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학술대회에서 미얀마 쿠데타의 부당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미얀마는 불교사회주의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어쩌다 미얀마가 저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얀마의 불교사회주의는 초대총리 우누(U Nu, 1907~1995)가 주장한 것이다. 우누는 인도의 초대총리 네루(1889~1964)와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고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우누와 네루는 서로 합심해서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이 잘 진행되도록 노력했다.
우누의 정치적 동지였던 아웅산이 1947년에 암살을 당하자, 우누는 미얀마의 초대총리가 됐다.
우누는 불교경제학으로 널리 알려진 슈마허(1911~1977)의 주장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불교사회주의를 전개한다. 이는 사회주의와 불교의 유사한 측면에 착안한 것이다. 우누는 공공복지를 확대해서 국민 생활의 수준이 향상되고 동시에 평등화되기를 추구했다. 또 다른 우누 계열의 인물은 미얀마에서 사회주의는 ‘현세의 열반’이라고도 했다. 우누는 미얀마의 발전을 위해서 향상된 농업기술이나 현대적 공장을 모색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가치를 가질 뿐이라고 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의 개선을 추구하고 그래서 미얀마 국민이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보건 혜택을 누리며 더 나은 치안 속에 살고 더 나은 여가를 향유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이 더 나은 조건 속에서 삶을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향유하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우누의 불교사회주의는 미얀마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우누의 불교사회주의는 현재의 한국사회에 시사해 주는 것이 적지 않다. 우선, 단순히 경제발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혜택이 국민에게 고르게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한국사회가 경제가 발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혜택이 구성원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갔는지는 의문이다. 또 단순히 경제가 발전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을 통해 구성원 내면의 삶이 풍요로워야 한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물질적 풍요가 어느정도 이뤄졌지만 그것이 삶의 질이 나아지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경제발전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누가 추구한 길이 미얀마에서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퇴색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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