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가면’에 담긴 삶의 지향점…국립민속박물관 ‘MASK’ [전시리뷰]

우리는 역할, 지위 등에 따라 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옛 사람들 역시 가면을 쓰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그 속에 소망을 담고 한을 풀어냈다. 이제는 일상이 돼버린 가면의 의미와 가면극에 담긴 옛 사람들의 이상을 풀어낸 전시가 열렸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한국의 탈을 비롯해 중국의 나희, 일본 가구라 등 유물 2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특별전 ‘MASK-가면의 일상, 가면극의 이상’을 선보인다. 전시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삼국의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가면을 비교해가며 가면극에 녹여낸 각기 다른 이야기와 삶의 지향을 풀어냈다. 특히 이번 전시는 국내 최초로 일본 ‘가구라’ 가면을 내걸어 일본 가면의 유래와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1부-다른 이야기’는 삼국 가면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한국 가면극의 특징은 풍자와 해학, 어우러짐이다. 말뚝이 대 양반, 취발이 대 노장, 할미 대 영감의 대결 구조로 극을 이끌어가다 결국 화해하고 다 같이 춤을 추며 끝난다. 전시에선 곱슬머리 등으로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양반’ 가면과 붉은색 얼굴과 큰 코로 벽사(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남성성을 나타낸 ‘말뚝이’ 등의 가면을 볼 수 있다. 특히 불타지 않아 원형이 보존된 1930년대 ‘동래야류’에 등장하는 말뚝이 가면을 볼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반면 중국의 가면극 ‘나희’는 역사 속 영웅의 이야기를 그린 점이 도드라진다. 여러 소수민족에 따라 나당희·지희·관색희·사공희 등 그 명칭도 다양하다. 전시에선 중국 귀주성 전설에 따른 24신을 그린 가면과 서유기, 삼국연의 등 영웅들을 형상화한 다양한 가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일본의 가면극 ‘가구라’는 신에게 올리는 제사의 한 과정으로 연행되는데, 신사에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가구라를 전시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2부-같은 마음’에서는 삼국의 가면극이 결국 배불리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뤄졌다는 공통점을 조명했다. 풍어·풍농의 의미를 담아 ‘강릉관노가면극’에 사용된 ‘장자마리’를 비롯해 중국의 ‘나공’·‘나파’, 일본의 ‘기쓰네’·‘오쿠로텐’ 가면 등이 전시됐다. 특히 국내에 남아있는 탈놀이 가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국보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11점 등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삼국 가면의 조형성을 비교한 ‘3부-다양한 얼굴’에선 한이 담긴 여인의 얼굴, 웃음기 가득한 익살꾼의 얼굴,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위용을 떨쳤던 옛 한국인의 얼굴들을 소개한다. 전시를 기획한 오아란 학예연구사는 “한국, 중국, 일본의 가면극은 형태는 다르지만 잘 먹고 잘 살길 바랐던 마음은 같았다”며 “행복을 추구했던 삼국의 가면 문화를 살펴보면서 관객들도 2024년에 대한 소망, 기대를 가지고 전시장을 나서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달 24일부터 선보인 전시는 내년 3월3일까지 이어진다.

"내가 제일 잘나가" 멋쟁이 조선 남자들 [전시리뷰]

조선의 남자들은 어떻게 ‘멋’을 냈을까. 격식에 맞는 옷을 차려입어 예를 갖추고 체면을 차리면서도 ‘갓’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이고, 모자 안 잘 보이지 않았던 망건에도 수를 놓았으며, 다양한 종류의 갓끈 등을 이용해 자신을 표현했다. 공·사적으로 외부와 접촉이 많았던 조선의 남자들은 장소와 용도에 따른 의복 뿐 아니라, 장식의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실학박물관에서는 이 같은 조선시대 남성들의 장신구 100여점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기획전 ‘조선비쥬얼’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여성 못지 않게 화려했던 남성의 장신구를 조명하는 첫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조선 남성들의 장식은 ‘머리’에 집중돼 있었다. 하루의 시작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조이는 일이었는데, 이 같은 행위가 끝나면 꾸밈의 반은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조선 남자를 상징하는 장신구 중 으뜸은 단연 ‘갓’이다. 당시 집한 채 가격을 호가하기도 했던 갓은 외출할 땐 반드시 착용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전시장에 들어서면 숭실대학을 설립한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가 착용했던 양태가 큰 갓이 눈길을 끈다. 갓은 모자와 양태로 구성되는데, 19세기 전반까지 모자가 높고 양태가 어깨를 넘을 정도로 커지다가 사치와 허비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19세기 후반 들어 양태가 다시 작아지는 모습을 띤다. 특히 이번 전시에선 국가민속문화재인 능창대군의 망건과 영친왕의 망건도 볼 수 있다. 남성용 헤어밴드인 ‘망건’은 상투를 튼 뒤 이마에 둘러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없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마가 패일 정도로 꽉 조여매면 눈매가 올라가 최적의 ‘리프팅’으로 인상을 바꾸기도 했다. 능창대군의 망건은 황색 말총과 검은색 말총으로 기하무늬를 넣어 짰으며, 좌우에 매화 옥관자가 달려 있다. 영친왕의 망건은 보다 원형을 잘 갖추고 있으며, 짜임이 섬세한 수작으로 좌우에 작은 금관자와 중앙의 호박 풍잠이 있다. 이 같은 장신구가 어우러진 모습은 ‘권기수 초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63세의 권기수는 양태가 좁은 ‘소립’을 쓰고 좁은 소매에 쥘부채와 선추, 안경을 들고 있으며 붉은 세조대를 맨 형태를 보인다. 실용을 추구한 장신구가 어우러진 조선 ‘멋쟁이’의 모습이다. 이밖에 당시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대나무, 구슬,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갓끈’, ‘귀걸이’, 옷고름을 매는 복식에서 중앙에서 만나는 복식으로 변화하며 생긴 ‘단추’, ‘안경’과 화려한 무늬의 ‘안경집’, 높은 신분인 남성들의 신 ‘태사혜’와 ‘나막신’ 등 남성들의 미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다채로운 장신구를 볼 수 있다. 관람객 A씨는 “옛 남성들이 사용했던 장식품은 멋과 실용, 예술성까지 돋보였다”며 “장신구를 하나 하나 해체해서 조선시대 남성들의 멋과 유행을 알 수 있게 했다. 손톱만한 장식에도 각각의 처지와 신분이 드러나 재미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를 기획한 정미숙 학예연구사는 “조선 남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는지, 어떤 장식을 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실용성에 바탕을 둔 장신구를 통해 선조들의 지혜와 공예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부터 선보인 이번 전시는 내년 2월24일까지 이어진다.

섬유예술 반세기... 실로 그리다 ‘이신자 회고전’ [전시리뷰]

“실로 그림을 그립니다. 50년대에는 실과 바늘로 기존 틀에서 벗어나는 작업을 했고, 60년대부터는 염색과 직조를 병행하며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임했습니다.” 내면의 기억과 풍경들을 ‘짜고, 엮고, 감아내며’ 손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태피스트리’라는 개념이 없었던 50여년 전, 이신자는 실을 뽑고, 엮는 거칠지만 대담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나가 불모지였던 한국 섬유예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 반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그의 섬유예술 작품 90여점과 아카이브 30여점을 한 데 모은 전시 ‘이신자, 실로 그리다’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고 있다. ‘1세대 섬유예술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에선 그의 삶의 궤를 함께 한 한국 섬유예술의 발자취와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실과 천을 다루는 일이 오래도록 여성의 몫이자 가사 노동으로 치부돼왔던 것에서 벗어나 섬유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주로 자수·염색·매듭·직조 등이 독립적인 섬유미술로 작동하던 1950~60년대에 이신자는 천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크레스파스를 칠하거나, 자수와 염색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 섬유미술의 폭과 깊이를 확장했다. 이신자의 초기작인 ‘장생도’는 사슴, 학, 거북 등 가장 한국적인 정서인 십장생을 현대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면을 촘촘히 메워가는 전통의 자수 방식에서 벗어나 실의 꼬임과 풀림을 응용하고, 천을 오려 붙이는 ‘아플리케’ 방식으로 작품의 입체감을 살렸다. 특히 1980년대 초 남편과 사별한 이신자는 ‘기구 Ⅰ’, ‘메아리’, ‘화합 Ⅰ’ 등에서 보이듯 강렬한 붉은색과 검은색의 대비를 통해 상실감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했다. 1980년대 후반엔 곡선 형태를 띤 직조의 모양이 직선으로 변하고 푸른색이 더해져 차분함 속에서 강렬한 힘을 드러냈다. 전시장 한가운데 원형으로 자리한 초대형 작품 ‘한강, 서울의 맥’은 63빌딩 등 당시 서울의 전경을 19m 길이로 구현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보이지만 날실과 씨실의 교차로 건물과 나무 한 그루도 놓치지 않고 입체감을 부여했다. 당시 작가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태피스트리에 금속을 고정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하나의 창으로 금속 프레임을 배치해 3차원 세계를 구성, 자연에 대한 확장된 시각을 제공했다. ‘산의 정기’, ‘지평을 열며’ 등은 절제된 도상과 화면 분할, 강렬한 선의 반복으로 구상과 비구상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 김진우씨(38)는 “작품의 뒤를 보면 색색의 실들이 매듭지어 지거나 꼬이면서 또 하나의 작품을 이뤄 신기했다”며 “실로 짠 그림이라는 ‘태피스트리’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섬유예술가의 예술 여정을 되돌아볼 수 있어 전시의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지난 9월22일 개막한 전시는 내년 2월18일까지 이어진다.

작가와 관객이 함께 채우는 시공간…‘2023 아워세트 : 레벨나인×손동현’ [전시리뷰]

따분한 미술관에서 창작자와 수용자가 함께 만드는 시공간이 피어날 수 있을까? ‘2023 아워세트 : 레벨나인×손동현’전이 수원시립아트스페이스광교에서 지난 5일 개막했다. 이번 기획전은 동양화로 과거에서 현재를 끌어와 동시대성을 다루는 손동현 작가와 현재에서 미래를 넘나드는 창작그룹 ‘레벨나인(Rebel9)’의 인터렉티브 작품들을 겹쳐놓을 때 생겨나는 시간선에 주목했다. 장르도, 영역도, 표현 방식도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작가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바로 창작이든 감상이든 예술을 대하는 데 있어 수용자의 자세가 우선시된다는 점이다. 손동현 작가는 동양화의 전통을 동시대의 관점으로 뜯어보는 작업을 통해 동양화를 대하는 수용자로서도 역시 능동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디지털 정보와 뉴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레벨나인의 작업 역시 자신들의 창작물이 어떻게 수용자와 연결되는지 고민해왔다. 그들의 작품은 수용자 없이는 의미를 획득하기 어렵다. 이에 관람객들은 이들이 마련한 체험의 장을 거닐며 작품을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전시를 완성하는 주체가 된다. 손동현 작가와 레벨나인의 협업으로 탄생한 ‘라이트하우스-우리가 묻는 대로’를 통해 관람객은 AI와 문답을 주고받는 항해자로서 손 작가의 작품세계를 유영할 수 있다. 질문을 입력하면 미리 정보를 학습한 AI가 몇 가지 형태의 답변을 제시하고, 관람객의 선택에 따라 감상의 방향이 결정된다. 또 다른 협업 작품 ‘만화경’ 역시 수용 주체의 선택이 작품의 빈틈을 메꾼다. 패널에서 원하는 작품을 고른 뒤 패턴 등 세부 설정을 선택하면 벽면에서 관람객이 설정한 대로 디지털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창작자와 수용자가 전시장을 교류의 장으로 가꿔내는 셈이다. 무한한 정보의 바다를 영감의 원천 삼는 레벨나인은 뮤지엄의 아카이브를 해석하고 재구성하고 수용방식을 조정했다. 이어서 만나는 ‘정보의 미술관, 미술관의 정보’는 경험에 참여하는 주체가 정보를 선별하고 판단하는 길을 비추는 조력자가 된다. 작가는 똑같은 아카이브 자료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얼마든지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집중했다.  눈길을 돌리면 손동현 작가의 ‘박달나무 동산’이 관람자를 압도한다. 수원지역을 비롯한 경기도와 전국 팔도가 자리한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들이 작가를 통해 해체되고 재조합되면서 지금 이 시점에 관람객과 공유하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변모했다. 그는 김홍도의 화법을 비슷하게 흉내내기도 하고, 그가 하지 않았을 법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손 작가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림에 투영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채로운 시점을 여러 폭의 그림에 뒤섞어 놓는 시도 자체가 곧 우리가 어디서든 정보의 분열을 경험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레벨나인의 신작 ‘매직카펫라이드’ 역시 VR(가상현실)과 AR(증강현실)로 빚어낸 또 다른 세상이다. 수원의 한 상점이라고 설정된 가상세계 속에서, 장비를 착용한 관람객들이 체험하는 모습이 전시장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송출되면서 현실과 가상이 연결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윤여진 수원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는 관람객의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이끌어내는데 초점을 맞췄다”며 “작품 감상의 스펙트럼이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가늠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2월17일까지.

“동양화 두고 충돌·교차하는 시선”…‘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전시리뷰]

동양화를 두고 동시대에 공존하는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들이 교차하고 충돌하고 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작품 세계를 구상하고 개척해왔을까.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의 기획전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가 지난 14일 개막해 관람객과 만나고 있다. 네 차례에 걸쳐 동시대 동양화를 둘러싼 담론을 다루는 ‘아아! 동양화’ 기획전 중 두 번째인 이번 전시는 동양화와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게 영역 사이 진동하는 작가들의 시각을 붙잡고자 한다. 권순영, 김선두, 김정욱, 손동현, 유근택, 이성민, 이진주, 정재호 등 총 8명의 작가들이 작품 66점을 통해 각자의 관점에서 동양화에 대한 생각을 풀어낸다. 갓 대학을 졸업한 신진 작가부터 화단에서 오랜 기간 버텨온 작가들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담겼다. 본격적으로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비치된 8인의 인터뷰 자료집은 공간을 수놓는 작품 만큼이나 중요한 전시의 안내자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구역마다 작가들의 작품이 뒤섞여 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개별 작품을 공들여 조명하는 자리라기보다는 작가들이 다양하게 펼쳐낸 작품들이 동양화라는 교집합 속에서 어떤 움직임과 에너지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보는 기회다. 이진주 작가의 ‘가짜 우물’과 손동현 작가의 ‘A.R.M.O.R.’가 같이 놓여 있는 2층 전시 공간에선 형식과 내용, 표현 방식 등에 있어 각자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분화됐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 동시대 담론과 살짝 떨어진 채 자신만의 길을 꾸려가는 이도 있다. 권순영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동양화를 논할 때 항상 관찰자의 위치에 머무르면서 자신에게 맞는 재료와 표현 방식으로 세계를 구축했다. 그가 그려낸 세계는 허구처럼 보여도 그의 내면을 마주할 때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다. 정재호 작가는 전통을 그대로 잇기보다는 변화하는 미술의 담론에 뛰어들면서 작업을 지속해왔다. 지필묵에서 시작해 장지에 아크릴을 지나 캔버스에 유화로 변화를 거듭해온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창작자가 재료를 극복하는 과정과 연결된다. 스며들거나 얹히는 재료의 물성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작가는 과거의 대상과 기억을 소환할 때는 한지를, 현재를 담아낼 땐 캔버스를 택했다. 전시장 속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사유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됐는지 어렴풋이 음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3층에 자리잡은 이성민 작가의 작품에서는 동시대성을 품은 동양화의 형식이 어떻게 재창안되는지 엿볼 수 있다. 동양화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형광색을 주저없이 사용하며 분채로 세계를 펼쳐내는 이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인지 그림인지 혼동에 빠지는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가 적극 불러오는 텍스트와 대중문화 요소들은 매난국죽으로 대표되는 동양화의 관습과 거리를 두는 시도의 일환으로 읽힌다. 동양화 작가로 활동하는 이정배 기획자는 “이번 기획전은 동양화를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다각도의 시선을 충돌하고 교차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려는 차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며 “총 4부의 기획이 끝날 시점이 되면 그 기간 동안 발견된 다채로운 쟁점이 향후 동양화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영향을 주는 담론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오는 10월9일까지.

‘백자 너머의 백자’ 展, 편안한 청백색 ‘조선 백자’ 매력에 흠뻑 [전시리뷰]

오묘한 끌림과 편안함을 주는 청백색의 신비한 빛깔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는 숭고함이 깃들어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가 형상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그것을 만들어 내는 정성이 집약됐기 때문이 아닐까. 그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현대적인 기법으로 다양한 시도를 이어온 현대 백자를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국도자재단이 오는 8월6일까지 여주 경기생활도자미술관 2층 전관에서 선보이는 ‘백자 너머의 백자’ 전시다. 전시는 이승희, 이기조, 강민수, 한정용, 고희숙, 이정용 등 대표 백자 작가 6인이 조선 백자의 숭고함을 이어오면서도 현대적으로 빚어낸 작품 300여점을 펼쳐 놓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전통적 기법을 살리면서도 판, 주전자, 접시 등 현대에 쓰임새 있게 활용되는 이기조 작가의 백자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작가의 공간 한가운데 펼쳐진 ‘백자 발’은 이 작가 공간의 백미다. 백토 재료의 물질성을 강조한 100개의 조선시대 형식의 그릇은 똑같은 듯하지만 파스텔톤으로 은은한 색이 제각각 빛을 발한다. 백자 발은 같은 재료와 같은 가마에서 구웠지만 불의 위치에 따라 산화와 환원이 반복되며 색깔이 다른 사발이 나왔다. 작가의 손작업으로 매번 달라지는 호흡과 리듬에서 오는 미묘한 변화, 장작가마의 예측할 수 없는 불길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한 백색의 스펙트럼이 감탄을 자아낸다. 이어 우연인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처지지 않고, 느긋해서 넉넉한 느낌을 주는 강민수 작가의 실용적 백자 항아리를 만날 수 있다. 강 작가는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선, ‘달항아리’ 작품을 선보인다. 강 작가는 조선 백자의 신비한 색감과 안정감은 장작 가마를 거쳐 완성된다며 장작가마를 고집한다. 작품 ‘백자 대호’는 장작가마에서 우연히 튄 재가 백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강 작가가 “다시는 못 만든다”고 선언하기도 한 65cm가 넘는 대형 달항아리는 그 거대한 작품의 위용에 백자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작품 제조 과정에서 기압 차로 선명하게 금이 간 또 다른 달항아리는 마치 무늬를 새긴 듯 눈에 띈다. 이승희 작가의 작품에선 그림을 그린듯 캔버스 위에 옮겨진 도자를 만날 수 있다. 마치 도를 닦듯 흙물을 바르고 바르는 행위를 여든 번 넘게 반복한 끝에 부조처럼 겹이 완성된 백자를 선보인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물이 3차원에서 2차원으로 재탄생한 모습에서 도자의 현대화와 확정성을 엿볼 수 있다. 거친 부속 도구와 이질감의 질감 연구가 화두인 이정용 작가는 백자의 순수한 본질을 질감으로 표현했다. 전시 공간에는 도침(陶枕)과 갑발(匣鉢) 등 과거 백자 제작 과정에서 기물을 받치고 보호하는 거친 질감의 부속 도구와 매끈하고 하얀 백자의 질감이 융합된 ‘백자 접시’, ‘백자 항아리’ 작품이 전시됐다. 이질적인 질감에서 나타나는 작품 속 백자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전시의 끝에 다다르면 장작가마를 활용해 조선 백자의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가져온 전통적 방법에서 기술과 예술의 조화로 펼쳐낸 현대 공예의 무한한 가능성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박민혜 한국도자재단 큐레이터는 “뿌리 깊은 백자 전통은 현재까지 한국인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며 “조선백자가 지니고 있는 쓸모를 찾고 전통을 너머 다양한 시도와 실험으로 현대 백자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야기를 많은 분들이 만나 백자와 한 발 더 가까워지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예술로 승화한 작가들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사계’ 下]

한국의 근현대 역사는 국권 침탈, 6·25전쟁 등으로 얼룩져 고통과 아픔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문화예술 역시 그 흐름을 함께 했다. 작가들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척박한 현실을 토속적인 동화의 세계로 승화한 동심 등을 담아 작품을 완성했다. 경기도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사계’ 중 이 같은 태곳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모아 ‘향수의 계절’ 구간을 선보인다. 총 21점의 작품 중 이건희컬렉션은 11점이 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론을 작품에 구현한 박수근은 일상의 인물과 풍경을 고유의 화법으로 담아냈다.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배제한 채 평면적 형식을 구사하는 화풍이 특징인 박수근은 ‘절구질하는 여인’에서도 검은색의 윤곽선 안에 전체적으로 황갈색을 사용해 투박한 색감을 보인다. 특히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 표면을 거칠게 마감함으로써 토속적인 미감을 풀어냈다. 전시실의 한쪽 벽에 빽빽히 자리한 이중섭의 작품이 돋보인다. ‘싸우는 소’, ‘닭과 병아리’를 비롯해 함께 전시된 ‘오줌싸개와 닭과 개구리’는 이중섭이 6·25전쟁 발발 이후 피란길에 제작한 작품으로, 특유의 천진난만함과 해학이 넘친다. 오줌을 누는 남자에 놀란 듯 닭이 도망가고, 개구리가 이 광경을 관망한다. 전통소재를 담백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 표현적이면서도 해부학적인 정확함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전시의 마지막 구간인 ‘봄, 여름, 가을, 겨울, 봄’은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처럼 여러 시련 끝에 새로운 경지를 성찰해 나간 작가들의 작품을 담았다. 17점 중 8점이 이건희컬렉션이다. 곽인식은 6·25전쟁 시기 암울한 현실이 반영된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유리, 돌 등을 화면에 붙이는 다양한 실험을 했다. 이후 색점의 화합을 이루는 화면을 보여주는 단계로 나아갔는데, 그의 작품 ‘무제’를 통해 이것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인 김환기는 구체적인 형상 대신 깊은 사유와 수행으로 선과 점을 통해 화면을 구성해 나갔다. ‘Untitled’, ‘무제’를 통해 비대상적 주제에 대한 추상성이 양식화돼 가는 그의 예술 과정을 볼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은 이번 전시와 관련, 도슨트 프로그램을 포함해 큐레이터 전시 투어 프로그램, 다문화 어린이·어르신·유아·장애인을 위한 특별 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특히 종전 온라인 예약서비스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예매 방법을 변경, 현장 발권을 가능하게 했다. 도미술관은 주중엔 시간당 50명, 주말은 시간당 100명의 관람객에게 현장에서 발권을 가능하게 하고, 노쇼 전시 티켓도 추가로 배분한다. 또 오후 5시부터 시작하는 8회차 전시를 추가로 열어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관람객의 입장이 가능토록 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방초아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사계’는 한국 근현대사 전반에 걸쳐서 예술가들이 시대와 호흡한 작품들을 선보였다”며 “그 시절들의 작품을 보면서 나의 삶을 반추하고, 동시대 예술가들의 계절을 음미하며 한국 근현대미술의 수작들을 다시 읽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독자적 여성화가의 길 구축”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사계’ 中]

경기도미술관의 이건희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사계’는 1927~2010년 일제강점기, 6·25전쟁, 분단, 민주화 운동 등 격동의 근현대 시기를 거친 예술가들이 남긴 대표작을 선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이건희컬렉션 중 여성 작가의 작품만을 별도의 공간에 모아 다른 이건희컬렉션 전시와의 차별화를 꾀한 점이다. 남성중심의 화단에서 고군분투했던 여성 작가들의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계절’은 최초의 여성화가인 나혜석, 1세대 여성 조각가인 김정숙, 여성의 관점에서 조형성을 탐구한 박래현과 천경자 등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총 16점의 작품 중 이건희컬렉션은 4점이며, 나머지는 수원시립미술관·리움미술관 등의 소장 작품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천경자의 ‘누가 울어2’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천경자는 채색화로 독보적인 화풍을 구축한 작가로, 화려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세계를 담아냈다. 1969년부터 세계 각국을 여행하기 시작한 천경자는 미국 중서부를 여행한 뒤 ‘누가 울어2’를 완성했다. 카드, 강아지, 코끼리 등이 어우러져 신비한 모습을 띄면서도 전라의 여성의 눈빛과 코끼리에 앉아 울고 있는 듯한 여성의 모습에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고독했던 그의 정서가 베어있다. 1955년 미국에서 추상 조각을 공부한 김정숙은 유기적이고 단순한 추상 형상의 작품을 선보였다. 새의 날개를 단순화해 비상의 본질에 닿으려고 한 작품 ‘비상’, 숭고한 사랑을 표현한 ‘키스’, 마광기법을 통해 표면을 완벽하리만큼 매끄럽게 처리한 ‘제목 없음’ 등 작품 3점을 통해 단순하고 상징적이며 완벽주의적으로 변모해 간 작가의 여정을 살필 수 있다. 이 외 나혜석의 ‘자화상’과 박래현의 ‘작품11’ 등도 볼 수 있다. 변화무쌍하면서도 조화로운 자연은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준다. 도미술관은 ‘자연으로부터’ 구간을 통해 자연을 소재로 독자적인 화법을 찾아간 예술가들을 조명했다. 총 16점의 작품 중 이건희컬렉션은 13점이 있다. 변관식은 자연의 장대함을 부각하는 동시에 인물을 등장시켜 작품 속 풍경을 실제 유람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강촌추색’은 가을빛이 완연한 서정적 분위기에 변관식 특유의 표현적 필묵이 조화를 이룬다. 옅은 먹에서 진한 먹으로 쌓아가듯 농담을 살린 적묵법, 작고 동그란 호초점은 그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전통 회화를 계승하면서도 근대적 화법으로 한국의 산수를 그렸다. 오지호의 후기 작품 중 하나인 ‘여수항 풍경’은 푸른 바다와 화려한 색을 입힌 배가 조화를 이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자연을 사랑해 그 생명력을 순수한 색채와 자유로운 붓의 구사로 화폭에 담았다. 오지호는 후기에 항구 풍경을 많이 그렸는데, ‘여수항 풍경’은 붓의 터치로 바다의 물결을 표현한 표현주의적인 성향과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감이 드러나는 인상주의적 성향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밖에 유영국의 ‘작품’, 도상봉의 ‘개나리’ 등 자연을 모티프로 한 한국 근현대미술의 다양한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관람객 A씨는 "이건희컬렉션 전시를 경기도에서 볼 수 있다고 해 시스템이 열리자 마자 예매를 하고 기대하며 기다렸다"며 "회화, 조각 등 한국근현대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하면서도 작가 개개인의 고민과 화풍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전시였다"고 말했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동서양 조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사계’ 上]

전 국민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건희컬렉션’이 경기도미술관을 찾아왔다. 경기도미술관은 지난 8일 이건희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사계’를 개막해 오는 8월20일까지 선보인다. 이건희컬렉션 46점과 경기도미술관을 비롯한 공사립미술관 11곳의 소장품을 한데 모아 한국 근현대미술의 추동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에선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 우리 근현대를 아우르는 대표 작가 41명의 작품 총 90점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은 이들 작품을 ‘조화’, ‘자연’, ‘향수’, ‘순환’ 등의 개념으로 분류, 이를 다시 ‘새로운 계절’, ‘자연으로부터’, ‘또 하나의 계절’, ‘향수의 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등 5개의 구간으로 나눠 전시했다. 다채로운 화음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을 녹여낸 이번 전시를 세 차례에 걸쳐 따라가 본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조선의 화단은 서양미술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해외 유학을 다녀온 화가들이 등장하면서 서양의 기법을 동양의 기법 등과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전시의 첫 번째 구간인 ‘새로운 계절’은 동서양의 융합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정취를 보이는 근현대 작품을 채워넣었다. 총 20점의 작품 중 이건희컬렉션은 14점이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는 ‘사내아이’는 단 4점만 전해지는 김종태의 작품 중 하나다. 김종태는 서양미술의 재료인 유화로 한복을 입은 사내아이를 그려 서양의 기법을 전통과 조화시키는 현대적인 화풍을 보였다. 대담한 색을 사용해 한복의 주름 등을 거침없이 묘사하고, 조는 아이의 모습을 정면에서 포착해 단순하면서도 과감한 구성을 택했다. 특히 사내아이가 졸고 있는 모습에서 일제강점기의 혼란스러운 현실을 잊으려 했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인성의 ‘석고상이 있는 풍경’ 역시 수채로 세련된 기법을 보이지만 옥수수, 사과, 마늘 등 한국적 도상을 그려넣어 향토색을 표현했다. 1931년 일본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이인성은 서양의 기법으로 한국적 색채와 주제를 탐구했다. ‘복숭아나무’는 이인성 특유의 짧은 붓 터치로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로 햇빛과 그늘의 대비를 만들어 공간감과 깊이감을 드러냈다. 채색화에 두각을 나타냈던 김기창은 일본화풍의 채색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화와 풍속화를 재해석한 독자적인 양식을 완성했다. ‘소와 여인’은 이 같은 독자적 화풍의 결과물로, 하단의 검은 소가 추상적으로 표현돼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종이의 거친 질감을 살려 한국적인 주제에 대한 향수를 자아낸다. 이 밖에도 동양적 사유인 부처상과 현대적 매체인 TV를 조합한 백남준의 ‘TV 부처’ 등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각각의 방식을 달리해 융화의 양상을 보여준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안미희 경기도미술관장은 “한국의 현대미술이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그 근원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며 “근현대미술의 대표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소개한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공립미술관이 가져야 하는 사명감, 학예사들의 열정으로 이건희컬렉션 전시를 마련했으니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붙잡아야 삶과 가까워질까…‘남은 인생 10년’ [영화리뷰]

불치병에 걸려 인생이 ‘10년’밖에 남지 않은 여자는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영화 속 대사처럼, ‘10년’이라는 기간은 마냥 짧지도 않지만 또 그렇다고 무작정 길지도 않아 마음을 어디에 두고 시간을 보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난치병으로 생을 마감한 고사카 루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남은 인생 10년’이 지난달 24일 개봉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예상가는 전개, 전형적인 장르 공식을 따라가는 멜로드라마일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흘러가는 시간을 버텨내는 삶을 담는 방식에 관한 고민들을 꾹꾹 눌러 담았기에 주목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화가 시간을 어떻게 스크린에 옮겨놓았는지 살피는 일이 인물들의 삶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제공한다.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영화를 1년에 걸쳐 찍으면서, 시간 변화에 따라 배우들의 감정선을 매만졌다. 계절이 바뀌고,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에 다다른다. 촬영 환경에서 배우들은 뜨거운 햇빛을 받으면서 입김을 ‘호호’ 부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자연스럽게 몸을 감싸는 온도와 습도, 바람과 냄새에 의지해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내면의 감정에 귀 기울일 수 있다. 흩날리는 벚꽃잎, 불꽃 튀던 여름밤의 공기, 선선한 바람을 타고 멀어지는 낙엽 등을 넓은 화면 속에 담아내는 과정은 단순히 수려한 영상미 확보만을 위한 과정이 아니다. 죽기 위해 살고 있는 마츠리가 쓰러졌던 그 가을날의 어느 산책로에 어떤 공기가 맴돌고 있을지, 죽음을 극복하고 삶의 의지를 이어가는 카즈토가 뒤를 돌아본 그 벚꽃길에서 눈앞을 스치는 꽃잎은 어떤 향과 사연을 품고 있을지 관객들도 함께 느껴볼 기회를 만드는 셈이다.

‘한국화 전문 화랑’ 수장의 작품 기증… ‘동녘에서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 [전시리뷰]

“제 선친이 미술계에 들어와 평생 일을 하고 생계를 꾸리면서 한국 미술계에 조그마한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남겼습니다. 그 바람에 따라 형제 간 뜻을 모아 의미있는 작품들을 기증하게 됐습니다.” ‘수집가’의 작품 기증은 미술인으로서 한 개인이 쌓아 온 역사를 기증한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작가의 작품 기증도 그 사례가 많지 않지만, 수집가의 작품 기증 사례는 더욱 드물다. 박우홍 동산방화랑 대표는 지난 2021년부터 2차례에 걸쳐 동산방화랑의 설립자인 부친 박주환(1929~2020)이 수집한 209점의 작품, ‘동산 박주환 컬렉션’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동산방화랑은 지난 1974년 서울 인사동에서 본격 운영한 한국화 전문 화랑으로,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실험적인 전시를 해 현대 한국화단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동산 박주환 컬렉션’ 209점 중 94점의 한국화 대표작을 선정, 내년 2월12일까지 ‘동녘에서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을 연다. 이번 전시는 시대 흐름에 따라 총 4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허백련의 ‘월매’가 압도적인 규모로 눈길을 끈다. 오랜 세월을 견딘 매화 고목을 10폭의 병풍에 먹으로 섬세하게 묘사했다. ‘북풍이 불어 사람을 넘어뜨리는데 고목은 변하여 거친 쇠가 되었네’란 좌하단 시구와 우측의 여백을 향해 뻗어 있는 매화 가지가 묘한 균형을 이룬다. 1945년 광복 이래, 서화가들의 창작 방식 중 하나로 자리잡은 ‘합작’ 문화를 헤아릴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이상범·김기창·정종여의 ‘송하인물’엔 3개의 호(號)와 낙인이 찍혀 있다. 소나무는 정종여, 인물은 김기창, 좌상단의 화제는 이상범이 써 그림을 완성했다. 소나무 아래 바위에 기대 달을 감상하는 인물을 묘사했는데 먹과 색, 화제와 서정적인 여백이 조화를 이룬다. 특히 현대 도시의 건물을 색으로, 가로수를 과감한 수묵으로 표현한 송수남의 ‘자연과 도시’, 섬세한 필선과 담채의 조화로 8명의 소녀와 여인을 표현한 장운상의 ‘한일’ 등을 통해 전통과 현대의 표현방식을 절충한 당시 청년작가들의 현대 한국화도 만날 수 있다. 윤소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한국화 전문 화랑의 작품 기증으로 50년 역사의 한국화 특성을 보여주는 전시가 마련됐다”며 “이번 전시로 한국화 연구 기반이 확장되고 수집가들의 기증문화가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은 ‘수집가’가 기증한 작품을 살펴보며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뒀다. 전시장을 찾은 김현주씨(52)는 “한 개인이 쌓아올린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돼 의미가 있고,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작품들을 한국 미술사의 변천사를 보듯 관람하게 돼 보는 재미와 감동이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백남준의 세계와 직관적으로 친해지는 기회…‘사과 씨앗 같은 것’展 [전시리뷰]

‘난해하지 않게,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백남준의 예술 세계’.  백남준아트센터의 ‘사과 씨앗 같은 것’이 지난달 27일 개막했다. 동시대와 소통하면서도 항상 시대를 앞서 갔던 백남준의 삶을 만날 수 있다. 백남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만프레드 레베, 만프레드 몬트베, 알도 탐벨리니, 앨런 캐프로, 오토 피네, 저드 얄커트, 제임스 시라이트, 토마스 태들록의 작품을 다루는 이번 전시는 백남준을 비롯해 그의 곁에 머물거나 그를 스쳐갔던 작가들을 통해 백남준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높이는 데 집중했다. 총 29점의 작품과 인터뷰 프로젝트 비디오 14점이 관람객과 만난다. 전시는 1980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임의 접속 정보’ 강연 도중 백남준이 당시 새롭게 태동한 매체인 비디오에 대해 예술과 소통이 교차하는 지점에 ‘사과 씨앗 같은 것’이 있다고 언급한 데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이 씨앗은 무엇일까. 교차점에서 생겨날 어떤 가능성 내지는 잠재력에 대한 기대가 녹아 있는 비유로 읽힌다. 이번 전시에선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그 사과 씨앗을 어떻게 하면 싹틔울 수 있을지 백남준의 삶과 생각을 따라 고민에 빠져볼 수 있다. 백남준의 삶에서 뽑아낸 주요한 순간들이 전시장 곳곳에 스며들었다. 공연과 실험 작곡에 몰두하던 그가 독일에서 품었던 생각들, 텔레비전과 비디오 아트를 통한 프로젝트 작업으로 전 세계를 누볐던 시기의 작품들을 만난다. 이 가운데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에게 영향을 줬던 주변 동료 작가들, 그가 작업 때 작성했던 글을 함께 배치하고, 작품의 내부 구조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등 관람객과의 소통에 초점을 맞춰 전시를 기획했다. 본격적으로 전시공간에 들어가면 처음 맞닥뜨리는 벽면에 연보가 보인다. 백남준이 1963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는 등 당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사진들과 함께 아주 간결한 사건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글자와 숫자로 도배된 과다한 정보량을 들이미는 전시들과 다르게, 관람객과 백남준 세계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이는 구성이다. 지난해 센터가 수집한 신소장품인 ‘랜덤 액세스 오디오테이프’는 백남준의 초기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백남준은 1963년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선보인 첫 개인전에서 마그네틱 테이프를 풀어 제각기 조각으로 잘라낸 뒤 벽면에 붙여 놓았다. 이 테이프 조각에 관람객이 금속 헤드를 갖다대 녹음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든 ‘랜덤 액세스’를 그가 다시 제작한 작품이다. 다시 만든 작품은 나무판에 붙은 테이프를 통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청취가 가능하도록 제작됐다. 소통을 강조한 전시의 기조 때문인지 전시장에서 눈에 띄는 작품들이 여럿 있다. ‘나는 이 곡을 1954년 도쿄에서 썼다’는 벽면의 흑경과 함께 배치돼 있다. 텔레비전의 후면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내부 구조를 흑경에 반사된 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이 같은 구성은 전시장 초입에 있던 ‘퐁텐블로’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 기존의 작품을 이루던 CRT 모니터는 수명의 제약이 있어 사용시간이 한정돼 있으므로, 일부 뒷부분을 LED와 디빅스플레이어로 교체한 상태다. 내부 구조를 육안으로 볼 수 있기에, 이처럼 작품에 깃든 역사도 함께 음미하는 기회도 열린다. 전시를 기획한 조권진 학예사는 이번 전시에 대해 “백남준의 작품을 따라가는 데 있어 그가 활용한 기술과 아이디어, 함께 했던 작가들로부터 받은 영감과 그들의 피드백 등 단계적인 소통을 체험할 수 있게 전시를 기획했다”면서 “작품의 구성 원리와 기술의 구조적인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훨씬 깊게 이해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의 작품은 태생적으로 기술을 매개로 예술의 확장성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2월12일까지 열린다.

양평군립미술관, ‘양평·몽골 현대미술展’ [전시리뷰]

한국과 몽골의 현대미술 작품 110점을 한 공간에 모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양평군립미술관에 양국의 문화적 교류와 함께 몽골과 한국의 수교 33주년 의미를 더해주는 자리인 ‘양평·몽골 현대미술展’이 마련됐다. 몽골인 작가 29명과 양평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작가 25명이 각각 빚어낸 몽골 작품 84점, 한국 작품 26점이 내걸렸다. 양국의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작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몽골의 자연환경을 담은 영상이 2층으로 향하는 길 벽면에 상영되고 있다. 영상에선 몽골의 유목 생활 모습과 드넓은 평야에서 말과 양 등 몽골의 가축이 뛰어다니는 장면이 나오며 이곳을 지나면 몽골의 암각화와 몽골 풍경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또 몽골 전통 음악인 흐미가 흘러나와 몽골에 가지 않아도 몽골 현지의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게 도와준다. 이어지는 2층에는 양평군 작가들의 회화 26점이 전시돼 있다. 그중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푸른 소나무를 낡은 철판 위에 그려낸 김성우 작가의 ‘일월오봉도 2023’가 눈에 들어온다. 낡은 철판 위에 전통 회화를 담은 독특함과 함께 높은 산과 나무가 없는 대초원 지대 몽골 특성상 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서용선의 ‘NY subway 2013’은 한 사람이 지하철 공간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모습을 그려냈다. 19세기 이후 개발된 대중교통 수단 지하철 공간의 운영과 함께 그에 맞게 적응해 행동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캔버스에 표현했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지나면 몽골 작가들의 작품이 내걸린 드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몽골이 품은 국가의 색채와 정체성이 단버에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든다. 아말사이항 작가의 ‘Ancient Queens 2022’는 화려한 색의 전통의상과 모자를 착용한 여성들을 담아냈다. 고대 여왕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작가만의 기법으로 현대적인 방식으로 표현해 눈길을 끈다. 흑질바야르의 작품 ‘To be or not to be 2018’에서는 기린, 곰, 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들이 나무로 된 사각형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작품은 지구온난화와 인류의 악한 행동으로 야생동물 멸종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내용을 담았다. 현 시대의 수많은 장점과 더불어 존재하는 단점을 작가만의 현대적 시각으로 풀어냈다. 전시를 기획한 라현정 양평군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인류가 직면해 있는 다양한 현상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며 “양국의 현대미술 전시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인류 공동체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는 5월21일까지.

삶은 좋고, 죽음은 나쁠까?…경기도극단 연극 ‘죽음들’ [공연리뷰]

살아간다는 건 바꿔 말하면 죽어간다는 것. 우리는 결국 죽기 위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삶은 좋기만 하고, 죽음은 나쁘기만 한 걸까? 지난 2일부터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는 경기도극단의 연극 ‘죽음들’은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만날 기회다. 그렇다면 죽으러 가는 우리들에게 누군가는 ‘잘 죽어서 사후세계에 도착하는 법’을 안내해줘야 한다. 무대 위에서 느린 속도로 기이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늙은 죽음(김성태)과 젊은 죽음(최예림)이 바로 그 역할을 떠안은 안내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이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산 자의 곁에 동행하고 있었다. 늙은 죽음과 젊은 죽음은 어두운 무대 위 초록색 섬광을 받으면서 이런 말들을 내뱉는다. “상처받게 하지 말어, 우리는 누굴 죽이러 온 게 아니야. 태어날 때 산파가 필요하듯 죽을 때도 준비가 필요해. 우린 그걸 도와주러 온 거야. 누구나 죽는 건 처음이니까…”, “사람들은 눈에 안 보이면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아…우린 늘 곁에 있었거든”. 천혜자(김지희)는 딸 지율(이은)과 아들 한율(김형준)의 걱정 속에 죽음을 앞두고 있다. 지율은 엄마 곁을 맴도는 죽음을 향해 증오와 거부감을 드러낸다. 우리 엄마 데려가지 말라면서 예정된 죽음을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지율은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죽음이 오는 게 싫다며 죽음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그랬던 그가 연극의 종착지에 이르면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극 ‘죽음들’은 지율을 통해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질문을 만들어낸다. 지율의 서사가 전개되는 동안 엄마 혜자는 죽으러 간다. 그 과정에서 무대 위로 끼어드는 젊은 시절의 혜자(장정선). 그는 딸 지율이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에서 자신이 지율로 태어날 걸 알지 못하는 존재(육세진)와 대화를 나눈다.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장면은 또 있다. 결국 지율과 함께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다른 쌍둥이 아들(노민혁)이 늙고 병든 혜자가 죽고 난 뒤 사후세계에서 만난다.   이처럼 관객이 도착한 무대는 단순히 몇 마디 설명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곳이다. 무대 위는 우리에게 익숙한 삶 속의 시간들이 이어지다가도 갑작스럽게 관객들이 낯설게 여길 만한 삶 이전의 세계를 함께 구현하고 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시작되는 세상, 마치 뱃속의 어딘가를 형상화한 듯한 삶 이전의 세계가 지속되다가 갑자기 현실 속 사람들이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거나,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전환된다. 또 죽고 난 뒤의 세계도 묘사돼 있다. 흥미롭게도 각각의 세계가 공존하는 장면도 많다. 후반부로 갈수록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시간과 공간들이 점점 한 무대 위에 공존하는 장면이 늘어나는데, 각기 다른 곳에 있던 존재들이 한데 모여 함께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울림 있는 대사를 내뱉는 구간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면서 펼쳐왔던 독특한 서사에 짙은 여운을 남긴다. 연극을 보다 보면 배우들의 의상과 대사와 몸짓, 배경과 음악의 조절 등을 통해 계속해서 교차하는 시공간의 변화를 관객들이 잘 따라갈 수 있도록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 이번 작업을 총괄한 김정 경기도극단 상임연출은 황정은 작가가 빚어낸 희곡 속의 텍스트를 무대화하는 작업에 있어 먼저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누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연출의 단초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김 연출은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계속해서 교차하고 함께 다룰 때 관객들이 그 장면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이번 작업의 최대 과제였다”라고 덧붙였다. 무대는 7일까지 이어진다. 

그가 공간에 정서를 투영하는 법…‘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리뷰]

한 남자가 오고가며 자신의 눈에 담겼던 공간을 캔버스 위로 불러낸다.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그의 공간은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곳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2023년 해외소장품 걸작전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가 지난 20일부터 서소문본관에서 개막해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서울시립미술관과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공동으로 기획해 선보이는 작가의 첫 국내 개인전으로 화제를 모은다. 미국의 국민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 160여점, 산본 호퍼 아카이브의 자료 110여점을 7개 섹션으로 나눠 선보이는 전시다. 관람객들은 이번 전시에서 프랑스 파리에서 구도와 화풍에 변화를 줬던 호퍼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뉴욕이라는 도시가 지닌 시공간적 특성의 빈틈을 파고들었던 작업 스타일도 엿보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호퍼는 자신의 눈에 담긴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가 캔버스에 풀어낸 공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연이 깃든다. 파리, 뉴욕,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 등 대도시부터 여행지 속 자연까지 호퍼는 일상 속에서 자신이 갔던 곳을 소재로 예술 세계를 표현해냈다. 사실 관람객은 ‘퀸스버러 다리’ 등의 작품을 볼 때면 그가 강 위의 배에서 강 건너의 풍경을 봤을지 배의 창문을 통해서 비친 풍경을 봤을지 알 수 없으며, ‘황혼의 집’, ‘밤의 창문’과 같은 작품을 통해선 그가 옥상에 서서 건너편 건물의 창가를 응시했을지 건물 안의 창문을 통해서 맞은편 사람을 바라봤을지도 예상하기 힘들다. 이처럼 그가 무심코 바라 봤던 교각의 돌출부, 목장의 지붕, 극장의 장식물 등 각 공간이 지닌 입체적인 특성뿐 아니라 그가 당시 장면을 바라봤던 위치와 구도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도록 모호하게 표현돼 있다는 점이 그림의 매력을 더한다. 호퍼의 그림 속 공간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전시장을 수놓는 호퍼의 그림들은 대부분 수직 구도보다 수평 구도에 맞춰져 있다. 눈의 시야각에 맞춘 영역까지만 표시하는 그의 그림은 그래서 사실주의의 흔적이 짙게 묻어나지만,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그리기로 결정한 이미지들에 대해서 장소와 연결되는 감정과 생각을 결합해 새로운 상상지대를 만들어낸다. 그 영향 때문에 배경의 세부 요소가 모호하게 뭉개지거나 빛과 그림자로 둘러싸인 채 본래의 형상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 호퍼의 그림 속 사람들은 대개 뒷모습이거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공간을 차지한다. 상당수 그림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일상의 공간이 그림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우선 매만지고 있지만 사람들 역시 그의 그림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다. ‘푸른 저녁’은 시간대를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한 기운이 맴돌고 있다.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로도, 사물이 만드는 그림자로도 지금이 어스름한 저녁인지 자정이 지난 시점인지도 알 수 없다. 이곳 카페를 찾은 사람들은 서로 대화나 교감이 전혀 없다.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우울한 색채보다 더 짙은 적막감을 만든다. 파리에 있던 호퍼가 뉴욕으로 돌아온 뒤 그 당시의 생활을 떠올리면서 만들어낸 그림이라는 점에서, 어디까지 호퍼의 상상이고 어디까지 실제 카페 속 풍경인지 감상자는 확인할 수 없다는 점 역시 그림의 모호한 정서를 극대화한다. 이승아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에드워드 호퍼는 20세기 초 현대인이 마주한 정서를 예리하게 포착해 화폭에 담아내 현재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며 “이번 걸작전이 팬데믹 이후 고립과 단절, 소외가 만연한 오늘날에 필요한 전시로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해를 넓힐 뿐 아니라 고단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시공을 뛰어넘는 위안과 공감을 선사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는 8월20일까지.

이런 가족도, 저런 가족도 모두 정상 아닌가요?…수원시립미술관 ‘어떤 Norm(all)’ [전시리뷰]

어떨 때 ‘정상’이고 어떨 때 ‘비정상’인가. 한국 사회는 임의로 설정된 기준과 규범에 따라 끌어안을 요소와 배제할 요소들을 선별한 뒤 차별을 정당화한다. 정치, 경제, 환경, 외교 등의 거대 담론이 아닌 피부로 와 닿는 일상조차도 ‘강요된 정상성’에 물들어 있다. 식생활, 외모, 패션, 주거 형태….그 중에서도 ‘가족’을 바라보는 통념은 오랜 기간 갇힌 틀을 맴돌며,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과 그 형태에 정답이 있는 듯 각자의 미디어 환경을 비롯한 일상에 영향력을 떨쳐왔다. 지난 18일 수원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현대미술 기획전 ‘어떤 Norm(all)’은 ‘어떤 가족이 정상인지’ 관람객들에게 질문한다. 강태훈, 김용관, 문지영, 박영숙, 박혜수, 안가영, 업체eobchae(김나희, 오천석, 황휘), 이은새, 장영혜중공업, 치명타, 홍민키 등 분야를 막론하고 활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참여했다. 다큐멘터리, 회화, 사진, 설치 등 다채로운 분야의 작품들이 3부로 구성된 전시장 곳곳을 수놓고 있다. 이곳에 모인 작품들은 저마다 결이 다르고 지향점도 다르지만, 모두 관람객과 상호작용할 때 작품의 의미가 완성이 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품고 있다. 1부의 작품들은 전통 속 가족의 모습을 조망하면서 그 이념을 해체하려는 작업의 전초전을 위해 모였다. 강태훈 작가의 ‘나쁜 피’는 사회에서 작동하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은유적인 오브제를 통해서 들추는 작업이다. 박혜수 작가의 ‘우리 친밀도 검사’를 통해선 관람객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가족에 대해 어떤 인식을 지녔는지 확인해볼 기회다. 2부에선 정상성의 폭력이 만들어낸 그늘 속에 늘 존재해왔던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을 만난다. 문지영 작가는 ‘엄마의 신전’ 회화 연작으로 개인의 경험을 캔버스로 끌고 와 정상과 비정상을 어떤 척도로 나눌 수 있는지 반문하고 있다. 그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문제 제기뿐 아니라 그 다음 단계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 느껴진다. ‘엄마의 신전 Ⅴ’ 속 남자가 사라진 공간에 어머니와 장애를 지닌 아이가 서로 의지한 채 서 있는 모습은 전형적인 가족 사진처럼 보인다. 이들을 가족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떻게 불러야 할까? 문 작가의 작품을 통해선 정지된 회화가 사회 문제를 머금었을 때 어떤 생명력으로 둘러싸이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작법을 활용해 만든 홍민키 작가의 ‘들랑날랑 혼삿길’ 역시 성소수자 민기, 그의 연인과 가족들의 생각을 교차해서 담아내며 다양한 목소리와 생각을 관람객들과 나누고 있다. 이어지는 3부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가족을 정의하고 구성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생각들이 엿보인다. 김용관 작가에겐 서로가 서로를 익숙하게 받아들여야만 가족이 성립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의 믿음이 반영된 설치 작품 ‘무지개 반사’는 다양성과 평화를 상징하는 무지개 색상을 관람객들이 친근하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작됐다. 김 작가는 “작품에 깃든 그래픽 요소에 대한 가치 판단보다 그것들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게 될 때 화합과 공존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를 기획한 장수빈 큐레이터는 “최근 몇 년 간 혼란에 빠진 한국 사회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이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족’에 관한 이야깃거리였다”면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 속 가족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동시대 작가들의 관점을 빌려 조명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8월20일까지.

이희문과 경기시나위, 한바탕 울고웃은 '민요연습실' [전문가 리뷰]

‘민요연습실’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다섯 단원에 관한 얘기였다. 거기엔 웃음과 눈물이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시원하게 털어놓는 그녀들의 얘기는 케이블방송의 토크쇼보다 더 재미있었다. ‘민요연습실’은 어떻게 재미와 감동을 주었을까? ‘우리 노래는 좋은 것이여’라고 한 마디도 외치지 않았다. 예술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일반 직장인과 별반 다름을 확실하게 알려줬다.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민요를 하는 단원들만의 영업비밀(?)도 알려주었다. 경기민요 대표곡 ‘노랫가락’ 곡조안에, 각자의 얘기를 노래 가사로 잘 담아냈다. 화려한 한복 속에 감춰진 그녀들의 고군분투기가 감동이었다. ‘우리비나리’(구희서 작사, 이준호 작곡)엔 더 큰 뭉클함이 있었다. 경기도립국악단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전신)의 창단연주회(1997년)에서 초연되었다. 민요선율과 국악관현악이 만난 불후의 명곡을 남긴 작사가와 작곡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란 말을 여기서 해도 될까? 두 분께 크게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5인 중 최고참은 박진하. ‘긴아리랑’은 누구나 부르고 싶지만, 아무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긴아리랑’이 원래 그리움이 절절히 배어있다면, 박진하가 부르는 노래는 여기에 더해서 오랜 직장생활을 견뎌낸 뿌듯함이 더해졌다. 함영선은 선배와 후배 사이에 끼어있다. 자신도 긴아리랑을 부르고 싶지만, 배우지도 않았던 ‘병정타령’을 무대에서 불러야 했던 에피소드가 참 코믹하다. 연기를 잘해서 인정받은 하지아는 그동안 소리극에서 주인공을 참 많이 맡았다. 만삭의 상태에서도 주인공을 잘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힘듦을 내색도 하지 않고 무대에 올랐을 그녀의 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심현경은 막내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도 이젠 솔찮이 많아졌다. 후배가 언제 들어올 것인가? 막내인 그녀는 선배들과 다른 모습으로, 오늘도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다. 정가를 전공한 강권순 악장은 직장생활 2년 차의 초짜. 전공도 다른 상태에서 단원들과의 화합을 지향한다. 정가에 속하는 ‘수양산가’를 단원들에게 알려주었고, 정가와 민요가 어우러진 새로운 노래가 탄생했다. ‘어울렁더울렁’은 이들의 노래에 딱 맞는 표현이다. 신원영이 음악감독과 편곡을 맡았다. 경기민요의 본질적인 특징을 그대로 살리면서, 여기서 새로운 사운드를 입혔다. 고급지고(!) 깔끔하다. 앞으로 국악을 연구해서, 신원영만의 독특한 작품으로 사랑을 받게 될 것 같다. ‘민요연습실’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란 서양속담이 있다던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민요연습실을 마치 다큐를 찍듯 솔직하게 보여줬다. 이런 성공의 배경에 경기소리꾼 이희문이 있다. 그는 이렇게 연출가로서의 역량도 튼튼히 쌓아가고 있었다. 윤중강 국악평론가

아트스페이스J, ‘사진집 밖으로 걸어 나온 사진’展 [전시리뷰]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지그시 바라본다. 사진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다. 한 장의 사진은 왜 이 사람이 이 피사체에 카메라를 갖다 댔는지, 그렇게 찍힌 사진이 현상과 인화, 인쇄, 출력에 이르기까지 어떤 여정에 몸담았는지 상상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남 아트스페이스J에서 진행 중인 ‘사진집 밖으로 걸어 나온 사진’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유명한 사진집의 표지에 실리거나 책 속에 수록된 사진들을 사진집과 나란히 배치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사진이 독립된 개체가 아닌, 책 속의 표지 사진으로 바뀌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원본 사진과 표지로 재편집된 사진 사이에는 어떤 관계와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을까. 10주년을 맞는 아트스페이스J는 오랜 기간 갤러리 차원에서 모아 왔던 소장품들을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다. 사진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만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사진전이나 사진집 출간기념회가 아닌, 사진과 사진집을 함께 음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카메라로 찍어낸 사진을 액자 속의 사진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어 선택한 용지나 기법에 따라 색감과 결이 천차만별 달라진다. 매체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사진의 특성 차이를 음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첫 번째 홀에서는 필름 현상에서 인화에 걸쳐 프린트까지 인위적인 개입을 없앤 스트레이트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들을 주로 접하게 된다. 처음 맞닥뜨리는 사진은 1985년 6월 ‘내셔널 지오그래픽’지 표지를 장식한 ‘아프간 소녀’다. 미국의 사진작가 스티브 맥커리가 찍은 이 사진 속 소녀가 책 표지를 벗어나 액자 속에서 우리를 응시한다. 책이 발간될 당시 출판사의 편집 부서가 왜 이 사진을 골랐는지, 원본 사진이 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떤 스토리가 있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홀에서는 동시대 한국 작가들이 찍어낸 사진의 매력을 찾아보는 시간을 만끽한다. 양성철 작가의 ‘좋은 깃발 별이 되어’가 동명의 사진집 속 표지로 안착한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표지로 쓰인 사진이 아니더라도, 사진집에 실려 있는 사진들 중 전시실 벽에 소환된 사진들도 있다. 오상조 작가의 ‘당산나무_전북 장수’가 그 예시다. 학예팀 측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들과 협의를 통해 사진에 더 잘 어울리는 프레임을 고르는 데에도 신중하게 접근한 만큼, 사진이 소속된 장소와 사진을 머금은 매체들에 따라 어떻게 감상이 달라지는지도 확인 가능하다. 또 전시를 보다가 마음에 들거나 흥미를 끄는 사진이 있다면, 그 사진이 실려 있는 사진집을 들고 홀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사진집을 감상해볼 수도 있다. 전시를 기획한 한혜원 큐레이터는 “사진 매체가 대중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시를 기획했다”며 “코로나19의 영향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서 사진집을 펼쳐보는 등 접촉과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번 기획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주실 지 걱정이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전시는 27일까지.

소통의 오류 빠진 가면 쓴 현대인…수원시립공연단의 ‘억울한 여자’ [공연리뷰]

억울함을 토로하는 여자. 여자는 왜 억울할까? 무엇이 그를 억울하게 만들었을까? 가면 쓴 현대인들은 살아가는 내내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내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소통 속의 단절을 느끼는 한 여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고장난 현대사회의 단면이 드러난다.   수원시립공연단의 정기 공연 연극 ‘억울한 여자’가 24일부터 26일까지 수원SK아트리움 소공연장에서 공연됐다. 구태환 연출은 쓰치다 히데오의 희곡을 특별히 각색하는 대신 원작의 결을 살려 작업했다. ‘도쿄’ 등의 지명, ‘가사하라 유코’ 같은 배역명 등이 모두 일본 원작을 그대로 따라간다. 국내 관객에게 익숙하게 하려면 현지화 작업을 하는 편이 좋았겠지만, 수원시립공연단의 ‘억울한 여자’는 그 노선을 선택하지 않았다. 구태환 연출은 “특히 대화의 연속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리듬으로 인물의 심리를 빚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관객들이 무대 위 배우들이 느끼는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기회였으면 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2002년 일본에서 집필됐던 이 작품이 2008년 한국 초연을 거쳐 다시 2023년 수원에서 상연될 때 어떤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는 걸까. 무대 위 배우들이 각자의 배역을 지금 이 시점에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동시대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다.  일본의 어느 지방 소도시의 한 커피숍이 연극의 주 무대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서로 근황을 나누고 마음을 확인한다. 주인공 유코는 다카다가 쓴 그림책을 읽고 그에게 흥미를 느꼈고,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잘 이해하는 작가인 그의 팬을 자처해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는다. 유코는 네 번째 결혼, 다카다는 재혼이다. 연극을 보다 보면 이전의 세 남편이 왜 유코의 곁을 떠나갔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과연 유코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 남편들이 그를 떠나간 건지 의구심이 커진다.  유코는 자신의 마음을 전부 내보일 때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본인이 판단하기에 진정성 있고 문제 없다고 여긴 행동이 세상 사람들에겐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유코를 둘러싼 사람들은 언제나 많지만, 그는 철저히 고립된 존재다.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이해할 수 없고 유코 역시 세상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모두가 ‘소통의 오류’에 빠진 셈이다. 연극을 다 보고 나면 느껴지는 단어는 ‘불편함’, ‘위선’, ‘고립’이다. 인물들의 대화는 시종 삐걱댄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상의 대화가 아닌, 적막감과 머뭇거림이 쉴 새 없이 머문다. 일부러 딱딱하게 선을 긋는 사람도 있고, 과도한 친절로 무장해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이 속으로 하는 생각을 숨기고 비위를 맞추는 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사람도 많다. 이 과정에서 말을 뱉기 전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상대방 역시 그 정적을 충분히 감지한다. 관객들도 그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을 그대로 목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연극은 관객을 무대 장치로 압도하지 않는다. 한정된 공간에서만 진행되는 연극에서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그 대화 사이를 파고드는 공기다.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만 받아들이며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면 배척한다. 그와 같은 소통의 단절과 오류가 현 시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각자의 자화상을 제공한다는 점이 지금 이 연극이 우리의 내면에 다가올 수 있는 이유다.

1세대 조각가 김윤신 개인전 ‘더하고 나누며, 하나' [전시리뷰]

올해 여든여덟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인 1세대 조각가 김윤신. 그가 평생 주력해온 조각의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더하고 나누며, 하나’ 전시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지난달 28일 개막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지나온 60여년의 작품활동을 각각의 공간에 담아냈다. 작가는 재료 본연의 성질을 파괴하지 않고 재료가 담고 있는 본래의 속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을 추구한다. 전시 제목인 ‘더하고 나누며, 하나’는 1970년대 후반부터 작품 제목으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의 의미를 한글로 간략히 풀어냈다. 하나의 작품명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은 작가의 작품 철학이 확고하면서도 그 의미가 품을 수 있는 범주가 그만큼 넓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 작가가 프랑스 유학 동안 제작한 석판화들이 등장하는 1층의 첫 섹션은 ‘예감’이다. 대부분의 석판화의 작품명이 ‘예감’인데 그중 1967년에 제작된 ‘예감’에 눈길이 간다. 태극문양을 표현한 듯하면서도 나선형 계단이 보이기도 한 작품은 흑백에 다소 차이를 주면서 약간의 공간감을 준다. 직선과 곡선이 겹쳐진 표현은 김윤신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공통된 조형적 특성을 예감할 수 있다. 두 번째 섹션 ‘우주의 시간’은 김 작가가 목조각을 하는 중간에 약 5년 동안 멕시코와 브라질에서 오닉스(Onyx)를 소재로 가장 힘든 과정을 동반해 작업한 석조각을 전시했다. 평범한 겉면을 깎아내 속살을 드러내면 나타나는 각기 다른 색을 띠는 결은 고급스러운 느낌과 마치 우주를 보는 듯 신비롭다. 다음 섹션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면 복도 끝에서 마치 양팔을 벌리고 환영하는 듯한 알가로보 나무로 제작한 T자 형태의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1994-520’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작품을 비추는 조명은 그림자를 만들어 활짝 편 날개를 연상시킨다. 세 번째는 전시 제목과 같은 ‘더하고 나누며, 하나’는 그가 평생 주력해온 목조각이 펼쳐진다. 1970년대 ‘기원쌓기’ 시리즈의 작품들은 제목처럼 수직적인 쌓기에 집중했으며, 돌탑과 장승 등 한국의 토테미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가 추구하는 원 성질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휘어지고, 벌레가 먹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모습이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한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작가의 독특한 철학을 형성했다. 음양사상의 원리를, 수렴하고 더해지는 ‘합’과 분열하고 나뉘는 ‘분’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 뒤 조각을 통해 표현했다. 1984년 김윤신은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알가로보, 팔로산토 등 둘레가 크고 밀도가 높은 목재를 재료로 썼다. 단단한 나무가 빚어낸 볼륨감 속에 응결된 힘과 건축적 구조가 엿보인다.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 십자가 모양, T자 모양과 같은 형태로 전시된 작품을 통해 작가는 나무가 지닌 상징성에 절대적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덧대어 표현했다. T자 모양 나무의 끝부분에서는 한옥의 처마나 한복 소매 배래선을 품은 듯한 곡선의 미학이 묻어난다. 마지막 섹션 ‘노래하는 나무’에서는 김윤신이 지난해부터 한국에 있으면서 제작한 작품들이 보인다. 자연의 생명력을 노랑과 초록의 생동감으로 표현한 대형 회화 ‘내 영혼의 노래’뿐 아니라 호두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목조각도 보인다. 이들 중 일부는 경쾌한 느낌을 자아내듯 형형색색 채색돼 있다. 1983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김윤신 작가는 국내에서 활동이 상대적으로 적어 덜 알려졌다. 미술관은 대중들이 작가를 알아갈 수 있도록, 한국 여성 조각사의 확장을 위한 마중물이 되도록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는 오는 5월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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