삶과 죽음 담아낸 ‘특별한 시선’
- 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生이 있었다.
<귀>, 시와시학사, 2005.
응시(凝視)는 형태를 뚫고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내는 ‘특별한’ 시선(視線)이다. 길가에 핀 꽃을 보고 “민들레가 참 예쁘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 시선이다.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알아내서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민들레’라고 인식하는 것이 ‘시선’이라면, ‘응시’는 대상의 형태와 특징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창조적인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민들레꽃을 보며 “지상에 보름달이 떴구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응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나가다 흘낏 보면 ‘민들레’로 인식되겠지만 골똘히 바라보면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응시는 사물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드는 내밀한 시선이다.
우리의 삶이 점점 삭막해져가는 이유를 꼽으라면 나는 선뜻 ‘응시의 결여’라고 말하고 싶다. 속도가 경쟁의 척도가 되는 시대에서 응시의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자칫 낙오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응시를 통해 세상의 내밀한 곳을 들여다봄으로써 삶의 의미와 지평이 확장되고 자신만의 개성이 발현될 수 있기에 우리는 응시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시인들은 응시하는 존재들이다. 서정춘 시인의 ‘달팽이 약전’은 대상을 응시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응시는 깊이의 사유다. 시인은 명부전 뜨락을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를 한참동안 지켜본다. 나선형의 껍데기 안에 연하고 무른 점액질의 살을 숨기고 있는 달팽이는 응시의 시간을 거쳐 ‘나’의 모습으로 동일화된다.
‘내 안의 뼈’들을 다 녹여서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등에 업고 있는, 하여 ‘온 몸이 혓바닥뿐인 生’으로 요약된 화자의 삶은 아마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기나긴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 세월의 지난한 사연들을 시인은 ‘달팽이’의 모습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의 가슴을 한없이 뭉클하게 만든다.
이렇게 짧은 시에 삶과 죽음의 장구한 난제를 함축적으로 아로새겨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보통의 시선을 넘어선 것이다. 깊이의 시선이 없다면 달팽이는 그냥 달팽이일 뿐이다. 명부전을 올려다보며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서정춘 시인의 달팽이를 보면서 삶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삶이란 고통을 녹여 ‘아름다운 유골’을 만드는 달팽이의 느릿한 시간이 아닐까.
‘온 몸이 혓바닥뿐인 生’으로 느릿하게 감식(鑑識)하는 시간의 고유한 결은 아무에게나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응시하는 자들의 특권이며,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이 발견하는 성찰의 지극함이다. 자유로운 정신이란 “자신에게 새로이 독자적인 ‘눈’을 창조하는 힘”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독자적인 ‘눈’이란 바로 응시하는 ‘눈’이다. 우리가 그렇게 강조하는 ‘창의성’과 ‘개성’이라는 말의 실체는 바로 응시에 있다. 꽃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얼음 속에서 불을 발견하는 응시의 순간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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