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피난길에 오른 가족을 만나기 위해 떠난 고려인 동포(경기일보 3월30일자 1·3면)와 출국 닷새 만에 연락이 닿았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이 마땅치 않아 발이 묶인 것으로 확인됐다.
31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3월25일 밤 터키행 비행기에 탑승한 고려인 동포 최 빌리안(33·우크라이나)은 전날 저녁 안산시 고려인문화센터 측에 몰도바 도착 소식을 알려왔다. 가족과 무사히 상봉한 그는 아내, 어린 아들딸과 함께 활짝 미소지으며 찍은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의 거취다. 법무부는 지난 29일 외교부와의 협의를 통해 고려인 동포의 형제자매, 조부모까지 가족 초청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재혼 가정인 빌리안의 경우 아내의 아들이 빌리안의 자녀로 정식 입양 절차가 진행되지 않아 입국대상에서 벗어난 상황이다.
몰도바에서도 우크라이나 대사관 시스템이 마비된 터라 ‘종전 이후에나 비자 발급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놨다. 우크라이나 현지에선 여전히 포성이 이어지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종전 시점은 예측하기 어렵다. 결국 빌리안과 그 가족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몰도바에 발이 묶여 버렸다.
빌리안은 현지 구호단체를 통해 일정 비용을 내고 임시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얼마 되지 않는 수중의 돈마저 떨어지고 나면 빌리안과 가족들은 갈 곳마저 사라진다. 비단 빌리안뿐 아니라 가족을 구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또는 그 인접 국가로 떠난 동포들도 마찬가지 상황으로 전해진다.
김영숙 안산시 고려인문화센터장은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약없이 집을 떠나 전쟁 난민이 된 동포들이 얼마나 막막하고 위험하겠느냐”며 “외교부는 신속한 여행증명서 발급을 비롯해 동포들을 구할 방책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1천만불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고 국내 우크라이나인 3천800명에 대해 체류를 연장하는 특별조치를 결정했지만, 난민 수용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사태가 길어지자 법조계도 정부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촉구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심각성에 비춰볼 때 정부의 현행 조치는 부족하다”며 “한국은 2012년 아시아 최초로 유엔난민협약을 이행하고자 난민법까지 제정한 국가로,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특별 기여자로 받아들였듯이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과 보호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현지 상황은 전날 5차 평화협상으로 양국의 긴장 해결에 물꼬를 틀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 지 하루 만에 다시 갈등 국면으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러시아는 수도 키이우 등에 배치된 군을 재편성, 다음 작전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며 우크라이나는 완전한 군 철수의 선행을 주장하며 대립하고 있다.
장희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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