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천책의 사상과 현대적 함의

고려시대의 무신 집권기 시대에 불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 중의 하나가 백련결사(白蓮結社)이다. 백련결사는 원묘국사 요세(1153~1245)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의 불교문화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수행기풍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이 백련결사의 전통을 이은 사람 가운데 천책(天, 1206~?)이 있고, 그의 저술로 ‘호산록(湖山錄)’이 전한다. 이 ‘호산록’은 고려시대 천태종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천책의 사상 가운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사상의 유연성이다. 천책은 천태종에 속한 인물이지만, 화엄종의 사상도 수용하고 선종의 사상도 포용한다. 일반적으로 천태종의 사상을 추종하면, 나머지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천책은 그렇지 않았다. 천태종의 사상과 화엄종의 사상을 아울러 드높였고, 선종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주변 사람에게 공부하도록 권했다. 천책의 이러한 유연한 자세는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유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해서 유교, 도교, 불교가 일치한다는 ‘삼교일치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천책의 사상에서 주목할 또 다른 점은 주체적인 관점이다. 천책은 천태종의 위대한 인물을 선정할 때 고려출신의 보운(927~988)에 주목했는데, 이는 중국 천태종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보운은 중국에 건너가 천태사상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천태사상을 널리 전하고 고려에 돌아오지 못했다. 보운이 어느 정도 역사적 자취를 남긴 인물이지만, 중국의 천태종에서는 보운의 활동에 대해 평가해 주는 데 인색했다. 그에 비해 천책은 중국의 평가와는 다르게, 천태종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로 보운의 위상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천책의 사상에서 주체적인 안목을 읽을 수 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이 중국이었고 이 문화의 중심과 다른 관점을 갖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유하면, 요즘 서양철학을 전공하면서 미국, 서구 유럽과 다른 견해를 갖기 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천책의 사상이 갖는 현대적 함의는 어떤 것일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문화에 대해 주체적 태도를 가지면서도 또 새로운 문화에 대해 문을 여는 유연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둘을 동시에 갖추기는 쉽지 않다.

개인의 경우에도 사고방식이 유연해서 다른 문화를 잘 수용하는 쪽이라면, 아무래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쪽에서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또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추진하는 데 강점이 있다면, 자신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수용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한 사회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유연한 태도를 잃기 쉽고, 또 반대로 유연한 태도에 방점을 두면 주체적인 측면이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태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할 때 더욱 성숙한 문화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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