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외환위기 극복…‘햇볕정책’으로 노벨평화상

민주화 투쟁, 인권 신장, 남북통일 운동, 노벨평화상 수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굵직한 인생을 대변해 주는 용어들이다.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며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재임 기간동안 6·25 전쟁 이후 최고의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한 경제 대통령이자 예술과 스포츠를 사랑한 문화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곧 통일을 향한 여정이었다. 유신 때부터 ‘빨갱이’로 몰려 수차례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3단계 통일론과 대북 포용 정책의 확고한 신념을 꺾지 않고 마침내 남북 화해협력 시대를 여는 등 통일운동에 평생을 투신했다. 일각에서는 ‘대북 퍼주기’라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는 집권기간 끝까지 이 신념을 고수했다.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에 대해 “북에 의한 적화 통일도 용납하지 않지만 남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도 기도하지 않는다”며 “남북이 오로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 협력하자”고 북을 설득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서로 안심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이 지론은 결국 철통같던 북한의 마음을 움직였고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분단 50년만의 일이었다. 남한의 대통령 김대중과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얼싸안는 모습에 전세계가 열광했다. 이에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며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김 전 대통령을 선정했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된 것이다. ◇IMF를 해결한 경제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 외환위기 당시 취임해 뚝심으로 국가 부도 위기를 해결한 경제 대통령이었다. 특히 IMF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단행한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권 건전화는 지난해 9월 전 세계에 몰아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한국이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됐다. 또 그의 ‘민주적 시장경제 원리’는 한국 사회가 자율 경쟁과 시장 경제로 진화하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당면한 경제위기를 ‘시장경제 논리와 공정경쟁 원리의 실종’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고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을 지양했다. 또 경제운용에 따른 폐해와 비효율성을 제거하려면 경제정책을 민간주도형으로 펴나가야 하며 이를 통해 공정경쟁 질서를 확립하고 소득재분배를 실현해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철학 아래 경제 정책을 운용했다. 그 결과 외환 위기로 1997년 말 39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고를 재임 마지막 해인 2002년 말 1천214억달러로 늘림으로써 국가부도 위기를 해소하는 성과를 거뒀다. ◇대한민국을 IT 강국으로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던 지도자였다. 초고속인터넷 등 유무선 통신망을 구축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굴뚝 산업 중심에서 지식정보화 강국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이라는 것.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취임 당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며 IT강국 의지를 피력했다. 실제로 그는 임기 내내 IT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역량을 쏟아부었다. 이에 취임 첫해인 1998년 6월 시작한 초고속 인터넷서비스 가입자가 불과 4년만에 1천만명을 넘어서면서 인터넷이 생활화되는 등 IT 붐이 조성됐다. ◇문화·체육을 사랑한 대통령 책을 사랑한 대통령이었던 만큼 김 전 대통령의 문화 사랑도 남달랐다. 무엇보다 현재 문화정책의 큰 틀과 기본이 마련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책이란 이름에 걸맞는 문화비전이 처음으로 제시됐으며 문화가 산업으로 새롭게 옷을 입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문화산업진흥기본법 제정 등으로 문화산업 집중 육성과 문화콘텐츠 산업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바탕을 마련했다. 2000년 정부예산대비 문화예산 1%, 1조원대 확충과 문화재청 출범, 한국문학번역원 설립, 문화예술진흥기금 조성 확대 등 문화예술진흥과 문화복지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한국체육사에 미친 가장 큰 업적으로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에 남북한 동시입장을 성사시킨 것이다. /최모란기자 moranl@kgib.co.kr ■DJ 어록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 봐야 한다”.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3선 개헌은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독재 국가로 만들어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 좌익독재 뿐 아니라 우익독재도 똑같다.” ▲“4·19는 5·16의 안티 테제다.” ▲“이제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을 둘이나 잡아넣을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런 건 못한다.”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 ▲“햇볕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감싸기도 하지만 음지에 있는 약한 균들을 죽이는 것도 햇볕이다.” ▲“나도 실업계 고등학교 나왔어요. 실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결정해야지, 학교를 가지고 차별하면 안된다.”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가지고 (평양) 방문길에 오르고자 한다.”(2000년 6월13일 서울출발 평양행 대국민 인사말에서) ▲“여러분이 보고싶어 이곳에 왔다.”(2000년 6월13일, 평양 도착성명에서) ▲“촛불집회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인터넷·휴대전화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된 중대 변화.” ■ 막 내린 3金시대 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金) 시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막을 내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명이자, 정계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 전 대통령이 서거로 196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했던 시대가 마감되고 있는 것. 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愛憎)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 9단’의 칭호는 이들 3김에게만 허락된다. 그만큼 3김이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과 폐단은 깊고도 넓다는 의미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친 뒤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경쟁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암흑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힘은 3김에게 다시 정치활동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이다. DJ와 YS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나란히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합당과 분열 등을 거듭하면서도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됐고,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의 대통령 당선으로 3김 정치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YS와 JP는 집권여당인 민자당 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으로 협력관계를 맺었지만 JP는 1995년 YS 민주계의 퇴진 압력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한 뒤 같은해 3월 충청기반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DJ도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역시 호남을 지역기반으로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15대 총선은 3김이 맞붙은 또 한번의 승부였다. YS에게 쫓겨난 JP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른바 ‘DJP 연합’을 통해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뤄낸 것. 이에 따라 DJ는 대권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고, JP는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로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연합뉴스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독재에 맞서 가시밭길… 민주주의 꽃피운 ‘忍冬草’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으로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을 살았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지만 남북화해라는 화두는 미완의 유업으로 남았다. ◇소작농의 아들이 정치인의 길로 목포 앞바다에 솟아있는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 전대통령은 교육열이 남다른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목포로 유학해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청년실업가로 성장한 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지만 건준에 몸을 담은 이력은 그를 평생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우익반동이란 이유로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으나 총살 직전에 탈출, 생애 5번의 죽을 고비 중 첫번째 고비를 극적으로 넘겼다. 이러한 그의 정계 입문 과정은 3전4기 끝에 성공한 그의 대권도전사와 닮은꼴이다. 제3대 민의원 선거(1954년)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쓴 잔을 마신 그는1956년 장 면 박사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연거푸 민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4.19 혁명으로 이듬해 5월 다시 치러진 인제 보선에서 생애 첫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당선된 지 사흘 만에 5.16 군사정변이 나는 바람에 선서 한번 못해보고 의원직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 1962년 YWCA 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던 미국 유학파인 이희호 여사와 재혼, 가정적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1963년 6대 총선 때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금배지를 달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발을 디뎠다. 19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해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좌절과 재기가 반복된 대권도전사 1967년 7대 총선에 당선된 뒤 그해 5월 한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원내총무 경선에서 첫 대결을 펼치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의원의 막판 지원으로 YS를 누르고 이듬해 대선에 나섰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 이후 긴 가시밭길에 들어서면서 유신이 선포된 1972년부터 1987년 6.29 선언까지 17년의 시간은 납치와 망명, 투옥, 연금으로 점철된 암울했던 시기였다. 특히 1973년 일본 도쿄에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돼 수장당할 뻔했으나 미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살아났는가 하면 19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간 복역한 뒤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던 그의 꿈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무산됐고,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군사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 번 벗어났지만 1982년말 미국으로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군사정권의 숱한 탄압에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그의 의지는 1987년 6월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됐다. ◇양김 분열 후 정권교체까지 그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다. 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지난 1988년 총선에서 호남지역을 싹쓸이하면서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 재기하는가 싶더니 1990년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졌다가 1991년 9월 YS가 떠난 민주당의 이기택씨와 야권통합을 성사시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1992년 12월 대선에서 YS에게 패해 대권 3수에 실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1995년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치전면에 복귀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 손잡으면서 ‘DJP 공조’는 외환위기를 맞아 ‘준비된 대통령’ 탄생을 갈망하는 국민 여론을 타고 정권교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DJ정부 출범…불운했던 말년 대선 승리의 감격을 누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날부터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견제,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측근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져나오면서 YS처럼 조기 레임덕에 빠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특히 대통령의 아들들과 `2인자'로 불렸던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각종 비리의혹 사건은 정권의 도덕성에 큰타격을 입혔다. 퇴임 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노무현 정부 시작부터 몰아닥친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흠집이 가고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영어의 몸’이 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외부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통해 건재를 과시했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자 “북미관계가 안 돼서 진전을 하지 못한 것”이라며 햇볕정책 책임론을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한마디’는 퇴임 후에도 민주당과 전통적 지지층에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를 주문하는 등 왕성한 정치활동 때문에 현실 정치 개입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용성·구예리기자 leeys@kgib.co.kr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서거한 가운데 동교동계로 불리는 ‘김 전 대통령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몰리고 있다. 동교동계는 김 전 대통령의 집이 동교동이었던 것에서 생겨난 동교동계는 유신시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인 상도동계와 더불어 측근 인사들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은 단연 박지원 민주당 의원으로 마지막까지 김 전 대통령의 병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자임해왔다. 김 전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듯 했으나 지난 총선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최근에는 지난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김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잇는 중요 인사로 부각됐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추미애 민주당 의원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사람이다. 평소 김 전 대통령의 ‘수양딸’로 불릴 만큼 김 전 대통령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던 추 의원은 지난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최근 민주당내에서 정세균 대표 못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함께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광주 북갑 총선에서 386 운동권 출신의 강기정 의원에게 패해 정치무대 복귀에 실패했고, 권노갑 최재승 이훈평 전 의원은 정치자금법 및 선거법 위반 혹은 개인 비리로 정치 복귀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하자 지난 2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권노갑 전 의원과 남궁진 전 의원도 미국에서 급히 들어왔다. 이 밖에도 한광옥 윤철상 김옥두 설훈 전 의원, 김홍일 전 의원의 처남인 윤흥렬 씨 등 동교동계 인사 20~30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에 모여서 김 전 대통령의 병상을 마지막까지 지켰다./장충식기자 jcs@kgib.co.kr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87년, 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 수감되고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80년에는 5월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때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해 7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92년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95년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네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듬해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공조를 앞세워 9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건국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사회를 구현했으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60년대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현실정치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른바 `3김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여↔야·대통령↔국민 소통 안된다” 64.4%

우리 사회에서 소통이 가장 안되는 곳은 정치권이며, 여야 정당간·대통령과 국민간의 소통이 가장 절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진보와 보수 성향의 이념 갈등이 소통을 가장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이는 경기일보가 창간 21주년을 맞아 한길리서치연구소에 의뢰, 8월 초 경기도와 인천광역시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소통’을 주제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95% 신뢰 수준에 ±3.1%P)다.★관련기사 4·5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기도민과 인천시민들의 69.9%가 우리 사회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답한 반면 28.1%만이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고 응답, 소통의 부재 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족간 대화나 소통은 87.6%가,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대화나 소통은 65.3%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노사간 대화나 소통은 10.0%만이, 정치권의 대화나 소통은 3.9%만이 이뤄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소통이 가장 안되는 관계에 대해서는 50.5%가 여야 정당간을 손꼽았고 이어 정치인과 국민간(20.6%), 대통령과 국민간(13.9%)의 순으로 답했다. 특히 가장 소통이 필요한 곳으로 30.5%가 여야 정당을 꼽았으며, 그 뒤를 이어 대통령과 국민간의 소통(29.3%), 여야 정당과 국민간 소통(26.5%)이라고 답하는 등 86.3%가 정치인의 소통 부재가 심각한 수준에 달한다고 판단했다. 소통을 가장 어렵게 하는 갈등에 대해서는 48.1%가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이념 갈등이라고 응답했으며, 이어 부유층과 서민층의 계층간 갈등(30.3%),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지역간 갈등(8.5%), 젊은층과 노년층의 세대간 갈등(5.6%)을 꼽았다. 이명박 정부의 국민과의 소통에 대해서는 31.0%가 잘하고 있다, 63.9%가 잘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김문수 경기지사의 도민과의 소통은 48.8%가 잘하고 있다고 답했고, 안상수 인천시장의 시민과의 소통은 38.1%가 잘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김규태기자 kkt@kgib.co.kr

李 대통령, 재산 331억 기부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집을 제외한 331억여원의 재산을 청소년 장학과 복지사업을 위해 장학재단을 세워 사회에 기부키로 했다. 청와대는 6일 “이명박 대통령의 재산 사회기부와 관련해 지난 3월 발족한 ‘재단법인 설립추진위원회’(위원장 송정호)가 4개월간의 논의를 거쳐 331억4천200만원을 청소년 장학사업에 사용키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3면 이 대통령이 기부하는 재산은 서울 서초동 소재 영포빌딩을 포함한 총 6건의 건물과 토지 등으로, 미국법원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30억원 상당의 LKe-뱅크 채권과 44억2천500만원 상당의 논현동 자택, 그리고 4억8천100만원의 기타 재산은 제외된다. 이 대통령이 청계천 복원 사업을 하기 전 지인으로부터 받은 아호인 ‘청계’에서 비롯된 재단법인 ‘청계’가 다음달 초순 설립돼 이후 이사장을 포함한 12명의 재단임원들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기부 재산에서 나오는 부동산 임대 수입이 재단의 주된 수입원이 된다. 현재 해당 기부 재산에서 한달 9천여만원의 수입이 발생하고 있으며 연 11억원 가량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8월초 재단이 설립되는 만큼 첫 수혜자는 늦어도 신학기가 시작하는 내년 초 선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재단법인 청계 설립에 즈음하여’라는 글에서 “약속을 실천했다는 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다”며 “우리 사회가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사랑과 배려가 넘쳐나는 따뜻한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강해인기자 hikang@kgib.co.kr

李 대통령 “대운하, 임기 중 추진 안해”

이명박 대통령은 29일 “대운하의 핵심은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것인데 정부에서는 그것을 연결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고, 제 임기 중에는 추진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일부 국민들이 정부가 추진 중인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사실상 이름만 바꿔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와 관련,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4대강 살리기라는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정쟁의 틀에 갇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이런 논란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공식 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대운하가 필요하다는 제 믿음에는 지금도 변화가 없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정치적 쟁점이 돼 국론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강을 이대로 둘 수는 결코 없다”면서 “잠실과 김포에 보를 세우고, 수량을 늘리고, 오염원을 차단하고, 강 주변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한강이 된 것이다. 4대강 살리기도 바로 그런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강해인기자 hikang@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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