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하에서는 누구나 자기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고, 자기와 다른 주장을 공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온나라를 뒤덮고 국민적 논란이 불붙는 소위 ‘천도(遷都)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이다. 정부와 여당은 행정수도의 신설이라고 강변하고, 반대파는 천도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국익에 얼마나 보탬이 되느냐이다. 여기서 국민 모두가 거부감을 갖는 천도의 실체에 대해서 재론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것이 만약 천도라면 남행천도, 즉 남천(南遷)이 과거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반대로 북행이 이로웠는지를 역사적으로 되짚어 보고자 한다. 우리 한민족의 조상들은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길을 넘고 장백산맥을 가로 질러, 남으로 남으로 살기좋은 터전을 찾아 나섰었다. 그렇게 해서 자리잡게 된 반도땅은 천혜의 환경을 두루 지닌 은총받은 땅이었다. 사계절이 분명하고 땅은 기름져 농사 짓기에 그처럼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높은 산과 넓은 강을 경계로 ‘남행후 정착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그 바탕에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나섰던 노력, 즉 생존남행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가 되면, 고구려의 남진과 이에 대항하는 백제의 북진, 그리고 신라의 북행이 결국 반도통일의 신라로 이어졌다. 잠깐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 대치시대가 있기는 하였지만, 다시 후삼국의 쟁패로 이어졌고 고려와 조선을 거친 지금은 新후삼국시대와도 흡사한 어지러운 모습이다. 조선시대는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이 살아 있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언로, 즉 말길을 막지 않아서 누구나 자기의 주장을 펼 수 있었고, 심지어 군왕에게 목숨을 걸고라도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할 말은 하는 그런 사회였다. 조선은 거대한 중국과 대치하면서 외교정책상 사대주의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때문에 북행은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내치가 우선이었다. 북한의 개성지역이 공업단지로 본격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경기도의 미수복지역 개성지구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선다는 사실은 남북관계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빛나는 신호탄이다. 조선시대에 단절되었던 북행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태동되고 있음이다. 금강산지구에서의 이산가족 만남과 더불어 실질적인 북행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역사적 진전이라고 하겠다. 공단 개발에 앞서서 문화재조사가 남북한 학자들의 공동작업으로 진행되고 있고, 본인도 조사에 참여하는 기관장 자격으로 개성을 방문할 예정이다. 잘 살기 위한 경제북행으로 시작된 일들이 이제 역사북행으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음은 남행의 과거사를 들여다 볼 때, 크게 기대되는 역사적인 과업이 아닐 수 없다. 그 현장을 직접 참여하고 본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밀려 평양고토에 낙랑부가 생긴 것은 남천의 한 예로 볼 수 있고, 고구려가 만주의 집안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것도 남천에 해당된다. 이는 전략적인 남천이었다. 고구려로부터 갈라져 나와 남행한 백제가 수도를 한성에서 공주로, 공주에서 부여로 옮긴 것도 모두 남천이다. 이는 국난에 닥쳐서 국가사직을 보호하고 미래를 기약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수도의 이전에 해당된다. 이에 비해 신라는 끈질기게 북행을 시도하였다. 북행의 결과는 반도의 통일이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웠다. 최근에 이르러 수도 서울을 다시 옛날의 백제 남행 천도지였던 공주부근으로 옮긴다는 국가시책이 발표되기에 이르렀음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에서 보았듯이, 남행만으로는 우리 민족의 생존을 보장받기도 어렵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우기는 더욱 어렵다. 뒤로 물러나서는 살길이 더더욱 막막하다. 북행이거나 해양에의 도전만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정치권에서는 단기안적, 정쟁적인 시각을 버리고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을 곰곰이 되씹어야 할 것이다. 개성공단의 예처럼 경제를 통한 북행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이때에, 이런 역사적인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남천을 기도한다면, 훗날의 역사가들이 무어라고 할까? /이종선 경기도박물관 관장
오피니언
경기일보
2004-07-2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