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면서 생명이 솟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걱정 속에서도 산에서 솟아나는 푸릇푸릇한 생명의 색깔들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직은 으스스할 때가 있는데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뜨겁게 느껴지는 3월에는 생각나는 사람들이 더욱 많다. 나는 그 가운데 용성(龍城) 백상규(白相奎, 1864-1940)를 생각한다.
용성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시작시기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용성은 불경번역에 관심이 깊었다. 용성은 3.1운동 후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천도교 교전이 한글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출옥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어 불교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역경초조(譯經初祖)라고 불릴 만하다. 또 직접 농사를 지으며 선수행을 실천한 선농초조(禪農初祖)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경초선(勁草禪)과 같은 동아시아 선의 전통과도 연관해 생각해 수도 있을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지금 식으로 말하면 평소 자기 일 자체가 바로 선인 그런 생활불교, 실천불교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또 용성은 당시에 어린이들을 위해 현대음악 형식으로 직접 작사ㆍ작곡한 찬불가를 풍금을 연주하면서 보급했다고 한다. 또 여성 불자들이 참선 수행할 수 있도록 사찰에 부인선원을 개설해 운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시대를 앞서간 분이었다.
특히 나의 이목을 끈 것은 그가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와 3ㆍ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국가 이름과 ‘태극기’라는 국기 이름을 주창했고, 민족대표들의 동의를 얻어 3ㆍ1운동에 이것들이 쓰였다는 것이다. 용성은 스님이었다.
또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였다. 민족대표 대부분은 천도교와 기독교계 인사였다. 그들은 태극기를 국기로 삼자고 주창한 스님인 용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민족대표들은 당시 한국인들의 심상 속에서 유교와 도교적 진리를 상징하는 태극이 민족의 보편적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여겼던 것일까? 이런 점들은 앞으로 더 살펴보아야 할 과제로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태극은 그렇게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자랑스럽게 만드는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기 태극기는 욕된 20세기 시작시기에 3ㆍ1운동과 함께 우리의 상징으로 태어나서 우리의 영광된 미래의 역사를 만들며 세계사에서 우뚝 솟아오른 대한민국의 상징이 됐다.
태극은 고대 동아시아의 공통 유산인 ‘주역’에도 등장한다. 태극은 아주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 태극은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가지 원리인 음양이 뭉쳐져 있는 진리의 상징이다. 태극기가 국기로 사용되게 된 경위나 역사에 대해서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 태극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아마도 3ㆍ1독립운동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태극기를 국기로 삼은 데서 유래하는 것 같다. 그가 ‘대한민국’이란 이름과 ‘태극기’란 국기의 이름을 사용하게 한 분들 중 아주 초기의 가장 중요한 분들 중 한 분인 것은 내 가슴에 새기고 싶다. 용성의 무미(無味)스럽고 무사(無事)한 오도송(悟道頌)도 함께! 용성은 용맹결사 정진 끝에 보리도를 깨치고 낙동강을 건너면서 오도송을 읊었다고 한다.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그는 깨달은 이후 금오산에 걸린 달이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경치를 즐기며 강에서 고기 잡고 갈대꽃을 즐겼다. 그는 편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선각자로서 그 시대의 할 일을 하였고, 그리고 자기 길을 담담히 그렇게 갔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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