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유한한 삶이 주는 성찰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종종 착각을 하곤 한다. 20대 청년 대학생들에게 ‘나의 생은 앞으로 얼마나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대부분 40년 혹은 60년이라고 답한다. 평균 수명에 따라 그렇게 셈했을 것이다. 최근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수명이 2030년도에는 81.9세에 이르러 세계 최고 수준의 장수국가가 된다고 한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80여년이 더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역사적으로 장수를 누린 사람은 있었지만,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영생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고, 인생은 삼세판이 가능한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고 착각하고 시간을 허비한다.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는 도중,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17세 이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요.’라는 것으로 이어질 때, 나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천원짜리 지폐에 새겨져 있는 율곡은 16세 때 인생의 큰 역경을 겪는다. 스승이자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가 홀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인생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진 그는 삼년상을 마친 이후, 머리를 깎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경공부에 몰두했다. 꼬박 1년 동안 죽음이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뜻한 바가 있어 산을 내려와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오죽헌에 돌아온 후 제일 처음 한 일은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인 ‘자경문’을 지은 것이다. 모두 11조목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문장이 뜻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뜻을 크게 가지고 성인을 본받되,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나머지 단추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잘못 꿰면 단추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맹자는 말한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귀한 것이 있지만,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人人有貴於己者, 弗思耳).” 경제적인 부유함과 사회적인 높은 지위가 자신을 귀하게 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내면의 선한 양심을 드러내며 각자 처한 위치에서 자기답게 살았을 때, 비로소 가치롭고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유한한 삶에 대한 자각은 자신이 가장 가치롭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으로 이끈다. 이제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절실히 물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정해지면 주저말고 뚜벅뚜벅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그리운 백야

하얀 밤이라니. 백야(白夜)는 낭만적 매혹이었다. 우리와는 거리가 먼 북반구의 현상이기 때문인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백야들은 낯섦의 유혹으로 마음을 더 당겼다. 밝은 밤이라는 백야의 환상이 빙하 이상의 동경을 품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아주 먼 곳의 매력이라 벼르던 백야 체험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맞아 보니 백야는 훤한 저녁이었다. ‘위도 48.55° 이상의 지역에서 여름 동안 밤하늘이 밝아지는 현상’이라는 백야도 곳에 따라 다른 게다. 대낮처럼 태양이 떠 있어 ‘한밤의 태양’이라 불리는 지역이 아니면 대부분 밝은 저녁의 지속이다. 저녁 10시와 새벽 3시의 하늘빛이 거의 같다. 가장 어두울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도 불빛 없는 뜰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똥벌레 불빛으로 공부했다는 옛날 선비의 형설지공(螢雪之功)도 아니고, 백야 설렘에 잠은 계속 밀려났다. 오 백야의 난간에서 책을 읽다니, 불면이 대책 없이 깊어져 여정은 힘들었지만. 무릇 여행은 낯선 것을 만나러 가는 길. 낯선 곳에서는 낯선 생각들이 낯선 감각을 깨워낸다. 백야도 먼 곳의 낯선 매혹으로 우리를 낯선 시공간에 세운다. 6월 하지부터 8월 중순까지의 신비로운 백야. 처음 맞은 사람도 그러한데, 현지인들은 밤새 마시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랴. 8시 이후 마트의 주류 판매 금지에 끄덕이게 된다. 매년 백야를 다양한 축제로 즐기는 문화도 당연한 인생의 찬가라 할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오래된 전언처럼.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백야 아닌 열대야로 고문 중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별의 기후 차별 속에서 곳곳의 산불 비명도 터져 나온다. 빙하가 가속도로 녹는 환경오염에 맞물려 폭염이 점점 거세질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몇 년 간은 폭염이 드셀 전망이라니, 그야말로 세계적 대책과 실천이 시급한 때다. 독하게 길어지는 열대야에 우리도 비책을 마련해야 뜨거운 여름을 웬만큼 넘길 것이다. 하여 낮일 대신 밤일을 늘려볼까.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하며 기나긴 열대야를 노려본다. 이 또한 지금 이 곳에서의 백야라고, 새롭게 사귀어볼 수 있을지 마음을 내어본다. 밤새 뒤척거리다 보면 조금 서늘해지는 새벽 공기의 맛. 그런데 새소리, 매미소리, 벌레소리가 또 뜨겁게 달라붙는다. 낭만적이던 매미소리마저 그악스러워지니 자연의 소리들이 열대야의 공범 같다. 모두 피해자려니 하지만.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소음의 열기가 들이치며 서서히 달궈진다. 아 팔팔 끓는 8월이 온 게다.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찬물 끼얹으며 열을 식혀본다. 백야 며칠 즐기다 와 열대야에 늘어지다 들러보니, 코앞에 입추가 있다. 곧 서늘한 바람 데리고 처서도 준비할 터, 다시 오늘의 자세를 가다듬는 한여름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에센셜리즘과 화광동진

중국의 수필가 린위탕(林語堂)은 “삶의 지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에센셜리즘(Essentialism ; 본질주의)을 좇아 필요한 때 필요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에센셜리스트(essentialist ; 본질주의자)가 되라는 말이다. 최근에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었다. 『에센셜리즘(Essentialism)』(그렉 메커운, 김원호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1.)이다. 요약하면 잡다하게 이 일 저 일 손대거나 관심 두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나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에센셜리즘이란 말의 원래 뜻은 본질주의로, 사물의 핵심 의미를 추구하는 걸 말한다. 이를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행동에 적용했다. 이 일 저 일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을 쏟거나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남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행동을 살펴서 필요 없는 건 버리고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일 하나를 선택해서 성취하는 데 힘을 쏟으라고 충고하는 책이다. 막 소설가로 등단해 활동하던 젊은 시절,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으로부터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쓴 글 한 폭을 받았다. 김동리 선생님은 세배를 오거나 방문하는 사람 가운데 특별히 눈길 가는 분의 이름을 기록해 두고(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이름을 적는다) 마음 내킬 때 휘호를 준비해 건네주는 걸로 유명하다. 순서대로 주는 게 아니라 건너뛰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장부에 기록은 됐어도 언제 글을 받을지 모른 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미리 써 달라고 채근해도 소용없다. 그냥 기다린다. 짧게는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길게는 몇 년이 지나도 못 받는 분도 있다. ‘화광동진’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빛을 감추고 먼지 같은 하찮은 일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재주를 뽐내지 말고 겸손하게 세상과 잘 어울리라는 말이다. 『에센셜리즘』을 읽다가 불현듯 이 ‘화광동진’이 생각나서 옷깃을 여몄다. 내 재주만 믿고 이 일 저 일 붙잡다가 혹여 놓친 건 없는지 누군가에게 내가 잘났다고 으스댄 일은 없는지 나 혼자 다 해결할 줄 안다고 세상일을 간섭하며 나서지는 않았는지 잠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살폈다. 이 생각 끝에 나를 더 단단히 다잡은 게 바로 ‘화광동진’이다. 노자는 ‘무위이화(無爲而化)’, 즉 무엇을 억지로 고치고 다듬지 말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라고 했다. 이 역시 화광동진이다. ‘나’를 주체로 세상을 끌고 가지 말고 객체로 세상과 어울려야 나도 세상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참 행복을 누리며 사는 ‘무위이화’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공부, 기쁘지 아니한가!

‘현량자고(懸梁刺股)’라는 말이 있다. 자는 시간도 아까워 끈으로 머리를 묶어 들보에 매달았다는 현량의 고사와 잠이 오면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가며 공부했다는 소진의 고사가 결합된 말이다. 공부에 빠져 공부를 위한 삶을 살았던 사례는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학생들을 잠 못들게 하며 영향을 주고 있다. 빠르면 초등학교 입학하는 순간부터 옆 눈 가린 경주마처럼 입시의 긴 터널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대학 가면 해결될 줄 알았던 공부 열풍은 스펙 쌓기로 지속되고, 취업 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으로 계속된다. 수단으로 전락된 공부 때문인지, 최근 배움의 전당이 흔들리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도쿄대가 찻잔과 같은 전문적 바보를 양산해왔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 ‘공부(工夫)’의 ‘공(工)’은 땅을 다질 때 쓰던 돌 절굿공이를 형상하고 있다. 절굿공이로 땅을 다지듯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를 의미하는 ‘학습’도 논어 첫 문장에서 기인한다. ‘배우고 부단히 익혀라[學而時習]’. ‘배움[學]’은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부단히 힘쓰는 ‘익힘[習]’의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 자율적인 의지를 발현해 선현들의 지혜를 학습하는 것이 우선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배움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爲己之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의 시선이나 외부 기준에 부합하는 공부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는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퇴계는 깊은 산 무성한 숲에 홀로 피어난 난초가 남에게 향기를 자랑하기 위해 꽃 피우지 않듯이, ‘천성(天性)’ 그대로 꽃을 피우고 향내를 풍기는 자기 함양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안개꽃은 안개꽃대로 묵묵히 자기 모습을 꽃피워야 아름답다. 스티브 잡스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다움’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에 나를 맞추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울려오는 직관에 귀 기울이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는 공부의 결과가 기쁨(不亦說乎)이라고 강조한다. 배움의 과정이 고통스럽다면, 지금 하는 공부가 남을 위한 공부인지 나를 위한 공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다움을 찾아가는 공부는 결과의 좋고 나쁨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기쁨을 줄 수 있다. 나를 위한 공부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도 의미 있다. 즐거움은 덤이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마침내

‘마침내’ 이 말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면?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본 소회와 영상이 겹칠 것이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긴 그 영화. 영화제 동안 현지 평점도 최고라서 부풀었던 <헤어질 결심>의 황금종려상 기대는 감독상으로 서운함을 달래야 했다. 마침내는 영화에서 한국어를 잘 못하는 중국동포(탕웨이)가 쓴 말이다. 그 단어가 새삼 이색적으로 도드라지게 닿은 것은 대사도 영화의 미장센처럼 만드는 감독의 힘이겠다. 마침내가 ‘결국, 끝내, 기어코, 급기야, 필경, 드디어’ 같은 유의어보다 일상어로 덜 쓰이는 까닭일 수도 있다. 아무튼 마침내는 ‘마지막에 이르러’를 강조하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고 잔상이 오래 남는다. ‘어떤 경과가 있은 후 마지막에 이르러’라는 말뜻이야 다른 유의어에도 비슷이 담겼지만. 다 알다시피 영화는 문학, 미술, 음악 등을 영상에 녹여 담는 종합예술이다. 대략 두 시간에 예술성은 물론 세계인을 휘어잡을 대중성까지 담보하는 장르적 융합으로 작품을 빛낸다. 한때는 세계 영화판을 쥐락펴락한 양대 산맥으로 미국영화의 대중성과 유럽영화의 작품성을 대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칸영화제에서 보듯, 한국영화도 세계의 주목이 집중될 만큼 비약적 발전과 위상을 갖췄다. 그런 중에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은 큰 성취로 지면을 즐겁게 달궜다.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 후이지만 한국영화사에 남을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영화를 찾아보며 아쉽게 여겨진 대사도 달라졌다. 철학과 문학을 녹여 담은 명대사는 명장면과 함께 오래 회자되며 영화의 위상을 높여왔다. 그 전에는 나만의 허전함이었는지 모르지만, 곱씹을 대사로 거듭 호명되는 영화들에 한국영화는 별로 많지 않았다. 요즘은 대사의 매력을 다시 쓰며 활용하는 눈 높은 관객들의 호응과 향유를 받는 게 많아졌지만 말이다. 책 속에 잠자던 단어나 문장이 영화에 나오면 그것을 다시 즐기며 한국어의 영역을 넓히는 맛이 좋다. 〈헤어질 결심〉에서도 여러 명대사가 운위되는데 ‘마침내’ 또한 묘한 매력으로 되새김 중이다. 마침내, 기다린 영화에 ‘N차 관람’ 관객도 늘고 있다고 한다. 대중적 흡인력은 적은 편이라도 찐 관객의 여러 번 관람이 영화를 한층 풍요롭게 한다. 영화도 관객이 같이 키워가는 것, 보는 사람이 늘수록 더 새롭고 다양한 영화를 만날 기회도 많아진다. 그렇듯 마침내 한국영화를 즐겨 찾는 외국인이 확연히 늘기까지 영화계는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바쳤을지. 그래서 마침내보다 계속 더! 널리 세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연일 폭염이라 마침내 더위가 물러간다는 소식이 간절하다. 마침내 뭔가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지독한 폭염만이라도 물러가주면 좋겠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더닝 크루거 효과

여러 사람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십중팔구 정치 또는 특정 정치인이 화제로 올라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두 번 놀란다. 사람들이 언제 이렇게 모두 정치 전문가가 됐는가 놀라고, 이러다 혹시 국민 한 사람당 나라 하나씩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다가 놀란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일까 아닐까 궁금해한 적 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때까지도 선진국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문화의 질량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경제지표가 기준이라는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좀 의외다 싶었다. 그런데 사실 잘못 이해한 게 아니었다. 선진국을 결정하는 경제지표에는 눈에 보이진 않으나 문화가 짝으로 붙어 다닌다. 우리는 재산이 많으면 부자라고 하나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는 번 돈만큼 문화를 이해하는 마음을 함께 쌓아야 부자라고 하며 사회로부터 존경받는다. 돈이 많다고 해서 모두 부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IMF가 발표한 GDP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가 세계 10위(2021년 기준)다. 엄청난 부자 나라다. 그렇다면 문화를 이해하는 질량도 세계 10위일까? 1999년 코넬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 데이비드 더닝과 그의 제자 저스틴 크루거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해 ‘무능한 사람의 착오는 자신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되고 유능한 사람의 착오는 타인을 오해하는 데서 생긴다’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이를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고 한다. 쉽게 설명하면 빈 깡통이 소리가 더 크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책을 여러 권 읽은 사람보다 한 권 읽은 사람이 더 큰소리치며 잘 사는 세상을 보고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말한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앞에 나서지 않고, 조금 아는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주름잡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원미란 작가의 단편소설 『고상한 소스의 세계』를 읽어보면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대강 가늠된다. 우리는 ‘고상한 소스’를 먹으며 그게 음식의 참맛이라 믿는다. 이 고상한 소스에 길들이면 음식이 된 원재료는 까마득히 잊는다. 그래서 너도나도 고상한 소스로 자신을 감추는 일에 귀재가 되려고 한다. 양념 잘 치는 사람이 주인 행세하는 사회, 이 또한 더닝 크루거 효과가 만든 현상이다. ‘고상한 소스의 맛’을 걷어내고 음식 원재료의 맛을 찾아내는 힘이 문화에 있다. 아무리 현란한 소스로 포장하더라도 음식을 만든 엄마의 마음을 찾아낼 수 있을 때 ‘엄마의 손맛’을 제대로 안다. 이것이 문화의 힘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여전히 유효한 미래사회 보편가치 효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한국의 효사상과 가족제도 등의 설명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한국의 효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며 서양에도 효 문화를 전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한국이 지닌 빼어난 문화중 하나로 손꼽히며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기능하였던 효가 어찌 된 일인지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겐 고리타분한 전통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효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통사회에서 효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효라는 도덕관념이 가부장적 상하 지배를 유지하는 규범으로 기능하기도 했고, 효의 본질인 진정성 있는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포장된 효를 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극단적인 방식으로 효를 실천한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병을 치료한 사례를 최고 등급의 효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세종은 단지(斷指) 등은 비록 정도에 합하지 않지만,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절실하므로, 취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생사의 기로에 선 부모의 병을 낳게 할 수만 있다면 신체도 아끼지 않겠다는 자식의 마음이 가상해 상소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자, 이런 효의 폐단은 선명하게 부각됐다. 다산은 당시 효행 실천의 문제를 지적하며, 부모를 이용하여 명예를 얻거나, 부역을 피하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단지 등의 사례가 역사 사료에 나오지 않는 것도, 절실한 마음을 표현한 효행이기는 하지만, 훗날 세상 사람들을 잘못 이끌까 염려돼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 본 것이다. 한자의 ‘효(孝)’는 ‘늙을 노(老)’와 ‘아들 자(子)’가 결합된 회의자로, 자식이 노인을 등에 업고 봉양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다만 봉양의 행위에는 진정성 있는 공경의 마음을 담고 있어야 한다. 『논어』에서는 “개와 말도 모두 먹여 길러줄 수 있는데,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부모님을 봉양하는 행위에 공경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으면 먹이주며 기르는 동물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부모자식 사이는 천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감정’의 온도가 따뜻하다. 설령 관계가 소원해져 감정의 온도가 식었다할지라도, 조금만 자극하면 본래 마음의 따뜻함은 금세 회복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공경의 감정을 행동 동력으로 삼아,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당연히 봉양의 방식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디지털혁명이 생활문화로 스며든 이후, 해외에 있건 지방에 있건, 언제든 SNS로 부모님과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고, 온라인 배송을 통해 손쉽게 마음을 전할 수도 있다. 또한 봉양에는 물질적 봉양을 넘어 부모님 뜻을 존중하는 ‘양지’의 의미 역시 담고 있다. 부모님이 바라는 것을 아느냐고 대학생들에게 물으면, 대학 잘 가면, 학점 잘 받으면, 취직 잘하면 부모님이 기뻐할 것이라 대답하곤 한다. 『맹자』에서는 “자신을 돌아보아 참되지 않으면 부모를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내면에서 드러나는 따뜻한 공경의 감정을 부모님께 전하고,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사욕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바른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 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의 본질이자 이상이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빼앗긴 그늘을 그리며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푸라타나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김현승, 「푸라타나스」) 이 시를 뇌던 시절, 길가나 교정에는 플라타너스가 많았다. 넓적한 잎으로 그늘을 크게 지으며 땡볕을 가려준 나무였다. 시가 깊이 닿아서인지, 버즘나무보다 플라타너스가 더 정겹게 입에 붙었다. 유독 크고 너른 잎사귀들로 제 풍치를 우람하게 만드는 플라타너스. 공해에 강하고 빨리 자라며 그늘까지 넓어서 한때는 가로수 나무로 불릴 만큼 인기도 높았다. 그런 플라타너스 풍경으로 소문난 길은 영화 출연도 했건만, 어느새 많이 사라졌다. 알레르기 유발이나 꽃나무를 선호하는 정서에서도 밀렸지 싶다. 밀려난 플라타너스들은 어디서 푸른 머리를 적시고 있을까. 그런 그리움에 돌아보니 와중에도 남아 있는 플라타너스 우듬지가 민머리처럼 휑하다. 새 가지들이 삐죽삐죽 겨우 잎을 내미는 모양새다. 큰 잎사귀와 무성했던 가지들을 거의 다 쳐냈으니 나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꼴이 된 것이다. 그동안 지나친 가지치기에 대한 지적이 있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마구 잘라낸 결과다. 가로수가 상가 간판을 가리거나 알레르기를 유발한다는 민원에 따른 조치라면, 공원의 나무들은 왜 그리 심하게 쳐냈는지. 일부러 찾던 그늘이 좋은 길. 나무들 비명이 들리는 듯해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지나가기도 편치 않다. 지친 걸음을 쉬고 책을 읽곤 하던 나무 그늘 아래 벤치마저 빼앗긴 셈이다. 도대체 가지치기의 기준은 어떻게 마련하고 행하는 것인지 의아하다. 가지치기로 흉해진 가로수 모습을 공원에서도 마주치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공원의 나무는 과실수나 관상용 정원수와는 역할이 다르지 않은가. 앙상해진 나무들이 그럼에도 새 잎을 열심히 펼쳐내고 있다. 잘린 팔을 힘껏 내어 뻗는 모습이 딱하다. 걷는 사람들은 땡볕 가려줄 푸른 그늘 빼앗긴 나무 밑을 얼른 지나간다. 그늘에 기대어 쉬던 걸음을 재우치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갈수록 차가 늘면서 인도가 차도에 먹히는 것도 억울한데 가로수 그늘까지 앗기다니, 이건 시민의 행복권 침해라고 분개하는 마음도 커진다. 걷고 싶은 도시, 아름다운 도시의 길에는 가로수도 큰 역할을 하건만 너무 쉽게 쳐내기를 감행하니 말이다. 그늘의 힘이 나날이 크게 닿는 철이다. 그늘막 설치도 좋은 배려지만 가로수 그늘 키우기가 더 절실하다. 알다시피 나무는 이산화탄소 흡수에 따른 공기 청소는 물론 대기 온도 낮추는 큰일을 말없이 수행한다. 내년에도 흉해진 가로수를 보지 않으려면 가지치기의 기준과 비율을 정해야 할 것이다. 올해 애써 자란 나뭇가지들이 내년 여름에는 푸른 그늘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니체의 ‘아모르파티’와 노자의 ‘거피취차’

춘추시대 사상가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문을 연 노자(老子)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道]을 제시했다. 노자 사상을 정리한 책이 ‘도덕경’이며 그 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억지로 고치고 다듬어 무엇을 만들지 말고 흐르는 물처럼 자연에 동화해 살아가라는 것이다. 쉬운 듯하나 해석하기도 행동으로 옮기기도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내놓는 노자 사상의 해석 또한 분분하다. 무위(無爲)는 유위(有爲)의 반대 개념이다. 대부분 세상 사람들은 유위에서 살아간다. 유위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의지하는 것, 즉 인연에 따라 쌓은 물질에 의해 능력을 만드는 걸 일컫는다. 지식이든 재물이든 이를 쌓아가는 일이 유위에서 일어난다. 노자는 이 유위를 버리고 반대쪽에 있는 무위를 선택하라고 했다.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를 버리고 비어 있는 공간인 무위에 서라는 거다. 그래서 노자는 알기도 따르기도 어렵다. ‘도덕경’ 5천자 중에서 딱 잡히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이것만 제대로 발견하면 노자의 길에 들어선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와 ‘거피취차(去彼取此)’가 그것이다. ‘무위이무불위’는 무위에서 뭘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거피취차’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잡으라는 뜻이다. 이 두 말은 서로 일맥상통한다. 무위는 유위와 달리 앎이 없는 공간이다.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오직 지금 내가 원하고 생각하는 대로 길을 만들며 행동하는 공간이다. ‘거피취차’를 다산 정약용은 ‘이상을 버리고 일상에 몰두하라’라고 해석했다. 머릿속에 그림 그리지 말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붙들라는 의미다. 이 두 명제를 달리 풀어보면 학습된 사고에서 벗어나 나의 눈으로 나를 발견하라는 의미다. 낯설지만 그게 노자가 말한 ‘길’이며 내가 가야 하는 길이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바꾸지 않으면 나는 그 길로만 가게 된다. 누구나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하지만 돌아서면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다. 익숙한 길을 놓지 못해서다. 방향을 바꾸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로 가야 인생이 바뀐다. 이게 ‘거피취차’다. ‘무위이무불위’와 ‘거피취차’는 모두 같은 길 위에서 만난다. 니체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한 ‘아모르 파티(amor fati)’도 호라티우스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도 결국 같은 길 위에 있다. 쥘 들뢰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 역시 그렇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제대로 겸손하기

요즘 청년들이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자기 PR이 취업의 비결이라 입을 모은다. 물건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듯, 경쟁시대에 자신을 포장하여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한결 같이 지혜로운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하는 덕목으로 겸손을 강조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어쩜 자기 자신을 낮추거나 자신의 좋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연상하게 하는 겸손은 현대사회에서 점차 설자리를 잃어 간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겸손은 무엇일까? 제대로 겸손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주역』에서는 겸손을 ‘地中有山(지중유산)’ 이라하여, 땅 속에 거대한 산이 박혀 있는 모습을 상징한다. 땅 위에는 웅장한 산도 있고, 밋밋한 평지도 있고, 움푹 들어간 구덩이도 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병풍처럼 우뚝 솟은 설악산 울산바위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활짝 펴게 하고 감동을 안겨준다. 다만 대부분의 우리는 되어가는 사람이기에, 처음부터 높은 수준을 기대하기 어렵다. 만일 평지처럼 평범한 자기 모습이 작아 보여,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조급한 마음을 가진다면, 관심은 저절로 밖으로 항하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장마에 내리는 장대비는 순식간에 세상을 물로 채우지만, 마르는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빠르다. 남의 시선을 위해 화려하게 포장한 모습은 금세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 겸손한 자는 세상에 알려진 명성이 실제 모습보다 지나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관심의 방향을 안으로 틀어 자신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는 그대로 모습이 드러나기를 유념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부족 역시 직시하여 미흡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평지는 그 위에 높은 산도 없고 밋밋하여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속에 거대한 산이 박혀 있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자신의 부족을 고쳐나가 내면을 꽉 채운 겸손한 사람은 수준의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모두 감동을 줄 수 있다. 겸손의 결과를 『주역』에서는 ‘君子有終(군자유종)’이라 하여 결국 자기 모습을 이루어 유종의 미를 거두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귀한 존재로 성장하므로, 형통하다고 풀이한다. 실제보다 지나쳐 보여 지는 것을 경계하고,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 지게 하여, 자신의 부족을 채워 나가는 것이 제대로 겸손 하는 방법이다. 근본에 힘쓰면서 자기답게 살아, 작게는 자신에게 크게는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비결, 매 순간 겸손을 새기면서 제대로 겸손을 실천하는 데서 출발한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몽니와 추앙

몽니와 추앙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다만 묻혀 있던 단어를 누군가 되살려 쓴 뒤 활용되는 점이 닮았다. 몽니는 어느 정치인이 쓰며 존재감을 만천하에 새로 드러낸 고유어다. 추앙은 최근 TV드라마 작가가 새롭게 살려 쓴 덕에 대중의 관심을 받는 한자어다. 평소 잘 쓰지 않던 말들의 먼지를 털어낸 언어 촉에 따라 일상으로 확실하게 등판한 것이다. 몽니보다야 추앙이 당연히 좋다. 견줄 표현도 아니지만,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이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의 급을 따르겠는가. 아무튼 요즘 떠오른 추앙만 봐도 책 속에만 잠자다 불려나와 재활용되는 말로 레트로 같은 유행을 타고 있다. 청춘의 고단한 현실에 겹치는 의미까지 덧대며 젊은이들이 즐겨 쓰니 외연의 확장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판을 돌아보니 언어를 오늘의 사용법에 어떻게 더 어울리게 쓸지, 날마다 쓰는 언어의 면면이 새삼 크게 닿는다. 몽니는 현실에서 안 만나고 싶은 말이다. 추앙은 현실과 좀 동떨어진 말이다. 그런 몽니와 추앙이 실은 현실에도 자주 출몰한다. 정치의 계절이면 몽니며 추앙의 어금니가 더 드러났으니 귀 씻고 눈 씻고 외면할 수 있다. 그런 정치판의 말판을 떠나 우리 일상을 봐도 닥치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비일비재한 몽니를 치우고 추앙을 다시 보면 새삼 깨우는 게 많다. 말이란 많이 쓸수록 본뜻보다 풍부해지게 마련이지만, 요즘 만나는 추앙은 일종의 즐거운 발견이다. 혹 “날 추앙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 당혹감이 크겠지만 그냥 뜬금없다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까. 아무튼 위인이나 부모(드물지만 부모를 존경한다는 사람도 있다) 추앙에는 끄덕이지만, 주변의 장삼이사(張三李四) 추앙은 거의 없으니 갸우뚱하겠다. 그런데 재고할 것은 그 말을 건넨 상대의 상태다. 이런저런 피해로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을 찾고자 던진 말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터진 청이라면 추앙의 마음을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마음을 받아 다시 살아갈 힘이 솟는다면. 그렇게 보면 추앙은 어떤 대상에 바치는 순정한 마음이다. 예컨대 시나 그림이나 음악 같은 예술에 바치는 추앙도 있다. 그보다 이해와 배려를 담은 존중의 자세라면 일상 속의 다양한 추앙도 가능하겠다. 아부와는 다른 진정한 마음의 높임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상에는 높임말이 지나치게 넘치는데 높임의 마음은 인색하고 적은 느낌이다. 그런 판에서 몽니를 줄이고 추앙을 늘린다면 기울어진 마음의 평형도 잡고 세상 골목까지 환해질 듯하다. 커튼을 열며 오늘의 추앙을 찾아본다. 오늘의 커피를 음미하는 소소한 즐거움처럼. 추앙이 사랑의 다른 형태로 곁에 선다. 오늘의 길에서도 새삼 추앙하고 싶은 풀꽃들을 만나려니.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메멘토 모리

아침 뉴스를 보다가 문득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Cus, 1904~1989)의 작품「 기억의 지속 (The Persisten ce of Memory)」이 생각났다. 중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달리의 대표 작품이다. 카탈루냐의 햇볕이 뜨겁게 이글거리던 날 바르셀로나에서 열차를 타고 피게레스에 있는 달리미술관을 찾아가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지나간 기억을 끌고 와서 흐르는 시간을 변형하려는 사람들, 이 남의 기억을 따라 하면서 거기에 자기 푯대를 세우려는 사람들, ‘망량문영(罔兩問景)’ 고사처럼 그림자의 그림자를 좇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무의식의 가상공간에서 자기 세상을 만들려는,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 「기억의 지속」을 보는 듯하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기억의 지속」은 달리가 28살이던 1931년에 그린 크기가 33×24cm인 소품이다. 여명인지 일몰인지 모를 애매한 시각이 수평선에 걸린 사막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모두 4개의 시계가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호박(琥珀)처럼 생긴 시계다. 시계 자판에 개미들이 득시글거리기는 하나 그나마도 이 시계만 제대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나머지 3개는 곧 흘러내릴 듯이 흐물거리며 축 늘어졌다. 그중 하나는 죽은 나뭇가지에, 하나는 테이블 모서리에, 나머지 하나는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살점 덩이처럼 이상하게 변형된 사람의 얼굴 위에 걸쳐져 있다. 이 그림들은 무의식의 공간에 흩어져 있는 각각의 기억들이다. 시계(인간의 삶, 또는 기억)가 녹아 늘어지든 멀쩡하든 시간은 계속 흐르며, 흐르는 이 시간 위에 영원한 건 없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죽음이다. 개미 떼가 오글거리는 호박처럼 생긴 시계에서 그 극명함을 본다. 호박은 보석이다. 보석 같은 삶에도 개미가 득시글거린다. 어릴 때 본 벌레와 박쥐의 사체에 달려들던 개미 떼의 기억을 달리가 여기에 옮겨놓은 것이다. 테이블에 걸쳐져 흘러내리는 시계 위에도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샤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는 듯 외로이 서 있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빨래처럼 걸린 시계, 이상하게 변형된 얼굴에서 녹아내리는 시계, 이 모두 흐르는 시간 위에 옮겨놓은 기억들이다. 이 변형된 얼굴에는 입이 아닌 코에 혀가 달렸다. 맛난 냄새를 맡던 코와 맛난 음식을 먹던 혀는 한통속이라는 뜻일까. 강렬한 속눈썹이 붙은 지그시 감은 눈은 무의식의 세계, 꿈꾸는 현상을 표현한다. 달리의 작품 「기억의 지속」은 자기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잘난 사람 큰소리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 앞에 겸손하라’ 외친다. 흐르는 시간 위에 영원한 건 없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화 다스리는 근본적인 방법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분노의 감정이 이는 상태를 ‘화난다’고 한다. 불처럼 뜨거운 분함이 일어나 열이 나기 때문에 ‘불 화(火)’자를 쓴 것이다. 분노가 사회에 만연해서인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킹 받네’라는 신조어가 유행한다고 한다. ‘열 받다’에 킹(KING)을 붙여 극도로 화난 감정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화는 없을 수 없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부정한 모습을 보고 화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다만 마음에 쌓아 두거나 극단적인 표출은 개인적 화병과 사회적 범죄로 이어진다. 다스리지 않는 화(火)는 화(禍)를 불러온다. 고전 <논어>에서는 ‘분사난(忿思難)’이라 하여, 화가 나더라도 마주하게 될 곤란한 상황을 생각하며 절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못 표현하거나 지나치게 드러난 화는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 사소하게 시작된 다툼에서 화를 절제하지 못해 씻을 수 없는 결과를 맛본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다만 내키는 대로 화를 내어 닥칠 곤란 때문에 화를 다스리는 것은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다. 공자는 배움을 좋아한 안연이 ‘화를 옮기지 않았다(不遷怒)’고 극찬한다. 며칠 전에 났던 화를 시간을 달리하며 지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에게 났던 화를 대상을 달리하며 을에게 옮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의 원인은 마주한 대상에 있지, 자기 마음에 있지 않다. 자기 마음에 남아 있는 화에서 화가 옮겨지고 있다면, 대상과 무관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남아 있는 화를 다스려야 적절하고 상식적으로 화를 낼 수 있다. 화가 나서 열이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우선 화를 표출한 뒤 겪게 될 어려움을 생각하며 화를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화난 감정이 지속돼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고 있다면 화난 감정에서 잠시 떨어져 화의 원인이 현재 마주한 대상에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화에 있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화가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화를 다스리며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수양의 노력이 필요하다. 맹자는 잃어버린 닭과 개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자신의 잃어버린 본심 찾을 줄 모른다고 비판한다. 거울을 닦아야 거울 기능을 할 수 있듯, 깨끗한 마음을 회복해야 화병에 걸리지 않고 극단적인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 처음에는 온 힘을 들여 닦아 내야만 때 한 겹을 겨우 벗겨 낼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닦기를 반복하면 힘을 점차 적게 들여도 거울을 맑게 해 지금 바로 여기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화내야 할 때 적절하게 화내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옮기지 않는 비결, 마음 수양에 달려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초록초록 새소리가

나날이 싱그러운 오월이다. 꽃 피고 잎 피고 매일매일 새 춤을 추는 나무들에 취한다. 자연의 순리라는 본성에 따라 본연의 소임을 다하는 나무며 풀들이 미쁘다. 어디선가 미사일이 터져도 우리 주변의 자연은 묵묵히 제 일을 펼쳐 가니 그 위안이 실로 크다. 어두운 뉴스 속에서 초록 아침을 맞으며 감사를 생각한다. 커튼을 여는 순간 한층 명명해진 초록에 눈 씻는 복이 새삼 귀하게 다가온다. 아직은 연두에 가까운 어린 새잎부터 먼저 나와 짙어진 초록 잎사귀까지 다함께 불러주는 오월의 노래다. 무슨 새소리를 초록초록 내는 것만 같아 귀마저 맑아진다. 며칠 전 공원에 옮겨 심은 나무들에게 부디 잘 견디라고 눈인사를 마구 보낸다. 집 안에 섬기고 있는 벵갈고무나무 새잎에도 살랑 입술을 건넨다. 그렇게 초록으로 눈과 귀와 마음을 헹구며 어깨 펴는 아침이 더없이 오붓하다. 그러고 보니 초록에는 육친 같은 느낌이 있다. 산 아래 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늘 두르고 살아온 산빛 때문일까. 시멘트 숲에 둘러싸였던 한때는 숨이 턱턱 막혔다. 방 하나라도 온전히 누리고자 독립했는데, 창을 열면 이웃의 시멘트벽이 눈앞을 가로막곤 했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집 앞의 초록 인사는 얼마나 큰 호강인지. 그때는 그랬다고, 30년 전만 해도 다세대 주택가는 녹지가 아주 적었다. 지금은 쌈지공원이나 도로 꽃밭을 곳곳에 만들며 도시 미관도 많이 갖췄지만.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으면 조경이니 도시 디자인에 신경 쓴다더니 세련된 외모 뽐내는 건물 사이에도 초록이 많이 늘었다. 그럼에도 더 많은 나무, 더 푸른 숲을 기대한다. 땡볕 아래 걷지 않도록 그늘 넓은 가로수가 고루 갖춰지길 고대한다. 나무그늘 좋은 길은 걷기 편하고 맑은 공기도 그만이지만 도시 경관을 수려하게 만든다. 매연과 간판과 요란한 불빛에 지친 눈의 피로 씻어주는 데도 변함없이 일등공신이다. 초록을 희망의 상징으로 삼아온 것도 그렇듯 오래된 자연의 힘에서 연유할 것이다. 되짚어보니, 신록 예찬이 창창했던 예전의 좋은 산문들 또한 덕성 많은 초록에 대한 겸허한 감사였다. 초록의 품을 받들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좋은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마지막 한 줌을 넣고 갈 수는 없을까. 수목장도 점점 어려워지는 판에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전혀 불가능한 바람일는지 톺아보는 것이다. 더 널리 초록초록 뿜어 펼치라고 비는 마음만 나무 밑에 담아두고 싶건만. 나의 나무 하나 지상에 심은 양 기대서는 오월 아침, 초록을 흠향하듯 깊이 마셔본다. 초록의 싱싱한 향이 걷는 사람들 발소리를 들어 올린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

시간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심히 오락처럼 시계를 바라본 적 있는가. 없다면 조용할 때 그렇게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면 필자처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지 모른다. 디지털이 아닌 초침·분침·시침이 움직이는 아날로그 시계여야 한다. 종종걸음 하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숨이 막힐 듯한 압박을 느낀다. 겅중겅중 뛰는 분침을 보고 있으면 뭔가에 쫓기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시침을 바라보면 속이 터질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이것이 열심히 일하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현재 ‘나’의 모습이다. 우리는 늘 그렇게 무엇에 쫓기듯 오늘을 살고 있다. 많은 철학자와 선지식인들이 과거와 미래를 잊고 오늘 지금 열심히 살라고 했다. 과거와 미래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래가 없으면 희망이 없고 과거가 없으면 성찰이 없다. 과거와 미래를 버리라는 게 아니라 부질없는 미련(과거)과 욕망(미래)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경고다. 오늘 현재를 충실히 살면 반드시 오고야 마는 내일이 되면 어제의 오늘은 과거가 된다. 또한 반드시 오게 되는 내일은 오늘의 미래다. 결국 과거와 미래는 ‘오늘’이 만든 결과다. 지난 일에 미련을 두고 다가올 미래를 고민하며 오늘을 소홀하게 하면 과거도 미래도 함께 희생당한다. 오늘이 없는 사람에게는 과거와 미래도 없다.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일 뿐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1989년 톰 슐만(Tom Schulman)의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원작으로 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개봉되자 한동안 이 말이 유행했다. ‘오늘 지금을 즐겨라’는 뜻이다. 명문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 부임한 국어 교사 존 키팅과 제자 6명이 벌이는 이야기로 틀을 깨고 자유로운 이상을 가지라는 교육소설이다. 출세를 위해 틀에 박힌 교육을 받는 제자들에게 키팅이 “카르페 디엠!”하고 외친다. ‘카르페 디엠’이란 말은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시에 처음 등장한다. 『송가(頌歌, Odes)』 제1권 열한 번째 작품 「묻지마라, 아는 것이」의 마지막 구절이 ‘내일은 믿지 마라.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다(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민음사, 2021, p.33). 이 말은 단순히 먹고 즐기자는 게 아니라 오늘(지금)에 충실해야 아름다운 과거도 희망찬 미래도 생긴다는 의미다. 호라티우스는 제1권 세 번째 작품 「그렇게 너를 퀴프로스의」의 마지막 구절에서 ‘인간에게는 못 할 일이 없었다 / 우리는 어리석게도 하늘을 도모하며 / 우리의 범죄로 유피테르가 / 성난 번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민음사, 2021, p.20)라고 했다. 유피테르(Jupiter)는 로마신화의 최고신이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다. 인간의 욕심이 도를 넘으면 신이 벌을 내린다. ‘미래의 창고’를 채우려는 마음이 욕심이다. 카르페 디엠은 미래의 창고를 채우려고 ‘오늘(지금)’을 소홀히 하면 미래의 창고는 텅 빈다는 지혜를 담은 시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금슬 좋은 부부를 위한 관계윤리

결혼식에 가면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 까지’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부부의 연을 맺어 한 평생 함께 하며 가정화목의 근간인 부부 화합을 이루라는 축원의 말일 것이다. 부부 관계는 당사자 둘은 물론, 자식들과 양가 부모형제, 친인척, 지인 등 주변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조화롭게 할 필요가 있다. 고전 『맹자』는 부부 간에 지켜야 할 관계 윤리로 ‘별(別)’을 강조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남자 혹은 장자 중심의 사유가 주류 세계인식으로 등장한 이후, 고전이 사유문화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이론근거로 활용돼 역할의 구별이나 지위의 차별을 뜻하는 의미로 곡해되기도 했다. 본래 한자 ‘별’은 높고 낮음, 귀함과 천함의 가치가 들어 있지 않은 구분과 차이를 의미한다. 부부 사이에서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름이다. 다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자세다. 물론 다름을 존중한다고 각자의 다름을 무한정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부부는 매일 마주보며 생활하는 관계이므로, 나의 다름은 반드시 상대의 다름과 만나게 돼 있고, 때론 충돌한다. 태극기 가운데는 음과 양이 짝하고 있다. 음이 극대화 되거나, 양이 극대화 되더라도, 음과 양은 서로 없을 수 없다. 이것이 ‘대대(待對)’의 관계다. 대대는 나와 너의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돼 서로의 권리를 n분의 1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어느 하나 없을 수 없고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아래, 상황에 맞게 서로 살리는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이상이다. 서로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인륜이 시작인 부부관계는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실천 노력이 필요하다. 배우자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 크고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으면 실망도 커져 관계 회복이 어려워질 수 있다. 상대방이 수준 높은 인격을 갖춘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되어가는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상대방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면 절망하고 감정마저 차가워질 수 있다. 그렇다 보니 그대로 갚아준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선을 긋고 법적인 부부로만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거나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헤치고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어떻든 스스로는 바르게 행동해 자신의 자존을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물론 배우자의 변화 여부는 상대방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다. 객관적 한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 조화로운 부부 관계를 위해 일상에서 진정성 있게 노력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작이 될 수 있다. 거문고와 비파의 서로 다른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감동적인 음악이 되듯, 서로 다른 존재가 인연을 맺어 다름을 존중하고 다름과 조화하며 금슬 좋은 부부 사이를 이루는 비결, ‘별’의 관계 윤리를 실천하는 데서 시작한다. 고재석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개-라는 발견에

개가 무슨 죄인가. ‘개’를 붙인 명칭들 앞에서 했던 생각이다. 왜 개를 함부로 붙여왔을까. 개에게 묻지도 않고 허락도 안 받고. 개에게 미안해, 그런 심정도 있었다. 대상에게 묻지도 않고 마구 붙여온 시의 비유들처럼. 언젠가 〈개 같은 내 인생(1985)〉에 놀라 비디오를 찾아본 적이 있다. 스웨덴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였는데 재개봉(2021) 영어 제목도 ‘My Life as a Dog’다. 이런 제목에서 우리의 정서나 언어 습관이 짚이는 것은 개에 담아온 폄하 때문이다. 표준어사전에서 개-접두사를 찾아보면 예전부터 써온 낮춤의 표현이 다양하게 나온다. ①‘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금 ②‘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꿈. ③‘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망나니. 그런데 개를 왜 낮춤의 접두사로 많이 써왔을까. 더 찾아봐야겠지만 무엇보다 말맛이나 폄하 효과가 큰 데서 비롯됐을 듯하다. 욕에 붙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 개만도 못하다는 표현까지 한결같이 낮춤의 효과로 활용해온 것이다. 아무리 봐도 좋은 뜻의 개-접두사 활용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개-접두사의 남용을 다시 보면 반려견 동반자들이 집단적으로 불만을 제기할 법도 하다. ‘개는 훌륭하다’는 TV프로그램도 있은 판이니. 그럼에도 오랫동안 자리 잡은 말들은 쉬 바뀌지 않는다. 개오동, 개살구, 개복숭아 등에서 보듯 ①의 예는 여전히 많고, ②나 ③의 예도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개를 사전의 풀이를 뒤집는 뜻의 유행어가 획기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개좋아’ ‘개웃겨’처럼 개-접두사를 최고의 표현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 또한 젊은 층 특유의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신조어 놀이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개를 낮춤으로 써온 기성세대는 선뜻 따라 쓰기도 어려운 개-접두사의 대반전이다. 말은 언중(言衆)이 쓰는 대로 시대를 타며 변한다. 최근까지도 수많은 말이 새로 나와서 무슨 뜻이고 활용인지 기울여보면 사라지기 일쑤였다. 새로운 말 사용법을 채 익히기도 전에 새 말이 나오는 등 유행 주기도 짧아졌다. 그런 특성을 유념해도 개-접두사만큼 놀라운 전도가 또 있었을까(좀 다르지만 욕을 부사로 즐긴 예도 있었다). 한편으론 개의 반전에서 통쾌함을 맛본다. 그 착하고 예쁜 개를 왜 비하에 써왔느냐는 항의도 살짝 느껴진다. 늘 쓰는 말에도 사람 중심의 편견이 얼마나 많이 깊이 들어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개좋아! 비슷한 부사(아주, 매우, 무척) 이상의 말맛이 분명 있다. 하지만 개를 안 붙여도 참 좋은 화양연화 같은 나날이다. 새록새록 피는 꽃과 잎만 봐도 눈부실 때, 덩달아 환히 피길 빌며 길을 나선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미네르바의 올빼미

제우스와 사랑을 나눈 메티스가 임신하자 예언자가 “메티스에게서 태어날 아이는 제우스보다 더 지혜롭다”라고 예언한다. 이 예언을 두려워한 제우스는 메티스가 낳은 아이를 얼른 삼켜버렸다. 곧바로 머리가 터질 듯 아파 제우스는 황급히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에게 자신의 머리를 가르라고 명령한다. 머리를 가르자 한 손에 창을, 다른 한 손에 방패를 든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가 뛰쳐나왔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지키는 이여신이 로마 신화에서는 미네르바(Minerva)로 불린다. 지혜를 얻으려면 자신의 머리를 깨는 만큼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이 신화가 보여주고 있다. 지혜와 철학의 여신 미네르바(아테나)는 올빼미로 상징된다. 관념론 철학자 헤겔은 자신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녘이 지나면 날개를 편다”라고 했다. 지혜를 무기로 자신을 성찰하라는 의미다. 일상으로 분주한 낮에는 잊고 지내다가 그 일상을 내려놓는 어둠이 찾아오면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을 되돌아본다. 장자는 지혜(道)를 나비로 상징했다. 장자가 말한 ‘오상아(吾喪我)’가 도추(道樞)며, 이 도추에서 樞(지도리)가 나비 모양으로 생겼다. 吾(오)는 지혜로 뭉친 참 ‘나’며 我(아)는 분주한 일상으로 위장한 허상의 ‘나’다. 허상의 나‘我’를 죽여야 참 나‘吾’를 본다. 밝은 낮에는 볼 수 없으나 그 일상이 사라지는 어둠이 찾아오면 비로소 참 나를 볼 수 있다. 지도리(나비)처럼 양 날개가 균형을 이룰 때 올바른 지혜의 눈(道)을 뜬다. 제우스의 머리를 깨고 나온 미네르바의 올빼미와 닮았다. 인간의 실존 세계를 그린 작품으로 평가받은 손창섭의 단편소설 〈인간동물원초人間動物園抄〉 (‘문학예술’, 1955년 8월호)를 보자. 매일 반복되는 원초적 본능만 존재하는 감방에 갇힌 죄수들의 일상을 그린 소설이다. 이들이 기다리는 유일한 희망은 창살로 막은 감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일이다. 변하지 않은 일상이 반복되는 감방과 달리 푸른 하늘과 매일 변하는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이들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이 창문은 인간에게 좁은 울(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의식 변화로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이며 장자의 나비며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다. 라파엘로가 그린 명작 ‘아테네 학당’ 광장에는 머리를 깨고 나온 미네르바의 올빼미들이 날고 있다. 지혜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지키고 가꾸라는 교훈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통합의 정치 실현, 생각부터 다르고 바르게

대선 이후, 통합의 정치가 화두가 되고 있다. 성별세대지역의 지지율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득표율도 0.73%의 근소한 차이를 드러내어, 역대 대선에서 찾아보기 힘든 혼돈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여든 야든 아쉽게 석패 했기에 위안을 삼거나, 어쨌든 이겼기에 승리에 도취해서는 안 된다. 분열된 국론의 통합 없이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다행히 정치권에서 대결과 정쟁의 태도를 자제하고 상생과 화합의 정치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노력으로 정책과 제도를 보완하여 통합하는 것은 시급하고 필수적인 조치이다. 하지만 거시적인 대안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국민 개개인의 자율적인 인식 전환은 효과가 더디더라도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 쪽과 상대 쪽을 갈라치기 하고, 상대를 배척하는 편협한 자세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이 바로 서야 행동이 일관되게 상식적일 수 있다. 사람들은 악취를 맡으면 코를 막고, 꽃을 보면 좋아한다. 물론 반대 경우도 있다. 예쁜 꽃을 싫다 하고, 나쁜 냄새를 향기롭다 여기는 경우이다. 대상과 만나 생각이 드러나는 순간, 욕심이 개입되어 착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살피고, 옳은 생각을 간직하는 실천이 요구된다. 다만 선현 율곡은 성학집요에서 나쁜 생각이 들더라도 좋은 생각을 하려 하면 선한 생각을 그나마 간직할 수 있지만, 노력해도 잘 안 되는 것이 부념(浮念)의 제거라고 하였다. 부념은 현실과 무관하게 마음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쓸데없는 생각이다.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이를 알아차리고 가볍게 물리친 후 마음을 수습하여 이끌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논어에서는 때가 낀 거울처럼 지금 이 순간을 바로 비추지 못하는 쓸데없는 생각의 결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일에 대해 섣부른 예단을 하는 경우이다. 사사로운 의도도 없고(毋意),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어야 한다(毋必)고 하였다.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럴 것이라는 예단을 하게 되면 점차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마음으로 확장된다. 이런 상태에서 일을 마주하면 자기만의 편견으로 판단하여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일어났던 과거 일에 대해 고착화된 편견을 지니는 경우이다. 고집하는 것도 없고(毋固) 자기에만 갇히는 것도 없어야 한다(毋我)고 하였다. 일이 발생한 후에 마음에 편견이 남아 있으면 점차 자기에만 갇히게 된다. 상대가 변화 했음에도 과거에 머물러 관계맺음을 할 수 없다. 맑은 거울은 마주한 대상을 온전히 비추다 대상이 바뀌면 이전 사물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새로운 대상을 비춘다. 마음도 거울처럼 지금 바로 여기에만 감응하는 것이 본질이다. 겹겹이 쌓인 먼지와 때를 닦아야 거울 기능을 할 수 있듯, 마음에 남아 있는 쓸데없는 편견을 제거하여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주변 존재를 바로 보아 화합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다름과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어 통합의 정치를 이루는 근본적인 시작은 생각부터 다르고 바르게 하는데 달려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손 손 손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랬더니 상대가 꼭 잡더라고. 그 말이 여러 생각을 불렀다. 손잡기가 예사 인사지만 한동안 뜸했던 사이라 돌아뵈는 것이다. 말없이 서로의 밀린 마음을 나눴다는 것일까. 손은 잡는다는 것. 악수가 우리 전통 예법은 아니라도 일상의 인사법이 됐다. 다 알다시피, 손을 내어 마주잡는 악수는 믿음과 우애의 표현이었다. 내 손에는 무기가 없소라고 빈손을 내보이며 맞잡은 게 서양식 악수의 유래라고 하듯. 퀘이커교도의 평등주의, 평화주의 운동에서 악수가 더 퍼졌다는 말도 있다. 칼이 없다는 표시든, 잘 지내자는 표현이든, 손잡기에는 서로의 마음을 함께한 세월이 들어 있다. 그런 악수를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당신의 책을 사들고 온 독자의 사인 요청에는 기꺼이 응하면서도 악수는 웃는 것으로 사양했다. 오만 운운하는 수군거림에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네 전통 인사법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 서양식 악수를 사절하는 철학이었다. 남이 어떻게 보든 상관 않고 소신껏 행동하는 모습은 당시 신선해 보였다. 지금도 전통 인사법만 고수하는지는 확인 못해서 장담할 수 없지만. 악수에 불편한 기억도 따라 나온다. 문인들과 악수할 때 내 손이 거칠게 느껴져 악수를 꺼렸던 기억이다. 글 쓰는 남자들은 손이 왜 그리 부드러운지, 나도 모르게 물러서곤 했다. 강도 높은 쓰기노동이 느껴지는 펜혹의 손도 있었지만, 노동이라곤 모를 여린 손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다 자판을 두드리니 펜혹도 추억의 단어로 사라졌고 손의 느낌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물일 많은 여성들은 거칠어진 손에 나이가 더 드러나니 섬섬옥수도 한때의 관형어로 추억될 뿐이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라는 노랫말도 일깨우듯. 손잡기를 톺아보니 여러 의미가 닿는다. 적조했던 사이의 손잡기도 새롭게 보인다. 짧은 시간의 스침 속에 마음 주고받기? 꼭 맞잡아온 손은 이해해 같은 위로의 표현으로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반대편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인사라도 속이 좀 시끄러울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튼 누군가 손을 잡는 순간의 속마음 되짚기가 손의 중요성을 새삼 깨운다. 세간에는 더 크고 더 복잡한 손잡기가 오가는 중이니 복잡한 손잡기 너머 손절의 안팎도 다시 뵌다. 투표 전과 달라진 속내들이 그들 손에는 더 다양하게 묻어 다닐 것이다. 인간사 속의 손만 바쁘랴. 막 피는 꽃이며 풀이며 나무의 손은 더욱 분주한 철이다. 거기에 꽃다운 손잡기로 세상 골목이 환히 피어나는 모습을 얹어 본다. 그대 소매에 홍매화 향기가 시들기 전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봄빛 피는 공원에도 손을 내어 봄향을 귀하게 받아본다.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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