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학
작년에 자란 갈대
새로 자란 갈대에 끼여 있다
작년에 자란 갈대
껍질이 벗기고
꺾일 때까지
삭을 때까지
새로 자라는 갈대
전생의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전생의 모습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8.
지난해 7월에 타계한 소설가 박상륭의 단편소설 <두 집 사이-제이의 아해兒孩 얘기>에 “시인들은, (외안外眼을 잃기로써 내안內眼을 떠), 저렇게 존재의 비밀을 보아낸다. 시인은 까닭에, ‘사물’을 노래하려면, 먼저 ‘사물을 보는 눈’을 잃어야 한다.”는 빛나는 구절이 비수처럼 매복해 있다. 겉눈을 잃고 속눈을 떠야 ‘사물’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우리의 겉눈이 그만큼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렇다고 시인더러 장님이 되라는 것은 분명 아닌 바, 그의 진의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지라는 일설로 보인다. ‘보기’는 곧 ‘말하기’의 다른 방식이다. 그래서 잘 보는 사람이 잘 말하기 마련이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그것의 ‘참뜻’을 읽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상을 배회하는 주관의 눈을 버리고 본질을 파고드는 객관의 눈으로 사물을 마주할 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비밀들’이 우후죽순으로 푸르게 솟아 발견의 기쁨을 안겨준다.
이윤학 시인의 <전생의 모습>은 갈대를 묘사함이 분명하다. 그런데 묘사의 시선이 집요하고 세밀하여 예사롭지 않다. 보통사람 같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화려한 현상에 유혹되어 그 풍경에 성급히 주관의 감정을 쏟아 붓기 마련이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는 비유가 그런 유혹의 예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작년’의 갈대와 ‘새로이 자라는’ 갈대가 한 줄기에 자리 트고 생멸해가는 일련의 모진 시간을 세밀히 묘사한다. 작년의 갈대 ‘껍질’이 벗겨지고 삭아 떨어질 ‘때’까지 그 곁을 지키며 ‘새로’ 자라는 갈대로부터 삶과 죽음이 ‘전생’(前生)의 등을 맞대며 요동하는 숭고의 장면을 보아낸다는 것은 시인의 ‘내안’이 없었다면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생의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곁에 있어주는 전생의 모습”이란 진술은 박상륭이 말한 ‘존재의 비밀’을 건드려내기에 이른다. 시들어가는 작년의 갈대가 기억해내려는 전생의 모습은 새로 자라는 갈대의 전생일 것이다. 죽음이 삶이 되고, 삶이 죽음이 되는 윤회의 바퀴 밑에서 작년의 갈대와 새로 자라는 갈대는 한 뿌리에서 시작된 애틋한 전생이고, 서로의 뜨거운 사랑이다.
편견이라는 겉눈이 갈등을 부추기는 혼탁한 시절이다. 우리 안에 감겨져 있는 속눈이 떠져 서로의 전생(全生)을 사랑으로 지켜주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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