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포천, 허브 아일랜드

이것은 분명, 위대한 인간승리다. 여리디여린 심성, 인생을 뜨겁게 살겠다는 굳은 신념의 젊은 여인이 과로에 지칠대로 지쳐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 여인은 길게 살아야 6개월이라는 절체절명의 진단을 받았다. 여인은 평소 극성스럽게 산을 좋아했다. 성냥불도 두려워서 켜지 못했다던 심약한 소녀가 성인이 돼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 북한산 인수봉 암벽등반도 하게 됐다. 암벽등반에서는 자일파티의 리더가 돼 톱을 맡기도 했다. 인수봉을 처음 올랐을 때의 공포감을 딛고 이번에는 대원들의 안전이라는 부담감이 그녀의 마음을 크게 짓누르더라고도 했다. 그 다음부터는 인수봉을 오르는 투지라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는 투철한 인생관을 갖게 됐다는데. 여인은 조용한 산속에서 삶을 마감할 준비를 하기로 마음 먹고 거처를 산속으로 옮겼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허브아일랜드의 한 자락, 포천시 신북면 삼정리(청산로길)의 삼정초등학교 뒤쪽 산 언덕배기였다. 23년 전인 1997년 봄날의 일이었다. 적막한 산속에도 어김없이 새 날은 밝아 왔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여인은 아! 오늘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소중한 오늘 하루, 헛되게 보내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됐다고 했다. 힘겨운 몸으로 호미를 들고 척박한 공터에 나가서 채소씨를 뿌렸다고 한다. 또 하루, 새날이 밝아 올 때는 돋아나는 새싹을 보면서 삶의 환희까지 느끼게 되는 일상이 이어지더라고 했다. 곧 다가올 것만 같았던 6개월의 시한이 지날 무렵에는 몰라보게 건강이 회복됐고 해가 바뀌고 새봄은 또 찾아 왔다. 꽁꽁 얼었던 땅속에서 연약한 새싹이 돋아나는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게 되면서 외경심마저 가지게 되더라고 했다. 지금 세계적인 허브농장을 조성한 위대한 인간승리 허브아일랜드 임옥(林玉) 대표의 이야기다.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에 외경심, 허브로 가득한 자연의 섬 허브아일랜드로 승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산 여인이 흙속에 파묻혀 살아 보니 도시에서의 그 화려했던 사업들은 뜬 구름처럼 보이더라는 것이다. 여인은 서울에서 잘 나가는 커피전문점 두 곳과 레저와 기업연수 등을 전문으로 하는 이벤트회사를 운영했었다. 산속에다 터를 잡은 지 2년이 되던 해, 이벤트회사를 운영했던 인연이 닿아 일본 지바현에 여행 갈 기회가 생겼다. 여행지에서 허브아일랜드라는 이름의 농장을 견학했다. 거기서 아!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친 것이 오늘의 허브아일랜드의 시작이 됐다고 한다. 처음 척박했던 수백평의 땅에다가 호미로 땅을 일궈 채소씨를 뿌리며 시작했던 일이 23년이 지난 지금은 42만9천752.066㎡의 부지 위에 세계 각지의 허브들이 수집돼 허브의 진한 향기를 뿜어 내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허브향기로 가득한 자연의 섬이 됐다. 허브(herb)란 단어는 건강(health)과 식용(edible), 상쾌함(refresh) 그리고 아름다움(beauty) 네 단어의 머릿자를 따온 합성어라고도 한다. 약초로서의 효험을 갖고 있거나 식용이 가능한 모든 종류의 식물의 통칭으로 그 종류가 현재 지구상에는 2천500여 종, 실생활에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먹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했던 허브가 많다. 약용과 미용의 식물, 인삼과 쑥 그리고 창포 등이 우리토종의 허브인 셈이다. ■생활속의 허브, 후각과 시각 등 오감(五感)을 즐겁게 아름다운 자연속에 조성된 허브아일랜드 어느 곳에서나 허브의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예쁜 꽃밭이 있고 정다운 연인과 함께 걸을 수 있는 허브 산책로가 있다. 허브아일랜드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허브의 매력에 빠져 들게 되는데 허브아일랜드 투어맵을 따라 관광코스와 체험코스를 둘러 본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과 조형물 모두가 이국풍(異國風)이다. 원산지가 지중해인 생활속의 허브를 테마로 한 허브농원이라 그 분위기도 그에 따른 탓이겠다.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모티브로 이태리 베네치아 마을과 트레비 분수, 프랑스의 작은 마을, 그리고 그리스의 신전을 표방한 허브힐링센터 등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동화나라를 구현해 놓았다. 연간 100만명의 관람객들이 다녀 간다고 했다. 스카이허브팜으로 가서 소원을 이뤄 준다는 신비로운 종소리를 듣는다. 맑고 깨끗한 종소리가 울리면, 세가지 소원이 이뤄진다는 로맨틱한 전설!! 스카이허브팜의 종을 울려 소원을 빌어 본다. 종이 한번 울리면 사랑을, 두번 울리면 건강을, 세번 울리면 소원을 이뤄 준다고 한다.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는 허브둘레길을 지나 스카이허브팜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평소의 소원을 빌어 본다. 스카이허브팜에는 라벤더(4천그루)와 핑크뮬리(6천200그루)가 있다. 6월 중순부터 8월초까지 보랏빛 라벤더가 꽃을 피우며, 9월 중순에는 핑크빛인 핑크뮬리를 볼 수 있다. 그 밖에 페퍼민트와 칸나라는 꽃도 있다. 허브성 베네치아 마을에서는 곤돌라를 타고 연인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 준다. 베네치아 물길을 따라 곤돌라가 미끄러져 나간다. 그윽한 허브향기와 형형색색의 불빛, 화사한 허브꽃으로 단장한 중세도시가 짙은 허브향기를 쏟아낸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다던 향기도 바람에 살랑인다. 연인들의 사랑의 속삭임과 허브가 어우러져 한 폭의 파스텔화를 그린다. 베네치아가게에서 특별한 가면을 쓰고 기념사진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 다양한 둘만의 이벤트를 연출해 본다. 피톤치드가 풍부한 잣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속에 위치한 산타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일년내내 크리스마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힐링 장소다. 허브식물박물관은 세계 유일, 국내 최대 규모의 허브 실내 식물원으로 250여종의 허브식물을 관람할 수 있다. 약 900㎡의 부지 위에 세운 전국 최초의 식물 박물관이다. 국공립 식물원 시설을 제외한 단일종 식물원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 박물관 안에는 250여종의 허브와 다양한 식물들이 식재돼 있다. 총 3개의 실내 전시관과 야외 전시장, 플라워가든과 폭포수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동화 속 주인공이 돼보는 동화나라 관광펜션 허브아일랜드에서는 매우 이채로운 체험들을 할 수가 있다. 허브아일랜드에서 직접 재배한 다양한 허브들을 이용해 화장품과 비누, 작은 생활소품을 직접 만들 수 있는 행복한 시간도 누릴 수가 있다. 생명의 나무를 메인으로 꾸며진 만들기체험장 내부는 허브공방에서 수공으로 제작한 공예품들과 아기자기한 생활소품들도 구경할 수 있는 장소다. 허브힐링센터는 국내 최대 관광 농원인 허브아일랜드에서 직영하는 허브문화체험센터다. 허브를 이용한 건강관리방법을 오랜 기간 조사하고 임상해 한국형 허브건강관리 방법을 개발해 공급하고 있다. 서양의 허브와 동양의 꽃차, 뿌리차, 잎차를 이용해서 만든 다양한 공예작품을 가족과 함께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씻는 허브, 바르는 허브, 마시는 허브, 만지는 허브, 보는 허브, 듣는 허브, 즐기는 허브 등을 테마로 허브를 이용한 10가지 허브 건강 체험 프로그램도 제공 중이다. 어린아이들이 허브아일랜드의 광활한 자연과 풍경을 느끼며 동물과의 교감을 경험할 수 있는 당나귀 먹이주기 체험은 재미있고 색다른 체험으로 가족단위 방문객들에게 대단한 인기다. 어린이들은 동화나라관광펜션에서 동화 속의 주인공, 인어공주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백설공주, 신데렐라가 되어 볼 수가 있다. 80~190㎡으로 구성된 여러 개의 펜션에는 동화의 스토리를 그림과 조각으로 옮겨놓아,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놓았다. 동화나라관광펜션은 어린이에게는 상상력, 어른에게는 동심 그리고 단체 연수에는 화합의 장을 제공해 준다. 글=우촌 박재곤/사진=허브아일랜드 제공

[아름다운 강산‘산山 내川 들野’나들이] 굽이굽이 강줄기 따라… 시간과 자연이 빚은 예술

포천 숲길 짙어 이끼 푸르고 / 나무 사이 사이 강물이 희여... 시인 신석정(辛夕汀) 선생의 시(詩) 산수도(山水圖)의 첫 구절이다. 이 산수도의 마지막은 푸른 산 푸른 산이 천년만 가리 / 강물이 흘러 흘러 만년만 가리로 매듭지어 진다. 언제 읽어도, 수백 번을 읽어도 눈에는 아름다운 산하(山河)가 그려진다. 무한의 시간을 읽고 무한의 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즐거움까지 갖게 해 주는 명시다. 긴 장마가 이어진 여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은 포천 한탄강을 탐승했다. 돌아 오는 길에서는 한탄강이 임진강을 만나고 예성강도 만나 한강의 일원이 되어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 가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로,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에서 시작된 한탄강이 지난 7월10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네스코(UNESCO)본부 제209차 집행위원회에서 세계지질공원으로 최종 인증이 되었다. ■ 한탄강, 용암이 빚은 예술품 지질학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다 국가지질공원은 우리나라 자연공원법에 의해 정해져 있다. 국가지질공원은 지구과학적으로 중요하고 경관이 뛰어 난 지역으로 국가가 인증한 공원을 말한다. 지질공원의 핵심은 단순히 지질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중심의 활동에도 그 비중을 크게 두고 있다. 지질유산을 보전하고 교육과 관광에도 활용하여 지역의 경제적 이익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을 위시하여 13개 지역이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 받았다. 이 들 중, 제주도(2010년)와 경북 청송(2017년) 그리고 광주 전남 무등산권(2018년)의 3개 국가지질공원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이번에는 포천권역과 연천권역, 강원도 철원권역의 한탄강이 4번째로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이 된 것이다. 세계지질공원은 국제적인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 명소를 보호와 함께 교육과 관광을 연결해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을 도모시키기 위한 유네스코의 프로그램이다. 세계유산, 생물권보전지역과 함께 유네스코 3대 보호제도 중의 하나로 지역이 보유한 지질학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것이며,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은 세계적인 지질생태 관광지구로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평가받은 셈이다. ■ 각양각색의 독특한 지질학적 특성 화산하천지형의 공존과 아름다운 조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은 경기도 포천과 연천, 강원도 철원을 포함한 넓이 1천165.61㎢ 지역에 해당하며 그 중 포천시 한탄강 유역이 가장 큰 면적(493.24㎢)을 차지한다.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탄강 지질공원은 화산지형과 하천지형의 특징이 함께 공존하면서 독특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약 50만 년에서 13만 년 전 사이 북한의 추가령(楸哥嶺) 구조곡에 위치한 오리산과 680m 고지에서 수차례 분출한 용암이 남쪽으로 흘러 광활한 용암대지를 만들었고 그 위를 흘러 내리고 있는 강이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현무암 절리를 침식, 30~40m 높이의 수직 주상절리협곡을 형성시켰다. 주상절리는 기둥모양의 돌틈이란 뜻으로 암석이나 지층에서 나타나는 기둥모양의 평행한 틈(절리)이다. 주로 용암이 분출되어 굳어진 화산암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여 식을 때 부피가 줄어들면서 만들어 진다. 일반적으로 단면이 6각형 모양을 이루며 용암이 식는 환경에 따라 4~8각형의 모양을 이루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동해 해안에서 잘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내륙에는 한탄강이 대표적인 주상절리지역이다. 절리는 형태에 따라 주상절리 외에 땅과 수평을 이루는 판상절리, 부채꼴 모양의 방사선절리도 있다. 하식동굴은 하천의 흐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굴로서 절리나 침식에 약한 부분이 흐르는 물에 깎여 나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탄강의 대표적인 절경의 한 곳인 비둘기낭폭포의 하식동굴은 한탄강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침식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동굴이 더 커지고 있다.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 장암산(長岩山, 1천52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한탄강은 휴전선을 넘어 철원군과 포천시를 차례로 지나며 134.5㎞를 흘러 임진강과 만난다. 한탄강은 625전쟁으로 한탄하며 죽었다고 하여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한탄강(漢灘江)의 원래 명칭은 크다는 한(漢)과 여울이라는 뜻, 탄(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에 포함된 26개 지질명소 중 포천 한탄강 지질공원에는 10개의 지질명소가 인증되어 있다. 비둘기낭 폭포를 위시하여 화적연, 포천 아우라지 베개용암, 포천 아트밸리, 대교천 현무암 협곡, 지장산 응회암, 교동 가마소, 멍우리 협곡, 구라이골, 백운계곡과 단층 등이 포천권역의 10개 지질명소다. 이밖에 연천 전곡리 유적토층과 재인폭포, 철원 용암대지 등 26곳 지질명소는 모두가 다 각양각색의 독특한 지질학적 특성으로 수많은 탐승객들의 눈길을 끌며 사랑을 받고 있다. ■ 높이 50m 한탄강 하늘다리를 건너며 한탄강주상절리 협곡의 웅장함과 아찔함을 느껴본다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의 지질명소 모두를 둘러 보자면, 적어도 세 차례 이상의 일정을 잡아야만 하겠다. 우선 포천권역부터 도상(圖上)나들이에 들어가 본다. 포천 한탄강의 주상절리길 안내자료와 지도를 펼치면 한탄강 지질관광의 거점, 포천권역에서는 맨 먼저 대교천 현무암 협곡이 나온다. 2004년 천연기념물 제436호로 지정된 이 협곡은 한탄강에서도 대표적인 현무암협곡지대다. 협곡의 총길이 약 1.5㎞, 높이는 20~30m로, 부채모양으로 형성된 방사선절리가 관찰된다. 그 다음, 교동가마소는 관인면 중리 교동마을에 있는 현무암지대로 협곡의 모양이 가마솥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교동가마소에는 궁예가 옥가마를 타고 와서 목욕을 했다는 소(沼)와 폭포소가 있다. 용(龍)이 놀았다는 용소도 있는데, 용이 놀았다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다. 구라이골과 운산리자연생태공원의 구라이골은 굴과 바위의 합성어로 굴바위라고도 불린다. 한탄강지류에 형성된 소규모 현무암 협곡이지만, 하천에 의한 다양한 침식지형인 하식애와 하식동굴을 관찰할 수가 있는 곳이다. 이동면 도평리의 약 10㎞에 달하는 백운계곡과 단층은 중생대 쥐라기 화강암의 구조운동(단층)으로 생성된 다양한 지질학적 구조를 관찰할 수가 있다. 선유담을 위시하여 많은 못(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경관이 매우 뛰어 나다. 계곡주변의 도평리마을은 이동갈비와 이동막걸리의 본거지로 유명한 관광지다. ■ 한탄강지질공원센터, 50만년의 세월이 담긴 한탄강 한눈에 포천시(시장 박윤국)는 지난해 4월 국내 최초의 지질공원전문 박물관인 한탄강지질공원센터를 개관했다. 한탄강의 지질, 역사, 생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이 센터의 용암이 만든 강, 지질관에는 한탄강의 용암이 분출하기 이전, 지층을 이루었던 화강암부터 한탄강의 형성과정과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 주상절리, 용암대지, 베개용암 등 한탄강의 지질학적 특징이 전시되어 있다. 삶이 흐르는 강, 지질문화관에서는 드넓은 용암대지와 한탄강 협곡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 최고의 유람지였던 한탄강과 영평팔경까지 한탄강의 문화를 체험할 수가 있다. 또 다른 한 공간, 다시 태어난 강 지질공원관에는 현재 한탄강과 함께하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질공원제도와 한탄강 지질공원의 명소들도 소개되어 있다. 지질생태체험관에서는 어린이들이 한탄강의 지질과 생태를 놀이로 배우며 체험할 수 있고 협곡탈출 4D라이딩 영상관에서는 한탄강 레프팅을 실제로 체험한 기분을 갖게 해 준다. 경기도의 자랑이자 소중한 자산인 한탄강세계지질공원은 4년 주기로 재인증을 거쳐야 하는 만큼 당국자나 기관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며 잘 보존해야겠다. 아울러 대한민국 최고의 생태관광명소를 넘어 세계적인 지질생태관광지로 도약할 수 있도록 관계자와 탐승객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야만 하겠다. 글=우촌 박재곤/사진=포천시 관광산업과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광주 화담숲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애국가의 후렴이다. 무궁화는 태양의 꽃이다. 태양과 함께 꽃을 피우고 지며 다시 태양과 함께 새로운 꽃을 피운다. 무궁화 꽃잎 중앙에는 붉은 단심이 있고 꽃잎을 따라서 단심선이 뻗어 나가는데 그 모양이 태양을 연상케 한다. 무궁화는 한 여름에 수천 송이의 꽃을 피워 다함 없는 에너지를 간직한 꽃이다. 무궁화는 태양같이 밝은 꽃이라는 의미에서 환화(桓花)로도 불리는 등 상징적인 면에서도 태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태극기와 애국가 그리고 무궁화는 우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기(國旗)요 국가(國歌)이며 국화(國花)다. 지금으로부터 만 75년 전인 1945년, 열 살 나이의 필자는 나라를 잃은 이 땅에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교실에는 일본 국기가 걸려 있었고 일본 국가를 불렀다. 남의 나라 글 일본어로 된 책으로 공부했고, 봄날에 반짝 피었다가 허무하게 우수수 지고 마는 사꾸라를 나라 꽃 국화(國花)라고 배웠다. 그 해 여름방학이 끝나고 등교를 하니 일본인 교사들은 보이지 않았고 우리나라 선생님이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 그 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고 드디어 우리말로 애국가를 부르며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인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그렇게도 충격적인 변화를 접하게 된 탓이었을까, 그 후 75년의 인생을 태극기와 애국가 그리고 무궁화와 한글의 소중함에 유난스레 집착하며 살고 있다.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프로야구 매 경기마다 시합에 앞서 젊은 선수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태극기와 애국가를 가슴에 품는다. 그 씩씩한 모습이 볼수록 감동스럽고 행복해 진다. 강원도 홍천 출신인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 1863~1939) 선생은 구한말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로서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낙향, 무궁화 밭을 일구어 가꾸고, 그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며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쳤다. 1918년에는 홍천군 보리울(모곡)에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로 광복에 대한 의지를 승화시키며 민족혼 고취에 힘쓰셨는데, 일본경찰에 의해 무궁화는 모두 뽑혀 소각되고 갖은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루었다. 1933년의 이 일이 무궁화사건 인바, 이 사건을 계기로 무궁화는 국민들로부터 나라의 꽃으로 확고히 자리매김 되기도 했다. 인류역사상 백성의 이름으로 특정식물이 가혹한 수난을 겪은 일은 무궁화가 유일하다고 한다. 독립문 건축기념 행사 때 처음으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무궁화는 애국가의 후렴부에 한국을 대표하는 꽃으로 등장한다. 프랑스, 영국, 중국 등 세계 모든 나라의 나라꽃들은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이 곧 나라꽃으로 정해진데 반해, 무궁화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민들에 의해 정해진 나라꽃이다. 조선황실의 꽃이 이화(李花 梨花 : 배꽃)였지만 무궁화가 백성의 꽃, 국민의 꽃인 나라꽃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은 온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아 마땅할 자랑거리임에 틀림이 없겠다. 무궁화 꽃은 보통 6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11월 초까지 무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끝없이 피고 또 핀다. 10년이나 15년 된 나무 한 그루에서 3~5천 송이까지 꽃을 피우는 대단한 생명력을 지녔다. 무궁화 꽃은 겉으로는 다섯 장의 꽃잎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섯 꽃잎은 하나로 붙어 있는 통꽃의 구조이다. 이렇듯 무궁화는 국민 모두에게 화합과 통합을 시사해 주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나라꽃이다. ■ 화담숲, 17개의 테마원과 국내외 식물 4천여종을 수집전시 화담(和談)숲은 LG상록재단이 공익사업의 일환으로 식물의 생태적 연구와 보전 그리고 생태체험을 통한 교육의 장(場)을 제공하고자 조성한 수목원이다. 광주 도척면 도웅리 발이봉(512m) 기슭 16만5천265㎡(약 5만평)에 자리를 잡았다. 화담숲은 공개된 수목원으로, 누구나 방문하여 지친 일상의 피로를 말끔히 씻고 재충전 할 수 있는 국민건강의 숲이다. 화담(和談)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이고 지난 2006년 4월에 조성승인을 받아 2013년에 정식개원을 했다. 17개의 테마원을 위시하여 국내 자생식물과 도입식물 4천여종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화담숲은 수목원의 본래 역할인 수목유전자원의 수집, 증식, 연구, 전시, 교육 뿐만 아니라 동 식물이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생태계 조성에도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사업중 천연기념물인 원앙과 어름치 등 다양한 동물을 생태관과 원내에서 보전하면서 생태보전에도 앞장서고 있다. 여러 테마원 중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테마원은 단연 반딧불이원을 꼽을 수 있겠다. 매년 6월이면 화담숲의 밤 하늘은 반딧불이의 은은한 불빛으로 수놓아져 이 광경을 직접 경험하고자 하는 인파로 북적인다고 한다. 개원 후 지난 9년간 원내 반딧불이원에 서식처 복원과 인공사육을 수행한 결과 매년 애반딧불이를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가 잡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어서 붙여진 개똥벌레라는 별명의 반딧불이는 농약사용과 밝은 불빛의 도시화로 인해 그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잃었다. 그 결과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책으로만 볼 수 있는 신비의 곤충, 어른들에게는 오랜 추억 속의 곤충으로 남아 있다. 화담숲은 단순 반딧불이 방사를 넘어 근본적인 서식처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라져가는 생명에게는 새 터전을 제공하였으며 사람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되새겨 보는 좋은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 화담숲 고객에 대한 각별한 배려, 휠체어를 탄 채 모노레일에 올라 아름다운 숲을 둘러 본다 화담숲은 생태수목원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자연의 지형과 식생을 최대한 보존하며 만들어졌다. 계곡과 산기슭을 따라 숲이 이어지고, 산책로는 계단 대신 경사도가 낮은 데크길로 조성되어 있다. 화담숲의 이동수단인 친환경 모노레일은 노약자도 불편함 없이 숲을 조망할 수 있음은 물론, 휠체어를 탄 채 모노레일에 올라 아름다운 숲을 둘러 볼 수도 있다. 어느 공간, 어느 위치에서도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이 정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화담숲의 매력이자 자랑이라고 한다. 도보로도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는 테마원들을 모노레일로는 더 쉽게 관람할 수가 있다. 산기슭 단풍 아래에다 9천450㎡ 규모로 조성해 놓은 이끼원에서는 솔이끼, 들솔이끼, 비꼬리이끼 등 30여 종의 이끼들을 볼 수 있다. 이끼들은 습도, 경사, 햇빛 등 까다로운 생장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10년 넘게 생육조건을 맞추는 연구를 거듭해서 만들어진 노력의 결과물이 이끼원이라고 한다. 국내 최대, 유일의 인공이끼원이기도 하다. 이 밖에 줄기의 껍질이 종이처럼 하얗게 벗겨지는 자작나무가 이룬 자작나무숲도 볼 수 있다. 국내 최대 규모로 1천300여 그루의 명품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어 몸과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소나무정원도 있다. 다른 한 곳에는 자연 암석군 틈새에 식생이 더해진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암석-하경정원도 있다. 계곡을 따라 수많은 수국으로 장관을 이루는 수국원이 있고 분재원에는 30년생에서 120년생까지의 540여 점의 다양한 분재들도 전시되어 있다. 화담숲이 자리잡고 있는 발이봉 기슭은 조류가 자생하고 있는 생태의 보고이다. 멸종위기 생물 2급인 참매와 큰유리새, 흰배지빠귀 등 21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개체수 보호 차원에서 활발히 증식될 수 있도록 화담숲은 서울대 습지보전연합(교수 이우신)과 함께 인공 새집 달아주기 사업도 수행하고 있다. 소형 산새류와 중형 산새류용을 구분하여 총 70여개의 인공 새집을 화담숲과 그 인근에 설치하여 종 보호와 함께 조류 생태연구의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나라꽃 무궁화 보급사업이 그 시발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날에는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띄던 나라꽃 무궁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국민들의 무궁화에 대한 관심이 줄어 들고 체계적인 관리가 부족했던 것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산림청에 따르면 1983년부터 2015년까지 33년동안 총 3천366만본의 무궁화를 전국에 심었지만, 현재 298만본, 약 8%만 살아남은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점차 잊혀져 가는 나라꽃 무궁화의 위상을 높이고자, 화담숲은 2018년 4월 산림청과 협약을 맺고 화담숲 인근 양묘장에 무궁화 8천본을 식재했다. 원화, 선덕 등 우수한 품종접목 6천본과 산림청으로부터 분양 받은 2천본의 묘목을 화담숲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5년간 생육, 서울의 오산고등학교를 위시하여 전국 1천여개의 희망학교에 순차적으로 무상으로 보급하고 있다. 오산고등학교는 일제 때 평북 정주에서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학교로, 교내에 무궁화동산을 만들어 가꾸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던 학교다. 화담숲에서는 무궁화가 국민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국립산림과학원의 실내용 무궁화 품종연구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모든 국기게양대 옆에다 식재하여 평상시에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하고 무궁화에 대한 교육자료를 배포하여 모든 국민들과 청소년들의 무궁화에 대한 인식 개선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겠다고 한다. 화담숲에서는 정성을 들인 만큼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무궁화를 더 많은 국민들이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글=우촌 박재곤 사진=화담숲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화성 제부도

제부도는 섬(島)이다. 섬이란 강물이나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는 땅이다. 외지에서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통상 배를 타고 뱃길을 따라 들어 가야만 한다. 하지만 제부도로 가는 여객선 뱃길은 없다.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져서 생긴 바다 밑 바닥 길 위로 차를 타거나 걸어서 가야만 한다. 그래서 제부도는 신비로운 섬이다. 국토의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총 3천348개의 섬을 가지고 있다. 섬 많기로 세계에서 4번째로 꼽힌다. 이들 섬 중, 유인도는 472개이고 무인도는 2천876개다. 472 개의 섬 중의 한 곳인 제부도가 2019~2020년 한국관광 100선에 뽑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2년 단위로 우리나라 대표 관광명소 한국관광 100선을 선정해서 발표한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우수관광지 100개소를 선정해서 국내외에 홍보하는 사업이다. 2019~2020 한국관광 100선은 4회째가 됐는데, 경기도에는 화성의 제부도, 양평의 두물머리,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 등 12곳이 선정됐다. 인천에는 월미도, 소래포구, 송도 센트럴파크, 인천 차이나타운, 이상 4곳이 포함돼 있다. 섬 관광지로는 남이섬(북한강)과 안면도(서해)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동해)가 선정됐고 경남거제의 외도보타니아(남해)와 제주도의 우도가 한 자리씩을 차지했다. 제부도(濟扶島)는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바닷물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리(濟扶里)의 섬으로, 면적은 0.98㎢, 인구는 2020년 7월말 기준으로 581명, 327가구이다. 바닷물 갈라짐 현상으로 도보나 자동차로 갈 수 있는 바닷길은 2.3㎞다. 제부도가 어떤 사연으로 한국관광 100선에 뽑혔는지를 미리 음미해 본 후, 제부도 나들이 길에 오른다면 그 즐거움은 배가될 것으로 믿어진다. 제부 해변길을 걷는 여름날의 행복 디자인으로 치장된 문화예술로 만나는 매력의 섬 제부 바닷가에서는 발길이 닿는 곳, 눈길이 머무는 곳 어느 곳이나 모두가 다 멋진 디자인 작품이다. 디자인 공모전에 출품한 수많은 작품들이 한 자리에 나열된 모습이다. 나지막한 언덕, 탑재산 아랫 쪽 바닷가 하늘의자에 앉아 숨을 멈추고 시원하게 펼쳐 진 서해바다를 한 눈에 담는다. 그리고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해변길을 따라 걸어 본다. 발길이 닿는 곳들 모두가 예사롭지 않고, 하나같이 다 멋진 디자인 길이다. 눈에 머무는 곳 모두도 마찬가지다. 잠시 후 발길이 닿은 곳, 따로 의자에 앉아 멀리 펼쳐 진 수평선을 한번 더 눈에 담았는데, 앉은 자리의 등 뒷쪽에 제부도의 명품 중의 명품으로 꼽히는 제부도아트파크가 자리하고 있다. 제부도아트파크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디자인 공모전의 하나인 레드닷디자인어워드(Red Dot Design Award) 2017년의 수상작품으로도 등재돼 있다. 명실상부한 명작품이다. 바다조망이 가장 아름답다는 이곳에서는 정기적인 공연도 이뤄진다. 다시 해안 따라 발길을 옮겨 흔들의자와 그늘의자를 거치고 나면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갯벌체험장에 닿는다. 바로 이곳에는 제부도의 상징 매바위가 있다. 짧은 시간, 5리길도 되지 않는 1.5㎞의 해변길을 걸으면서 인간의 위대한 예술작품에 젖어 본 후, 신이 창조한 대자연 속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으니, 아! 참으로 행복한 여름날의 바다나들이가 아닐 수 없다. 제부도에서는 해변의 일부구간과 탑재산을 맴도는 제비꼬리길도 열어 놓았다. 바닷가에는 서해바다조망대인 조개의자가 설치돼 있고 탑재산 언덕, 하늘로에서는 제부도의 해안상태를 살펴볼 수 있다.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바닷물 갈라짐 현상의 현장도 내려다보게 된다. 제부도 나들이의 명(明)과 암(暗) 그리고 제부도해상케이블카 건설 제부도는 매력의 섬이다. 인구 87만명의 활기찬 도시 화성시가 배후도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구 124만명의 도청소재지 수원 역시 인접해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나들이하기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제부도는 수많은 경기도민들에게는 매우 가까운 거리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나들이길 최상의 명소이자 적지다. 특히 2020년 여름휴가의 계절, 해외여행 제로(0)인 상태에서 제부도는 매력만점의 나들이 대상지다. 하지만 제부도는 이러한 소중한 고객들을 다 모실 여건이 되지 않는다. 섬의 규모가 작고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도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나 휴일의 모세길 정체는 제부도 탐승을 어렵게 하고 있는 실정이라, 손님들을 맞아야 할 섬사람들이나 섬을 탐방하고자 하는 쌍방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다. 석양의 장관을 보면서 멋진 추억을 간직해 올수 있는 길이 1.8㎞의 백사장, 제부도 해수욕장은 올 여름 수영복차림의 입수를 통제하고 있다. 제부도나들이의 큰 즐거움 하나를 누릴 수가 없게 된 셈이다. 비록 지금은 모두가 어려운 현실이지만, 천혜의 관광자원인 제부도와 뱃놀이축제가 개최되는 전곡항을 연결하는 제부도해상케이블카 건설사업이 민자로 진행중이다. 해상케이블카 사업시행회사 측에서는 제부도의 케이블카는 자연경관에 어울리면서 관광레저기능을 갖는 친환경적 녹색교통시설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글=우촌 박재곤 사진=화성시 관광진흥과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제부도 1호 음식점 ‘석구네횟집’

아무도 찾아 오는 사람 없는 바닷가에는 해당화가 곱게 피어 있었다. 해당화를 반기며 낭만을 찾아 바닷가로 산책 오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눈에 띄었다. 바닷가에는 이들에게 민생을 해결해 줄 식당이 필요했다. 식탁 몇 개를 펼쳐 놓고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 했던 30대 초반의 부부가 차려 내는 음식 맛이 보통이 아니었다. 음식 맛이 크게 소문이 나고 손님들의 발길도 늘어났다. 이 식당을 차린 사람은 수원의 남문(팔달문), 번화한 거리의 요리집에서 조리를 했던 사람이다. 30대 초반의 나이로 결혼을 하고 아내와 함께 경치좋은 바닷가로 이주를 했던 것이다. 1987년 당시, 이 곳에는 전기불도 없었고 수돗물도 없었다. 전기는 발전기로 식수는 펌프물로 해결했다. 이런 가운데, 주간조선에서 이 집을 알게 돼 기사가 크게 났었다. 이 기사가 많은 사람들이 제부도를 찾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국민들의 삶은 향상됐고 자가용 붐이 일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 편으로 식도락나들이를 하는 붐도 함께 일어났다. 그 덕분에 석구네횟집이 크게 번창하게 됐고 주변에는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제부도에는 50여 식당이 영업 중이고 개업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였던 이성락(李成樂)ㆍ김효자(金孝子) 내외분은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글=우촌 박재곤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두물머리 최후의 뱃사공 이귀현옹

▲ 이귀현옹(오른쪽)이 우촌 박재곤 선생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두물머리 탐방길에 귀한 분을 만났다. 이귀현(李貴鉉ㆍ76)옹. 그는 두물머리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 곳에서 살면서 10대 초반부터 나룻배 사공 일에 뛰어 들었다. 처음 허드렛일부터 시작된 일이 1995년 두물머리의 뱃길이 끊어지는 날까지 뱃사공으로 이어져 두물머리 최후의 뱃사공이라는 기록을 갖게 된 분이다. 바로 두물머리 뱃사공의 살아 있는 역사다. 황포돛대배는 1965년까지 두물머리에서 서울의 뚝섬~마포~행주나루간을 운항하며 채소와 땔감 등 생필품을 매매하는 역할을 했다. 그 이후의 나룻배는 두물머리의 강 건너편, 광주의 남종면 귀어리 나루터를 왕래하는 여객선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뱃길이 끊어지고 배 타는 일은 없어졌지만 이 옹은 수많은 TV드라마와 영화 등의 뱃사공 역을 도맡아 출연하는 연예인으로 변신해서 지금도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은관 선생의 배뱅이굿 전승자가 되어 배뱅이굿 보존회 양평군 지부장을 맡아 활동중이다. 두물머리에서는 해마다 사단법인 배뱅이굿보존회 경기도지회 주최의 지역예술축제를 열고 있는데, 2020년 축제는 16회째로 황포돛배야 두물머리 강변에 살자라는 주제의 공연을 했다. 해마다 두물머리 나루터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의 기획과 연출은 이귀현 옹이 맡았다. 두물머리에서 지척의 거리, 이귀현 옹의 집에서 운영하는 식당 나루터家(가)의 벽면에는 두물머리의 역사를 한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수많은 소중한 사진들이 걸려 있다. 이 옹을 만나 황포돛대 이야기와 지역역사 그리고 연예인으로 활동중인 이 옹의 구수한 이야기들도 들을 수가 있다. 글사진=우촌 박재곤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양평 두물머리

강원도 태백땅 삼수령(三水嶺)에 비가 내리면 이 빗방울들은 한강을 따라 서해로,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이 분수령을 삼수령이라 했다. 514㎞, 1천300리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儉龍沼)는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관통하는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1천418m) 깊은 계곡 안쪽에 있다. 생태계 보존지역인 금대봉 기슭에 위치한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에는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올라와 머무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검룡소에서 분출하는 물줄기는 힘차다. 젊은이의 몸속에 돌고 있는 끓는 피와 같다. 물줄기는 지표상에 일정한 유로(流路)를 갖고 있는 유수(流水)의 계통을 말한다. 작은 물줄기에는 천(川)이라는 이름을 쓰고 큰 물줄기에는 강(江)이나 하(河)라는 이름을 붙인다. ■ 검룡소에서 두물머리까지 천리물길, 남한강 물길의 족보 검룡소에서 분출한 물은 골지천이라는 이름의 물줄기가 돼 백두대간의 서면(西面)자락, 첩첩산중 겹겹의 계곡을 돌고 돌아 정선땅 여량에 닿는다. 이곳에서 대관령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송천과 아울려 조양강이 된다. 그래서 이곳 이름이 아우라지로, 옛날에는 마포나루까지 물길로 뗏목을 띄어 보내던 곳이었다. 조양강은 영월에 닿고 그 이름도 동강으로 바뀐다. 구곡양장 동강은 영월땅을 관통하고, 평창에서 흘러 온 서강과 만나 드디어 남한강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강물은 흘러 흘러 충주땅에서는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인공호수인 충주호를 펼쳐 놓는다. 충주호를 떠난 물길은 여주에 다다르고 강마을을 휘감는다. 이 물길은 풍광이 수려해 아름다운 강이라는 별칭, 여강(驪江)으로도 불린다. 검룡소에서 남한강 물길 천리 394㎞가 흘러 내린 곳, 양평땅 양수리에서는 북녘 땅 금강산에서 발원해 흘러 온 큰 물줄기 북한강과 만나 머리를 맞댄다, 그래서 두물머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 두물머리의 물줄기는 큰 가람 한강(漢江)이 되어 서해바다로 도도하게 흘러 들어 간다. 이렇게 검룡소에서 서해바다까지의 길고 긴 여정에서 한강은 수많은 하천의 지류들을 받아 들이고, 강안(江岸)의 양쪽으로는 수많은 높고 낮은 산들을 거느린다. 우리 선조들은 먼 옛날부터 이 물가에 고을을 형성하고 살아 왔다. ■ 남한강과 북한강 두 큰 물줄기가 머리를 맞대는 곳 두물머리는 천하제일의 강 풍경을 연출 드라마 촬영 및 사진 촬영지로 유명한 두물머리, 순 우리말의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머리를 맞댔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이두수(二頭水), 양두수(兩頭水), 병탄(竝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름도 모습도 여러 번 바뀔 것 같지만 산과 강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빼어난 풍광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양평의 대표명소인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두루머리의 풍광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수백년 된 한그루의 나무가 강을 바라 보고 서서 큰 그림자를 그려내고 잔잔한 강물과 돛단배 한 척, 수수한 연 밭과 섬 하나, 부드러운 산세가 고요하게 드리워져 있다. 분주한 일상을 잠시 내려 놓고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이 곳, 자연속으로 들어 와 보면 일상의 피로가 치유되는 느낌마저 든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높이 26m의 도당(都堂)나무다. 그 위엄이 대단한 이 나무는 무려 400년을 넘는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켜왔다고 한다. 느티나무는 강이 잘 보이는 지점에 그늘을 만들어 쉴 곳을 마련해 주고 떼몰이꾼이나 배를 타고 한강을 지나는 이들에게는 표지판 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아래에서 배를 타는 이들의 안녕과 마을의 안정을 바라는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도당제, 도당굿, 고창굿 등으로 불러 왔다고 한다. 두물머리의 상징처럼 서 있는 이 느티나무에 돛단배가 빠질 수는 없다. 길이 16m, 돛대 높이 8m 크기의 전통 돛단배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1호 조선장 기능 보유자인 김귀성 장인이 원형대로 복원 한 것이라고 한다. 돛의 색깔이 누렇다 해 황포돛대라고 불린다. 한강을 왕래하며 땔감, 식량 등을 수송하는데 쓰여졌으나 현재는 육상교통수단의 발달로 이 돛단배의 용도는 사라졌다. 주로 정박돼 있는 돛단배이지만 두물머리만의 수려한 느낌을 잘 담고 있다. 두물머리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돛단배이기도 하다. ■청동기시대부터 형성된 촌락, 떼몰이꾼들의 떼돈으로 성황을 누리기도 팔당댐 담수로 수몰이 되는 두물머리 부근의 유적발굴사업에서 문화재관리국은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 몇 개를 발굴했다. 느티나무 옆에 놓여 있는 길이 170㎝, 높이 40㎝, 넓이 110㎝의 고인돌 덮개에서는 32개의 바위구멍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별자리인 성혈(性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물머리는 이미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이 형성되고 고인돌을 설치할 정도로 인문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강수상교통의 한 곳, 강나루터였던 두물머리는 정선과 영월 등지의 뗏꾼들과 한강 하류에서 소금을 싣고 온 뱃사람들이 이 곳에다 낙전(落錢), 나루터는 흥청거렸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는 것이다. 두물머리 느티나무에서 팔당호 왼쪽으로 작게 보이는 섬은 큰 섬이라고 불리고 있다. 100평 정도의 섬이 큰 섬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섬보다 작은 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은 섬은 팔당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 됐다고 한다. 큰 섬은 원래 200평 크기의 사구였으나 지금은 100평 정도로 민물가마우지의 서식처가 됐다는 것이다. 두물머리 하류 쪽으로는 짙은 숲으로 덮힌 족자섬이 눈에 들어온다. 족제비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을 보고 섬 이름이 지었다는 설, 발 모양을 닮았다고 족자섬이 됐다는 설 등이 있다. 팔당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족자도(簇子島)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가마우지 서식지가 됐다. 두물머리의 또 한 곳, 갈대쉼터는 사방으로 펼쳐진 갈대들이 바람에 춤추는 풍경이 멋지다. 두물머리는 2015년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의 촬영지로도 등장해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자연을 액자 안에서 감상 할 수 있는 자연풍경 투하형 액자, 액자포토존을 설치해 놓았다. 두물머리를 배경으로 색다른 사진을 찍어 두물머리의 추억을 남길 수도 있겠다. 글=우촌 박재곤 사진=양평군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외국인 입맛도 저격 ‘연밭’식당

세미원 주소지 양평군 양서면사무소는 세미원에서 150m, 지근의 거리다. 면사무소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식당 연밭은 수생식물인 연(蓮)을 재료로 연잎찰밥을 차려낸다. 연은 씨, 잎, 꽃, 뿌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식자재다. 연잎으로 차를 끓여 마시고 연근은 조림을 해서 반찬으로 먹는다. 잡곡찰밥을 연잎에 담아내는 연잎찰밥이 연밭식당의 대표음식이다. 전국적으로 크게 알려 진 업소라 이 밥을 먹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찾아 오시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대기표를 받고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찾았던 외국인 손님들의 단골집으로도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4층 건물의 1층 전체를 식당으로 쓰고 있는데 식당 한쪽 유리창 밖으로는 남한강의 한 지류인 가정천이 바라다 보인다. 연꽃이 피면 그 분위기가 세미원의 일부를 보는 듯하다. 1981년에 문을 열어 양평군의 맛집으로 선정된 연밭의 업주 권오충(權五充) 옹은 이 지역 토박이로, 다섯 형제자매 내외가 작고한 선친의 뜻에 따라 식당 건물 2~4층에서 함께 살고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점. 글=우촌 박재곤 사진=세미원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양평 세미원

겸손으로 내려앉아 고요히 위로 오르며 피어나게 하소서 신령한 물 위에서 문을 닫고 여는 법을 알게 하소서 언제라도 자비심 잃지 않고 온 세상을 끌어안는 둥근 빛이 되게 하소서 죽음을 넘어서는 신비로 온 우주에 향기를 퍼트리는 넓은 빛 고운 빛 되게 하소서 - 이해인(수녀 시인) 연꽃의 기도- 연꽃은 여러 가지 덕성을 지녔다.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연꽃 향기가 연못에 가득 찬다. 바닥에 오물이 즐비해도 그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잎은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해 바람이나 외부의 충격에도 좀처럼 부러지지 않는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다. 사람들이 이런 덕성을 지닌 연꽃처럼 살 수는 없을까. 특히 사회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연꽃 같은 고고한 품성을 지니고 사회를 이끌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 연꽃의 천국, 우리나라 최고의 연꽃정원 세미원을 둘러 보다 태극기 속에 사람과 자연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상을 담은 불이문(不二門)을 통해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洗美苑)으로 들어선다. 경기도 지방정원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미원은 남한강의 끝자락 늪에다 물과 꽃을 주 테마로 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잘 가꾸어 놓은 전통적인 한국식정원이다. 정원안으로 들어서고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전통 정원시설인 돌징검다리를 밟고 건너면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이 국사원(國思園)이다. 한반도 모양의 연못에 백수련과 무궁화를 둘러 심었다. 이름 그대로 나라를 생각하며 나라사랑을 다짐토록 한다. 연이어 맑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한강과 나라와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분수가 물을 뿜어 올리는 장독대분수를 만나게 된다. 장독은 옛 선조때부터 우리의 기본식품인 된장과 간장을 담아서 발효시키고 저장했던 항아리다. 이 속에는 식품만이 아니라 숭고한 어머니의 마음까지 담겨져 있다. 하늘을 향하여 솟아 오르는 물줄기에서 모정까지 느끼도록 해 놓았다. 2만㎡에 육박하는 땅에 각종 수련과 연꽃, 수생식물들을 가꿔 놓은 세미원은 연꽃의 천국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연꽃정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주제를 달리하는 여러 연못(연당蓮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웃한 여러 연못들을 둘러 본다. 수련을 극진하게 사랑해서 수련의 화가로 불리던 프랑스의 클로드 모네의 정원으로도 일컬어지는 사랑의 연못은 남한강의 아름다움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젊은 연인들은 빠짐없이 여기를 들러서 사진으로 추억을 담아 간다고 한다. ■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 물을 보고 마음을 씻고 꽃을 보고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어라 세미원에서는 연꽃, 연못만이 아니라 볼 곳이 많고 체험할 것도 많다. 순백의 연꽃밭 사이에 놓인 외돌다리, 일심교(一心橋)는 꼭 건너 봐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걸어야 할 길 모두가 다 넓고 평탄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외길을 걸어야 할 경우도 있다. 길은 외길인데, 상대방향에서 마주보고 오는 사람과 마주치게 되기도 한다. 이때 쌍방 서로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만을 고집한다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보가 필요하고 배려가 필요하다. 세미원 한 구간은 마음을 씻는다는 상징으로 돌빨래판 길 세심로(洗心路)를 만들어 놓았다. 그 밖에 두물머리의 강심수를 길어 재를 올렸던 한강 청정기원제단과 거대한 크기의 정병(淨甁)과 용병(龍甁)을 활용한 분수도 설치되어 있다. 또 한켠에는 겸손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만 통과할 수 있는 자성문(自省門)도 만들어 놓았다. 물의 기운을 상징하는 용두당간(龍頭幢竿)도 세워져 있다. 세미원에서 세한정(歲寒庭)을 둘러 볼 수 있다는 것은 크나 큰 덤이기도 하다. 국보제180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 선생의 세한도(歲寒圖ㆍ영인본)가 벽에 걸려 있다. 기구한 운명의 세한도에 얽힌 사연과 추사와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사제간의 아름다운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겠다. 세미원은 철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풍광이 달라진다. 1년 4계, 풍광에 따른 분위기의 문화제를 준비해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봄빛정원문화제와 연꽃문화제가 봄과 여름에 열리고 가을에는 수련문화제가 열린다. 겨울에는 겨울정원과 어울리는 포근한 분위기의 예술작품전도 연다. 야간개장을 하는 여름기간에는 청아한 달빛을 머금은 연꽃과 아름다운 조명속에서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낭만적인 밤을 즐겨볼 만하다. 귀로에는 조선 정조시대의 배다리를 재현한 열수주교(冽水舟橋)를 건너는 것이 좋겠다. 이 다리를 건너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절경, 한국관광공사의 한국관광 100선지로도 선정되어 있는 두물머리와 연결이 된다. 글=우촌 박재곤 사진=세미원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인천 강화 평화전망대

인천 강화 이야기에 앞서 북한의 개성에 있는 송악산(松嶽山ㆍ488m)을 소개하고 싶다. 송악산은 산 전체가 주로 화강암인 큰 바위산이다. 예로부터 경기(京畿)의 오악(五嶽) 중 한 산으로, 명산 반열에 올라 있다. 경기오악은 송악산을 위시, 가평의 화악산(華嶽山ㆍ1.4㎞)과 가평~포천의 운악산(雲嶽山ㆍ935m) 그리고 파주의 감악산(甘嶽山ㆍ675m)과 과천~서울의 관악산(冠嶽山:631m)으로 모든 산 이름에는 악(嶽)자가 들어 가 있다. 원래 산 이름에서의 악(嶽)자는 큰 산, 위엄있는 산이란 뜻이였다는데 언제부터인가 바위산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이들 다섯 산 중 송악산은 남북분단으로 가 볼 수 없는 산이지만, 아주 가까운 위치의 산으로, 강화평화전망대에서는 강 건너 바로 눈 앞으로 다가 선다. 송악산 자락에 펼쳐진 대도시 개성 역시 아무나 가 볼 수 없는 곳이지만 거리로는 아주 가깝다. 남북 분단 이전, 일제 때의 개성~서울 간은 통학기차로 통학을 하던 거리였다. 거리상으로는 약 60km, 철길위의 정거장마다 열차가 정차했기 때문에 기차 타는 시간이 편도로 2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신 민관식(1918~2006) 선생은 이 통학열차를 이용했던 일정때의 기록을 남겼다. 개성역을 출발, 봉동~장단~문산~금촌~일산~수색~신촌역을 거쳐 서울역(당시의 경성역)에 도착한 다음, 도로위를 달리는 전차로 갈아 타고 안국동으로 이동했다. 그 다음, 도보로 화동(종로구 북촌로)에 있었던 경기고등학교(당시의 경성제일고보)까지 갔다는 것이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어떤 명분이든 이제 전쟁은 그만 어느 집단이나 나라, 시대마다 전쟁의 명분들은 다 달랐겠지만, 그 명분들의 공통분모들을 찾다 보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322년)가 말한 우리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는 평화로 귀결되기도 한다. 온갖 전쟁으로 얼룩진 세계사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역시,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라는 표현은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이 땅에서 90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을 통해서 형성되고 발전되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를 가하고 상대를 죽이고 자신들도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처참한 전쟁의 비극을 통하여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고 또 성장해 오기도 했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서면 민통선북방지역 제적봉에는 강화평화전망대가 있다.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문화관광공간이다. 2008년 9월 5일에 개관한 이 전망대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인 1층에는 통일염원소를 배치해 놓았다. 이산가족들의 한을 달래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디지털나무를 설치, 탐승객들이 이곳에다 소망을 적고 그 뜻을 오랫도록 기릴 수 있게 해 놓았다. ▲고향 그리워 울고 또 울었던 망향의 긴 세월남북을 가르는 강안(江岸)의 최단 거리는 고작 1.8km 전망대 본관건물 2층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땅과 북한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조망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가 투영된 한반도의 축소판과 같은 강화의 전쟁사와 군사유적지, 6?25전쟁의 피해 상황도 볼 수 있다. 남북분단의 과정을 설명 받고, 영상물 관람을 통하여 대치중인 남북한 상황도 알 수 있게 해 준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통일로 가는 길을 보게 되며 통일을 위한 노력과 통일 이후의 비전도 제시해 주고 있다. 3층은 북한땅 조망실이다. 조망대에서 조망되는 북한지형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전망대에서 한 눈으로 들어오는 강 건너편 북한의 개풍군 해창리와 삼달리까지는 2.3km, 정말 지척의 거리다. 남북간의 강안(江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강화도 북단의 도로, 전망대로(길)의 한 강안 맞은 편에 있는 북한의 해장포다. 1.8km의 거리다. ▲대룡시장 교동이발관, 망향 70년 지광식 할아버지 이야기 강화평화전망대를 찾아 가기 직전, 먼저 들렸던 강화군 교동면 교동섬에서 만난 82세의 실향민 지광식(池光植) 할아버지는 실향 70년의 한(恨)과 망향의 간절함을 소상하게 이야기 해 주셨다. 하늘을 나르는 새들과 남북을 가르는 강물 속의 물고기들도 자유롭게 남북을 오고 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이 스스로가 갈라 놓은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지 못하며 한 맺힌 삶을 살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고향으로 돌아 간다는 꿈과 희망은 포기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 지광식 할아버지는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열한 살 나이 때, 동네 어른들을 따라 살던 고향마을, 당시의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남당리 마을 앞 남진포 포구에서 배를 타고 남한 땅인 강화도의 교동섬으로 피난을 왔다고 했다. 북한 땅 고향마을에서 남한 땅 교동섬까지는 물길 20리, 약 7km의 거리다.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바로 고향으로 돌아 가겠다는 다짐이었다는데, 이제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을 넘고 또 너머 70년의 세월까지 넘겼다며 허탈해 하신다. 당시 교동섬에는 북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집단이주라도 한 듯, 서로가 다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전쟁은 이어지고 귀향이 어려워 지자, 피난민 일부는 더 먼 남쪽으로 갔다고 했다. 교동섬에 남은 사람들은 생계의 방편으로 허허벌판 피난 온 정착지에 자신들이 살던 고향마을 가까운 곳, 대룡리(大龍里)에 있었던 연백장의 모습 그대로를 본 따서 만든 골목시장을 개설했다고 한다. 강화도 본섬에서 교동도까지는 2014년 연육교인 교동대교(3.44km)가 개통되었고 교동도(섬)는 지금 보석처럼 반짝 반짝 빛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 중심이 대룡시장이다. 반세기 전으로 되돌아 가 본 시간여행대룡시장 골목길을 걷다 대룡시장 골목안으로 들어 섰다. 초여름의 무더운 날씨, 허름한 건물벽면에 그려 진 첫 번째로 만난 벽화의 한 컷에서 아이스케이키~ 하고 외치는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골목 안 길이 좁기는 했지만, 차 없는 거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참 잘한 조치라는 생각이다. 골목 길 양 쪽으로는 금방 찌그러질 것 같은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 서 있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갔고 오랫동안 이대로 잘 보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에 이 정겨운 옛날식 건물들이 현대식 건물들로 개조 된다면 어떻게 하지? 엉뚱한 걱정이 앞섰다. 건물 벽면에는 세련되지 않은 옛날식 벽보들이 많이 붙어 있다. 여러 컷의 벽화들도 그려져 있다. 골목 곳곳에는 반세기 전 생활상을 떠 올리게 하는 조형물들도 재현되어 관광명소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온다. 시장 안 풍경들이 엄청 난 관광자원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교동이발관은 눈에 확 띄는 소재다. 주인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압권이고 반 세기 전의 이발관 모습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기네스 북에 등재될 수도 있을 법하다. 이발관 안 벽면에는 1965년 7월 10일, 공중위생법에 따라 경기도지사가 교부한 이용사면허증(지광식)이 걸려 있다. 다른 한 쪽 벽면에는 당시 어느 이발관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평화로운 농촌풍경, 이발소 명화가 옛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이발관의 간판 윗 편에다 둥지를 틀고, 대를 이어가며 할아버지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제비가족의 보금자리 두 동(棟)이 객의 눈을 크게 자극했다.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살 수가 없는 귀하고도 기이한 재비들의 단독주택이다. 글_우촌 박재곤 사진_강화군청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水閣煙光內(수각연광내) 아지랑이 끼어있는 강언덕 집에 黃薇晩色深(황미만색심) 백일홍 꽃이 짙게 짙게 피어 있네 田園猶慣眼(전원유관안) 산과 들은 아직도 눈에 익은 풍경이고 花木舊怡心(화목구이심) 꽃과 나무는 내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네 樑燕亦新乳(량연역신유) 들보에 제비는 올해도 알을 까고 林櫻空好音(임앵공호음) 숲속의 꾀꼬리는 속절없이 고운 노래 得時堪羨物(득심감선물) 제철 만난 만물이 부럽기만 하여서 倚杖一悲吟(의장일비음) 지팡이 짚고 서서 슬피 탄식하노메라 -정약용- 정약용 선생께서 남기신 많은 글 중에서 도구려술감이나 숙정촌(宿汀村:강마을)은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인양 눈으로 들어온다. 이 풍경의 강마을은 지금 정약용유적지 앞 쪽 다산생태공원이 되어 우리나라 제1의 강 풍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 지고 있다. 도구려술감(到舊廬述感)은 성균관대 송재소 교수가 옛집에 들러라는 제목의 현대어로 옮기고 작곡가 임긍수 선생이 곡을 붙인 노래가 되어 애잔하게 불리어 지기도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많은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우리나라 역사상의 가장 큰 스승 중의 한 분이시다. 남양주 조안면 마재마을, 예봉산과 운길산의 남쪽 끝자락,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물가에 그의 생가와 기념관, 문화관이 있다. 지금은 팔당호수가 된 마재마을을 둘러 보다 보면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넓고 아름다운 강 풍경을 볼수 있다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마을 북쪽은 예봉산과 운길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호수 건너편 서쪽으로는 하남의 검단산이 솟아 있다. 검단산에 올라 보면 바로 발 아래로 팔당호의 시원한 절경이 전개된다. 추운 겨울날, 호수가 얼음으로 뒤덮히고 눈이 많이 내려 쌓인 날은 자신이 지금 백두산을 올라 천지를 내려다 보는듯한 착각도 하게 된다. 팔당호 건너편 동남쪽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백자의 고장이다. 해협산을 너머 양자산과 앵자봉의 부드러운 능선이 길게 펼쳐져 있다. 앵자봉 계곡에는 백년의 성당 천진암이 지금도 건립중이다. 강 건너 서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을 쌓은 큰 덩치의 웅장한 산이 시야를 압도하기도 한다. 눈길을 발 아래로 당겨 본다. 공원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서로 자태를 자랑하는데, 물가의 수련과 창포를 찾지 못해 아쉬웠다.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물가의 새벽안개를 상상해 보았다. 한 차례 보지를 못하면 평생의 한이 된다는 이곳의 새벽안개풍경은 꼭 한 차례 찾아 가 볼만 한 풍경이다. 이 여름 유서 깊은 이곳에 들러 강변의 시정(詩情)에 한번 젖어 보는 것도 좋겠다. ■ 정약용유적지, 역사공부와 함께 강변의 시정(詩情)에 젖어볼만한 곳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정약용유적지는 선생께서 태어난 곳이자 강진에서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이곳에는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묘소와 39세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여유당이란 현판을 걸고 살았던 옛집이 복원되어 있고, 선생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기념관 그리고 정약용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문화관이 있다. 이곳에는 실학을 주제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실학박물관도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유적지 입구 다산문화의 거리에는 정약용 선생의 얼이 느껴지도록 화성(수원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전시되어 있고 길가의 벽면 동판에는 선생이 집필하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에서 뽑은 글들이 새겨져 있어서 선생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다. 기념관에서는 디오라마로 연출한 선생의 일대기와 당시의 생활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정약용 선생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실물 크기의 4분의 1과 2분의 1 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19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을 쌓을 때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당시 4만냥의 국가 재정을 절약하는데 큰 힘이 된 거중기와 일종의 크레인인 녹로는 바로 실학정신에 바탕 한 정약용 선생의 설계로 제작된 기계이다. ■ 길고 긴 유배에서 꽃 피운 실학사상 기념관 옆에 있는 문화관에는 정약용 선생의 인간적 고뇌와 삶의 철학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선생의 꿈,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유배지에서 그리운 마현, 새로운 조선의 발견, 다산 근대의 길 등 5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래픽 패널을 만들어 놓았다. 정약용 선생의 사상과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다산의 삶이라는 애니메이션 영상물도 자동으로 상영되고 있다. 여유당 뒤 나즈막한 언덕 위에는 정약용 선생과 부인(풍산 홍씨)의 합장묘가 있다. 1762년 임오년, 사도세자가 죽던 해에 태어 난 정약용 선생의 아명은 귀농(歸農)이었고, 자(字)는 미용 또는 용보였으며, 아호로는 열수(洌水), 사암(俟菴)등이 있으나 가장 많이 알려 져 있는 것이 다산(茶山)이다. 열 살 나이 때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시작했고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고문(古文)을 열심히 읽었으며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1783년 22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하여 뛰어난 성적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다가 1789년 대과 시험에 합격하여 정식관료로 진출하였다. 이어서 정조의 능행을 위해 한강에 배를 엮어 만든 다리인 주교(舟橋)를 가설하였고 정조의 역점사업인 화성(수원성)의 설계도를 완성하는 등 기술관료로도 크게 활약하였다. 하지만 그는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옥사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정약용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18년간의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에 다산학문의 두 축을 이루는 경학과 경세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 졌으며 5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이로써 어떻게 자신을 갈고 닦아 인간관계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하는 문제와 국민을 잘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방도를 찾아내서 책에 담아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했고, 그들을 저술 작업에 참여시킴으로써 오늘날 다산학단으로 불리게 된 연유가 되었다. 글=우촌 박재곤 사진=안미옥 (사)정약용문화교육원 사무국장 김남기 정약용문화교육원 이사장 실학박물관 우여곡절 끝 건립 정약용 사상 널리 전파 할 것 잘 정돈되고 아름답게 꾸며 진 오늘의 정약용유적지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헌신해 온 한 사람의 역사학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단법인 정약용문화교육원의 김남기 이사장이 바로 이 분이다. 서울대 문리과대 사학과(64학번)에서 한국사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공부한 김 이사장은 서울의 숭문고와 이화여고 교단에서 젊은 날들을 보내신 교육자이다. 슬하의 두 남매가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과감하게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을 떠나 학문의 스승인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인 이곳 마재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오대산에서 잘 자란 소나무를 가져다 주변 경관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전통 가옥을 짓고 다산사랑모임을 결성, 회장직을 맡아 동분서주 뛰어 다녔다. 그의 정성을 하늘이 도운 것일까? 문리과대 동문인 정치학과(65학번) 출신 손학규 동문이 경기도민의 선택을 받아 도지사의 자리에 올랐다. 한사람은 어렵게 뛰어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두 차례의 공청회를 열었고, 또 한사람은 도 차원의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두 사람이 힘을 합해 환경부와 환경단체들을 설득해 냄으로서 실학박물관이 건립되었고, 팔당 호숫가에 생태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익혀 온 정약용선생의 정신세계를 저술과 강좌를 통해서 후진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김 이사장은 오늘도 이곳이 세계적인 학자가 태어나고 돌아가신 마을에 어울리는 맑고도 아름다운 유적지를 만들기 위해 고심 중이다.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양평 용문산 보릿고개 마을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속담이 있다. 계절은 봄날, 아직 보리는 익지도 않았는데 지난해 가을에 추수한 식량은 이미 바닥이 났다. 그래서 봄날은 궁핍했다. 암담하고 궁핍했던 봄날. 보리가 익을 때까지 넘어야만 하는 춘궁기 보릿고개. 가수 진성이 2015년에 발표한 노래(작곡 김도일) 보릿고개는 가수 스스로가 작사한 노랫말이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 가운데 가요계를 강타, 트롯의 붐을 타고 지금 크게 히트하고 있다.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가슴시린 보릿고개 길/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한 많은 보릿고개여/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지금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애절한 이 노랫말에 가슴이 시려질 것이고 어머님의 한숨과 통곡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리라.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던지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기도 했던 그 시절을 지금 자라고 있는 세대들은 이해하기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다. 하지만, 불과 60년 전, 이것은 바로 이 땅의 사람들이 겪었던 엄연한 현실이었다. 1960년대, 도농간의 인구가 8대2 의 시절, 대다수 국민들은 농촌이 생활의 터전이었다. 보리농사를 지으며 늘 보리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보리밭을 거릴었다. 엄동이 지나면 들판에는 파릇파릇한 보리싹이 돋아나고 넓은 보리밭은 초록의 한 폭 그림이 된다. 보리이삭이 피어나면 철 없는 아이들은 이삭이 팬 보릿대를 꺾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고 추수를 끝내고 쌓인 보릿짚 무더기는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나를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휘파람 불면/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70년 전, 시인 박화목은 보리밭을 걸어가는 외로운 이의 그리움과 쓸쓸함을 한 편의 시에 담았다. 이 시에 작곡가 윤용하는 곡을 입혔고 이 가요는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불후의 명곡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돌이켜 보고 새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보릿고개마을이 그 온고지신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전통 농촌체험마을이다. 이 체험마을은 용문산 아래 쪽 상원사 가는 길 용문면 연수리에 있다. 뒤로 북쪽에 용문산 정상과 백운봉이 자리 잡고 남쪽이 트이고 동쪽과 서쪽에 높은 산이 없어서 산골마을 치고는 햇볕이 잘 들고 하루해가 많이 드는 마을이며 산골마을답게 밤낮의 일교차가 커서 과일과 곡식의 당도가 아주 높은 마을이다. 보릿고개마을의 주변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 정겨운 옛 지명들이 전해지는데 태남길, 수득골길, 귀골길, 솔골길, 오래골, 상원골, 당재, 사그메기 등이다. 그 이름들은 나름대로 연유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귀골(길)은 용문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골짜기의 모습이 마치 귓바퀴 같다고 하여 귀골길이라고 했다 한다. 또한 마을은 수도권 근교의 마을로는 보기 드물게 옛 돌담길 등 전통농경사회에서 서로 도우며 살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연부락의 형태를 아직도 잘 보전하고 있다. 이 돌담길 등 전통농촌마을의 원형을 기반으로 하여 일반 학생부터 가족들, 외국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체험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마을이다. 도시속의 번잡함과 소란을 멀리 두고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은 아담하고 봉긋한 산과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함께 하는 마을이다. 평화로운 자연의 소리와 풍경이 반겨주는 이곳에서 도시생활의 찌던 일상, 지쳐있는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훌훌 털어 버려 볼만 한 쉼터이기도 하다. 보릿고개체험마을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운영되는데 마을 주민, 62명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도시사람들에게 궁핍했던 그 때 그 시절을 회고토록 하고 농촌생활을 체험토록 해주는 마을이다. 40대에서 80대까지의 주민들이 마을공동체를 결성하여 운영하고 있는 양평 보릿고갯마을의 원용우(元容禹) 위원장은 자신들의 마을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마을, 이사 와서 살고 싶어 하는 행복한 마을로 꾸미겠다는 단단한 다짐으로 힘을 모우고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인정이 넘쳐 나는 마을을 찾아 오셔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산바람을 마시고 가실 것을 권유드린다고 했다. 양평 보릿고갯마을에서는 매우 다양한 계절별 체험프로그램을 짜놓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전통음식체험을 위시하여 자연생태체험, 농사체험 등이 주요 프로그램인데 전통공예와 전통놀이도 해 볼 수 있다. 콩으로 순두부를 만들어 보고, 디딜방아에 보리를 넣고 찧은 보리가루로 보리개떡을 만들어 먹어 본다. 쑥과 호박으로 쑥개떡과 호박개떡도 만들어 본다. 인절미를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한다. 밭에 나가서 고구마와 감자를 캐고 옥수수를 따고 복숭아밭에도 간다. 농산물수확체험을 해 보는 것이다. 농촌마을을 둘러보고 밤에는 모닥불에 둘러앉아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먹으며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해 본다. 보리밥과 제철음식을 맛본다는 것은 빠뜨릴 수 없는 필수이겠다. 어린 시절 아빠 엄마를 따라가서 농촌의 이런 체험을 한차례 해 본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용문산을 오르겠다는 산꾼이라면 가족 모두가 이 보릿고개마을에서 1박 하고 부인과 애기들은 마을에서 농촌체험을 하도록 하고 산을 다녀 오는 것도 좋겠다. 옛고향의 정취가 그대로 살아있는 청정한 자연환경에서 재배한 과일들을 수확해 보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가 있다. 복숭아와 배가 이 마을의 특산과일이기도 한데, 일교차가 심한 산속의 기후로 이곳에서 나오는 복숭아는 그 당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글=우촌 박재곤 사진=이호남 양평 보릿고개마을 사무장 양평 보릿고개마을 찾아 가는 길 위 치 : 양평군 용문면 연안길 23-1 (주차장주소 용문면 연수리 167번지 일대) 문 의 : 031-774-7786 010-4400-7786 (마을 사무장)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자가용 이용시 6번국도 : 서울 미사리 팔당대교 양평 용문 연수리 37번국도 : 이천톨게이트 이천 천서리 개군 양평 용문 연수리 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이천IC 이포대교 천서리 사거리 용문 용문소방서 연수로 3㎞ 직진 연안상회 보릿고개체험마을 대중교통 이용시 버스 : 동서울(상봉)터미널홍천방면 버스 승차 용문터미널 하차 ※ 연수리행버스 : 7:00, 9:00, 11:00, 12:00,15:40, 17:00, 18:40 전철 : 용산에서 용문까지(20분 간격) 용문역에서 택시로 10분 거리 기차 : 청량리역 중앙선 원주, 제천방면 승차 용문역 하차 일제 강점기 식량수탈해방직후 등 힘든 시기 함께한 보리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라고 했다. 먹는 것이 만백성의 하늘이라는 뜻이다. 기원전 90년 경, 고대 중국을 무대로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司馬遷)의 역사서에 담긴 내용이다. 민이식위천은 2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모든 인류에게 그 때나 다를 바 없는 엄연한 진리다.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주식은 쌀밥이었고 그 다음이 보리밥이나 잡곡밥으로 맥이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 쌀을 생산해 내는 벼농사의 시작은 적어도 서기 1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리는 한자로 대맥(大麥)이라고 하며 지구상의 식량작물로는 가장 오래된 작물 중의 하나다. 7천년 전에 야생종으로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세계적으로는 다양한 기후조건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보리를 처음으로 들여온 시기가 중국 서기전 1세기경에 전래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쌀밥의 별칭인 이(李)밥이 조선왕조의 이씨(李氏)들이나 상류사회의 음식이었음을 말해 주는 반면, 보리밥은 서민층들이 먹었던 주식(主食)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이런 가운데 일제 강점기에는 호남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과 목포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수탈해 갔다. 음력 4월에 이르면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 수확을 애타게 기다리게 했다. 이 시기가 바로 보릿고개로, 식량부족의 궁핍한 춘궁기(春窮期)의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보리가 익을 때까지 산과 들을 헤매며 초근목피(草根木皮), 나무껍질이나 나물을 캐다 먹으며 연명을 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보릿고개는 일제의 식량수탈과 해방직후의 사회적인 혼란과 전쟁을 거치면서 계속 이어졌다. 1970년대에 접어 들면서 정부의 식량증산정책에 따라 통일벼의 파격적인 생산량으로 보릿고개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1977년에는 10㏊당 벼 평균 수확량이 500㎏에 육박했다. 드디어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녹색 혁명으로 인해 식량자급자족시대로 접어 든 것이었다. 2020년, 이제는 벼가 자라기엔 매우 건조하고 척박한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사막에서 농촌진흥청의 농업기술이 2020년 5월, 벼를 재배한 후 첫수확을 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들에게 전해 주고 한다.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양평 양자산 산중마을

신라(新羅.기원전 57년~935년)는 한반도의 동남부 경주를 본거지로 시조인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래 제56대 경순왕까지 993년간의 왕조를 이은 나라다. 세계적으로도 오래 존속한 왕조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구성했었는데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540년~576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가 고구려땅이었던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지배자가 되자 고구려의 유민들은 양자산의 북쪽 기슭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중의 분지로 피신해서 터를 잡았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은 낯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에 이들을 대상으로 산적행위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후, 이들은 화전(火田)을 일구고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워내는 한 편, 다랭이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이것이 산중마을의 시작이자 역사다. 지금의 행정구역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와 신화리, 화양리 일대가 이들 고구려 유민들의 본거지로 이들의 영원한 고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 이 땅에 조선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충신들이 절개를 지키고자 관직을 뒤로하고 은둔하기 위해 모여든 절개의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고장이지만, 불과 반 세기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양평군의 오지에 속했다. 군청소재지에서는 큰 강 건너 편,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찻길이 있고 큰길이 있는 양평읍내의 중학교로 진학을 하면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양평장보다 더 큰 시장을 보기 위해서는 염티고개를 넘어 먼 길, 퇴촌을 거치고 광주(廣州)까지 가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확 달라 졌다. 집집마다 갖고 있는 자가용차로 잘 뚤린 길을 타면 전국 어느 곳이나 이웃 같은 세상이 되었다. ■ 국보 제186호가 출토된 땅 신화리 고려의 충신들이 절개를 지킨 절개의 고장 통일신라시대의 강상마을을 한번 생각해 본다. 1976년 신화리에서 경지정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었다. 고증을 거친 후, 국보 제186호 양평신화리금동여래입상(楊平新花里金銅如來立像)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곳은 통일신라의 불교문화가 크게 꽃피웠던 성지로 추정된다. 아쉽게도 더 이상의 불교유적을 찾지 못했지만, 엄청난 불교유적을 발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 토박이 양촌 유영진(兪永鎭. 77)선생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했다. 큰 강 한강을 뱃길로 건너야만 했던 일상의 생활은 부지런해야만 했고 알뜰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몸에 배이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가는 길이 멀고 힘들었기 때문에 공부한다는 것의 소중함도 크게 깨닫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생활해 온 강상면 주민들은 힘을 모아 자신들의 마을이 갖고 있는 자산인 청정한 자연을 이야기로 만들어 세상에 널리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강상면주민자치위원회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볼거리 체험관광과 산중옛길로 이어지는 7개의 등산로와 자연휴양림길을 조성한 것이 바로 이 사업이다. ■ 나비등을 타고 늦게 찾아 온 봄날자연의 숨길 산중옛길 나들이 강상면 송학리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양자산의 주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저 착한 산의 한 자락에 산적 악한들의 소굴이 있었다니, 자연과 인간의 박자가 엇박자였던 것으로 느껴졌다. 김외숙 마을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마을입구인 사슬고개로 들어 섰다. 다리가 아파서일가. 봄은 나비등을 타고 천천히 찾아 온다고 했다. 그런데다 산적마을로 가는 산중옛길은 양자산의 북녘 기슭이고 한강의 강바람이 센 곳이라 반대편, 양지 바른 쪽보다는 어느 해나 봄의 도착이 지각이라고 했다. 이른 봄부터 산속에서는 꽃들의 릴레이가 이어지는데, 이곳은 어느 해나 한 두 걸음 뒤진다고 했다. 진달래가 지고 말았을 것으로 알았는데 만개한 진달래와 함께 산철쭉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길은 울툭불툭 투박한 흙길이지만, 아스팔트길에 익숙해진 발바닥에 색다른 쾌감이 와 닿는다. 얼마를 걸었을까. 붉은 흙길이 나왔다. 해설사의 해설이 이어졌다. 도공이 이 길을 걸었다면 삽으로 퍼다가 도자기를 굽는 가마로 갖고 가고파 할 것입니다. 정신을 잊고 걷다가, 반세기 전에 불렀던 캠페인송 한구절을 중얼거리게 되었다. 상쾌한 아침이다 / 걸어서 가자 / 걸어 가면 건강하다 / 걸어서 가자 //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아침마다 라디오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들려 주었던 노래다. 걷는 길 좌우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도열해서 서 있다. 나무에 관한 설명을 듣다가 쪽동백나무 이야기에 귀가 솔렸다. 여름에는 이 나무에 흰 꽃이 만발하는데, 어르신 세대에서는 이 나무의 열매를 따다가 기름을 짜 내어서 호롱불을 켰다는 설명을 했더니 어떤 어린이가 전기불이 있는데, 왜 그렇게 했지요? 라는 질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웃어야 할지, 슬픈 생각에 울어야 할지, 답변이 어려워 졌다고 한다. ■ 1천300년 전 산적들의 일상을 상상해 보는 재미하산길은 두 갈래 세월리쪽과 신화리쪽 길은 산길이라지만 경사도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분지인 이곳, 길 아래쪽에 온실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그 한 켠이 산나물자생단지다. 이 단지에서 호미로 흙을 다듬고 있는 분에게 무슨 나물이냐 고 물었더니 도라지라고 했다. 삼복의 여름날, 파란 도라지가 피어 있을 산속의 풍경화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산 아래 멀리, 흘러 내리는 남한강 물줄기와 양평군 개군면의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산중전망대에 올라 본다. 주중의 오후, 생각보다는 삼삼오오 경기도 광주와 이천 등 가까운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봄 향기를 맛보러 이 곳을 찾아 왔다고 했다. 복장이 가지가지다. 결혼식에 가도 결례가 되지 않을 만한 정장차림의 부인이 유독 눈에 띈다. 이 부인은 평소 가까이 모시는 스승께서 가벼운 평상복차림으로도 불편하지 않을테니 여행을 좋아 한다면 양평 산중마을은 꼭 한 번 가 보라는 권유를 하셨다고 했다. 어쩌다 정장차림으로 오게 되었는데 스승님 말씀대로 전혀 불편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산길에서는 매점이나 식당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간식과 물 준비를 하지 않고 온 것은 낭패였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간이복 차림으로 손자 손녀를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다고 했다. 산적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200여 평쯤 되어 보이는 넓지 않는 공간에 탑승객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1천300여 년 전, 사람이 이 곳에서 살았을 모습을 상상해 봤다. 사람살기에 딱 좋은 위치다. 마당 앞쪽은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주변의 산세는 바람막이 병풍 같다. 산중마을은 산적공원에서 지근의 거리, 사는 사람은 없다. 내려가는 길 다래골부터는 아름다운 세월리계곡의 풍광을 즐기며 자동찻길까지 내려올 수가 있다. 이 구간은 데크를 설치해 놓았다. 건각들이라면 남한강과 양평시가지, 백운봉과 용문산을 조망할 수 있는 서석산(330m) 전망대에 올랐다가 신화리주차장쪽으로 내려 오는 것도 좋겠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이광희 한국산서회 이사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가평 아침고요 수목원

국토가 좁다. 인구밀도로 따지면 우리 국민은 지구 상에서 가장 비좁게 사는 축에 속한다. 이토록 좁은 국토 중에서 67%의 면적이 산림인바, 산림은 바로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원이자 우리 삶의 터전이다. 국토의 어느 곳에나 주변에는 산이 있고 그 산은 국민 누구에게나 휴식 공간이 되어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우리에게 산림의 효율적인 활용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의 삶의 질은 어떻게 될 것인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뜻있는 단체와 국민이 산을 다듬고 가꾸어서 휴양림이나 수목원 등을 조성해 놓았다. 축령산과 은두산 자락 깊은 계곡 33만㎡(10만평)에는 원예학자인 한상경 교수가 1994년부터 매우 이상적인 산림활용의 예(例)로 아침고요수목원을 조성했다. 이 수목원은 단순한 식물수집 개념이 아니라 원예미학적인 관점으로 한국의 미를 최대한으로 반영, 계절과 주제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수목원으로 꾸몄다. 한국정원의 참모습과 모델을 제시하며 한국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한편, 식물유전자원의 수집보전교육전시연구 등의 수목원의 다양한 목적까지 함께 수행하며 인간의 휴식과 심신의 치료에 기여하고자 했다. 1996년 개원 이후 현재까지 영화 촬영지부터 맛집 등 보고 즐길거리 多 1996년 아침광장, 매화정원, 고향집정원 등 미완성의 상태로 개원하고 매년 특색있는 정원을 지속적으로 조성했다. 지금은 고향집정원, 분재정원, 에덴정원, 석정원, 약속의 정원, 하경정원 등 한국적 정서를 듬뿍 담은 총 20여 곳의 테마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원예수목원이 되었다. 약 300여 종의 백두산 자생식물을 포함, 5천여 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는 이 수목원에는 3개의 전시공간도 열어놓고 있다. 아침고요라는 수목원 이름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예찬한 데서 따왔다고 했다. 개원 초창기인 1997년 최진실과 박신영이 출연한 영화 편지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용객이 급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각종 언론에 소개되고 영화와 CF, 드라마 등 다양한 영상물의 단골 촬영장소가 되었고 지금은 연간 이용객이 100만명에 이르는 수목원으로 자리 잡았다. 아침고요수목원은 그동안 국공립 중심의 수목원 조성에서 사립수목원 조성의 붐을 일으키며 우리나라 수목원 확충의 전환점으로도 큰 역할을 하였다. 가평군 청평면에서 운악산이 있는 현리로 가는 37번 국도를 타면 멀지 않은 곳에 상면초등학교가 나오고 여기서 좌회전, 4㎞를 달리면 아침고요수목원에 닿게 된다. 이 거리, 가평군 상면 임초리와 행현리에는 10여 개의 대형 음식점들이 일년 사계 성업 중인데, 저녁 시간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불야성의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곳의 지명 임초리(林草里)와 행현리(杏峴里)는 이곳에 수목원을 조성하라는 암시를 하는 듯한 지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에 있는 음식점들에서는 잣두부 요리와 숯불 닭갈비, 막국수 등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을 위시 다양한 메뉴의 먹거리들을 차려내고 있다. 업소마다 대형버스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도 확보 돼있다. 아침고요수목원을 처음 조성한 한 사람의 의지가 척박했던 이 산골을 생기가 넘치는 부유한 마을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에 새삼 찬사를 보내고 싶다. 봄나들이 봄꽃 축제, 4월의 핑크빛 벚꽃과 6만송이 튤립들의 합창 아침고요수목원은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들에도 한국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을 선보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목원과 식물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계절따라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 아침고요수목원에서는 지금 화려한 봄꽃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청정한 잣나무 숲 아래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산책길과 각종 꽃나무로 가득한 33만㎡의 아름다운 화단의 구석구석이 자연의 화려함으로 가득하다. 수많은 내ㆍ외국인 관람객이 찾는다는 이 수목원도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한산한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어길 수 없는 법, 구름다리를 건너서 수목원으로 들어서면 투명한 빛의 크로커스와 백목련의 꽃, 노오란 산수유가 풍성하게 피어 찾아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100년이나 된 분재작들이 전시되어 있는 분재정원에도 봄은 찾아와 파릇파릇한 새 잎들이 돋아나고 있다. 분홍빛 꽃 잔디가 하나둘씩 얼굴을 내미는 억새월을 지나면 진노랑의 귀여운 수선화가 가득 피어나 새봄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꽃샘추위로 닫혀 있던 매화꽃의 꽃망울들도 속살을 들어내며 그윽한 향기를 내 뿜는다. 느긋하게 수목원을 거닐다 보면 봄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튤립 6만 본이 하늘길, 하늘정원, 달빛정원을 빼곡히 수놓고 있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튤립은 봄의 설레는 기분을 한껏 고조시킨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뻗은 낙엽송 사이사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펼쳐진 꽃 군락의 모습이 아름답다. 특히, 튤립과 교회가 어우러진 달빛정원은 새봄의 청명함을 담고 있어 아름다운 4월의 풍경을 만나볼 수 있게 된다. 수목원의 대표정원인 하경정원은 각 개체들의 어울림과 절제가 자연스럽게 표현된 정원으로 풍광이 뛰어나며 꽃 200여종과 목본성 식물 100여종도 만날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내내 항상 꽃으로 가득한 하경정원 전체는 한반도의 지형으로 통일을 염원하는 모습을 담아 놓았다. 우촌 박재곤 사진=아침고요수목원 제공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가평 나미나라 공화국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됨에 따라 일상에서의 행동 반경이 줄어들고 자연스레 보고 듣고 즐길 거리가 사라졌다. 더욱이 이번달은 봄과 여름의 경계선으로 신혼여행과 봄나들이 등 다양한 야외활동이 이뤄져야 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이에 본보와 우촌 박재곤 선생은 수도권 내 가볼 만한 명소와 그곳에 딸린 역사와 배경을 조명해 독자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여행의 운치를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이번 기획 기사를 통해 코로나19 사태가 막을 내린 후 가볼 만한 곳들을 하나하나 버킷리스트에 담을 수 있을 전망이다. 기획 기사는 이번 기사를 시작으로 2주에 한번씩 목요일마다 연말까지 연재된다. 편집자 주 ■남이섬의 역사,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강 청평호수위에 가랑잎처럼 떠 있는 섬 남이섬은 상상의 나라 나미나라공화국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됐다. 섬이라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배를 타야만 들어 갈 수 있는 출입국관리사무소장에는 8개 나라의 언어로 된 작은 안내책자가 비치되어 있다. 지금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처럼 봄은 왔는데, 코로나19와 어수선한 총선분위기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봄 같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 섬나라로 취잿길에 올랐다. 남이섬은 본래 홍수 때만 섬이 됐지만 1944년 일제가 청평댐을 건설, 북한강 수위가 상승하면서 완전한 섬이 되었다. 앞섬이라는 뜻의 남섬으로도 불렸던 남이섬 지명의 유래는 남이섬 북쪽 언덕의 돌무더기에 조선 초기의 무장인 남이 장군이 묻혀 있다는 오랜 민간전승에 기인하여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이다. 남이섬 유원지의 설립자인 민병도 선생은 1965년 남이섬 조성 초기, 남이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장군의 기상을 기리기 위해 돌무더기 주위에 봉분을 쌓고 추모비를 세웠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추모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다. 남이섬에 있는 이 묘는 허묘(虛墓)이고 남이 장군의 진묘(眞墓)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반역죄로 처형을 당한 사람의 후손들이 선조의 묘를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실제 묘지는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산 145번에 몰래 만들었다. 그 묘가 밝혀지면 그 묘는 훼손 당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계자들이 죽음까지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묘(假墓)를 만들어 본래의 묘지를 지켜 왔다고 한다. 남이섬은 한 때 이 섬의 대표였던 강우현 디자이너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나미나라공화국으로 불리는 상상의 나라로 변모시켰다. 2001년 (주)남이섬 대표이사직을 맡은 강 대표는 상상경영, 역발상경영, 청개구리경영 등 별난 이름의 경영이론을 몸소 실천하면서 황폐했던 남이섬을 연간 내외국인 330만명이 즐겨 찾는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바꿔놨다. ■ 겨울연가 그리고 신혼여행부부 강 대표의 나미나라공화국 20년, 짧은 역사에서 오랫도록 기록에 남길만 한 소중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 겨울연가와 남이섬 화쟈이웬은 단연 압권이다. 겨울연가는 KBS 2TV에서 2002년 1월14일부터 2002년 3월19일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바로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의 NHK 겨울소나타(ふゆのソナタ)로 방영되면서 그 인기가 폭발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한류의 붐을 불러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NHK의 겨울소나타를 보게 된 30~40대 이상의 일본 여성들은 잊고 지났던 아련한 첫사랑에 대한 순정과 기억의 향수를 반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여성들이 한 동안 개인적으로나 또는 단체관광단의 일원이 되어 남이섬을 찾아 왔고 욘사마의 생가를 찾아 춘천으로 왔다. 덩달아 가평과 강원도 춘천의 경제까지 크게 도움이 되었고 막국수와 닭갈비까지 일본에 크게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다. 나미나라 공화국 취재길, 곱게 차려 입고 이 곳 저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젊은 한 쌍의 남녀를 만났다. 신혼여행을 온 신혼부부라고 했다. 신혼여행계획은 외국의 관광지였는데 코로나19로 비행기 길이 막혀 국내여행으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신혼여행길 어젯 밤,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가지 언약을 했다는 이야기 한 토막은 잔잔한 감동이었다. 남이섬 신혼여행경비는 당초 외국여행 예상경비의 4분의 1로도 넉넉했다는 계산, 나머지 돈은 간호사인 신부 친구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 남이섬 화쟈이웬의 추억과 남이섬의 먹거리 화쟈이웬(花家怡園)은 베이징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중식당인데, 남이섬에서는 화쟈이웬 해외지점 최초이자 국내유일의 지점을 개점한 적이 있었다. 화쟈이웬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9개의 사업장을 거느리고 있는 세계굴지의 외식업재벌로 직원수가 2천600명이 넘고 본점 한 곳의 연간 순수익이 160억원이 되는 외식업소다. 전체 사업장의 순수익은 400억원을 웃돈다는 외식업재벌의 유일한 해외지점을 서울이나 한국의 대도시가 아닌 외진 북한강 속의 작은 섬에다가 열게 된 사연은 참으로 흥미롭다. 2010년 여름, 나미나라공화국임을 자임하는 한국의 작은 회사가 중국의 여러 경로를 통해 세계 최다 인구의 중국정부에다 나미나라공화국에는 반듯한 중국음식점 한 곳쯤은 있어야 하니 중국은 정부차원에서 도와 주어야만 한다는 요청을 했다. 드디어 2011년 이른 봄, 화쟈이웬 본점에서 전문인력 12명을 나미나라공화국으로 파견했고 그해 4월13일에는 화쟈이웬 남이섬점이 역사적인 영업을 개시했다. 화쟈이웬의 대표메뉴는 북경오리요리인데 이 요리를 조리하는데는 98회의 칼질을 요한다고 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식탁에 올리는 여러 종류의 낯선 음식들 중에서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을 본뜬 장식을 한 왕새우볶음요리 조초명하는 예술작품인양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화쟈이웬 측에서는 당초 나미나라공화국에서 중국음식장사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래서 나미나라공화국에 세계적인 자신들의 중국음식을 선 보이는 것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고 중국음식을 먹으며 중국문화를 체험하고 중국문화가 스스럼없이 이 섬에 스며들기를 바란다는 뜻을 남기고 떠났다. 이제는 그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매우 아쉬운 생각이다. 우촌 박재곤 선생은 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남  우촌미디어 대표  전국산촌미락회 상임고문 주요저서  산따라 맛따라  이렇게 사는 인생  작은 마을에 사는 큰 행복.  1960년대 한국의 산악운동 (공저. 제1필자. 제5회 대한민국산악대상 수상) 귀환길의 식도락 가평 다믈촌 청평호수 물줄기 벗삼아 입안으로 퍼지는 자연 경춘선 청평역과 청평버스터미널이 있는 마을에서 신청평대교를 건너 가평군 설악면으로 가는 청평호반은 산과 물이 어울린 멋진 절경이다. 이 절경 속 화야산 자락에는 음식점과 별장 그리고 방갈로가 많다. 그만큼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것을 잘 말해 주는 대목이다. 이 절경의 화야산 끝자락 회곡리에는 별난 이름의 음식점 다믈촌이 있다. 다믈촌에서는 청평호수의 큰 물줄기가 내려다보이고 물 건너 한 눈에 들어오는 산이 호명산이다. 호명산 정상에는 백두산 천지를 연상케 하는 호명호수가 펼쳐져 있다. 다믈촌은 아주 드물게 가평에 있는 농가맛집이다. 농가맛집은 농촌진흥청에서 지원하는 농촌형 외식사업장으로 지역 농산물을 활용, 음식관광활성화와 향토음식자원화사업을 위하여 선정한 업소다. 다믈촌은 흔히들 말하는 분위기 있는 업소로 알려져 드라이브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음식점의 기본 필수조건은 맛이겠지만, 그 맛을 누가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 또한 맛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업주 김유진 대표를 깊이 알게 되면 다믈촌이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찾고, 이 집이 식도락 업소로 회자 되는지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가까운 대형매장에서 쉽고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식재료보다 주변에서 맑은 산수의 기운을 받고 자란 싱싱한 친환경농산물 사용을 고집한다는 것이 주변의 평판이었다. 자연히 계절 따라 음식상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발효효소관리사와 약용식품관리사의 자격을 갖춘 김대표의 발효식품에 관한 정성은 각별한 것으로도 소문이 나 있었다. 다믈촌의 장독대에는 언제나 30여 가지의 채소와 과일들이 발효 중이라고 한다. 손님들, 특히 어르신들에게 지극정성이라는 김유진 대표가 차려내는 음식에는 아름다운 마음과 효심(孝心)이 담겨져 있다. 다믈촌에서는 정례적으로 마을의 어르신 40명을 업소로 초청, 대표음식인 능이토종닭백숙을 위시, 노인층이 즐기는 음식들로 기쁨을 선사하며 잔치를 베풀고 있다고 한다. 다믈촌에서는 아름답게 잘 꾸민 찻집 참새언덕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메뉴: 능이토종닭백숙 8만원, 옻닭ㆍ오리백숙 각 7만원, 뽕닭백숙ㆍ얼큰볶음탕ㆍ오리불고기 각 6만5천원, 묵무침ㆍ감자전ㆍ두럽(회, 전, 튀김) 각 2만원, 부추전ㆍ김치전 각 1만원.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9시 주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회곡가래골길 4 (설악면 회곡리 4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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