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인천 부평구 산곡동 백마장기지촌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위해 부평벌에 병참기지를 만들었고 해방이 돼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철마산 밑에서 한가롭게 농사짓고 살던 백마장에도 노동자의 사택과 군부대 그리고 기지촌이 들어서면서 사람과 물자가 넘쳐났다. 7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곳곳에는 아직도 식민통치와 미군 주둔의 질곡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백마장이 일제식 지명이냐 아니냐 논란이 많다. 1940년 일제는 산곡리(山谷里)의 이름을 하구바죠(白馬町)로 바꿨다. <부평사> 에 의하면 일찍이 ‘조선 때 말을 먹이던 곳으로 마장 또는 백마장으로 불렸다’며 백마정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일본식 개명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부평사>
백마정은 해방 후 산곡동으로 다시 불리며 현재에 이른다. 그렇지만 아직도 산곡동은 백마장이란 이름을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서울역 앞에서 ‘백마장’행 버스를 운행하면서 인천의 유명한 지명이 되기도 했다.
‘관동조’ 주택의 아픔
1939년 일제는 부평에 일본육군조병창을 설립했다. 인근에 군수기지를 세우기 위해 5개의 일본인 토건하청업체를 참여시켰다. 이 중 간또오구미(關東組)라는 업체는 백마장 일대의 공사를 맡았고 근로보국대에 편성된 한국인들이 이 공사에 투입되었다. 근로자들을 위해 판자로 만든 집들이 들어섰다. 지금의 산곡동 롯데마트 인근이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관동조’라고 불렀다.
일제가 물러난 후 미군이 부평에 주둔하면서 이곳은 양색시촌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미군이 떠나자 한국인을 상대하는 집창촌으로 변했다가 현재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롯데마트 길 건너 산곡1동에 들어서면 자로 잰 듯한 10여 개의 골목이 나온다. 골목길 입구에 서면 끝이 가물가물 할 정도의 기다란 길이 나온다. 두부를 자른 것처럼 반듯한 골목에 똑같이 생긴 집들이 빈틈없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일제는 조병창과 조선베아링 등 군수기지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위해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다섯 가지 표준형 주택을 설계했다. 이중 20~15평 규모의 갑(甲)형과 을(乙)형은 일본인들을 위한 단독주택이었고 10~6평의 병(丙)형 이하는 한국인을 위한 집단주택이었다.
집단주택은 말이 주택이지 수용소와 다름 없었다. 산곡동의 주택은 신사택과 구사택으로 구분된다. 구사택은 벽돌로, 신사택은 블록으로 지어졌다. 특이한 점은 적게는 6개 많게는 12개의 집이 하나의 기와지붕을 이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비와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한 방편인 듯하다.
산곡1동사무소 옥상에 올라가서 단지를 내려다보니 마치 틀로 찍어낸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끼고 있다. 그렇게 그 집들은 70년의 세월을 보냈다. 좁고 긴 골목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이른 새벽 작업복에 각반을 찬 수많은 노동자들이 ‘벤또’를 하나씩 들고 군수공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최근 인천시는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을 품고 있는 이 주택단지를 등록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968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백마장
일제가 쫓겨난 후 미군이 들어왔다. 백마장 곳곳에는 미군 시설이 자리 잡았다. 60년대 초 현재의 현대아파트 3단지 자리에 국내에서 제일 큰 121미군후송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병원은 시설과 의료진이 좋아 당시 유력 정치인들은 물론 대통령도 치료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이 병원이 세계의 이목을 끈 적이 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상에서 미국의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었다. 사건발생 후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다.
승무원들은 바로 이 121병원으로 후송돼 하루 동안 묵으며 검진을 받았다. 별 넷 미군 사령관을 비롯해 한국에 주둔하는 모든 미군 별들이 사이드카와 소방차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을 방문했고 외신기자와 국내기자의 취재열기로 크리스마스 이브 하루 종일 백마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태원보다 앞선 양키문화
부평에 미군과 미제물건이 들어오면서 양키문화도 함께 들어왔다. 백마장 골목에는 미군들이 출입하는 클럽이 생기며 주말이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뤘다.
미군헌병들이 자주 순찰을 돌았지만 미군끼리, 미군과 한국인이 심심치 않게 싸움판을 벌이곤 했다. 가끔 기지촌 여성의 살인사건이 신문 귀퉁이를 장식하곤 했다. 급기야 부대 인근에 미군 형무소가 생기기도 했다. 미군형무소는 7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고 이후 문화주택이 세워졌다.
골목마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색시집들이 들어섰다. 연합병원과 모자병원이 문을 열었는데 양색시들의 보건증 발급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철마산 아래에는 혼혈아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험하긴 했지만 미군 덕분에 돈은 돌았다. 구멍가게에서도 달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백마장 경기는 좋았다. 특히 양복점과 가구점은 호황을 누렸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들은 값싸고 솜씨 좋은 양복을 몇벌 씩 맞춰갔으며 침대와 소파는 양색시들의 필수 구입품이었다. 양색시들의 국제결혼과 미국 이주에 필요한 서류를 대행해주는 민간사무소들도 솔솔이 재미를 봤다.시장 안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65년 시장 입구에 문을 연 백양당 아이스케키점은 여름 한나절에 1만개 이상 아이스케키를 팔 정도였다.
결코 사그라들 것 같지 않던 미군 경기는 70년대 들면서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미군철수가 현실로 나타나면서 급기야 72년 12월 중순 부평 애스컴부대 한인종업원 416명은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이후 백마장에서는 미군과 군속 그리고 양색시들의 그림자가 점점 사라졌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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