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신년특집] 경기도무형문화재 명인들의 하루

전통기술 갈고 닦으며... 삶과 예술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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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야장의 손에 벌겋게 달궈진 쇠는 이내 모양을 갖춘다. 쇠는 맥박이 고동치듯 열기를 뿜는다. 조주현기자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우리는 가끔 일탈을 꿈꾼다. 특별한 무언가가 벌어지지 않은 날엔 때론 무기력하기도 하며 특별한 일상을 고대하기도 한다.

 

여기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본인의 길을 꾸준히 걸어오며 저마다의 신념과 가치관을 삶에 녹여내는 이들이 있다.

 

매일 되풀이하며 갈고닦는 기술을 미래 세대에게 무형유산으로 남겨주는 경기도 명인들이다. 명인들이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관으로 수십년간 지켜온 ‘하루’의 의미를 따라가봤다

 

경기도무형문화재 60호 신인영 야장

-안성대장간 5대 야장… 60년 가까이 전통 기술 보존 앞장, 익산 미륵사지석탑 등 국내 주요 문화재 보수공사 참여

-국내 유일 가능한 ‘접쇠’ 이용해 숭례문 철엽 제작·복원 칼·프라이팬 등 철물·도구 입소문… 해외서도 진가 알아봐

 

■ 57년 담금질하며 지킨 ‘기본’... 해외서도 알아봐

하늘이 말갛게 푸르러 오기도 이른 오전 3시. 고요한 들판 가운데 대장간의 화덕이 붉은빛을 내뿜으며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낸다.

 

화덕 옆에는 한 남자가 직접 제작한 집게와 전등, 모루 받침대가 놓여 있다. 철을 식히는 담금질용 물통은 언제 가져왔는지도 모를 만큼 오랜 세월 그의 손에서 탄생한 제품을 묵묵히 받아왔다.

 

나무로 된 모루 받침대는 장비를 올려둬도 쉽게 떨어지지 않게 안쪽이 파여 있다. 망치는 그의 손에 맞는 두께의 고무로 감겨 있다. 저마다 시간의 흔적을 품은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긍정하는 한 장인의 철학이 엿보인다.

 

경기도무형문화재 60호 신인영 야장(71)은 50년 넘게 ‘기본’을 지키며 전통 기술을 보존해 왔다. 그의 선명한 강철 제련 소리는 57년간 안성에서 이어졌다.

 

신 야장은 안성대장간의 4대 야장인 고모부 강석봉이 보관하던 장검에 매료돼 13세에 본격적으로 대장장이 일을 시작했다.

 

4년이 채 되지 않은 17세, 실력을 인정받아 안성대장간의 5대 야장이 됐다. 그는 1971년부터 10여년 동안 전국을 돌며 기술에 깊이를 더했다. 다시 안성대장간으로 돌아왔을 땐 국내에 그의 기술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가 만든 물건의 모든 부분에는 이유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호미를 만들 때도 성에(호미의 목·슴베)의 휘어지는 각도를 토질·용도에 따라 달리 한다. 날의 각도도 흙이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계산해 만든다. 제작 과정도 마찬가지다.

 

근대화 이후 한쪽 모서리에 뿔이 달린 서양식 모루를 쓰는 대다수 대장간과 달리 그는 여전히 원통 모양의 전통 모루를 사용한다. 전통 장비를 사용해야 원래의 쓸모가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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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경기도무형문화재 60호 신인영 야장. 그는 57년간 신념과 가치를 쇠에 녹여냈다. ③ 명인의 노랫소리가 흥을 돋운다. 고양송포호미걸이보존회장 조경희 명인은 한동안 끊겼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주현기자

기본을 지켜왔기에 소실된 기술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다. 숭례문, 익산 미륵사지석탑, 안성 청룡사 등 국내 주요 문화재도 복원 당시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신 야장은 흙을 이용해 강도가 다른 두 철을 붙이는 ‘접쇠’가 가능한 국내 유일 대장장이로, 전소된 숭례문을 복원하는 데 이 같은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신 야장은 접쇠를 이용해 ‘철엽’을 제작하기도 했다. 철엽은 침입과 화재를 막기 위해 나무 대문에 부착하는 물고기 비늘 모양 쇠붙이 장식이다. 그는 숭례문의 철엽 411개 중 270개를 전통 방식으로 복원했다. 여러 대장장이를 통솔해 철엽 외 받침쇠, 감잡이쇠 등 주요 철물 31종을 제작했으며 총 3만7천563개의 철물을 생산해 민족의 상징을 지켜냈다.

 

그의 철학은 해외에서도 알아봤다. 지난 2018년 유럽 최대 인테리어 박람회인 ‘메종&오브제’를 시작으로 그 진가가 드러났다. 신 야장의 철물과 도구들이 소개되며 입소문을 탔다. 유럽과 일본이 득세한 주방칼 시장에도 신 야장의 상품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섰다.

 

대장간 최상품에 표시하는 나무 손잡이의 ‘X’ 표기는 해외에서도 알아보며 그가 57년 동안 작업해온 데 대한 자그마한 증명서가 됐다. 그는 “칼을 구매한 한 외국인이 ‘한국에도 칼이 있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의 노력을 해외에서도 알아보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라고 밝혔다.

 

그는 옛 기술을 잊지 않으면서 현대에도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도전한다. 대장장이 기술로 도래를 이용한 장식, 프라이팬, 빵칼 등을 만드는 것이 그 예다. 최근 안성시 안성맞춤박물관에서는 그의 작품을 주제로 한 특별전까지 개최됐다.

 

신 야장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새해에도 일상을 유지할 계획이다. 그가 지금껏 대장장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심’이다. 연말에도 그는 본인의 길을 걸었고 새해에도 그의 길을 걸어갈 예정이다.

 

그는 “평상심을 잃으면 작업에도 영향이 있다. 늘 그렇듯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제품을 만들 것”이라며 다시 망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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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요란한 풍물소리가 동네방네에 울려퍼지고, 두레패와 마을 사람들은 음식과 술을 나눈다. 농사를 짓느라 애쓴 노고에 대한 위로와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호미걸이’는 한바탕 놀이다. 조주현기자

고양송포호미걸이보존회장 조경희 명인

-‘호미걸이’ 노동 피로 풀고 풍년 기원하는 민속놀이 한동안 맥이 끊겼었지만 김현규 선생이 발굴·재현

-후계자인 ‘조경희 명인’… 포용의 리더십 발휘하며 전수자들 이끌고 원형 재현·전수 보존 힘쓰고 있어

 

■ 새해에도 ‘흥’ 잃지 않게... “우리는 호미걸이”

무대에 3열로 늘어선 ‘모’ 앞에서 ‘어이!’ 소리와 함께 북 연주자가 대북을 두드린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무대를 한바퀴 돌며 춤을 춘다. 춤을 멈추고 벼를 든 사람은 가장 앞 좌석에 있는 관객에게 벼를 전달하고 다시 춤사위를 보여준다.

 

이어 농민들이 북, 꽹과리, 장구, 징, 제금, 태평소 등의 악기를 들고 나온다. 고양특례시 송포동 대화마을에서 전승돼 온 놀이, 경기도무형문화재 22호 고양송포호미걸이의 첫 번째인 ‘상산제’에서 하늘이 내린 축복이 인간세상에 닿는 장면이다.

 

송포동은 고양의 유명 곡창지대이며 한반도 최초 재배 볍씨인 ‘가와지볍씨’가 발견된 지역이다. 5천여년 전부터 밭농사가 이뤄진 송포에서 매년 여름 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기도하며 노동의 피로를 풀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됐다.

 

‘호미걸이’는 김매기를 끝내고 올해 농사는 끝났으니 내년을 대비해 호미를 씻어 걸어둔다는 의미다. 타 지역의 풍물이 북, 장구, 징, 꽹과리로 구성되는 데 비해 호미걸이풍물은 서양의 심벌즈와 비슷한 전통악기 ‘제금’을 추가해 듣는 사람과 연주하는 사람 모두의 흥을 더 돋운다.

 

고양송포호미걸이보존회 회장인 조경희 명인(63)은 호미걸이의 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1951년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맥이 끊겼던 고양송포호미걸이는 1977년 조경희 명인의 스승인 김현규 선생이 발굴·재현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98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김현규 선생의 선택을 받은 조 명인이 전수자들을 이끌고 원형 재현과 전수 보존에 힘쓰고 있다.

 

음악과 전통에 끌렸던 조 명인은 30대라는 늦은 나이에 호미걸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생 당시 선생님이었던 송용운 선생(전 고양예술고 이사장)에게 김현규 선생을 소개받아 호미걸이를 배우기 시작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 선생은 조 명인이 고양 사람인 점, 악기와 소리의 재능, 전통을 이으려는 의지 등을 보고 후계자 교육을 시작했다.

 

조 명인은 해가 뜰 때부터 연습을 시작해 늦은 저녁까지 몰두한다. 그는 한 번의 공연을 위해 단원들과 두세달 합을 맞춘다. 두 딸도 각각 전수자·이수자로 함께 공연을 기획한다. 보존회장으로서 단원을 가르칠 때도 고민을 많이 한다.

 

한 번 명맥이 끊겼던 호미걸이이기 때문에 다그치거나 혼내는 것이 아닌,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한다. 단원 대부분이 나이가 많기에 누군가에게 하는 칭찬이 질투를 불러오지 않게, 무대에 서는 순서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 않게 여러 방법을 생각하는 등 늘 즐겁게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한다.

 

조 명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즐거움’과 ‘사명감’이다. ‘내가 아니면 없어진다’는 사명감에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조 명인은 “노동의 피로를 풀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하는 호미걸이놀이처럼, 새해에도 계속 즐길 수 있게 원형을 보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건주수습기자/사진=조주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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