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 대상이 유형(有形)이던 무형(無刑)이던 말이다. 그래서 자연(自然) 앞에 제사를 드리고 짐승에게도 의지함을 보이고 고등종교에 깊게 심취해 가는 것이다. 그 종교성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지금보다 더 위험한 욕망의 결과를 스스로 초래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종교적 쉼마저도 종교의 비본질적 분주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신앙 안에서 조차 진정한 쉼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치열하게 뛰어야만 하는 세상살이 삶 속에서 우리는 인생을 즐거워하기 보다는 그 인생을 살아내기마저 바쁘다. 잠시라도 그 모든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살펴볼 여유도 없이 우리는 많은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다 함께 뛰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왜 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여유도 없다. ‘나는 어디로 뛰고 있는가?’의 방향성을 잡을 시간도 없다. 일단 뛰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우리는 지친다. 견디다 지친 삶들이 하나 둘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이미 망가진 나의 마음과 몸을 보게 될 때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지만 마음과 육체로부터 돌려받는 것은 병든 고통 일 때도 있다. 그때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잘못 살아온 낙오자로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 우리는 인생의 가치를 잃어 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극단의 선택도 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진리를 찾고 고상한 삶을 살아가는 데 목적이 있다. 인생의 답을 찾고 싶은 욕망이 절대자를 향한 구도적인 자세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대자는 우리에게 나침판을 내어주지 지도를 선물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은 그 나침판을 가지고 방향을 잡으며 내 자신을 돌아봄으로 믿음의 감격과 기쁨을 얻는다.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연약함을 고백할 때 유한자의 자세를 갖게 되고 자신의 옳음이 아닌 절대자의 옳음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절대자는 우리의 인생을 급하게 설계하지 않으셨다. 인생을 빠르게, 빠르게로 외친 것은 유한한 우리의 어리석은 경쟁의 심리였을 뿐이었다.
힘들면 쉬어가자.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실수를 줄이고 내 인생의 의미를 맛보면서 살아가 보자. 인생 살아내기가 고달플 땐 나를 먼저 사랑하고 자신의 인생 타임라인에 쉼표를 찍고 잠시 들숨과 날숨을 들이키며 멈추어서 쉬어보자. 한 해도 열심히 뛴 내 자신에게 수고의 감사와 애씀의 칭찬을 해 준다면 우리 인생은 자신으로부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깊은 호흡하고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는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주변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리고 괜스레 주변에 분노를 쏟아 내지도 않는 절제된 자신의 인생속도를 얻게 될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이 깊게 물들어지는 21C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서 인생의 진정한 승부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서 만족하는 인생의 삶을 살아오신 좋은 선배들의 인생은 먼저 열심히 뛰기 시작한 삶이 아니라 천천히 자신이 뛰어야 할 방향과 목적의 이유를 결정하고 자신만의 길을 뛰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준비된 인생의 삶은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그들의 기쁨과 아픔도 함께 나누어 가는 다 함께 잘사는 삶이 되어져야 한다.
지쳤다면 쉬어가자. 힘들다면 모든 것을 멈추고 잠시 멈춤의 쉼을 가져보자. 그 쉼의 여유가 참 내 인생의 중요함을 알게 해줄 스승이 될 것이며 지친 나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위로자가 될 것이다. 잘 사는 인생은 경쟁자를 앞지를 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인생을 동행할 때 얻어지는 상급이다. 그래서 인생의 쉼표는 인생에 용기와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다 힘들 때 쉬어가는 용기와 지혜를 만나보길 기도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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