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속도의 시대로 접어든지 오래다. 빠른 것이 좋은 것이며 빠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바쁘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빠르고 빈틈없는 현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소외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시간 없이 바쁘게 사는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바쁜 우리들에게 마치 선지자같은 신선한 메시지를 던진 한 책이 있었다. 그 책은 바쁜 우리들에게 충고하듯이 새로운 가치를 던졌는데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라는 피에르 쌍소의 글이었다. 행복은 ‘빠름’에 있지 않고 ‘느림’에 있으며 성공은 ‘이김’에 있지 않고 ‘함께’ 함에 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했었다. 그 느림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생각나는 분들이 우리의 부모님 세대분들이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힘들어 포기하신 어머님을 위로하며 2G폴더폰을 사드리던 마음에서 나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곧 내가 만나게 될 시대임을 인정해야 했다. 오늘을 바쁘게 사는 우리들도 곧 다가올 다음 세대에게 느리다고 힘들어하는 따가운 눈총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밀림의 빌딩숲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은 다 같이 함께 하는 삶이 아닐까? 속도와 상관없이 느림의 미학을 존경하며 빠름의 패기를 격려하는 여러 가치관들이 만나서 서로들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삶 말이다.
예루살렘 안에는 베데스다라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주변에는 신비한 신화를 믿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 작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전설이었다. 38년을 걷지 못하는 사람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려는 절실함이 있었다. 누구도 병자로서 소외당하지 않고 온전한 몸으로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간절함에 그들은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바라며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몸을 던질 준비를 하는 긴장속에서 살았다. “빨라야 한다. 어느 누구 보다도 빨라야 한다. 1등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이상한 사실은 연못을 바라보던 그들 뒤쪽에 거대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성전에는 미신보다 훨씬 더 자신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절대자를 향한 신앙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 신앙을 의지하여 성전으로 가지 않고 미신적인 신화의 베데스다 연못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 했을까? 이유는 종교를 자신들의 도그마(Dogma)로 바꾸어 병든자들을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병자는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 깨끗하지 못한 자들은 거룩한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는 지도자들의 편견과 오만함이 성전에 높은 울타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잘못된 종교적인 신념이 바른 믿음을 떠나 어리석은 미신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모습을 만들어 냈다. “빠르게 그리고 더 빠르게 달려서 제일 먼저 연못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래야 나는 인정받으며 그래야 나는 성공한 인생이 된다”는 자기모순이 진리가 된 것이다.
이 베데스다의 신앙 속에서 우리는 불행한 과거의 실수를 바라보듯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념과 지역과 세대로 갈라지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적폐’라는 단어가 진리와 정의의 잣대가 되어 소수의 느린 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기를 바라며, 그 ‘적폐’라는 칼날이 두려워서 과거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편 가르기 극단이 없기를 소망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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