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서 느낀 ‘친숙한 두려움’
일진(日辰)
- 신현정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 나온 보랏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자전거 도둑》, 애지, 2005.
언제부턴가 신문을 읽을 때 1면 주요기사를 제치고 ‘부음란’을 먼저 찾아 훑어보고 곧바로 ‘오늘의 운세’를 챙겨 보는 버릇이 생겼다. 죽음의 소식과 하루의 운세를 연달아 겹쳐 읽는 것이 참 이상야릇한 행동이라 여기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친숙한 두려움’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 감정의 실체를 말로 또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버스 운전석 앞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와 함께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떠올려본다면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이 주는 두려움보다 친숙한 것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더 깊은 흔적을 남긴다. 프로이트는 친밀한 대상에게서 느끼는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운하임리히(unheimlich)’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운하임리히’는 ‘집과 같지 않은’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친숙한 것에서 느끼는 심리적 공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신현정 시인의 시 <일진>은 나팔꽃이 핀 마당에서 양치하고 세수를 하는 정겨운 풍경을 서정적 묘사로 그려내고 있어 앞서 말한 ‘친숙한 두려움’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오늘따라’ 공교롭게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는 진술이 여러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당하게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오늘따라’와 ‘그만’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두려움일 것이다. ‘보랏빛 나팔꽃’이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는 진술에서 시인이 겪고 있는 모종의 두려움과 그것이 내뿜는 심적 진동이 여실히 느껴진다. ‘하늘 저 켠’과 ‘보랏빛 나팔꽃’이라는 이미지가 서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오늘따라’, ‘그만’, ‘망정이지’, ‘다 볼 뻔하였다.’는 시어들이 그날의 운세를 뜻하는 ‘일진’이라는 제목과 연결되면서 빚어내는 ‘친숙한 두려움’의 정서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암투병중이었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내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절박과 소중을 이만큼의 서정으로 넉넉하고 아름답게 표현해낼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죽음은 친숙하고 두려운 사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태를 가려줄 ‘보랏빛 나팔꽃’의 사연이 있어 삶은 아름답게 지속된다. 다 드러난 것보다 반쯤 가려진 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도 무사히!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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