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그의 동문이었던 사(師: 子張)와 상(商: 子夏) 둘 중에 누가 더 어진 사람인지를 스승에게 물었을 때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자공이 “그러면 사가 낫다는 말입니까?” 라고 되묻자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子貢問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라고 하였다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아무리 어질고, 아무리 좋은 것이고, 아무리 현명한 일이라도 지나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적당주의의 찬사가 아니라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적절히 행해야 그 행하는 것이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말일게다.
꼭 미투운동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선의의 결정이나 중요한 정책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뇌(無腦)한 사람처럼 책임지지 못할 선동적 구호만 외쳐대다가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발뺌하는 것도 그렇다. 또한 밝혀진 명명백백한 사실에 대하여 조작, 모함 운운하며 신성한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에 사대적 성조기와 불문곡절 이스라엘 국기까지 볼모로 흔들어대는 것도 지나칠 정도다.
‘토라’라고 부르는 구약성서 처음의 다섯 책인 모세오경 안에는 613개 율법이 들어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켜야 할 법이다. 이 법은 248개의 계명과 365개의 금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계명에 비해 금령이 더 많은 걸까? 원죄를 안고 태어난 사람의 부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것도 1년 365일을 쉬지 않고 자신을 살피며 살아야 할 것같이 의도적으로 주어진 이 숫자는 주목하는 이로 하여금 지금의 삶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했고,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오히려 비판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마태복음 7:1-3). 남을 비난하고 고발하기에 앞서 반드시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찔러대면 아픔이 더 커지고 아물 수 없는 상처만 남게 되지만, 배려하고 격려하는 돌봄은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낫게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희망을 갖게 하는 마력이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적절히 행하는 것이 낫겠다. 비록 고발과 대결의 미세먼지로 뒤덮인 세상을 살고 있지만 마음이라도 쾌청했으면 좋겠다.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서로에게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배려함으로 믿어주고, 격려함으로 힘이 되어주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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