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정의란 개인의 가치관에서 출발했다. 옳음을 의미하는 한자 ‘義’는 양 ‘양(羊)’자와 나 ‘아(我)’자로 조합된 글자이다. 여기서 양이란 하늘에 드리는 제물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하늘에 제사 드리는 의미로서의 ‘의’는 하늘의 뜻을 받든 상태이고 이것은 옮음을 말하는 ‘의’이다. 결국 정의란 하늘의 뜻을 받든 개인의 의지를 말한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개인과 개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정의는 점점 사회적 성격을 띤 용어로 자리 잡아 가게 됐다. 그래서 그런지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와 강연으로 선풍적 인기를 얻었던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Micharl Sandel) 교수도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정의라고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마치 정치, 경제, 사회의 주체인 개인마저도 그런 사회체계의 영향을 받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 이래로 인간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란 그러한 사회보편 개념에 얽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것은 원죄로 얼룩진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준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너를 통해 저 사람이, 너를 통해 내가, 저 사람을 통해 내가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의는 종종 이기심과 폭력의 발단이 되어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는 협박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 분이었던 윤치호는 그런 폭력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다. 개화기 사회진화론 논리의 약육강식이라는 밥상 위에 있었던 조국의 존망 앞에서 ‘정의가 힘인지 아니면 힘이 정의인지’에 고민하다가 힘에 눌려 친일하였고, 결국 해방된 조국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개인의 도덕적 의지와 그 의지에 군림하려는 사회적 힘의 대립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그분만의 고민이 아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살아가려는 대부분 사람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성경이 요구하는 정의는 그렇지 않다. 나의 이기심을 발동하거나 내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고 죽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정의란 남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는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39-44)고 하였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마태복음 5:6, 10)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란 하늘의 뜻을 받든 나의 책임 있는 태도이며, 그것은 누가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며 사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고 강요하는 힘이 아니라 나를 따라올 수 있도록 자발적 동기를 제공하는 배려가 정의인 것이다. 구호로만 정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구호대로 나부터 바르게(正) 정 옳음(義)을 실천해가는 것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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