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저수지가 있는 가을-만석거공원

송죽동의 만석거공원은 수원시의 향토유적지로 1795년(정조19년) 축조됐다고 한다. 원래는 대유둔이라는 대규모 농장을 설치할 목적으로 조성한 일종의 담수호였다. 단순한 농업용수를 위했다기보다는 계획적 조경까지 해 아름다운 멋을 입혔다. 호수 가운데 섬을 조성한 것이나 호수 남단에 영화정을 세워 주변을 조망하게 한 것이 그 증거다. 가을이 익을 때마다 이곳에 왔다. 수강생들과 산책 겸 스케치를 위해서다. 따뜻한 볕을 쬐며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사색적이다. 단풍 든 나무들도 곱고 호수의 연잎도 미라처럼 쭈그러진 누런 연밥 줄기를 걸치고 있다. 이곳이 수원의 추팔경(秋八景)에 속한다는데 누렇게 익은 벼의 황금 물결이 이름 하여 석거황운(石渠黃雲)이라고도 불렸다니 만석거는 명실공히 가을 공원이다. 가을을 노래한 시는 참으로 많다. 시를 부르는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가을을 가지고 있다. 덕수궁 돌아 정동길 가던 언덕길과 양지 쪽 집 뒤란에 붉은 홍시가 터지던 갑사 가던 길의 추억을. 그곳에서 속으로 삭였다. 지난 시간의 아픈 기억들과 바람같이 사라진 정한이 지기 시작해서다. 가을은 소리 없이 낙엽이 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주신/겸허한 모국으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김현승 ‘가을의 기도’ 중에서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골목길-다시 바라본 산루리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사각지대가 있다. 늘 오가는 일상적 길을 우리는 반복해서 걷기 때문이다. 출퇴근하는 길, 간혹 들르는 은행과 세탁소와 이발소, 그 외에 마트나 빵집 등 소모품을 사는 시장길만 익숙한 것이다. 나의 생활권인 산루리의 중동, 구천동만 해도 가끔 가는 철물점이 전부였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뒷골목을 세세하게 돌아보게 됐다. 평범한 도시소시민들의 안락한 거주지가 정겹다. 집 앞의 화단과 울타리를 감싼 넝쿨들과 등대처럼 우직한 전봇대와 엉켜 있는 전선줄들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회로 같다. 수년 전 보쌈집을 하던 가영이네는 멀리 부천으로 이사 갔다. 그 자리에 벌써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고 지금은 그 위치마저 찾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산다는 게 이웃을 잃고 또 만나고 자라는, 그러다 마침내 잊히는 야생초 같다. 요즘 들어 문화계 원로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다. 박서보 화백은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는 말을 남기고 단풍 붉은 시월에 떠나셨다. 긍정의 시인 김남조 님도 아름다운 시만 남기고 앞서가셨다. 문득 선생님의 ‘편지’라는 시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버드내 옆-구천동

수원천의 옛 사진을 보면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아이들이 멱 감는 풍경이 담겨 있다. 간혹 요즘도 세류동을 지나는 여름 버드내엔 어린이들이 물놀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면 음표가 되고 스케치가 된다. 시냇가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노는 소리와 윤슬이 반짝이는 느린 물소리는 슈만의 트라이 메라이의 어린이 정경이 떠오른다. 도심을 지나는 수원천의 모습도 시대에 따라 변했다. 정치인이 바뀔 때마다 복개와 해체를 거듭했다. 구천동의 한 시절은 빨간 등불이 있는 허술하고 희미한 술집에서 양은냄비를 두드리는 젓가락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몇 차례의 정비 끝에 단정한 공구 거리로 환생했다. 현재는 수원공구단지가 생겨 대부분 고색동으로 이전했지만 아직도 공구와 함께 철물점, 건재상회, 쇠를 달구는 대장간의 불빛은 꺼지지 않고 있다. 쇠락하는 것과 흥하는 사이의 아름다운 옛 모습은 오랜 세월 쓰러지지 않고 잘 견뎌왔다. 슬레이트지붕과 기와지붕 아래 담쟁이넝쿨이 가을 물을 들인다. 골목길은 땅의 습기와 발자국 소리를 세세하게 받아들인다. 땅과 벽과 넝쿨 사이에서 자란 시간의 무늬가 바람에 새겨지고 있다. 그런 곡선의 시간이 스피디한 직선의 공간 뒤에 있다는 건, 산소 같고 비타민 같은 느림의 미학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삶이 공허해질 때 골목길을 걸어보라.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엄숙한 당신의 그림자를 앞세우고 지난 시간을 길어 올리며.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사라지는 것과 잊히는 것

사라지는 것은, 아직 문이 닫히지 않아 꼬리를 보이고 있지만 잊히는 것은, 마음 밖으로 떠나버린 것. 어떤 심상도 도달하지 않은 채 형상의 부재가 돼 가는 망각은 참으로 무섭다. 사랑도 미움도 아닌 건축물 하나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나의 화실은 5층 꼭대기 옥상에 붙어 있는 조그만 방이다. 가끔 작업하기에 비좁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나의 벽면 한쪽은 웬만한 크기는 수용할 만한 화판이 돼 주고 있다. 그러나 계절에 매우 민감한 방이다. 하늘과 마주한 지붕은 땡볕이 무방비로 스며들고 겨울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삭풍이 얇은 벽으로 파고든다. 그래도 봄가을은 민감해 좋다. 뒷문을 열면 파란 하늘과 마주하고 건너편 가까이 팔달산이 눈높이에 있다. 꽃이 피고 지며 눈이 오고 비바람이 부는 풍경을 계절 따라 느낀다. 눈이 내리면 바로 아래 내가 40년 넘게 살아온 교동의 부국원, 성공회 등이 보이고 소문으로만 전해 들은 일본군 헌병대의 건물 한 채가 있었다. 낡은 목조 건물이지만 담쟁이넝쿨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후배가 화실로 사용하고 있던 이 건물과 넓은 마당(주차장)이 사라졌다. 한 건설회사가 이 땅을 매입해 커다란 빌딩을 짓게 된 것이다. 문화재 유물조사단이 몇 달간 땅을 걷어내며 발굴을 마친 후였다. 참으로 잠깐 사이에 내 화실 주변은 모든 게 바뀌고 사라졌다. 뒷문 밖에는 공사가 진행 중인 높은 건물이 가로막고 있다.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들은 사라지고 목련꽃이 피는 모습도 벚꽃 핀 팔달산의 모습도 가려져 잊히고 있다. 어찌하랴! 나도 많은 세월에 이렇게 변해버린 것을.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아내가 많이 지쳤다. 밤새 음식 준비에 온 힘을 다한 것은 조상에 대한 예도 있지만 아들 며느리와 딸 사위를 위한 사랑에 더욱 힘을 낸 것 같다. 불평은커녕 즐겁고 좋아서 한 듯하지만 피곤해 보인다. 아침에 아들 내외가 왔다. 다 차려진 아내의 정성스러운 음식으로 추석 차례를 마쳤다. 일단 모두가 한숨을 잤다. 점심시간을 훨씬 넘겼지만 고단한 아내를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교외로 나가기로 했다. 명절 때마다 주로 가던 융·건릉이다. 푸른 소나무 잎과 상수리나무 잎이 폐부를 활짝 열어준다. 녹색 잔디밭과 파란 하늘에 갈대밭도 초가을의 서정을 이룬다. 흐린 눈을 맑게 닦아주는 기분이다. 내려오는 길에 아늑한 재실에 들렀다가 천연기념물 개비자나무를 봤다. 거칠면서도 화려한 나무 비늘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문득 내장산의 비자나무와 비슷한 레바논산맥의 백향나무가 생각났다. 그곳의 백향목 군락은 꿈속처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백향목은 레바논 국기에도 들어있지만, 성경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사용했던 나무라고 알려졌다. 눈 덮인 레바논산맥의 브샤레 마을에서 본 칼릴 지브란의 생가미술관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예언자를 쓴 그는 글도 글이지만 그림도 정말 좋았다. 예언자의 집을 나와 나는 히치하이크에 성공해 백향목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융릉의 비자나무는 조금 변형된 같은 과라 해서 개비자나무라고 붙여졌지만 순수한 시골 총각처럼 맑은 색채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보정동 카페거리에서

나의 개인전에 수강생들이 관람 왔다. 예기치 않은 도슨트가 됐다. 작품을 놓고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것이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황병승 시인이 인터뷰를 거절한 이유처럼, 그림도 관객이 보고 느끼고 해석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작가의 의도를 다 알아버리면 화면은 이야기의 확장성이 없는 부동의 겉을 보는 것과 같을 수 있는 것이다. 어찌됐건 스케치도 겸해 왔으니 관람 후 근처의 보정동 카페거리를 찾았다. 아기자기하고 이국적인 정취가 담긴 젊은 분위기의 거리다. 커피, 파스타, 북카페, 레스토랑, 옷가게 등이 테라스와 마당으로 연결된 곳에 편안한 의자가 있는 풍경이 참 좋았다. 와플이나 크레이프 등의 브런치를 겸해 많은 나무 그림자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노천카페에서 그림부터 그릴 것을 괜히 중국집에 들어가서 시간을 많이 놓쳤다. 이 거리는 인근에 대학이 있어 문화특화거리로 조성되고 있었다. 모두 떠나고 수강생 철호님과 노천카페에서 스케치하며 커피 한 잔을 나눈다. 철호님은 몇 해 전에 아내를 잃고 몹시 허전해하는 모습이 드리워져 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는데 아직도 프로필 사진엔 아내와 찍은 사진이 그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병세가 심해지자 여보 살려달라고 매달릴 땐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펐다고 한다.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 아내의 묘소를 찾는다는 그의 아내 사랑에 나도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그림 속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했어요.” 박 선생님의 남은 인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이집트-오래된 내일

올해는 나의 회화 인생 30년이 되는 해다. 내가 살고 있는 수원보다 아이러니하게도 용인의 한국미술관에서 규모 있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인근 도시에서라도 초대받게 돼 매우 고맙고 기쁜 일이다. 그림을 끄집어내 전시를 준비하면서 지난 30년의 묵은 그림들을 비로소 다시 보게 됐다. 30년 아카이브 중에서도 스케치 작품이 유독 많았다. 1천여점의 오래된 그림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이 그림들도 함께하려다 워낙 방대해 언젠가 스케치전만 따로 해봐야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아내가 많이 아쉬워한다. 이 많은 그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또 다른 임무가 억누르고 있는듯하다. 살 날이 점점 줄어드니 더욱 현실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문득 2003년쯤으로 기억되는 이집트 여행이 생각났다. 거대한 룩소르와 카르나크신전의 석주, 오벨리스크에 감동했고 파라오의 미라를 보며 삶과 죽음뿐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도 성찰하게 됐다. 물론 영원히 살고 싶은 신앙적 기원에서 비롯됐겠지만 과학이 죽음 이후를 증명해주는 오늘날엔 남은 분들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정리해주는 게 더 중요함을 느낀다. 무엇이고 현재에 존재감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죽어서 조명된다고 해서 본인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꿈꾼다. 오래된 내일의 추억과 화려한 부활의 노래를. 알랭 드 보통은 말했다. 예술은 경험을 기록하는 방식이라고. 우리는 모두 경험을 기록하고 그리다가 경험의 유산을 남긴다. 죽음 이후의 일마저.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바그다드 카페처럼

우리는 가끔 전원 풍경을 꿈꾸고 조용한 카페에서 좋은 사람과 커피 한잔 나누기를 원한다. 그러나 근거리 교외로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황량한 사막에 목적 없는 삶이 퇴적되는 무모하고 건조한 공간이었다. 그런 생기 없는 자리에 야스민이라는 이방인이 등장해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 깃든다. 한 사람의 활력 있는 온기가 공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야스민의 마술놀이는 바그다드 카페를 신나고 즐거운 마법의 무대로 바꿔놓았다. 그녀가 독일로 돌아갈 때 이 카페는 이전보다 더한 절망의 시간으로 회귀한다. 침묵의 시간에 걸려 온 전화, 야스민이 다시 돌아왔다. 와! 신나는 인생! 다시 브렌다의 바그다드 카페는 희망의 공간으로 바뀐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야스민을 향한 화가 루디콕스의 프러포즈는 모든 인생 드라마의 절정이자 엔딩일 수 있다. 요즘은 어디에도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카페를 볼 수 있다. 호수가 내다보이는 더 비얀코라는 보통리 카페의 주인은 우리가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도 잘 배려해 줬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건물 앞 옹벽에 커다란 벽화를 그려 놓은 걸 보게 됐다. 이 아름답고 전망 좋은 카페를 오늘은 수강생 설정선씨가 그렸다. 충청도 사투리가 흘려지는 그녀는 처음 들어왔을 때 순수해 다른 곳에서 배운 그림을 뽐내듯 내보이는 자신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보였다. 요즘은 그림도 무르익고 동료들과도 재밌게 지내고 있어 바그다드 카페의 멤버처럼 활달하다. 바그다드 카페 엔딩에 울려 퍼지는 제 베타 스틸의 ‘Calling you’를 듣는다. 즐겁게 살자! 바그다드 카페처럼.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여행의 기술-목포 오거리

일상성의 탐험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여행의 기술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호기심과 상상력과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또 예술적, 철학적 사유를 도입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창조하고 변환한다. 그는 프로방스에서 반고흐의 그림을 보고 사이프러스를 바라보며 나무 너머의 세계를 인식한다. 고흐의 꿈틀거리는 현장성을 치환하는 동시에 풍경 너머의 이상적 범주를 부여받는 것이다. 목포는 근대의 향수가 묵은 책 냄새처럼 켜켜이 묻어나 풍요로운 여행지였다. 여행을 다녀와서 남도 기행이라는 제하의 칼럼도 썼고 유달동 로망스라는 카페를 수강생들과 그려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들 중 목포를 여행하면서 내가 그리고 쓴 카페에서 음식까지 먹어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분도 있었다. 여행의 발견이 어떤 공동의 함의로 결합될 때 다양한 형식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현장법사나 혜초, 마르코폴로는 탐험가적 여행을 통해 이국의 문물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기록했다.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알리고 배우고 실천하며, 학문을 허위 의식의 세태를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목포 오거리는 목포가 길러낸 주요 예술인의 근거지였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점으로 다양한 문화가 집결하는 교점이었다. 여행지를 완전히 소유하는 방법은 그림을 그리고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하는 것이 최상의 완성이다. 이야기가 널려 있는 목포 오거리를 오늘은 수강생 강동임씨가 그렸다.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서 학교 수업 후 어반스케치 야학을 듣고 있는 젊고 성실한 선생님이다. 그의 진지하고 순수한 학습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또 하나의 비옥한 소양이 됐으면 한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농대

1907년 수원고등농림학교로 개교한 서울농생명대학이 2003년 서울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서울농대 혹은 농대로 불리던 수원의 토착 지명이었다. 1980년대 농대 뒤편은 청춘들의 데이트 장소인 푸른지대라는 딸기밭으로 유명했다. 수강생들과 스케치를 왔다. 이곳저곳 스케치 소재를 찾다가 이 멋진 공간을 보석처럼 발견했다. 붉은 벽돌의 박물관 건물과 창업지원센터의 화려한 색채가 뭉게구름을 띄워 놓은 푸른 하늘과 대비를 이룬다. 무엇보다 건물 사이를 연결한 통로는 마치 서태후가 거닐던 이화원의 장랑을 연상케 하는 작지만 멋진 회랑이다. 다만 창업지원센터 1동은 모든 건물이 리모델링 돼 안타깝다. 남아 있는 현관의 고색 원형이 아쉬움을 더한다. 농대 앞 천변의 수양버들이 다 잘려 나간 것처럼 인간에 의해 변형되는 환경 파괴가 너무나 무섭다. 메타세쿼이아를 비롯한 고목들이 원시림처럼 무성하고 느낌 있는 카페도 멋진 공원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2019년 아트경기 때 전시작가로도 왔고 경기민예총의 장승깎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상상캠퍼스 앞마당에서 나무를 깎기도 했던 곳이다. 무엇이고 목적을 가지고 와 한곳만 바라보던 것과 장소만 생각하며 아름다움을 찾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마치 공동의 일로 만난 사람의 외양보다 데이트 상대로 정중히 만난 사람의 내면에서 비로소 깊은 속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시 몇 년이 흐르고 이곳은 또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추억은 효모 같은 것. 삶이 장독의 메주처럼, 사색에서 길어낸 시처럼 잘 무르익길. 들깨 향기 묻어 오는 가을바람을 바라본다. 메밀밭을 걸어가는 나그네처럼.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미쓰비시 줄 사택

인천시 부평동 산곡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한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다. 미쓰비시 줄 사택, 영단주택, 육군조병창 등이다. 줄 사택은 천장 하나에 칸막이만 두고 여러 집이 연결돼 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합숙시킨 유물로서 중요한 사료인데 이것을 철거해 공영주차장을 만들겠다는 안도 나오고 있어서 이를 바라보기가 매우 답답한 심정이다. 미쓰비시는 전범 기업으로서 대법원전원합의체는 일본 피고 기업의 배상책임을 확정한 바 있음에도 전범 기업의 재산 매각 등의 조치를 하기는커녕, 제3자 변제방식을 발표하여 한국 정부와 민간기업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아무튼 이곳은 전쟁 군수용품을 만들던 조병창이 있었던 관계로 지하에 엄청난 동굴까지 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지하 동굴마저도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만든 것이니 그들의 재산과 목숨까지 우리가 지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됐건 이 귀중한 치욕의 유물을 현재의 불편을 위해 영구히 버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단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증거물로서 잘 보존해 후대를 위한 산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군산이나 목포의 적산가옥과 유적(군산세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일제의 수탈행위에 대한 증거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부수는 건 쉽지만 한번 파괴하면 원형을 다시 복원하기 어렵다. 벌써 계절이 가을로 기울고 있다. 가을은 잠시 쉬어갈 수 있을까. 불볕더위가 지나간 자리에 혹독한 겨울이 닥치는 사이의 미학, 새털구름 같은 가벼운 이상을 따라 올해도 나의 전람회를 준비하고 있다. 기대와 설렘으로 늘 인생이 채워지길, 가을을 위한 사소한 기도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행궁동 골목집

화가들의 전시 뒤풀이는 가장 중요한 식순이다. 전시하는 작가는 작품을 내놓고 조금은 긴장하고 있지만 관람자들은 작품만 둘러보면 곧바로 뒤풀이 집으로 향하는 게 일반적이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에 눈도장만 찍으면 식은 보지도 않고 곧바로 뷔페로 가는 것처럼 말이다. 방화수류정 아래 수원천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대안공간 전시장이 있었고 그 앞에 골목집이 있었다. 골목집은 전시 뒤풀이를 많이 했지만 전시장이 사라지자 행궁동 생태교통 거리로 이전했다. 오랜만에 들렀는데 주인은 나를 알아봤다. 이곳에서 화수공담이라는 화가와 비평가들의 담론이 있었는데 필자도 게스트로 참여해 본 터라 눈썰미 좋은 주인께서 알아보신 것이다. 화수공담이라는 프로젝트 자체가 술 한잔 놓고 그림에 대해 비평해 보자는 취지여서 이론에 약한 작가들이 비평가들 논리 앞에 술만 들이켜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해도 이 프로젝트는 자신이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 자존심을 세웠고 일부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초대된 작가는 벽에 그림을 걸고 스크린에 슬라이드 그림을 띄워 작품을 설명했고 뒤이어 비평가가 혹독하게 분석했다. 그때의 긴장감에 술 한잔은 똘똘 뭉쳐진 머리를 해체하기에 충분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김치찌개는 이 집 안주 중 최고였다. 큼직한 두부전도 맛났지만 김치찌개는 닳으면 물 붓고 즉석에서 재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여러 가지 메뉴가 붙어 있고 유명 TV 프로그램에서 맛집 촬영도 한 관계로 식사 시간엔 손님이 넘친다. 이 유서 깊은 식당을 오늘은 신입생 김명숙 씨가 그렸다.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담백한 필력이 기존 수강생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세류동 이용원

세류동 골목길에 이용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용원은 현대사회로 오면서 헤어스타일이 디자인 개념으로 바뀌어 생긴 다양한 이름 가운데 본디 명사다. 머리를 전문으로 하는 유명 헤어디자이너들도 많다. 이 미용실은 사람과 사람을 가꾸고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커뮤니티 공간이 돼 가고 있다. 흔히 미스코리아들이 유명 미용실을 찾는 유행도 일류를 지향하는 심리적 선동의 시대상이다. 이 미용원은 택시 안의 풍경처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옆집 이웃 이야기, 이·미용에 대한 상담 등 다양한 이야기의 생산지이기도 한 것이다.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에서 이발사 피가로는 ‘나는 마을의 만능 일꾼’을 부른다. 로지니아를 꼬이려는 작업도 참 우스꽝스러운데 아무튼 사각사각 머리 깎는 소리는 참 좋았다. 명절 전에 꼭 가야만 했던 이발소는 바리캉이라는 기기로 배코를 치면 엄청 따갑기도 했다. 그때의 이발소 아저씨는 면도에 머리까지 씻겨 주는 1인 다역이었다. 세류동 이용원은 가게 앞에 여러 개의 화분을 놓아 깔끔한 정원 분위기다. 다만 입구 배너와 문에 ‘금이빨, 은수저 삽니다’라는 문구가 상당히 이질적이어서 놀랐다. 아마 부업으로 하는 일 같다. 이발소를 찾는 고객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남자 커트 전문 헤어숍이나 미용실에서도 염색과 커트를 다 해 주는 시대이니까 말이다. 이 그림은 수강생 장윤숙씨가 그렸다. 엄지이용원이란 글씨가 순수하다. 그림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가 없다. 다만 다를 뿐이다. 인스타그램에도 자주 올라온 그녀의 스케치북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멋진 유산이다. 그림을 무척이나 사랑한 그녀의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할.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보통리

가끔 그곳에 가고 싶다. 수련이 호숫가를 뒤덮고 미루나무 허리에서 매미가 종일 울어대는 여름날에. 미인도의 눈썹 같은 하현달이 초롱히 뜬 밤길을 걸으며 풀벌레 소리 듣던 계절도 여름밤이었다. 뭉게구름이 청춘의 욕망처럼 피어오른 여름날은 괴테도 니체도 꿈을 주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어반스케치 수강생들과 야외 스케치를 갔다. 둑 너머 시골 풍경이라는 녹색 양철지붕의 카페를 지날 땐 여름방학 때 놀러 가던 외갓집 생각도 들었다. 함께 그림 소재를 찾으며 땀 흘려 걷는 이 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의 현재요 오래된 유산이다. 여름날의 땀은 바람처럼 시원한 추억이 된다. 멋진 카페에서 냉커피 한잔으로 더위를 식히며 저수지가 있는 창밖을 본다.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 같은 아련한 원근감을 느껴본다. 아, 그때 나는 환희와, 눈물과, 영광의 뒤란길 같던 헤르만 헤세 페트카멘친트의 한 대목을 생각해냈다. 구름은 순하고 부드러운 신의 축복이요 선물이며 대지의 꿈이라는. 그럴까. 나는 여전히 젊은 날의 허물 같은 추억을 돌이켜 구름을 동경하며 꿈꾸고 있다. 틴에이저 시절 경전처럼 암송하던 구절을 되뇌어 본다. 구름은 모든 방랑과 탐구와 향수의 영원한 상징이다. 구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방황하며 떠 있듯이 인간의 영혼은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오! 구름, 쉬지 않고 흘러가는 아름다운 구름이여, 그때 나는 철부지 어린아이였고 구름을 사랑하며 구름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 역시 한 조각 구름으로 방랑길을 떠나, 낯선 인간으로서 시간과 영원 사이를 떠돌며 인생을 마치게 될 줄 몰랐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용두레 우물가

‘용정지명기원지정천 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비가 있듯이 용두레는 조선족이 개척한 용정시의 기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용정은 만주족이나 한족의 역사가 아닌 순수 조선족의 개척사일 듯하다. 용정시에 들어서면 용문교 아래로 해란강이 보인다. 가곡 선구자에 일송정 해란강이 등장하듯 이곳은 지난날 말달리던 선구자의 본거지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무덤과 소·중학교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20여 년 전 백두산 여행을 위해 연길을 찾았을 땐 대부분 한글이 먼저 들어간 간판들이어서 들떴는데 지금은 한문 뒤에 한글이 간신히 기대어 있는 형국이었다. 외곽엔 아예 한문으로 된 간판도 눈에 띄어 편치 않았다. 연길시를 비롯한 조선족 자치구의 인구는 점점 줄어들어 약 170만 중에 70만 정도는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하니 자치구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조선족은 관심을 둬 줄 여력이 없는 북한과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한국인과 한족으로 편입을 노리고 있는 중국인의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신세가 됐다. 어쨌든 연길시나 용정시 곳곳에 조선족 자치구 창립 70년 기념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어 그나마 위태한 마음을 달래줬다. 일찍 잠이 깼다. 러시아의 백야처럼 아침이 일찍 밝아 놀라웠다. 호텔 창가 멀리 넓은 광야가 아련히 다가왔다. 문득 선구자의 노랫소리가 억센 말발굽에 휘몰아치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권선동 은행나무

내가 살고 있는 권선동의 세곡초등학교 앞 길가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 570년의 꺼칠한 고목이다. 나는 매일 아침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피트니스클럽에 간다. 너무 늙고 기력이 쇠한 이 나무는 문신처럼 강렬한 세월의 무늬가 있다. 나무의 밑동에서 위로 올라가며 꽈배기처럼 꿈틀대는 모습이 거대한 아나콘다 같은 느낌이다. 이 나무는 고려 말 한림학사 이고(李皐·1341~1420)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벼슬을 내려놓고 수원에 내려와 살면서 후진들에게 어질고 선하게 살라고 가르치며 자신의 집터에 심은 은행나무다. 집은 간 데없고 절간의 석탑처럼 나무만 덩그러니 서 있다. 이 나무는 내부에 공동(空洞)이 있고 가지 절단부와 줄기에 부패가 진행돼 비바람에 쓰러지거나 가지가 고사해 떨어질 염려가 있었다. 시에서는 보호수 생육환경 개선사업을 진행했다. 외과수술과 고사한 가지를 제거하는 한편 철제 지지대도 4개 설치했다. 나무의 가지들은 잘려 나갔으나 외형은 일부분 힘이 느껴진다. 칠월 초 모든 환경개선 작업이 완료돼 깨끗이 단장됐다. 오늘날 권선동은 이고 선생이 선하게 살라는 권선(勸善)의 의미에서 지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선하게 살자! 생이 일장춘몽이고 악해야 할 시간과 용서받을 시간이 없으므로. 이고 선생의 은행나무는 선하게 살라는 뜻을 받들어 삶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시켜 주고 있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수원의 형용사 아름다운 버드내

교동 살던 토박이 후배가 어릴 적 수원천에서 멱감고 빨래하던 이야기를 을지문덕이 청천강 얘기하듯 신나게 얘기하던 기억이 난다. 수원(水原)은 지명 자체가 물의 근원이다. 나도 버드내를 바라보며 40년 넘게 교동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한때는 권선동 집에서 교동 작업실까지 걸어 다녔다. 요즘은 평일엔 다른 코스로 걷지만, 일요일은 꼭 버드내를 따라 걷는다. 집은 잠만 자는 공간이고 대부분 시간을 교동에서 보내고 있다. 교동이 아름다운 건 버드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원에는 버드나무가 참 많았다. 세류동, 유천, 방화수류정 등에도 버들 류(柳) 자가 들어 있는 게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버드나무 꽃가루가 알레르기의 주범이라고 하여 모두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수원천의 수양버들은 아직 살아남아 겨울이 지나면 연둣빛 물을 들이며 봄을 알린다. 여름엔 녹음이 더욱 푸르고 가을이면 서서히 갈 빛으로 옮겨가고 겨울 눈이 덮이면 하얀 치맛자락을 날리기도 한다. 버드내의 물도 맑아져 물고기와 오리, 두루미 등이 물을 가르곤 한다.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도 보이고 운동기구까지 있는 시민들의 멋진 산책길이 되고 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버드내와 더불어 남은 삶도 이곳에서 응시하고,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백두산에 올라

10년 전쯤 배낭여행팀과 온 후 오랜만의 백두산이다. 25년 전쯤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과 함께 왔던 먼 기억도 있다. 그때의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또 다른 인연의 사돈과 함께 왔다. 사돈과의 동행은 그 자체가 위태한데 얼떨결에 우리 사이가 탄로 나는 바람에 일행까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조금은 불안하지만 세상에 절대 자유란 어디에 있겠는가.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내 아들의 별이 돼 준 며느리의 그 아버지가 지금 나와 동행하고 있다니. 새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번 여행은 백두산에 올 기회를 갖지 못하신 사돈의 제안이었지만 서파가 포함돼 있어 흥미를 자극했다. 서파는 상상대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지녔다. 에델바이스 같은 만병초가 지천이고 파란 하늘을 담아 놓은 천지의 물도 다도해의 쪽빛을 닮았다. 북파의 인파도 서파에 못지않아 긴 줄을 따라 개방된 구간을 한번 돌고 나오는 기분이다. 건너편 멀리 몇 해 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동반했던 장소도 보여 기분이 야릇하다. 민족의 영산이라지만 왠지 중국의 관광지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수많은 관광객에게 떠밀려 다니는 중국의 천지에 비해 건너편 우리 구역은 선택된 사람들의 휴양지 같아 보여서다. 어서 우리 땅을 밟고 진정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세계인들과 함께 오를 날을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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