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문턱 낮추고 고객만족 높이고 ‘뚝심경영’

대개 성공 CEO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향기가 있다. 넘치는 카리스마에다 또 조직을 아우르는 포용력과 융화력이, 때론 밀어 붙이는 업무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 한편으로 믿음과 관용의 미덕도 철철 넘쳐난다. 이런 향기는 곧바로 조직 발전과 비전을 제시하는 근간이 된다. ◇7년의 노력 ‘결실’= 용인축협 조성환 조합장(57)에게는 남들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CEO의 향기가 배어 있다. 온화한 미소 뒤에는 항상 일에 대한 옹고집이 누구보다 강하고 공사처리가 분명한 사람이다. 조합장 취임 이후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물에서 리더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조 조합장은 2대째 용인축협 수장직을 역임해 오고 있다. 취임 당시인 지난 7년전, 조합 예수금은 1천200억원 그리고 경영상태는 간신히 적자를 면할 정도였다. 무척이나 어려웠던 당시 상황이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현재, 예수금 규모는 3천450억원으로 300% 이상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올해에는 지난해 예수금보다 무려 300억원 순증했다. 대출금 규모 또한 지난해보다 600억원 순증한 3천100억 정도로 성장했다. 이런 신장세에 편승, 올 사업 물량은 무려 7천억원에 달한다. 이 또한 지난해 5천억원보다 무려 2천억원이나 늘어난 규모다. 이 모두 7년전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과로 보기에 충분하다. 조 조합장의 원대한 목표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당초 2012년까지 계획했던 사업물량 1조원 시대를 2010년으로 2년 앞당긴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내년 계획 사업물량이 올해보다 1천억원 증가한 8천억원대다. “FTA 등으로 지금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1차 산업은 분명 끈기와 저력이 있기에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것이 조 조합장의 평소 소신이다. 이런 뚝심은 그가 걸어온 과정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조 조합장은 원래 기업 CEO 출신이다. 서울에서 삼성전자 협력회사로 조그만 전자부품 회사를 경영한 기업인이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공장 부지가 필요했던 그는 지난 79년 처음으로 용인을 찾아 인연을 맺어 간다. 용인에 정착한 그는 처음에는 회사를 계속 유지해 갔다. 그러다 지역민으로 축산에 매료돼 지난 85년 젖소 20두를 구입해, 목장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이후 2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잘 될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지역내 성공 축산인으로 이름을 올려 놓게 된 것이다. 현재 용인에서 40만㎡ 규모의 목장 부지와 함께 일일 착유량 3t 규모인 젖소 250두를 기르고 있는 용인지역내 최대 대농중 한 사람이다. 원 고향이 용인이 아니지만 원주민보다 지역은 물론 축산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넘쳐 났기에 축협 조합장 또한 백암지역 조합원들의 만장일치 추대로 쉬이 입성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용인축협 박용순 경영혁신실장(사진작가)은 “지난 7년간 조합이 이렇게 발전한데는 조합원 모두의 노력의 결과 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CEO로서 자질과 능력이 출중한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면서 “오는 2010년 사업물량 1조원 달성에 없어서는 안될 분”이라고 말했다. ◇고객 만족 경영= 용인축협 조합원은 1천800여명이다. 현재 본점을 비롯 12개 사무소에 근무중인 직원은 160여명 정도다. 무엇보다 조합이 살아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조 조합장은 올 점포 운영의 1차 목표를 ‘고객 가치혁신의 해’로 삼고 자신은 물론 전 직원을 채근했다. 그 결과, 농협중앙회가 실시하는 총 8회의 CS(Customer Service) 평가에서 발군의 점수를 받았다. 모두 8회에 걸쳐 이뤄진 평가에서 전 사무소가 90점 이상의 고득점을 획득, 전년대비 11점이 오른 평균 90점이란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최근에 이뤄진 8차 평가에서는 중앙회와 지역 농협의 평점이 각각 89.2점과 88.0점에 머물고 있는데 반해 97.8점이란 월등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날이 갈수록 고객 만족 경영이 현실화 되고 있는 모습이다. “고객들이 만족하는 조합을 만드는 것 만이 현재의 힘든 상황을 타개해 나갈 지름길로 확신한다”는 조 조합장은 항상 고객 모시기에 조합 문턱을 낮추고 있는 장본인이다. 이런 노력은 곧바로 조합 신장과 연결됐다. 모두가 긴축경영에 돌입한 올 한해 용인축협은 상호금융 사업확대를 위한 공격적 마케팅 일환으로 기흥보라지점과 수지동천지점 등 2개 사무소를 개점했다. 이 때문에 상호금융대출금이 전년대비 24% 정도 신장, 11월말 잔액 기준 3천79억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12월 들어 고객 감사 일환으로 정기예금 특판 행사도 벌이고 있다. 1년 기준 금리가 단리식의 경우 6.5%, 복리식은 6.69%대다. ◇사회공헌 활동= 용인축협은 농협중앙회와 경기일보가 추진중에 있는 농촌사랑 1사1촌 자매결연 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쉴새없이 바쁜 일과에도 불구, 관내 조합원과 농민을 위해 일손이 필요로 하는 현지 농가를 수시로 찾았다. 벼 세우는 작업에서부터 방역 활동, 모판준비, 고추따기 등 농가들이 필요로 하는 일손을 제때 지원해 줘 주변 칭찬도 자자하다. 이는 지역농민과 더불어 사는 조합 설립 취지에도 부합하기에 조 조합장을 비롯 직원 모두는 항상 일손지원에 나설때마다 내일처럼 기뻐하며 농토에서 땀 흘리기에 인색하지 않았다. 또 협동조합간 상호 발전은 물론 상생 방안 일환의 조합간 자매결연 운동에도 동참했다. 강원지역 고성축협과 자매결연을 맺고 도농 상생자금 5억원을 지급해 줬다. 사회 공헌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농협이 내놓은 사회공헌 상품인 ‘지역사랑예금’(용인참사랑예금)을 통해 조성된 기금으로 관내 초·중·고 학생 지원 활동도 활발하게 펼쳐오고 있다. 주로 결식아동 후원을 비롯 도서기자재 지원, 장학금 지원, 각종 학습용품 지원 등에 사용중이다. 조 조합장은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의 기금 확대를 통해 지역사회 환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면서 조합과 조합원 그리고 관내 주민들이 함께 하는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에 앞장 설 계획”이라고 밝혔다./김동수기자 dskim@kgib.co.kr

우리기술로 만든 ‘맑은 공기’해외 바이어들도 “원더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돌파구는 있습니다. 사업도 상호 신뢰 관계입니다. 우리기업, 우리 상품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면 상대방 역시 신뢰를 지키게 돼 있습니다. 소비자들과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이른바 ‘잘먹고 잘살자’라는 웰빙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당시만 해도 건강을 생각하는 생산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생소한 단어에 열광했던 소비자들 역시 쏟아져 나오는 생산물들을 무분별하게 습득할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는 판단하지 못했다. 우리의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기술의 필요성에 공감했던 ㈜맑은공기 도상혁 대표는 국내 최초로 몸에 해로운 오존은 발생하지 않고, 반대로 몸에 이로운 음이온 발생은 최대인 음이온 모듈 국산화를 실현한 장본인이다. ◇우연한 만남이 기회로= 언론사에 십수년간 몸담았던 도 대표는 지난 2001년 취재차 일본을 방문했다 기이한 한 사람을 만났다. 음이온만 가지고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웰빙산업과 실버산업이 10년은 앞서 발달돼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음이온에 관심을 갖게 된 도 대표는 국내에 들어와서야 우리나라에 자체기술이 없다는 것을 알게됐다.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할 지를 고민해 왔던 도 대표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단순히 일본의 산업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친환경적이고 웰빙적인 의미에서는 음이온 관련 사업이 오래도록 관심받을 것이란 비전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웰빙문화가 이슈가 되는 시점이 오고 있고, 시장이 확산될 것을 확신했다는 도 대표는 기존에 있던 업체들이 이에따른 기술적 노하우가 없다는데 착안, 국산화 기술을 먼저 발굴하는데 주력했다. ◇우리기술만이 살길이다= 생산 초기 “우리만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데 집중했던 도 대표는 제품을 판매하기 이전 R&D 인력부터 충원했다. 웅진이나 삼성, LG, 샤프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대기업이 웰빙바람을 타고 많은 생산품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 기업들도 자체적인 기술 없이 대부분 일본에서 직수입 한 기술을 사용하거나 대만 등의 제품을 수입해 판매했다. 판매 과정도 다단계 위주로 변해 갔다. 공기청정기 한대가 100만원이 넘었다. 공기청정기 하면 옥매트나 정수기처럼 다단계 판매로 이뤄진다는 인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우리기술 개발에 집착했던 도 대표는 판매도 하기전이라 자금이 있을리 없었다. 그래서 도 대표는 친분이 있는 연구원들을 찾아다니게 됐다. 전담 연구원을 두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임시로 단편적인 프로젝트만이라도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맑은공기는 어렵게 국산 음이온 모듈 개발에 성공하게 됐고, 최초로 오존이 방출되지 않는 무오존 인증을 받아냈다. ◇시련은 깊어지고= 어렵사리 우리기술 개발에 성공했지만 도 대표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막대한 자금을 기술 개발에 쏟아붓다 보나 보니 회사가 더 힘들어졌다. 일만 열심히 할줄 알았던 도 대표는 날마다 회사를 위해 돈을 빌리러 다니는 아내에게 가장 미안했다고 한다. 또 막상 제품을 생산해 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기술에 목말라했던 국내시장에 막상 우리기술을 내 놓아도 선뜻 쓸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제품이 정직하다고 외쳐도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대기업이라는 이름만 믿고 상품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고심하던 도 대표는 상품을 차별화 하기위해 가격도 낮추고, 기술력은 높이고, 디자인도 새롭게 했다. ◇보따리 장사에 나서다= 자사 제품에 자신이 있었던 도 대표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보따리 장사에 나섰다. 한국무역협회로부터 해외 바이어들의 정보를 받아 직접 안내 메일을 보냈다. 누가 언제 어디서든 만나자고 하면 서슴없이 제품을 들고 찾아갔다. 그런 끝에 한두 곳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독일까지 날아가 직접 상품을 보여주고 계약을 맺었다. 당시 독일 바이어는 공기청정기의 경우 오존 발생이 항상 문제였는데 맑은공기의 제품은 그런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것에 무척이나 놀랐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한국기업들이 반 덤핑 하는 경우가 많아 맑은공기의 제품까지 가볍게 평가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맑은공기 제품과 대놓고 비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최초로 무오존 인증을 받은 맑은공기의 제품을 따라오기란 처음부터 힘든 일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비로소 결실을 보는 순간 이었다. ◇환율피해도 없다= 이렇게 인정받기 시작한 맑은공기의 제품은 환율변동 같은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게 됐다. 초창기 원달러 환율이 1천100원정도 했을때 계약을 시작한 도 대표는 이후 환율하락으로 많은 피해를 겪기도 했다. 다시 도 대표는 보따리를 싸서 바이어들에게 찾아갔고, 환율정책 관계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1달러를 우리돈 1천원으로 거래하는 1:1 계약을 체결했다. 맑은공기의 기술력을 믿은 해외 바이어들이 앞장서 나서 준 것이다. 해외바이어들도 분명 원화 거래를 선택한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직한 제품으로 맺어진 바이어와 업체의 상호신뢰 관계는 이같은 결과로 나타나게 됐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돌파구는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실망시키지 않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도 대표는 “제품은 고객과 믿음의 결과”라고 믿으며 지금도 세계시장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한국의 溫氣’ 세계에 전파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서 알려지고 사람은 일에 의해 평가 받듯이 기업은 품질로서 인정받겠습니다. 쉽게 제조된 제품은 고객에게 커다란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의 특징적 가옥문화인 ‘온돌’이 국제적인 명품으로 자리 잡은 지는 이미 오래다. 처음 한국에 와서 온돌 문화를 경험했던 몇몇의 외국인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알려진 우리의 온돌은 이제 해외 건축 양식에서도 빠질 수 없는 공법이 된 것이다. 이러한 온돌 공법을 해외에 알리데 한 몫을 담당한 도내 중소기업 렉스바(www.rexva.co.kr) 역시 온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됐다. ◇한류 여기도 있다= 유명 연예인들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온돌 문화도 이제 한류열풍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고유한 온돌이 바닥에서만 열을 발산해 온 집안을 따뜻하게 했던 방식이었다면 렉스바의 난방필름이나 면상발열체는 바닥의 열을 천장과 벽으로 옮겨왔다. 바닥과 벽, 천장 등에 얇은 난방필름을 끼워 넣은 것이다. 이로써 해외 난방 방식인 히터 방식과 우리의 온돌이 만난 특별한 난방 방식을 만들어 냈다. 난방필름을 이용한 필름히터는 전기열 보다 30%, 기름보일러 보다 60% 저렴한 장점이 있다. 최근 외국의 경우 우리의 온돌 방식을 고급 아파트나 리모델링에 사용하는 등 일부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었다. 이랬던 것이 지금은 렉스바의 노력으로 더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온돌의 우수성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해외에서 인정받다= 렉스바의 제품들은 조악하지 않고 안정적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좋아한다. 지난 10월 경기도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주최한 CIS지역 통상촉진단에 참여한 렉스바 김호섭 대표(43)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우크라이나 대사관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우크라이나 S사를 벨로루시 민스크에서 직접 만나 수십만불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업계 최고라는 독일 Enhofilm보다 더 좋다는 평가와 함께 말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계약을 이뤄내기 위한 김 대표의 철저한 준비와 노력이 이끌어낸 결과이다. 렉스바의 제품은 가격이 조금 비싼 대신에 안전성이 높다. 안전성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생산 과정이 견고하다는 것이다. 이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 포함된 김 대표와 직원들의 노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공장을 설립하고 단 한번의 실수도 발생하지 않았다. 처음 생산한 제품을 납품할 때는 “꼭 딸 자식 시집 보내는 것 같더라”고 말할 정도로 김 대표가 제품에 쏟아붓는 열정은 크다. 이러한 열정은 우크라이나는 물론 영국, 인도, 미국, 캐나다, 중국,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까지 판로를 확보해 렉스바의 기술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바닥까지 떨어져 봐라= 렉스바 김 대표가 이렇게 성공하기 까지는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5년이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들어간 벤처기업이 얼마 못가 문을 닫았다. 이로 인해 김 대표는 1년간이나 월급을 받지 못했다. “처음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평생 처음 월급을 못 받아봤습니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민하던 김 대표는 그냥 바닥까지 떨어져 보기로 결정했다. 우습게도 그러고 나니 새로운 희망이 생기더란 것이다. “더이상 떨어질 바닥도 없다고 생각하니 다음달 월급 걱정이나 그동안 받지 못한 월급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수 있는 용기를 낸 그는 다른 할 일이 없어 창업을 준비했다. 처음 노동부에서 지원받은 종자돈 1천만원이 수중의 전부였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끝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동안 지킨 의리 덕분에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힘든 누군가에서는 늘 이렇게 말한다. “끝까지 한번 떨어져 봐라. 그러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라고 말이다. /장충식기자 jcs@kgib.co.kr 온돌 방식을 채택해 웰빙난방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난방필름 생산업체 렉스바(www.rexva.co.kr)가 국제적인 이름을 얻고 짧은 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호섭 대표 자신에게 있다. 아직도 새벽 2, 3시면 잠에서 깨 회사 생각만 한다는 김 대표는 분명 두 아들과 아내에게는 아빠와 남편으로의 점수는 높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객에게 평가 받는 점수는 그렇지 않다. 인터넷을 통해 렉스바 홈페이지를 접속하면 실시간 대화의 창이 열린다. 언제고 궁금한 사항이 있는 고객들은 친구와 채팅하듯 렉스바의 직원과 연결할 수 있다. 그 실시간 상담을 맡고 있는 직원이 다름 아닌 김 대표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장이 직접 사소한 것까지 챙기는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시간이 날때마다 고객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기 위해선 언제든 고객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해 낸 것이 실시간 대화 창이다. “좋은 제품을 쓰기 위해 고객들이 갖는 궁금함은 당연하다”며 “고객의 궁금함을 해결해 주는 것도 생산자의 당연한 업무”라고 그는 이야기 한다. 그는 또 “자기품질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해 나가야 한다”고 전제한 뒤 이를 위해서는 제품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상품으로써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는 장비가 우선이고, 제품이 우선이고 사람이 나중이다. 사람이 가장 나중인 것은 제품이 좋으면 김 대표를 믿어줄 것이고, 렉스바 자체를 믿어줄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 골프방 대중화 이룰것”

㈜월드스크린골프는 고양시 덕양구 지식정보진흥원에 본소를 두고 지속적인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다. 현재 직원은 총 25명으로 이중 개발팀은 기술력 유지에 근간이 되는 보안을 위해 별도 분리돼 운영중이다. 스크린골프는 일반적으로 정면 스크린에 3D시뮬레이션과 센서모드 등이 작동, 여러기능을 포함한 ‘도심 속의 골프장’으로 필드에서 직면할 수 있는 유사상황을 만들어 낸다. 때문에 굳이 필드를 나가지 않더라도 필드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스스로의 골프능력 향상을 위한 과학적인 진단 또한 받을 수 있다. 장호정 대표가 구상하는 ‘골프방’은 노래방과 흡사한 시스템을 지닌다. 스크린골프장에는 쇼파와 같은 휴게공간도 마련돼 있으며 1인당 2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18홀을 돌게 된다. 게다가 스크린골프에 내장돼 있는 수십, 수백여 개의 필드 소프트웨어는 국내는 물론 해외 유명 골프장까지 안내한다. 아직도 일부 특정계층 위주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는 국내 골프 문화가 골프방을 통해 대중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지, 자뭇 기대되고 있다. 지난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골프 엑스포(Expo)에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 한 기업체가 참가했다. 세계 몇몇 나라에서 이미 개발됐던 ‘스크린골프’를 내놓은 ㈜월드스크린골프는 비록 후발주자에 속했지만 기존 기술력을 뛰어넘는 차별성과 순수 개발한 기술로 관람객은 물론 각국 바이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이 업체는 패기 하나로 뛰어든 외국 박람회에서 미국 등 여러나라는 물론 10년 가까이 스크린골프 업종을 이어오던 타업체들을 제치고 당당히 히트상품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월드스크린골프의 장호정(37) 대표가 스크린골프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시기는 2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골퍼인 부인과 장인의 권유로 2005년 스크린골프를 접하게 된 그는 젊은 나이에 겪었던 사업실패라는 쓴맛의 기억에 망설임 끝에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뭐랄까…. 저도 처음 경험한 건데, ‘이거다’싶은 느낌이 전해왔습니다. 머리 속을 뚫고 가는 한 단어가 있었어요.” 총알이 머릿속을 관통하듯 ‘골프방’이 스쳐 지났다. 계획을 잡아 놓은 것이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노래방의 성공신화가 골프방으로까지 이어지리라 믿음이 왔다. 이때부터 그는 혈혈단신 무던히도 발품을 팔았다. 처음 아무런 정보없이 내딘 발걸음인지라 막막했지만 게임업체 등을 중심으로 프로그램 개발자들을 찾아다녔다. 수소문 끝에 두 명, 세 명, 네 명… 마음이 통하는 동반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본격적인 프로그램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스크린골프는 사실 이미 이전부터 국내에 들어와 일부 마니아층을 대상으로 성업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외국 기술력에 의존해 있었고 틈새시장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대중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 같은 시장분석 아래 도전한 장 대표의 여정은 국내외를 넘나들게 됐고 그곳 스크린골프에 대한 장단점을 파악한 장 대표는 비로소 동반자들과 초기작업을 완성했다. “1년 만에 첫 기계가 완성됐습니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처럼 모자란 것도 많았죠. 그렇다고 보완작업을 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장 대표는 우선 앞서 나왔던 스크린골프를 넘기 위해 골프장 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투자했다. 당시만 해도 스크린골프 기계 한 대당 20개에서 많아야 40개 정도의 필드만을 보유한 골프장 소프트웨어를 장 대표는 70여 개로 대폭 늘려 골퍼들의 다양성을 충족케 했다. 또 60%에 육박하는 실골프장과의 유사성에 순수 국내기술로 일궈낸 편의성 등도 더했다. 한 마디로 틈새시장을 대중시장으로 확장할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현재 보유중인 골프장 소프트웨어만도 140여 개에 이르는데, 내후년까지는 400여 개를 만들어낼 계획이에요. 사람들이 골프방을 찾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가장 단순히는 시·공간의 제약에 따른 연습 개념이겠지만 이는 일부 골퍼들의 이야기이고 궁극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어울리며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번 와봤더니 ‘그게 그거네’라고 하면… 재미없겠죠?” 그의 노력은 올해부터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베이징골프엑스포는 물론 지난 9월 고양 킨텍스에서 경기도가 주최한 G-Fair(경기도 우수상품박람회)를 통해서도 명성을 떨쳤다. 중국에는 이미 현지 법인이 세워졌고 국내에만도 40여 개의 지점이 운영중이다. 또 중동 두바이와 100여 대의 기계수출을 화두로 협의중에 있으며 이 밖에 베트남과 싱가폴 등에서의 러브콜도 꾸준하다. 불과 3년이 채 안된 세월만에 일궈낸 세계시장 진출이다. 이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국내 게임산업이 성장할 무렵 투자자로 나섰지만 손해를 감수해야 했고 20대 중·후반에는 야심찬 포부로 유스호스텔 사업을 추진하다가 IMF를 겪으며 젊은 나이에 도망자 생활도 감수해야 했다. “아직 성공이라 하기엔 좀 그렇죠. 투자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가 집도 잡히고, 빚도 있고…. 그래도 투자는 계속할 것입니다. 골프방 문화가 정착될 때까지 쉼없이 달리는 것, 그것이 제 업(業)인 것 같아요.” /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거대 기기들 ‘제어’ 핵심부품 “정직한 기술력으로 승부”

근대사회의 산업발전을 이룩해 놓은 인간의 한계는 아직까지도 미지수다. 과거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비행은 어느덧 항공운수업을 이루었고 우주로의 여행까지 기대하게 되는 등 머릿속 상상력이 현실화 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땀과 노력, 그리고 이를 가능케한 여러 기기들을 이루는 구성품들에 대해 아는 이는, 전문가가 아니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거대 기기설비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부품들의 역량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 보다 더욱 값진 의미를 지닌다. ‘액추에이터(Actuator)’는 그들 중 하나에 해당된다. 다소 생소한 액추에이터란 사전적 의미로 ‘가동시키는 것’을 뜻하는데, 흔히 가동에너지(전기에너지)를 기계적인 변위 또는 응력으로 변환하는 트랜듀서이며 공기압식, 유압식, 전기식 등이 있다. 즉, 에너지를 기계적인 일로 변환시켜 직선운동이나 회전운동 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액추에이터는 실상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자동차에서부터 선박이나 댐, 정유공장 등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이 다양하다. 1958년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150㎞가량 떨어진 바쓰(Bath)라는 도시에서 설립된 업체 로토크(Rotork)는 이 액추에이터에 있어 전세계를 상대로 한다. 현재 80여 개국에 걸쳐 지사 및 에이전트가 운용중이며 반세기에 이른 축적된 기술력과 노하우는 산업 자동화와 계측기기 분야를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한국법인인 ‘로토크 콘트롤즈 코리아 주식회사’(이하 로토크 코리아)는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동과 유럽, 미주에 이르기까지 가스와 오일, 원자력, 발전사업, 화학 플랜트, 상하수도, 선박 등의 액추에이터에 있어 명실공히 으뜸을 달리고 있다. 이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로토크 코리아만의 고객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액추에이터는 본래 밸브(Valve)업체를 주고객으로 하지만 결국 밸브 액추에이션(Valve Actuation)을 필요로 하는 곳이 최종 고객이 되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이 외국의 공사를 수주할 때 일종의 플랜을 제공한다. 직접 액추에이터를 공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국가마다 기준이 달라 후보군이 되는 해당 액추에이터 및 업체에 대한 수준과 기술력 등을 조언, 국내 기업의 액추에이터 및 업체 선정을 도와주고 있다. 국내에는 이미 전국 곳곳에 로토크 코리아에서 수급한 액추에이터가 가동중이다. 한국도시가스를 비롯해 과천정수장, 영광원자력, 태안화력, 충주댐, 인천 LNG, 현대중공업 등 프로젝트로만 계산해도 수백여 개에 이른다. 이러한 로토크 코리아에도 한 번쯤 시련은 찾아 왔다. 1988년 ‘지사’의 개념으로 출발한 로토크 코리아는 1995년 오늘날의 한국법인에 이르렀지만 2년 뒤 IMF를 겪으며 위기를 맞았다. 당시 50% 가깝게 보이던 시장점유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 했던 것 처럼 본사의 기술력과 한국법인의 마케팅이 조화를 이뤄 이제는 30% 가량을 웃돌고 있다. 기술력에 있어서는 영국 및 말레이시아 등에서 생산된 MOV(Motor Operated Valve)를 통해 수동화를 벗어나 신속성, 안전성, 효율성을 꾀했고 마케팅에 있어서는 ‘Install & Forget’이란 회사이념 아래 공급은 물론 서비스까지, 고객만족을 실천해 왔다. 외국계 기업이라는 텃새 속에서도 한국법인으로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간직하고 있다는 로토크 코리아는 가까운 미래에 사회환원 활동은 물론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는 등 이제 제2의 도약을 준비중이다. /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인터뷰> 전승우 로토크 코리아 대표이사 {img5,L,300} “외국계 기업에… 한국인 자긍심 심었죠” “산업기기에 생산성을 높여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임입니다.” 전승우(49) 로토크 코리아 대표이사는 ‘액추에이터’에 대한 자긍심으로 꽉 차 있다. 그의 설명대로 ‘산업에 사용되면서 사람이 하지 못하는 리퀴드(Liquid)나 가스(Gas) 등의 제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액추에이터’라고 볼 때 효율성과 생산성을 끌어 올리는 발전력의 핵심부품이 되기 때문이다. 전 대표가 산업분야와 인연을 맺어 온 것은 오래됐지만 실상 한 기업의 대표로서 지나온 길은 그리 길지 않다. 경희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삼미특수강㈜ 중앙연구소 기술개발부를 시작으로 4년 가량 연구·관리직을 담당했던 그는 1991년 인스트론 코리아㈜ 영업부로 뛰어든 이후 마켓의 영역을 쌓아왔다. 특히 1993년부터는 엑추에이터와 같은 기계장치를 생산하는 업체에 몸담아 왔다. “처음 영업시장으로 나왔을 땐 그야말로 실수투성이었죠. 그러다 차츰 영업은 ‘정직’이란 정공법이 최고란 걸 깨달으며 매력에 빠졌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요? 산업분야에서는 꽤 알아준다는 업체에 있었죠. 그런데 어느날 제 능력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했습니다.” 2년여 전 전문 헤드헌터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그는 소위 ‘스카우트’ 형태로 자리를 옮겨왔다. 후보군 중 가장 막차를 탔던 그는 당시 내로라 하는 5~6명의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었던 건 영업에서 익히 정공법이 도움이 됐다고. 본사 회장의 최종 면접시 정직하게 이력과 소신을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이 같은 본사의 선택은 곧 실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현실적 여건상 IMF 이전 만큼은 아니지만 연평균 100억원 규모의 매출과 날로 신장하는 판로 등에는 전 대표가 담당한 일익이 결코 작지 않았다. “외국계 기업에서 성공한 케이스 아니냐 하는데,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외국계 기업의 내적 분위기, 문화는 정말 다르거든요. 철저하게 실력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요? 실력이라 표현하긴 뭐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취업난 속에 외국계 기업을 동경하는 구직자들에 대한 그의 조언은 간단명료했지만 말투와 표정 속에 피나는 땀방울이 묻어 나왔고 자만하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 있었다.

30초 영상 미학… ‘틈새시장’ 사로잡은 마술사

‘30초, 그 이상의 가치를 위해’ 6년전 열정 하나로 버스광고 시장에 뛰어든 황기순 SNP 대표(www.sptec.net). SNP는 LCD 모니터를 이용,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기업이나 상품광고, 지역홍보, 생활정보를 TV광고와 동일한 방식으로 실시간 제공하는 LCD 버스광고 전문 기업이다. 이 회사는 그동안 얻은 광고 컨설팅의 노하우와 철저한 관리시스템으로 변화무쌍한 패러다임에 빠르게 적응, 업계에서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다. #엔지니어에서 사업가로 원래 그는 엔지니어였다. 어릴적부터 엔지니어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사업을 시작하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사업가가 되기전만해도 황 대표는 LCD 모니터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에 다니며, 훗날 남들에게 인정받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작은 소망이었다. 엔지니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황 대표가 영업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회사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금난과 판매부진을 겪으면서부터다. 회사를 살리자는 생각에 전 직원이 영업에 나섰고, 그도 자연스럽게 영업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영업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엔지니어가 무슨 영업이냐며 탐탁치가 않았다고 한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팔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있었다고. 자기 자신도 의아스러웠지만 용기를 냈다. 이런 용기는 곧 자신감을 가졌왔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재치까지, 상대방을 배려하고 호감을 갖게 하는 그의 영업 전략은 곧 결실로 이어졌다. 불과 수개월만에 300여업체와 납품 계약을 맺으면서 자신도 놀랐다. 황 대표 스스로도 그때 ‘또다른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계기가 그를 창업에 이르게 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01년 시스컴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전국 LCD 모니터 총판과 차량용 LCD TV를 판매했다. 그러나 벤처기업이었던 생산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1년반만에 회사를 정리했다. #고정관념을 깨라 시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2003년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그동안의 기술력을 집약한 전자액자인 매직프레임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 제품은 TV를 끄면 사진 액자로 자동으로 전환되는데다 DVD, MP3, 오디오, 광고 애니메이션 등을 갖춘 다기능 디지털 액자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황 대표는 이 제품을 들고 웨딩샵 등 관련 분야의 업체에 직접 발로 뛰며 영업했다. 아이디어도 괜찮고, 기능도 좋아 판매에도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기술 하나만으로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이디어나 제품 자체가 생소하다보니까 판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들 제품의 아이디어나 기술력은 인정하면서도 상업성에서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연이 기회로 우연한 기회에 성남 지역 시내 버스 100여대에 매직프레임을 달았다. 제품 생산과 관련된 OEM도 체결하고 대리점도 계약했다. 프로그램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상호도 SNP TEC로 변경했다. 그러나 잠시 희망이 보이는 듯 했지만 이마저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버스는 진동이 심하고 불규칙한 전압 때문에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기존 업체들도 이러한 기술적 문제 때문에 버스내 동영상 광고 시장을 포기했다. 그도 제품의 성능만큼은 자신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품의 디자인에 신경쓰다보니 버스마다 구조가 달라 설치에 문제가 많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리고 기존 버스 광고 업체들의 견제도 만만찮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연구에만 몰두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첫 도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의 시행착오로 황 대표는 겸손과 신중을 배웠다. 근본적인 하자 해결을 위해 꼬박 1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다. 2004년, 무선 콘텐츠 자동 갱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버스의 모니터와 음성 안내방송은 물론, 동영상 광고, 문자서비스 등이 동시에 가능한 제품이었다. 특히 광고 내용도 30초 분량의 동영상 화면으로 구성, 일반동영상, 디지털 편집, 플레쉬 제작 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살아 숨쉬는 광고’를 만들어냈다. 본사가 있는 평택 지역 시내버스 100대에 동영상 광고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처음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버스 회사는 물론이고 광고주, 고객들까지 시내버스에서 LCD모니터로 다양한 광고나 정보를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성공이었다. #시장을 꿰뚫어보라 황 대표는 광고 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같은 변화를 따라잡고 새로운 광고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수시로 지역별 특성분석과 유동인구 등을 분석, 최저 비용으로 초대의 광고효과를 이끌어 내고 있다. 특히 가격에서의 경쟁력은 절대적이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버스 한대에 한달 평균 4만원이 채 안되는 가격을 받고 있다. 하루 평균 버스 한대에 1천명 정도가 이용하는 것을 감안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어머어마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시내버스의 경우 고객 순환이 빠른데다 노출이 잘돼 반복홍보 효과와 집중 효과가 크다. 버스 이용객이 광고 효과가 높은 학생이나 주부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다. #희망을 쏜다 황 대표는 요즘 전국을 돌며 영업을 직접 챙긴다. 이렇게 자동차로 이동하는 거리가 1년에 6만~7만㎞는 족히 된다. 주요 타깃은 지역의 대학이나 관공서. 현재 수원을 비롯해 안성, 서울, 아산, 청주, 춘천, 원주, 대구, 포항 등 현재 11개 시군에 2천200여대의 LCD동영상 광고 기계가 설치됐다. 올해안에 광주와 울산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얼마전에는 인천공항에 호텔 홍보를 위한 대형 LCD 모니터를 설치했다. 이를 계기로 호텔업계를 적극 공략한다는 전략도 가지고 있다. 조만간 전국 지사나 총판 모집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도 있다. 그는 회사 이익에만 여념하지는 않는다. 얼마전 경기지방통계청과 제휴하고 지역의 다양한 정보를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꼭 광고가 아니더라도 각 지역에서 열리는 문화행사나 관공서의 유익한 정보, 생활정보 등을 지역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다. 황 대표는 훗날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시간나는데로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잊지 않는다. 그는 버스광고 시장에 새로운 장을 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오늘도 바쁘게 직접 현장을 달린다. /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공기청정 효과 ‘웰빙 형광등’ 빛났다

“교실 조도사업을 벌이며 생각한 것이 교실의 공기질이 무척 나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렴하면서도 교실환경 개선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다 형광등 일체형 공기청정기를 개발하게 됐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고효율이 기대되는 신기술 형광등기구 일체형 공기청정기를 개발한 ㈜엠에스라이팅 김귀곤 사장(52)은 “사업적 성공도 중요하지만 소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제품이 더욱 중요해 신기술을 개발하게 됐다”고 밝혔다. 화성시 봉담읍 동화리 엠에스라이팅 공장. 2개동의 공장에서 제품생산에 열중인 가운데 2층 개발팀에서는 최근의 웰빙열기를 반영하 듯 다양한 기술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이제는 조명기구도 단순히 밝기와 수명, 디자인만으로 경쟁할 수 없다면서 소비자들이 편리하고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 1999년부터 조명사업을 벌여온 ㈜엠에스라이팅은 2002년 벤처기업으로 등록한 뒤 조명분야에서는 수십개의 특허와 실용신안등록, 디자인 등록을 한 중견기업이다. 학교의 조도개선사업 등 조명분야에 주력하던 ㈜엠에스라이팅은 최근들어 웰빙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의 기술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중 형광등기구 일체형 공기청정기와 살균향균 기능의 스카이 바이오를 개발했다. 엠에스라이팅이 특허를 받은 형광등기구 일체형 공기청정기의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공기청정기 플러스 형광등기구다. 표출되는 부분은 일반 형광등과 차이가 없지만 공기를 흡입하는 공간과 정화시켜 내보내는 공기청정기 기능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다르다. 천장 속으로 내장되는 부분에 공기청정시스템이 들어가 4차례에 걸쳐 공기를 정화시킨 뒤 분출시킨다. 1차 프리필터는 흡입된 공기 중 시트나 실내에서 발생되는 큰 먼지를 1차적으로 걸러 주는 것으로 필터는 물세척이 가능하며 2차 탈취카본피터는 냄새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3차 실균구리폼필터는 망목 고조체인 살균 구리폼 필터에 수많은 기공을 가지고 있으며 공기청정기의 토출구에 위치해 살균기능을 담당한다. 마지막 4차 집진 헤파필터는 3M의 필터 기술력으로 만들어져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를 99.9% 제거해 봄철 꽃가루나 황사먼지, 분칠가루 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해준다. 또 이 제품은 정화된 공기의 분출구를 아래로 하지 않고 옆으로 만들어 소비자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했으며, 필터교체도 필터부분만 간단하게 해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한국산업기술시험원으로부터 서울 모고교에서 성능테스트를 받아 교실의 공기질 개선에 효과가 있음을 인정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천장의 공기청정기는 공기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받는 위치여서 효능에서도 일반 평형대보다 30% 정도 효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리모콘을 통해 청정기를 별도로 사용할 수 있고, 청정기 가동 전력이 55W로 형광등기구와 비슷해 소비자들의 부담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김 사장은 “기술적인 면이나 효능면의 특허나 실험은 물론 실제 사용기관에서 검증받았다”며 “가장 의미있는 것은 형광등에 부착된 천장형 공기청정기의 가격이 크게 낮아져 대중이 이용하는 시설의 공기질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일반 청정기도 많지만 형광등 일체 청정기를 고안한 것은 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설치비가 저렴한데다 아이들의 장난 등으로 발생하는 고장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이 주요했다”며 “형광등의 열이 공기의 흐름을 위층으로 이동시키고 이 부분을 정화하면서 공기청정기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엠에스라이팅은 형광등기구에 SKYBIO액을 도포해 살균과 항균기능의 제품을 출기하기도 했다. 형광등 반사갓에 SKYBIO액을 도포해 기존의 밝기만을 위한 형광등기구에서 살균과 항균기능을 첨가, 박테리아를 비롯 대장균이나 녹농균이 생장하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조명기구의 디자인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공간에 따른 시각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제품을 다양하게 개발하는 등 신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 회사 김찬대이사는 “조명연구소에서 신재품 개발과 디자인 개발이라는 2개축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며 “최근의 기술들은 조달청으로부터 우수제품으로 인정받는 등 웰빙시대에 적합한 기술들로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최종식기자 jschoi@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경영자는 무한책임” 강철 주무르는 ‘철의여인’

신광자 ㈜금진메탈 대표이사는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지금의 회사를 지켜냈다. 대기업의 납품 업체에서 이제는 지역의 탄탄한 입지를 가진 중소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신 대표는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하며 희망과 좌절을 겪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중소기업의 경영자로 변신하기까지 그녀의 성공스토리를 들어본다. #인생의 전환점 ㈜금진메탈의 시작은 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 대표는 남편이 다이캐스팅을 전문으로하는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리 큰 걱정없이 아이 둘을 돌보며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창업한지 채 5년도 못돼 뜻하지 않은 부도를 맞았다. 함께 열심히 뛰어준 직원 절반 이상을 구조조정하고, 남편은 회사와 가족을 위해 재기에 힘썼다. 결국 다시 힘들게 일어서기는 했지만 97년 IMF 직전에 회사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가만히 집에만 있기에는 조바심이 생겼다. 그 때문에 남편의 일을 조금이라도 거들겠다는 생각에 직접 팔을 걷고 나섰다. 이렇다할 사회 경험도 없었지만 결혼전 중소기업의 경리로 잠시 일한 경험을 살려 회사의 재무업무부터 맡았다. 하루이틀 일을 하다 그녀는 내친김에 영업 현장도 직접 누볐다. 직접 트럭을 몰고 새벽 4~5시까지 납품 업체를 돌며 배달까지 했다.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잠도 아꼈다. 두 아이의 엄마였기에 집안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일하다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챙기고. 이런 생활을 수년간 반복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다. #주부가 CEO로 어느덧 회사도 안정을 찾아갔다. 기술력도 인정받아 삼성전자의 에어컨과 냉장고 관련 부품을 납품하게 됐다. 주문량이 급격히 늘면서 밤낮없이 공장을 돌려야했다. 그러던 중에 뜻하지 않게 삼성전자가 99년 광주로 이전했다. 남편이 운영하던 의왕공장도 함께 광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 생각하면 이 일이 지금의 ‘신광자’를 있게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남편을 따라 한동안 광주에 머물렀지만 그녀 눈에는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는 광주뿐 아니라 경기도에서도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 의왕 공장을 자신이 해보겠다고 했다. 처음에 만류하던 남편도 끝내 신 대표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신 대표는 혼자 의왕으로 돌아왔다. 남편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받아 회사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2003년 1월 1일 ㈜금진메탈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절망이 희망으로 초기부터 다이케스팅 분야에서 기술과 경험을 쌓아온 인력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동안 남편과 함께 일해온 터라 적응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입소문을 통해 업계에 ㈜금진메탈의 기술력이 알려졌고, 회사도 가습기, 전자렌지 등 전자제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요부품을 생산하며 삼성전자의 2차 협력업체로 탄탄하게 성장했다. 그러던 중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철썩같이 믿고 있던 1차 협력업체가 부도를 냈다는 것이다. 10억원에 이르는 어음은 고스란히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8개월 넘게 방황하며 고민했다. 그동안 고생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회사를 정리할까도 생각했다. 가족들에게도 미안했고, 직원들에게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를 다잡아 주고 용기를 북돋워준 사람들 역시 가족과 직원들이었다. 지금도 그들은 늘 옆에서 신 대표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후원자였다. 신 대표는 다시 뛰었다. 기업의 조직을 슬림화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줄여 나갔다. 위기관리 능력을 보이며 CEO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차츰 회사는 회복하고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이런 고난을 이겨내자 이내 중국 등 동남아 국가의 저가 부품에 맞써 힘든 싸움을 벌였다. 2002년에는 해외진출까지 모색했다. 납품 업체를 따라 중국 청도에 진출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납품가격 문제로 포기했다. 그러나 오히려 전화위복이 돼 국내에서는 드물게 기술력이 필요한 각종 부품의 금형을 주문받아 제공하고 있다. 지금은 국내에서는 다이캐스팅을 통한 전문 제조업체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히고 있다. #울고 웃은 15년 신 대표 스스로도 그녀 자신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누가 들으면 낯뜨거운 소리라 할 수 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간혹 정말 자신이 장하다 싶을때가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나이 50을 넘겨 남편은 광주에서, 신 대표는 수원에서 벌써 8년째 늦깎이 주말 부부로 생활하고 있다. 이런 고생 때문인지 지금은 어느정도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신 대표는 회사를 경영할수록 자신의 부족함과 사업이 아닌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어했다. 몇년전부터 지역의 봉사단체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최근에는 수원의 한 대학 최고경영자과정까지 수료했다. 혹시나 경영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지역에서 열리는 유명인사들의 강연회도 빠짐없이 챙기는 열정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일한다는 핑계로 뒷바라지에 소홀했던 것이 늘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다. 심 대표는 회사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해오고 있다. 아이들을 키울때나 남편을 내조할때도. 회사에서 제품이 날개 돋힌 듯 팔릴 때, 직원들은 환하게 웃었지만 기업 개선작업으로 직원들이 회사를 떠날때는 누구보다도 가슴이 아팠다. 이제 규모만 큰 회사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올해 회사의 매출 확대보다는 수익률 향상과 원가절감을 통한 내실경영에 초점을 맞춰놓고 있다. 앞으로는 제품의 설계에서 생산, 품질 보증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품질, 고객의 만족에 주력할 생각이다. 이를 위한 끊임없는 연구·개발에 지속적으로 정진해 나갈 계획이다. #강한 기업을 꿈꾼다 ㈜금진메탈의 핵심 경쟁력은 모든 종류의 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과 노하우. 이 때문에 삼성전자에 이어 업계에서 꽤 알려진 이름의 업체들과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스러질듯 스러지지않는 ㈜금진메탈은 외풍에 시달리지 않고 롱런하고 있다. 이는 업체들이 요구하는 니즈를 충분히 수용하고, 디자인 변화에 빠르고 능동적으로 대응, 제품의 품질과 가치를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슬림화된 조직 역시 기업체질 개선은 물론 수익성 향상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장기적으로 내실있는 강한 중소기업으로의 성장을 장기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제 신 대표는 시장에서 검증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업계 최고의 자리를 넘보며 새로운 성공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디지털 홍보시대 e곳으로 초대합니다.

세계적인 여성 최고경영자(CEO)들의 이름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남성의 전유물이라 일컬어졌던 법조계는 물론 제조업, IT기술직까지 여성들의 이름으로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젊은 2030세대들의 톡톡튀는 아이템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아직 미개척분야에 뛰어든 당찬 여성 CEO가 있다. 이영아(30) 시즌소프트(www.seasonsoft.co.kr)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도전은 시작됐다= 2005년 10월 이 대표는 고등학교 동창이던 절친한 친구와 함께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창업을 결심했다.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한 것이다. IT계열의 괜찮은 벤처회사에서 온라인 마케터로 일하던 그녀는 물론이고 동업자인 친구 역시 순탄한 길을 뒤로하고 험난한 길을 택했다. 친할 수록 돈거래나 동업은 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이 두사람은 아직도 끈끈한 동업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대표는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일단 ‘신뢰’가 최우선으로 전제돼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지향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파트너를 만나는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녀와 친구는 더할나위 없는 ‘훌륭한 파트너’라고 확신한다. 사업 초기,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함께 창업 아이템을 구상했다. 시장조사도 하고 사업계획서까지 만들면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친한 동업자가 있어 서로에게 위안이 됐다고 한다. 그녀는 작은 것 하나까지 꼼꼼히 챙기며 신중을 기했고, 결국 6개월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창업을 선언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전자초대장 사업이다. ◇꿈이 현실로= 창업한지 3개월만에 사업자 등록을 내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일사천리였다. 그동안 살면서 크게 실패한 경험도 없었고, 실패라는 것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사장’이라는 호칭도 어색하고, 회사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규모도 초라했지만 전자초대장은 그녀들에게 또다른 도전과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처음에는 무슨 용기에서인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웨딩전문업체를 무턱대고 찾아갔다. 그동안 구상한 남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이는 등 나름대로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준비한 것에 비해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은 사라지고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절치부심(切齒腐心)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했다. 프로그램과 웹디자인을 자체 개발한 것은 물론 웹사이트까지 구축하고 영업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시행착오를 겪은터라 보다 완벽한 준비를 위해서는 직접 발로 뛰고 부딪히는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하나씩 결실을 맺었다. 많은 사람들이 톡톡튀는 감각의 홈페이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차츰 주문도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온라인 뿐 아니라 오프라인 초대장까지 손을 뻗쳤다. ◇제2의 도전= 그녀에게 2007년은 기억이 남는 한해가 될 것 같다. 사업을 시작한지 어느덧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회사가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일할 수 있는 공간확보는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업체의 특성상 넓은 공간은 필요치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은 필수적이었다. 수소문끝에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경기지회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하면서 부담을 크게 줄였다. 불과 3천만원이라는 많지 않는 돈으로 창업을 하면서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기에 더욱 절실했다. 이어 사업 확장에 주력했다. 전자초대장은 그 시간에 비해 큰 수익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때문에 보다 효율적이고 고부가 가치의 아이템이 필요했다. 고민끝에 결정한 것이 바로 기업이나 단체 등을 대상으로 한 전자카달로그 사업이다. 최근들어 기업들이 온라인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온라인상에 자신의 회사를 소개할 수 있는 카달로그야 말로 아직 개척되지 않은 블루오션과 같은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시즌소프트’라는 회사의 이름도 ‘e-프로포즈’에서 바꿔달았다. 전자청첩장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프로포즈라는 이름을 섰지만 사업확장에 있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에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이 대표는 2005년 창업한 뒤 쉴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녀의 이력을 보면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한순간도 쉼없이 달려왔음을 알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리고 취업, 창업. 그녀는 직장생활과 창업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이런 그녀지만 사업을 시작한 이후 가장 절망했던 순간은 바로 두달 전이다. 실패를 모르고 달려왔던 지난 2년동안 큰 절망없이 사업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11월부터 중소기업청의 기술혁신과제에 도전했다. 하나하나 조금씩, 조금씩 열정을 쏟아가며 일했다. 1차는 무난히 통과했지만 지난 7월 2차에서 그만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첫도전에 2차까지 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이 대표는 이런 실패마져도 긍정적으로 바라볼만큼 이제 CEO로서 성숙해졌다. “사업이라는 것은 돈을 벌면서 인생공부까지 할 수 있어 매력적입니다. 지난 2년간 가장 큰 인생공부를 한 셈이죠.” ◇도전은 계속된다= 이른바 21세기 무형의 가치가 강조되는 정보지식 사회에선 부드럽고 섬세한 감성과 커뮤니케이션인 소위 ‘여성스러움’이 남성을 압도하고 있다. 그녀도 이런 장점을 토대로 온전히 자신만의 능력과 의지로 한 단계, 한 단계 성공 계단을 쌓아올리며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전자카달로그는 단순히 사진을 조합해 꾸미고 이를 연결하는데 그쳤지만 얼마전 여기에 동영상을 접목하는데 성공했다. 아직은 기술개발에 더 치중해야 하는 신생기업이지만 그녀의 꿈은 당차다. 먼저 ‘전자카달로그=시즌소프트’라는 공식이 정형화될 만큼 업계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고 오프라인상의 인쇄 디자인 회사를 설립해 온·오프라인의 패키지 상품을 만들어 시너지 효과를 높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직원이 만족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도전하지 않는 기업은 죽은 기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은 힘들고 고될지는 몰라도 새로운 뭔가를 찾아 열심히 뛸겁니다. 전 아직 젊으니까요.”/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손가락만한 USC로 글로벌시장 ‘접속’

“한 때 유행했다 사라지는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하는 기업으로 남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잠시 ‘반짝’했다 사라지는 IT업체들이 부지기수다. ㈜아이오셀은 업계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강병석 대표이사(43)가 있다. 그의 말대로 단순히 작은 제품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바로 ㈜아이오셀이 추구하는 기업정신이다. ◇준비된 기업을 만들어라 ㈜아이오셀은 2001년 설립 이래 콘텐츠웨어와 관련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불과 6년만에 관련 업계의 리딩 컴퍼니로 성장했다. 90년대 초반 태동기를 맞던 IT업계는 2000년 이후 IT·벤처기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옥석 가리기로 변화를 맞았고, 이후 콘텐츠로의 가치 이동이 일어나면서 ㈜아이오셀은 급성장했다. 얼마전 모바일 디바이스를 콘텐츠웨어로 만들기 위해 세계 최초로 임베디드 콘텐츠웨어 플랫폼인 ‘C2’를 선보였다. C2는 모바일 디바이스를 인터넷과 연동해 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 디바이스 상호간에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든 개방형 플랫폼이자 미들웨어이다. 강 대표는 최근 DMB, 와이브로 등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IT업계의 가치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주도권 싸움에서 소프트웨어가 우위를 확보했듯이 콘텐츠웨어가 IT의 키워드가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아이오셀은 콘텐츠웨어 시대에 대비해 창업 당시부터 이에 필요한 기술과 제품을 준비하며 지금 그 결실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 ◇어려울때 기회를 잡아라 강 대표는 지난 2001년부터 본격적인 CEO의 길을 걸었다. IMF 직전인 지난 1997년, 삼성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어릴적 자신의 꿈을 위해 과감히 버렸다. 그러나 회사를 바로 설립하기보다는 한 중소기업의 신규사업 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에게 부족했던 경험이나 경영자적인 마인드를 채워나갔다. 4년이 지나고 막상 회사를 설립하겠다고 나섰지만 많은 것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벤처업계가 전반적으로 어려워 주변 사람들의 반대도 만만찮았다. 회사를 창업하기에 앞서 6개월 정도를 해외전시회며 여행 등으로 사업 계획을 구상했다. 그리고 수원 영통의 한 건물 2층 서너평 정도를 임대해 책상하나 달랑 놓고는 직원없이 혼자 창업했다. 그때까지도 IT와 관련된 업종의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강 대표는 향후 시장의 흐름을 시나리오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장의 변수를 나름대로 예측하고 그에 맞는 시나리오를 또하나 만들어냈다. 고민끝에 이동식 매체가 활성화될 것으로 판단하고, USB에 승부수를 던졌다. 이 때부터 USB와의 끊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지금 생각하면 미래 트랜드를 보는 눈은 남들보다 조금 나았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탱크’ 강병석 강 대표의 성격은 적극적이다. 아니 적극적이다 못해 오히려 공격적에 가깝다고 그 스스로 얘기한다. 직원과도 타협보다는 그의 방식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고. 한번 목표가 정해지자 그는 공격적으로 나섰다. 정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선 온라인 관련 모임 활동은 물론 외국 전문가들과의 교류도 가졌다. 전문 서적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경영스타일 때문에 창업 6년만에 300억원이라는 매출을 기록할 정도로 고공성장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규모에 비해 조직은 상당히 슬림화돼 있다. 슬림화된 조직은 ㈜아이오셀의 기업체질 개선은 물론 수익성 향상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이 회사에는 기획, 디자인, 개발 업무 등 28명의 전문 인력이 일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으로서는 보기드물게 특허 관련 업무를 맡아보는 변리사까지 채용, 업무 자체를 전문화했다. ㈜아이오셀은 유효한 특허만도 50여건에 이를 정도로 연구에 치중하고 있다. 연구 개발 업무가 많은 IT업체의 경우 지적재산권 등 특허 소송에 휘말리기 쉽다는 생각에서다. ◇시장 변화에 민감하라 강 대표는 엔지니어였지만 삼성에서 기획업무를 담당했던터라 회사의 시스템을 과감히 삼성화했고, 시장조사나 경쟁사 조사 등도 삼성의 장점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회사를 떠나왔지만 삼성이라는 대기업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업은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이오셀은 디지털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과 디자인 변화에 빠르고 능동적으로 대응해 왔다. 지금도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연구개발 활동을 통해 제품의 품질과 가치를 극대화해 나가고 있다. 이런 요소가 훗날 명실상부한 글로벌 회사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으로 그는 기대한다. 강 대표는 상품의 디자인을 예술이라고 표현한다. 디자인 전문가들을 많이 채용하고, 강 대표 자신도 이런 시대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명품 잡지며 IT 서적, 전시회 등을 통해 감성을 높이고 있다. 여기서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많은 정보와 아이템을 얻는다고 한다. 이렇게 얻은 정보를 서로 나누기 위해 직원들과도 토론을 많이 벌인다.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다보면 시장의 흐름도 알 수 있고 아이디어가 다양해질 것이라는게 그의 생각이다. ◇도전은 계속된다 초창기 경쟁 업체들이 꽤 많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그리고 빠르게 급변하는 시장을 주도하고 월 25만개 연간 300만개까지 생산량을 끌어올려 국내 시장 점유율을 7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그의 목표다. USB는 당분간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할 과제이지만 내년에는 8GB 정도의 제품이 상용화될 것으로 그는 예측하고 있다. 이후에는 콘텐츠와 관련된 사업이나 이를 유통하는 사업이 새로운 대안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강 대표는 콘텐츠 게이트웨어의 핵심기반인 아이오셀의 C2 플랫폼 기술로 콘텐츠웨어 중심기업으로 성장, 콘텐츠 웨어 세상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콘텐츠웨어를 바탕으로 CT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장에서 검증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최고의 자리를 확보하고 새로운 성공 신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그는 확신한다./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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