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행간行間

‘문득’의 생각으로 마주한… 일상의 부드러운 행복

 

행간行間

          - 박목월

이처럼 깊이 눈이 내린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

전혀 이승의 그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것이

어깨에 쌓인다.

그렇다. 이제는 깊이 조용할 세계에 들어섰다.

모든 소리는 내면으로 울리고

가는 귀가 먹은 오늘의 눈

시도 죽음도 눈처럼 가벼워지고

아무리 걸어도 발에 땀이 배지 않는 오늘의 눈

적막한 행간이

전혀 이승의 그것 같지 않는 부드러운 것이 온다.

-《박목월 시전집》, 민음사, 2003.

‘문득’이라는 부사(副詞)는 캄캄한 방에서 라이터를 켜는 것처럼, 숨겨진 혹은 잊고 있던 사물과 기억들을 순간적으로 소환한다. 그래서 ‘문득’은 일상의 따분함을 가로질러 어떤 의미들을 새로이 되새겨 보게 만든다. 그 되새김은 아픔일수도 기쁨일수도 있겠지만 곱씹어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시인들은 ‘문득’의 시간을 사랑한다. 평범하고, 지루하고, 고통스런 일들로 덜그럭거리는 생활의 불편한 뜨락에서 아름답고, 소중하고, 내밀한 것들이 주는 행복의 맛을 감식토록 해주는 ‘문득’의 따뜻한 방문(訪問)은 그래서 반갑다. 문득 떠올린 첫사랑, 문득 떠올린 친구, 문득 떠올린 고향처럼 ‘문득’의 시간은 아련하고 아득하지만 그 아렴풋함으로 하루 동안 쌓인 일상의 피로들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박목월 시인의 <행간>은 ‘문득’의 부드러운 시간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눈 내리는 것을 보며 “이처럼 깊이 눈이 내린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득’의 시선에서 온 것이다. 늘상 봐왔던 눈의 풍경이 “전혀 이승의 그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은 거칠고, 가볍고, 시끄러운 일로 가득한 일상의 시간과 대척(對蹠)한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라고 느낄 만큼 깊고, 부드럽고, 조용한 시간을 맛보는 시인의 모습에서 평온함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쓸쓸함의 무게가 느껴진다. 밥벌이를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만 ‘오늘들’의 연속, 그것이 ‘이승’의 고달픔이며 삶의 무게일 것이다. 문장과 문장의 행간에 담긴 어떤 ‘적막’처럼, 내리는 눈과 눈 사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와 ‘내면’과 ‘부드러움’을 읽어내는 시인의 심정이 참으로 애틋하다. “아무리 걸어도 발에 땀이 배지 않는 오늘의 눈”은 가볍고 부드럽다. ‘문득’의 따뜻한 방문으로 무거움의 시간들을 잊고 눈 속을 총총히 걸어가는 시인의 뒷모습이 바로 ‘적막의 행간’일 것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적막’이 있다. 그 적막 안에 오늘의 쓸쓸함이 있고, 내일을 살아야 하는 희망도 있다. 쓸쓸함과 희망의 엇갈림을 붙잡아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이 ‘문득’의 손길이다. “이런 일도 있어구나.”라는 ‘문득’의 생각으로 불편의 일상을 횡단할 때, 내면의 깊은 창(窓)이 열리고, 그 안쪽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전혀 이승의 것 같지 않은” 행복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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