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시 쓰기 딱 좋은 나이” 칠곡 할머니들의 유쾌함 담긴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여든에 한글 깨치고 시 짓는 할머니들 유쾌함
경북 칠곡 문해학교 학생들 실화 재구성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 감독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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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공연 사진. 라이브㈜ 제공

 

“가마이 보니까/ 시가 참 만타/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다” (박금분作 ‘시’ 중)

 

돋보기를 들고 눈에 보이는 온갖 재밌는 것을 발견한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할머니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하다. 완벽하지 않은 맞춤법이지만 삐뚤빼뚤한 글씨엔 세월이 전하는 지혜가 담겨있다. 시가 될 만한 모든 것을 찾아 헤매며 지나온 삶을 하얀 종이 위에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쓴다. 배움은 당당함을 알려줬고, 시를 찾는 과정은 여든이 넘은 소녀들에게 설렘을 가져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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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공연 사진. 라이브㈜ 제공

 

지난 11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개막한 라이브㈜의 창작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경상북도 칠곡의 문해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경쾌하게 풀어냈다. 문해교육이란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부족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성인들이 글을 배우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작품의 원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2019)과 이를 기반으로 한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쓴 김재환 감독이 뮤지컬 예술감독으로도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작품은 칠곡리 할머니들의 실제 일화를 재구성해 ‘팔곡리’라는 가상 마을의 문해 학교에 다니는 유쾌한 네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됐다.

 

한 평생 글을 읽지 못하는 설움을 숨기며 살았던 팔복리의 ‘영란’, ‘춘심’, ‘인순’, ‘분한’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글을 가르쳐주는 문해학교로 향한다. 어느 날, 시사고발 다큐멘터리 PD ‘석구’가 라디오를 통해 할머니들의 사연을 듣고 이들을 찾아온다. 예산 삭감으로 수업 중단 위기에 놓인 문해학교의 선생님 ‘가을’은 석구에게 할머니들이 시 쓰는 모습을 세상에 알리자고 제안한다. 수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말에 할머니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자신만의 시를 찾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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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공연 사진. 라이브㈜ 제공

 

“우리 손주는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니/ 무서워 죽겠다/ …달려가 보듬어 안고파도/ 손주놈 손에 들린/ 동화책이 무서워/ 부엌에서 나가질 못 한다” (강춘자作 ‘무서운 손자’ 중)

 

“우리 어매 딸 셋 낳아/ 분하다고 지은 내 이름 분한이/ 내가 정말 분한 건/ 글을 못 배운 것이지요/ …구십에 글자를 배우니까/ 분한 마음이 몽땅 사라졌어요” (권분한作 ‘내 이름은 분한이’ 중)

 

이 같은 칠곡 할머니들의 진솔함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지난 2013년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 최우수상 등을 하고,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 뮤지컬 넘버로 경쾌한 멜로디의 노래로 재탄생한 이들의 시는 지난한 세월 속 고난과 희망을 담아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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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 수상작 ‘무서운 손자’, ‘내 이름은 분한이’. 라이브㈜ 제공

 

수줍은 첫사랑이지만 ‘원수’가 된 남편,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하나뿐인 ‘영감’에 대한 인순의 시와 노래는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다 이내 동화책을 읽어달라는 손주를 피해 부엌에서 나가지 못하는 설움을 담은 영란의 시와 노래는 깊은 몰입감으로 관객들을 숨죽이게 했다. 특히 딸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분한의 이야기는 세대를 뛰어넘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글자를 배우니 행복하고, 무엇이든 시가 될 수 있다며 ‘지금이 시를 쓰기 딱 좋은 나이’라 말하는 할머니들의 마지막 노래 한바탕은 객석의 앉은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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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원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 포스터. 단유필름 제공

 

실제의 인물들에서 영감을 받은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그 진솔함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이 창작 단계에서부터 돋보인 작품이다. 제작사 라이브㈜는 문해 학교 학생들을 대본 리딩 현장에 초대하기도, 출연 배우들이 문해 학교를 방문해 함께 수업을 듣기도 했다.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창작진은 그 과정에서의 고민과 깨달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춘심' 역을 맡은 배우 박채원은 "원작인 책이나 영화가 있었기에 탐구할 재료가 이미 있었지만, 배우들이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건 문해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을 때"라고 말했다.

 

그는 "어르신들이 은행에서 숫자를 몰라 애를 먹었던 일 등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나누시는데, 슬픈 일은 하나도 없었음에도 돌아오는 길에 다같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며 "그날 수업 이후 작품에 대한 몰입도가 깊어졌다"고 회상했다.

 

오경택 연출가는 "시를 읽었을 때, 한 인간의 삶이 어린아이에서 소녀, 젊은 시절을 거쳐 결혼하고 누군가의 아내이자 며느리, 어머니가 되는 일련의 과정이 압축된 삶의 힘이 느껴졌다"며 "솔직하면서도 아름다운 시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남녀노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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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원작인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안윤선 할머니(중앙)와 주석희 선생님(앞열 좌측에서 두 번째). 라이브㈜ 제공

 

이번 작품은 매회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돼 있다. 지난 19일 열린 초청 공연에는 전국 문해 학교 학생들과 선생님, 문해교육 기관 관계자 300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21~22일에는 간식을 증정하는 ‘급식 날’, 25~26일에는 객석에서 즉석 사진을 찍어주는 ‘졸업 앨범 촬영’, 26~27일에는 마지막 공연을 마친 배우들의 무대인사 ‘졸업식’이 예정돼 있다. 

 

김 감독은 “태어나 뮤지컬을 처음 본다는 할머니들이 어린아이와 같이 즐겁게 즐기는 모습을 보며 뿌듯했다”며 “젊은 관객뿐 아니라 어르신들도 공감하며 문화예술을 즐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작품은 오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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