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부국원이 보이는 풍경-향교로

부국원은 종자와 종묘, 농기구, 비료 등을 판매했으나 조선총독부 산하 농사시험장 등과 연계돼 산미증식계획과 식민지 농업 수탈의 어두운 역사에 일조한 곳이기도 하다. 1950년대 수원지방법원과 지방검찰청, 수원교육청사와 민주공화당사, 수원예총회관 등으로 변모했으나 1980년대 이후 박 내과라는 병원이 있었다. 나이 많으신 원장님은 2015년경 이 건물을 매물로 내놨다. 필자는 이 근대적 향수가 있는 건물이 참 좋았다. 그러나 한 건설업자가 이 건물을 원룸으로 재건축할 계획으로 사들였다. 필자는 언론매체에 이 사실을 알리고 건물이 사라지지 않을까 안타까워했다. 다행히 시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재매입해 위기를 넘겼다. 건축주는 애초의 계획을 변경해 부국원 옆에 보이는 원룸만 짓게 된 것이다. 필자의 화실에서 뒷문을 열면 팔달산의 사계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젠 이 원룸에 가로막혀 숨이 막힐 듯 답답하다. 벚꽃 피는 봄도 단풍잎 고운 가을도 볼 수 없다. 한때는 이 거리가 수원의 중심 도로였지만 45년을 살아온 길 치곤 그다지 변한 게 없어 어쩌면 정감이 간다. 건너편 행궁동에 비해 유동 인구가 적어 소규모 가게들의 생업은 어렵지만 말이다. 저녁 눈처럼 그리움 묻어 오는 이 길을 오늘은 주간반 최승은님이 그렸다. 도화지 앞에만 서면 하안거의 스님처럼 정진하는 그의 과도한 몰입이 날로 깊어짐을 느낀다. 뜻깊은 꿈이 길을 이룬다는.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무속 신앙

역마살이 끼었다고 H는 속으로 말했다. 특별한 이상향도 없지만 계절풍처럼 내 안이 요동칠 때면 배낭을 멨다. 다시 그런 미래가 온다면 거친 길보다 편하고 뻔한 여행을 하고 싶다. 아름다움 뒤에 누추하고 불편했던 것들은 젊음을 무기로 각박하고 빈약한 삶을 헤쳐 나갔던 것과 양립했다. 빌딩 숲속에 과학과 화려한 실존이 존재한다면 변두리 빈민가엔 늘 근심과 걱정과 실체 없는 허구가 난립한다. 매교동 변두리는 무속 신앙이 널브러졌다. 2년 전에 그린 그림을 살펴보니 지금도 바뀐 게 없다. 보이지 않는 담벼락 안에 빨간 지붕이 덮여 있다. 연등이 빨랫줄처럼 걸렸고 장대에 나치 기를 뒤집어 놓은 무당의 깃발이 매달렸다. 징 소리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허약한 곳에 여린 삶이 신을 의탁해 살아가고 있다. 액운을 덜어내려고, 가로막힌 앞을 뚫어내고 가뭄에 봇물 터지듯 생이 윤택하게 자라길 빈다. 꽃 대신, 계룡 할아버지, 백년암, 천상암, 태을연사, 천신보살, 설악산 박보살, 한국역리연구소, 신가림, 사주, 작명, 병굿 등 무속인과 동종의 집들이 산재해 있다. 미신의 삭정이 같은 영혼은 항상 호두알처럼 엉켜 정상적인 삶을 왜곡하고 있다. 떠날 때 무겁지 않게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야지. 마음의 깊이를 채우되 헛된 욕망을 비우고 살자. 생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도구만으로 빛나는 계절과 예지를 본다. 훈자의 살구처럼, 우물가의 앵두처럼, 미켈란젤로의 눈동자처럼.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고화로

공고/오늘 강사진/음악부문/모리스라벨/미술부문/폴 세잔느/시 부문/에즈라 파운드/모두 결강/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 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김소월/김수영 휴학계/...브란덴브로그 협주곡 제3번을 기다리고 있음.... 명동 백작의 주인공들은 궁색해도 기품이 있다. 이봉구나 김수영은 더욱 백작다운 품위를 지켰다. 김종삼의 시인학교 멤버도 부문별 거장의 멋이 있다. 공초 오상순이 종일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모습, 대한민국 김관식은 술 마시며 놀다가 일찍 갔다. 그는 최소한 쩨쩨하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끼와 주당의 자존심을 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예술이었던 고뇌와 헌신 그 이상의 까닭이었을 것이다. 고등동과 화서로를 잇는 고등동성당 근처 고화로에서 오래된 골목을 발견했다. 돌담길 추녀에서 햇빛을 가린 채 그림을 그리다 문득 버려진 벽시계와 온도계를 누군가가 옹벽에 걸어놓은 걸 발견했다. 초침은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분침과 시침은 멈춰 있다. 어떤 벽 아래엔 초록의 박하가 자라고 있는데 그 위에 호소문을 매달아 놓았다. ‘나도 살고 싶소! 자르지 마시오, 내 이름은 박하라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겸손한 척 힘이 세다. 한 시대를 바꾸고, 뒤집고, 지고 나는 힘이 있다. 고약하지만 그것은 과거까지 남겨둔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안다미로

어머니는 손님상에 항상 고봉밥을 올리셨다. 도시인의 세련된 공기에 비해 월등히 큰 사발 그릇이 나는 늘 불만이었다. 훗날 사촌 형수가 된 예쁜 누나가 우리 집에 올 땐 더욱 고봉밥이 민망했다. 하지만 형수 누나의 밥 먹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서너 해를 넘기지 못했다. 안다미로는 넘치도록 담는다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솟아오른 고봉밥이 하늘 가신 어머니의 불문율 같은 범절임을, 밥그릇이 삶을 담보하는 인생의 경전이었음을 세월이 가파르게 흐른 후에야 깨닫는다. 팔달산 허리의 전망 좋은 카페 안다미로는 낮 달맞이꽃 무리가 물 마신 노랑 병아리 하늘 보듯 반겼다. 붉은 장미는 정염을 불태우듯 카페의 뜰을 온통 휘감고 사바의 중생을 측은히 굽어보고 있다. 2층 방엔 낙엽 지던 가을과 창밖의 바람이 윙윙 울고 가던 그 겨울의 추억이 묻어 있다. 스케치가 끝나고 정성스레 만들어온 김밥을 나눠 먹는다. 삶을 엮는 각자의 방식은 늘 유대적이고 봉사적이고 맑다. 단오 지나 노랑꽃창포가 물가에 피어났다. 여름이 무르익는 유월은 준비 없이 미련 없이 매우 불친절하게 건너왔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뭉게구름 핀 여름은 또 어떤 길일까. 김종삼 작사 시인학교에 곡을 붙여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두드리며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 레바논 골짜기 칼릴 지브란의 집에서 하늘에서 유람온 괴짜 시인 김관식이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 지르는.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오월의 장미

작약, 모란, 꽃양귀비, 그리고 장미꽃이 마지막 오월을 피운다. 추억 맺힌 감꽃과 뽕나무의 오디도 고향 같은 향수를 담아 온다. 계절 음식처럼 계절 꽃을 그린다. 많은 화가가 한 번쯤 장미꽃을 그렸고 시인은 시를 썼다. 로즈 바이올렛색이 있지만 장미는 빨간색이 매력이다. 요즘은 흰색, 상아색, 핑크색 등 다양한 장미가 있다. 보기보다 장미 그리기는 쉬운 게 아니다. 빨간 꽃과 녹색 잎이 뚜렷하게 강한 보색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사물도 너무 강한 것의 조합은 결합이 쉽지 않고, 개성도 서지 않는다. 조용한 성격의 권향숙님은 교실 사람이 잘 모를 정도로 정숙한 분이다.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그림은 잔잔하게 성장하고 있다. 오늘 스케치는 수채화같이 맑다. 노란색 연두색 녹색으로 이어지는 흐름도 고상하고 채도가 엷고 여리기도 한 빨간색의 운용도 그렇다. 그만의 색을 보유하며 꾸준히 가꿔 그의 내면이 아름답게 차려지길 바란다. 들장미, 넝쿨장미는 대문과 담장을 넘으며 새 길을 개척하고 있다. 유월이 오면 장미도 걷히고 미라처럼 인조 장미만 우두커니 남을 것이다. 그럴까. 문득 이런 시가 생각난다. “통과해야만 할 아득한 봄날의 시간이/저 밖에 선혈처럼 낭자하다/베란다 앞 낮은 산을 뒤덮으며/패혈증처럼 숨 가쁘게/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진달래/...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인조 장미 몇 송이가/무게도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최승자 ‘아득한 봄날’ 중)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날 날 날, 오월

어린이날, 부처님 오신 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참 날 많은 오월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이 몇 번 더 주어질지, 이 땅의 시간이 궁금하다. 어버이날이라고 꽃 한 송이 올려온 아들, 현금 봉투에 정성스러운 편지를 담은 딸, 내가 섬기던 부모님이 안 계신 이후 풍속도가 바뀌었다. 스승의 날이라고, 행궁동 현대미술 교실에서 꽃바구니와 티셔츠 하나를 받았다. 게다가 스승의 날 노래까지 들려주니 이럴 자격이 있을까 불편도 했지만 한편 흐뭇했다. 매교 어반스케치 교실엔 고참 몇 분이 예쁜 다과를 마련해 와 함께 나눠 먹었다. 정성이 고마웠다. 여성회관 어반스케치 교실에도 꽃 한 송이를 에코백에 몰래 매달아 놓아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맛난 점심식사를 나누며 따뜻한 정이 혈류처럼 흐름을 느꼈다. 작은 정표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세상인지 모르겠다. 학창 시절의 스승의 날은 정식 행사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마저 사라진 듯하다. 교권이 무너지고 여러 가지 불협한 일들이 겹치면서 스승과 제자라는 의미도 어색한 지경이다. 그나마 성인들은 은혜라는 인생사를 교환하며 사는 예지가 있어 고맙게 받아들인다. 고마움은 예절이다. 내가 늘 감사하다. 이런 시가 있다. “불온한 생각도 이직은 더러 있는데/꺼내놓을 용기가 없다./대부분 옛사람 옛글이 시키는 대로/다소곳이/상부의 명령과 지시에/고분고분/고향에 보내는 편지에는 그냥/잘 지낸다고 쓴다.” -윤제림 ‘근황’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매산로2가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도로명 주소가 보였다. 2014년 우리나라도 도로명이 도입돼 시행 중이다. 행정동과 법정동이 따로 있어 헷갈리기도 하지만 옛 지명이 아직 익숙하다. 사는 동네를 잊어버릴 순 없는 것이다. 매산로2가는 옛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이다. 수원역 근처라 아직 여관, 여인숙 등 숙박시설이 즐비하다. 기억공간 잇~다에서 전시를 끝내고 오는 길에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를 이 거리를 지난다. 따지고 보니 이 도시에 살면서도 가지 않은 길이 너무나 많다. 모든 길은 내가 필요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오늘은 어반 스케치의 소재를 살피다가 이 낯선 길을 만났다. 그래도 옛날 건물은 요즘 건물들과 달리 붉은 벽돌집이 많아 나름대로 멋이 있다. 교외엔 찔레꽃, 아카시아 꽃이 만개하고 산천초목이 신록을 지나 점점 짙푸르다. 모처럼 북한강변 미술관들을 둘러봤다. 서호미술관, 한강미술관, 모란미술관 등 각기 다른 운치와 규모 있는 전시를 하고 있었다. 현대미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어 난해하지만 신선하다. 이런 걸 보면 아날로그 세대에서 이어온 작업관을 어떻게 바꿔 가야 할지 의문이다. 우리 교실에 비교적 젊은 김희선님이 있다. 초등학교 아이를 둔 학부모라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간다. 3시간의 취미 생활에 집중하다가도 생활전선에 바삐 투입돼야 하니 분주한 시절이다. 그의 조용한 성격처럼 그림도 고요하다. 세상도 더러 고요했으면 좋겠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어린이날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여기에 아버지의 기일이 겹친 날이다. 때마침 연휴라 딸과 외손주들이 내려와 함께 제사를 올렸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은 상을 바라보며 우리를 따라 연신 절을 한다. 한 세대가 가고 오는, 세월이 이렇게 빠르다. 날씨도 궂고 어디 나들이 갈 처지가 아니므로 딴은 작업할 게 많아 집을 나선다. 날씨만 좋으면 함께 봄나들이라도 가고 싶은데 조그만 봉투만 식탁에 올려놓고 조용히 집을 빠져나온다. 봉투에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이한이, 이서야 어린이날을 축하한다. 무럭무럭 잘 자라거라.’ 이렇게라도 하고 나오니 다소 마음이 놓인다.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넣어 둔 용돈으로 아이들과 쇼핑하고 장난감이라도 사 주렴, 미안하구나.’ 힘든 육아에 피아노 독주를 앞둔 딸이 과제처럼 엄습한 일들로 매우 피곤할 것 같다. 부모 마음도 다를 수 없다. 천천히 세류동 길을 걸어가는데 어린이집 앞에 ‘어린이날을 축하해요’라는 예쁜 현수막이 걸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중요한 날이나 계절마다 바뀌는 이 어린이집의 멋진 그림에 흐뭇해할 것 같다. 다시 수원천을 걸으며 나날이 푸른 버들잎과 활력 있는 냇물을 바라본다. 지나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시절이다. 이 봄에 운명하신 부모님의 복받치던 슬픔을 건너 새싹 같은 아이들이 자라난다. 희망이요 기쁨인 어린이가 가장 아름답다. 꿈을 이을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산 아래 시詩

자주 가는 돈가스집 앞에 여태 없던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생소한 간판엔 ‘산 아래 시‘라는 산뜻한 글이 담겼다. ‘시를 만나, 시에 말 걸며, 시의 시간을 꽃 피우고 있습니다’라는 문장도 시적이다. 이 거리에 조금 어색하지만 반갑다. 서점 전멸의 시대에 시집 전문 책방이라니,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갔다. 매대엔 컬러풀한 책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으나 대부분 무명 시인이다. 모두 새 책인데 어떻게 된 걸까. 책방 주인은 유명 작가들의 책은 취급하지 않는다며 의미심장하게 응수했다. 시의 내용이 맑고 간혹 비장했다. 어쩜 무명 시인이 더 치열할 수 있다. 기웃대다가 그냥 나오기가 민망해 이상의 시집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손에 담았다. 주인은 덤으로 동인지 한 권을 줬다. 아는 작가라곤 이것뿐인가 했더니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포켓북으로 빈티지하게 놓여 있어 갖고 싶었다. 그러나 책에 정가가 없어 한동안 망설였더니 그냥 가져가란다. 덤으로 시 동인지 한 권도 줬다. 이 책방 주인 돈 벌려고 책방 차린 게 아닌가 싶다. 책값을 모르니 돈을 받을 수 없다며 행운이라고 한다. 이런 시가 생각났다.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천천히 걸어 나오는 저물녘 도서관/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혼자 걸어 들어갔는데/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가 않은/도서관.’ -송경동 ‘삶이라는 도서관’-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광교산 길과 원주민 L씨

상광교 로컬푸드 옆에 카페 109가 보인다. 봄날 아침, 올해도 사월 스케치는 이곳 전원 풍경을 택했다. 이슬 맺힌 아침은 다소 쌀쌀하다. 목장과 마을을 한 바퀴 답사하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수상한 듯 기웃댄다. 그림 그리러 왔다고 하자 엉겅퀴처럼 곤두선 표정을 낮달처럼 하얗게 밝혔다. 수강생들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 모습이 신선하고 진지하다. 할아버지는 이 주변 카페와 건물의 주인이라며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꺼냈다. 올해 한 살 빠지는 90이라며 1967년 상수도보호시설 공사 때 이곳에 왔단다. 이전엔 대학 레슬링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셨다는데 고향은 이북이라고 한다. 1969년 전기불도 없고 차도 다니지 않던 이곳에 젖소 두 마리와 정착했다며 자신을 이석삼으로 소개했다. 소는 불어나 100마리에 이르렀고 그는 2천평, 1천평, 600평 광교산 길 일대를 구석구석 사들였단다. 하지만 혼자 잘사는 게 즐겁지 않아 22가구의 주민에게도 젖소 키울 것을 권장해 지금까지도 이곳저곳 목장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고 심재덕 수원시장 재임 시절에서 상수도 보호를 위해 목장을 옮겨주길 원해 카페 주변 1천평만 남긴 채 다 팔아 버렸다며 홀가분해하신다. 그와의 목적 없는 대화를 마치고 스케치도 마쳤다. 함께 맛난 밥과 커피도 나누고 쑥 냄새 가득한 봄길을 돌아온다. 산과 들이 연둣빛 신록으로 물들어 간다. 봄의 언어와 꽃의 흔적이 지워진 자리에.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봄나들이-물향기수목원과 옛 도청 앞 벚꽃길

도청 앞에 옛 자가 붙었다. 팔달산과 도청을 뒷동산 삼아 살아온 지 45년에 이른다. 지나간 것은 모두 섬이 된다. 도청이 광교 신도시로 옮겨간 지도 몇 해가 흘렀다. 세월은 늘 바라보지 않는 사이 생각을 놓은 사이를 관통하고 있다. 봄비가 주말 내내 내렸다. 꽃비 내린 자리에 모든 잎이 선명하고 파릇하게 살아났다. 주말이 오기 전에 수강생들과 물향기수목원을 찾았다. 눈부신 벚꽃과 빨간 산당화가 줄지어 피었고 음지엔 아직 개나리가 노란 줄기를 뻗고 있었다. 강한 자외선을 피해 자연과 식물을 읽는 물 향기 식물 책방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각자 수집한 풍경을 그리거나 창밖 풍경을 담았다. 처음 나온 수강생들은 스케치북에 펜을 대는 것이 설레지만 불안해 보였으나 나름대로 재미있는 색칠을 했다. 그림이 무슨 형식이 있고 잘 그리고 못 그린 차이가 있겠는가. 다름을 보여주는 현대미술은 저마다의 개성을 찾는 것일 뿐이다. 맛난 밥도 함께 먹고 막걸리 한잔도 축였다. 일부는 꽃구경도 제대로 못한 짧은 시간이 불만인 듯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올해의 마지막일 꽃을 좀 더 바라보기 위해 고등동에서 옛도청으로 향했다. 도청 앞 벚꽃을 못 보면 한 해를 못 보는 것 같은 허망함과 아쉬움이 따른다. 팔달산 허리를 걸었다. 전망 좋은 카페 안다미로에서 차 한잔 마신다. 봄비가 어두웠던 날들의 복수처럼 찬 바람 싣고 쏟아진다. 봄처녀의 한 문장같이 날 개면 진주 이슬 신고 새 풀 옷 입은 봄길을 걷고 싶다. 꽃바람이 스쳐 가는 사랑 같이 불어오는.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목련꽃 필 때

옥탑방 작업실에서 아래를 내다보면 목련꽃 핀 동네가 아련히 다가왔다. 궤도를 이탈한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게 두렵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목련꽃 핀 카페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답답한 시공간들이 지나간 연애편지를 꺼내 읽는 것처럼 시큼했는데 그마저 커다란 건물이 생겨 가려졌다. 오늘, 커피 향과 목련꽃 그늘진 골목을 거닌다. 사랑이 이별을 동반하듯 산다는 건 늘 걱정과 근심을 부여한다. 정의의 탈을 쓴 마키아벨리즘이 득세하는 시국이 나의 부근에도 사회적 좀비처럼 옥죄고 있다. 나를 해방하는 궁극은 무엇일까. 케테 콜비츠와 뭉크와 버지니아 울프의 환영들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내게 고여 있다. 자유롭게 살기도 어렵고 싫다. 우울증같이 고요한 자유는 더욱 절규의 절벽을 이룬다. 그래도 이 봄이 평온했으면 좋겠다. 수면마취에 든 검진자처럼 잃어버리든 잊어버리든 더 이상 산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구속 없는 자유를 갈망하는 노스텔직한 시 한 편 꺼내본다. ‘그리운 손길은/가랑비같이 다가오리/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시드는 걸 생각지 않고/술 마실 때/취해 쓰러지는 걸 염려치 않고/사랑이 올 때/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봄바람이 온몸 부풀려 갈 때/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오늘같이 젊은 날, 더 이상 없으리/아무런 기대 없이 맞이하고/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져도/봉숭아 꽃물처럼 기뻐/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리.’ -신현림, ‘사랑이 올 때’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삼월을 지나며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몰래 배우네.’ 마종기님의 시 연가는 봄마다 꺼내 보는 애송시다. 꽃피는 소리처럼 삼월이 지났다. 대춘의 기대는 어느새 한바탕 꽃을 피워 놓고 도망간 기분이다. 삼월 끝에 수강생들이 들려준 어반스케치 이야기를 다시 내어 본다. 낯선 수원의 새 아파트로 이사 온 김희정님이 새 길을 찾다가 만난 공터 풍경을 담았다. “이곳은 잘 정돈된 건물과 도로 사이에 섬처럼 몇몇 집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문 앞에는 고추 모종과 파 모종이 자라고 있었고 간혹 정돈되지 않은 마당은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은 상상을 키웠다. 파릇하게 올라온 길쭉한 고추들은 할머니의 호통을 엄숙히 담은 대자보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고추 따가지 마라, 도적놈들아!).” 철도회사에서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친 이재년님은 수업 시간에 그려온 멋진 간이역을 보기 위해 비로소 월정리역을 찾아 그림에 담았다. 젊은 날 등산을 좋아한 김연화님은 산을 통한 아름다운 추억을 담았고 동화 같은 알프스 여행을 담은 안형숙님, 시골에 홀로 사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남편과 함께 울진 여행을 했다는 권향숙님, 박정란님은 한정식집 넓은 뜰에서 음식을 매개로 한 지인들과의 정담을 담았다. 그 밖에도 중국인 리린의 다변적 한국살이, 천현경님의 손바닥 정원 이야기도 눈물 닦은 손수건처럼 깊은 사연이 묻어났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아버지의 헬륨 풍선

한 분기를 마감하는 어반스케치 발표회를 가졌다. 저마다 잔잔한 감동이 있다. 오늘, 봄 햇살 같은 한진옥님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놀이동산 같은 곳엘 가면 커다란 헬륨 풍선을 사곤 했다.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고 하던데 아버지는 풍선을 든 아이 같았다. 아버지의 풍선은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수단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풍선에 의지하지 말고 딸이자 보호자인 나를 따라오라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헬륨 풍선에 의탁한 채 이곳저곳 돌아다니기에 분주하다. 사신 날이 구십 해를 넘겼어도 골목길, 사잇길, 목적지와 상관없이 끝까지 가보고 눈으로 담아야 직성이 풀리신다. 그러나 아버지와 외출할 땐 보고 싶은 곳이 달라 서로를 놓치기 일쑤다. 귀가 어두운 아버지는 전화도 잘 못 받으시고, 받는다 하더라도 말을 잘 못 들으셨다. 아버지와의 통화는 반복해서 목소리만 높일 뿐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하고 피식 웃기 일쑤다. 결국 핑크색 하트 풍선이나 상어 모양의 파란 풍선을 찾아 헤맨다. 민속촌은 아버지와 자주 찾던 곳이다. 한때는 먼 곳까지 단풍 구경을 가곤 했지만 이젠 1시간만 넘겨도 야단이다. 그래도 근래 자주 가게 된 민속촌과 눈부신 은행나무는 아버지가 매우 흡족해하셔서 좋았다. 오랜만에 활짝 웃는 아버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3년 전 아버지는 쓰러지셨고 후년에 돌아가셨다. 겨울 같은 늦가을이었다. 웃음 담긴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립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지동에서...

삼월도 벌써 어둡다. 아직 꽃도 피지 않았는데 눈 내리는 꽃샘추위라니. 호두야 카페 뒤에서 좁은 골목을 발견했다. 돌개바람이 상모춤을 추며 골목을 휭 지나간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듣지 않아도 한잔의 술을 마시고 싶은 오후, 하얀빛은 담벼락에 붙어 전신주의 그림자를 붙안고 있다. 거리엔 이른 봄나들이를 한 사람들이 허기를 채우려 분주히 기웃댄다. 칼국수집, 국밥집, 돈가스집, 짜장면집. 우리는 늘 빈 배 채우기에 일생을 보낸다. 미나리꽝, 못골, 지동시장을 지난다. 오늘 저녁 서울에서 최동호 시인이 오신다고 기별이 왔다. 일방적 통보지만 사랑채에서 차 한잔 마시며 서정적으로 시인을 기다린다. 이윽고 단오에서 시처럼 인자한 시인을 만났다. 맛난 저녁을 함께하고 표 사장이 내 온 차 한잔 나눈다. 내용물 없는 맑은 차를 수묵담채 같은 시담으로 채웠다. 낯선 대화가 넓은 간극을 오솔길처럼 좁히며 무쇠솥의 시루떡처럼 보슬보슬 익어간다. 시인의 표정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서사적 풍요로움이 엿보이며 오가는 대화 또한 시를 짓는 느낌이다. 시인은 수원 남문 언덕, 코모호수, 화령전 등 자신의 시에 곡을 입힌 성악곡을 들려줬다. 소프라노와 바리톤의 목소리에 시가 음표를 탄다. 가곡을 들으면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춰 스와니강을 부르던 중학교 교실로 옮겨간다. 반들반들 초 칠한 마룻바닥에 비친, 시골 소년의 초상 같은.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아스팔트 위에 핀 꽃

삼월과 봄이라는 단어는 어느 곳에 심어도 향기가 있다. 흙을 일궈 파종하고 빨랫줄의 하얀 옥양목 빨래가 마당을 덮던 삼월 삼짇 무렵의 풍속도가 그려진다. 봄을 맞는다는 의미를 담아 어반스케치 전을 기획했다. 타이틀을 ‘아스팔트 위에 핀 꽃’이라고 한 건, 도시가 주는 삭막함에 어렵게 비집고 나온 꽃을 봄 화단에 이식해 보자는 뜻을 길어 온 것이다. 60 여명의 수강생이 참가했다. 자아의 정체성은 멀리서 보아야 비로소 전체가 보인다. 수업 시간에 정신을 쏟았던 작품들이 옹기종기 걸렸다. 호두야 카페, 간판은 고상한데 주인장 신경순 선생은 희로애락을 저버린 듯 무표정하다. 마치 매생잇국 표면 같아 속을 들여다 보기엔 천불만 난다. 그렇다고 사씨 남 정기의 사씨와 교 씨, 혹은 이몽룡의 장모나 박씨전의 박씨부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수원의 전설 극단 성의 김성렬 대표는 연극에 혼을 쏟다가 몇 해 전 저세상으로 가셨다. 내가 아는 단오 카페의 표 수훈 사장과 호두야 카페의 신 사장은 선후배 간으로서 김성렬 선생의 제자들이다. 어찌 됐든 행궁동 현대미술팀까지 참가한 이 전시가 모쪼록 봄비처럼 촉촉한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 황량하고 외로운 도시, 인정의 가뭄과 사랑의 도탄에도 개나리 진달래 꽃물처럼 예뻐 너와 나의 가슴이 행복으로 물들였으면 좋겠다.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예술)은 존재한다’는 최승자의 시처럼.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삼일문 앞에서

내 안의 울타리가 케테 콜비츠의 목탄처럼 어둡다. 새해 들어 벌써 두 달을 낭비한 채 삼월을 맞는다는 게 스스로에게도 예의가 아닌 듯하다. 봄은 왔건만 마음은 아직 얼음장 밑 물소리 같다. 궂은비처럼 어수선한 시국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동주 형의 거룩한 시를 가슴에 내었다. 그를 옥사시킨 일본이 8개월 동안 다녔던 릿쿄대에 기념비를 세우더니 편입한 도시샤대에선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사람은 가도 영혼은 부활해 그와 그의 시를 가슴으로 영접한 것이다. 탑골공원 삼일문 앞으로 갔다. 풍물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만세삼창과 다양한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무엇보다 서예 퍼포먼스에 광화문 미술행동이 그림을 입히는데 대장께서 내게 붓을 내밀어 당황했으나 나는 이 땅에 새봄이 오기를 비는 의미를 담아 꽃으로 여백을 채웠다. 장순행님의 즉흥 창작무 ‘조선의 소녀 몸짓으로 피어오르다’가 아름답게 펼쳐졌다. 이 시대의 봄에 유관순 누나의 꿈이 분분히 재림하는 환영을 본다. 미움은 오물이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더럽히는 부메랑이 된다. 요즘의 분위기가 염려스럽다. 편을 갈라 상대편을 욕하는 미움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분열뿐인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자신을 인정받게 되는 게 아닐까. 우리의 적은 너와 내가 아니다. 더 큰 세계관으로 튼튼히 뭉칠 때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후소의 방

고등동의 은행나무 집 앞에서 레슨받는 딸을 기다렸다. 정원은 고요하고 피아노 소리만 담을 넘어왔다. 차 안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을 즈음 대문 밖으로 중년의 남자가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건너편 구멍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을 시선이 따라갔다가 다시 나왔다. 까만 비닐봉지를 낀 그의 손엔 막걸리 한 병이 꼭지를 내밀고 있었다. 어느 해 가을, 우리는 그의 내외와 교외의 한 갈빗집에서 식사하게 됐다. 내용 없는 자리여서 불편도 했지만 남자는 고기를 태우면 몸에 좋지 않다며 신경 써서 고기를 구웠다. 요즘은 어딜 다녀왔냐고 형식적으로 물었다. 나는 의욕 없이 근교에 다녀왔다고 포스터모더니즘적으로 대답했다. 세월이 흘렀다. 신문에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 출판사 광고로 자주 올랐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후소 오주석 선생, 바로 그였다. 가곡 명태를 부르며 막걸리 한잔 축일 줄 아는 시대를 빛낸 미술사학자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들었다. 후소 선생이 요절한 것이다. 남창동 99칸 양성관 저택은 민속촌으로 옮겨가고 1977년 예술의전당을 설계한 김석철 건축가가 이 집을 신축했다. 그의 아내 김은혜 선생이 명주실같이 섬세하게 수원시립합창단의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을 무렵이다. 이 공간에 마련된 2층 후소의 방은 그의 서재를 수원시가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연구와 집필에 몰두한 그의 시선이 머문 자리에 다시 세월이 먼지처럼 쌓여 간다. 아는가. 땀과 눈물의 효모 같은 고뇌의 책 냄새를.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종로 연가

오랜만에 전철 타고 광화문에 간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충돌이 나를 내몰았다. 종각에서 내려 광화문을 향하다가 두고 온 그리움 같은 골목길 낮은 가게들 사이에 발걸음을 멈췄다. 건너편 햄버거집 2층에 올라 추억의 삭정이 같은 영혼 마른 허공을 본다. 찬바람 섞인 늦추위가 시리지만 실내는 유리창을 투과한 양광이 깊이 파고든다. 빛이 얼마나 따가운지 견디기 힘들 정도다. 고층 빌딩 아래 주막처럼 내려앉은 식당들은 저마다 땀 밴 사람 냄새를 풍기고 있다. 종로라는 그윽한 지명 안엔 장롱 속의 옷처럼 버리지 못한 추억이 있다. 알량한 청춘의 감성이 쓴 글로 전국에서 수많은 편지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손글씨가 주는 체취는 규방의 향기처럼 진했다. 답장을 나누던 마지막 한 분이 군대에 면회와 처음 만났다. 훈련 때문에 대부분 면회가 되지 않았으나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여고를 졸업한 그녀가 이곳 종로의 한 엔지니어링 회사에 취직해 제대한 나와 찻집에 마주 앉았다. 노란 달걀이 동그랗게 띄워진 쌍화차를 마신 것만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공은 관대하지 않았고 나는 수줍고 용기 없고 맛난 대화도 마련하지 못했다. 서툴고 초라했던 시절, 무모하게 보낸 젊은 날들이 어젯밤 꿈같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만이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영원 속에 울려온다. 광화문 앞에서 기도의 깃발을 들었다. 상처뿐인 시절을 어서 건너 찬란한 봄을 기다린다. 영원히 기억할.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영화루가 보이는 풍경

제주도가 고향인 K로부터 설 끝에 호출을 받았다. 겨울빛이 창을 뚫고 사랑채 깊숙한 테이블에 앉았다. 차 한잔과 맛난 정담이 더없이 안온하다. 돌아오는 길에 낡은 골목길을 걸었다. 많은 추억과 경험의 사유가 꾸역꾸역 고여 들었다. 옆구리엔 K에게 받은 조롱박처럼 큰 한라봉이 친절한 충만감을 준다. 생각의 창고가 가득 찬 넉넉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 형의 보편적 사상을 빌려 발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주름이 덕지덕지한 여관 골목을 주소지 없는 길냥이처럼 살피다가 익숙한 길에 도달했다. 가끔 막걸리 먹던 추억을 쌓아둔 동막골 전집은 혼자라서 포기하고 옆에 낀 60년 노포 영화루에 들었다. 점심시간이라 테이블이 찼다. 이민이나 타지에서 돌아온 분들이 이곳부터 찾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짜장면 한 그릇에 깃든 추억이 사무치게 그리웠을 것이다. 아직 사장님과 종업원 사이에 오가는 중국말이 정통성과 신뢰감을 보장해 주고 있다. 오늘은 향수 젖은 이 골목길을 트리 희(희영, 희선, 희정)의 에이스(?) 희정님이 그렸다. 70년대 소설 속 창백한 환자처럼 자주 아파 늘 걱정이었는데 요즘은 동료들과 잘 지내고 결강도 없어 다행이다. 그림도 나날이 좋아져 부디 오래오래 우리의 교실에 머물러 주길 바라는 게 나의 내심이다. 설 지나 벌써 정월 대보름이다. 농가월령가는 바야흐로 쌍 제비 옛집 찾듯 분주하고 새 학기 새봄이 그대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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