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0-④ 교회의 신비한 보물 ‘종탑’

교회에는 또 하나의 보물이 있는데, 18세기에 제작한 파이프 오르간이다. 이 오르간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마침 오르간 연주 소리가 교회 안에 울려 퍼진다. 잠시 무릎 꿇고 기도드리며 감상한다. 쉽게 들을 수 없는 오르간 리듬을 타고 중세로 시간 여행 떠나듯 신비한 분위기가 온몸을 적신다. 외관의 주요 특징을 살피며 카메라에 담는다. 아치형 개구부가 있는 좌우 종탑은 각각 4개 기둥으로 지탱하고, 그 위 둥근 돔은 푸른 채색 타일(azulejos)로 덮여 있다. 돔 꼭대기에는 손잡이가 있는 등불 형상의 작은 컵 모양 구조물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독특한 형상이다. 교회 회랑을 거쳐 작은 광장을 건너 오악사카 문화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원래 산토 도밍고 수도원이었으나, 현재는 오악사카 지역에서 발굴한 고대 유물과 콜로니얼 시대 기독교 성화(聖畵)와 성물(聖物) 등으로 구성된 컬렉션을 소장한 박물관이 됐다. 소장품 중 가장 중요한 유물은 사포텍 문화에 속하는 몬테 알반(Monte Alban)의 ‘무덤 7’에서 고고학자 알폰소 카사가 발굴한 부장품들이다. 박물관의 23개 전시실에는 선사시대 유물뿐만 아니라 국보급에 속하는 수많은 컬렉션이 전시돼 있고, 콜로니얼 이전과 이후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으며, 독립운동과 혁명 등 멕시코 전·근대사 유물들도 연대기별로 가지런하게 전시돼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0-③ 화려하게 치장한 산토도밍고 교회 내부

천장에 매달려 ‘술에 취한 노아’부터 그리기 시작해 9개의 장면을 8개월에 걸쳐 완성한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화 ‘천지창조’를 그린 미켈란젤로. 그는 한쪽 시력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취해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무녀, 그리스도의 선조들 그리고 천장 사각 모서리에 이스라엘을 구한 성인을 그렸고, 20개의 기둥 위에는 젊은 군상을 그렸듯이 산토도밍고 교회 내부의 아름다움도 상상을 뛰어넘는다. 바로크 양식의 파사드와 화려한 내부를 치장한 인테리어는 아름다움을 넘어 과연 교회가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문득 ‘울지마 톤즈’에서 의사이자 선교 사제의 의미심장한 어록이 떠오른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라는 명제에 빠져 잠시 감상을 방해한다. 교회 안에는 주보성인이자 수도회를 창시한 산토 도밍고 데 구스만의 가계도를 묘사한 34개의 초상화, 화려하게 치장한 중앙 제단과 묵주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예배당, 그리고 중앙 제단 한쪽에 있는 멕시코 로코코의 보석으로 알려진 인자한 성모 마리아상에서는 무한한 사랑의 자애로움을 느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을 느끼기도 한다. 6만장의 금박(23.5캐럿)을 사용해 화려하게 장식한 교회 내부와 함께 교회 전면은 정문과 좌우에 35m의 높은 종탑이 있는 외관이다. 정문 상단에는 산토 도밍고와 히폴리투스가 성전을 들고 있는 조각상이 이 교회의 상징성을 나타낸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0-② 중후히 빛바랜 교회 속… 신앙심 품은 웅장한 벽화

심각하게 폐허가 된 교회는 1902년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대통령 재임 때 교구에 반환돼 원래 기능을 되찾았고, 1933년에는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됐다. 수도원 단지는 오악사카 베니토 후아레스 자치대학교(Universidad Autónoma Benito Juárez de Oaxaca)가 관리하다가 1993년 산토 도밍고 문화센터(Centro Cultural Santo Domingo)로 전환하는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이때 고고학자 알폰소 카소(Alfonso Caso) 발굴팀이 몬테 알반에서 출토한 유물을 전시하는 문화박물관으로 의미 있게 개조됐다. 교회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성당으로 복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1979년에는 교황 요한 바로오 2세가 방문해 병자를 위한 미사가 거행됐다. 현재는 대성당의 회랑과 연결된 문화센터와 함께 오악사카의 주요 명소가 됐다. 교회 앞 광장에 다다르자 이미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아 분주하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길거리 음식 타코와 기념품을 파는 행상인의 호객 소리가 메아리친다. 광장에서 바라본 바로크 양식의 교회 외관은 오랜 세월의 무게만큼 중후하게 빛바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왜 이 교회가 문화적·종교적·역사적으로 오악사카 명소인지 세월의 무게만큼 그 가치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첫눈에 절로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온다. 마치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에 온 듯한 천장화와 벽화가 분위기를 압도하고, 중앙 제단의 정교하고 화려한 황금색 치장은 신을 향한 경외함과 애틋한 구원의 욕망을 담은 신앙심의 극치를 보여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0-① 명소 뒤 숨겨진... 아픈 역사의 흔적

시에라 마드레 산기슭 아즈텍의 군사기지가 있었던 오악사카 지역은 찬란한 고대 문명국인 자포텍과 믹스텍의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선조로 간주하는 몬테알반과 미틀라 고대 유적이 있어 오악사카 사람들은 고대 문명을 가진 후예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1521년 에스파냐 코르테스 원정대가 이곳에 도착한 초기에는 공존과 함께 문명 충돌이 일어났다. 정복자는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고대 유적을 파괴했고 토착신앙은 점차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 기독교문화가 뿌리내렸다. 그 시발점으로 1522년 오악사카 대성당이 건설되기 시작한 후 수도원과 교회가 줄지어 세워졌다. 오악사카의 중세 건축물들은 정복 초기에는 아픈 역사의 상흔이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은 이곳을 찾는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됐다. 오늘은 4박5일 오악사카 지역 마지막 여정으로 소칼로 광장을 출발해 콜로니얼 시대 흔적을 찾아 시내 도보 여행을 떠난다. 광장 주변에는 오랜 세월의 무거운 흔적을 간직한 오악사카 대성당이 있고 1902년까지 대주교 궁전이었던 건물을 20세기 초 민족주의와 자포텍 및 믹스텍문화가 지닌 경외심을 반영한 ‘네오 믹스텍(neo-Mixtec)’으로 개축한 중후한 모습의 주정부 청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성당에서 북쪽으로 네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산토도밍고 교회와 오악사카문화박물관을 찾는다. 1555년에서 1666년 사이에 지은 교회와 수도원 단지는 세월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멕시코혁명(독립전쟁) 이후 개혁법(교회법)에 따라 기독교가 핍박받을 때 수도원 건물은 파괴되고 유물은 도난당하는 등 큰 수난을 겪었다. 그 후 1866년부터 1902년까지 일어난 독립전쟁 기간에는 왕실 군대와 반란군이 교차 점령해 교회는 마구간으로 개조됐고 수도원은 군인 막사와 장교 숙소가 됐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⑨ 자연이 만든 걸작... 석회화 폭포 ‘카스카다 치카’

‘소녀 폭포’라는 이름을 가진 카스카다 치카(Cascada Chica)를 배경으로 수영복 차림의 깜찍한 소녀가 포즈를 취하고, 어머니는 딸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몰래 소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셔터를 누르자 ‘찰칵’ 소리에 들켰다. 그녀는 민망하지 않게 함박웃음 지으며 괜찮다고 흔쾌히 허락한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석회화된 절벽의 절경을 보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간다. 가는 길에 2천500여년 전에 고대인이 만든 관개수로 흔적을 만난다. 사포텍인은 이 수로를 이용해 산 측면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아직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발굴하지 못했으나, 이곳의 관개수로는 메소아메리카에서 발굴된 독특한 관개 시스템이라고 한다. 밑에서 바라본 석회화 폭포는 마치 한겨울 얼음폭포처럼 보이는 시각적 환상을 일으키며 장관을 연출한다. 기다랗게 늘어뜨린 코끼리 코 모습을 한 종유 기둥에는 온천수가 흘러내린다. 자연이 빚어놓은 천연 작품은 앞으로도 온천수가 분출하는 한 모습을 바꿔 가며 새로운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중요한 것은 셀 수 없고, 셀 수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Not everything that counts can be counted, and not everything that can be counted counts)”고 했다. 고대 유적지를 찾으면 깊은 맛과 향을 내는 와인처럼 역사적인 흔적과 향기를 즐길 수 있으나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치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첩첩산중을 넘어야 하듯 어려움이 따르고, 때로는 고고학적으로 불가사의한 영감을 얻기도 한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⑧ 수천년 자연의 신비… 히에르베 엘 아구아 폭포

20세기 초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부는 멕시코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로 ‘몬테 알반’과 ‘미틀라’를 히스패닉 이전 중요한 멕시코 유적 중 한 곳으로 지정했다. 1931년 몬테 알반을 발굴한 고고학자 알폰소 카소도 미틀라에서 활동했다. 오악사카의 ‘몬테 알반과 미틀라’ 유적은 멕시코시티의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 산 미겔 아옌데의 ‘카나다 비르겐 피라미드’, 유카탄반도에 있는 ‘치첸이트사 피라미드’와 더불어 멕시코 4대 문명 역사 지구다. 미틀라 탐방을 마치고 현지 레스토랑에서 타코와 용설란으로 빚은 메스칼(Mezcal) 한 잔을 곁들여 늦은 점심을 하고 히에르베 엘 아구아로 향한다. 오악사카시티에서 동쪽으로 약 70㎞ 떨어진 곳에 있는 자연유산인 이곳은 세계에 있는 두 곳의 석회화된 온천과 폭포 중 한 곳으로 튀르키예 파묵칼레와 쌍벽을 이루는 명소다. 히에르베 엘 아구아의 석회화된 폭포는 수천 년 세월에 걸쳐 생성됐다. 석회 동굴에 종유석이 자라는 것처럼 이곳도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수가 솟아 절벽 표면에 흘러내리며 신비로운 형상의 석회화된 폭포가 형성됐다. 이곳에는 온천수를 분출하는 샘이 네 곳 있는데 수온은 섭씨 22∼27도다. 넘쳐흐르는 온천수는 여러 개의 천연 야외 수영장과 2개의 대형 수영장으로 흘러들고 히에르베 엘 아구아는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계곡 아래서 50∼90m로 솟아 오른 2개의 암석 절벽 위 야외 수영장에는 여행객이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물놀이를 즐긴다. 인공 수영장 중 한 곳은 절벽 가장자리에 있어 보기에도 아찔하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⑦ 망자의 신전 '미틀라'

미틀라의 돌 블록과 잔해를 사용해 폐허의 부지 위에 산 파블로 교회를 지었는데 당시 교회 지도자는 지하 세계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기독교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교회 북쪽 면에는 사포텍 디자인을 통합한 흔적을 교회에 남김으로써 옛 문화가 새로운 종교에 의해 대체됐음을 상징하는 포인트다. 전설에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유적지 위에 세워진 산 파블로 교회 중앙제대 아래 있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최근 고고학팀은 ‘지상 투과 레이더(GPR)’와 ‘전기 저항 단층 촬영(ERT)’ 장비를 사용해 현장을 스캔한 결과 전설에서 주장한 교회 부근 폐허의 단지 아래서 지하 미로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다른 고고학 연구팀은 ‘지진 소음 단층촬영(SNT)’ 장비를 이용해 유적지 다른 위치에서 궁전의 초기 건설 터에 대한 증거도 찾았다. ‘미틀라’는 나후아틀어 믹틀란(Mictlan)에서 유래했고 의미는 ‘죽은 자의 장소’, 즉 지하세계를 의미한다. 16세기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지하에서 많은 유골을 발견하고 이곳을 인간의 심장을 꺼내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제례 의식을 행한 장소로 사제들이 운영하는 종교 중심지라는 기록을 남겼다. 오악사카 계곡에는 기원전 900년경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고 750∼1520년 가장 번성했다. 미틀라는 에스파냐 침략 전까지는 ‘죽음이 출생 후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메소아메리카인의 믿음을 표현하는 신성한 장소였다. 미틀라의 정교한 석조건축물은 이들에게 사후 세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⑥ 영원한 휴식 장소 미틀라 '지하 무덤'

단지 동쪽 건물에는 통치자, 북쪽 건물에는 고위 사제들이 묻힌 무덤이 있는데 구전에 따르면 사포텍인은 미틀라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잇는 관문’이라고 했다. 궁전 아래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 몸을 움츠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을 통과하면 지하 공간에 다다른다. 고고학자는 인신공희(人身供犧)로 희생된 시신을 안치한 곳으로 추정한다. 에스파냐 선교사 부르고아는 미틀라와 주변 사포텍 도시 유적지를 방문한 기록을 1674년 책으로 출판했다. 그는 4개의 방이 서로 연결된 광대한 지하 사원을 묘사했다. 첫 번째는 기도 공간으로 사용했고, 두 번째 방은 대제사장이 묻힌 곳이며, 세 번째는 왕족들이 화려한 세속 물품과 함께 묻힌 곳이다. 그리고 마지막 방에는 깊은 동굴로 이어지는 돌문이 있다고 기록했다. 미틀라는 부르고아가 이곳을 찾기 훨씬 전인 1520년대 에스파냐 선교사와 군사 탐험대가 이미 이곳을 다녀갔고, 그들은 미틀라를 종교 중심지로 우야 타오라고 불리는 대제사장이 신전에 거처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사포텍인은 영원한 휴식 장소 료바(Lyobaa)로 알려진 미틀라를 ‘지하 세계 입구’라고 믿었다. 이곳을 탐험한 선교사로부터 지하 방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앨버커키 대주교는 1553년 “‘지옥으로 가는 뒷문’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마귀가 바깥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게 돌로 벽을 쌓고 미틀라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⑤ 미틀라 궁전의 정교한 석조 기술 '눈길'

교회를 둘러보고 미틀라 유적지로 발길을 옮긴다. 사원 앞에 다다르자, 세월의 흐름만큼 빛바랜 흔적을 가진 채 잠연(潛然)한 모습을 간직한 유적을 바라본다. 수없이 많은 미스터리로 가득한 이야기를 상상하며 계단 아래서 올려다본 사원의 정교한 격자 문양 석벽과 치장한 조각술은 매우 인상적이다. 계단 좌우 벽체의 붉은 프레스코화는 언제 누가 그린 것인지 알지 못하나 강렬한 색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열 계단을 올라 사원으로 들어서며 고대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거대한 돌기둥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는 궁전으로 들어선다. 지붕은 사라지고 석주와 벽체만 있는데, 벽면 곳곳에 프레스코화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다. 두 개의 궁전 입구는 남쪽을 향하고, 북쪽 벽면에는 사후 세계로 통하는 작은 개구부가 있다. 본관인 궁전은 가로 36.6m, 세로 6.4m 크기 직사각형으로 이곳에는 한 때 지붕을 받치던 화산석 기둥 6개가 남아 있어 ‘기둥 궁전(Columns Palace)’ 또는 ‘기둥 대웅전(Grand Hall of Columns)’이라고 한다. 4톤에 달하는 돌기둥을 어떻게 이곳까지 옮겼을까 생각하니, 불가사의한 흔적에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계도 없던 시절 오직 망치 하나로 정교한 문양을 새긴 석조 기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복도를 따라 안 뜰로 들어서자, 작은 돌을 잘게 다듬어 타일처럼 끼워 붙여 모자이크 처리한 벽과 기둥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궁전 단지에는 정교한 기하학적 디자인을 그레카스(Grecas) 기법에 따라 반복적 패턴(iterator pattern)으로 새긴 절도 있는 문양을 많이 만난다. 이 문양은 하늘· 땅· 뱀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다른 유적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오직 미틀라에만 있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독특한 디자인으로 인정받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④ 다양한 종교 유물… 화려함에 눈호강

산 파블로 교회는 1590년 에스파냐 정복자가 사포텍의 미틀라 유적을 허물고 그 위에 세운 교회지만, 지금 모습은 여러 차례 복원한 것이다. 에스파냐 정복 이전 미틀라 유적 일부가 지금도 교회 아트리움과 정원 역할을 하는데, 남쪽 구조물 벽체에서는 히스패닉 이전 미틀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유적 발굴 과정에 교회 하층토에서 불규칙한 구조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은 사포텍 시대 만든 미틀라의 지하 터널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구전에 따르면 미틀라 유적 지하에 거대한 미로가 존재했는데 고고학자들은 전설을 바탕으로 탐사한 결과 흥미로운 진실을 찾았지만, 교회 하층토는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여러 차례 복원과 증축한 모습을 찾을 수 있는데, 신고전주의와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교회는 중앙부 상단 붉은 돔 중심으로 네 방향에서 볼 때 서로 다른 구조적 형상을 가진 돔들을 볼 수 있다. 붉은 사암으로 복원한 정면 입구 상단에는 직사각형의 큰 창이 있는데 이 부분은 교회 2층 성가대 창으로 다른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다. 교회 내부 중앙 제단 뒤편엔 18세기 초에 제작한 주보성인 ‘산 파블로’ 조각상이 있고 입구 오른쪽 세례당에는 ‘세례자 요한’의 조각상이 있다. 교회 안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종교 유물이 있다. 중앙에는 멕시코 가톨릭 주보성인 과달루페 성모화가 있고, 좌·우에는 ‘성모승천’과 ‘자비의 성모’ 상이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③ 쇠약해진 툴레 고목의 경고

안타깝게도 식물학자는 고목이 서서히 쇠약해진다고 경고한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주변 지역 공업화와 환경오염, 지하수 수위가 점차 낮아져 그렇다고 한다. 정부 당국은 고목을 지키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물을 주고 가지치기 등 상태 점검과 관리를 철저히 한다. 하지만 토속 신앙 영적 지도자는 콜로니얼 시대 이곳을 가톨릭교회가 소유하고, 고목 옆에 산타 마리아 성당을 지으면서 에하카틀(Ahuacatl) 신이 노해 필멸의 불안은 가속화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묵시적 주장은 툴라 고목이 살 만큼 오래 살아 이제 죽을 때가 됐다고 주장한다. 식물학자는 툴레 고목이 축복받은 유전자를 지닌 것을 인정하고, 멕시코인들은 고대 전통 시대를 초월해 보편성을 지닌 신성한 나무로 인식한다. 수 천 년 동안 여러 문화와 종교로부터 존경받은 고목은 세월을 초월해 끝없이 이어지는 영원성을 상징하는 나무로 애착을 가지고 있고, 고대와 현세를 연결하는 마지막 연결고리 중 하나로 신성시한다. 툴레 나무를 둘러보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 미틀라 유적지로 향한다. 유적은 시에라 마드레 델 수르(Sierra Madre del Sur)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천480m 고도에 세워졌다. 미틀라는 오악사카 지역에서 몬테 알반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로 사포텍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곳이다. 유적지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빛바랜 석조 건축물 산 파블로 교회(Iglesia de San Pablo)를 스치듯 둘러보고 미틀라 유적으로 들어선다. 아내에게 이 교회도 미틀라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귀띔하자, 대뜸 알았다는 듯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중남미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콜로니얼 시대 지은 가톨릭교회 대부분은 주변 고대 유적을 파괴한 돌로 지은 예가 많은데, 이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② 신비롭고 인상적인 사포텍의 전설

툴레 나무 나이는 몇 살이나 됐을까 궁금하다. 가이드는 6천 년이 넘었다고 설명하나 자료에는 약 2천년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엄청난 숲 왕관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목은 보기에도 신비롭고, 나이만큼 인상적이다. 사포텍 전설에 따르면 툴레 나무는 2천여 년 전 바람의 신 에하카틀(Ehacatl)과 영적으로 소통한 아스텍 사제 페초차(Pechocha)가 심었다고 하는데, 과학적 연대 측정과 가장 가깝게 일치한다. 사이프러스 일종인 탁소디움 무크로나툼(Taxodium mucronatum)은 멕시코 국목(國木)이다. 전설에 따르면 에스파냐 침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 원주민들은 침략자를 격파하고 목숨 잃은 전사의 넋을 기리며 ‘슬픈 밤(La Noche Triste)’에 툴레 나무 아래서 울었다고 전한다. 여행객이 고목 둘레에 모여들자, 동네 꼬마 녀석들은 가이드 설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목 둥치 껍질에서 동물 얼굴 형상을 가리키며 깔깔대고 웃는다. 녀석들을 물리친 가이드는 수령만큼 주름진 껍질을 두른 고목에서 작은 손거울로 태양을 반사해 익살스러운 다람쥐꼬리, 사슴 머리, 코끼리, 악어 등 다양한 동물상과 에스파냐 서사시인 살리나스(Salinas y Serrano)의 귀 모양을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설명한 후, 툴레 나무를 ‘신의 지팡이’라고 한다. 나무는 높이 35.4m, 숲 둘레 58m, 지름 14m, 무게 63만6천107톤이다. 강강술래 잡기 하듯 둘레를 잡으려면 성인 30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볼 때, 툴레 고목과 경쟁할 나무는 지구상에 없다고 자랑한다. 둥치가 워낙 커 원래 그루터기가 여럿인 줄 알았으나, DNA 검사 결과 한 그루로 확인됐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9-① 고대문명 흔적 속 우람한 ‘툴레나무’

고대 유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지구별에는 신들이 창조한 듯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유적지에는 아름다운 사원과 고건축물,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성채를 만나게 된다. 유적은 역사적 사실 외에도 전설까지 전해지고 있어 탐방하고 나면 나를 채우는 여행지로 손색없다.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지리적으로 중심인 멕시코는 수많은 고대 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지만 우리에게는 유럽 문명만큼 잘 알려지지 않아 생소하다. 오악사카주에서 두 번째로 큰 고고학 유적지로 사포텍(Zapotec)과 믹스텍(Mixec) 문화 중심지인 산 파블로 비야 데 미틀라(San Pablo Villa de Mitla)에 있는 ‘미틀라(Mitla)’ 유적을 찾는다. 지역 여행사에 예약해 둔 미니버스를 타고 오악사카시티를 출발해 미틀라로 가는 길에 멕시코가 자랑하는 ‘툴레 나무(rbol del Tule)’를 찾는다. 입구에 도착하자 숲이 넘치고 둥치가 우람한 사이프러스의 일종인 ‘알레르세(Alerce)’ 고목이 산타 마리아 델 툴레(Santa Maria del Tule) 교회 앞에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다. 입장료를 내자 고목의 생장 배경과 고통, 변화와 기쁨 등이 담긴 팸플릿을 준다. 공원으로 들어서면 범상치 않은 고목이 관람객을 압도하고, 첫눈에 수령이 오래돼 많은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툴레 나무는 시각적으로 뒤에 있는 교회와 일체를 이루고, 주변 콜로니얼 시대 건물과는 조화를 이룬다. 시민들에게 공원과 고목은 휴식처이자 자랑거리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8-⑨ 이념넘어... 수천년 토착신앙 품은 '아포스 수도원'

1962년 복원 작업을 마친 후 단지 내 회랑과 주요 건물은 국립 인류학 및 역사 연구소의 유물 복원 작업실과 수장고로 사용하고 있다. 아쉬움이 남아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마치 요새처럼 생긴 수도원 단지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라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발길을 붙잡는다. 마법 같은 매력이 풍성한 오악사카는 16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에서 고대 믹스텍, 사포텍 문명과 유럽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다양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런 특성을 인정해 유네스코는 1987년 오악사카 지역 유적 단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유적지에 분산된 고대 문명과 중세 유물은 멕시코의 중요 문화유산이자 보물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산티아고 아포스 수도원 단지는 모두 복원되지 않았지만 오악사카 지역 콜로니얼 시대 종교 건축물 중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평가한다. 수도사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신앙을 떠나 유럽과 다른 찬란한 고대 문명이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준비 없이 원주민과의 만남은 난감했다. 그래도 그들은 개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원이 지향하는 이념을 넘어 히스패닉 이전의 믹스텍과 사포텍의 토착신앙 정신을 담은 역사적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몬테 알반에서 고대 원주민의 숨결과 놀라운 지혜를 보며 만심환희(滿心歡喜)에 젖고, 쿠일라판 언덕 산티아고 아포스톨 수도원 단지에서는 원주민의 쓰라린 역사와 고통을 느낀다. 이처럼 멕시코는 혼합 문명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8-⑧ 다시는 되풀이 않도록... 아픈 역사도 남긴다

여행자가 이곳에 오면 찾아봐야 할 세 가지 관람 포인트가 있다. 첫째는 지붕이 사라진 옛 성당의 돌기둥을 살펴보는 것이고, 둘째는 아치에 남아 있는 16세기 프레스코 성화를 감상하는 것이며, 셋째는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돌에 새긴 비문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그냥 스쳐 지나기 쉬운 돌무더기가 교회 앞마당에 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멕시코를 침략한 코르테스가 수도원 단지에 자신의 집을 지으려고 한 돌인데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짓지 않았다. 문화재 당국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 돌무더기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뒀다고 한다. 단지에서 유일하게 종교 건물로 사용하는 곳은 ‘지붕 없는 교회’와 수도원 사이에 반원형 돔을 부벽으로 지탱하고 있는 소박한 성당이다. 이곳에는 콜로니얼 초기 세비아 출신 화가 안드레스 콘차가 그린 성화가 제단에 있는데, 그의 작품은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에도 있다. 그 외에도 오악사카 출신으로 도미니크 수도원 관구장이자 신학자인 프란시스코 부르고아의 무덤과 비석도 있다. 단지에는 3곳의 출입구가 있는 대성당, 본당, 2층 회랑과 그곳으로 이어지는 지붕이 있는 포르테리아, 순례자 숙소와 기도 공간인 작은 예배당과 예쁜 아트리움이 있었다. 하지만 1917년 시작한 크리스테라 전쟁으로 1926년 단지는 완전히 폐쇄됐고 3년 후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어린이를 위한 학교가 됐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8-⑦ 도미니크수도회서 만나는 가톨릭 혼합 작품들

외경적인 이야기지만 ‘교회 지붕을 올릴 때마다 악마가 계속 올리지 못하게 지붕을 떨어뜨렸다’고 하는 믿지 못할 구전이 남아 있으나 이곳에는 멕시코 근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인 사실도 남아 있다. 멕시코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빈센테 게레로 장군이 1831년 밸런타인데이에 처형되기 직전 3일 동안 수도원 회랑에 있는 수련관에 갇혔다. 게레로 대통령은 재임 중 노예제도를 폐지해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부통령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가 반란을 일으켜 자리에서 쫓겨났다. 반란군이 그를 체포해 강압적으로 조사했던 방에는 당시 상황을 그린 유화가 걸려 있고 조금 떨어진 마을에는 그가 처형된 장소에 동상이 있다. 도미니크수도회의 산티아고 아포스 수도원 단지는 1530년대부터 ‘지붕 없는 교회’를 시작으로 짓기 시작해 바실리카, 수도원, 회랑, 숙소, 수련원 등이 차례로 추가됐다. 단지에는 16세기에 정교한 문양을 새긴 세례대가 있고 고딕 양식의 회랑과 국보로 지정된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데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국가문화재로 평가받는다. 특히 단지에 남아 있는 벽화는 중요한 유물로 이곳에 살던 사포텍과 믹스텍족을 개종시킬 때 토착신앙 요소를 가톨릭에 맞춰 체계적으로 혼합한 작품이다. 원주민의 상징적인 영적 이미지와 전통문화 요소를 가톨릭의 유사성과 호환성을 혼합해 표현한 벽화는 개종에 대한 저항을 완화해 점진적으로 가톨릭문화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작품이다. 성물방 벽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모습을 담은 벽화가 있는데 배경은 골고타가 아니라 쿠일라판 언덕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8-⑥ 수백년 세월, 프레스코 성화 간직한 '지붕 없는 교회'

몬테 알반을 뒤로하고 쿠일라판 데 게레로에 있는 산티아고 아포스톨 수도원 단지로 간다. 쿠일라판 계곡은 기원전 500년부터 사포과 믹스텍족의 오래된 도시이자 원주민 종교에서 신성시하던 장소였다. 기록에 따르면 정복자 코르테스는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단지는 그들이 파괴한 석조 건축 재료와 원주민의 노동력을 동원해 지었다. 하지만 수도사는 어디론가 떠났고 수도원 건물은 국립 인류학 및 역사 연구소가 관리하는 국가기념물로 남아 있다. 수도원 단지로 들어선다. 먼저 ‘지붕 없는 교회’가 눈에 들어오는데, 전면은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플레터레스크 건축으로 아치형 입구가 세 곳에 있다. 중앙 상단 박공판 부분에는 도미니크 수도원 문장이 새겨 있고 정면 좌우 측면 꼭대기에는 뾰족한 원뿔 모양의 종탑이 있다. 교회는 16세기에 짓기 시작했으나 아직도 지붕이 없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지붕 없는 교회로 들어서자 오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텅 빈 교회 내부 좌우에는 천장을 받쳤던 돌기둥과 기단석이 줄지어 서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 신전에 온 듯한 느낌이 들지만 기둥과 벽면 아치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중세 프레스코 성화가 이곳이 교회였다고 알려준다. 벽체 한 곳은 고대 믹스텍족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비문이 있는데, 이곳에 살던 원주민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지만 기둥과 외벽 아치는 수백 년 지난 세월의 고뇌(프레스코 성화)를 간직한 채 한마디 말도 없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8-⑤ 박물관서 만나는 웅장한 석조유적 단잔테

남아 있는 유적 대부분은 당시 이 도시의 종교적, 정치적 중추부 건축물이고 제단과 피라미드, 넓은 계단은 사포텍 건축의 전형적인 특성을 갖췄다고 고고학자들은 평가한다. 유적지 중심인 중앙광장은 탁 트인 구조라 사방에 흩어져 있는 건물로 접근하기 쉬운 체계적인 동선을 갖췄다. 2시간 동안 유적을 둘러본 후 입구에 있는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비록 유적지가 넓고 파괴돼 진지하게 볼거리가 없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가슴에 와닿는 감동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고대 유적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멕시코는 웅장한 석조 유적이 이곳뿐만 아니라 전역에 흩어져 있다. 박물관에는 몬테 알반의 형성 시기와 역사, 그동안 여러 차례 미국과 멕시코 고고학자에 의한 발굴 과정과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이곳에도 단잔테를 전시하고 있는데 사포텍족의 상형문자와 달력 표기가 있는 유물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적 발굴 이전인 콜로니얼 시대에 이미 많은 유물이 침략자 손에 약탈당했다. 몬테 알반에서 발굴한 유물은 멕시코시티에 있는 국립인류사박물관과 오악사카시티에 있는 후아레스 주립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몬테 알반 유적은 라틴아메리카 고대 유적지로선 규모가 크며 고고학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받는다.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최초로 도시 문명을 꽃피운 몬테 알반은 단순한 요새나 성지가 아니라 완전한 도시 기능을 갖춘 곳으로 멕시코시티 인근에 있는 테오티우아칸보다 300∼500년 앞서 해발고도 1천940m에 건설됐다. 유적지 면적은 15㎢로 테오티우아칸의 21㎢보다 작지만 건설 시기를 고려하면 결코 좁은 면적이 아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8-④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피라미드 '장관'

메소아메리카 지역 고대 유적지를 여행하다 보면 공 경기장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전형은 몬테 알반이라고 한다. 이곳 공 경기장은 1∼2세기 유적으로 분류하는데, 가지런히 쌓은 돌계단은 고대 유럽 경기장과 달리 매우 인상적이다. 경기 방법과 형태가 같은지는 알 수 없으나 오악사카 중부 계곡과 믹스테카 지역에서는 ‘믹스텍 볼’이라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신전 형태인 듯한 ‘시스템 IV’를 찾는다. 연석이 없는 넓은 중앙 계단과 두 개의 좁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지만 경사도가 심해 쉽지 않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제례를 행한 듯한 구역이 남아 있다. 고고학자는 이곳을 AD 200∼500년 사이 인신공희 장소로 추정한다. 구조는 4단의 계단을 갖춘 제법 규모가 큰 석조 건축물이고, 테오티우아칸 ‘달의 신전’ 앞 제례단보다 규모가 크고 건축적 형상도 매우 아름다운 피라미드다. 광장 주변에는 BC 500∼AD 100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 ‘빌딩 L’과 형상이 ‘시스템 IV’와 비슷해 쌍둥이라고 부르는 ‘시스템 M’ 등 아직 용도를 밝히지 못한 석조 건축물이 즐비하다. 이외에도 알폰소 카소는 유적지 주변 7곳의 무덤에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화려한 매장 유물을 발굴했다. 몬테 알반은 기원전부터 형성된 유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저 돌로 쌓은 돌무더기로 밖에 안 보인다. 넓은 단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석조 피라미드와 건축 잔해는 외형적으로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고,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없다 해도 사포텍족의 세련된 석조 기술을 후세에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특히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는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8-③ 사포텍족의 피라미드 유적지 '몬테알반'

신전을 둘러보고 멕시코 고대 천문 유적지 중 가장 아름답다는 ‘빌딩 J’(천문관측소로 추정)로 간다. 빌딩 J는 특이한 오각형의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도 광장 주변 다른 건물처럼 일정 각도로 정렬돼 있다. 건물 안 각진 벽에는 온갖 그림이 새겨져 있으나 복구 과정에 연결이 잘 안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고고학자는 빌딩 J를 하늘을 관찰하여 종교의식과 농사 시기를 결정하는 천문대로 추정한다. 천문대를 둘러보고 상징적인 계단을 올라 남쪽 플랫폼 정상에 오르자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계곡 바람이 더위를 씻어준다. 몬테 알반 피라미드는 평지에 축조한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축조 시기도 앞서고, 산악 지형 특성을 살려 산 정상에 축조함으로써 당시 위세는 훨씬 강했을 것 같다.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피라미드 위치가 갖는 상징성은 크기에 상관없이 명당인 것 같다. 정상에 서면 유적지 내 모든 건축물이 내려다보이고 조금만 고개 돌리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오악사카 계곡 원주민 마을이 내려다보이며 먼 발치에 있는 오악사카 시내까지도 가물가물 보인다. 먼 옛날 사포텍 문명 고전기에 이런 지리적 이점까지 고려해 터를 잡은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남쪽 플랫폼(피라미드)에서 내려와 광장 모서리에 있는 사포텍족의 전통 공놀이 경기장으로 간다. 가는 길에 신비롭게 춤추는 인간을 새겨 놓은 단잔테 석조부조 40여점을 만난다. 독특하면서도 해학적인 미를 간직한 부조 형상을 카메라에 담다 보니 왜 고대인이 이것을 세웠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고대 석조예술의 깊은 역사의 향기를 느낀다. 박태수 수필가

문화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