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문을 열고 나서니 ‘눈 손님’이(11월11일) 찾아와 손짓을 하는 듯했다. 가을이 미련을 두고 떠나지 않은 끝자락에 겨울을 재촉하는 ‘첫눈’이 산사(山寺)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오봉산 석굴암이 해발 500여m에 자리하다 보니 첫눈은 채 녹지 않고 절 마당을 얇게 덮었다. 어둠이 가시니 마치 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은 듯했다. 해가 뜨면 눈이 사라질까 한참을 바라봤다.
혼자서 첫눈을 감상하는 것이 미안해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지인들과 함께 공유했더니 곧 답장이 이어졌다. “도시에는 눈이 오지 않았어요”, “우리 동네는 눈 대신 비만 살짝 왔어요”라는 아쉬움과 더불어 기분 좋은 선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첫눈은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초겨울이 준 선물이었다.
사실 산사의 겨울은 도시보다 빠르게 찾아온다. 사찰도 현대화돼 예전처럼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거나 눈 때문에 길이 막히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겨울을 준비하는 것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마을보다 앞서 김장을 미리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지난 6일 봉선사는 배추 2천 포기로 김장을 했는데, 사찰에서는 ‘김장 운력(雲力)’이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서 일하는 것을 절에서 운력이라고 하는데 오래전부터 전통을 이어오는 울력이라고도 한다. ‘운(雲)’이란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구름처럼 모여 함께 힘을 모아 일을 하는 까닭이다. 일종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봉선사에서 김장할 때 주지 초격 스님은 물론 여러 대중스님과 신도, 자원봉사자 등 100여명이 참여한 것도 운력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봉선사와 비롯하여 전국에 사찰에서도 바쁘게 김장울력을 하고 있다. 김장은 절에 있는 연못에서 직접 길러 수확한 연잎 가루를 넣어 별미다. 남양주 봉선사는 여러 사람의 정성이 깃든 김장을 지역의 여러 가지로 어려운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에게 해마다 자비의 손길로 나눠 전하고 있다.
운력에는 화합(和合)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려면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각자의 입장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면서 공동작업을 해야 효율성이 크다.
현대사회에서는 많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나서 힘을 보탰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아파트 생활이 주를 이루면서 이웃에 누가 사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서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사라졌다. 이웃이 함께 김장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김장을 사다 먹으라는 TV 홈쇼핑 광고를 들을 때면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하다. 그래도 중소도시나 시골에서는 품앗이가 실낱처럼 이어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예전처럼 이웃까지는 아니라도 가족이라도 모여 김장을 하면 어떨까. 어머니나 부인만 김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온 가족이 함께하는 김장은 우리 시대의 ‘품앗이’이며 ‘운력’이다. 어려울수록 김장을 이웃과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문화가 이어지면 참 좋겠다.
지난 7일 입동(立冬)이 지나고 나니 겨울은 더욱 속도를 내면서 깊어가고 있다. 마을에도 첫눈이 올 것이고, 때로는 폭설도 올 것이다. 시대는 바뀌고 인심도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겠지만 ‘눈 손님’을 맞이하면서 조금은 더 따뜻한 마음, 함께하는 마음, 나누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오봉도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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