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읽는 동시] 하느님의 회초리

하느님의 회초리 오순택 빗금으로 오는 비는 하느님의 회초리 회초리 맞고 풀잎은 푸른 멍이 들고 꽃잎은 얼굴이 붉어진다. 더 푸르게 더 아름답게 피어나라는 하느님의 매운 회초리 풀꽃이 아름다운 이유 필자는 이 동시를 읽고 나서 세 번 놀랐다. 한 번은 하느님은 말씀으로만 훈계를 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었고 또 한 번은 응징의 뜻으로 회초리를 드시는 게 아니라 격려의 차원에서도 회초리를 드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란 것은 이 비밀을 오순택이란 시인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었다. 아무튼 흥미로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온 세상의 풀잎과 꽃잎이 푸르고 아름답게 피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회초리 덕분이라는 사실이 놀랍고도 반갑다. 50, 60대 이상 된 이들은 회초리에 대한 추억을 한두 개쯤은 갖고 있으리라. 부모님한테서 받은 회초리 추억이거나 선생님한테서 받은 회초리 추억이거나.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잘못한 일에 대한 응징? 아니면 잘되라고 내린 격려? 같은 회초리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아픔의 차이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동시 속의 하느님은 ‘더 푸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피어나라는 뜻으로 풀잎과 꽃잎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이를 안 풀잎과 꽃잎은 웃으며 하느님의 회초리를 달게 받았다. 해서 말인데, 하느님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풀잎과 꽃잎에게만 회초리를 들지 마시고 제발 우리들한테도 따끔한(?) 회초리를 내리시옵소서.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제비꽃

제비꽃 박민순 큰 꽃은 대충 넘겨보지만 쪼그리고 앉아 가까이서 본다 어린아이가 기도하는 듯한 너를 자세히 본다 잘났다 뽐내지도 못났다 숨지도 않고 작은 키 곧추세워 꽃을 피우니 아름다운 네 모습에 내가 젖는다. 평범함 속 아름다움 제비꽃은 키가 작다. 키뿐 아니라 생김새도 조그맣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만큼 쪼그리고 앉아야 간신히 눈을 맞출 수 있는 꽃이다. 시인은 하고많은 대상 속에서 왜 제비꽃을 시제로 삼았을까. 시인은 제비꽃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들을 찬양하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다. 잘났다고 뽐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목소리조차 소음이 될까 봐 조심하는 이들. 먼저 달려 나가기보다는 함께 가고 싶은 이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해주려는 이들. 더불어 사는 삶이 곧 행복이라고 여기는 이들. 운동회 때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다리를 묶어 달리기를 한 경험이 있다. 결승선까지 넘어지지 않고 달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보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를 튼튼히 받쳐주고 있는 것을 본다. 목소리만 커가지고 나라니 국민이니 앞세운 사람들은 오히려 가만히 있는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 동시는 그런 뜻을 은연중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네 모습에/내가 젖는다.’ 그렇다. 꽃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나비처럼 걷다

나비처럼 걷다 송영숙 아파트 뒷동산 오솔길 짧은 오르막길 지하철 타러가는 지름길 내가 즐겨 걷는 길 배롱나무 꽃잎 잔뜩 떨어진 오늘 아침 오솔길 떨어진 꽃잎, 밟히면 아플까 나비처럼 가볍게 걷는다 오솔길 옆 작디작은 풀꽃 위를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꽃은 꺾는 게 아니라 보는 것 오솔길은 혼자 걷도록 난 길이다. 그래서 실처럼 가늘다. 굳이 넓을 필요가 없다. 사람 하나 빠져나가면 되는 길이 오솔길이다. 반면에 오솔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이 동시는 지하철을 타러 가는 아이의 마음을 보여준다. 엊저녁에 비가 왔는지 길에는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져 있다. 아이는 땅에 떨어진 꽃잎을 밟지 않으려고 걸음을 조심스레 떼 놓는다. 아이의 마음이 천사 같다. 어릴 적 읽은 동화가 생각난다. 공원에서 뛰놀던 아이가 바람에 날려 모자가 꽃밭으로 들어가자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꽃밭에 들어가면 꽃이 망가질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마침 공원에 산책 나왔던 노신사가 이를 보고 지팡이로 꽃밭의 모자를 건져 내준다. 동심은 어렵게 얘기할 것 없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내 몸처럼 여기는 것이다. 지난번 화마에 잿더미가 된 산과 들을 보며 우린 많은 생각을 했다. 한순간의 부주의가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와 함께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인간의 행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자연 속에 있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골탕

골탕 이성자 엉뚱하기로 소문난 우리 반 대풍이 4학년으로 올라온 첫날 -선생님,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그야, 된장찌개지. -그럼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요? 잠시 생각에 잠긴 선생님 활짝 웃으며 -그야, 골탕이지. 한 방에 아웃된 대풍이 일 년 내내 힘 못 쓰겠다. 짓궂은 학창시절 추억 어느 학급이고 짓궂은 친구가 있다. 특히 선생님만 골라서 골탕을 먹이기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이 동시 속의 대풍이도 그중 하나다. 4학년이 돼 처음 맞는 선생님을 골탕 먹이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 대풍이. 그런데 이를 눈치 챈 선생님이 먼저 한 방을 먹인다.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 ‘골탕’이라고. 이때의 대풍이 표정은 어떠했을까. 보나 안 보나 우거지상이었을 것 같다. 학창시절은 참 많은 추억을 남긴다. 그 가운데는 아름다운 추억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추억도 있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좋은 친구도 있지만 못된 친구도 있다. 남을 골탕 먹이기 좋아하는 친구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런 친구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모범생보다 말썽꾸러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던가. 글도 다를 게 없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은 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반면에 못된 짓만 골라 하는 골칫덩어리는 항상 글의 중심에 선다. 위 동시에서 대풍이가 착한 아이였다면 이성자 시인은 글을 못 썼을 것이다. 고맙게도 말썽꾸러기였기에 작품 하나를 얻은 것이다. 작가들은 이처럼 고약한(?) 아이들을 찾아다닌다. 그러고 보면 작가들도 참 못된 취향을 갖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웃음꽃

웃음꽃 권말순 벚꽃 목련꽃 개나리 이런 꽃보다 더 예쁜 꽃은 웃음꽃 내 친구가 나를 볼 때마다 보내주는 웃음꽃 결코 시들지도 않는 항상 싱싱한 꽃 친구야, 고마워. 가까운 행복 한세상 사는 데 친구처럼 좋은 것도 없다. 얼굴만 봐도 좋은 게 친구다. 어릴 적엔 아침부터 꼬박 하루를 같이 놀고도 다음 날이면 또 놀고 싶은 게 친구다. 그래서 나온 말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지 않던가. 이 동시는 친구의 웃는 얼굴이 꽃보다 더 예쁘다고 노래한다. 웃음꽃이 벚꽃, 목련꽃, 개나리보다 더 보기 좋다고 한다. 그 이유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웃음꽃은 결코 시들지 않기 때문이란다. 맞다! 친구의 웃음 한 바가지는 상대방의 가슴을 환한 물결로 넘치게 한다. 여기에다 웃음은 전염성도 강하다. 웃음 한 바가지를 선물받은 이는 만나는 이에게 또 옮겨준다. 어릴 적 읽은 만화 생각이 난다. 아침에 꾸지람을 들은 아이가 강아지한테 화풀이를 하고도 모자라 빈 깡통을 냅다 발로 걷어찼다가 하필이면 그 깡통이 지나가던 아주머니의 종아리를 때리고 울상을 짓는 만화였다. 날로 각박해지고 웃음기가 메말라가는 요즘이다. 이런 때일수록 나부터 웃음꽃 한 송이 피우는 일은 어떨까. 그리고 그 웃음꽃을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에 꽃씨를 심듯 넣어준다면? 행복이란 게 어디 별건가. 고된 삶일지라도 이렇게 작은 웃음꽃 한 송이 주고받으며 사는 게 행복 아니겠는가.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까치집

까치집 정용원 미루나무 꼭대기 반쯤 지은 까치집 아빠 까치는 서까래 구하러 가고 엄마 까치는 솜털 담요 사러 간 사이, “주추와 기둥은 튼튼한가?” 바람은 한바탕 흔들어 보고 “아기 까치 태어나면 둥지 안은 포근한가?” 봄 햇살은 뱅그르르 둥지 안을 돌아본다. 사랑의 보금자리 까치는 주로 미루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는다. 왜 낮은 곳을 마다하고 그 높은 곳에 삶터를 장만하는 걸까. 높은 곳일수록 바람도 세고 빗줄기도 강할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까치들은 지금까지 미루나무 꼭대기를 고수해 왔다. 거기에는 필연코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까치집은 엉성하기 그지없다. 비쩍 마른 나뭇가지와 진흙을 얼기설기 얹어놓은 데 불과하다. 이 동시는 바로 그 점을 걱정하고 있다. 바람은 얼기설기 지은 까치집이 튼튼한지 어떤지 흔들어 본다. 또 햇살은 까치집 안이 포근한지 어떤지 둥지 안을 들여다본다. 까지집을 걱정해주는 바람과 햇살의 마음이 참 어여쁘다. 무엇보다도 까치 부부의 사랑이 너무도 아름답다. 머잖아 태어날 새끼 까치를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부부의 정성어린 행동이 따뜻하기 그지없다. 그러고 보면 까치나 인간이나 부모는 같은가 보다. 그 많은 가운데서 만난 인연을 함께 가지고 간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변함없는 삶을 이어간다. 정용원 시인은 원로 아동문학가로 얼마 전에 산수 기념으로 ‘동심문학 반세기’란 문집을 출간했다. 50년의 동심문학을 총정리한 것이다. 축하와 함께 앞으로의 건승을 기원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새싹

새싹 장춘희 들썩, 연노랑 새싹 아기의 작은 어깨 짓 대지를 들어 올린다 또 한 번의 안간힘으로 언 땅을 밀고 올라온 왼쪽 어깨 세상마저 들어 올린다 봄은 늘 여린 몸짓으로 우주를 여는가 보다 어여쁜 ‘봄’ 봄은 참 대견하다. 겨우내 꽁꽁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온다. 봄은 참 귀엽다. 연둣빛 싹을 쏘옥 내미는 것을 보면 꼭 잠에서 막 깬 아기 얼굴을 보는 것 같다. 이 동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린 몸짓으로 우주를 연다’는 것. 시인은 왜 ‘강한 몸짓’ 대신 ‘여린 몸짓’이 우주를 연다고 했을까. 강한 몸짓이 우주를 여는 데 더 좋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강한 것보다 여린 것이 더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는 법. 두꺼운 외투를 벗기는 것은 북쪽의 찬 바람이 아니라 따사로운 햇볕이다. 마찬가지로 봄은 왁자지껄하게 오는 게 아니라 소문도 없이 온다. 그게 봄의 어여쁨이다. 필자의 친구 가운데도 ‘봄’ 같은 이가 있었다. 중학교까지 같은 학급에서 공부한 그 친구는 언제나 조용했고, 은근했고, 말이 없었다. 그냥 좋으면 배시시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싫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 게 그 친구의 태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미적지근한’ 친구로만 대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간 후 우리는 그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다. 그의 조용한 태도와 은은한 미소가 종종 떠올랐다. 요즘처럼 시끄러운 세상에 봄 같은 그 친구가 생각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봄은 예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낮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어른을 꿈꾸는 아이

나도 엄마 강금순 휴일 아침 늦잠 자는 엄마 대신 화장대에 앉은 꼬마 아가씨 분첩 꺼내 조심스럽게 톡톡톡 눈썹연필로 삐뚤삐뚤 입술은 붉은 립스틱으로 범벅 —나도 엄마다! 거울 들여다보고 미소 짓는다 큰 가방 둘러메고 현관으로 달려가서는 엄마구두 신고 뒤뚱뒤뚱 큰소리로 —회사 다녀올게!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어른이 돼서 더 너른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 이 동시는 엄마가 되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화장대 앞에 앉아 엄마가 하던 행동을 흉내 내본다. 얼굴에 분도 발라보고, 눈썹도 칠해보고, 입술에 립스틱도 발라본다. 그러고는 나도 엄마라고 미소 짓는다. 어디 이것뿐인가. 회사에 출근하는 엄마의 흉내까지 내본다. 큰 가방도 둘러메보고, 엄마 구두도 신어보고. 어릴 적엔 누구나 이런 짓을 한두 번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른들 눈에 띄어 한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어른이 뭐 그리 좋다고. 쯧쯧쯧.” 살아보니 어른만큼 걱정 많은 인생도 없다. 눈만 떴다 하면 하루가 걱정으로 시작해 걱정으로 끝난다. 집 걱정, 일 걱정, 돈 걱정, 자식 걱정. 걱정을 내려놓고 지낸 날이 과연 몇 날이나 되던가. 언젠가 한 잡지에서 엄마를 반납하고 싶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게 소원대로 이뤄진다면 어른을 반납하기 위한 엄마들의 줄이 끝도 없을 것이다. 이 ‘나도 엄마’는 그런 의미에서 미소 짓게 한다. 동시는 때로 어른들 앞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그러면서 혼자 쓸쓸히 미소 짓게 한다. 아, 서글픈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어른들이여!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마음의 양분

세찬 비바람에도 쑥 햇님의 사랑을 받아 쑥 자고 일어났더니 또 쑤욱-쑥 매일매일 다르단 말이지 넌 바로 너 말이야 이 동시를 읽다 보니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아침마다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 벽에다 표시를 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옆집 수동이도, 태식이도, 영자도 그랬다. 우린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키재기판이 없던 시절 이야기다. 시인도 어릴 적에 그랬나 보다. 하루라도 빨리빨리 자라고 싶어 ‘쑥’이란 어휘를 사용했다. 매일 조금씩 자라고 싶은 게 아니라 단숨에 쑥쑥 자라고 싶었나 보다. ‘세찬/비바람에도/쑥//햇님의/사랑을 받아/쑥’. 그리고 또 있다. 시인은 여기서 키만 노래한 게 아니다. 아이의 마음도 함께 노래했다. 쑥쑥 자라는 만큼 마음도 튼튼해져야지 다짐한 것이다. 내 어릴 적에 비하면 요즘 아이들은 키도 크고 체격도 당당하다. 좋은 환경에서 영양가 있는 음식 먹고 자유롭게 자라는 덕분이다. 그러다 보니 서양의 청소년들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국제경기에서도 당당한 체격을 보여주는 우리의 청소년들이다. 기왕 자라는 김에 튼튼한 체력만큼 꿋꿋한 의지와 인내심까지 지니기를 바라고 싶다. 시인은 몇 해 전, 동시집 ‘아기별 탄생’을 일본어판으로 내 왕인 박사를 흠모하는 일본 어린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하기도 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겨울꽃

겨울꽃 김흥제 밤새 변한 하얀 세상 나뭇가지에 눈꽃 피고 장독뚜껑은 흰 모자 쓰고 길엔 하얀 비단 깔렸다. 얼른 나가 하얀 비단 만져보니 보들보들, 사르르 녹는다. 아깝지만 콩콩 발자국 찍으니 흰 국화꽃이 피었다. 겨울이 꽃을 보려고 흰 눈을 불렀나 보다. 백색의 풍경화 올겨울은 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아니, 제법 내린 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심하게’ 내렸다. 그로 인해 농가의 피해까지 발생했다. 축사가 무너지고 비닐하우스가 뜯겨지고, 사람이 상해를 입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 동시는 어린이의 마음으로만 겨울의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폭설로 인한 현실의 고통을 왜 외면하느냐고 나무랄 것까진 없다.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이니까. 오히려 아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듯이 온 세상의 변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뭇가지에 내린 눈, 장독대에 내린 눈, 길에 내린 눈. 아이는 눈도 만져보고, 눈 위에 발자국도 찍어 본다. 그러면서 아이는 생각하는 것이다. 겨울이 꽃을 보려고 흰 눈을 불렀나보다라고. 겨울을 겨울답게 해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눈이다. 흰 눈을 보기 위해 동남아인들이 한국에 관광 왔다는 뉴스를 며칠 전 접했다. 마침 떡가루 같은 눈이 내려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여행비는 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코리아 넘버 원!” 돌아가 눈 위에서 찍은 사진을 자랑할 게 뻔하다. 겨울꽃이 만발한 한국의 설경, 그 백색의 풍경화만큼 우리들의 마음도 갈등 없는 하나였으면 참 좋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같이 가는 길

같이 가는 길 최영재 모두 한 동네로 갈 것처럼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 있지만 각자 버스와 눈이 맞으면 반가이 차에 올라 먼저 앉은 손님 둘러본다. 같은 차타고 같은 길로 함께 가는 인연 처음 만난 사이지만 어쩐지 눈맞춤하며 씩 웃고 싶다. 동시는 어린이는 물론이고 어른들에게도 좋은 문학이다. 특히 나이 든 어르신들에게는 더욱 권하고 싶은 독서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잠시나마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고 무엇보다도 치매 예방에 좋기 때문이다. 이 동시는 시내버스를 같이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같은 차타고 같은 길로 함께 가는 인연/처음 만난 사이지만/어쩐지 눈맞춤하며 씩 웃는다.’ 어찌 이를 어린이들이나 읽어야 하는 동시라고 할까. 같은 방향으로 가는 버스 안의 사람들은 인생길에서 만난 ‘인연’으로 바꿔 읽어도 좋지 않은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우주의 시간 속에서 만난 우리들이다. 이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놀랍게도 어린이가 읽어야 할 동시가 귀띔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단순 간결한 몇 줄의 언어로 말이다. 시인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할 적에도 전교생 앞에서 그렇게 ‘간결한’ 훈화를 한 걸로 유명하다. 어디 훈화만인가. 시인은 축구 실력도 보통을 넘어 프로에 가깝다. “슛은 말이지요. 반 박자 빨라야 해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시인은 타이밍을 시에도 적용하는 기지 넘치는 작가다. 얼마 전 펴낸 동시집 ‘어린이 명함’에서도 이를 여실히 보여줬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겨울철새

겨울철새 이경화 벼를 베고 난 들판에 차디찬 바람 몰고 온 집 나갔던 기러기 떼로 몰려 와 흩어진 낱알 허겁지겁 먹고 있어요 염치는 있는지 여문 곡식 거둔 뒤에 몰래 들어와 살그머니 눈치 보며 먹고 있어요. 적막한 들판 반가운 손님 겨울 들판은 쓸쓸하다 못해 적막하기 그지없다.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들풀마저 떠난 허허로운 들. 여기에 찬 바람까지 불어와 냉랭하기만 들. 그러나 이 적막한 들판을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오는 반가운 친구들이 있다. 바로 겨울 철새들이다. 그들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몰려와서는 한바탕 놀다 간다. 시인은 이 고마운 친구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듬어 안았다. 추수 끝난 빈 들판에 떨어진 곡식을 ‘훔쳐’ 먹는 그들을 나무라기는커녕 장난기 가득한 필치로 그려 놓았다. ‘염치는 있는지/여문 곡식 거둔 뒤에 몰래 들어와/살그머니/눈치 보며 먹고 있어요.’ 염치, 눈치란 말이 참 재미있다. 아니, 그 의미를 곱씹게 한다. 농사꾼이 거둬 가고 남긴 낱알을 주워 먹는 걸 염치로 아는 기러기가 우리네 인간보다 나아 보인다. 염치를 아는 이런 기러기에 비하면 우린 언제부턴가 참으로 염치없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눈치도 마찬가지다. 어디 주위의 눈치 보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부끄럼을 가르칩니다’란 소설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런 제목의 소설이 나왔을까 싶다. 올해는 제발 염치를 아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다. 여기에 주위의 눈치도 보며 사는 우리가 됐으면 참 좋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눈물

눈물 박상재 눈이 녹으면 빗물보다 진한 눈물이 된다. 눈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질펀하게 눈물이 스며 파란 씀바귀 싹이 돋고 노란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든다. 눈사람의 눈물이 한 세상을 열었다. 눈물이 여는 세상 올겨울에는 예년에 볼 수 없었던 폭설이 내렸다. 지난번 내린 폭설의 잔해가 아직도 응달에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 동시는 눈이 녹은 물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노래한다. 땅속으로 스며든 눈물로 하여 말랐던 대지를 뚫고 나온 씀바귀가 싹을 틔우고,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나비들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눈사람의 눈물이/한 세상을 열었다.’ 시인이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새로운 세상은 ‘눈물’이 가져온다는 것. 새해다! 우리들의 뜨거운 눈물로 새로운 세상을 열자. 이제부터는 갈등과 반목과 다툼을 씻어내자. 미움과 질시와 경멸도 한 방에 날려 버리자. 담을 쌓고 지냈던 울타리도 훌훌 걷어내자. 따듯한 시선으로 서로서로 바라보자. 기왕이면 손도 잡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자. 저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이 어디 보통 인연인가. 산다는 게 뭐며 행복이란 뭔가. 더불어 사는 것보다 더 즐거운 삶이 어디 있겠는가. 뜨거운 눈물만이 새로운 세상을 연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 기도하자. 마음을 활짝 열어 세상을 바라보자. 희망은 좋은 것! 좋은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들의 눈물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신발 두 짝

신발 두 짝 문삼석 신발 두 짝이 나란히 누워 소곤소곤 얘기했대요. -우린 일할 땐 따로따로지? -그렇지만, 쉴 땐 이렇게 함께잖아?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어느 집이건 신발장을 열면 신발 두 짝이 나란히 진열돼 있다. 큰 신발은 아빠 신발, 조금 작은 신발은 엄마 신발, 그 옆에 놓인 누나 신발, 형 신발 그리고 내 신발. 모두모두 나란히 놓여 있다. 이 동시는 바로 그 두 짝의 신발을 노래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두 짝 신발의 주고받는 대화다. ‘-우리 일할 땐/따로따로지?/-그렇지만, 쉴 땐/이렇게 함께잖아?’ 시인은 신발을 통해 ‘가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침 식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은 후 각자 일터로 떠났다가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는 가족의 이야기다. 가족은 거실에 모여 앉아 차라도 한 잔씩 나누며 오늘 하루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 이야기 가운데는 보람찼던 이야기도 들어있을 테고, 힘들었던 이야기도 들어있을 테고, 속상한 일도 들어있을 터. 가족은 거기서 삶의 즐거움과 함께 행복을 느낄 뿐 아니라 고단함과 피로를 씻기도 한다. 그리고 또 있다. 내일의 희망도 서로서로 주고받는다. 이 동시를 읽다 보니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란 그림이 생각난다. 가난 속에서도 삶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가족의 저녁 식탁. 시인은 바로 우리들 모든 가정의 평화로운 저녁을 소망하며 이 동시를 쓴 건 아닐까 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담

담 박옥주 현이와 다툰 뒤 담이 생겼다. 잠도 못 잤다. 밤사이 담 위에 하얗게 눈이 쌓였다. 눈은 봄이 오면 녹지. 현이와 나 사이 담도 눈 녹듯 사라졌으면... 내리는 눈에 녹는 마음 친한 친구와도 때론 다툴 때가 있다. 별것 아닌 걸 가지고도 토라지고 말도 하지 않는다. 어릴 때일수록 더 그렇다. 이 동시가 그 좋은 예다. ‘현이와 다툰 뒤/담이 생겼다.’ 담은 이쪽과 저쪽을 갈라 놓는 경계선이다. 쳐다볼 수도 없을 뿐더러 오고갈 수도 없게 한다. 높은 담장일수록 더욱 그렇다. 무엇 때문에 다퉜는지 모르나 현이와 다툰 아이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밤이 깊을수록 미웠던 마음이 사그라진다. 오히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쳐든다. 친구 사이는 그렇다. 나라 사이에도 담이 생긴다. 그래서 생긴 게 국경이다. 그런데 국경 아닌 ‘이상한’ 국경도 있다. 우리나라가 그 좋은 예다. 같은 민족이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진 지 햇수로 80년이나 됐다. 이 기막힌 운명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것도 갈라지기만 했으면 괜찮다. 적이 돼 3년 내내 피를 흘리며 싸웠다.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눈은/봄이 오면 녹지.’ 맞다. 봄이 오면 겨울눈은 녹게 마련이다. ‘현이와 나 사이/담도 눈 녹듯/사라졌으면….’ 이게 어찌 동시 속의 아이뿐이랴. 정말로 녹아야 할 눈은 남과 북의 눈이다. 그리하여 삼천리금수강산에 통일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를! 진동하기를!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파리똥

파리똥 임상미 어젯밤 우리 집에 파리가 왔다갔나 봐 밤새 내 얼굴에 점을 찍었어 아마도 화장실을 잘못 찾았나 봐 파리야, 우리 집에 놀러 오려거든 현관문 옆 모퉁이가 화장실이야 알았지? 아이의 다정한 안내 파리는 집 안의 골칫거리다. 식탁에서 밥을 좀 먹으려면 언제 나타났는지 먼저 먹겠다고 대들지 않나, 잠 좀 자려면 가 먼저 눕겠다고 시위를 한다. 게다가 실내 온도가 따뜻하다 보니 겨울철에도 활개를 치며 다닌다. 이쯤 되면 골칫거리도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 작품 좀 보라지? 동시 속의 아이는 파리를 미워하기는커녕 다정한(?) 친구쯤으로 여기고 있다. 자기 얼굴에 똥을 싸 놓고 간 파리를 향해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살살 달랜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시인의 마음이 예쁘다. 어느 노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여름날, 냇가에서 모기에 물린 종아리를 내려다보며 요만한 ‘관계’라도 있어야 공생하는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미소를 짓는다. 이쯤 되면 모기도 좋은 친구다. 그러니 가려운 것쯤은 참을 만하다. ‘파리야, 우리 집에 놀러 오려거든/현관문 옆 모퉁이가 화장실이야.’ 모기에게 길 안내까지 해주는 이런 친절이 바로 동심이다. 동시는 동심을 담는 그릇. 동시 작가는 그 그릇에 향기를 넣는 사람. 임상미 시인은 계간지 문학과비평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온 햇병아리 아동문학가다. 그런 만큼 신인다운 패기와 열정으로 남들이 가지 않은 문학의 길을 가기 바란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가을 담벼락

가을 담벼락 장성유 가방 메고 도서관 가는 길 바람이 쏴아 담벼락에 붙어 빨갛게 물든, 담쟁이 이파리들. “내 손 잡아 줘.” “내 손 잡아 줘.” 따스함이 필요한 계절 가을은 두 얼굴을 가진 계절이다. 하나는 풍요로움의 계절인가 하면 또 하나는 쓸쓸함의 계절이기도 하다. 이 동시는 후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담벼락에 붙어 있는 쓸쓸한 담쟁이 이파리들을 노래하고 있다. 점차 차가워지는 세찬 바람에 담벼락에서 떨어질까 걱정을 하는 이파리들. 차디찬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한다. 어찌 이파리들뿐이랴. 우리 주변에도 이파리 같은 이들이 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이들. 의지할 곳 없는 어린이와 노인들.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가 생각난다. 폐렴을 앓는 존시란 여인은 창 너머 담벼락의 잎들이 모두 지고 나면 자신의 생명도 끝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 존시를 위해 이웃의 무명 화가 베어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담벼락에다 잎새를 그린다. 그 어떤 세찬 바람으로도 떨어뜨리지 않을 잎새를!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본 그 이야기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전히 남아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내 손 잡아 줘.” 오늘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자. 삶의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이파리들이 있나 없나 둘러보자. 있다면 손을 내밀어 잡아 주자. 따뜻한 손 하나면 된다. 자, 어서!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가을 들녘

자연이 주는 선물 신진호 부지런한 농부 할아버지의 땀방울 뽀얀 알곡 되어 주렁주렁 농군 할머니의 어깨춤 부르는 벼이삭의 수런거림 사락사락 나들이 나온 메뚜기 가족 흥에 겨워 폴짝폴짝 풍요의 바다 너른 들판 황금빛 이삭물결 남실남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여름 내내 뙤약볕 아래서 땀 흘린 농부들의 부지런한 노동으로 무르익은 곡식을 거둬들인다. 그 아름답고도 장엄한 광경을 이 동시는 음악성으로 보여준다. ‘주렁주렁’, ‘사락사락’, ‘폴짝폴짝’, ‘남실남실’. 우리말이 참 다양하고도 맵시 있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시인은 들녘의 풍요를 인간으로만 찬송하지 않고 메뚜기 가족까지 합세시켜 상생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삶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바라만 봐도 넉넉해지는 것! 어릴 적 우리 동네 어른들은 누렇게 익은 논만 바라봐도 배가 부르다 하셨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논 둘러보기를 좋아하셨다. 나이 들어 보니 그 어른들의 삶의 행복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집 안에 숨겨둔 돈뭉치보다 자연의 풍요와 넉넉함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자연은 우리 모두의 것이어서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신의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좋은 선물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것 또한 우리 모두의 의무이리라. 시인은 몇 해 전에 ‘젓가락이 숟가락에게’란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사물을 대하는 시안이 예리하면서도 따듯해 읽을수록 삶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다. 동시도 부지런히 써줬으면 좋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휴대전화

휴대전화 이경자 말도 못하는 두 살배기 손자 할머니 생각나면 휴대전화를 가져온다네요 영상통화하며 눈빛으로 마음을 읽고 함박웃음으로 대화를 한다네요 멀리 모로코의 손자와 영상으로 이어주는 휴대전화가 참 고맙다. 눈빛만 봐도 알아요 요즘엔 휴대전화 안 가진 사람이 없다. 농사짓는 시골 할아버지도, 채소 파는 할머니도 휴대전화는 필수다. 게다가 수시로 이용한다.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나 싶다. 이 동시는 해외에 나가 있는 손자가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영상으로나마 대화를 하고 싶어 휴대전화를 가져온다는 작품이다. 아직 어려서 말은 못하지만 눈으로는 얼마든지 대화를 할 수 있는 영상통화. 얼마나 고마운 대화인가. 시각장애인들은 수화로 대화한다. 손짓, 눈짓에다가 표정까지 얹어 자기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고 보면 대화의 방법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니, 서로 얼굴만 봐도 훌륭한 대화가 되는 것이다. 언젠가 읽은 소설이 생각난다. 교도소 면회실에 창살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죄수인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은 끝내 말 한마디 없이 면회를 끝낸다. 굳이 말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침묵 속의 대화에 더욱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말을 못하는 손자가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휴대전화를 갖고 오는 이 장면 하나가 그 어떤 대화보다도 정답지 않은가. 휴대전화가 갑자기 강아지나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똑같은 시간인데

똑같은 시간인데 한희숙 어제 아침 9시는 시간이 너무 빨라 지각할 뻔했는데 배가 아픈 오늘 9시는 시간이 너무 느려 병원 앞 계단에서 9시 병원 문 여는 시간 기다린다. 어제오늘 똑같은 우리 집 벽시계인데 왜 이런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시간'은 요술쟁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월급 날짜는 왜 그리 더디 오는지, 세금 낼 날짜는 왜 그리 빨리 오는지, 방학은 왜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게 ‘시간’이라는 요술쟁이다. 이 동시는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등교 때면 빨리도 달음박질하는 시간. 몸이 아파 진료받아야 할 땐 느림보 시간. 이건 아이의 마음이나 어른의 마음이나 같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동화를 읽은 기억이 난다. 집을 보던 어린아이가 세 시간만 있으면 엄마가 돌아온다는 말에 시계 시침을 한 시간 앞으로 돌려놓고 좋아라고 손뼉을 친다. 그러고는 제 시간에 돌아온 엄마를 향해 왜 늦게 왔느냐며 따지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엄마의 표정이 지금까지도 웃음을 자아낸다. 이 동시 속의 아이처럼 시간을 맘대로 돌려놓고 싶은 게 우리 인간의 마음이리라. 즐거운 시간은 길게, 힘든 시간은 앞으로 빠르게. 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인간의 수명도 맘대로? 이건 아니다! 시간을 공평하게 주신 신이 노하겠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리라. 기다릴 줄도 알아야겠고, 참아야 할 줄도 알아야겠고. 사는 일은 이 두 가지를 몸에 익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윤수천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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