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핸드메이드 라이프

지난해 10월 루마니아 북부 마라무레슈 지역을 여행했다. 산들에 둘러싸인 목가적인 풍경과 세계문화유산인 목조교회로 이름난 지역이었다. 풍경도 건축물도 아름다웠지만 그보다 내 마음을 흔든 건 사람들이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그들은 경계심 없는 수줍은 태도로 이방인을 맞았다. 들판에서 건초를 베는 여인도, 자른 나무를 마차에 싣고 가는 남자도, 동네 어귀에 모여 수다를 떨던 할머니들도 손을 흔들면 마주 흔들어 주고, 눈이 맞으면 미소를 지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을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꼭 안으로 불러들여 포도나 사과 같은 것을 가득 담아 줬다. 그곳에서는 한 번도 과일을 사지 않았다. 배낭에는 채 다 먹지 못한 과일과 마늘, 고추, 파프리카 소스 같은 것들이 늘 들어 있었다. 그날도 동네를 구경하며 어슬렁거리던 길에 마당에서 포도를 수확하던 가족과 눈이 마주쳤다. 아들 크리스티안과 그의 엄마 로디카였다. 집으로 들어오라기에 기꺼이 들어갔다(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마당의 포도를 따 포도주를 담그는 날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의 중요한 연례행사가 철마다 과실주를 담그는 일이었다. 작년에 담갔다는 포도주도 한 잔 얻어 마시고, 역시나 포도와 사과를 한 아름 얻어 귀가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러 한국 화장품 세트를 선물로 드렸다. 환하던 로디카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내가 그녀의 웃는 얼굴을 찍으며 소셜미디어에 올릴 거라고 했더니 로디카가 비명을 질렀다. “립스틱도 안 발랐는데! 내 옷차림 좀 봐!” 하며 깔깔 웃었다. 선한 인상에 웃음이 많은 그녀 같은 사람이 마라무레슈에는 가득했다. 작은 마을 브랩에서 머문 숙소는 120년 된 목조가옥이었다. 12년 전 아무도 이 마을을 찾지 않던 시절에 영국인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낡은 목조주택을 하나씩 사들여 아름답게 고쳤고, 이 지역의 여성들이 만든 수공예품들로 꾸몄다.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집을 에어비앤비에 올려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 마을에는 식당도 없었다. 이들은 마을의 음식 솜씨 좋은 여성 세 명을 섭외해 돌아가며 그 집으로 손님들을 보냈다. 지금 이 마을에는 숙소가 20개 가까이, 식당도 서너 곳이 생겼다. 루마니아인은 물론이고 외국인까지 이 마을을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브랩의 숙소를 돌보는 이는 20대 여성 안드라다였다. 주근깨 핀 얼굴에 반짝이는 눈이 만화영화 주인공 같았다. 우리가 도착한 날 체크인을 마친 그녀는 “긴급한 용무가 있다”며 서둘러 떠났다. 그 긴급한 용무는 그녀의 염소 세 마리를 몰고 집으로 가는 일이었다! 그녀는 매일 세 마리의 염소와 함께 출근해 염소와 함께 퇴근했다. 루마니아인의 다수가 정교를 믿는데 안드라다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왜 교회에 안 나오냐고 물으면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야 전 교회에 입고 갈 옷도 없는 걸요.” 그 핑계가 정말로 그럴듯하다는 걸 교회에 가보고서야 깨달았다. 한 주 내내 허름한 옷을 걸치고 부지런히 일하던 여인들이 일요일에는 대변신을 이뤄냈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단장하고 교회로 향했다. 그 화려한 옷차림 사이에서 청바지에 패딩 점퍼 차림으로 서 있던 나는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화사한 전통 옷은 대부분 직접 만든 것이었다. 자수를 놓은 조끼와 꽃무늬 치마, 양털 양말에 양가죽으로 만든 신발. 하나같이 정성과 시간을 쏟아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마을 여성들은 긴 겨울밤을 자수를 놓으며 보낸다고 했다. 물론 이제는 스마트폰과 겨울밤을 나눠 써야 하겠지만. 마을을 걷다 보면 마당의 빨랫줄에 포도송이가 새겨진 베갯잇이며 제비꽃이 수놓인 방석 커버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머무는 숙소의 커튼이며 침대보, 러그도 기성품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수공예품을 볼 때마다 사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만들고 싶다’가 아니라 ‘사고 싶다’였다. 나는 이토록 자본주의의 충실한 신도였다.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을 스스로 만들어 쓰고, 직접 키워서 먹으며 살아가는 이곳에서도 한결 같았으니. 인간은 원래 놀이하는 인간이자 도구의 인간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도구를 써서 뭔가를 만들며 노는 능력 덕분이라고 본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우리의 육체성은 퇴화했다. 오래전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이제는 소수의 고급 취미가 됐다. 무엇보다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들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기에는 우리는 너무 바쁘다(시간을 절약하게 해주는 모든 전자제품을 지니고 사는데 늘 시간이 없다). 이제 우리는 ‘구매하는 인간’이 됐다. 구매하기 위해 일하는 삶이다. 그런 면에서 루마니아 북부의 산간마을은 놀이하며 만드는 삶이 아직 살아 있었다. 노동과 놀이가 아직은 철저히 분리되지 않았고, 직접 만들어 쓰다가 물려주는 전통은 여전했다. 민박집의 주인 안젤리카도 자수를 놓아 손님방을 꾸몄고 시어머니와 시할머니의 혼수품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80세 노인이 자신의 할머니가 만든 자수품들을 나무함에 넣어 보관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당연히 내 안에도 뭔가를 만들며 사는 삶에 대한 로망이 있다. 소비하는 인간에서 생산하는 인간으로 변신하고픈 욕망이다. 그 욕망은 해마다 12월이 되면 절정을 이룬다. 12월이 오면 다람쥐가 잣나무 오르내리듯 꽃시장을 찾는다. 삼나무며 유칼리, 향나무, 측백과 편백 가지를 사와 가득 쌓아 놓고 리스를 만든다. 올해는 마흔 개의 리스를 만들어 절반은 선물하고 절반은 소셜미디어에 올려 팔았다. 재료비를 제하고 남은 돈의 절반을 유엔난민기구의 우크라니아 지원, ‘국경 없는 학교짓기’의 캄보디아 학교 지원금으로 보냈다. 둥근 나무 틀에 초록잎들을 감아가며 리스를 만들다 보면 사는 일의 크고 작은 근심 따위는 희미해졌다. 리스틀 안에 소재를 꽂을 때마다 나 자신도 온전히 투영되는, 쾌락에 가까운 몰입의 시간이었다. 내가 만든 리스는 비록 서툴지언정 내 자아의 일부가 포함돼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구매해서는 얻을 수 없는 원천적인 즐거움이 담겨 있다. 루마니아 산골에서 수를 놓는 여성들도 나와 같을 것이다. 무엇보다 적어도 그 순간에 우리는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것만 상상할 수 있다. 완성해서 쓸 때의 즐거움이라든가 선물 받을 사람이 보여줄 표정이라든가…. 시간을 쓰고 마음을 쏟아 손으로 만들어내는 행위는 결국 자아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표현된 자아는 쉽게 훼손당하거나 빠르게 사라지지 않는다. 루마니아가 나를 흔든 건 이렇게 손수 만든 물건으로 자아를 표현하는 능력이 퇴화되지 않고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내년 12월에도 나는 리스를 만들며 짧게나마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살아볼 것이다. 소비가 아닌 생산의 방식으로 잠시나마 나를 표현하기 위해.

[김남희의 길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기

밥상머리 교육을 받던 시절부터 일본 혹은 일본인에 대한 주의사항을 끝없이 들어왔다. 그런데도 지금 가까운 외국인 친구를 꼽는다면 전부 일본인이다. 내게 이렇게나 많은 일본 친구들이 생긴 건 전부 한 사람 덕분이다. 2008년 가을, 나는 “피스 앤 그린 보트(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가 아시아의 환경과 평화를 위해 띄운 배)”에서 쓰지 신이치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그는 일본의 환경운동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 <슬로 라이프> <행복의 경제학> 같은 책으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분이었다. 우리는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함께 하며 가까워졌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신이치 선생님은 내 삶의 가장 큰 스승이자 벗이 되었다. 부탄과 일본, 한국을 여행하며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을 함께 쓰기도 했다. 그는 내가 일본에 갈 때마다 놀라운 수준의 “맡기기” 기술을 시전했다. “오키나와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니 오키나와의 평화운동가 치넨 우시 씨에게, “교토를 제대로 둘러보고 싶어요.”라고 하니 교토가 고향인 테리와 마유미 부부에게, “홋카이도에 갈 예정이에요.”라고 했을 때는 말 치료사인 요리타 씨에게 나를 맡겼다. 시모노세키에는 친구 우에노 씨가, 비와코에는 그의 형 코이치 씨가, 마츠모토에는 그의 동생 슌스케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전화 한 통화로 전국의 친구들에게 나를 맡겼다. 처음 만난 이들이 단지 그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환영했다.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거나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가이드를 자처했다. 나는 그런 호의에 기대어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국을 돌아다녔고, 그의 친구들은 내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이들이었다. 저항할 줄 아는 한국의 문화를 부러워하고, 그로 인해 일본보다는 한국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들의 극진한 배려를 느낄 때마다 나도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반드시 기억했다가 다음 만남에 선물로 주거나, 내가 좋아하는 곳에 데려가곤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더 나은 사회와 지속가능한 지루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희망의 싹을 키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2년 반이 넘도록 문을 닫았던 일본이 지난 10월에 문을 열었다. 나는 동유럽에서 돌아오자마자 일본으로 향했다. 11월의 교토는 따뜻했고,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친구들의 호의에 철저히 기댄 여행이었다. 마유미는 여행의 프로그램을 함께 짜주고, 식당 예약을 비롯해 온갖 번잡스러운 일을 맡아줬다. 무엇보다 10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을 집으로 초대해 일본의 다도를 경험하는 시간을 선물했다. 신이치 선생님은 사흘간 우리와 함께 다니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라의 시골 마을에 사는 친구 카오리도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줬다. 교토의 근대 도예가 가와이 간지로의 기념관에 들렀던 날, 우리는 그 동네의 조용한 카페에 모여 앉았다. 선생님은 라쿠고가(일본의 전통 1인 만담)로 데뷔한 재능을 살려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셨다. 어린왕자의 친구가 된 여우는 어린왕자와 헤어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너의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장미를 위해 낭비한 시간이란다.” 생텍쥐페리의 프랑스어 원서를 영어로 처음 번역한 이는 생텍쥐페리와 가까운 친구였다. 그 영문판에서는 “네가 낭비한 시간”이라고 번역되어 있었다(선생님은 이 번역본이 가장 프랑스어 원본에 가까울 거라고 했다). 어린왕자의 일본어 번역본 12개를 확인하니 그 중 10개가 그 표현을 바꿨다. “네가 낭비한 시간”이 아니라 “네가 쏟은 시간”으로. 낭비라는 단어는 너무나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번역자들이 단어를 바꿨을 거라는 게 선생님의 추측이었다. 낭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씀”이라고 되어 있다. 좋은 의미라고는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헤프지 않게, 헛되지 않도록 시간과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그로 인해 매사에 경제성과 효율성, 생산성을 따진다. 여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조지아를 ‘가성비 스위스’라고 표현하는 글을 읽고 혼자 서글퍼한 적이 있다. 조지아는 조지아만의 아름다움을 지닌 나라인데 왜 굳이 스위스와 비교를 해야 하는 걸까 싶어서였다. 여행지의 식당을 고르거나 명소를 찾는 일에서도 순위를 따지고, 리뷰의 평점을 체크한다.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실패라는 경험의 무게는 무거워진다. 그러니 어떤 일에서도 실패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매사에 가성비만을 중심에 놓고 살아갈수록 삶은 팍팍해지지 않을까. 일상이 우리에게 실패를 허용하지 않으니 여행에서라도 우리는 실패할 기회가 필요하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도 성장하는 존재니까. 무용한 것들에 헌신해보는 경험도, 쓸모라고는 없을 일에 시간을 낭비해보는 일도 여행이라면 좀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비생산적이고,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며 살고 싶다. 시를 읽고, 그림을 보러 가고(예술이야말로 가장 헛된 낭비니까), 꽃을 사서 꽃아 보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음식도 만들어보고, 친구와 마주 앉아 온갖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교토와 나라의 친구들은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낭비했다. 마유미도, 신이치 선생님도, 카오리도 ‘돈이 되지 않는 헛된 일’에 헌신했다. 12월이 되어 다시 일본을 찾아갔을 때도 한결같았다. 도쿄의 친구 히로미 언니도,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신이치 선생님도 나를 위해 돈과 시간과 마음을 쏟아부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싶다. 무용한 것들, 쓸모없는 것들에 기꺼이 에너지를 쓰며 살고 싶다.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계획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 온전히 몰입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가고 싶다.

문화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