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소의 해에 슬기로운 소를 그리며

2021년은 신축년(辛丑年) 소의 해다. 소는 불교에서 마음을 뜻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우리 역사에는 ‘슬기로운 소’를 뜻하는 이름의 불교계 인물이 있다. 성우 경허(惺牛鏡虛, 1849~1912)다. 성우는 법명이고 경허는 법호다. 소의 해에 성우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의 법명 성우에서 성(惺)자는 ‘슬기롭다’는 뜻이다. 성자는 별 성(星)에다가 마음 심(?)을 왼쪽에 붙인 글자다. 이 글자는 글자 그대로 풀면 ‘마음 안에서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우(牛)자는 소를 뜻하고, 마음을 은유한다. 그러니 성우는 ‘깨어 있는 마음’ ‘깨달은 마음’을 가리킨다. 즉, 성우는 ‘자신 안에 성성하게 깨어 있는 부처님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스님의 법호 경허에서 경(鏡)자는 ‘거울’이란 뜻이다. 허(虛)자는 ‘텅 비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거울은 마음 바탕을 은유하는 말이다. 그러니 경허는 ‘마음 바탕이 텅 비었다’는 뜻이 된다.

스님이 오도를 한 1879년 여름에 조선 전체에 ‘호열자’라는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은 그 소식을 알지 못한 채, 청계사에 계셨던 은사 스님인 계허를 뵈러 동학사에서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향하던 길에 폭우를 만나 하루 묵어가려고 어느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마을은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가는 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도 않아 묵을 만한 집을 찾지 못하다, 간신히 한 집에 묵게 되었다.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자신의 공부가 헛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가지 않고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영운(靈雲) 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는 법문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하며 용맹정진했다. 스님은 칼을 갈아 턱밑에 놓고서 졸음을 쫓으며 정진했다.

한편, 경허의 수발을 들던 사미승 원규는 11월 어느 가을날 동학사 근처 사가에 갔다. 원규는 아버지이신 이처사와 이야기를 했다: “강주 스님은 무얼 하시느냐?” “방안에서 옴짝달싹 안 하시고 소처럼 앉아 계시기만 합니다.” “허허 중노릇 잘못하면 다음 생에 소가 된다는 것도 모르신다더냐?” “공양만 받아먹으면, 다음 생에 소가 되어 죽도록 일해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절간에 가 공부한다는 사문이 겨우 그렇게밖에 말을 못하느냐? ‘소가 되더라도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정도는 되어야지!”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라니요, 이게 뭔 말입니까?” 이 처사는 강주 스님께 이를 여쭈어보라고 했고, 절에 돌아온 원규는 경허 스님께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경허 스님이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축복이 일어났다. 스님은 오도의 순간을 게송으로 남겼다.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나그네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 스님은 당시 전염병 대유행을 만나 자신의 공부를 되돌아 볼 기회를 얻게 되었고, 삼사 개월의 용맹정진 후 코뚜레 뚫을 곳 없는 소가 되었다. 그 소는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해탈한 소이자 깨어 있는 소다. 그 소는 중생의 마음이고 중생의 마음은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의 해인 금년에 우리 국민 모두 코로나19의 고통에도, 그것이 모두가 해탈할 축복의 시간으로 이용하길 바란다. 소의 해에 우리 모두 깨어 있는 마음이 되자는 뜻으로, 또 마음 바탕을 텅 비우자는 뜻으로 스님의 법호와 법명을 새겨보았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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