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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토닥토닥] 연필 쥔 백발의 만학도들...배움의 恨 50년만에 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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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토닥토닥] 연필 쥔 백발의 만학도들...배움의 恨 50년만에 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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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상록평생학교에서 윤희진 교감이 백발의 만학도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다. 조주현기자

“50여년 만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려니 낯설고 두렵지만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꼭 졸업장을 타겠습니다”

14일 평택시 이충동에 위치한 평택시민아카데미 평택상록평생학교의 한 교실. 이곳에선 50~70대 학생 10명이 화이트보드에 적힌 시에 대한 현황을 열심히 공책에 적고 있었다. 모두 늦깎이 학생들이다.

이날 수업은 중학 국어. 그 가운데서도 ‘새로운 시작’ 주제의 시를 배우는 시간이다. 정채봉 시인의 ‘첫마음’을 소리 내 읽은 뒤 다시 공부를 시작한 각오를 나눴다. 어르신들은 “이 나이에 공부한다는 게 아직은 두렵지만 학교에 열심히 나와 중학교 졸업장을 받겠다”고 입을 모았다.

학기 초. 아직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게 어색하고, 굽어가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적는 게 예전 같지 않지만 집중이 흐트러지는 학생은 없었다.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 같았다.

지난 1993년 평택상록평생학교 개교 이래 평택은 물론 안성, 천안, 아산 등지에 이르기까지 1천여명 이상이 이곳에서 한글을 배웠고 100여명이 초등‧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가난으로, 여성이어서, 시대적인 이유 등 저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연과 한을 가슴에 품고 다시 펜을 쥔 백발의 만학도들이다.

이날 중학 국어 수업을 맡은 윤희진 평택상록평생학교 교감(51)이 10년 전 처음 이곳을 찾았던 날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 10여명이 굽은 손가락으로 ‘개나리’, ‘개구리’ 등을 따라 읽으며 공책에 받아 적는 풍경.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글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열의에 의욕을 얻어 지난 2013년 성인문해교육 강사로 교육봉사를 시작했다.

윤 교감처럼 상록학교에서 문해 교육을 하는 교사는 12명이다. 이들은 전업주부부터 학원 등 생업이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늦깎이 어르신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에 되레 감동을 받는다고 입을 모았다.

윤 교감은 “중학교 과정 개설 후 처음 간 수학여행 버스 안에서 할머니 한 분이 본인 생전에 수학여행을 갈 줄은 몰랐다며 말을 잇지 못하고 우셨다”며 “이 일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을 내려놓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윤 교감을 통해 졸업장을 받은 학생은 44명.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거나 대입 검정고시를 치른다. 벌써 4명의 어르신이 대학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저도 어르신들로부터 좋은 점을 배우며 교학상장(敎學相長)하고 있다”며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어르신들이 더 큰 배움을 마치고 돌아와 저희와 함께 교육봉사를 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바람을 전했다.

황우갑 평택시민아카데미 회장은 “봉사자들과 후원자들 덕분에 넉넉하진 않아도 29년 동안 꾸준히 어르신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드릴 수 있었다”며 “앞으로 평택상록평생학교를 독립 교육기관으로 만들어 다양한 학습반과 더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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