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고려의 魂을 깨우다
이 시기 강화는 고려의 대중무역 교통로이자 해상교류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1232년부터 1270년까지 39년간 이어진 강도시대의 강화는 대몽항쟁을 위한 보장처(전란 때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이자 임시 수도의 역할을 다했다.
강도시대에 세워진 희종의 무덤 석릉, 고종의 무덤 홍릉, 원덕태후의 무덤 곤릉, 순경태후의 무덤 가릉, 고려궁지 등 우리나라에서 찾기 어려운 고려 유적이 강화에 많이 남아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특히 강도시대 강화에서 보관됐던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오늘날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됐을 만큼 역사ㆍ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꼽힌다.
1225년 몽골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변에서 돌연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고여는 앞서 1218년 몽골이 거란적(契丹賊)을 물리치고 난 뒤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러 온 사신으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피살됐다. 이 사건으로 고려와 몽골의 국교는 단절됐고, 몽골은 1231년 고려를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고려는 왕족인 회안군 정을 안북부(평안남도 안주)에 있던 몽골군 진영에 보내 강화를 청해 급한 불을 껐다. 이후 몽골은 점령한 지역에 민정 담당자인 다루가치(達魯花赤) 72인을 두고 고려에 압력을 가하는 등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특히 몽골은 공물과 함께 왕공(王公)·대관(大官)의 어린 자식들까지도 요구했다. 괴롭힘이 심해지자 고려는 결국 몽골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몽골이 수전에 약하다는 이유 등으로 1232년 6월 강화 천도를 단행했다.
새로운 수도가 된 강화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공격이 쉽지 않은 곳이지만, 반대로 수도인 개경과 가깝고 지방과의 연결 혹은 조운(漕運) 등이 매우 편리하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 고려는 강화를 강도(江都)로 칭했고, 이후로도 강도는 강화를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됐다.
■ 강도시대와 최씨정권
몽골은 1232년, 1235년, 1251년, 1254년, 1255년, 1257년 등 총 6차례 고려를 침입했다. 이 기간 고려는 최우부터 최항·최의의 집권기와 김준·임연·임유무의 집권기까지 강화에서 몽골을 상대로 장기 항전했다. 이 중 강화 천도를 단행한 최우는 고려 무신정권기를 대표하는 최충헌의 뒤를 이어 최고 권력자에 오른 인물이다.
천도 당시 최우는 천도론을 반대하는 참정지사 유승단과 야별초 지휘관 김세충을 처형했다. 천도를 결정한 다음날에는 강화에 군을 보내 궁궐을 짓게 했고, 개경의 각 기관을 강화로 옮기는 동시에 각 도에 영을 내려 백성들을 산성이나 해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천도가 이뤄진지 2년 뒤인 1234년 강화에는 궁궐과 여러 관청이 세워지는 등 조금씩 수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됐다.
최우의 아들 최항은 1249년 아버지가 죽자 정권을 이어받았다. 최항은 1252년 몽골 사신이 왕의 출륙 친영(出陸 親迎)을 요구하자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보내 대신 맞게 하는 등 아버지의 강격책을 계승한다. 최항이 집권했던 1251년과 1255년 강화에는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과 역대 고려왕의 위패를 모신 태묘가 각각 세워졌다.
4대 최씨정권의 마지막인 최의는 1257년 아버지 최항의 권력을 잇는다. 최의는 앞서 최항과 최우가 그랬듯 전횡을 자행하다가 1258년 김준과 유경(柳璥) 등이 일으킨 무오정변에서 살해당한다.
최우부터 최의에 이르기까지 최씨정권과 강도시대는 흐름을 같이한다. 강도시대 강화의 방비시설인 내성·외성·중성도 최씨정권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232년 강화 천도와 함께 쌓은 것으로 보이는 내성은 현재 강화읍 일대에 축성돼 있다. 동남쪽 일대를 둘러싼 외성은 천도 이듬해부터 1237년 증축됐고, 중성은 1250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1259년 고려와 몽골 사이에 강화가 성립됐다. 그러나 최씨정권 이후 권력을 손에 쥔 김준·임연·임유무 등 무신정권은 여전히 항전을 기도했다.
무오정변 이후 최고 권력자가 된 김준의 경우는 원종(元宗)이 즉위한 후 친몽정책과 개경환도를 반대하다가 1268년 강윤소·임연 등에게 암살당한다. 임연은 1270년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는 등 몽골에 끝까지 항전하려다가 병으로 숨졌고, 그의 아들 임유무도 야별초를 통해 개경 환도를 막으려다가 원종의 밀명을 받은 홍규와 송송례에게 살해된다. 이 같은 무신정권의 몰락은 같은해 왕정 복구와 개경 환도를 동시에 가져왔다.
개경 환도 이후 대몽항전에 참여한 삼별초가 항거에 나섰다. 삼별초는 종실 왕온(王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에서 진도로 거점을 옮겨 대항했다. 1년여 뒤에는 고려조정과 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해상에서 항전했다.
삼별초의 항전은 1273년 여몽연합군이 제주도를 점령하면서 평정됐다. 고려 말기 강화는 고려 왕의 유배지가 됐다. 폐위된 우왕(禑王)은 강화로 유배를 왔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은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게 폐위된 뒤 강화에서 죽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이후 이성계(태조)는 왕씨 일족을 강화와 거제로 안치했고, 1394년에는 왕씨 일족 모두를 강화나루에 던져 죽였다.
강도시대 강화의 모습은 강도시대에 활동한 문인 최자의 삼도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삼도부는 동문선(東文選) 제2권 부조에 실린 부(한문 문체의 하나)로 서도의 변생과 북경의 담수, 강도의 정의대부 등 가상인물 3명이 삼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최자는 삼도부를 통해 지금의 강화인 강도에 대해 화산(花山)을 중심으로 갑화관(岬華關)과 풍포관(楓浦館), 바다와 절벽이 갖춰진 금성탕지(金城湯池·매우 견고한 성)이자 제왕의 도읍이라고 칭송했다. 또 풍속이 순후한 덕의 터전으로 태평성대의 지극한 정치가 펼쳐지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최자는 삼도부에서 ‘안으로 마리·혈구가 무겁게 둘러섰고 밖으로 동진·백마의 사면을 요새로 하니 출입을 누가 어찌하랴’, ‘성시가 곧 포구이며 문밖에 바로 배가 있다’, ‘상선과 공물을 실은 배가 만리 밖에서 잇달았다’ 등의 표현으로 강도시대 강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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