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한 단상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애송시에서 늘 수위를 차지한다. 시인 집단에서조차 가장 좋아하는 시로 꼽힌다. 가슴에 그냥 꽂히는 이런 구절 혹은 시가 지닌 다양한 함의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하다. 이름을 존재 전체의 의미로 확장하면, 한 존재에 대한 명명이자 호명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름이란 어떤 존재를 표상하는 중요한 징표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작은 에피소드가 되작여진다. 어떤 어른이 필자에게 “이름을 바꾸는 것도 선각 아니겠느냐”고 한 것이다. ‘자(子)’ 자에 내포된 식민 잔재 때문이다. 필자는 “그냥 그것을 인식하며 살겠다”고 했다. 실은 개명 절차가 복잡해 귀찮은데다 이름을 바꾼다고 존재가 달라지진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동안 필자를 알아온 사람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이름으로 계속 부를텐데 새로운 이름을 알려주면 얼마나 번거로울 것인가. 이름은 한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누군가는 필자의 이름에서 모습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언행을 생각하고, 누군가는 시 한구절을 연상할 것이다. 하여튼 이름은 하나의 존재 전체를 표상한다. 물론 이름이 바뀐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과 상관없이 실존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 석자에는 그동안 만나고 부딪쳐온 사람들과의 시간이 배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개명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름을 바꿔 부르고 바꿔 적어야 한다는 게 미안스럽다. 그러니 설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주어진 이름에 자신의 생을 담아갈 밖에. 사실 필자의 이름에서 풍기는 식민 잔재가 싫었고 지금도 첫 소개 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이름도 식민지라는 이 땅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보면 이를 양가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호미 바바에 의하면 양가성은 식민지인들이 식민 지배자를 모방하되 똑같이 닮지는 않음으로써 차이를 만드는 전략이다. 그런 흉내 내기에 따른 차이가 식민 통치자를 교란시키며 일종의 저항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자(子)’자 이름 역시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 탈식민주의연구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 갖다 붙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런저런 논의를 떠나 필자를 아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름을 고쳐 부르는 노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그렇잖아도 바쁘고 고된 나날이니 말이다. 자신의 이름이 빛나기를 누구든지 바란다. 좋은 이미지로 오래 남는 이름이 되길 기대한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생각하면 다시금 마음 깃이 여며지곤 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삶 전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자신의 이름 하에서 나날을 성심껏 살아간다. 아니 그렇게 쌓인 삶이 한 이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소망들의 아름다운 함축이 바로 ‘꽃’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가끔은 ‘누군가의 꽃’이 되길 간절히 꿈꾸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정수자 시 인

아부와 아첨의 효능

권력이나 권력자 주변에는 알랑거리는 아첨꾼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쨌든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 주변에도 아첨꾼들이 모여 드는 건 당연하다. 우리나라 어느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방귀를 뀌었는데 어느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화제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화제의 그 장관은 능청맞고 아첨 잘하는 인물로 소문이 나있어 그런 우스갯소리가 만들어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절대 권력자, 또는 최고 권력자 주변에는 언제나 별의별 소문들이 많겠지만 이중에는 조작된 소문들도 많다는 점을 우리도 알고 있다. 다만 궁금하다고 할까. 흥미 있는 건 그때 대통령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점이다. 누군가 너무나 뻔히 드러나게 아첨을 해왔을 때 어떻게 대할 것인가? 너무나 뻔한, 그러니까 서투른 아첨에 넘어가는 건 더불어 속물이 되는 것 같아 불쾌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 그러면 아첨한 상대가 불쌍해진다. 자신은 속물을 면할지 모르지만 상대의 속물성을 규탄하는 게 돼 분위기를 난처하게 만든다.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해 내키지 않지만 좋아하는 표정을 짓는다면 대단한 인생수업을 받은 큰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첨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고 추켜세우는 아첨이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해 인류 공통의 기호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첨을 하는 건 속물근성의 표현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최고의 처세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인간을 사로 잡는데는 추켜 세우는 게 제일이야. 만약 나는 추켜 세우는 아첨을 무엇보다 싫어 한다고 말하면 상대는 ‘맞습니다. 당신은 아첨을 싫어합니다’라고 대답하거든. 그래서 당신이 좋아한다면 그야말로 아첨에 넘어간 결과가 되는거지.” 여러말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맞장구만 치고 있어도 훌륭한 아첨이 된다. 그러나 아첨이란 결국 말로 이뤄진다. 우리말에 ‘말로만 생색을 낸다’는 표현이 있다. 말이란 돈이 들지 않는 공수표인만큼 공짜로 생색을 내는 게 추켜세우고 아첨하는 행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냐는 식으로 모두가 서로를 추켜 세우고 아첨하는 사회에 화합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게 아닐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즘 우리 정치판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뭔가 엄격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자기만, 또는 자기들만 잘났다는 식으로 독선적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자기들 파벌 내부에서만 아첨과 아부를 일삼을 게 아니라 그 아첨과 아부를 상대에게도 확대하는 게 어떨까. 물론 그것이 상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혼돈돼선 안된다. 인간적인 평가나 능력에 대한 평가와 치켜 세우는 아첨과는 별도의 것이다. 대통령과 정치판, 치켜세우는 아첨과 아부의 인간관계, 역학관계 등은 단순한 처세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김 정 옥 연출가·예술원 회원

우리의 문화유산 환수, 이제 시작이다

문화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지만 전쟁은 인간의 문화를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든다. 모든 전쟁이 다 그렇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지점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처럼 정복전쟁으로 동과 서를 연결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발생한 예는 드문 경우에 속할 것이다. 전쟁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 중 가장 부정적인 영향은 다름 아닌 문화유산의 약탈행위이다. 이집트의 문화유산은 나폴레옹 원정 등으로 인하여 초토화 되었으며,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등 많은 문화유산이 팔이 잘려나가고 목이 잘려나가는 등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서구 열강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에 이집트, 그리스 등이 자국의 문화유산 반환 요구를 하고 있으나, 2002년 12월에는 서구열강의 18개 박물관장이 고대 문화재 반환을 거부한 사실은 그들의 적반하장과 안하무인의 극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임진왜란과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가 해외로 약탈되어 갔다. 우리의 고려 불화는 일본의 사찰에 보관된 경우가 허다하며, 도공, 도서, 불상 등 약탈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렇게 약탈당한 문화유산은 그들의 문화유산으로 둔갑해버려 원래부터 자신의 것인 양 포장되어 있거나, 쓸모없는 물건으로 취급당하고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힘이 아닌 문화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미국문화가 세계문화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자 세계 각지로부터 미술품 등 각종 문화재를 사들여 문화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 놓는 데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미국의 노력은 문화를 확대재생산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동시에 문화의 세기인 21세기를 맞이하여 그 결실을 맺고 있다. 또한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자국의 소수민족 역사로 편입하고 유네스코에 문화유산 등재를 시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21세기는 더 이상 문화가 전쟁의 약탈품이나 전리품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전쟁이고 문화의 우수성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기에 문화유산의 중요성은 누구에게나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1995년 발효시킨 ‘약탈·불법수출 문화재에 관한 협약’에서 전쟁으로 인한 약탈·유실 문화재는 시한 없이 반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매년 5천만 위안에 이르는 ‘국가 중점 문물 반환 기금’을 마련하고 민간 골동품 수집가들과 시민사회단체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해외로 반출된 문화유산을 본격적으로 회수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스 등 문화유산을 침탈당한 세계 각국들도 범국가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최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도쿄대로부터 되돌아 온 데 이어, 국내 한 방송사와 시민단체의 국민모금운동으로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를 일본의 고서점에서 구입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는 뜻깊은 일이 벌어졌다. 온통 나라가 수해로 침울한 때에 너무도 반가운 소식임에는 틀림없지만 한편 씁쓸한 마음 또한 감출 수가 없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환수에 국민적 관심과 노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국내 문화유산에 대해서도 보다 철저한 보존, 보호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박 두 례 부천문화재단 상임이사

마을 활력 프로젝트

얼마 전 5·31지방선거가 끝났다. 호남 몇 군데를 제외하곤 한나라당 싹쓸이로 끝났다. 앞으로 4년동안 보수색채가 짙은 단체장들이 대부분의 지방정부를 이끌어 가게 됐다. 거기다 지방의회마저 한나라당이 독식해 제대로 된 견제세력마저 없는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문제 투성이의 지방자치를 보수 색채의 한나라당이 독식을 했으니 결코 지방자치 앞날이 밝지 않을 것이다. 한 화가의 시름이 깊다. 우리나라에는 리(里) 단위 마을이 3만5천곳 정도 된다. 언젠가 이 난을 통해 말했듯 우리나라는 평면적은 미국이나 중국의 30 몇분의 1이나 주름진 산하를 쫙 편 표면적은 그 큰 나라들의 6분의 1 정도 된다고 한다. 그만큼 골짜기가 많고 따라서 마을이 많다는 이야기다. 마을들마다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문화 다양성에 관한한 문화강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사정은 다르다. 문화다양성은 점점 퇴색되고 농·어업을 기반으로 한 마을 공동체들은 점점 해체되고 있다. 다양한 문화는 일제 식민지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시책 등으로 거의 획일화된 문화로 퇴행했으며 농·어업 기반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 또한 요 근래 들어 농산물 개방 등으로 거의 해체 위기를 맞고 있다. 앞에서 자치단체들을 언급했듯 대부분의 자치단체들의 단체장들과 지방의원들은 보수 색채의 한 정당이 독식하고 있으며 자치단체들 사이의 차별도 정치적인 이념의 스펙트럼도 없어 보인다. 자치단체가 그냥 제도로서 단체장이나 지방의원들을 4년마다 뽑을뿐이며 주민들의 자치와는 아무 상관없이 굴러갈 뿐이다. 마을 공동체 안에서도 노령화된 구성원들은 그저 일년 단위의 농사일에 습관적으로 매달려 있을뿐 마을의 미래에 대한 주민들 사이의 아무런 소통도 없다. 전체적으로 마을 공동체들은 꿈과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이러한 마을들이 어떻게 하면 활력을 되살릴 수 있을까. 요즈음 행자부, 농림부, 환경부 등 정부 부처들과 문화연대, 지역재단 등 시민단체들이 나서 지역 활력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시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늦긴 했지만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많은 지역과 관련된 계획들이 대부분 그 구체성이 결여되고 있다. 예를 들면 지역 현안에 대한 현황과 발전전략에 대한 대안들은 제시되고 있으나 이를 시행할 주체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가 결여됐다. 그 시안들이 구체화될 지역에 대한 단위 설정도 막연하다. 필자는 리(里) 단위의 마을 살리기만이 우리가 문화사회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동안 생각했던 마을활력 프로젝트의 몇 가지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이러한 마을프로젝트나 마을의 발전 마스터플랜 등을 만들기 위해선 마을의 민주적인 주민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마을 주민들의 총회에서 이같은 안에 대해 의논하고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 다음, 시행을 위임받아 처리할 자체 조직을 갖춰야 한다. 지금 현행 마을의 이장이나 새마을지도자 같은 관 행정 조직으로는 한계가 있는만큼 새로운 주도 조직을 만들어야 함은 물론이다. 두번째는 이처럼 위임받은 소 조직이 마을 생태환경과 주민들의 삶(전통건축물 구비문학 예술축제 민속 의·식문화 등)에 대한 꼼꼼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셋째, 이를 근거로 마을의 생태환경과 민속, 문화, 경관가치 등에 대한 보존 및 발전전략 등을 수립한다. 마지막으로 외부의 지원을 받을지 여부와 이러한 프로그램에 주민들의 참여 여부, 즉 주민들의 자발적인 교육과 훈련 등을 통해 모든 주민들의 역할 분담이 이뤄지도록 한다. 아마 전국에 산재된 많은 마을들 중에는 필자같은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실제로 그 마을에 살고 이러한 마을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는 젊고 싱싱한 주민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들과 외부의 지원자들이 함께 공동 네트워크를 구성, 몇군데만이라도 시범사업으로 이러한 마을 살리기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빠르게 문화사회로 진입할 것이다. /김 정 헌 공주대 교수·화가

연화장에서 꿈꾸는 화엄문화

장묘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내 이웃에 혐오시설을 두지 않으려는 심리는 여전하다. 집단이기주의 비판은 다른 동네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아쉬울 땐 이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기피라니, 이기적인 삶의 방식이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즈음의 장묘시설을 기피 대상으로 치면 건물이나 공간이 억울할듯 싶다. 그만큼 건축미도 상당한데다 쾌적하고 세련된 공간으로 망자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갖추는 좋은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기피니 혐오니 하는 딱지를 떼지 못하는 건 왜일까. 무엇보다 ‘장묘’에 따른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한때 ‘4’가 ‘사(死)’를 연상시킨다고 기피하던 이상한 관행이 있었다. 그것은 인식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사라졌는데, 장묘시설도 변화를 이끌어 내는 운영방식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장묘공간을 일정 부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물론 장묘시설은 망자에 대한 극진한 예의와 함께 이에 따른 편의나 쾌적함이 우선일 것이다. 거기다 예술적 아름다움을 더한다면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여 공연을 하되, 엄숙한 장례식장에 걸맞게 삶과 죽음을 더불어 성찰할 수 있는 그런 것을 하면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다. 죽음의 분위기만 침통하게 감도는 것보다 그것을 포용하며 삶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병행되면 장묘시설들도 더 친근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실은 몇 년 전 수원연화장에서 그런 아름다운 모의를 한 적이 있다. 가칭 ‘연화장 프로젝트-경계를 넘어’로 각 분야의 예술인 몇 분이 모여 새로운 시도를 꿈꿔본 것이다. 이는 훌륭한 장묘시설을 또 다른 의미 있는 예술공간으로 확장해갈 순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우선 문학과 음악, 미술, 무용 등의 교섭을 통한 추모 공연으로 계획을 세웠다. ‘경계를 넘어’, 즉 삶과 죽음, 산 자와 망자, 고정관념의 벽 그리고 예술 장르간 경계 같은 것을 다 넘어 화엄세상의 꿈을 펴보자는 것이었다. 제법 의미 있는 일이 될 듯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진행하던중 사정이 생겨 아쉽게도 후일로 미뤘다. 장례도 하나의 문화다. 그리고 장례식은 우리의 문화 전통으로 보면 일종의 축제였다. 만장을 앞세운 채 꽃상여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던 행렬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답던가. 망자를 묻으며 부르는 노래나 어떤 행위들, 그리고 상여같은 것은 또 얼마나 슬프고도 아름답던가. 그런 것들은 모두 망자를 위한 것인 동시에 산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망자를 극락으로 보내려는 지극한 예의이자 남은 사람들을 추스르는 삶의 한 절차이다. 아무리 절통한 죽음이라도 그 옆에서 곡을 하고 밥을 먹듯, 남은 사람은 또 남은 날들을 어기차게 살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은 발상의 전환이 긴요한 시대다. 장묘시설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속도로에서 연화장을 본 사람들이 무슨 박물관이냐고 물을 때마다 그것을 본래의 용도에만 한정하는 게 아까웠다. 장묘시설도 공유시설이니 많은 사람이 누려야 한다. 그곳에 새로운 문화를 입히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장례나 추모에서, 나아가 우리네 일상을 위로하는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망자와 더불어 산 자들의 통찰을 이끌어내는 문화공연이라면, 우리가 한번 꿈꿔볼 만한 멋진 일이 아닐까. /정 수 자 시인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

월드컵 열풍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결승과 3·4위전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신문이나 방송은 온통 월드컵 얘기 뿐이어서 솔직히 짜증스럽기까지 했던 월드컵 열풍과 광란이 한국의 16강 탈락과 5일 일어난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뉴스의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실력의 현주소가 그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국을 2 대 0으로 꺾은 스위스는 16강에 진출했지만 16강전에서 곧바로 탈락하고, 한국과 비긴 프랑스는 16강전, 8강전에서 우승 후보 브라질을 이기고 준결승에서는 포르투갈을 누르고 결승에 오른 것을 보고 한국의 실력도 결승에 오르고 우승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데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아쉬워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 누가 더 강하고 센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와 비긴 프랑스보다도 우리를 2대0으로 이긴 스위스가 더 강하지만 객관적 전력 평가에는 프랑스가 한수 위이다. 결국 축구와 같이 많은 변수가 있는 경기에서는 누가 더 강하고 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얘기 될 수 없고, 상대적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브라질은 프랑스에 무릎을 꿇고 막강한 전력을 지닌 독일은 이탈리아에 손을 들었다. 천적이 있고 징크스가 있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결국 축구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는 절대적 강자는 없고 오직 상대적 강자와 약자가 있을 뿐. 이 세상, 사회도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으며, 높은 사람과 밑에 사람, 귀하신 몸과 천한 자가 있다. 80년대 초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 우연한 기회에 연출가 몇 사람과 기자들 몇 사람이 술을 마셨다.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인 오 아무개는 주벽이 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날도 그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대통령보다 더 높은 사람이야, 그러니 내 앞에서 까불지 말라고…” 그의 주벽을 아는 사람은 또 시작이야 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처음 그를 만나는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너희들 대통령하면 꼼짝 못하지, 내가 그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이야!” 참다 못해 한 기자가 “당신이 어떻게 대통령보다 높으신 분이냐?”고 물었다. “청와대로 전화를 해 봐, 물어보라고, 대통령과 나 중 누가 더 높냐고…” 그리고는 병신 같은 놈들, 진짜 높은 사람을 몰라보는 바보들이니 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술판은 싸움판으로 돌변했다. 참다못한 한 기자가 주먹을 날린 것이다. “너 간첩 아니야?!” “청와대로 전화해 보라는데, 무서워서 전화도 못하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싸움을 말리느라 내 안경도 날아갔다. 싸움은 이튿날 술이 깬 다음에 청와대로 전화해 보기로 하고 일단 진정됐지만, 이제 생각하면 당시 군사정권의 절대적 권력 앞에서 한 어릿광대가 연출한 해프닝이었다. 봉건사회나 독재국가에서는 모르지만 민주사회에서는 절대적으로 높은 사람과 밑에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월드컵 같은 경기에서 강자와 약자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성이 우리 사회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누구나 이의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스승이요, 선생님이라 할 수 있는데 누구나 선생님이고 누구나 사장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높은 사람이라도 말하는 상대에 따라서 낮춰 말해야 하는데 자기한테 윗사람은 상대에게도 윗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한 연극인이 비록 주석에서 술이 취해 외친 말이지만 “내가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이다”는 말은 강하고 높고, 약하고 낮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외침이었다고 생각된다. /김정옥 예술원 회원·연출가

월드컵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풍경

2006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이다. 얼마 전까지 수많은 국민들이 흥분과 환호성으로 잠시나마 우리의 일상을 통째로 흔들어놓았던 월드컵이었지만, 한국팀이 아쉽게 16강에 탈락을 한 이후 그 뜨거웠던 열기도 점차 가라앉고 차분한 심정으로 진정 월드컵을 즐기고 있다. 이 시점에서 월드컵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오늘날 급격한 사회 변화는 컴퓨터와 정보기술의 발달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술의 발달은 인간생활의 다양한 생활모습과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디지털기술을 바탕으로 한 멀티미디어는 전통적인 미디어에서 뉴미디어를 탄생시켰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다채널 다미디어 시대에 익숙하게 됐고, 세계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월드컵도 이런 뉴미디어와 매스미디어로 전 세계인의 눈과 귀를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계 인류를 하나로 묶어내는 디지털미디어의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우리의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월드컵은 축구경기이면서 재미있는 놀이, 오락인 셈이다. 또한 뉴미디어 기술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의 체험 기회도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이번 월드컵을 통해 보여지는 각 나라의 응원문화도 흥미롭지만 우리의 남녀노소 구분없이 외쳐대는 대~한민국 응원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었다. 이 거리응원뿐만 아니라 찜질방에서도, 음식점에서도 외쳐대는 응원이 화제가 되어 세계 속에 새로운 응원문화를 낳기도 했다. 이런 여러 현상들이 디지털정보사회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열정적인 응원도, 독일 현지에서 쏟아내는 환호도 함께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거리와 시간차이로 결과의 소식만을 접했을 터인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디지털미디어 특성으로 세계가 동시에 들썩이고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우리 안방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디지털미디어로 인해 개방과 공유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활발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아마도 인간 본연의 모습에 부합되어 더욱 열광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간의 욕구를 월드컵을 통해 표출하고 그것을 보고 공감하기도 한다. 우리의 거리응원도 일면에는 그런 욕구와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또 한가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접근이다. 우리나라는 공중파 3사가 동시간대에 중계하는 반면 월드컵 개최국인 독일은 하루에 한 방송사만이 중계를 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축구가 아닌 다른 문화적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좀더 문화적으로 선진국임을 입증하고 있다.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협약에서 문화다양성의 정의를, ‘문화다양성은 집단과 사회의 문화가 표현되는 다양한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집단 및 사회의 내부 또는 집단 및 사회 상호간에 전해진다. 문화다양성은 여러가지 문화적 표현을 통해 인류의 문화유산을 표현하고, 풍요롭게 하며, 전달하는데 사용되는 다양한 방식뿐만 아니라, 그 방법과 기술이 무엇이든지 간에 문화적 표현의 다양한 형태의 예술적 창조, 생산, 보급, 배포 및 향유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우승도 중요하지만 월드컵이 세계의 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창이었으면 한다. 거창하지만 인류애를 가지는 기회와 문화간의 상호존중의 틀을 만들기를 기대하며, 더 나아가 세계 인류의 문화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고 보존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숙된 세계 시민이 되는 길이며 성숙한 시민사회를 이끄는 단초가 될 것이다. /박 두 례 부천문화재단 상임이사

문화권은 기본권이다

얼마 전 문화헌장이 선포됐다. 문화헌장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문화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의 기초이다. 문화는 시민 개개인의 삶의 다양한 목표와 염원들을 실현해 나갈 자유로운 활동의 터전이고 공동체를 묶어 주는 공감과 정체성의 바탕이며 사회가 추구해야할 가치, 의미, 아름다움 등의 원천이다. 문화는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품위와 생명의 존엄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두는 사회를 열게 하며 시민 생활의 질을 높여 모든 이가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번에 선포된 문화헌장을 길게 소개한 이유는 우리의 문화적 권리가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살아야 할, 또는 살아 있을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 권리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들은 잘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품위있고 아름답게 살 권리도 있다. 좀 비약해 말하자면 책을 볼 권리도 있으며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고 이를 통해 현실과 다른 상상의 세상을 꿈 꿀 수 있는 권리도 있다. 언젠가 KTF라는 통신회사가 시민단체 대표들을 점심에 초대해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기업은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취지에서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런 사업중 하나가 소년소녀가장 돕기라고 했다. 주로 생활하는데 도움이 돼라고 의식주에 대해 지원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누군가 소년소녀가장들에게도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또는 아는 사람들과의 통신도 중요하니 이 기업이 가능하면 통신기기도 지원해줄 것을 제안했다. 필자는 이 제안을 적극 지지했다. 이때 의식주는 생존에 필요한 당연한 기본권이지만 다른 친구들과 통신을 할 수 있는 통신권도 이젠 인간들의 삶에 필요한 문화적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화실이 있는 가평의 한 마을은 지금 한참 전원주택업자들과 펜션업자들이 동네 경관을 망가트리고 있다. 거기다 이 난을 통해서도 소개했지만 이 외통 동네에 경기도가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개설할 예정이어서 앞으로 또 한번 마을이 파괴될 위험에 처해있다. 그런데 더 한심한 건 이같은 경관을 포함한 마을의 변화에 대해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이 이상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오래부터 살아온 주민들에게 답답해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관이 (허가를 받아) 하는 일인데….” 대부분의 주민들은 생업에 바빠서긴 하지만 마을과 주민 자신의 문화권인 경관의 가치와 좀 더 나은 삶의 질에 대해 나 몰라라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에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생존권마저 위협받는 절대 빈곤층이 갈수록 늘고 있지만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문화적 조건들도 늘고 있다. 위에서 보듯 아무리 빈곤층이라도 학교나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통신할 수 있고 최소한의 정보가 있어야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분별하게 개발돼 경관이 파괴된 지역에 우리 삶을 그대로 방치해서도 안된다.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압축적 근대화과정을 거쳐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열 몇번째 경제대국에 속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문화지수나 삶의 질 지수는 아마도 일산화탄소를 기준으로 한 환경지수 136위와 같이 거의 꼴찌에 가까운 순위일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의 삶을 품위 있고 아름답게 영위한다는 게 사치가 아니라 당연한 인간의 기본적 권리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것을 우리 사회에 제안한 게 다름 아닌 이번에 선포된 문화헌장이다. /김 정 헌 공주대 교수·화가

아름다운 문화 나들이

‘간송 탄생 100주년 특별전’. 딱 2주간의 전시에 보기 드문 명품전이라 바쁜 중에도 어렵사리 틈을 냈다. 간신히 미술관을 찾아 입구에 서자 소문대로 사람이 넘쳤다. 길게 늘어선 줄에 마음이 먼저 둥둥거렸다. 특별 나들이에 간송의 비탈길조차 흐뭇하다.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신문에서 본 몇몇 대목이 스쳤다. 필자들은 대부분 간송 전형필 선생에 대한 예를 갖추며 문화사랑의 폭과 넓이를 기렸다. 그 많은 유물에 바친 시간이 새삼 귀하고 아름답게 새겨졌다. 그 분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가 엉뚱한 곳에서 통탄하고 있을까. 그래서 간송 덕에 만나는 문화유물은 유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마음으로 그 분의 혼이 담긴 명품들을 깊이 쓰다듬었다. 간송은 우리 문화사랑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 분이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전시회에 몰려나온 데서 그 힘을 다시 보게 한다.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신윤복의 고혹적인 ‘미인도’ 앞에서 넋을 놓거나 이명욱의 텁텁한 ‘어초문답’ 앞에서 연신 무릎을 치는가 하면, 우아하기 짝이 없는 ‘청자상감운학매병문’이나 앙증맞은 ‘청자압형연적’ 등의 앞에서는 눈이 부셔 아예 붙박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아이들까지 몰려오니 그야말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에 다들 흠뻑 취했다. 찬탄의 표정에 은근히 묻어나오는 자긍 또한 서로가 뿌듯이 공유한 느꺼움이다. 욕심 같아서는 쉬었다 다시 들어가 보고 또 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그렇지만 더위에 지친 데다 사람이 계속 몰려와 그건 좀 곤란했다. 유물들에 대한 걱정도 발길을 돌리게 했다. 비좁은 공간에 사람이 넘치니 자연 염려가 앞서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떠오른 게 ‘불친절한 전시’라거나, ‘국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촌평들이었다. 물론 ‘1시간 이상씩 늘어선 인파’에 비해 전시 방식이나 공간 등이 미흡해서 나온 애정 어린 비판이다. 전시 문화를 전반적으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평소에 만날 수 없는 귀한 문화재와 그에 상응하는 관심에는 못 미치는 ‘대접’ 때문이다. 간송 탄생 100주년에 선생 댁에서 하는 전시라는 의미가 크긴 하다. 일생 우리의 문화재를 모은 산실에서 유물을 만나는 일은 그 뜰의 나무들과 더불어 그 분의 운치나 체취를 느끼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전시 방식만 아니라 전시 기간도 너무 짧기 때문이다. 큰 맘 먹고 다른 일정 미루며 간 전시장에서 사람에 밀려다니는 것쯤이야 당연한 품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전시라도 그에 따른 대가가 너무 크면 그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아무튼 간송은 어르신들을 전시장으로 불러냈다. 그런 문화사랑이 어르신들께 제공한 시간 여행은 특별해 보였다. 묵은 것의 아름다움을 푹 익혀 볼 줄 아는 분들이 전시장을 오래 거닐었다. 나이 들수록 우리 것의 가치를 새기는 건 지나온 시간을 알아보기 때문일까. 그런 시간 나들이의 무늬가 문화 나들이에 상감되는 오후, 그득히 품은 소회에 문득 눈물이 고였다. 미술관 앞에서 독도 지키기 서명을 받는 사람들 곁을 지날 때도 그러했다. 간송의 문화사랑에 독도의 위용이 거듭 겹치는 귀로는 그윽하고도 길었다. /정 수 자 시인

따라지의 향연

내가 창단동인으로 참가한 극단 자유가 창단 40주년을 맞는다. 창립공연으로 막을 올린 ‘따라지의 향연’은 뜻밖에 호응을 얻어 40년 동안 극단 자유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잡고 꾸준히 공연돼 왔다. 전용극장이 없어 연속적으로 공연되지는 못했지만 5년 또는 10년 간격으로 꾸준히 공연됐다. 아마 40년을 두고 한 극단에서 공연돼 왔으니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봐서도 최장수 공연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연 횟수나 관객 동원수도 한 극단의 한 공연으로는 최고 기록을 세웠으리라 생각한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동안 배역도 바뀌고 사회풍속도 많이 변했다. 이를테면 ‘따라지’라는 어휘를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른다. ‘따라지’라는 말은 원래 화투놀이에서 3+8=11 또는 5+6=11과 같이 10을 제하고 남는 한 끝으로 끝빨이 없는 사람, 하찮은 인생을 ‘따라지’ 또는 ‘따라지 인생’이라고 했는데 6·25 동란이후 38선을 넘어온 피란민을 ‘38따라지’라고 부르게 되고 정부가 국유지를 빌려주고 정착촌을 만든 곳을 해방촌이라 했다. 해방촌은 곧 판잣집촌이었는데, 이 해방촌에 사는 사람들이 삼팔따라지다. 50년대에서 60년대 그리고 70년대에 걸쳐 삼팔따라지의 판잣촌은 서울을 에워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따라지라는 어휘가 젊은 세대에게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참으로 인생무상을 실감케 한다. 어휘만이 바뀐 것이 아니다. 추송웅, 함현진, 장건일 등 따라지역이나 가짜 귀족, 벼락부자역을 감동적으로 연기했던 배우들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 배우만이 아니라 ‘따라지의 향연’의 무대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 관객들 가운데에도 돌아가신 분이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며칠전 60년대 라디오 드라마의 스타 고은정씨를 만났는데 나는 40년전 ‘따라지의 향연’에 어린 꼬마로 출연한 아들 소식을 물었다. 그는 지금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의 부원장으로 재직중이라 했다. 어머니 고은정씨 말로는 아들이 꼬마역으로 출연한 이후 때때로 무대에의 향수를 얘기해서 아들의 진로에 대한 갈등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그가 영상대학원 교수로 있는 것은 40년전 무대출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번 40주년 기념무대에도 꼬마 ‘빼빼니애로’가 출연한다. 앞으로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라 했다. 소년이 실제로 영화감독이 될지 또는 다른 직업을 갖게 될지는 모르지만, 무대 배우로서의 체험은 일생 그를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연극과 인생은 별개의 것이지만 사촌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지의 향연’ 주제라 할 수 있는 ‘빛과 그림자’, ‘부귀와 가난’도 결국은 앞과 뒷면을 이루는 하나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어 부귀를 누리는 자가 있다. 그러나 ‘진짜 가난과 가짜 귀족놀이’에 지친 따라지들에게도 꿈은 있다. 70년대 유행가 ‘쨍하니 해뜬날 돌아 오련다’는 따라지들의 허세였지만 동시에 꿈이었다. 연극은 어렵고 힘든 세상에 웃음을 선사하고 꿈을 길러준다고 할까… 꿈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깨질 수도 있지만 꿈은 여전히 가난한 자, 약자에게 소중한 양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김 정 옥 예술원 회원·연출가

다문화사회의 공존과 조화

우리나라가 이민국가란 사실을 알고 계신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민은 20세기초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의 이민, 1960년대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들의 이민사 정도 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이민은 이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떠나는 이민역사는 기억하지만 우리나라로 이민 오는 외국인들에 대해선 거의 무방비라고 하겠다. 유엔 정의에 따르면 일시적으로 취업을 위해 이주한 이주노동자도 이민자의 범주에 포함, 한국은 지난 2004년말 현재 외국인 42만명이 취업하고 있는 이민국가이다. 더구나 매년 수많은 코시안들이 출생하고 성장하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회현상이 발생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민국가문제가 더 이상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고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우리의 숙제다. 가장 중요한 건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인정이다. 다문화주의는 21세기의 정의이며 시대적 조류이다. 다문화주의는 지배문화와 피지배문화, 중심문화와 주변문화 등의 서열을 따르지 않고 다양한 문화의 차이와 다양성 등에 대한 이해와 존중, 공존 등을 주장하는 것으로, 세계주의와 다원주의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1970년대 캐나다 정부가 다문화정책을 표방했고 이어 호주도 백호주의를 버리고 유색인종에 대한 개방적 이민정책으로 전환했다. 오늘날 호주의 다문화주의는 호주를 문화의 역동·다면·발전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나라의 이미지를 안겨 줬고 예술의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뤄 호주만의 독특한 문화 창조에 원동력이 됐다. 우리 지역을 살펴보자. 부천노동지방연구소에 따르면 부천에도 이주노동자가 2만명에 이른다. 지난 1월 현재 원미구가 국제결혼가족을 조사한 결과 314가구라고 한다. 부천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이주노동자가 적지 않은 편이다. 부천을 포함한 전국 단위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다양한 문화서비스가 이뤄지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 입장이 아니라 우리 입장이 아니었을까 하는 솔직한 반성을 해본다. 물론 그들을 위하는 최선의 마음으로 기획하겠지만, 우리 또한 그들의 문화를 깊숙이 알지 못하는 맹점이 분명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의 기준, 입맛, 형태 등에 맞추길 강요했을지도 모를 우를 다시는 되풀이해선 안될 것이다. 이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열어 놓고 소통해야 한다. 문화나 인종, 기타의 우열은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이같은 측면에서 부천여성청소년센터의 결혼이민자 지원사업이 더욱 의미있는 프로그램으로 발전되길 바란다. 부천여성청소년센터는 ‘한국문화를 배우고 세계문화를 나누자’란 주제로 결혼이민자들의 한국생활을 적극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이들에게 꼭 필요한 한글교육, 생활문화, 예절교육, 상담, 인터넷교실, 요리교실 등을 기초반과 초급반 등으로 나눠 운영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이같은 프로그램들을 통해 이주노동자 또는 결혼이민자들에게 관용과 차이의 인정, 다름이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는 훈련과 더불어 이들도 우리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사회에서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키워 나가길 바란다. /박두례 부천문화재단 상임이사

오! 대한민국~ 오! 간판공화국

지난해 백제 무령왕이 탄생했다는 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라는 조그만 섬엘 다녀온 일이 있다. 일본 동경에 한두번 간 적이 있지만 이렇게 시골로 가보긴 처음이다. 한시간 이상을 버스로 가는 길에 여러가지 일본 농촌풍경을 잘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도로와 비교하면 왕복 2차선의 좁은 국도였지만 농촌 들녘이 우거진 숲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에 집을 두고 공주의 직장과 가평의 화실 등을 돌아 다녀 시골풍경을 많이 본 필자같은 사람 눈에 일본 농촌은 우리와 너무 달라 보였다. 우선 시각적 공해물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필자 눈에 그렇게도 익숙했던 그 간판들과 선전 현수막 등 온갖 선전물들이 일본의 국도 옆에는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왜 얼핏 본 일본의 풍경을 얘기하는지 대부분의 독자들은 짐작하리라 믿는다.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는 간판공화국이다. 온 나라가 간판과 상업적 선전물 등으로 덮여 있다. 점점 그 도가 심해지고 있다. 어떤 기준이나 규칙도 없어 보인다. 대도시의 부도심으로 갈수록, 도시의 근교로 갈수록, 수도권의 새로운 개발지역으로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그것을 매일 보아야 하는 사람들은 눈곱만큼도 생각을 해주지 않거니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막가파 수준의 간판과 현수막 등도 수두룩하다. 남이 내걸고 자기 영업을 선전하는데 나라고 가만 있을 수 있느냐다. 옆집에서 5개를 내걸면 나는 하나를 더해 6개를 내걸어야 직성이 풀린다. 남이 인도를 침범하면 나는 차도를 점거한다는 식이다. 한때 음식점들마다 TV의 ‘맛자랑 멋자랑’에 나온 걸 그 집의 자랑거리로 크게 내다 붙인 걸 다들 기억할 것이다. 이제는 전국의 거의 모든 음식점들이 ‘맛자랑 멋자랑’을 내걸지 않은 집이 없게 됐지만 심지어 어떤 집들은 길거리에 세워 논 입간판에 ‘××× 맛자랑 멋자랑에 나오지 않은 집’이라고 써 붙여 놓은 집도 생겼다. 너도 나도 내세우다 보니 나온 집이나 나오지 않은 집이나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하는 그집 주인의 나름대로의 배포(?)가 실소를 머금게 한다. 특히 필자는 도시 근교를 자주 지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간판으로 요란하게 뒤덮인 건물들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된다. 온갖 간판들과 현수막들이 건물을 완전히 포장하고 있다. 상업적 선전 간판들과 현수막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그렇게 우리나라 길거리엔 관제 안내 표지판들이 많은가. 정말 정신이 혼란스럽고 괴이한 간판이나 선전물, 안내표지판 등을 만날 때 마다 운전이 잘 안될 지경이다. 어떻게 이처럼 자기선전과 포장이 극심할 수가 있는가. 거의 간판 전쟁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어떤 건축가는 간판으로 요란스럽게 뒤덮인 이런 건물들을 야유하면서 간판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간판은 건물의 마감재다.” 논객인 강준만이 간판문제를 우리 사회의 생존권차원의 ‘주목투쟁’으로 기술한 것에 필자는 동의한다. 그는 이 주목투쟁의 현상을 우리 사회가 서울대 간판처럼 서열중심의 사회심리적인 요소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질곡과 결핍의 시대를 살아온 한국인들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불확실성의 제거의 표시로 간판을 더 많이, 더 요란스럽게 만들어 붙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어디에 있든 간판으로 뒤덮여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는 일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되겠다.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와 경관은 우리의 공공재다. 아무리 간판이 생존(?)과 관련된 주목투쟁이라고 하더라도 공공재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행위로 우리 삶의 질을 떨어 뜨려서야 되겠는가? 이럴 때 지방정부는 우리의 공공공간을 위해 바로 그 공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김 정 헌 화가·공주대교수

전통의 행복한 회통

얼마 전 미·중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胡錦濤)는 리바이(李白)의 시로 자신의 의중을 전했다. 중국 지도자가 시에 심중을 담아 말하는 건 자주 보아온 모습이다. 그럴 때면 중국 공산당 주석의 딱딱한 이미지 대신 부드러운 여유가 느껴진다. 대화에도 격조가 생긴다. 시문의 중시는 중국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공유한 전통이다. 시를 쓰고 즐기는 게 문사의 당연한 소양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선 한시를 쓰지 못하면 지성인 축에 들지 못한다고 한다. 연설이나 대화에 시를 곧잘 인용하는 멋도 이런 전통에서 나온다. 일본은 또 일본대로 전통시 하이쿠를 다양하게 즐긴다. 그 덕에 하이쿠는 세계 현대시사에서 언급되고 있는데다 세계적인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미국 아이들에게도 영어로 하이쿠를 짓게 한다니, 놀랍다 못해 무섭다. 이처럼 중국(한시)이나 일본(하이쿠)은 전통시를 여전히 즐기는데 우리는 전통 시인 시조를 유독 멀리하고 있다. 고려말부터 정제된 형식에 한국적 미학을 담아온 시조는 우리 민족만의 독자적 시가 양식이다. 왕을 비롯한 사대부나 기생 등 누구나 쉽게 짓고 즐기며 삼라만상부터 정치나 사랑, 음담 등에 이르기까지 3장에 싣지 못하는 게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판소리 같은 걸쭉한 입담의 사설로 정치나 양반, 풍속 등을 풍자했고 근대 초기에는 일제의 식민지배 비판으로 국민적 저항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랬던 시조가 이제는 소수자의 문학으로 쓸쓸하기 한량없다. 물론 전통시가 변함 없는 위상을 누리는 일본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자유시는 고작 500부 찍는데 비해 하이쿠는 100만부 이상의 베스트셀러도 나온다). 자유의 확대를 추구해온 현대 예술 정신과 전통시의 정형성이 상충하므로 대부분 자유시 위주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을 보면 세계의 문화 조류와 자국의 문화 흐름이 반드시 같이 가는 건 아니다. 전통시에 대한 자긍이 하이쿠를 현역으로 즐기는가 하면 자국 미학의 세계화까지 이뤄 가니 말이다. 위싱턴의 포토맥 강변에 벚나무를 심듯, 하이쿠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통 미학에 눈감고 온 것만은 아니다. 요즘 영향력이 더 막강해진 영화만 해도 전통의 현재화를 많이 볼 수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들이 한국 전통 미학의 영상화라면,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는 재해석을 통한 전통의 현재화라고 할 만하다. 문학에서도 전통의 현재화는 꾸준히 탐구되고 있으며 음악이니 무용이니 미술 같은 다른 장르들도 그런 고민은 항상 진행형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담아 내느라 모두 진통 속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성공적인 일부를 제외하면, 그 노력들이 아직 생활 속의 크고 깊은 뿌리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없다”는 신영복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전통이 시쳇말로 장사가 되지 않는 건 무엇보다 자긍심 부족 때문이다. 스스로 위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전통을 찾고 존중하겠는가. 우리 자신이 전통을 귀하게 여기며 현재화를 지속할 때 한국 미학을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시조 또한 통섭의 천착을 거듭할 때, 오늘 속의 큰 시로 회통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대화나 놀이에도 즐거운 격조를 하나씩 더 얹게 되지 않을까. /정수자 시인

아름다운 山川, 봄날은 간다

세계의 환경변화, 지구의 온난화현상 때문인지 모르지만 계절이 서서히 변화하는게 아니라 껑충껑충 뛰어간다고 한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가고 이제 봄이 오려나 해서 초봄을 막 느끼는데 갑자기 초여름으로 껑충 뛰어넘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봄이 실종됐다고 할까… ‘봄날은 간다…’는 유행가의 구절이 있는데 봄은 언제나 그렇게 훌쩍 가고 마는 것이다. 목련이 피고 벚꽃이 지고 김영랑 시인이 안타깝게 노래한 모란꽃도 피고 지고, 바람이 불고 황사도 날아오고 어수선한 봄날, 짧은 봄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날의 우리 山川은 아름답다.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신록이 피어날때 내가 사는 팔당 호반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광주시 퇴촌면에서 이조도자기의 본고장인 분원을 거쳐 양평에 이르는 호반의 길은 환상적인 드라이브코스라 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이 제대로 홍보되면 관광자원으로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무지와 이기심으로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그 주범은 옥외광고와 간판이다. 옥외라는 말은 집밖으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옥외간판이나 광고물은 그곳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광고효과를 최대화하고 눈에 띄게하기 위하여 광고물은 멋대로 커지고 붉은색을 주로한 원색으로 도발적이며 전투적인 광고물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곳, 사람을 사랑하는 곳으로 가장 아름다워야 할 교회나 모텔도 아름다움과 조화에 별로 신경을 쓰지않는 것 같다. 수많은 교회에 밤이면 빛나는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는 장관이라면 장관이지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희랍의 남쪽 키크라테스 군도의 니코노스섬이나 파로스섬에는 주민 5인에 하나꼴로 교회가 많다. 그 교회가 서로 경쟁하듯이 아름답게 가꾸어져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준다. 神과 人間이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공간은 그렇게 아름다워야 된다고 생각되었다.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건물의 벽과 심지어 보도까지도 흰색과 코발트색으로 도장되어 바다의 빛깔과 찬란한 태양의 빛이 조화되어 감동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희랍의 남쪽섬들만이 아니다. 스위스에서는 새로 건물을 지을 때는 창의 크기까지도 관광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새봄이 오면 모든 주민이 테라스와 입구에 꽃을 심는다. 매년 30만원 정도의 꽃을 심는다고 한다. 그것은 의무는 아니지만 모든 주민이 불문율의 약속으로 해마다 꽃을 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투자한 이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뭔가 획기적인 대책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 뭣보다도 아름다운 자연속에 살거나 영업을 하는 주민의 의식 변화가 요구되지만 동시에 관광문화의 발전을 위해 제대로 된 심의기구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 그 심의기구는 관리들만으로 운영되지 않고 미술인을 중심으로 한 사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여야 한다. 우리의 아름다운 山川, 자연을 누가 지킬것인가. 아름다운 봄날은 속절없이 가고 있다. /김 정 옥 예술원회원·연출가

창의성과 상상력을 키웁시다

21세기는 상상력의 시대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위기에 처한 시기에 지식보다 더 중요한 유일한 자질은 상상력뿐이라고 했다.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예술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세계 각국의 공통된 인식이다. 우리 사회가 예술교육에 대한 접근이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최근 몇 년 전부터 급물살을 타고 있다. 예술교육은 우리 사회의 이슈 중 하나로 현재 학교 안에서, 학교 밖에서, 사회에서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예술교육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인격형성과 자신의 삶을 이끌 수 있는 정서적 근간을 만들어주는 훌륭한 교육방법으로 오래 전부터 활용되어왔다. 특히 어린이에게 문화예술 활동은 뛰어난 교육적·자기계발 활동으로서 더욱 깊이가 쌓이고 원숙한 경지를 찾게 되는 것으로서 교육에 있어 상승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우리 미래, 대한민국의 핵심주체이며, 우리의 미래를 짊어갈 희망주이다. 그런 어린이들에게 좀더 행복하고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은 지금의 어른들의 몫이라 하겠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아마도 어린이들이 원하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어린이 스스로가 재미있고 즐겁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창조성을 키워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교육을 통해 유연한 사고력과 상상력, 창의성과 함께 생각과 학습의 다양한 방법을 습득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공유하여 사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오감을 통해 체험하는 미적체험은 경험치가 되어 훗날 성인이 되어 훌륭한 전문예술가로 성장하거나 예술활동을 취미로 삼는 행복한 개인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다문화시대에 타인과 타문화와의 소통능력을 높여 우리 모두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다. 이달에는 가족관련 행사가 각 지역마다 많이 벌어지고 있다. 부천문화재단도 그러하다. ‘2006 다시 여는 부천어린이세상’, ‘2006 가족놀이마당’, ‘판타스틱스튜디오 5월 가정의 달’ 행사를 준비하였고, 이제 어린이들과 가족들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문화예술 행사는 지역 내 이웃주민들을 친밀하게 하는 인간적·문화적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고, 주민들의 귀속욕구를 충족시켜줌으로써 도시주민들의 정서안정과 정신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또한 직업적 불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예술적 방법으로 재훈련되어 안정적으로 일하게 되며, 예술 또는 예술가를 활용하여 창작활동의 기회를 주면서 동시에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활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또 오늘은 어린이 날이다. 이참에 이러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가족의 의미도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가족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이런저런 예술체험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 두 례 부천문화재단 상임이사

예술의 공공성과 패러디

예술용어 가운데 패러디란 말이 있다. 패러디(Parody)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패러디는 문학 작품의 한 형식으로 어떤 저명 작가의 시구나 문체 등을 모방해 풍자적으로 꾸민 익살스러운 시문(詩文)을 말한다. 패러디 형식은 문학 작품에서 먼저 시작됐으나 이제 예술의 모든 장르는 물론 드라마나 개그 등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 코드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필자는 이 패러디 형식을 일찍부터 즐겨 사용해 왔다. 뭔가를 삐딱하게 보고 풍자적 시각으로 해석하는 게 체질에 맞는 모양이다. 이러한 체질은 집안 내력인지도 모른다. 필자의 아버님도 유머감각이 뛰어 나셨지만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할아버지는 더 뛰어나셨던 모양이다. 아버님이 평양의전을 다니실 때 할아버지가 며느리 몫까지 셈해 고루 상속을 하셨는데 아버님이 어머님 몫까지 챙겨 평양의전을 때려 치우고 평양 최초의 자동차 운전학원을 차리겠다고 덤비셨단다. 할아버지가 이 고집을 말리기는커녕 “그래라. 앞으로 의사가 많아져 가방 하나 메고 ‘병 고치시오. 병 고쳐’하고 길거리에서 떠돌이 행상처럼 떠돌지도 모르니까”라고 오히려 아들의 고집을 두둔하셨단다. 이 말씀은 그 당시 봉건제도에 길들여진 어른들의 고집스러운 결정과는 다른, 세상을 유쾌한 예지로 판단하는 풍자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그림이 우리의 근대화와 관련된 역사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림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역사적인 무게에 짓눌려 필자의 그림이 관객들에게 외면당하는 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연극에서의 패러디는 주로 유명 작가의 시구나 문체 등을 빌려다 풍자를 위해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필자의 그림에선 유명 작가나 무명 작가 등을 구별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의 도상이나 구성형식 등을 차용할 때가 많다. 심지어는 학생들의 작품에서도 좋은 표현이나 그럴듯한 도상들을 필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으면 서슴없이(?) 갖다 쓴다. 좀 심하면 인용이나 차용을 지나 도용(盜用)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미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피카소와 브락크는 서로의 그림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입체파적 화풍으로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떤 미술에서 영감을 받고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우리는 인용, 차용, 영감과 영향력 등이 모두 넓은 의미의 패러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로 올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패러디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TV 개그에서 잘 생긴 여배우의 얼굴과 약간 독특하게 생긴 추남의 얼굴을 반씩 섞어 전혀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 내고 웃고들 있다. 별로 신선하고 재미있는 개그는 아니지만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서로의 얼굴을 반씩 제공해 전혀 새로운 도상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상향식 패러디를 보여주는가 하면 동시에 하향식 패러디도 보여 주고 있다. 두가지를 다 보여 주지만 못생긴 추남의 얼굴에 대한 풍자보다는 잘 생긴 여배우의 엉뚱한 이미지를 보고 관객들은 웃는 것이다. 이렇듯 패러디에는 다른 맥락에서 이뤄진 것을 같은 맥락 속에 집어 넣어 전혀 엉뚱하고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낸다. 그랬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가지 새로운 맥락들이 발생하고 확장되면 우리는 그것을 예술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의 진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김 정 헌 공주대 교수·화가

문화카페/맛있는 산책

산책하기 좋은 철이다. 미풍이 잘 어울리는 꽃과 신록의 눈부신 날들. 이때문에 저녁이면 수수꽃다리 아래로 신록 아래로 마음이 먼저 가 거닐곤 한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마냥 걷다 아는 이를 만나면 아무데나 앉아 아무런 얘기나 해도 편한 좋은 날들이다. 그렇게 아무 길이나 들어서도 좋은 산책을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자주 누리고 싶다. 좀 쉬고 싶을 때쯤 무슨 요깃거리가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담한 전시회나 음악회, 연극 같은 게 없을까. 마음먹고 예매하고 나서 보는 큰 공연도 좋지만 가끔은 지나던 길에 어떤 프로그램에 끌려 낯선 것들과 만나고 싶다. 그런 게 상시 공연이나 전시가 갖는 힘이 아닐까. 그 근처부터 행복해지는 곳, 아름다운 산책로에 좋은 공연을 겸한 서울의 덕수궁 길이 그런 문화공간일 것이다. 수원의 화성 주변 역시 최고의 산책길로 꼽히지만 문화적으로 맛있는 산책을 하기엔 까마득하다. 돌아 보면 우리가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은 늘 부족한 느낌이다. 무슨 ‘전당’이니 하면서 잔뜩 힘주지 않은 소박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이웃같은 문화공간은 많을수록 좋은데 말이다. 물론 건물만 그럴듯하게 세워놓고 내용이 없는 건 곤란하다. 하드웨어만 앞세운 탓에 그런 조짐을 보이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인구 100만명이 넘는 수원에 갤러리다운 갤러리 하나 없다는 건 너무 초라하다. 예술영화 전용관 하나 없는 것 역시 문화 저변의 빈곤이나 왜곡 등을 낳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현실에서 보듯, 우리의 문화적 욕구는 아직도 계속 뒤로 밀리고 있다.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은 그 열매를 단기간에 따먹을 수 없다. 그래서 장기적인 안목의 인프라 구축이나 투자가 더 절실하다. 도내 부천, 안산, 성남, 일산 같은 도시가 공연장을 늘리고 그 역할이나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게 확장하는 등 선례를 보여주기는 한다. 하지만 가까운 데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공간은 여전히 미흡하다. 이러한 사정은 사실 시민들의 문화 향유권을 앗기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좋은 문화예술을 향유하려면 시민들이 더 나서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우는 아이 젖 준다’고 위정자들에게 그 중요성을 자꾸 환기하는 게 필요한 것이다. 문화공간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도시들은 편안히 걷고 싶은 길도 별로 없다. 끊임없이 부수고 파헤치고 다시 짓는 증·개축의 ‘공사중’인 이 땅에서 호젓한 추억의 장소는 다 사라져간다. 마을이 사라지는 지금 담장 너머로 부침개를 주고받던 이웃이나 골목의 기억은 책 속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 간절히 생각해본다. 문화공간이 소중한 기억의 장소가 돼야 한다고. 일을 찾아 집을 찾아 혹은 즐거움을 찾아 시도 때도 없이 떠도는 현대인들에게 문화공간이 신명나는 삶터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이다. 동네 공연이나 전시 등의 좋은 기억들은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그뿐인가. 좋은 문화공간은 주민을 밖으로 이끌어 내고 서로 손잡게 해준다. 바로 그곳의 ‘시민들을 위한, 시민들에 의한’ 문화공간이 더불어 즐거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문화공간으로의 맛있는 산책을 늘 기대한다. 그런 산책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 이웃들과 한 하늘 아래 산다는 게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정 수 자 시 인

문화카페/머리칼과 수염

나이가 칠십을 넘었으니 당연히 노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청년같은 기분으로 살려고 하니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거울을 들여다 보면 무엇보다 머리칼의 숱이 적어져 중년을 넘어선 노인의 모습이 거기 있다. 모자를 쓰면 10년은 젊어진다고 해서 될 수 있는대로 모자를 쓰고 다니지만 실내에서는 모자를 벗어야 하니 어쩌랴…. 그렇다고 가발은 속임수를 쓰는 것 같아 쓰기는 싫고 그래서 가발 같은 모자를 만들어 보라고 많은 디자이너에게 제안해 봤지만 성과가 없다. 거울을 보고 생각하다 문득 수염을 길러보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위쪽 머리 숱이 적어 훤해졌으니 아래쪽에 수염을 기르면 보강이 되고 조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됐고, 무력한 노인의 얼굴에게 뭔가 권위와 긴장감을 되찾게 해 줄지도 모른다고 여겨진 것이다. 며칠간 면도를 하지 않고 수염을 기르다가 턱밑에만 면도를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아내가 질색을 했다. “흉측해요. 다 깎아요!” 아내는 수염 기른 남자를 보면 비위가 상한다는 것이다. 어쩐지 불결해 보인다는 것이다. 아내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수염을 기르지 못하고 다시 깎고 말았는데 아내의 이러한 혐오심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결코 누그러질 것 같지 않은 아내의 강력한 수염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나는 70년대 ‘헤어’(머리칼)란 뮤지컬을 생각했다. ‘헤어’는 70년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반전적인 젊은이와 히피족 등을 다룬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장발족을 유행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머리칼, 아름답게 길러라. 멋있게 흩날려라. 언제나 어디서나, 너 나 할 것 없이 헤어, 헤어, 헤어…. 바람에 흩날리고 나뭇가지에 휘감기는 비단 같은 머리칼, 햇살에 빛나는 풀잎처럼 반짝이는 머리칼. 예수님도 기른 머리칼, 마리아가 사랑했던 예수님의 긴 머리 아름답게, 멋있게 자라게 하라.” 이런 노래를 들을 때 젊은이들은 누구나 머리를 기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긴 머리에 대한 혐오를 갖는 사람의 세력도 만만찮았다. 그들은 “지저분한 머리칼 깨끗이 깎아 세계를 보다 청결하게 만들자”고 외쳤다. 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경제부흥을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독재자였고 새마을운동을 제창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해 잘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러한 그가 장발족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어떤 장군은 머리를 길렀다 옷을 벗었고 거리에서도 장발족들을 단속했다. 필자가 연출작업을 해온 극단 자유에서 70년대와 80년대 걸쳐 두 번 공연을 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작품심의에 걸려 포기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시대였다. 그 시대에 헌법재판소가 있었다면 통행금지시간, 장발단속, 영화나 연극의 검열 등을 다 헌법재판소에 제소를 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여자들의 치마 길이만 그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머리칼 길이도 유행이 있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필자가 수염을 기르는 건 아내 검열에 걸려 불발로 끝났으니 헌법재판소도 아내의 독재를 막지는 못하나 보다. ‘헤어’ 대신에 ‘수염’이란 뮤지컬을 만들어 저항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김 정 옥 얼굴박물관장·예술원 회원

문화카페/문화시설, 제 집처럼 드나들자

아침부터 작은 딸아이가 필자에게 이러쿵 저러쿵 잘못을 꼬집으면서 “자기만 나무란다”고 화를 냈다. 아직 고2인 작은 딸이 그런 말을 하니 속이 상했지만 아침부터 마음상할까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지중지 키워놓았더니 이제 엄마한테 대드는구나’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출근하는 내내 시골에 계신 친정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절로 흘러 내렸다. 가끔 어머니가 올라 오셔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고 하실 때마다 “잔소리 그만하시라”고 말했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부천문화재단 산하 부천시여성회관이 진행하고 있는 사회교육프로그램은 65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각 강좌 10%에 한해 선착순 우선등록시 수강료 1만원을 내는 특혜가 있다. 출근 후 10% 선착순 추첨장소에 참석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건강에 관한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으신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은 주로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도 있고 건강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분들인데도 당첨되지 않은 분들은 등록하지 않고 다음 학기를 기다리며 되돌아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문화재단 프로그램의 활성화에도 문제가 발생하고 어르신들의 건강도 걱정이었다. 그래서 어르신들에게 아침에 딸과 있었던 얘기를 하면서, “문화재단은 어르신들이 젊은 시절 고생하시면서 성실하게 납부하신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 건물도 그렇게 지어진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이 시설을 이용하실 충분한 자격이 있으며 10% 추첨때문이라면 차라리 자식들한테 몇만원 더 보내달라고 하세요. 10% 추첨 기회를 잡기 위해 운동을 쉬다 혹시 건강이 나빠지면 결국 어르신들만 손해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89세 된 할머니께서 우시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당신도 예전에 당신 어머니한테 우리 작은 딸이 내게 했듯 그렇게 했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문화재단에 올 수 있는 기력만으로도 복이라고 생각하시고 문화재단에 오고 가는 것 자체를 즐겁게 생각하시고 주인의식을 갖고 노시고 차도 마시고 애들이 어질러 놓은 것을 치워 주시기도 하셨으면 합니다”라고 말씀드리자 그제서야 “그래. 우리 상임이사님 말이 맞어”하시면서 거기 계신 모든 분들이 등록하셨다. 이처럼 길게 강좌등록의 풍경을 기술하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공공기관의 문화프로그램 운영의 근본목표가 생활에 지친 시민들에게 생활에 대한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삶의 활력과 휴식을 주기 위해서 이기때문이다. 그러기에 가능한 많은 시민들이 이용해주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다. 문화수요는 생활을 영위하는데 꼭 필요한 필수재라기보다 선택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수한 대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홍보 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공공기관들은 운영하고 있는 문화프로그램에 대한 홍보에 소극적이다. 결국 심사숙고해 만들어진 좋은 프로그램이 마땅한 홍보를 하지 않으므로 인해 프로그램이 일방적으로 흘러가 버리고 그래서 사장되거나 인기가 시들해져 실패하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건 시민들의 주인의식이다. 문화시설이며, 직원이며, 프로그램 등 모든 것이 시민 여러분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기에 문화시설의 주인은 곧 시민 여러분이란 강한 주인의식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문화시설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언제든지 자기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문화시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소임일 것이다. 4천500만 국민 모두 문화시설을 제 집 드나들듯 문턱이 닳아지길 간절히 바란다. 문화시설 종사자 여러분. 파이팅. /박 두 례 부천문화재단 상임이사

문화카페/어느 민중벽화 이야기

딱 21년 전 얘기다. 같은 학교에 불어 교수로 재직중인 뽕세신부 소개로 공주교도소에 여자 수감자 한명에게 그림을 가르치려 드나들었다. 그러다 교도소장인 염 소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는 미술선생인 필자에게 “환경미화용 그림을 좀 줄 수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그때 필자가 한창 길거리벽화를 연구하고 있을 때여서 그에게 “실내에 환경미화용 그림 몇점 거느니 교도소의 벽에 내가 벽화를 직접 그려 주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설득용으로 외국의 사례들을 슬라이드쇼를 해가면서 말이다. 염 소장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벽화를 그릴 벽을 선택하고 거기에 그릴 그림 계획(안)을 내달라”고 요청해 왔다. 작은 운동장이 있는 교도소 안 길이 30m 내벽을 선정하고 사업하는 선배를 통해 들어가는 일체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모내기를 하고 있는 들녘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참을 이고 가는 봄 풍경, 그녀가 지아비를 빨리 해방시켜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지아비는 석방되는 용꿈을 꾸고 있는 여름, 그 지아비가 석방돼 들녘에서 수확한 추수거리를 가지러 오는 가을 장면 등을 담은 벽화의 밑그림을 완성했다. 같이 작업할 공동작업단으로 미술교육과 학생들과 그림을 그린 경험이 있는 재소자 2명을 포함해 10명 정도가 구성됐다. 방학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7월에 다 마치는 것으로 일정표를 짰다. 모든 계획을 완료하고 뜨거운 여름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벽은 작은 운동장을 가로 질러 문제(?)의 재소자들을 가두는 독방들이 배치돼 있었다. 매일 아침 우리가 출근할 때면 이중 한방에서 인사를 겸해 누군가 큰소리를 내 뱉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 아무갠데요. 교수님 그림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그림입니다.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어느 사이 한 사람의 훌륭한(?) 관객을 확보한 셈이다. 어느 날 그는 좀 색다른 주문을 해 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교수님 그 여자 얼굴 좀 예쁘게 그려 주세요. 그리고 이왕이면 치마를 좀 짧게 그려 주세요.” 거의 주문 생산수준이다. 좀 너무한다 싶기도 했지만 0.9평에 갇혀 있다는 교도관의 말을 듣고 보면 이해도 갔다. 답답했던 그에게 그래도 우리의 벽화는 유일한 희망이자 위안이 아니었을까. 10년 쯤 뒤 소설가 황석영이 공주교도소로 이감을 와 면회를 갔다. 그와 면회를 끝내고 벽화를 보러 갔다. 몇년 전부터 시멘트 블록 벽이 너무 험해 에폭시 밑칠이 들고 일어나 그림 표면에 균열이 가고 떨어져 나가 모양이 흉하거나 마지못해 벽화로 존치시켜 놨겠다 싶어 별로 기대하지 않고 벽화 있는 데로 안내를 받아 갔었다. 그런데 그 벽화는 그대로 잘 살아 있었다. 많은 덧칠을 했고 새로운 화공(?)을 불러다 사람 얼굴은 간판 그림 그리듯 입체감을 살려 놓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이 벽화를 손대고 덧칠하고 또 바뀐 그림들을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을 것이다. “제일 처음 교수가 그렸을 때보다 그 여자 얼굴 훨씬 잘 그렸구먼…”이라고.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한 벽화가 어떤 사연을 갖고 태어나고, 어떻게 하다 병들고 늙어가다 죽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러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감상되고 하는 이런 공공성을 띤 벽화가 바로 민중벽화가 아니겠는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공주교도소 벽화 이름은 ‘꿈과 기도’였다. /김 정 헌 화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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