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 나라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개인과 전체 모두가 적용되는 헌법의 수호를 받는다. 그런데 요즘 종교계 안에서 정치적인 논리와 정치활동을 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통하여 작지 않은 파장이 일고 있다. 과연 종교인들의 정치 참여는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성경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관계가 정치적 관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는 이 사회는 정치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정치적인 관계를 나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질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스리는 자들은 자신들이 최고 상위에 있는 자들이 아님을 알고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그 사람의 직업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을 가르치며 또 낮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높은 곳의 사람들을 향하여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그 권위에 복종할 것을 가르친다. 이 말은 상호 사람의 존재를 존중하되 하는 역할에 대하여는 질서를 지키라는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기독교의 정치 목정에 대하여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 중에 한 이야기가 있다. 18세기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노예무역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아메리카 대륙과 서인도제도의 대규모 농장산업이 발달하고 유럽의 식민지 확대정책 속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서인도제도에 판매하는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영국은 1771년 190척의 노예 무역선으로 연간 4만 7천 명을 운반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노예를 사고파는 중심에 있었다.
동시에 기독교 정신에 따른 사회정의 실천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운동이 영국의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나타나면서, 인권의 문제와 노예무역에 대한 비판도 일어났다.
이 같은 시대배경 속에 노예무역 상인이었다가 성직자가 된 존 뉴턴은 젊은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무역 폐지에 앞장서도록 영향을 끼친다. 윌버포스는 1789년 첫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낸 이후 11번이나 법안 통과에 실패했지만 오랜 시간을 끈질기게 매달려 20여 년 만인 1807년에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833년 영국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결정을 이끌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적 행위는 사람들을 돕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한다. 비인격적이고 비종교적이며 사람을 살해하는 언어를 함부로 말하는 종교적 정치형태는 금지되어야 한다. 종교인들의 정치참여가 금지되어 있지 않고 어느 부분은 사회참여가 필요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종교적 정치참여는 이미 종교의 틀을 넘어서 세상 정치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 보인다.
예수께서는 칼을 드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먹을 드는 자는 주먹으로 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에게 미련한 놈(라가)이라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라 경고하셨다.
우리 모든 인간은 나하고 생각이 달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귀한 존재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축복하고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종교의 신앙이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저주하는 언어로는 치유와 회복이 일어날 수 없다. 답답하고 늦어 보여도 사랑하고 섬기며 눈물로 끌어 안아주는 사람이 분명히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성경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움직여야 하는 때가 아닐까 기도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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