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영의 그림산책]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신인상주의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쇠라의 대표적인 작품. 이 작품은 쇠라가 2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으로 60점이 넘는 드로잉과 스케치를 통해 그가 얼마나 이 작품에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886년에 열린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 출품하며 알려졌다. 평소에 색채대비, 보색 관계와 고전 작품을 연구해왔던 쇠라는 직감적인 태도로 작업하는 인상주의에 부족함을 느끼고 당시에 개발된 광학 이론과 색채론을 도입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자 했다. 그렇게 등장하게 된 기법이 점묘법이다. 점묘법은 그림을 그릴 때 화폭에 붓질이 아닌 원색의 많은 점으로 형태를 구성하는 기법으로 보색 관계의 점을 찍어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에는 색채가 합쳐져 보이게 했다. 이를 통해서 원색의 순도가 유지되어 강하고 밝은 색채를 느끼게 한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은 점묘법으로 화면을 꼼꼼하게 채웠으며, 원근법과 균형감 있는 구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작품을 보면 프랑스 파리의 센 강 주변에 있는 그랑드 자트 섬에서 여유롭게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는 40여 명의 파리 시민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인물들은 얼어붙은 듯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며 무표정하게 그려져 있어 배경의 밝은 분위기와 상반되는 차가운 느낌을 준다.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은 당시 파리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거나 양산을 쓰고 산책을 즐기고 있다. 화면 전경에는 큰 나무 그늘이 있으며 우측에는 뒷자락이 크게 부푼 치마를 입은 여성이 애완 원숭이를 데리고 남성과 서 있다. 그들 앞에 중산모를 쓰고 그늘에 앉아 있는 남성의 모습은 당시 유행했던 옷차림이다. 인상주의를 새롭게 정립하고 조형의 중요성을 다시 부각시킨 쇠라는 고흐, 고갱 등 당시 화가들뿐 아니라 이후 등장하는 큐비즘이나 추상회화에도 영향을 주며 20세기 회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문영 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섬의 순례’

〈키테라 섬의 순례〉는 ‘페트 갈랑트(우아한 연회)’ 로코코 회화 양식의 창시자이자 18세기 프랑스의 대표 화가 장 앙투안 와토의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작품 제작의 경위와 내력이 알려진 작품이다. 와토는 이 작품으로 당시 미술계를 이끌던 왕립 아카데미에 인정받으며 인기 작가가 되었다. 페트 갈랑트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남녀들이 담소를 나누고 춤추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신화에 따르면 키테라 섬은 비너스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난 뒤 처음 발을 디딘 곳으로 사랑의 여신의 섬이다. 이후 키테라는 사랑의 성지로 의미가 확장되어 이 섬을 순례하면 반드시 반려자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와토는 사랑의 성지인 키테라 섬을 순례하는 젊은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키테라 섬의 순례〉에서 와토는 즐거워하는 연인들을 아름다운 색채와 부드러운 터치로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화면에는 총 8쌍의 남녀와 배와 사공, 큐피드 등 많은 등장인물을 전경의 완만한 언덕에 따라 인물을 배치하였고 화면 좌우 배경의 명암에 차이를 줘 구성을 탄탄하게 했다. 화면의 우측을 보면 나무들 사이에 이곳이 사랑의 섬 키테라임을 알게 해주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비너스 조각상이 있다. 그 앞에는 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남녀가 앉아 있고 바로 옆에는 여성을 일으켜 세워주고 있는 남성이 있다. 그 옆에는 아쉬운 듯 여운이 남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있는 여성이 있고 그 여성의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기는 남성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5쌍의 연인들이 팔짱을 끼거나 기대며 즐거운 표정으로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금빛 배로 향하고 있다. 그들 머리 위로 비너스의 아들인 큐피드들이 순례자들을 축복하며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다. 〈키테라 섬의 순례〉의 섬세하고 우아한 작풍이 로코코 회화의 방향성을 제시하여 로코코 회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3대 천재 예술가로 손꼽히는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으로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바티칸 궁에 있는 교황의 개인 서재이자 정무에 관한 서명을 하는 ‘서명의 방’을 장식한 걸작이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미술의 목표인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이 잘 드러난다. 작품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신의 사상이나 업적에 관한 자세를 취하며 그려져 있는데 이 철학자들 묘사의 재미있는 점은 당시 저명한 예술가나 인사들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은 다빈치의 모습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화면 중앙에는 두 남성이 대화하며 걸어오고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 철학을 대표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좌측이 플라톤으로 자신의 저서를 옆구리에 낀 채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그가 관념 세계를 추구한 것의 은유적 표현이다. 우측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신의 저서를 허벅지에 받치며 지상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자연 세계에 기반을 둔 유물론적 성향을 보인 그의 철학을 대변한다. 플라톤의 좌측에는 소크라테스가 손을 펴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아래 계단에는 디오게네스가 비스듬히 기대고 있으며, 그 앞에는 탁자에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사색을 하며 글을 적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다. 화면의 좌측 하단에 월계관을 쓰고 푸른 옷을 입은 채로 책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에피쿠로스이며, 그의 바로 우측에는 피타고라스가 쭈그려 앉아 책에 몰두하고 있다. 우측 하단에는 허리를 굽혀 컴퍼스를 돌리고 있는 유클리드가 있다. 그 뒤로 천구의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가 있으며 그 옆벽 쪽에 검은 모자를 쓰고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라파엘로 본인이 그려져 있다. 라파엘로는 완벽한 원근법과 세밀하고 선명한 인물묘사, 수평적 구조로 수많은 인물을 균형감 있게 배치해 전체적으로 웅장하며 조화로운 걸작을 완성했다. 그의 작품은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의 규범이 됐으며 현재에도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줍는 사람들'

우리에게 친숙한 <이삭 줍는 사람들>은 <만종>과 더불어 프랑스 농민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의 대표작 중 하나다. 밀레는 19세기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파리의 교외인 바르비종으로 이사한 뒤 본격적으로 농민의 삶과 자연 풍경을 그렸다. 당시 바르비종에서 자연주의를 추구하며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들이 바르비종파라 불렸는데 밀레는 시골의 풍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더하며 바르비종파의 대표 화가가 되었다. 그는 농민이 일하는 모습을 과장 없이 서정적이면서도 엄숙하게 표현했다. 19세기 프랑스의 농촌에서는 부농들이 추수가 끝난 뒤 밭에 남은 밀 이삭을 생활이 힘든 빈농이나 미망인들에게 줍게 해주는 문화가 있었다. <이삭 줍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경에는 추수가 끝난 밭에서 머릿수건을 하고 허리를 굽히며 이삭 줍고 있는 세 여성 농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밀레는 이 여성들의 윤곽선을 견고하게 그리며 얼굴의 세부 묘사는 간략화하였다. 또한 이삭 줍는 행동을 투박하면서도 무겁게 표현하여 운동감이 없어 조각과도 같은 느낌을 주어 이삭 줍는 행위에 관람자의 시선이 집중되게 한다. 이 여성들을 추수되어 단순한 황금빛 들판에 배치하고 대비시켜 종교화에서 느껴지는 장엄미가 엿보인다. 세 여인의 뒤로는 수레를 가득 채운 마차가 출발하고 있으며, 멀리 원경에는 전경과 달리 많은 농민들이 부산하게 일하고 있고 수확물이 높게 쌓여있다. 전경의 세 여성은 이들이 추수하고 간 이삭을 줍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농부를 소재로 삼은 그림은 다른 회화보다 격이 낮다고 보았다. 밀레는 이러한 시선을 깨고 친분이 없는 농부들의 삶을 엄숙하게 그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가교 역할을 했으며 이후 프랑스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

영국의 국민화가이자 미술사에서 손꼽히는 풍경 화가인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BBC 설문조사에서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 1위로 뽑혔고 영국의 20파운드 지폐의 모델이 되었으며, 꾸준히 영화나 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 등장하고 있다. 테메레르는 1805년에 트라팔가르해전에 참전하여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설적인 군함이다. 이러한 영국 해군의 상징과 같은 군함도 수명이 다해 템스강에 있는 조선소로 예인되어 가는데 그 모습을 직접 본 터너가 퇴역하는 전함을 기리기 위하여 남긴 작품이 <전함 테메레르>이다. 그림에선 군함의 퇴역하는 모습이 웅장하게 표현됐다. 당시 군함은 돛대 등 쓸만한 것은 모두 제거된 상태였지만 터너는 돛대 3개를 복원하고 배를 황금빛의 섬세한 붓질로 윤곽을 잡았다. 선체는 흰색으로 장엄하게 묘사해 이 배에 경의를 표했다. 그 앞에는 군함을 증기기관의 힘으로 견인하는 검은색의 작은 예인선이 있다. 예인선은 검은색과 오렌지빛 연기를 뿜어내며 물살을 가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화면 우측에는 태양이 지고 있으며 석양의 노을이 태양을 중심으로 오렌지빛에서 황금빛으로 번져가며 푸른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터너는 석양이 지는 모습을 수채화를 그리듯 얇게 바탕을 칠 한 후 그 위로 구름을 두텁게 덧칠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서정성을 느끼게 한다. 작품에서 테메레르와 증기 예인선은 영국의 영광을 볼 수 있다. 군함은 구시대의 영광을 의미하며 예인선은 증기기관으로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의 새로운 상징이다. 또한 테메레르는 60대의 나이에 접어든 터너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터너는 분신과도 같은 이 작품을 매우 아껴 애인이라고 부르며 비싼 가격에도 팔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국가에 기증했다. 최문영 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물랭 드 라 갈레트>는 인상주의 대표 화가 르누아르의 걸작으로 그의 예술철학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르누아르는 일상의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여 빛과 색채로 담아냈다. 그는 각별한 친구인 모네와 함께 전통적인 미술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 색조, 질감을 통하여 순간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양식을 도입했다. 작품의 배경인 물랭 드 라 갈레트는 19세기 말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 있던 야외 선술집으로 당시에 일요무도회로 유명한 대중적인 사교의 장소였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젊은 파리의 연인들이 담소를 나누며 식사도 하고 아래 설치해놓은 야외무대에서 춤을 췄다. 르누아르는 이러한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물랭 드 라 갈레트 광경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내고자 하여 준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이 작품에 매진하기 위해 근처에 아틀리에를 얻고 6개월간 매일 현장에 직접 찾아가 정경을 묘사하며 수많은 스케치와 습작을 남겼다.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화면의 형체를 세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 짧은 붓질로 다양한 색채를 분할하여 표현하며 윤곽선 없이 하이라이트를 사용하였다. 작품에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고 그림자도 짙은 푸른색으로 사용한 점 등에서 인상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이 잘 드러난다. 르누아르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전업 모델들을 쓰지 않고 자신의 친구들과 이곳에 자주 드나들던 노동 계급의 여성들을 모델로 했다. 화면의 하단에 보이는 두 여성은 에스텔과 잔 마르고 자매로 재봉사이며, 그녀들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남성은 훗날 르누아르 전기를 집필하는 조르주 리비에르이다. 탁자 우측에는 화가인 프랑크 라미와 노르베르 괴뇌트가 나란히 앉아 있다. 화면의 좌측에서 관람자를 바라보며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여인은 르누아르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마그리트 르그랑이며 그녀와 함께 춤추고 있는 남성은 쿠바 태생의 스페인 사람인 카르데네스다. 화면의 좌측 하단의 인물은 절단되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화면을 액자 밖으로 확장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에 동화되는 느낌을 준다. 이들의 뒤로 야외무대에서 무리를 이루어 춤추며 즐기고 있는 젊은 남녀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춤추는 무리와 나무들의 형상은 간략하게 색채로 표현되었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자정까지 이어진 야외무대를 밝혔던 흰색 가스등이 그려져 있다. 르누아르는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자신의 철학을 작품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지켜왔다. 가난하여 빈 물감 튜브를 계속 짜면서도 작업했고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에 참전하며 친구도 잃었다. 말년에는 관절염으로 손가락의 관절들이 마비되어 붓을 팔에 묶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워하며 그림을 그렸다. <물랭 드 라 갈레트>는 그러한 르누아르의 정신이 가장 잘 담긴 작품 중 하나로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활기차고 행복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 보는 우리에게도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마원 '산경춘행도'

<산경춘행도>는 남송 시대 4대 화가이자 화원산수화풍을 이끈 화원화가 마원의 걸작으로 그의 개성 있는 화풍이 잘 표현돼 있다. 이 시기 문화의 발전에는 황실의 영향이 컸는데 황실에서 화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화가를 육성해 화원 중심으로 화단이 전개됐다. 마원은 이러한 남송 중 후반기 화원산수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집안인 마씨 집안은 7명이나 화원화가를 배출한 화단의 명가였다. 그 역시 뛰어난 실력으로 남송의 광종과 영종 두 황제 밑에서 화원의 대조를 역임했다. 북방지역과 다르게 남방지역의 자연은 언덕이 낮고 호수와 강이 많으며 푸른 잎이 무성하여 산수화에도 북송 시기와는 다른 화풍이 필요해졌다. 마원은 그에 맞춰 새로운 양식을 창안했다. 강남 지방 자연의 일부분을 소재로 선택하여 좌측 모서리에 배치하고 우측 위로 이어지는 대각선 구도로 그리는 변각구도를 고안했다. 산과 암벽에는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붓을 기울여 넓은 면으로 끌어당겨 수직으로 긋는 부벽준을 주로 사용했고 하단에는 강물을 습한 강남의 정취가 잘 느껴지게 했다. <산경춘행도>는 이러한 마원 고유 화풍이 잘 드러나고 있다. 우선 소재가 좌측에 집중되는 변각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에는 화창한 봄날에 산길을 거니는 한 선비의 모습이 보인다. 그 뒤로 시동이 거문고를 들고 따르고 있으며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는데 그 가지에 위에는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다른 새 한 마리는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땅에는 부벽준으로 그린 바위와 들꽃들이 있고 원경의 먼 산이 실루엣으로 표현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여백으로 처리하였다. 우측 상단에는 제시가 한 구절 적혀있다. 이 시는 남송의 영종 황제가 쓴 시로 ‘소매 끝 스치는 들꽃이 모두 절로 흔들리니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새가 울지를 않는다’라는 내용이다. <산경춘행도>는 시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당시에 문화를 향유하던 왕족들과 문인 계층 사이에서 시화 일치 사상이 크게 유행한 영향이다. 마원의 개성 있는 화풍은 마하파라 불리며 추종 받았고 남송의 산수화를 중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또한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서도 전해져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현대인이 겪는 군중 속의 고독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이다. 호퍼는 미국의 도시와 농촌 풍경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던 첫 미술가로 40대 초반까지 작품을 거의 팔지 못한 무명 화가였다. 그는 상업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여유가 날 때는 당시 미국의 모습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다. 이후 회고전을 통하여 인정을 받게 되며 평생 자신의 화풍을 이어 갔다. 호퍼의 작품은 사실주의 기법으로 미국인의 평범한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단순 재현이 아닌 화면을 재구성하여 극도로 단순화하고 평면화하여 작품을 통해 관람자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상상하게 만든다. 호퍼에게 사실주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그런 호퍼의 미학과 기법이 가장 잘 표현된 작품으로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경험한 20세기 전반의 미국의 대도시와 미국인의 감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작품의 배경인 간이식당은 호퍼가 54년간 거주한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식당에서 영감을 얻어 그렸다. 수평적 구도로 화면을 구성하고 어두운 거리와 식당 안의 형광등 불빛을 사선으로 대비를 줘 극적이고 정적인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유리창의 유리가 보이도록 재현한 호퍼의 유일한 작품으로 유리가 굽어지며 식당 안의 사람들을 감싸고 있어 실내를 훤히 비추어 식당 앞의 인도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화면에는 식당의 출입문이 보이지 않아 밤의 거리와 더욱 분리된 느낌을 자아낸다. 식당 외부 상단에는 대중적인 미국산 담배 필리스 시가의 광고가 있어 서민적 분위기의 식당임을 알게 해준다. 식당 밖의 거리의 건물들은 전부 불이 꺼져 있고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새벽 도시의 적막함을 느끼게 한다. 식당 내에는 등지고 혼자 앉아있는 사람, 한 쌍의 남녀와 종업원이 있다. 종업원을 바라보고 손에 담배를 끼고 있는 남성과 붉은색 블라우스를 입고 음식을 먹으려는 여성이 앉아있고 그 앞에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는 흰 모자와 옷을 입은 종업원이 있다. 그들과 건너편에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혼자 앉아있는 중절모를 쓴 남자가 있다. 그의 옆으로는 수평으로 놓여있는 비어 있는 의자들과 도시의 적막한 풍경이 어우러져 그에게서 고독을 느끼게 한다. 호퍼의 20세기 미국인의 삶을 사실적이고 단순하게 표현하면서 관람자의 심리적 요소를 이끌어 내는 화풍은 이후 앤드루 와이어스, 마크 로스코, 히치콕과 같은 화가, 작가, 감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은 예술과 인문학 분야에서 사랑받고 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프라고나르 '그네'

<그네>는 로코코 회화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마지막 대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작품이다. 로코코는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으로 퍼져나간 예술 양식으로 이전의 웅장하고 위압감을 주는 바로크 양식과 달리 곡선과 아늑함, 우아함과 관능적인 느낌을 준다. 프라고나르의 작품은 그러한 로코코 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준다. 프라고나르는 당시 화단과 아카데미에서 역사화로 호평을 받았으나 그는 화단의 기대와 달리 역사화를 버리고 장식적이고 관능적인 주제의 연애 풍속화를 그리며 큰 명성을 얻었다. <그네>는 화풍을 바꾸던 시기의 작품으로 그는 이 작품으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네>는 1767년 생 줄리앙 남작의 의뢰로 그려진 작품이다. 남작은 자신의 애인이 주교가 미는 그네를 다리를 보이며 타고 자신은 그 여성을 관찰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길 원했다. 프라고나르는 남작의 의뢰에서 종교적으로 민감한 부분인 주교를 나이 든 남편으로 바꾸어 젊은 아내, 나이 든 남편과 그녀의 젊은 애인인 남작을 삼각구도로 그려내었다. <그네>를 보면 자연스럽게 화면의 가운데서 드레스를 입고 그네를 타는 귀족 여성에게 눈이 간다. 이는 프라고나르가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그녀에게 집중시키고 분홍색 드레스와 숲의 초록색으로 보색 대비를 주어 자연스럽게 관객의 시선이 중앙으로 가게 유도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그네를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미소 짓고 있는데, 그녀의 시선은 왼쪽 아래의 젊은 남성에게 향하고 있다. 여성의 왼쪽 신발은 벗겨져 날아가고 있다. 당시 신발은 귀족들의 정숙함을 의미하기에 이후에 남녀 사이의 내밀한 관계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 젊은 남성은 남작의 복식을 입고 손에 남작 모자를 들고 그녀에게 뻗으며 관목 덤불에 누워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 남작의 뒤에는 사랑의 신인 에로스 조각이 비밀이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있다. 이러한 에로스의 행동을 통해 두 사람은 공식적인 관계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여성의 뒤에는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를 수행하는 푸토가 그녀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으며 그 옆의 그늘에서 그네를 끄는 남성은 주교의 복장이 아닌 나이 든 귀족으로 그려져 있다. 프라고나르는 그네를 소재로 그림을 자주 그렸다. 그 당시 그네는 육체와 행동에 대한 법도가 엄격했던 사회에서 여성들이 억압된 정신의 분출구로서 잠시나마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공인 놀이였다. 그네는 정형화된 사회체제를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의 상징인 것이다. 그네는 틀에 박힌 예술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한 프라고나르에게 가장 어울리는 작품 소재였다. 그의 예술은 우리에게는 혁명으로 몰락하기 전의 프랑스 귀족사회를 엿볼 수 있게 해줬으며 인상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인상주의를 이끈 화가 베르트 모리조가 그의 손녀이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초현실주의는 현재까지 많은 작가와 미술 애호가에게 사랑받는 예술사조이다. 초현실주의는 이전의 양식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다다이즘과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며 꿈과 자동기술로 무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운동으로 이성과 합리 거부하고 꿈과 무의식을 중요시한다. 그들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떠오르는 심상들을 그대로 그리거나 손이 이끄는 대로 형태를 그려나가는 자동기술법을 애용했다. 그들의 작품은 사실적인 표현과 추상적 표현이 함께 화면에 나타나 보는 이들의 눈을 끈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 대표하는 스페인의 화가로 그의 작품인 시계가 녹아 흘러내리는 <기억의 지속>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수많은 강박관념과 편집증, 공포증과 무의식을 화폭에 담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기 전 화구를 옆에 두고 잠들었다가 깨어난 후 꿈에서 본 장면들을 묘사하였고 그의 작품은 손으로 그린 꿈의 사진이 되었다. <기억의 지속>은 초현실주의운동에 참여한 지 2년 뒤에 그린 작품으로 정밀함을 그림에 가미했다. <기억의 지속>은 달리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시간과 죽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배경은 달리의 고향과 가까운 스페인 북동부 해안이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바다와 해안의 절벽이 있으며, 그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며 깔려있다. 왼쪽에는 관 모양의 상자와 앙상한 나무가 있다. 화면에는 녹아서 늘어진 회중시계는 3개가 있는데 하나는 나무에 걸려 있고 다른 하나는 상자에 걸쳐서 흘러내리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시계는 달리의 옆얼굴과 닮은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괴생명체 위에서 늘어져 있는데 이 늘어진 회중시계들은 그의 카망베르 치즈에 대한 꿈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다. 왼쪽 아래의 주황색의 정상적인 회중시계 위에는 부식을 상징하는 검은 개미들이 모여있다. 달리는 녹아내린 회중시계와 부식을 나타내는 개미들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등을 통하여 흘러가는 시간과 죽음에 대한 달리의 공포 두려움이 느껴진다. <기억의 지속>은 달리 회화의 정수이다. 그의 무의식과 철학이 담긴 작품이며, 세심한 기법으로 변형된 이미지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비틀어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 상황을 연출하여 어둡고 섬뜩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부조화는 조형적 매력을 느끼게 하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현대까지 사랑받고 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정선 '인왕제색도'

인왕제색도는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금강전도와 함께 진경산수화를 이끈 정선의 대표작이다.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중국의 남종화법을 이용하여 실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회화적 재구성을 통하여 화가가 느낀 감흥과 정취를 표현하는 화풍이다. 이러한 특성이 인왕제색도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왕제색도의 산 아래인 전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 부감법으로 그리고 산 위쪽의 원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고원법을 사용하여 바로 앞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림 오른쪽 상단 여백에는 정선이 인왕제색 신미윤월하완이라 쓰고 그 밑에 정선이라는 백문방인과 그의 자인 원백이 새겨진 주문방인이 찍혀 있어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원경에 배치된 바위 봉우리들이다. 이 봉우리들은 먹을 듬뿍 써 여러 번의 붓질을 하는 적묵법과 붓을 기울여 먹이 묻는 면을 넓게 하여 수직으로 내리긋는 부벽준법으로 통해 먹을 층층이 쌓아 중량감과 중후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원래 인왕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하얀 바위산이지만 정선은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그가 느낀 인왕산의 강렬한 기운과 인상을 표현했다. 산 아래에는 비 온 뒤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모습을 여백을 통하여 표현하였고, 능선은 먹을 엷게 사용하여 표현했다. 이 수평으로 배치된 여백이 수직으로 그려진 검은 바위 봉우리와 대비되며 화면에 안정감을 준다. 물안개의 앞인 전경에는 소나무와 다양한 크고 작은 수목과 가옥을 배치하여 분리되어 보일 수도 있는 안개와 봉우리를 하나의 장면으로 어우러지게 만들고 있다. 인왕제색도는 1751년 정선의 나이 76세에 완성한 역작으로 그의 진경산수화풍의 정수가 많이 담겨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김홍도, 심사정, 이인상 등으로 후대 화가들에게 이어지며 조선 후기의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고, 우리나라의 산천을 주자학과 연결하고자 했던 문인 사대부들의 풍류 문화 발전에도 영향을 끼쳐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만들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고야 '1808년 5월 3일'

고야 '1808년 5월 3일' 전쟁의 야만성과 잔학성을 드러내는 작품 중 많은 예술가의 작품 활동에 영감을 주었으며. 미술사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교과서에도 빠짐없이 소개되는 작품이 바로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인 1808년 5월 3일이다. 1808년 5월 3일은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자행한 민간인 저항군을 처형하는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1808년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강제로 자신의 형인 조세프를 스페인의 왕위에 앉힌다. 이에 분노한 마드리드의 시민들이 1808년 5월 2일 프랑스에 항거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점령군이 5월 3일 밤에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고야는 사건 6년 뒤인 1814년에 스페인 국민이 겪은 고통과 상처를 기억하고 전제군주에 대항한 그들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 1808년 5월 3일을 완성했다. 1808년 5월 3일의 왼쪽부터 보면 이미 처형되어 비참하게 쓰러진 사람들의 몸과 바닥에 흘러내리는 피를 진홍색으로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옆으로 수도승이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있고, 처형을 기다리는 분노로 양 주먹을 쥔 채 눈을 부릅뜬 남자와 그 뒤의 남자는 처형자들을 노려보고 있다. 작품의 중심인물인 가운데 흰옷을 입은 남자는 무릎을 꿇고 저항하듯 팔을 높이 들고 있다. 그의 옷에 빛이 밝게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며 주변의 어둠과 대비되어 그를 부각하며 이런 모습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그 옆으로는 끔찍한 광경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체념하고 고개 숙인 인물들이 있으며, 그 뒤로 총살 집행 장소로 내몰려 떠는 사람들이 중앙의 등불을 통해 극적이고 처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우측에는 얼굴을 볼 수 없는 프랑스 군인들이 일렬로 정렬해 총을 겨누고 있는데, 고야는 병사들을 일괄 집단으로 그려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1808년 5월 3일은 가운데의 인물을 중심으로 감정이 잘 드러나는 희생자들을 좌측에 감정 없이 뒷모습만 보이는 가해자들을 우측에 배치하여 작품 전체를 양분시키고 있다. 고야의 이러한 구성은 새로운 도상학적 전통이 되었고 우리에게 친숙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도 차용된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 국민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자유와 주권을 지키고자 싸우고 있다. 이러한 그들에 모습에 전 세계가 감동하여 응원하고 지원하고 있고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항전으로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다 보니 어린아이들까지 목숨을 잃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물론 전쟁인지 모르고 참가하여 괴로워하는 젊은 러시아 병사들까지 모두가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피카소 '게르니카'

전쟁은 기술의 진보를 가져온 측면이 있지만,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삶과 존엄을 파괴한다. 이러한 전쟁의 비참함을 가장 잘 표현한 걸작인 게르니카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게르니카는 입체주의의 창안자이자 다양한 양식의 화풍을 구사한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대표 걸작 중 하나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의 이름으로 스페인 내란이 한창 벌어지던 1937년 4월 26일, 파시스트 독재자인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2천 명이 넘는 시민이 사망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같은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상태였다. 그는 참사를 알리고자 부조리와 비극을 주제로 한 거대한 벽화를 한 달 반 만에 완성하고 작품의 이름을 게르니카로 하였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흑백과 회색의 색상만을 사용하여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흑백의 단색을 통한 대비 효과로 절망감과 비극성이 강조되며 죽음에 관한 테마를 잘 느끼게 해 준다. 화면의 왼쪽에서부터 죽은 아이를 팔에 안고 절규하는 여인이 있고 그 옆에는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황소와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말, 공포로 두려움에 떠는 두 여인과 불이 난 집에서 떨어지는 여인이 있다. 바닥에는 사지가 절단된 병사가 있어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혼란한 모습이 뒤엉켜 있다. 이런 혼란한 상황을 피라미드 형태로 집결시켜 작품의 몰입감을 높였다. 게르니카에서 황소는 잔인함과 어둠을 의미하고 말은 상처받은 민중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의 입체주의적 기법인 분할된 면들을 통해 작품 내 공포와 혼란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게르니카는 전쟁의 잔학함과 비참함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사실적 내용을 서사적으로 뛰어나게 풀어내어,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닌 사회현상에 책임감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철학적 작품이기에 위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경에 러시아군이 배치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게르니카에서 봤듯이 전쟁이 일어나면 결국 가장 참혹한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은 민간인이다. 러시아는 군사적 입지 재확립 및 풍부한 식량 확보 등의 이유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였고, 미국은 크림반도 침공을 방관해 흔들린 세계 경찰의 이미지와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인한 지지율 하락을 막고자 뛰어들었다. 그 외 여러 국가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입장을 위하여 이 상황에 개입하고 있어 전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무관계한 사람들과 아이들이 고통받지 않게 최대한 이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길 바랄 뿐이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박상옥 <한일(閑日)>

박상옥 한일(閑日) 고향과 시골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박상옥의 한일(閑日)이다. 박상옥은 한국적인 소재를 인상파적 기법으로 다룬 화가로 종로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추억을 전쟁 직후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화폭에 담았다. 한일은 1954년에 국내 미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었던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으로 박상옥의 화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해준 작품이다. 얼굴의 세부묘사를 생략하고 형태를 단순화하여 전체적으로 움직임이 거의 없이 순간을 포착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토속적이며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한일은 짜임새 있는 구성이 눈에 띈다. 배경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담장과 하단의 그림자로 사각형의 배경을 구성해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여기에 중앙의 하얀 토끼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을 둥글게 원형으로 배치하여 보는 사람의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화면에 집중하게 하며 아이들과 동물이 어울리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배경의 나무, 돌을 넣어 쌓은 담장, 기와, 지붕 등을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하는 방식으로 질감의 차이를 꼼꼼하게 표현하고 있다. 색채도 그의 이전 작품들보다 강하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였고 볼륨감을 주어 형태들이 명확하고 중량감을 느끼게 한다. 박상옥은 그림을 그릴 때 사실 그대로가 아닌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대상을 선택해 상황을 연출했다. 이 작품에도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대문 앞에 붙어 있는 입춘대길이라는 봄을 맞이하는 문구와 팔짱을 낀 아이의 자세에서 쌀쌀한 이른 봄임을 알 수 있다. 그와 달리 아이를 업은 소녀는 맨발이며 업혀 있는 아기는 민소매 옷을 입고 있어 여름의 의상임을 알 수 있어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최문영의 그림산책] 고흐 ‘밤의 카페테라스’

우리에게 친숙하고 사랑받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예술과 삶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다양한 방식으로 영감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 그의 예술 인생은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의 예술 작품은 생전에 외면받아 작품이 안 팔려 삶이 곤궁했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인생의 이해자인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살아갔다. 너무나 미술을 사랑하고 열정이 넘쳤던 고흐는 프랑스 아를에서 예술가 그룹을 만들어 서로의 예술을 이해하고 토론하기를 꿈꿨다. 하지만 찾아온 화가는 고갱뿐이었고 그와의 관계도 파국으로 끝나 그는 절망했고 자신의 귀를 자르고 말았다. 그의 고단한 예술 인생은 고통은 영원하다라는 유언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고흐의 예술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바로 <밤의 카페테라스>다. 이 작품은 고흐가 좋아하던 장소이며 현재도 반 고흐 카페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아를 포룸 광장에 있는 카페의 야경을 그린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수많은 스케치를 하며 심혈을 기울였으며 동생들에게도 작품에 대한 많은 편지를 보냈다. 고흐는 밤을 좋아했다. 밤은 빛이 없어지는 시간이 아닌 새로운 것을 보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밤하늘을 검은색이 아닌 짙은 파란색으로 그렸다. 고흐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렸는데 별을 그리며 너무나 행복했다고 동생들에게 전했다. 이 작품은 이후에 <별이 빛나는 밤>의 시작점이 됐다. 밤하늘과 달리 카페의 차양의 불빛은 밝은 노란색으로 표현해 색채대비를 이루며 어우러져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객관적인 카페의 풍경이 아닌 고흐의 시선으로 본 카페의 광경을 체험할 수 있다. 금방 종식될 줄 알았던 코로나19가 어느덧 3년째 지속되고 있다. 올해는 먹는 치료제가 나오고 해가 가기 전에 종식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긍정적인 분석도 나오고 있다. 빠르게 코로나19가 종식돼 고흐가 바랬던 것과 같이 우리도 아름다운 밤에 별과 달을 보며 좋아하는 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새해가 됐으면 하고 바라본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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