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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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葛藤)이라는 한자는 칡과 등나무가 얽혀 있는 형상으로 집단과 집단 사이의 지나친 대립이나 적대심 또는 불화를 가리키는 단어다. 태생적으로 반대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는 등나무와 칡의 넝쿨이 한 나무를 타다 보면 결국에는 서로 엉켜 푸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의미다.

 

마르크스(Karl Max)와 베버(Max Wener), 그리고 짐멜(Georg Simmel)은 사회의 구조를 갈등에 기초하여 설명하였다. 인간의 역사를 계급 간의 갈등의 역사로 본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변화가 소유집단과 비소유집단 간의 갈등과 투쟁의 결과라고 보았고, 권력분배의 불평등에 기인하는 권력 갈등을 설명한 베버의 이론에 기초한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는 권위의 차별적 분배로 인한 갈등이론(Conflict Theory)을 성립하였다. 그리고 심리적 전제 위에서 갈등의 사회적 기능을 설명한 짐멜은 교육이 사회계층, 계급 간 이동을 활성화시키기보다 기존의 불평등한 계층 및 계급 구조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여 갈등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6월 선거를 앞둔 우리 사회가 갈등의 골을 깊게 파고 있다. 새삼스런 일들은 아니지만 전략적 이유로 ‘건수’를 잡아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물론 변할 수밖에 없는 사회 현상에 대한 적응의 과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이 심히 불편할 뿐이다.

거기다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드러내는 대기업의 ‘귀족’(?) 갑질로 인한 갈등은 마치 국민과의 대결 국면을 형성할 정도다. 마르크스의 소유집단과 비소유집단의 갈등과 투쟁도 옳고, 막스의 권력 갈등도 옳고, 짐멜이 주장하는 불평등한 교육으로 인해 재편성되고 재생산된 갈등도 옳다고 한다면 이러한 불미스런 사회 현상은 배운 내용을 건전하게 적용하거나 응용하지도 못하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 하겠다.

 

예수는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고 조장하는 유대의 지도층을 향해 ‘독사의 새끼!’라고 욕하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했다. 그 행위가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는 패륜이고, 겉만 번지르르한 썩어빠진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위들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고,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영위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했다. 사람은 갈등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권이 있다. 즉 사람으로서 정당하게 누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갈등을 조장하는 도구로서 사람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 사람을 무시하고 이용하기보다 존중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필요하겠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이 살만한 정당한 사회가 될 것이다.

 

5월이다. 갑질 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달이다. 다른 달 다른 날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몰아두었을까? 5월이 신록의 계절이고 희망의 계절이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이 희망의 계절에 사람으로서 그 권리를 인정받고 희망을 보장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받을 대상으로서 존중하고 존중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정말 이 마음이라면, 이 믿음대로 서로를 배려한다면 골 깊은 우리 사회의 무분별한 갈등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60년 이상 묵은 남북의 갈등도 풀어내려는 시점에 어려운 게 뭐가 있을까?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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