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음악가 비발디를 무척 존경했기에 상당수의 비발디 작품을 편곡하기도 했던 바로크 음악의 대표주자 바흐가 훗날 비발디보다 존경받게 된 것은 바흐 작품이 주는 독창성 때문일 것이다. 바흐는 당시 음악의 전통과 여러 다양한 양식을 자신의 천재적인 개성 속에 담아 독특한 음악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바로크 시대의 사상이었고 결국 바흐에 의해 그 이상은 실현되었다. 바흐의 음악에는 당대의 바로크 양식뿐 아니라 훗날 이어질 고전주의 양식까지 암시하는 많은 특성이 들어 있었기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났던 것이다.
오늘날 음악계에서는 ‘바흐의 음악은 성경의 구약이고, 바흐는 음악의 신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의 바흐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바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생계수단으로 음악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별한 첫 번째 아내와 재혼한 아내 사이에서 바흐는 무려 스무 명의 자식을 두었고, 생계를 위해 작품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바흐는 늘 자상한 아버지였다. 아이들 모두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온 가족이 기악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것을 바흐는 무척 기뻐했다. 특히 그는 아이들과 쳄발로에 앉아 서로 다른 음색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아내와 자식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바흐. 그 일이 결국 작품을 쓰는 것이었으니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바흐의 음악적 성과는 바흐의 이런 가족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흐의 작품 중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은 아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 <인벤션>은 장남 프리데만을 위해 작곡되었는데 바흐의 모든 음악에는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마음이 밑바탕에 깔렸던 것이다.
말년에 바흐는 잘못된 각막 수술 탓에 시력을 잃는다. 시각장애인이 된 상황에서도 바흐는 결코 작곡을 중단하지 않는다. 바흐는 사위와 제자를 통해 자신이 불러주는 대로 곡을 받아 적게 하는데 이렇게 작곡된 작품이 <오르간을 위한 18곡의 코랄>이다.
동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가난한 음악가 바흐는 1750년에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이 시신은 다른 곳에 묻혀 있다가 1950년에 그가 27년간 봉직했던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로 옮겨져 현재까지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바흐의 음악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담백한 맛이 난다고 할 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바흐는 성스럽고 고귀한 기독교 음악을 많이 작곡했고, 그러다 보니 작품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정제된 언어처럼 한 음 한 음이 깊은 의미를 품은 듯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바흐의 작품이 퇴색되지 않고 시공을 초월하여 더한 빛을 발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깊이 있는 단순함, 그리고 튼튼한 기초에 바탕을 둔 보편적인 음악. 그래서 바흐의 작품은 그 어떤 장르에서 아무리 변형하여도 그 원곡의 토대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묵묵하고 한결같지만, 오래오래 질리지 않는 바흐의 작품은 그렇게 오늘날까지 전 장르를 망라하여 굳건히 서 있는 것이다. 영원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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