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 시각에 우리 색깔을 입힌 ‘한국사람들’

세계적인 대기업 질레트의 CEO. 1927년 태어나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희곡작가이면서 소설가인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극작가 미셸 비나레르(Michel Vinaver). 그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1955년 집필한 처녀작 ‘한국전쟁’. 1950년대 프랑스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연극 ‘한국전쟁’이 한·불수교 120주년을 맞아 한국인들에 의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 오는 10~19일 성남아트센터 앙상블시어터 무대에 올려진다. 특히 이번 작품은 비나레르와 연출작업을 함께 해온,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34살의 젊은 프랑스 여성연출가 마리온이 장단과 대사를 한데 엮는 연출가 변정주, 한국 극단 ‘우투리’와 만나 한국에서, 한국 배우들과 공연한다. 연극 ‘한국전쟁’의 배경은 38선 부근의 유원마을. 미군의 폭격으로 유원마을의 모든 게 파괴되고 삶은 혼란에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 살아가기 시작하고 유원마을에서 멀지 않은 숲속에서 프랑스 병사 5명이 길을 잃는다. 어린 소녀는 부상당한 프랑스 군인을 발견하게 된다. 소녀는 사망한 미군의 시신을 묻는 것을 도와주고 프랑스군은 소녀의 오빠 시신을 묻는 것을 도와 준다. 소녀는 프랑스 병사들을 마을로 데리고 온다. 이 작품은 전쟁의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전쟁의 아픈 기억들을 간직한 채 새로운 삶과 사랑을 시작하는 유원마을 사람들의 삶과 현실이 바뀌어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엔군으로 파견된 프랑스군 벨레르와 그 주변 사람들, 전쟁의 상황을 통해 변해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한국전쟁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보지 않고 침략에 대항하는 남한과 해방의 명목으로 싸우는 북한의 입장을 동등하게 비교하고 있다.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보다는 전쟁의 과정 속에서 마을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메아리를 서정적으로 그리면서 주인공인 벨레르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파괴자가 구원자가 되고 침략자가 해방자가 되고, 침략자가 피해자가 되는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영혼은 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돈다. 연극 ‘한국사람’들은 한국전쟁에서 죽은 모든 영혼들을 불러내 한 판 놀이판을 만들고 그들의 넋이 편안히 천지로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한판 씻김굿을 펼친다. 탈놀이, 씨름, 전통무술 등을 이용해 이미지와 장면이 구성되고, 사람들이 뒤엉켜 무덤이 되고 사람이 한 세트가 된다. ‘우리 집에 왜 왔니’, ‘가위 바위 보’, ‘기념상놀이’, 죽 끓이는 놀이’ 등 우리의 놀이와 몸짓을 통해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메아리를 냉철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보여준다. S석 2만원, A석 1만5천원. 문의(031)783-8000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첼리스트 장한나 안산 콘서트

11세의 나이로 세계적 권위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국제콩쿨에서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대상과 현대음악상을 수상하며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신동 첼리스트 장한나. 그가 신동에서 이제는 거장으로 돌아와 안산을 찾는다. 장한나는 오는 25일 오후 7시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해돋이극장에서 영혼을 울리는 깊고 그윽한, 강한 흡입력의 열정이 넘치는 연주를 선보인다. 혼신을 다하는 자클린 뒤 프레의 연주에서 뿜어 나오는 열정과 강한 흡입력에 사로잡혀 첼로와 인연을 맺은 장한나. 9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다 11살때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를 보고 싶어 참가한 국제콩쿨에서 대상을 수상, 이를 계기로 생전의 로스트로포비치와 미샤 마이스키 등 세계적 거장들이 그의 후원자가 됐다.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과 현란한 연주법 등으로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을 사로잡은 장한나는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의 활발한 연주활동과 음반작업을 통해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며 음악적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제는 천재 소녀에서 진정한 연주가로 성장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장한나와 협연한 오케스트라도 세계 정상의 베를린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 런던 심포니, 밀라노 라스칼라 오케스트라, 보스톤 심포니, 로마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오스트레일리아 국립(시드니) 오케스트라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함께 연주한 지휘자 또한 현재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이끄는 거장들인 주빈 메타, 로린 마젤, 주세페 시노폴리, 리카르도 무티, 세이지 오자와, 샤를르 뒤투아, 레너드 슬래트킨 등이다. 이번 공연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 실내악 및 연주회를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는 장한나의 강한 흡입력의 첼로 선율을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레퍼토리는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쇼스타코비치의 ‘첼로소나타’, 쇼팽의 ‘첼로소나타’ 등이다. 소요시간 100분. R석 7만원, S석 5만원, A석 3만원, B석 2만원./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문근영 "전 언제나 자라고 있어요"

문근영(19)은 계속 성장 중이다. 자연인 문근영은 올해 대학생이 됐고, 배우 문근영은 정통 멜로영화를 소화해내는 성숙한 여배우로 한 발짝 더 내디뎠다. 김주혁과 공연한 '사랑 따윈 필요 없어'(감독 이철하, 제작 싸이더스FNH)는 빚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잘나가는 호스트와 앞을 못 보는 대부호의 유산 상속녀의 사랑을 담았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멋있고 어여쁜 두 배우의 연기를 통해 눈을 만족하는 영화가 됐다. 수려한 영상미 속에 두 배우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사랑이 절실해 필요해"라고 외치는, 사랑이란 게 정말 소중하다고 말하려는 영화의 의도를 두 배우는 충실히 표현했다. '사랑 따윈 필요 없어'의 류민은 문근영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연배다. '국민 여동생'으로 떠오른 후 지금까지 그가 주로 맡아온 캐릭터와는 달리 침울하며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성격. 배우로서 문근영이 해내야 할 다양한 시도 중 하나다. 스크린 속에서 여전히 맑고 순수한 모습을 선사하는 그를 만나 영화 이야기와 이제 숙녀가 돼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난 언제나 자라는 중…내 나이에 맞게 이해" '사랑 따윈…'는 그를 확실한 티켓 파워를 갖춘 배우로 인식하게 한 영화 '어린 신부'나 '댄서의 순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 눈먼 대부호의 유산 상속녀 류민은 사랑 따윈 믿지 않는 여자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아온 밝고 발랄한 문근영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가 성숙한 멜로영화를 어떻게 해낼까. 많은 이들이 관심을 뒀던 대목이다. "전 언제나 자라고 있었어요. '과도기적 연기'라고 하는데 전 '댄서의 순정'이 제게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죠. 어느 배우든 그렇겠지만 캐릭터를 맡을 때 제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욕심에서 할 수도 있고, 내 능력 안에서 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모두 그러했죠. 만약 '어린 신부'를 했던 나이에 이 연기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지금 제 선에서 제 나이에 맞게 최선을 다해 찍었고, 이해했습니다. 어렵긴 했지만, 그런 부분에서라면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처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는 너무 창피했고 뭐라 말을 못했는데 점점 덤덤해졌다고 한다. "촬영할 때 정말 행복했어요. '그것만으로도 너 만족한다고 했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했죠." 어른스러운 말을 이어갔다. "제가 지금 후회한다고 다시 찍을 것도 아니고, 개봉 안 할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리해갔어요.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 있지만, 영화에 대한 실망은 없었으니까요." 영화 내용이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다고 말했더니 "감독님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전제를 달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상황 설정이 비현실적인 건 맞아요. 감독님 입장에서는 사랑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순수하고 예쁘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가장 순수한 감정인 사랑을 가장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거죠.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사랑을 꿈꿀 수 있게끔." 마지막 장면을 두고 그는 "두 사람의 생과 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만났다'는 것 자체가 해피엔딩일 것"이라고 말했다. ◇"민이의 미소, 문근영의 미소가 아니길" 문근영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표현해야 했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돼 보이는 그의 눈망울은 깊은 슬픔과 연민을 한꺼번에 담고 있다. "앞을 못 본다는 설정 때문에 촬영 전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 열심히 준비했어요. 시선 처리 연습도 많이 했죠. 그런데 막상 촬영을 해보니 연습과 상황이 달랐어요. 그래서 촬영 초반에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익숙해졌는지 신경 쓰이지 않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유난히 까만 눈동자 덕을 본 것 같다"고 했다. 까만 눈동자가 시선을 모호하게 했다는 것. "감정을 따라가니까 신경 쓰지 않게 됐어요. 그 설정을 잊을 정도로요." 왠지 모르겠지만 민이가 무척 좋았다고 한다. 캐릭터에 쏙 빠져 있는 문근영이 보였다. "나름대로 민이의 습관을 만들었는데 촬영 후 지금까지 그때의 습관이 남아 있어요. 민이를 연기하며 가장 신경 썼던 건 민이의 미소가 문근영의 미소가 아니길 바란 거였습니다. 제 웃음은 밝아요. 그런데 아픔을 갖고 있는 민이가 짓는 웃음은 훨씬 더 순수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확 피는 게 아니라 슬며시 피어나는 미소가 되길 바랐죠."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갔을 때 몸을 움츠리는 성향을 보이는 것, 말을 톡톡 내뱉으려 했던 것. 이런 것들이 익숙해지면서 민이가 된 듯했다. "줄리앙을 만나 아픔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희망과 사랑이 되는 감정이 좋았어요. 민이를 연기하면서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실제 많은 사랑을 받았구요. 연기하면서는 줄리앙에게 사랑받았고, 촬영하고 나면 감독님을 쳐다보는데 그때마다 지그시 웃어주는 감독님과 스태프들. 그 현장이 정말 좋았어요." 문근영은 영화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장르 영화가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최소한 문근영을 좋아하거나 문근영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함께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면 영화는 성공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을 것. '국민 여동생'이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보폭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문근영의 지금이 보기 좋다. /연합뉴스

<공연리뷰> 헤이그 왕립음악원 '메시아'

시대가 바뀌고 악기가 진화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바로크 시대 작품들은 연주가 단절됐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의 경우, 바흐 사망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멘델스존의 지휘 아래 다시 부활한 바 있다. 이런 작품들과 비교할 때 헨델의 '메시아'는 대단히 이례적인 작품이다. 초연 이후 작곡가가 생존할 당시는 물론 사후에도 꾸준히 연주되었으며, 그 전통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유행과 문화가 변천하면서 그에 적절한 스타일로 변형돼 왔다. 때문에 '메시아' 공연의 역사는 고전 음악 연주사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헤이그 왕립음악원 바로크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연주한 '메시아' 원전 연주는 당대 이 작품이 어떻게 연주되었는가보다는 오히려 고전음악이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었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무대였다. 고음악과 원전연주(고전음악을 악기와 악보 모두 당대 스타일 그대로 복원한 연주) 연구에 있어 최고봉에 속하는 헤이그 왕립 음악원은 안너 빌스마, 쿠이켄 형제, 톤 쿠프만, 앤드루 맨츠 등 현존하는 최고의 원전 연주자들을 배출한 바 있다. 헨델은 이 작품을 위해 구체적으로 편성이라든가 성악 성부를 지정하지는 않았다. 그 자신이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연주 여건에 맞추어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바 있다. 수십 대의 악기와 수십 명의 합창단이 이루는 대편성으로 화려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오늘날의 메시아 연주와 비교할 때, 최대한 시대에 근접하고자 시도한 이날 편성은 대단히 소박했다. 열 네 명의 합창단원에 현 파트는 6대의 바이올린, 2대의 비올라, 2대의 첼로, 1대의 콘트라베이스로 이루어졌으며 헨델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오보에가 생략된 가운데 목관은 파곳과 두 대의 호른이 주축을 이루었다. 또 화려한 사운드를 위해 트럼펫 두 대와 팀파니 1대, 그리고 오르간과 하프시코드가 각각 1대씩 중앙에 배치되었다. 단원 중에는 일부 한국에서 활동하는 바로크 연주가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소리를 내기 위한 최소한의 악기와 목소리만으로 빚어내는 '메시아'는 불필요한 과장과 무게를 털어내는 대신 간결하고 청아하면서도 맑은 사운드를 지향했다. 연주 스타일은 전반적으로 날렵하고 빨라졌으나 템포와 강약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다이내믹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전혀 지루하지 않게 연주를 이어나갔다. 현대 주법과 가장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현악 파트의 주법이었다. 짧은 보잉과 잘게 토막난 프레이징의 사이사이는 장식음 및 유연한 리듬감으로 채워졌으며 이를 통해 음악은 한층 활기를 띠었다. 독창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음역은 소프라노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에스더 에빙에는 이날 지휘자 자크 오흐가 지향하는 소리에 가장 부합하는 소리를 내며 이날 공연에서 전반적인 무게 중심의 역할을 하였다. 반면 기대를 모았던 카운터테너 피터 드 그루트는 발성 중 음역이 흔들리고 박자를 놓치는 등 컨디션의 난조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연합뉴스

<공연리뷰> 소극장오페라축제 모차르트 오페라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올해는 일 년 내내 방송과 공연장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을 넘치도록 들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모차르트 오페라 공연 레퍼토리는 그리 풍요롭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올해로 8회를 맞이하는 서울소극장오페라축제가 모차르트 걸작 오페라 세 편으로 이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반갑다. 이 축제에 참여한 세종오페라단(예술감독 장선희)은 2-4일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689석)에서 '코지 판 투테'를 한국어로 번안한 오페라 '사랑한다면'(유철우 연출, 김주현 지휘)을 선보였다. 등장인물과 시대적 배경이 현재의 한국으로 설정된 이 작품에서 군 장교인 남자주인공들은 젊은 직장인들로, 이들이 변장하는 알바니아 기사 역할은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한국 유학생으로 바뀌었다. 철학자 돈 알폰소와 하녀 데스피나를 카페 주인 부부로 만든 아이디어도 극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다. 대본은 완전히 한국어로 바꾸었고 음악 면에서는 아리아만 살린 채 레치타티보는 노래극(징슈필)처럼 연극 대사로 전환했는데, 전체적으로 대사 부분이 생생한 재미를 주었지만 아리아 가사는 이따금 극의 새로운 설정과 썩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연출 콘셉트에 맞추어 대본의 스타일을 통일하고 번안에 있어 좀더 과감하게 관객의 웃음을 겨냥했더라면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이탈리아어 대본에 익숙한 성악가들이 한국어로 번안한 텍스트를 노래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출연진 모두 이탈리아어로 불렀더라면 물론 훨씬 자연스럽고 훌륭한 가창을 들려줄 수 있는 가수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프라노 오은영(피오르딜리지)과 메조소프라노 김세아(도라벨라)의 가창과 연기는 각자의 역할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특히 데스피나 역의 소프라노 박선영은 잘 다듬어진 미성과 노련한 연기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돈 알폰소 역을 맡은 베이스 김재찬, 바리톤 강기우(굴리엘모), 테너 이성식(페란도) 역시 익살스러운 호연을 펼쳤다. 두 대의 엘렉톤과 세종오페라단 챔버앙상블의 목관, 금관악기들이 반주를 맡았는데, 부분적으로 특정 악기의 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돌출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연주에서는 활력과 생동감이 느껴졌다. 3-5일 예울음악무대(예술감독 박수길)가 국립중앙박물관의 극장 '용'에서 공연한 '박과장의 결혼'(이범로 연출, 양진모 지휘)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번안한 작품. 862석의 중형 극장 '용'은 오케스트라 피트도 갖추고 있어 모차르트 오페라 공연에는 적절한 환경이다. 이 공연에서는 합창이 빠졌을 뿐,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번안해 거의 그대로 살렸다. 모차르트의 이탈리아어 오페라에서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유기적인 연결이 극 전체의 생명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레치타티보를 포기하면 엄청난 음악적 효과의 손실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은 3막과 4막에서 극의 긴장이 다소 느슨해져 생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만큼, 1-2막의 레치타티보를 최대한 살리고 3-4막을 대폭 줄인 이번 시도는 설득력이 있었다. '박과장의 결혼' 역시 무대는 현재의 서울이다. 바람둥이 백작은 특급호텔 사장, 피가로는 하인이 아닌 호텔 직원, 수잔나는 사장의 비서로 변신했다. 미소년 케루비노까지도 수잔나와 입사동기인 호텔 직원이다. 나중에 피가로의 어머니로 밝혀지는 마르첼리나는 여기서 피가로에게 외상값과 빚을 독촉하는 카페 여주인으로 설정된다. 연출 콘셉트는 어색한 부분이 거의 없이 아귀가 척척 잘 들어맞는다. 2막에서 케루비노가 창밖으로 뛰어내릴 때 파손되는 것은 화분이 아니라 주차해놓은 사장의 자동차고, 4막에서 변장과 밀회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정원이 아닌 호텔 스위트룸. '피가로의 결혼'을 처음 보는 관객들도 웃음을 터뜨리지만, 원작의 내용을 알면서 본다면 더욱 재미있는 번안작품이다. 11명의 출연자가 한결같이 자연스럽고 희극적인 연기로 관객을 집중시켰지만, 피가로(박과장) 역을 맡은 베이스 박준혁의 빼어난 가창과 열연이 특히 돋보였다. 여러 개의 문을 이용한 단순한 무대도 효과 만점이었다. 소극장 오페라에서 흔히 기대하기 어려운 20명 규모의 체임버 오케스트라(영감과 열정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쳄발로가 반주를 맡아 모차르트 오페라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부족함 없이 전달한 것 역시 이 공연의 놀라운 수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어 공연이 가수들에게는 물론 상당한 부담이지만, 지역 주민들이 찾아오는 중형극장에서 이루어진 이 두 공연은 높아 보이는 오페라 장르의 문턱을 단번에 허물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 지난해의 소극장 오페라 공연들이 반주악기로 대개 엘렉톤만을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두 공연 모두 소규모의 앙상블을 선택했다는 것 역시 바람직한 시도로 보인다. 이처럼 엘렉톤, 엘렉톤+피아노, 엘렉톤+관악 앙상블, 순수 관현악 앙상블 등 반주악기군의 다양한 실험을 거치면서, 작품의 성격과 극장 규모에 맞는 가장 효과적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두 공연 모두 번안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오페라단 내에서 공동작업이 이루어졌거나 연출가가 자신의 연출 콘셉트에 맞춰가며 직접 대본을 번안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음악과 잘 어우러지는 재치있는 대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오래 공을 들였을 번안작가의 이름은 프로그램 소책자에 소개되었으면 한다. 서울소극장오페라 축제의 세 번째 모차르트 오페라 공연은 15-16일 성동구 소월아트홀에서 펼쳐지는 서울오페라앙상블(예술감독 장수동)의 '돈 조반니'. 지난해에 초연된 이후 전국 순회공연을 통해 관객의 열렬한 찬사를 받은 소극장용 작품이다. 재정 지원이 거의 없는 열악한 상황에도 매년 재미있고 수준 높은 공연으로 관객을 만족시키는 서울소극장오페라 축제를 지켜보면서, 잘 지어진 수많은 지역 극장들을 활용할 수 있는 소극장 오페라에 대한 많은 관심과 재정적 지원을 간절히 바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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