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 알반 유적지는 산꼭대기를 평탄화해 회반죽을 덮어 조성한 후 그 위에 건축물을 지었다. 고대인은 문자가 없어 건축물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발굴 과정에서도 용도를 밝히지 못해 피라미드마다 ‘빌딩 J(천문관측소로 추정)’처럼 알파벳을 붙였고 제법 규모가 큰 연관 건축물은 ‘시스템 IV나 M’처럼 부른다. 단지 배치는 남쪽과 북쪽 끝단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단지를 ‘남쪽 플랫폼(피라미드)’과 ‘북쪽 플랫폼(단지)’이라 부르고 광장 중앙에는 천문대로 추정하는 ‘빌딩 J'와 외형상으로는 한 건축물군(群)으로 보이나 G․ H․ I라는 각각 빌딩 명칭이 붙은 피라미드가 있다. 먼저 입구에서 가까운 북쪽 플랫폼에 올라 유적지 전체를 살펴본 후 유적지 중심인 중앙 광장(300mx150m)으로 간다. 단지는 광장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크게 구획돼 있고 그 중심에 신전이 있다. 신전은 태양 따라 동쪽과 서쪽을 향하는 구조이고 내부는 두 구역으로 나눈다. 먼저 전면에는 넓은 현관이 있고 이곳을 통해 뒷면에 있는 덜 노출된 성역으로 연결된다. 신전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곳에 몬테 알반의 특이한 석판 부조 ‘단잔테(Danzante·춤추는 사람)’가 줄지어 있다. 여러 단잔테 중 일부는 일그러지고 뒤틀린 자세의 나체 남성이 새겨진 특이한 형상이 여럿 있다. 그중 일부는 생식기가 절단돼 있어 표정과 복장을 보면 야릇한 느낌이 든다. 마치 춤추는 무용수인 듯하지만 1931년부터 이곳을 탐사한 고고학자 알폰소 카소는 건설 초기 전쟁 포로의 처형 모습을 새긴 ‘정복 석판’으로 추정한다. 박태수 수필가
여명이 틀 무렵 호텔을 나서 고대 사포텍 문명의 혼이 잠든 몬테 알반을 찾아 나선다. 이곳 유적은 기원전 800년부터 1천500년이 넘도록 시기를 달리해 여러 단계별로 축조됐고 서기 300년경에 이미 4만명이 거주하는 도시가 됐다. 10세기경에는 믹스텍이 이곳을 점령해 파괴한 후 거주지가 아닌 무덤으로 사용했으나 그 후 믹스텍도 중부지역의 패권을 쥔 아스텍에 정복당한 후 폐허로 남게 된다. 예약한 버스에 오르자 차는 오악사카 시내 호텔을 차례로 돌며 손님을 태워 유적지로 향한다. 각 나라에서 개별 여행 온 관광객이라 사용하는 언어가 제각각이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중세 돌길을 벗어나 원주민 주택가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은 꼬불꼬불해 버스가 벼랑으로 구를 듯하고 멀리 오악사카시티가 보인다. 창밖엔 멕시코 상징인 키 큰 선인장과 엉클어진 수풀이 사막 지형의 산을 뒤덮고 있다. 출발한 지 30여분이 지나자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유적지 입구에 도착한다. 입장료 80페소를 내고 유적지에 들어선다. 유적지 입구에서 만난 해설사는 사방에 흩어진 유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하고 먼저 단지를 둘러본 후 나갈 때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을 관람하라고 안내한다. 먼 발치서 유적을 바라보니 웅장하면서도 가지런한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사방에 흩어진 피라미드는 이미 콜로니얼시대 도굴당하고 훼손됐으나 남아 있는 유적만으로도 제법 규모가 컸다는 것을 느낀다. 돌아갈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안내 자료에 표시된 동선을 따라 유적을 찾는다. 박태수 수필가
멕시코 중부지역에서 벗어난 오악사카는 멕시코시티 아스테카 문명의 티우테우아칸보다 300∼500년 앞서 건설된 도시로 전 고전 문명기(서기 100년 이전)에 속하는 몬테 알반 유적과 메소아메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서기 300∼900년까지 마야 문명의 황금기에 세운 신전 도시 팔렌케 유적이 있다. 이처럼 오악사카는 전통, 예술, 문화, 보석 같은 자연과 더불어 현지인의 따뜻함이 있다. 사그라지지 않는 마리아치의 요란한 연주 소리와 현란한 춤사위를 뒤로하고 내일 만나게 될 과거로의 문명 여행을 꿈꾼다. 한 달 이상 이어진 여행으로 비록 몸은 피곤하나 자유여행의 진미를 느끼게 되고, 한동안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다소 불편하지만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은 엔도르핀이 솟구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에 지쳤을 때 삶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끔 여행을 꿈꾼다. 일상적인 삶은 습관적으로 사고(思考)하고, 더 나은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해지다 보면 한순간 겉으로 드러나는 위의(威儀)의 늪에 빠지기 쉽다. 이럴 때 여행은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연연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의 시선으로 새로운 문화와 환경을 만나게 된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를 간직한 멕시코는 마치 정글 속에서 만나는 ‘늪’ 같은 세계다. 가는 곳마다 다양한 문명과 문화가 공존하고 색다른 풍광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속에서 신비로운 과거와 역동적인 현대를 만나게 된다. 장 파울은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라고 했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누구나 베스트셀러 같은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지금껏 도시의 둔탁한 기계 소리에 함몰돼 제자리걸음만 하던 곳에서 벗어나자. 은퇴 후 삶은 때때로 그동안 미친 듯 달리는 기차에서 내려 나그네처럼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방랑하듯 살면 어떨까. 박태수 수필가
오악사카 역사 지구 소칼로 광장에 세워진 사포텍 원주민 출신 최초 대통령인 베니토 후아레스 동상을 둘러본다. 그는 오악사카 출신으로 혼란한 시기에 대통령을 두 번 역임했는데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백인 후예가 아니었다. 그는 원주민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회적 통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20세기 들어 원주민들은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베니토 후아레스는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헌법을 제정해 가톨릭교회와 정교 분리, 교회 재산 몰수, 토지개혁을 단행했으나 성직자와 대지주의 반대에 부딪혀 3년간 내란을 겪은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멕시코시티 국제공항도 ‘베니토 후아레스 국제공항’으로 명명됐고 멕시코 500페소 지폐와 50페소 동전에도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태평양 연안에 접한 오악사카 주도(州都) 오악사카는 1529년 에스파냐 정복자가 건설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역사 지구에는 중세 종교 건축물이 즐비한데 오악사카 대성당을 비롯해 예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산토도밍고 대성당과 수도원이 있다. 그 외에도 에스파냐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저택은 오악사카 사포텍족 인디언 혈통으로 오악사카 출신 화가 루피노 타마요 박물관이 됐고 19세기 말 유럽 낭만주의 양식으로 지은 오악사카대 중앙 건물과 현대미술관(MACO)도 있다. 이처럼 오악사카에는 중세 건축물이 많은데 콜로니얼 시대 건축물은 고건축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박태수 수필가
중앙 제단 좌우에는 별도로 기도할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이 있는데 오른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는 예배당이 있고 왼편에는 검은 옷을 입은 ‘고독의 성모’ 그림이 있는 예배당에서 미사를 마친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다. 대성당에는 조각상 외에도 빛이 안으로 비치는 곳에는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창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신비함이 내부를 더욱 엄숙하게 한다. 중앙 제단에서 입구를 바라보면 2층에 자리하고 있는 빛바랜 바로크 파이프오르간은 대성당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대성당은 1535년경 세우기 시작해 1640년 초기 공사를 마무리하고 대교구 성전 역할을 했으나 17세기 말 측면 예배당과 본당의 둥근 돔 천장이 추가됐다. 그 후 1724년에는 미겔 데 사나브리아가 증축 공사를 맡아 주변 건물을 이어 짓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 지역에 흔한 지진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강해 1733년 완공했다. 그 후에도 대성당은 여러 차례 보수와 보강작업을 했고 1931년에는 지진으로 부서진 첨탑을 철거하고 지금 모습의 첨탑을 새로 세워 완성했다. 남쪽 건물에는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 7세가 기증한 목각 시계가 있다. 대성당 밖으로 나오자 짙은 어둠이 내린 광장에는 마리아치의 흥겨운 연주에 맞춰 많은 이들이 어울려 춤사위가 펼쳐지고 밤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오악사카는 생각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태수 수필가
대성당에는 마침 저녁 미사가 진행 중이라 한동안 바깥을 둘러본다. 광장에서 바라본 바로크 양식의 전면 파사드는 세 구역으로 구성돼 있다. 반원형 아치 아래는 세 개의 문이 있고, 중앙 문 측면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조각상이 있다. 두 번째 층 중앙에는 구름과 케루빔 위에 승천하는 성모상이 새겨져 있는데, 한쪽에는 성 요셉(San José)과 성 마르시알(San Marcial)이 있고 다른 쪽에는 성 크리스토발(San Cristóbal)과 성 베드로 순교자(San Pedro Mártir)가 조각돼 있다. 세 번째 상단 중앙에는 성체성사를 통해 나타내는 신비로운 패널이 있고, 좌우에는 성배와 구름 사이의 천사들이 지탱하는 맨틀이 있으며, 주변은 날개를 펴고 빛을 발하는 비둘기 모양의 성령 모습을 정면에서 본다. 대성당 입구에는 ‘용서의 성모’(Virgen del Perdón)라는 표현이 있는데, 입구에서부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미사가 끝나 안으로 들어서자, 외관과 달리 화려하면서도 숭고하게 절제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내부가 아름답다. 중앙 제단에는 화려한 황금색으로 치장한 성상(聖像)들이 자리하고 있어 종교적 의미를 떠나 마음 가라앉히고 조용히 기도할 분위기를 느낀다. 중앙 제단은 그리스 대리석에 조각해 마감됐고, 가운데에는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성모 승천 상’(Nuestra Señora de la Asuncion)이 있다. 이 청동 조각상은 이탈리아 조각가 아다모 타도이니(Adamo Tadoini)가 만든 대표작이며 멕시코에서 사랑받는 종교 예술 작품이다. 박태수 수필가
광장에는 이미 여러 곳에서 마리아치의 연주 소리가 넘치고, 서로 마주 보며 춤춘다.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에서는 마리아치 연주가 대세지만, 이곳에서는 레스토랑에서 마리아치가 연주하는 경우보다 현지 음악가들이 광장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곡을 연주하는 색다른 광경을 즐기는 흥겨운 초저녁이다. 광장은 다양한 불빛의 리듬을 타고 흐르는 황홀한 밤이다. 아르곤 불빛이 밝게 비추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도 멕시코 여느 도시처럼 광장 중심에 오악사카 대성당으로 불리는 ‘성모승천 성당’이 있다. 저물녘 어둠이 드리운 광장 한 편에 오랜 세월의 무게를 지고 우뚝 서 있는 대성당을 먼발치서 바라보니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하고 미려한 외관은 품격 있는 콜로니얼 시대 종교 건축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느낀다. 태평양 지진대에 속하는 멕시코는 칠레와 더불어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역인지라 대성당 외관도 여러 차례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 정문 좌우 종탑은 아르곤 전등의 조명을 받아 밝게 빛을 발하나, 대성당 중앙 건물과 석재 색상이 달라 한눈에 시기를 달리하여 재건축한 것을 알게 된다. 대성당 외관은 라틴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채굴되는 화산암인 다공성의 경량 석재인 칸테라로 지었다. 여린 녹색을 띠는 이 석재는 팽창하지 않고, 공기와 습기를 흡수할 수 있어 습한 지역에 있는 교회나 주요 건축물을 지을 때 많이 사용하는 재료로 멕시코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칸테라 석재의 색상은 산 미겔 아옌데 대천사 아르칸젤 대성당의 연분홍 화산암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멕시코 화산암은 지역에 분포하는 성분에 따라 색상이 다르고, 특히 오악사카 지역에서 채취한 칸테라 석재는 미려한 녹색을 띠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낀다. 박태수 수필가
오악사카는 이번 멕시코 여행 계획에 포함하지 않았으나 한 달 전 쿠바에서 만난 독일 청년과 마이애미에서 온 중년의 미국인 추천으로 일정을 조정해 오악사카를 포함했다. 그들은 진정한 멕시코를 느끼려면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오악사카를 여행하라고 강력히 추천했다. 서울에 있는 명문 K대학에 두 아들을 유학시켜 한국을 사랑하는 마이애미에서 온 미국인은 오악사카에 가면 역사 지구 소칼로 광장에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의 가락이 넘쳐흐르고 사람들은 마리아치 음악이 흥겨워 리듬에 맞춰 춤추며, 오악사카 주변 계곡에 있는 고대 문명 유적인 몬테알반과 팔렌케에서 멕시코의 혼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이곳을 포함했으나 인터넷 자료 조사 과정에 오악사카는 치안이 불안하다는 정보가 많았고 아내와 가족들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제외했다. 하지만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여행한 두 조언자의 추천에 따라 오악사카를 찾는다. 오악사카 공항에 보잉 737 비행기가 희뿌연 구름을 뚫고 한 마리 새처럼 사뿐히 착륙한다. 국내선이라 별다른 절차 없이 바로 공항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오악사카는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니 조심하라’는 외교부 여행정보 안내 문자가 휴대폰 창에 뜬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역사 지구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한다. 관광안내요원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타고 소칼로 광장 부근에 예약한 부티크 호텔로 향한다. 때마침 호텔 앞 길거리에는 우리네 포장마차처럼 생긴 간이식당에서 타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며 빨리 체크인하고 밖으로 나오라고 재촉한다. 호텔 앞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서로 다른 맛의 타코 두 접시로 푸짐하게 저녁식사를 한 후 소칼로 광장으로 간다. 박태수 수필가
광산 도시 과나후아토를 뒤로하고 사라진 고대 문명의 신비로운 세계를 만나러 오악사카(Oaxaca)로 떠나는 아침이 밝았다. 어제 저녁 호텔에 머무는 동안 도움을 준 매니저에게 한국에서 가지고 온 작은 색동 파우치를 선물하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의 해맑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하려고 프런트 데스크에 가자, 그녀는 답례로 과나후아토 명소를 새긴 마그네틱과 엽서를 아내에게 선물하고, 투숙객으로부터 이런 선물을 받은 적이 처음이라며 고맙다고 다시 인사한다. 매니저는 그사이 정이 들었는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고, 꼭 다시 과나후아토를 찾아오라며 아내와 포옹한다. 그녀와 사진 한 컷을 담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이처럼 사람은 모르는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틈을 메우다 보면 정이 드나 보다. 한 주 동안 하루 한두 번 스치듯 만나기도 하고, 일정 도움을 받기 위해 몇 차례 대화를 나눴다. 상냥하고 친절한 그녀를 뒤로 하고 공항으로 출발한다. 차는 덜컹거리며 미로 같은 지하 차도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역사 지구를 벗어난다. 아쉬우나 이제 정해진 여정에 따라 떠나야만 하고, 한 주일 머문 과나후아토 여행은 2박3일 일정의 과달라하라보다 알찬 느낌이 든다. 30여분 달리자 멀리 레온-과나후아토 국제공항 관제탑이 보인다. 공항에 도착했으나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아 후미진 곳에서 책을 읽는다. 1시간 정도 지나자 탑승 수속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귀에 들린다. 짐 검사를 마치고 탑승권을 받아 게이트로 갔으나, 이륙시간이 2시간 남짓 남았다. 젊은 배낭여행자처럼 바닥에 앉아 노트북에 과나후아토 여행 자료를 정리한다. 박태수 수필가
모든 인간은 태어나 삶을 마칠 땐 죽게 되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박물관에서 삶의 경계를 넘어 죽음의 모습을 체험한 의미 있는 투어를 마지막으로 과나후아토 구시가지 마리아치의 공연을 즐기고 내일 아침오악사카(Oaxaca)로 떠날 준비를 한다. 멕시코는 400년 이상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긴 역사만큼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과나후아토 구시가지에 즐비하고, 크고 작은 교회의 건축 양식도 다양하다. 성당 내부도 지어진 시기와 설립한 수도 단체나 건축을 주관한 주체에 따라 제대 모양과 주보 성상의 형상이 다양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 본 교회와 비교할 때, 역사는 짧으나, 형태와 중앙 제대의 모양 등은 에스파냐 콜로니얼 시대 지어서인지, 닮을 수밖에 없어서인지 마치 일란성 쌍둥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거친 지형 위에 형성된 과나후아토는 좁은 골목길과 다양한 색상의 집들은 이방인에게 꾸밈없이 속살을 보여준다. 지하 터널은 미로처럼 연결돼 자동차가 숨바꼭질 하는 듯하고, 차와 사람이 함께 다니는 지하 통로는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과나후아토만의 유산이다. 과나후아토 구시가지는 쓰라린 콜로니얼 시대 아픈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도 산타 마리아 대성당과 후아레즈 극장 주변은 마리아치 악단의 연주 소리가 신선한 밤공기를 타고 넘실대고, 낮 못지않게 밤의 아름다움에 취한 여행객은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는 황홀한 밤이다. 박태수 수필가
미라(mummy)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 왁스(mum)와 밀랍이 함침(含浸, mummia)되어 방부 처리된 상태의 물질(mumiya)에서 유래했는데, 전시실마다 가득한 미라를 보노라면 독특하고 심오한 죽음을 마주하자,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들은 누구이고, 왜 이들은 죽어서도 미라가 되어 후세 사람들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미라는 인간의 시체에 붙인 이름으로 자연적인 상황이나 방부 처리를 통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허용 가능한 보존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진 미라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이유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보존하려는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방부 처리하거나 준비된 시체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유럽 여러 박물관에서 이집트 미라를 본 적이 있다. 대부분 종교적이나 왕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은 훗날을 위해 인위적으로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과나후아토 미라는 인위적으로 보존이나 방부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 상태로 관 외부 산소와 습도 교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상태로 보존되는 조건은 희소하므로 시체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이곳 미라들은 자연 상태로 존재한다. 멕시코 석학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Rozano)는 “인간은 삶의 문을 열려면 죽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삶의 숭배는 죽음의 숭배이기도 하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명은 결국 삶을 부정하게 된다”고 했다. 박태수 수필가
터널을 둘러보고 과나후아토의 이색적인 볼거리인 ‘미라박물관’으로 간다. 박물관은 구시가지 외곽 산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걸어서 올라가기는 쉽지 않지만, 차를 타지 않고 걷는다. 가는 길에 만난 오래된 성당을 둘러보며 잠시 앉아 기도한 후 현지인의 삶을 살펴보며 골목길을 걷는다. 미라박물관이 있는 언덕에 올라서는 과나후아토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보상이 뒤따른다. 박물관 입구에 다다라 숨을 고르고, 과나후아토 구시가지를 다른 방향에서 살펴보니 파노라마 화폭처럼 아름답다.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산등성이를 뒤덮고, 우후죽순처럼 뾰족한 고딕 양식의 성당이 띄엄띄엄 눈에 띄며, 때로는 둥근 달을 머리에 이고 있는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교회도 눈에 들어온다. 매표소에서 표를 산다. 입장료 85페소는 다른 박물관에 비해 비싼 편이다. 입장하자 먼저 시청각실에서 박물관 역사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한다. 이곳은 1861년에서 2002년 사이, 인근 교회 묘지에서 발굴한 성인 남자·여자와 어린이 미라 등 111구가 보존돼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태아 미라를 비롯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채 그대로 남은 미라도 해설을 곁들여 보여준다. 하지만 심약한 여행자는 보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박물관은 죽은 자의 의미를 재해석해 ‘작은 천사들’, ‘어머니와 아들’ 등으로 이름 붙인 9개 전시실로 구분돼 있는데, 비디오 감상을 마치고 정해진 통로를 따라가며 다양한 형상의 미라를 감상한다. 이곳은 세계 최초 미라 박물관으로 죽은 자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고고학적으로 유추한다. 박태수 수필가
배꼽시계가 점심때를 알린다. 멕시코 국민 음식 타코 까마론과 세비체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시장을 둘러본다. 누군가 말하길, ‘시장은 없는 것 빼고 모든 것이 다 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달고 시장도 현지인들의 삶에 필요한 많은 것을 팔고 있으나, 수공예품과 식자재를 제외하고 공산품은 대부분 중국 제품이 넘쳐나고, 질은 좋지 못한 편이다. 시장 옆길을 따라 과나후아토의 또 다른 명소인 지하터널로 내려간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매캐한 매연이 콧속 점막을 자극해 연신 재채기를 한다. 알레르기 천식이 있어 지하 터널을 둘러보기에는 신체적 거부감 때문에 몇 곳의 출입구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린다. 과나후아토 터널은 역사 지구인 구시가지 도로 역할을 한다. 콜로니얼 시대 광산촌인 이곳의 홍수와 산사태를 예방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Rio Guanajuato' 계획으로 지은 지하수 통로다. 하지만 지금은 복잡하고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구시가지 교통 체증을 해소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 구시가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거나,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진입할 때 일어나는 정체 현상을 줄이기도 한다. 터널은 1960년대부터 지하 도로로 개조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완성했는데, 자동차 탓에 환기 시설이 있어도 매연이 심하다. 미로처럼 얽힌 터널은 어두운 지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형의 고도차를 이용하여 밖으로 연결된 곳도 있다. 터널 속 조명은 자동차 불빛과 어울려 알록달록한 색감의 매력을 발산하고,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과나후아토 만의 유산으로 여행자는 한 번쯤 이곳을 찾아 묘미를 즐길만하다. 박태수 수필가
도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자, 중년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 사서가 도서관을 관리하는 미구엘 안겔 구즈만 로페즈 교수와 잠시 담소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인사를 나누고 그로부터 간단하게 과나후아토 대학과 도서관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도서관은 에스파냐의 식민 초기 고서와 자료를 보관하고, 과나후아토 대학이 관리하는 공공 도서관으로 식민 초기 이 지역 농업에 관한 자료를 특히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뜻밖에 만난 교수와 기념사진 한 컷을 카메라에 담는다. 도서관 앞 정원으로 나오자 들어갈 때 본 건물의 모습이 왠지 달라 보인다. 외관만 보면 콜로니얼 시절 지은 평범한 건물로 생각하였으나, 도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건물을 다시 보니 정원과 어우러져 중후하면서도 역사적인 건물이라는 것을 느낀다. 조금 전, 건물 앞에서 만난 여인의 권고가 아니었다면 그냥 스쳤을 터인데, 우연히 그녀와의 짧은 인사 한마디로 이번 여행에서 의미 있는 도서관을 만난 행운을 가졌다. 이처럼 우연한 인연은 일상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갈 수 있지만, 관심을 갖거나 생각을 바꾸면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차곡차곡 쌓인다. 여행길에 빠뜨리지 않고 버킷 리스트에 포함하는 곳이 재래시장이다. 과나후아토 명소인 이달고 시장으로 향한다. 재래시장은 커튼이 쳐지지 않은 열린 창으로 현지인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활기차게 사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덩달아 활력이 솟고, 생생한 삶의 현장을 체험한다. 박태수 수필가
대학 캠퍼스는 과나후아토, 셀라야-살바티에라, 이라푸아토-살라망카, 레온 등 네 곳에 분산해 다양한 전공 분야의 학부와 학과를 운영하고 3만3천여명의 젊은이가 14개 단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대학 본부와 법과대학이 있는 과나후아토 캠퍼스 건물 내 네오클래식 양식의 아름다운 113개의 대리석 계단은 대학의 상징적인 구조물로 멕시코 지폐 1천페소에도 등장하는 명소다. 과나후아토 캠퍼스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역사 지구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주변의 중세 건축물과 어울려 오랜 역사와 건축적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대학 외부 투어를 마치고 산티아고 길을 따라 이달고 시장으로 향한다. 과나후아토 구시가지에는 크고 작은 공원이 많고 교회와 중세 건물 주변에는 많은 조각상이 있어 느릿느릿 걸으며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잠시 중세 석조 건물 앞 포켓 공원에 설치된 조각상을 카메라에 담다가 중년의 백인 여인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한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자 닳고 닳은 대리석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안내원이 낯선 동양인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이다. 뒤편 사무실에서 젊은이가 나와서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여행길에 잠시 들렀는데 이곳이 무엇 하는 곳이고, 구경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은 과나후아토대학의 고도서와 자료를 보관하는 도서관으로 여행객에게 입장을 제한하지 않지만 방명록에 국적과 이름, 머무는 곳을 기록하고 들어가라고 한다. 인적 사항을 기록하자 배낭을 맡기고 들어가되 사진은 찍을 수 있으나 플래시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알려준다. 안으로 들어서자 서가에 꽂혀 있는 고서가 눈에 들어오고 고전의 향기를 눈으로 느끼며, 젊은이들이 자료를 찾아 분주하게 정리하는 모습도 보인다. 도서관은 15세기 과나후아토 지역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고서와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한 달째 멕시코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고대 유적, 박물관과 미술관, 교회와 대학 등을 둘러보면서 여행 떠나기 전 조사했던 자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 백문불여일견이라 하지 않던가.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데 여행은 관심 있는 분야를 이해하는 기회가 된다. 과나후아토대학의 고서와 자료를 수장하고 있는 이 도서관은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 대학 도서관과 비교할 수 없으나 규모는 작아도 소도시 대학에 이런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고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도서관에는 열람 공간과 작은 세미나실이 배치돼 있고 띄엄띄엄 학생들이 서가에서 자료를 찾는 모습에서 멕시코의 미래를 본다. 박태수 수필가
마침 오늘 공연을 준비하는 연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지만 무대에 오르자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Steinway&Sons)의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하고 있고 무대에서 바라본 관중석은 출연진이 온 힘을 다해 공연하고픈 열정을 끌어낼 만한 시설과 환경을 갖췄다는 생각이 든다. 극장 이름은 멕시코 최초 원주민 대통령이자 1858년부터 1872년까지 멕시코를 이끌었고 존경 받은 정치인인 베니토 후아레스의 이름을 따 ‘후아레스 극장’으로 명명됐다. 1903년 개관 당시 축하 공연은 이탈리아 공연 예술회사 에토레 드록이 기획했고 나폴레옹 시니와 조르조 폴라코가 감독을 맡았다. 첫 공연 작품은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중 가장 유명한 아이다를 공연했고 빛바랜 당시 공연 포스터가 그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후아레스 극장은 1972년부터 애든버러와 아비뇽 페스티벌에 비견되는 종합예술축제인 세르반티노 국제 페스티벌을 매년 10월에 20여일간 개최한다. 장르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돈키호테의 연극제인 만큼 세르반테스의 연극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이외에도 클래식 음악, 멕시코 민속무용과 함께 오페라, 무용, 거리예술, 시각예술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술 행사도 함께 열린다. 2000년 들어 많은 해외 예술가들이 참여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갖게 돼 권위 있는 국제종합축제로 자리 잡았다. 축제 명칭인 세르반티노는 돈키호테를 쓴 미겔 세르반테스를 의미하는데, 콜로니얼 시대 에스파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인구 15만명 소도시에서 이런 축제가 열리는 것에서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멕시코 국민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극장 투어를 마치고 가까운 곳에 있는 과나후아토주립대학으로 발길을 옮긴다. 산티아고 길에서 바라본 대학 본관 건물은 마치 중세 성채처럼 고풍스럽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듯하다. 은광 산업을 기반으로 아름답게 성장한 도시에 설립된 과나후아토주립대학은 이 지역 청년들의 꿈과 낭만을 간직한 명문 대학으로 1732년 설립한 성 삼위일체 대학이 모체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가운데 하나다. 지금의 교명은 1945년 과나후아토주가 대학을 인수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태수 수필가
어젯밤부터 차락차락 내리던 봄비는 새벽에 그쳤고, 해가 뜨자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다. 오늘은 과나후아토 여행 마지막 날이라 걸어 숨겨진 보물을 찾아 나선다. 구시가지 중심인 우니온 정원 앞에 우뚝 자리 잡은 유서 깊은 후아레즈 극장으로 간다. 이곳은 종일 붐비는 장소라 오전 이른 시간이 한가로워 먼저 찾는다. 극장 앞에 다다르자, 그리스 신전에서 영감을 받은 도리아 양식의 포르티코 기둥 12개는 세로로 홈이 있어 더 높아 보이며, 고전적인 전면은 눈에 띈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좌우에 조각가 헤수스 콘트레아가 제작한 앉아 있는 두 마리 사자 조각상이 있어 입구부터 웅장함에 압도된다. 전면 파사드 최상단에는 그리스 신화 속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예술과 학문의 뮤즈 9명 중 8명을 3.5m 크기의 청동 조각상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에로스와 어원이 같은 뮤즈 에라토만 이곳에 없는데, 그녀는 멕시코의 지구본에 표시되어 있다. 원래 9명의 뮤즈를 모두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오하이오에서 제작한 조각상의 배송 지연으로 8명만 설치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자료에 담겨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매끄러운 샤프트가 있는 12개의 열주랑(列柱廊)으로 구성된 아름답고 미려한 공간인 로비로 이어진다. 건축 당시 위업은 강철로 된 지지대와 2층 지붕 위로 솟아오른 유리로 된 창인 맨사드 지붕으로 투영되는 빛과 함께 아르누보 디자인의 로비는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건축적 개성이 돋보인다. 후아레즈 극장은 19세기 멕시코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주목받는 건축물이자 멕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연장으로 ‘멕시코의 보석’이라 평가받는다. 건축적으로는 ‘멕시코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개념이 내포되었으며, 1873년에 착공해 1903년에 개장한 이 극장은 과나후아토주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로비에서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목재 출입문과 젊은 두 남성 청동 조각상은 멕시코 장인의 예술성이 돋보이는 명작이다. 말발굽 형상의 공연장은 마치 유럽 중세 도시에 있는 예술극장을 보듯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좌석 배치는 사회적 계층에 따라 수준 높은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구역으로 나눴고, 디자인은 화려하면서도 예술적 조화를 갖췄다. 장식은 오리엔탈 스타일로 파리 코믹 오페라의 연출자이자 세트 디자이너인 폴리나 라비스타가 만든 커튼이 돋보이고, 빛을 발하는 샹들리에 장식, 기하학적 디자인의 벽지, 고급 목재 등 다양한 요소를 갖췄다. 박태수 수필가
비교적 잘 보존된 멕시코 고고학 유적지 중 한 곳인 카냐다 데 라 비르겐 유적지는 2011년에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됐다. 유적 보호를 위해 방문자 센터와 박물관이 있는 입구에서 피라미드까지는 정기 셔틀버스로만 접근할 수 있으며, 이동시간을 포함해 투어에는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최근 유물 도난으로 방문자는 배낭이나 가방을 소지하고 들어갈 수 없고, 지자체와 국립인류역사연구소에서는 유적지 보호와 연구에 힘쓰고 있다. 휴관일이라 현장에서 유적지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 없어 안내 표지판에 있는 자료를 카메라에 담고, 구시가지로 돌아간다. 넉넉한 오후를 활용해 이곳 장인들의 수공예품 공방과 미술 갤러리를 돌아보다 아름드리나무가 드리운 정원이 있는 예쁜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한다. 산 미겔 대천사 아르칸젤 교회와 엘 하르딘 정원 주변에는 규모는 작지만, 아름다운 그리스도 신학교 성당과 중세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외에도 공예가와 예술가의 도시로 널리 알려진 이곳에는 파브리카 라 아우로라 갤러리와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는 최고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코코〉의 배경이 되기도 한 라 에스키나 멕시코 토속 장난감 박물관도 부근에 있다. 박물관에는 장난감 장인들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전통 수제 장난감을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수집한 1천여 점 이상의 컬렉션을 5개의 전시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콜로니얼 시대 유서 깊은 중세 거리를 돌아다니며 현지인의 삶을 보았고, 오랜 세월의 흔적이 쌓인 아름다운 교회를 방문했다. 그 뿐만 아니라 손 솜씨가 뛰어난 이 지역 공예가와 장인의 활발한 예술 현장인 공방과 그들이 만든 예술품을 감상한 의미 있는 하루였다. 100세 시대, 은퇴 후 주어진 짧지 않은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살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 기회가 올 때를 기다리지 말고 만들어 가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더욱 의미 있지 않을까. 인생 후반의 여정에서는 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해답을 찾자. 해답은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삶의 지혜가 담겨 있어 때로는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이른 아침 안개 자욱한 산에서 길을 잃었다면, 서두를 것이 아니라 안개가 걷히길 기다림의 여유가 필요하듯 인생 여정에서도 때때로 여유가 필요하고, 은퇴 후 삶은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박태수 수필가
교회 투어를 마치고 다음 장소로 가기 전 잠시 성당 앞 중앙 공원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월요일 오전이라 젊은이는 별로 보이지 않고, 벤치에는 노인들이 눈에 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옆 벤치에 앉은 아주머니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제가 도움을 줘도 되겠느냐고” 정중하게 말을 건넨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다. 카냐다 데 라 비르겐 유적지에 가려 한다고 하자, 그녀는 월요일이라 휴관이 아닐지 모른다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을 알려준다. 유적지 입구에 도착하자 꽤 많은 관람객이 박물관 밖에서 서성인다. 관리인은 휴관이라 입장할 수 없다고 안내한다. 유적지는 매표소에서 7km 정도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오늘은 휴관일이라 버스를 운행하지 않는다. 엘 하르딘 공원에서 만난 아주머니 충고가 떠오른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멕시코가 속한 메소아메리카는 기원전 올메카·사포테카·고전 마야문명 등이 있었고, 기원후로는 아스테카·테오티우아칸·후기 마야 문명 등 찬란한 고대문명을 가진 지역이다. 이처럼 멕시코는 문명과 시기별로 다양한 유적이 전국에 산재하고, 카냐다 데 라 비르겐 고고학 지대도 그중 한 곳으로 별빛으로 물들었던 톨텍 문명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유적지는 메소아메리카 북쪽 경계에 있는 히스패닉 이전 정착지고, 우주의 주기를 반영한 도시 디자인과 다양한 크기의 피라미드가 있는 거대 유적지이다. 주요 피라미드 유적은 하늘을 관찰하는 데 사용됐으며, 사제들이 농경 주기와 관련된 예측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유적은 540년에서 1050년 사이 천문학과 종교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농업과 관련된 천문관측지로 추정한다. 900년 동안 버려진 이곳은 라자(Laja) 강의 중앙 유역이라 군사적으로도 우세한 방어적 위치 때문에 한때 인상적인 요새 역할을 했다. 박태수 수필가
산 미겔 대천사 아르칸젤 교회의 외관 디자인에서 뾰족 첨탑은 플라밍고처럼 우아하게 우뚝 솟았고, 분홍색 석재와 조화는 유카탄반도에 ‘분홍 호수’라는 애칭을 가진 라스 콜로라다스 호수에 서식하는 플라밍고 색감을 닮아 여유와 품위를 느끼게 한다. 교회는 마치 거대한 조각품을 옮겨놓은 듯하고, 섬세함과 정교함의 극치는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중앙 제단의 플라테레스크 양식을 교회 첨탑과 중앙 파사드에 옮겨 놓은 듯 착각에 빠질 정도로 아름답다. 단 한 사람의 현지 장인이 엽서 한 장을 보고 상상하여 세운 것이라고 하기에는 신의 가르침이 있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놀랍다. 교회의 건축 특성은 15세기 후반 후기 고딕 양식에서 초기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사이에 에스파냐가 식민 영토에 지은 교회 건축 양식이다. 콜로니얼 시대 지은 멕시코 교회는 대부분 유럽 건축가가 설계하고 지었다. 하지만 이 교회는 그들의 도움 없이 지역 출신 구티에레즈가 분홍 석재를 사용하여 독특한 색상을 돋보이게 하였고, 더불어 정교하고 섬세한 디자인은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는 찬사가 절로 나온다. 혼배미사가 끝나 안으로 들어서자, 신랑·신부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사진 촬영이 한창이다. 인생 최고의 순간에 가족과 축하객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신랑·신부는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키스 세리머니를 펼친다. 멕시코에서 결혼식은 예식장이 아니라 성당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여행하다 보면 쉽게 볼 수 있다. 성당 내부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보물이 있다. 중앙 제대에 오르는 계단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성가대에는 19세기 독일에서 들여온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측면 예배당에는 마초아깐주 파트스쿠아로에서 온 장인이 16세기에 만든 십자가 조각이 있고, 벽에는 에스파냐 화가 후안 로드리게스 후아레스를 비롯한 현지 예술가들이 17∼18세기에 제작한 다양한 성화를 감상할 수 있다. 장엄한 내·외부 공간이 아름다운 산 미겔 대천사 아르칸젤 교회는 분홍색 석재로 지은 건축적 특징 때문에 플라밍고· 웨딩 케이크· 산호초와 같은 미학적 키워드가 잘 어울린다. 그 이유는 거부할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이자 건축적으로도 손꼽히는 것에 대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교회는 산 미겔 데 아옌데 지명에서 보듯이 도시의 상징이고, 건축적으로도 북미 지역을 대표하는 중세 교회 중 하나이다. 박태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