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며 자라나는 어린이들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저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까 무척 궁금할 때가 많다. 그러나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이 질문이 아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곤혹스러운 것 같다. 자신이 뭐가 되고 싶은지는 사실 어른들에게도 버거운 질문이다. 미래에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자. 머릿속에 답이 떠올랐다면 누군가에게 말해보자. 사실 어른들조차 앞으로 어떤 것을 이루고 싶은지 명확한 답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거나, 뭔가 어렴풋한 답을 찾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쑥스러운 마음이 드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난해한 질문을 어린 자녀들에게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해내는 어린 학생들을 보면 대견스럽고, 수없이 되풀이되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답을 찾았을까 생각하며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실 아이들이 어떠한 답을 하던 별로 무게를 두지는 않는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진학할 대학과 학과를 고민하고 있는 수험생이라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초등학생이 어떤 답을 한다 한들 아이들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한정돼 있고 어른이 되기까지 남아있는 시간도 너무 길어서 그 답변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다양한 답변을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꿈이 뭔지 묻는 질문에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유독 자신감 없어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계속 물어보면 툭 던지듯 대답을 하는데 그러한 답변이 주로 유튜버, 연예인, 축구선수, 가게 주인 이러한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공부를 못해도 할 수 직업을 이야기한다. 한번은 경찰이 되겠다는 아이가 있어서 그러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라고 별 생각 없이 대꾸했더니 깜짝 놀라며 도둑 잡는데 공부를 잘 해야 되요?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이해할만한 정도로 경찰이 되기 위한 과정과 왜 공부를 잘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주니 꿈을 바꾸겠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사실 그 학생이 축구를 아주 잘하지도,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축구선수라는 대답을 했을까? 그것은 그 학생이 찾아낸 당혹스러운 반론을 받지 않을 안전한 답변이었으리라. 만약 꿈이 의사라고 답변을 했다면 어떤 반응이 뒤따르겠는가? 꿈이 없다고 말했다면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결국 안전한 답을 찾게 된다.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답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 교실마다 장래희망이 축구선수나 유튜버라고 하는 학생들이 넘쳐나는 것이 아닐까? 당신에게도 축구선수가 꿈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장 자녀에게 가서 축구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는지 확률과 통계 그리고 변증법적 논리를 총동원해서 기선제압을 한 뒤 진짜 꿈이 뭔지 집요하게 물어보라. 그러면 아이는 더욱 창의적인 답변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커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 학생이 있었다. 원래는 의사가 꿈이었다가, 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꿈이 가게 주인이 되었다가, 보증금이 얼마나 비싸며 자영업의 미래가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 운운하며 부모님이 핀잔을 주자 현재의 답변인 어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이가 자신만의 꿈을 품고 자라게 하고 싶다면 머리 아픈 질문 대신에 차라리 이런 질문을 해보자. 뭐 먹고 싶니?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자라나는 아이는 반드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김명수 화성 대양초 교사

색소폰 교육의 저변확대를 논하다

구한말 개화기부터 일제 강점기, 해방과 6.25를 전후해 다양한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전세계를 휩쓸고 있던 미국의 재즈 음악이 국내에 소개됐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미군(미8군)이 주둔한 곳에는 재즈 밴드가 활약했고, 수많은 경음악단이 생겼다. 이 시기에 재즈는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한 미군 취향에 맞는 재즈와 경음악 계열을 의미했다. 미8군은 한국 전쟁 때에만 32만 명에 이르며 재즈의 인기도 높았지만 병력 감소와 1960년대 중반 베트남 파병으로 미8군에서의 연주는 급속히 감소했다. 미8군 무대는 한국에 재즈와 색소폰이 직접적으로 연주되는 공간이었다. 다른 종류의 악기는 클래식에 기초해 일부 상류 계층의 향유물로 체계화된 보급과 교수법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색소폰은 명백한 클래식 악기임에도 상당히 퇴색한 이미지로 조명돼 밤무대에서 연주되는 대표적인 악기로 각인돼 버리고 말았다. 1990년대 초반을 시작으로 이후 서울, 경기의 음악대학을 중심으로 클래식 색소폰 전공 학생을 양성했고 이것을 기점으로 음악대학 내에 색소폰 전공자를 한명씩 선발, 색소폰의 새로운 입지가 도래하게 됐다. 하지만 아직도 음악대학 내에 적은 인원수와 검증되지 못한 강사진, 오케스트라 곡의 낮은 보급률, 정보, 교재 부족으로 색소폰 대중화와 홍보, 인지도를 저해하고 있으며 색소폰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교수 또한 적어 학생들은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최근에는 선행 연주자들에 의해 올바른 정보와 문화정착 발전에 힘쓰고 있지만 아직까지 연주에 필요한 정보 및 색소폰 교재가 체계적이지 못해 연주자들은 수입에 의존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연주자들이 저술한 교재, 전공자가 아닌 색소폰 주자가 주축이 된 색소폰 동호회 등이 색소폰 지도에 문제가 되고 있다. 색소폰은 다른 목관금관악기 보다 악기의 특성상 소리내기가 쉽다. 연주 시 운지법이 간편하며 전문연주자들을 모방해연주 흉내를 내고 습관처럼 주법이 변해서 고칠 수 없는 사례도 있다. 그러므로 전문성을 지닌 색소폰 교사가 지도 방법을 개발해 처음 악기를 배울 때 체계적인 색소폰의 표현 능력과 포괄적 이해력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종합적인 영역별 연계성을 고려해 지도해야 한다. 음악의 전문성을 지닌 색소폰 문화의 보급과 지도 방법을 개발해 색소폰 문화의 저변확대와 정착을 시켜야 한다. 이승수 오산 송산고 교사

“만민평등” 동학농민군의 뜨거웠던 함성을 듣다

경기도 학생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유적지에서 125년 전 수천의 농민군들이 힘찬 함성을 듣고 왔다. 경기도교육청이 5월 10일부터 11일 이틀 동안 전라북도 정읍과 공주 일대에서 진행한 경기학생 동학농민혁명 역사 유적지 현장체험에는 동학농민혁명 현장체험 답사단(안성 흥진중, 수원 화홍중, 용인 원삼중, 포천 일동중, 수원 동우여고, 안산 대부고, 시흥 경기자동차과학고, 포천일고) 학생과 교원 40명이 참여해 외세 저항과 독립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했다. 특히 5월 11일은 1894년 5월 11일 황토현 전승일을 기념해 올해 법정 국가기념일로 정식 제정된 의미 있는 날이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중심의 낡은 중세사회를 개혁해 만민평등 세상을 추구한 전국적인 반봉건 민주항쟁이다. 또한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전 민족적인 반일항쟁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전라북도로 떠난 학생교사들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민주주의 뿌리는 어디인가 현대시대에는 사람들이 이웃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무시하고 지나가는 그런 것들이 많다. 우리 학생들도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 변혁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사회 부조리하고 변화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변화시키고 싶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우리 한반도의 정신인 것 같다. 이번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을 통해서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에 대해서 몸으로 체득하고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3ㆍ1운동까지 이어져 온 정신을 이어나가는 한 사람이고 싶다.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으로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 국가에 도움이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김기영(포천 포천일고 2) 전봉준농민들의 함성 들리는 듯 고부로 가기 전 수천 명의 농민들이 모였던 말목장터로 갔다. 전봉준의 함성과 수천 명의 농민들이 외치는 함성을 들리는 것만 같았다. 동학농민군 대 관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들은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버텼다. 그러나 계속된 공격에 결국에는 동학농민군이 패하게 되었다. 이렇게 치열했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곳, 관련된 곳을 돌아보면서 동학농민군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얻기 위한 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아보면서 나도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진영(안산 대부고 1) 역사 유적지 체험 완벽했던 1박2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말목장터에서 보지 못했던 역사 속 그 감나무가 반겨주었다. 그곳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유물들과 그것을 추억하는 조형물 등을 관람했다. 직접 과거의 현장들을 체험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경험이었다. 마지막으로 우금치전적지에서 이틀간의 경험을 서로 나누고, 퀴즈를 풀며 체험활동을 마무리했다. 18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전라북도에서 1박2일의 체험활동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됐었지만 너무나도 완벽한 1박2일이었던 것 같아 뿌듯했다. 김찬영(시흥 경기자동차과학고 2) 위령탑 앞에서 역사교사를 꿈꾸다 모든 전쟁이나 전투가 벌어질 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무명농민군위령탑에 와서 다시 한 번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조상들에게 감사드린다는 생각을 했다. 또 3ㆍ1절 관련된 전시장도 보고 동학농민운동을 전시된 박물관을 보며 슬프기도 했고 수만 가지의 감정이 들었다. 내 꿈이 역사 선생님인데 이번 기회를 통해 역사 선생님이 되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 또한 역사 선생님이 된다면 제자들에게 동학농민운동을 알려주어서 모든 학생들이 동학농민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차훈(안성 양진중 3) 마음 아팠던 전봉준 장군의 맨상투 전봉준 기념관에 갔다. 1980년대 들어 황토현 전적지 등 주요 사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이 대규모로 행해졌는데 전두환이 전봉준 장군과 같은 전씨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한다. 5ㆍ18 민주화운동과 같은 항쟁을 탄압해 집권한 인물이 항쟁을 기념했으니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사진을 보면 두루마기를 입은 전봉준 장군이 주먹을 치켜들고 다른 한 손에 격문을 든, 바로 부안 백산 봉기 당시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전봉준 장군의 맨상투에 있다. 통상 상투머리엔 망건과 갓을 쓰거나 띠를 두르게 마련이다. 아무 것도 없는 맨상투바람은 죄인의 행색이다. 두루마기를 입고 격문을 읽는 몸통에 맨상투머리를 얹은 모순이 있다. 동상을 만든 작가인 김경승은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농민군의 구호인 부당한 권력과 일제에 대항하던 농민군의 정신과 전봉준 장군의 모습이 어처구니없게도 군사 독재정권의 손아귀 안에서 친일파의 작품이 된 것에 대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다. 최유진(수원 동우여고 2) 녹두꽃 핀 자리에 다녀오며 정읍에서 학창시절은 보낸 나는 어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다녀왔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곳이었다. 사발통문 작성지에서는 혁명적 거사계획에서의 그들의 결의를, 무명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에서는 백성 모두를 위한 보국안민을 외치는 그들의 기상을,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집결해 고부 관아로 진격한 말목장터에서는 마음 한편으로 두려움을, 황토현 전적지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들의 환호를 느껴볼 수 있었다. 시인 안도현씨는 정읍을 세 가지가 뜨거운 곳이라고 했다. 정읍사 여인의 사랑이 뜨겁고, 내장산 단풍 터널이 뜨겁고, 동학농민의 열정이 뜨거운 곳이다. 고향에서의 동학농민의 뜨거운 열정을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나의 고향이 너무 자랑스럽고 나 또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포천 일동중 교사 도용석 동학 125주년의 단상(斷想) 현재의 인간은 기억을 망각하지만 과거의 역사는 기억을 재생한다. 기억을 재생한 역사는 인간을 깨우고 진실과 진리로 인도한다. 역사의 깨우침을 받은 인간은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 인간을 모은다. 이렇게 모인 동학혁명유적지 현장체험단은 5월 10일 동학혁명모의탑에 앞에 섰다. 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거늘 그들은 왜 모의해야만 했을까. 글이 길다 할 수 없거늘 어떻게 사발통문이라는 바이블을 작성할 수 있었을까?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은 기단이 없다. 이한열 열사의 쓰러진 모습을 재현한 듯하다. 32개 보조석에는 무기가 아닌 죽창, 낫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정답이 있다. 만민평등사상이다. 멀리 금강이 보인다. 평생 동학을 품고 살았던 시인 신동엽은 여기에서 껍데기는 가라를 쓰면서 동학년 곰나루에 아우성만 살고라 표현했으리라. 이로는 너무 아쉬워 4천800구의 대하 서사시 금강을 썼다. 그가 타계한 지 꼭 50년이다. 시인은 하늘에서 금강 다음으로 동학을 어떻게 노래할지 자못 궁금하다. 수원 화홍중 교사 이형우

[5월은 우리들 세상] 공연 선물부터 깜짝 이벤트까지… 어린이날 맞아 ‘이색 행사’ 풍성

어린이날 풍경이 달라졌다. 제97회 어린이날을 맞은 5월 3일, 도내 학교에선 다양한 이벤트와 행사 등이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형님들이 동생들을 위해 버스킹 공연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물총놀이와 보물찾기를 했다. 또 등굣길 이색 이벤트부터 전교생들이 안전투명우산을 선물을 받고. 달라진 도내 어린이날 학교 풍경을 정리해봤다. 연천 대광초 학생주도형 어린이날 기념식 눈에 띄네~ 연천 대광초(교장 안선근)는 5월 3일 학생주도형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실시했다. 학생자치회가 주관한 이번 학생주도형 어린이날 기념행사는 1교시와 2교시에 본교 큰빛누리관(체육관)에서 진행된 가운데 모든 행사는 학생자치회 임원단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직접 계획ㆍ진행했다. 학생회장의 기념사와 학생 장기자랑 시간을 통해 대광초 학생들은 자신의 끼와 리더십을 펼치며 더욱 뜻깊은 어린이날을 보냈다. 또한 학교 내에서 진행되는 보물찾기 행사에 모든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어린이날을 만끽했다. 수원 광교호수초 선생님이 준비한 등굣길 러블리 이벤트 수원 광교호수초(교장 박정숙)는 5월 3일 아침 등굣길에 러블리 어린이날 이벤트를 진행했다. 러블리 어린이날 이벤트는 교사들이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어린이날 활동에 대해 고민하다 결정한 행사로, 아이들 등굣길에 교장, 교감선생님 등 교사들이 모두 나와 학교 앞에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아이들 한명 한명과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안아주고, 초코렛을 선물로 나눠주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또 광교호수초는 이날 행사와 더불어 1층 참여무대 공연장에서 광교호수초 바이올린부 어린이들이 기념연주회를 열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날 학생들은 등굣길에 서 있는 선생님들을 보며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지만, 선생님이 사랑합니다~ 하며 따뜻하게 안아주자 금새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행복해 했다. 아이들 등굣길에 함께 따라 나섰던 학부모들도 이날 등굣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거나 함께 사진을 찍고 선생님들과 포옹을 하면서 말 그대로 즐거운 파티분위기를 연출했다. 박정숙 교장은 애정 넘치는 이벤트 기획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오늘 행사를 즐기고 우리 학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 것 같아 기쁘다며 선생님을 보고 달려오는 학생을 보니 교사들의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연천 백학초 방향제 만들기물총놀이 행복한 추억 연천 백학초(교장 유규식)는 5월 3일 5월처럼 푸르른 어린이날 기념 행복한 추억 만들기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어린이들의 체력증진과 집단질서를 확립하여 협동심과 건전한 생활태도를 기르며, 스포츠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행복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1부는 운동장에서 진행하는 두레별 부스체육활동으로 미션달리기, 물 옮기기, 줄다리기, 계주로 진행됐으며 2부는 각 교실에서 진행됐다. 왕관, 감사 스탠드, 카네이션 팝업카드, 방향제 등 만들기 활동과 물총 놀이 등 놀이체육 활동을 통해 담임 선생님과 행복한 추억을 만들었다. 유규식 교장은 모든 학년이 두레로 나뉘어 함께 참여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응원을 통해 승패에 집착하기 보다는 단합과 즐거움을 느껴 공동체 정신을 함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산 성호초 재학생, 후배들을 위한 버스킹 공연 감동 오산 성호초(교장 김영학)는 5월 3일 아침 등교시간에 6학년 재학생 모두가 후배들을 위한 버스킹 공연을 진행했다. 그 동안 6학년 학생들은 오산시에서 진행하는 오산통통교실 학생 1인 1악기 프로그램을 통해 통기타를 5학년 때부터 배워왔으며, 이번 공연은 그 동안의 통기타 실력을 선보이는 기회가 됐다. 커다란 기타를 튕기며 목청껏 부르는 노랫소리에 길가던 많은 분들이 모여들어 흥얼거리며 함께 공연을 즐겼으며, 등교하는 후배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6학년 선배들에게 큰 박수를 쳤다. 이번 공연을 준비한 6학년 학생들은 공연을 통해 후배들에게 배운 통기타와 노래를 들려 줄 수 있어 기뻤고, 앞으로 후배들이 6학년이 돼 다음 후배들에게 이런 버스킹을 할 수 있는 성호초만의 역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함께 공연을 관람한 이재화 교사는 6학년 친구들이 마음을 모아 준비한 아침맞이 버스킹 공연은 얼굴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시간이었고, 주변 모두에게 사랑이 전해져 온 하루가 따뜻하고 행복하며, 고생한 우리 6학년 친구들에게 마음 한가득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수원 명인초 전교생에 교통안전예방 투명우산 선물 수원 명인초(교장 송철훈)는 5월 3일 5층 강당에서 어린이 및 학부모 대표, 교직원과 현대모비스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전교생들에게 투명우산 전달식을 가졌다. 이번 전달식은 어린이날을 기념해 현대모비스와 교통안전공단이 지원하는 교통안전예방 투명우산을 전교생에게 나눠주며 어린이날을 축하하고 안전의식을 고취하고자 마련됐다. 안전투명우산은 빗길에 빈번히 발생하는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투명비닐로 제작되어, 시야 확보가 용이하고 가벼워 교통사고 위험을 줄이고 학생들의 안전한 등하교를 돕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투명우산을 선물 받은 6학년 한 학생은 비가 올 때 무겁고 앞이 잘 안 보이는 우산을 들고 오다 보면,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차량이 오는 것을 못 보아 위험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가볍고 앞이 잘 보이는 우산을 들고 온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도 가벼워진다며 앞으로 모든 어린이의 등굣길이 안전해질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미디어경청종합

[항일독립운동 학교 유적지를 찾아서] 3. 가평 가평초등학교

가평하면 우리는 잣과 잣두부, 그리고 북한강과 수려한 경치를 손꼽는다. 이곳은 예로부터 서울과 춘천 간의 교통요지 구실을 해 온 곳으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개교한 지 100년이 넘는 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1907년 6월 25일 진사 이덕규가 사립 가능학교로 개교하고, 1910년 4월 1일 가평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되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평초등학교이다. 가평에서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5일과 16일 양일간에 걸쳐 일어났다. 15일 시위에 이어 16일에는 전날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할 목적으로 이어질 만큼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당시 이규봉과 그의 아들 이윤석, 제자 정흥교 등 가평초등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북면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4일 서울에서 전달된 31독립선언서를 보고 가평초등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로 결의하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비밀통문을 돌렸다. 이에 동네 아낙네들이 1천800여 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3월 15일 마침내 목동리에 있는 북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내면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가평군청, 가평공립보통학교, 군내면 사무소 등지를 돌며 만세행진을 벌였다. 이것을 본 헌병대는 시위 주도자로 보이는 이윤석 등 10여 명을 끌고가 헌병대에 가두었고,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은 그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만세운동은 식을 줄 모르고 지속됐다. 3월 16일에도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는데, 전날 만세운동으로 인해 이윤석, 정흥교 등 30여 명이 가평헌병분견소에 체포되자, 장기영, 정성교 등 200여 명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다시 북면 목동리로 나아갔다. 목돌리의 성황당고개에서 헌병대와 마주치자 장기영은 우리를 모두 잡아 가라. 그렇지 않으면 어서 어제 잡혀간 사람을 내놓으라라고 말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의 지원과 가세로 해산되고 말았다. 가평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만 7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중 28명이 징역형을 받을 만큼 거센 만세운동이었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탄압받았음에도 가평에서의 31운동은 기물을 파괴하거나 하지 않는 평화적인 만세운동이었다. 100년 전 그들에게는 함께 하는 사람들의 하나 하나 소중했고, 독립의지가 강했다. 당시의 가평공립보통학교 건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자리엔 지금의 가평초등학교가 당시의 독립의지와 모든 사람을 소중이 여기는 마음은 그대로 남아 간직되고 있다. 윤용한 화성 고정초 교사

[우리학교 동아리를 소개합니다] 고양 호곡중 국제교류부

고양 호곡중학교 국제교류부는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먼저 현재 말레이시아, 인도, 일본, 브라질 4개 학교와 교류를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학교에서는 학교 소개 영상과 한국어 대회를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주었고 국제교류부 학생들은 대단하게 생각했다. 인도학교와는 2017년도에 직접 호곡중학교로 방문해 친밀도를 높였으며 작년에는 화상채팅을 꾸준히 하는 등 친목을 쌓아가고 있다. 일본학교와는 소통이 제일 잘되는 것 같다. 3년 내내 같은 친구와 한 달에 한번 영어로 편지를 주고 받는 친구들도 있고 두세 명과 소통하는 친구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일본의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간식들을 보내주어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브라질 학교와는 작년부터 교류활동을 해 아직까지는 좀 어색하지만 한국의 라면을 culture box에 담아 보내주었더니 만들어 먹는 영상을 학교로 보내왔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굿네이버스, 세계시민교육을 통해 더 멋진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국제교류부 학생들은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아침 등교 시간마다 사회 이슈나 그 달에 있는 기념일에 관한 주제를 정해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모닝서베이를 실시하고 있는 가운데 4월 모닝서베이는 4ㆍ19혁명을 주제로 진행했다. 모닝서베이 활동을 통해 419 혁명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가연기자(고양 호국중 3)

남양주 진접고 기숙사 ‘정진재’를 아시나요

남양주시 진접고등학교의 기숙사 정진재에는 현재(2019년 4월 24일 기준) 모두 37명의 학생이 생활하고 있다. 지난 2016년 완공돼 학교 본관보다는 비교적 신식 건물에 속한다. 평소 기숙사에 대해 학생들이 궁금한 점이 많아 직접 기숙사생들과 인터뷰를 진행해 보았다. 1학년 신입생들과 2~3학년 재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학생들이 가장 만족하는 부분은 학습에 매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꼽았다. 정진재가 더욱 번영해 학교의 자랑스러운 상징이 되길 바란다. 다음은 학생들과의 일문일답. -기숙사에 왜 입주했나요. 집에서는 조성하기 어려운 독서실 분위기를 원했기 때문에 입주하게 되었어요. 또한 평소 기숙사에 대한 소문이 좋았기 때문에 믿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통학 거리 때문이기도 해요. -공부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인지 궁금합니다. 네! 정보검색실이 2개나 있고 모둠학습실, 매주 수요일마다 하는 진로 코칭이 있어 일반 (기숙사생이 아닌) 학생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공부에 매진할 수 있습니다. -힘들거나 불편한 점은 없는지. 처음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거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는데 이제는 적응이 좀 됐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까 작은 충돌이 생길 때도 있는데, 서로 최대한 이해하고 배려하다보니 금방 풀리는 편이에요. 이런 과정으로 공동체 의식이 길러지는 느낌도 들어요. 처음 한 달간은 적응 기간이라 힘들었지만, 이제는 집보다 기숙사 환경이 더 편해요. (웃음) -기숙사 생활이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됐나요. 자기주도 학습을 옛날부터 해온 편이지만 학습 분위기에 따라 효율이 달라지는 등 영향을 많이 받는데 기숙사 입사 때 학습 분위기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학습 분위기를 흐리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사감 선생님과 부장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에 집에서 할 때보다 공부 효율이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진로 코칭도 받을 수 있어서 참 좋아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 한마디. 기숙사에서는 다른 기숙사생들과 똑같은 공부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취미생활과 공부 시간의 경계가 모호한 친구들은 공부 시간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기숙사에 오는 것이 공부의 효율을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서윤기자(남양주 진접고 1)

[스승의 날 특집-선생님 이야기] 나이 서른아홉에 주례서기

1990년 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다섯에 안산 관산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2005년 봄. 제자 성희가 남편될 사람과 주말에 찾아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전화로 주례를 서 달라며 여러 번 간곡하게 부탁했는데, 이러저러한 핑계로 거절했다. 이번엔 직접 찾아온다니, 제자의 방문에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내가 승낙을 못하는 이유는 이랬다. 뚜렷한 직함 하나 없는 서른아홉의 초등학교 평교사가 주례 서는 걸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또 신랑 나이가 서른셋이니 나와 여섯 살 차이 밖에 나질 않는데, 동년배가 주례를 서는 법도 있나? 신랑 신부 측 어르신들이 아직 인생사를 배워야 할 나이에 주례를 서는 젊은이를 건방지게 생각할 수도. 무엇보다도 난생 처음 많은 하객들 앞에서 주례를 설 용기가 없었다. 제자는 남편 될 사람과 마다하는 나를 주저앉히고 큰절을 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기도 하고, 설득도 하고, 존경받는 지인을 주례사로 소개하겠단 말도, 모두 허사였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오히려 애원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이 안 풀린다고 생각했는지 제자는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을 거에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주례 서주시는 게 그렇게 힘드세요. 저희 선생님이 주례 안 서 주시면 결혼 안 할 거예요. 나이나 직함이 무슨 문제예요. 선생님이면 돼요. 제자의 눈물을 보자, 까짓것 해보지 뭐!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덜컥 허락을 하고 말았다.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 부부가 식을 올린 예식장을 찾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결혼식에 네 차례나 하객으로 참석해 주례사의 예식 집전도 꼼꼼하게 살폈다. 주례 집전 순서를 머릿속에 넣는 것도 일이었다. 멋진 주례사를 쓰고 싶은 욕심에 인터넷 검색을 하고, 주례사에 관계된 책을 사서 읽은 뒤에야 주례사를 쓸 수 있었다. 수십 번 읽어서 외웠다. 실전연습으로 우리 반 아이들과 결혼식 연극 놀이를 했다. 아이들의 역할을 정했다. 신랑, 신부, 신랑 부모님, 신부 부모님, 사회자, 하객 등. 주례는 당연히 나다. 연극은 회를 거듭할수록 진짜 결혼식처럼 짜임새가 있었다. 하도 많이 했더니 아이들도 자기들 결혼할 때 하나도 어렵지 않겠다고 했다. 2005년 4월 24일 일요일 12시 30분. 제자 결혼식 당일 아침, 나이 들어 보이게 몸치장을 했다. 주례 설 때 입으려고 사둔 양복을 입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장년에나 어울릴 디자인과 색깔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인다. 동네 단골 미용실을 찾았다. 최대한 나이 들어 보이게 머리 손질을 하라고 부탁했다. 앞머리에 약간의 흰색 염색을 하고, 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2대 8 가르마를 탔더니, 아주 쪼끔 더 나이 들어 보인다. 드디어 제자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혼인서약을 읽고, 성혼선언을 하고, 좌중을 여유 있게 둘러보며 주례사를 줄줄 외워 나갔다. 젊은 초보 주례사의 당찬 목소리가 식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후 2006년 봄. 제자 부부가 돌쟁이 아기를 안고 셋이 되어 찾아 왔다. 2012년 봄. 제자 부부는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와 함께 다시 나를 찾았다. 김용우 남양주 월문초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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