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쇠살문을 어떻게 개폐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수문은 성 안팎이 개방된 곳으로 적군의 침입에 특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적을 향한 벽을 두꺼운 벽돌 첩으로 해 대포를 배치했고 물이 흐르는 홍예 수문에는 쇠살문을 설치했다. 쇠살문은 철전문의 우리말이다. 화살 모양의 쇠살로 만든 문을 말한다. 수문에 살을 가로세로로 엮어 만든 쇠살문을 설치한 것이다. 의궤에 화홍문을 “다리 아래 7개의 홍예에 각각 쇠로 만든 살문을 설치했다. 줄로 양쪽 문짝을 걸어 당겨 다리 위 구멍(석안)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했으며 거기다가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고 기록돼 있다. 설치만 한 게 아니라 다리 위에서 쇠사슬을 당겨 문을 열기도 하고 내려 닫기도 한다. 평시에는 문을 열어두고 전쟁 중에는 문을 닫아 적군이 수문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림과 설명만으로 문은 어떻게 새겼으며, 문을 열고 닫는 기능은 어떻게 했을까 알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철전문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작동할까? 답은 쇠살문, 상층철전, 석안에 있다. 이 셋이 쇠살문 개폐 메커니즘의 비밀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 핵심은 철전문의 크기다. 홍예 모양의 수문은 화홍문이 7개, 남수문은 9개다. 쇠살문은 화홍문에 14짝, 남수문에 18짝이 투입됐다는 기록이 있다. 수문 한 곳에 문 두 짝씩 설치됐었다. 따라서 쇠살문 한 짝의 너비는 수문 너비의 2분의 1이 될 것이다. 또 의궤에 “줄로 양쪽 문짝을 걸어 당겨 다리 위의 구멍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했으며 거기에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고 했다. “쇠사슬로 문짝을 걸어 당겼다”는 말로 미뤄 쇠사슬을 위로 당겨 수문을 열어두고, 아래로 내려 닫아둔 것으로 보인다. 즉, 상하 개폐 방식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쇠살문 높이는 수문 높이의 반 정도가 될 것이다. 단순한 크기가 무슨 비밀병기일까? 크기 중에서 ‘절반 높이’가 핵심이다. 만약 쇠살문 높이가 수문 높이와 같다면 쇠살문이 오르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쇠살문 높이를 수문 높이의 절반 정도로 설계한 것이 개폐 메커니즘의 첫 번째 비밀병기다. 두 번째 핵심은 상층 쇠살의 존재다. 의궤 용어 ‘상층철전’이란 쇠살문 위층에 설치된 쇠살이란 뜻으로 ‘위층 쇠살’이 된다. 이것이 없으면 개폐가 성립되지 않는다. 철전문 높이는 수문 높이의 절반 정도다. 그러면 절반 윗부분은 개방된 상태로 적군이 침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 바로 ‘위층 쇠살’이다. 가로 살을 걸치고 그 위에 수직 살을 붙여 고정했다. 수문 좌우 벽에 남아 있는 사각형 구멍이 가로 살을 설치하기 위한 구멍으로 보면 된다. 이처럼 ‘위층 쇠살’의 존재 자체가 비밀병기다. 만약 ‘위층 쇠살’이 없다면 쇠살문으로 수문을 봉쇄해도 뻥 터진 윗부분으로 적군이 침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위층 쇠살’을 설계한 것이 상하 개폐 메커니즘의 두 번째 비밀병기다. 끝으로 다리에 뚫은 구멍(석안)의 위치다. ‘석안’이란 돌다리 바닥에 뚫은 구멍을 말한다. 쇠살문을 올리고 내리는 쇠사슬이 통과하는 구멍이다. 쇠사슬을 쇠살문에 연결해 당겨 올리는 것이다. 수문 한 곳에 구멍 1개씩이다. 핵심은 구멍의 구조에 있다. 구멍 위치가 쇠살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쇠살문 위치에서 문에서 뒤로 물러선 위치다. 구멍 내부 경사가 60도 정도다. 육안으로도 경사를 볼 수 있다. 왜 같은 위치가 아닐까? 이유는 대포를 쏘기 위해 설치한 두꺼운 벽돌 첩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더 큰 필연성이 숨어 있다. 좁은 구멍을 왜 까다롭게 경사지게 가공했을까? 왜 구멍과 문의 위치가 일치하지 않을까? 일치시키면 쇠살문을 들어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문과 석안이 같은 위치면 병사가 쇠사슬을 잡아 올려야 문이 올라온다. 반면 조금 뒤로 물러난 위치면 쇠사슬을 잡아당겨야 문이 올라온다. 이 두 가지 동작, 즉 ‘잡아 올리는’ 동작과 ‘잡아당기는’ 동작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공간(Space)과 힘(Forces)에서 큰 차이가 있다. 현실로 말하면 ‘병사 1명’과 ‘병사 여러 명’의 차이이고, ‘팔 힘’과 ‘온 몸 힘’의 차이가 된다. 줄다리기를 상상하면 이해가 쉽다. ‘1명의 팔 힘’으로는 쇠살문을 올릴 수 없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 경사가 지면 줄다리기처럼 ‘여러 명이 온 몸의 힘’을 쓰는 것이 가능해진다. 뒤로 물러나면 여러 명이 설 공간도 만들어진다. 이처럼 석안을 뚫는 각도를 경사지게 설계한 것이 개폐 메커니즘의 세 번째 비밀병기다. 정리하면 쇠살문을 개폐할 수 있었던 비밀의 핵심은 첫째, 철전문 높이를 수문 높이의 절반으로 한 것, 둘째, 개방된 철전문 윗부분을 상층철전으로 막은 것, 셋째, 석안을 철전문에서 뒤로 물러나 경사지게 뚫은 것이다. 화성 수문의 쇠살문에서 개폐를 가능하게 한 세 가지 비밀병기를 밝히며 정조의 과학정신을 엿보았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장안문 돌계단은 왜 오르기 힘들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문은 성에서 방어에 가장 취약한 곳이다. 따라서 곡성인 문은 원성과 다른 형태로 특별하게 만든다. 높이와 두께와 재료가 다르다. 매끈하게 마감한 육중한 돌로 안팎을 쌓았고, 두께가 두껍고 높이도 높다. 이것을 ‘육축’이라 한다. 한가운데는 뚫어 통로로 사용한다. 육축 위에 문루를 세웠으니 인공지반 역할도 한다. 모양은 정확히 등변 사다리꼴이다. 성안에서 보면 위아래가 나란한데 위가 짧고 아래가 길다. 그래서 좌우면은 위에서 아래로 경사가 지어져 있다. 안내문에 보면 이 경사 부분을 “성문 바로 위에 세워진 목조 누각에 올라갈 수 있도록 성문의 양쪽에 긴 돌계단을 설치한 것으로 석제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석제란 돌 사다리를 의미한다. 과연 누각을 오르는 계단으로 만들었을까? 경사가 급하고 계단 1단이 높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 돌계단을 사용할 때면 ‘당시 우리 조상은 거인이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왜 불편한 계단을 설치했을까? 장안문과 팔달문 돌계단을 보면 한 단의 높이는 30cm, 너비는 40cm다. 반면에 현재 건축법상 계단 표준은 단 높이 15cm, 단 너비 30cm다. 비교해보면 단 너비는 표준보다 10cm가 더 넓다. 1단 너비 40cm는 한 번에 내딛기에는 넓고 두 번 내딛기에는 좁아 한국인 보폭에는 매우 불편하다. 또한, 단 높이는 표준 높이 15cm의 2배다. 이 높이는 한국인 신체로 보면 1단 높이가 발을 올리기에 너무 불편하다. 장안문 돌계단이 불편한 이유는 외형상 돌계단에 규격이 큰 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는 군인이 사용하는 돌계단에 왜 너비도 크고, 높이도 크고, 무게도 큰 돌덩이를 사용했을까? 답은 “원래 계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아보자. 육축은 잘 가공된 무사석을 안팎으로 한 층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운 후 다지고, 다시 무사석을 한층 쌓고 잡석을 채워 다지는 반복 작업으로 꼭대기까지 완성했다. 육축 가운데 통로 부분은 안팎으로 홍예를 틀고, 두 홍예 사이에 수직 벽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육축 좌우 부분은 수직이 아니라 경사면이다. 이 경사면을 그대로 둘 수 없고, 무언가 마감을 해야 한다. 마감과 함께 경사면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다. 요즘 용어로 ‘비탈면 보호’다. 비탈면 보호 대책으로 요즘에는 표층 안정, 식생 녹화, 숏크리트, 블록, 옹벽, 벽돌 등 다양한 공법이 있지만, 당시에는 재료도 장비도 제한이 많았다. 화성에서는 어떤 공법을 채택했을까? 다름 아닌 ‘보석(步石) 쌓기 공법’을 택했다. 보석을 층층이 쌓으니 경사면이 계단 모양이 됐다. 이처럼 육축 돌계단은 원래 육축 경사면 보호를 목적으로 보석을 쌓은 것이다. 그런데 모양을 보고 ‘문루로 오르는 돌계단’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래 계단이 아니기 때문“이라 말한 것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에 사용된 대보석 1개 크기는 높이 1척1촌(34cm), 너비 1척5촌(46cm), 길이 5척(1.5m)이다. 무게는 약 0.7t이다. 지면에서 시작해 올라가면서 안으로 한 층씩 들이밀며 보석을 놓은 것이다. 경사면 보호가 목적인데 왜 크고 무거운 돌덩이를 사용했을까? 당시 사용 가능한 경사면 보호 재료는 흙, 벽돌, 돌 세 가지였다. 이중 보석만이 육축 경사면 보호에 적합한 재료였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재료 선택 시 경사면 밑은 잡석이란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첫째, 흙은 적합하지 않다. 흙은 빗물도, 눈도 쉽게 침투된다. 흙은 유실되는 재료이며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 팽창돼 균열이 가고 떨어진다. 더구나 급경사라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더욱 쉽다. 설혹 표면에 회를 섞거나 잔디를 입혀도 장기간 노출에 마찬가지다. 둘째, 벽돌도 적합하지 않다. 재료 특성상 급경사면에 고정적으로 붙일 방법이 없다. 벽돌 줄눈 사이로 우수가 침투되고, 동결과 팽창으로 균열이 생기고 떨어져 나가게 된다. 벽돌 규격, 벽돌 쌓기 방법, 급경사 바탕이라 붕괴 가능성이 크다. 셋째, 돌은 모양, 즉 판석이냐 보석이냐에 따라 사용 여부가 갈린다. 먼저, 판석을 경사면에 덮는 방식이다. 이 경우 경사진 잡석 위에 돌판을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냥 얹어놔도 흘러내릴 가능성도 크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철물 앵커나 시멘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판석은 두께로 인해 깨지기 쉬운 문제점도 있다. 다음 방법은 통돌 형상의 보석을 계단처럼 쌓는 방식이다. 통돌은 흙, 벽돌, 판석의 결함을 모두 해결해줄 수 있다. 통돌의 물리적 특성상 흙처럼 풍화가 없고, 벽돌처럼 흘러내리지도 않고, 판석처럼 균열도 생기지 않는다. 또한, 사각형으로 긴 모양이므로 계단처럼 딛는 수평면(Tread)과 오르는 수직면(Riser)이 형성된다. 이런 형태와 무거운 자체 무게는 수직 방향과 수직 방향의 외력에 의한 움직임이나 변위를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준다. 정리하면, 흙, 벽돌, 판석은 경사면 보호에 결함이 많았다. 여러 옵션 중 오로지 크고 무거운 통돌인 보석을 계단처럼 설치해 구조적 안전을 확보한 것이다. 화성 사대문 돌계단은 원래 경사면 보호와 마감을 위한 구조다. 다만 이를 문루로 오르는 돌계단으로 겸용했을 뿐이다. 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곡성이란 무엇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 4천600보는 원성과 곡성의 합이므로 원성이 아닌 시설물은 모두 곡성일까? “아니요”이다. 이유는 시설물은 두 부류가 혼재돼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곡성인 시설물이고 다른 하나는 곡성도 아니고 원성도 아닌 부류다.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곡성을 이해하게 되고, 화성을 알게되는 것이다. 곡성은 무엇일까? 의궤 권수에 “화성 둘레의 통계가 4천600보가 되는 셈”이라 하고 뒤이어 4천600보의 내역을 설명하며 “문이나 초, 치, 포, 대, 돈 등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635보 4척이고 이 밖에 원성이 3천964보 2척”이라고 기록했다. 기록을 보면 4천600보는 화성의 총 길이이고 문, 초, 치, 포, 대, 돈이 차지한 길이와 원성 길이를 합한 것이 된다. 하지만 곡성이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권1 ‘어제성화주략’에 그 실마리가 보인다. 어제성화주략이란 “성역을 계획할 때 필요한 절차와 방법을 임금께서 몸소 계획하시어 특별히 감동하는 신하에게 내렸다”라고 설명한다. 성화주략은 다산 정약용이 만든 화성 건설 기본계획서라고 지금껏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께서 몸소’라는 기록을 보면 마치 임금과 신하가 원저자를 놓고 다투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뒤에 ‘계획하시어’를 붙인 것을 보면 임금은 전략과 지침을 주고, 신하는 이를 받들어 계획서를 만든 것이 된다. 설계 과정으로 보면 정조는 발주자 요구사항(Owner’s Requirements)을 다산에게 건네고, 다산은 이를 기준으로 설계지침(Design Criteria)을 만든 것으로 보면 된다. 이 성화주략에 유일하게 곡성이란 용어가 나온다. “그 둘레가 곡성까지 합해 약 3천600보라야 겨우 계획한 바에 들어맞는다”라는 기록이다. 여기서 3천600보는 당초에 계획한 화성의 규모다. 이 계획이 실제로는 4천600보로 공사를 마쳤다. 따라서 의궤 권수에 나오는 4천600보는 ‘곡성을 합해 4천600보’란 의미다. 권수에 4천600보에 대해 “문이나 초, 치, 포, 대, 돈 등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635보 4척이고 나머지가 원성”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전체 화성의 길이에서 원성을 뺀 나머지 635보4척이 곡성이 되는 것이다. 화성 성역 200년 전 류성룡은 축성론에 “고대 성제에서 치는 곧 지금의 곡성이다”라고 했다. 이 말에서 곡성은 치처럼 성 밖으로 돌출한 성을 말하고 오래전부터 널리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치의 형태는 3면이 돌출된 형태여서 ‘굽을 곡’을 붙여 곡성이라 칭한 것 같다. 하지만 유의할 것은 돌출된 모양이라고 모두 곡성은 아니란 점이다. 분별이 필요하다. 권수 도설 성지전국 편에 ‘곡성 635보4척’에 해당하는 시설물 이름과 길이가 일일이 기록돼 있다. 이 중 곡성이 아닌 시설물을 알아두는 것이 곡성 여부를 파악하는 요령이다. 곡성이 아닌 시설물을 요인별로 세 가지 부류로 나눠 봤다. 첫째, 구조상 성이 될 수 없는 부류다. 지, 은구, 용연이 해당된다. 세 가지 모두 ‘연못 지’, ‘도랑 구’, ‘못 연’처럼 물과 관련된 시설로 지표면 아래에 형성되는 시설물이다. 둘째, 4천600보와 무관한 부류다. 옹성과 용도가 해당된다. 의궤에 옹성과 용도는 성과 구분해 별도로 분류하고 있다. 원성과 곡성의 합인 4천600보에 포함되지 않는 시설물이다. 셋째, 위치상 자연지반 위에 세운 부류다. 장대 2곳, 각루 4곳, 포사 3곳, 그리고 서노대, 동북공심돈, 성신사로 12개 시설물이다. 의궤에 이 12개 시설물은 ‘성 안(在城身之內) 시설물’로 분류하고 있다. 이 부류는 돌출된 인공지반 위가 아니고 성 안쪽 원래의 땅 위에 세웠다는 의미다. 이 12개 시설물은 꼭 기억해 둬야 한다. 세 가지 경우를 합한 23개 시설물은 곡성이 아닌 시설물이다. 따라서 나머지 37개 시설물이 곡성이다. 유형과 시설물을 보면 문 4곳, 암문 5곳, 수문 2곳, 적대 4곳, 노대 1곳 동북노대, 공심돈 2곳, 남공심돈, 서북공심돈, 봉돈 1곳, 포루(대포) 5곳, 포루(군졸) 5곳, 치 8곳으로 10개 유형에 37개 시설물이다. 8개 유형은 해당 시설물 모두가 곡성인데 노대에서는 서노대가, 공심돈에서는 동북공심돈이 곡성에 속하지 않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두 시설물은 물론 원성에도 속하지 않는 성 안 시설물이다. 참고로 곡성 길이 기준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는 좌우 길이, 즉 넓이(활)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다. 이것은 직선 형태를 한 문, 암문, 수문에 적용된다. 다른 하나는 돌출한 3면의 바깥 둘레(외주)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다. 여기에는 문을 제외한 포루(대포), 치, 포루(군졸), 적대, 동북노대, 남공심돈, 서북공심돈, 봉돈이 해당된다. 화성 전체 곡성 시설물은 권수 도설을 참고하면 된다. 정리하면 “곡성은 원성에서 돌출된 인공지반 3면의 성, 그리고 원성과 원성 사이에 설치된 문, 암문, 수문을 말한다.”, “화성에는 37개 시설물이 곡성이고, 그 곡성 길이의 합은 635보4척이다. 곡성 길이는 전체 성 길이의 15%에 해당한다.” 곡성에 포함되고 제외되는 기준을 살펴봤다. 용어 하나하나의 정의를 중시한 성역의궤 기록을 통해 정조의 엄격함을 엿보았다. 이강웅 고건축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비밀통로 암문은 왜 눈에 띄게 만들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성에서 문은 쓰임새와 관계없이 매우 중요하다. 성 자체가 폐쇄성이 강한 시설인데 문은 성 안팎의 소통 시설이다. 이런 문을 적으로부터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가 중요한 과제다. 화성에는 대문 4곳, 암문 5곳, 수문 2곳이 있다. 5곳의 암문은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서남암문, 남암문이다. 동서남북 외에 서남암문을 둔 것은 용도를 통해 서남각루로 소통하는 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의궤에 암문을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내어 두어 적이 그 길을 알지 못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해 적군이 그 길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은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일까? 과연 어느 정도 이 취지를 따랐을까? 이렇게 자문하는 이유는 화성 암문은 은폐와 동떨어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남암문은 아예 시장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서남각루로 통하는 서남암문을 제외하고 설치 장소와 외부 모양으로 나눠 은폐 상태를 평가해보자. 첫째, 암문 위치를 보면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모두 양쪽이 높은 지형이고 그사이 움푹 내려간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돼 암문의 기본에 충실한 편이다. 남암문은 성안 주택가와 성 밖 장터 사이 한가운데 설치돼 있어 은폐 개념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둘째, 암문 자재를 보면 모든 암문에서 벽돌을 사용했다. 암문 위 여장까지도 벽돌을 사용했다. 벽돌 색은 검은색으로 ‘검은색’ 하면 언뜻 은폐가 떠오른다. 하지만 좌우의 성은 돌이어서 희게 보이므로 대비가 돼 오히려 눈에 잘 띈다. 은폐와는 거리가 멀다. 셋째, 암문 모양을 살펴보면 동암문과 북암문은 각각 대원여장과 비예를 설치했다. 모양이 둥글고 높고 크다. 서남암문 위에는 아예 포사 건물을 얹었다. 남암문, 서암문은 평여장이다. 대원여장, 원여장, 비예 모두 인접한 성의 여장에 비해 크고 모양도 돋보이는 형상이다. 전체 암문 모양에서도 은폐와는 정반대다. 종합하면 암문 위치로는 남암문과 서남암문은 전혀 은폐와 동떨어진 위치다.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은 은폐에 충실했다. 사용 자재로 보면 모든 암문에 벽돌을 사용하므로 주변 석성의 흰색과 대비돼 은폐와 동떨어진 자재를 사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암문 모양은 동암문과 북암문은 높고, 크고, 둥근 모양의 대원여장과 비예를 갖춰 은폐와 관계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 서남암문은 위에 집을 얹어 이 역시 은폐와 거리가 멀다. 전반적으로 화성 암문은 은폐에 대한 배려는 없고 오히려 눈에 잘 띄는 암문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마디로 비밀통로 암문이 공개통로 암문으로 바뀐 듯하다. 화성 암문은 왜 눈에 띄게 했을까? 왜 공개된 암문으로 만들었을까?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그 이유를 찾아보자. 기록에 그 답이 있다. 의궤에 “성안으로 거둬들이는 사람, 가축, 수레, 양식 따위는 다 이 문을 통하게 된다”고 목적과 기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암문’이란 단어가 주는 ‘비밀스러움’이나 ‘은밀함’과 다르다. 화성 암문은 민간인의 빈번한 통행을 목적으로 설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암문이란 것은 성의 사잇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은 문은 지역 간 통로, 대규모 통로, 공식적 통로이고 암문은 지역 내 통로, 소규모 통로, 백성의 통로로 쓰였다는 의미다. 이렇듯 성 밖 백성의 실질적 통로로 대문보다 암문이 사용 인원이나 빈도가 더 높았을 것이다. 성 밖 하층 백성의 마을에서 성안으로 오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암문을 둔 것도 백성을 위한 공개된 통로임을 증명한다. 화성 암문은 세계의 모든 암문 중 유일한 공개된 암문이다. 그렇다면 공개된 암문은 적으로부터 안전할까?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이미 이에 대한 대책이 세워져 있었다. 암문 계획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룬 부분이 전시대책으로 ‘암문 봉쇄’다. 의궤에 “흙을 쌓아 이 문을 막으면 성과 똑같게 되는데 형편에 따라 통해 놓기도 하고 막기도 해 임기응변하기에 편하게 만들었다”란 기록이 있다. 위급 시 흙으로 메워 암문을 봉쇄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는 의미다. 짧은 시간에 흙으로 메우기 위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쏟아붓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의 위치가 양쪽이 높고 그 아래 푹 꺼진 곳을 택한 것이다. 남암문과 서남암문은 좌우 높은 내탁부에 흙을 쌓아 두었다가 아래로 쏟아부었다. 봉쇄 시간을 계산해 보니 서암문 경우 위급 시 우선 문 높이까지 메운다면 18㎥의 흙이 소요되고 3명의 병사가 30분 내 봉쇄가 가능하다. 이처럼 화성의 암문은 백성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오히려 눈에 잘 띄도록 계획했다. 크고 둥근 원여장이나 검은색 벽돌 자재를 사용한 것이 그 이유다. 성역 당시로는 고급 자재인 벽돌을 사용해 멋지고 큰 원여장으로 치장했다. 화성을 상업의 도시, 자족의 도시로 만들 계획을 한 정조는 암문을 이용하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최하층 백성에게 자존심을 세워주는 선물을 한 것이다. 전쟁 기간과 평시 기간을 고려한 현실적 배려가 배어 있는 암문이다. 이 세상 어느 암문과 다른 화성 암문이다. 화성의 암문을 보면서 정조의 애민사상은 사상이 아니라 실천임을 알았다. 오늘도 머리 숙여 암문을 빠져나가며 정조의 가슴을 엿보았다. 화성 암문은 역발상, 그 자체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흙을 조달하기 위해 지(池)를 팠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수원특례시가 화성에서 매우 중요한 시설물을 복원 중이다. 남지와 북지다. 남지는 상남지와 하남지 2개로, 팔달문 안 남창의 남쪽에 있고 북지는 북동포루와 북포루 사이에 있다. 수원시민으로서 큰 기대를 하고 있다. 기대가 큰 만큼 복원에 철저해야 한다. 이하 ‘지’를 ‘연못’으로 표기하겠다. 화성에 지는 연못으로 남지 2개, 북지, 동지 2개로 모두 5개의 연못이 있다. 남지는 성 안의 물을 빼는 데 관련된 시설이고 북지는 남지와 반대로 성 밖의 물을 끌어들여 모아 두는 역할을 했다. 동지도 남지와 유사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연못을 복원한다고 하니 바로 알려야 할 것이 있다. 일부 학자들이 “초기에 연못을 판 것은 치수 대책과 동시에 성을 쌓는 데 필요한 흙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주장이 정설로 가까이 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의궤 ‘일시’ 기록에서 초기 일정을 분석하면 크게 3단계로 볼 수 있다. 1단계가 돌 뜨기, 현장조사, 측량 말뚝박기로 공사 준비 단계다. 다음 2단계로 북수문, 남수문, 개울치기, 상남지, 북지, 하동지 공사로 모두 물과 관련이 있는 공사다. 그 다음 3단계로 북성과 남성의 착수다. 초기 일정을 보면 치수 대책을 화성 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이다. 사실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치수일 뿐이다. 특정한 목적이란 바로 3단계 공사인 북성과 남성의 착수다. 2단계 공사, 특히 3개의 못을 파지 않으면 3단계인 성을 쌓는 공사가 불가능했다. 남지 인근 남성 터는 개울이 성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북지 인근 북성 밖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저지대여서 물을 잡아두지 않으면 북성을 착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상남지와 북지를 가장 먼저 판 것이다. 상남지를 끝낸 날이 4월1일이고 보름 후인 4월16일 남성을 착수했다. 북지를 끝낸 날이 4월4일이고 3일 후인 4월7일 북성을 착수했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다. 필수조건이며 정조의 당초 계획이었다. 모두 상남지와 북지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이다. 치수를 위한 치수공사가 아니라 북성과 남성을 착수하기 위한 치수이고 선행공사인 것이다. 성역 초기에 연못을 판 것이 성을 쌓는 데 필요한 흙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은 허구다. 직접적 근거도 제시해 본다. 첫째, 공급에 맞는 일정이 아니다. 5개 연못 전체에서 나올 흙양의 3분의 2는 하남지와 상동지에서 나온다. 흙이 필요했다면 많은 양의 흙이 나오는 하남지와 상동지를 먼저 파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 두 곳은 모든 성역이 거의 끝나는 시점에 팠다. 허구라는 첫 번째 근거다. 둘째, 소요되는 흙의 양과 맞지 않는다. 북성의 내탁에 필요한 흙은 5만4천㎥로 계산된다. 반면에 북지에서 나온 흙은 1천800㎥다. 북성에 필요한 양의 3% 정도다. 매우 적은 양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초기에 필요한 것은 흙이 아니었다. 의궤 ‘토품(土品)’에 남성과 북성은 “토질이 개흙과 같아서 땅을 6척을 파고 벽돌을 3중으로 깔았다”고 기록했다. 이로 미뤄 초기에는 실제 나쁜 토질을 벽돌로 채우는 치환공사와 기반을 보강하는 공사여서 흙이 아닌 모래, 자갈, 벽돌, 큰 성돌이 필요한 시기였다. 종합하면 소요되는 자재의 종류, 시기, 수량이 모두 맞지 않는다. 연못을 파고 나온 흙을 북성과 남성에서 사용했다는 연관성이 전혀 없다. 오히려 개울치기 준천으로 확보된 모래, 자갈, 돌은 그래도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종류와 시기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조는 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성 맡에 숨겨진 남은구, 북은구 공사를 할 수 없고 성 쌓기 공사를 시작할 수 없으므로 연못을 판 것이다. 이때 연못의 기능은 은구와 성 쌓기 공사를 위한 저류지 역할이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연못 공사는 크리티컬 패스(Critical Path)인 셈이다. 크리티컬 패스란 어느 한 공정(패스)이 지연되면 전체 공사가 그만큼 지연되는 여유 일정이 없는 주 공정을 의미한다. 이럼에도 정조는 연못 공사에 또 다른 큰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막대한 공사용수의 확보다. 연못에 모여진 물을 용수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연못을 판 것이다. 그것도 지역에 맞춰 상남지, 북지, 하동지 3곳을, 소요량에 맞춰 필요한 크기로, 사용 시점에 맞춰 초기에 판 것이다. 공사량, 즉 공사용수 필요량과 연못의 체적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지역, 규모, 시기를 정확히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다. 상남지는 남성과 서성 일부를, 북지는 북성과 서성 일부를, 하동지는 동성에 필요한 용수를 담당했다. 공사 초기는 저류지가 목적이라면 공사 기간에는 저수지의 기능을 한 것이다. 예쁘기만 한 연못이 화성성역 전체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3개 연못이 없었다면 화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는 말은 화성의 연못과 준천을 위해 태어난 말이다. 이런 숨은 큰 의미를 지닌 남지와 북지가 의궤에 충실하게 잘 복원되길 기원한다. 크리티컬 패스를 정확히 파악한 상남지와 북지, 하동지, 개울치기에서 정조의 비상한 혜안과 의도를 엿보았다. 이외에도 더 중요한 다른 기능도 있다. 그리고 위아래로 연못을 2개씩 붙여 판 비밀도 있다. 관련 주제의 글을 기대하셔도 된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화성 시설물은 모두 몇 개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에는 다양한 시설물이 있다. 화성을 소개하는 여러 매체, 관리하는 기관의 자료, 연구자들이 언급하는 숫자는 각각 다르다. 그래서 ‘40여개의 시설물을 갖춘’처럼 적당한 표현을 쓰기도 한다. 화성이 세계 문화유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40개부터 90여개까지 그 차이를 보면 놀랍다. 이래서 한국인은 통이 크다고 하나 보다. 기준이 정립되지 않으면 오류가 퍼지게 되고, 연구의 첫걸음도 떼지 못할 것이다. 왜 이처럼 차이가 클까? 차이는 관점이 다른 데서 온다. 관점의 차이는 용어 정의로부터 생긴다. 주제가 되는 ‘화성’과 ‘시설물’에 대한 인식만 같이한다면 차이는 해소될 것이다. 먼저 ‘화성’의 정의다. 화성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화성시’의 화성, ‘화성부’의 화성, 그리고 어제성화주략의 ‘성화’란 화성 등 3개다. 화성시는 현재의 행정구역 이름이다. 화성부는 성역 당시의 수원의 이름이다. 어제성화주략에서 성화란 ‘화(華)라는 성(城)’을 의미한다. ‘캐슬화’ 또는 ‘포트리스화’와 같은 체계다. 어제성화주략은 정조가 발표한 화성 건설 기본계획서다.  ‘화성’은 이 셋 중 어느 것을 말할까? 행정구역을 말할까? 아니면 성 이름을 의미할까? 화성의 시설물 중 ‘화성’은 당연히 성 이름 ‘화성’으로 봐야 한다. 즉, 당시 화성부 내의 화성(城華)으로 정의할 수 있다. 지명이나 행정구역으로 본다면 행궁의 전각, 사직단, 만석보, 문선왕묘, 영화정 등 그 범위가 상당히 넓게 된다. 다음은 ‘시설물’의 정의다. 시설물의 개념은 성을 사용하거나 운영하는 데 관련된 토목 또는 건축시설물을 말한다. 시설에 포함되는 전기, 기계, 통신, 소방시설은 당시에는 없었던 시설로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화성의 시설물에 성과 여장은 포함하지 않았다. 성과 여장은 화성 자체, 즉 주체이지 시설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무형의 것은 ‘물(物)’이 아니므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화성과 시설물의 정의를 내려봤다. 이제는 시설물을 정하는 근거다. 화성은 화성성역의궤란 기록이 있어 가치가 높은 것이다. 규모, 방위, 토질 등과 마찬가지로 시설물도 화성성역의궤 기록이 근거가 되는 것이 합당하다. 성역의궤 권수에는 시일, 좌목, 도설이 기록돼 있다. 시일은 공사 일정이고, 좌목은 공사 조직이고, 도설은 도면과 시방서다. 장안문을 시작으로 성의 시설물 모두를 그림과 글로 설명하고 있어 도설이라 한다. 성역의궤는 건설기록이고, 도설은 성역의궤의 백미다. 시설물은 바로 이 도설에 그림과 글로 기록된 시설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도설은 유형별, 시설물별로 설명하고 있다. 원문의 단락을 기준으로 시설물을 분류해 보면 문 4곳, 옹성 4곳, 적대 4곳, 암문 5곳, 수문 2곳, 은구 2곳, 지(연못) 3곳, 장대 2곳, 노대 2곳, 공심돈 3곳, 봉돈 1곳, 각루 4곳, 포루(대포) 5곳, 포루(군졸) 5곳, 치 8곳, 포사 3곳, 성신사, 용연, 용도이다. 모두 19개 유형의 60개 시설물이다. 순서는 기록된 순서 그대로다. 지면 관계로 시설물 이름 60개는 생략했다. 원문과 다르게 취급한 것이 있다. 준천은 개울치기 작업으로 무형이므로 제외했고 서봉산 샛봉화는 화성부 밖이어서 제외했다. 반면 지는 5곳인데 3곳으로 간주했다. 남지가 상남지·하남지로, 동지는 상동지·하동지로 이뤄져 상하를 하나로 봤다. 성 밖에 있는 용연을 화성의 시설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예상된다. 하지만 권수 도설에 기록된 점, 권5 실입에도 기록해 성역에 포함시킨 점, 또 “용연 머리에 있는 까닭으로 방화수류정에서 출입하는 길이었다”란 기록을 보면 용연도 엄연한 성역의 하나였다고 본다. 결론은 화성의 시설물은 19개 유형에 총 60개 시설물이다. 기본 중의 기본인 ‘화성 시설물의 범위’에 대해 정의해 봤다. 규모와 시설물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성역의궤 기록 덕분이다. 그렇다면 수원팔경에 화성 시설물이 몇 개나 포함됐을까? 수원문화원이 지정한 수원팔경은 광교적설(광교산에 눈 쌓인 모습), 팔달청람(안개에 감싸여 신비로운 팔달산), 남제장류(남쪽 긴 제방에 늘어선 버드나무), 화산두견(화산의 봄 진달래꽃), 북지상연(북지에서의 연꽃 감상), 서호낙조(서호에서의 해넘이 모습), 화홍관창(화홍문을 빠져나온 비단결 폭포수), 용지대월(용연에서 월출을 기다림)이다.  이 중 제2경인 팔달은 팔달문이 아닌 팔달산을 의미하고, 제5경인 북지는 화성 시설물인 연못 북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저수지 만석거를 의미한다. 이 둘은 화성 시설물이 아니다. 따라서 화성의 시설물은 제7경인 화홍관창의 화홍문과 용지대월의 용연 두 곳이다. 용지대월은 ‘용연 위로 뜨는 달’이냐 ‘용연에서 기다리는 달’이냐로 논란이 있다. 후자가 맞을 듯하다. 성역이 시작되자마자 제일 먼저 북문, 남문, 북수문, 남수문을 같은 날, 같은 시에 착수했다. 시설물 중 가장 먼저 착수한 목적은 소통이었다. 남성과 북성을 착수하면 모든 길이 막히기 때문에 백성과 물자와 물길이 소통되는 문과 수문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다. 또 성 쌓기에 필요한 막대한 돌을 운반하고 백성도 오가는 다리를 겸한 수문이다. 백성을 우선하는 정조의 애민사상과 실용주의를 엿볼 수 있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오성지는 왜 무용지물이 됐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장안문은 방어에 가장 취약한 시설물이다. 따라서 좌우에 적대를, 위에는 문루를, 앞에는 옹성을 배치해 입체적으로 방어한다. 옹성 문짝도 철판을 입혀 화공에 대비했다. 철은 원래 불에 약하므로 철엽은 방화보다 내화 개념이다. 시간을 지체시켜 나무 문짝에 불이 붙기 전에 불을 끄느냐의 문제다. 당시에도 이 점을 알고 대안을 마련했다. 바로 오성지다. 옹성 문 위에 설치한 것으로 “모양이 구유처럼 생겼고 5개의 구멍을 뚫었다. 적이 불을 질러 문을 불사르게 되면 이 구멍으로 물을 흘려 넣는다”고 설명한다. 성역이 진행되던 시기에 정약용은 좌천돼 지방으로 가던 길에 화성을 지나게 된다. 이때 장안문 오성지를 보고 잘못을 지적한다. “오성지라는 것은 물을 퍼 내려서 적이 성문을 태우려 할 때 이를 막는 것이다. 그 구멍을 곧게 뚫어 바로 문짝 위에 닿게 해야 쓸모가 있다. 그런데 도면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었으니 이른바 그림책을 뒤져 천리마를 찾는 격이다고 한탄했다”이다. 한마디로 구멍을 옆면에 뚫었으니 물이 문짝에 직접 떨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때부터 오성지는 무용지물이 됐다. 왜 아래 면에 뚫지 않았을까? 이 또한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먼저 구조를 알아보자. 의궤에 “홍예의 개판 위에는 회3물을 깔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을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를 설치했다”고 설명한다. 문 위에 나무 널빤지를 설치하고, 그 위에 회삼물과 벽돌을 깐 뒤 오성지를 놓아야 한다. 정약용 지적의 대상은 사실상 성역 총책임자 감동당상 조심태다. 필자가 조심태에 대해 변명을 하겠다. ■ 조심태를 위한 변명: 조심태는 구멍을 옆면에 뚫을 수밖에 없었다. 첫째, 조심태는 정약용의 설계대로 공사했다. 설계의 바탕인 중국 무비지 도면에는 오성지를 외벽 면을 일치시키고 물이 나오는 구명은 옆면에 뚫려 있다. 조심태도 무비지와 똑같은 모양으로 공사를 했다. 정약용도 “성 쌓는 사람이 도면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어 놓았다”고 도면대로 한 점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약용의 말은 도면만 보고 그대로 하지 말고 목적에 맞게 조정해 가며 공사를 해야 한다는 취지다. 둘째, 아래 면에 뚫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문짝 바로 위로 물이 쏟아지게 하려면 나무 널판 위에 오성지를 놓아야 한다. 이 경우 개판은 무게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문짝과 오성지 구멍을 일치시키려면 문짝을 2척 뒤로 물려야 한다. 이 경우 문짝의 최대 취약부인 회전축이 적에게 노출되고 옹성 두께도 늘려야 할 판이다. 조심태는 이런 점을 감안해 무게가 개판에 전달되지 않도록 홍예석 위에 오성지를 설치한 것이다. 셋째, 옆면으로 구멍을 뚫어도 오성지 기능에 아무 문제가 없다. 실정록에 “불을 질러 문을 불사르게 되면 구멍으로 물을 흘려 넣게 된다”에서 “흘려 넣게 된다”의 원문 ‘하수(下水)’에 대한 해석이다. 문짝으로 직접 물이 떨어져도, 문짝 앞으로 떨어져도 모두 ‘하수’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불 끄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다른 근거도 있다. 정약용은 “수많은 적이 성문에 풀을 던져 언덕처럼 많이 쌓였을 때 불을 붙여 문을 태우면”이라고 발화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불화살보다 성문 앞에 인화물울 던져 놓고 불을 지르는 것을 더 중요하게 봤다는 의미다. 문짝 앞쪽으로 물이 흘러 떨어져도 풀에 붙은 불은 끌 수 있어 오성지 구멍을 꼭 문 바로 위에 오도록 할 필요는 없다. 정리하면 조심태는 중국 문헌과 정약용의 설계를 잘 지켰고 옹성과 문짝과의 위치를 고려하고, 구조 안전도 감안해 오성지를 설치했다. 당연히 기능에도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반대로 필자는 정약용에 대해서도 변명하겠다. ■ 정약용을 위한 변명: 정약용의 지적대로 아래 면에 구멍을 뚫는 것도 가능하다. 필자는 오성지를 홍예석과 개판, 두 곳에 반반씩 걸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60cm는 홍예석 위에, 60cm는 개판 위에 놓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설치하면 정약용이 원했던 대로 오성지 물이 문짝으로 직접 쏟아지고 개판도 무너지지 않는다. ■ 정약용과 조심태: 본래 오성지에 대한 고찰 두 사람을 비교한 것은 국내 유일의 화성 오성지가 정약용의 지적에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조심태의 오성지는 원래의 제도에 맞게 정상적으로 설치됐음을 밝혔다. 조심태의 설계와 시공이 정약용의 지적보다 근본적으로 오성지의 목적에 부합한다. 조심태의 오성지는 흐르는 양이 균등하기 때문이다. 물은 한곳에 가두면 윗면은 평형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수평이다. 옆면에 뚫린 구멍 아래까지 물을 채워 수평을 이룬 상태에서 위에 아무 곳에나 물을 부어도 5개 구멍에선 균등한 양의 물이 흘러넘친다. 그러나 아래로 뚫린 정약용의 오성지는 어떻게 물을 부어도 5개 구멍으로 물이 균등하게 쏟아져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넘쳐 흐르는’ 상태와 ‘쏟아져 내리는’ 상태의 차이다. 지금까지 오성지가 무용지물이 된 것은 ‘정약용의 지적’ 때문이 아니다. ‘정약용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했던 우리 때문이다. 정약용의 지적에서 허구를 살펴봤다. 오늘은 오성지를 되살려 낸 날이고 조심태와 정조가 누명을 벗은 날이다. 오히려 1970년대에 물통도 없는 기괴한 모습으로 복원한 지금의 우리가 죄인이다. 글·사진=이강웅고건축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문루의 기초는 어디에 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에는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등 네 곳의 문이 있다. 방위로 보면 북문, 남문, 동문, 서문이다. 네 곳의 문은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제도나 구조는 모두 같다. 문의 제도는 크게 육축, 문루, 옹성으로 나눌 수 있다. 문루는 육축 위에 놓여 있다. 육축은 등변 사다리꼴 형태로 매끈하고 큰 돌로 쌓은 부분을 말한다. 한가운데를 뚫어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로 사용한다. 좌우 경사진 부분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다. 속은 잡석으로 채워 놓았다. 문루란 육축 위에 지은 집을 말한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2층 중층 문루고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단층 문루다. 중층 문루는 보기만 해도 그 규모가 압도적이다. 특히 팔달문 문루는 육축 위에서 220년을 버텨온 것이다. 이런 대규모 크기와 무게의 건축물이 원지반이 아닌 8m 높이로 만든 인공지반인 육축 위에서 아무 이상 없이 유지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래서 문루의 건물 기초가 궁금해진다. 문루 기초는 인공지반 육축 위에 있을까? 아니면 원지반 육축 아래 바닥에 있을까? 답은 “육축 아래 원지반에 있다”다. 답을 듣자마자 여러분은 바로 답이 틀렸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문에 올라가 보면 문루 기초석이 육축 위 기둥 밑에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대원주석 18개씩, 창룡문과 화서문은 중원주석 10개씩 설치돼 있다. 육축 구조를 좀 더 살펴보자. 팔달문의 경우다. 물이 나는 터라서 14척 깊이로 땅을 파서 진흙, 모래, 회 다짐으로 지반을 강화했다. 그 위에 안팎으로 매끈하게 다듬은 무사석을 쌓고 그사이에 잡석을 채우며 다져 만든 것이 육축이다. 한마디로 육축은 사람이 만든 인공지반이다. 잡석은 30cm씩 한 층 한 층 층다짐을 했다. 모두 인력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이지만 충실하게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인공지반 위에 문루를 세웠다. 문루는 2층 나무구조로 거대한 지붕과 함께 무게가 큰 구조물이다. 무거운 목조 문루와 인공지반의 특성으로 보면 문루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침하, 이완, 파괴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실제 전쟁에 의한 파괴만 있었고 자연적 파괴는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의 시공 품질이 매우 뛰어났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과연 시공을 잘해서 문제가 없던 것일까? 이 또한 “아니요”다. 여기에는 공사 외에 정조의 비법이 숨겨져 있다. 어떤 비법일까? 의궤 권6 실입에 그 비법이 보인다. 다름 아닌 ‘은주석’의 존재다. 실입이란 실제 사용된 자재나 인력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은주석이 장안문에 271덩이, 팔달문에 272덩이, 창룡문에 109덩이, 화서문에 108덩이가 사용됐다고 기록돼 있다. 은주석은 ‘마루 밑 또는 방 밑 등 보이지 않는 곳에 사용하는 석재’로 설명하고 있다. 크기는 면 크기 사방 3척(93cm), 높이 1척2촌(37cm)이다. 은주석이 문루 기초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필자는 육축 아래 원지반부터 육축 위 기둥 기초 밑까지 은주석이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육축 속에 묻혀 있어 어느 문에서도 실물을 확인할 수 없으니 확정하기에 난감하다. 2013년 팔달문 해체보수 후 발간된 준공 자료집에도 기둥 기초석과 주변 잡석만 보인다. 이제부터 보이지 않는 밑 부분을 찾아 하나씩 범위를 좁혀 보자. 1단계로 ‘사용한 시설물’로 좁혀 보자. 화성 시설물 전체를 확인해 보니 은주석을 사용한 곳은 문 네 곳뿐이다. 따라서 은 주석은 ‘문루에 필요한 것’이라고 확정했다. 2단계로 ‘사용한 부재’로 좁혀 보자. 팔달문이 272덩이, 창룡문이 109덩이를 사용했다. 용어 사전에 사용처가 ‘마루 밑’이라 했는데 문루 마루 밑은 기둥이 전혀 필요 없는 구조이므로 사용 범위에서 제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루 기둥 밑이다. 간단히 검증을 해보자. 만일 은주석이 기둥 밑에 사용되는 것이라면 기둥 개수와 육축 높이가 은주석 사용량과 상관관계가 있다. 팔달문과 창룡문을 비교해 보자. 창룡문은 기둥 개수가 팔달문의 55%이고 육축 높이는 팔달문의 80%로 종합하면 44%에 해당한다. 은주석 사용량은 40%다. 따라서 은주석은 ‘문루 기둥에 필요한 것’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3단계로 ‘사용된 위치’를 확정해 보자. 은주석 1개 높이는 1척2촌이다. 팔달문에 272덩이가 사용됐으므로 사용한 은주석 총 길이는 326척4촌이 된다. 문루 기둥이 18개이므로 기둥 1개당 은주석 사용 길이는 18척이 된다. 육축 높이가 22척으로 약 4척의 차이가 발생한다. 같은 계산으로 창룡문도 4척 차이가 생겼다. 차이 4척은 육축 위 원주석 높이(두께)다. 따라서 은주석이 사용된 위치는 문루 기둥 밑이란 것이 밝혀졌다. 결론은 ‘육축 아래 원지반부터 육축 위 기둥 밑까지’ 은주석을 사용한 것이다. 은주석을 연속해 쌓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기초는 육축 위 기둥 밑에 있으나 사실상 기초는 육축 아래 원지반에 있다. 실제 기초와 보이는 기초 사이에 ‘보이지 않게 묻혀 있는 은주석’이 문루 하중 전체를 땅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것이 인공지반 위에서 팔달문 문루가 버텨온 비밀병기였다. 육축 속에 보이지 않게 심어 놓은 은주석에서 정조의 품질경영을 엿보았다. 이강웅 고건축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화성의 길이는 얼마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사람들은 성을 이야기할 때면 장소와 규모를 먼저 궁금해한다. 아마 성의 형태가 일반적으로 빙 둘러싼 모양이라 그런가 보다. 화성도 예외는 아니다. 안내 책자나 문화해설사가 제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성의 규모이기도 하다. 화성의 길이는 과연 얼마일까? ‘과연’이란 말을 붙인 이유는 수많은 안내문이나 자료에 통일된 수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본 중 기본인 화성 규모에 관해 탐구를 시작해 보자. 화성 길이에 대해 의궤에 수치로 보여주는 기록은 권수 도설에서 “둘레의 통계가 2만7천600척이므로 4천600보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네 군데 옹성의 둘레는 163보다. 용도의 둘레는 367보다”라는 기록이다. 화성 규모에 대한 매우 중요한 근거다. 원문에 길이에 대한 용어로 ‘주위’ 또는 ‘주’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앞에 얘기한 ‘빙 둘러싼 모양’의 ‘둘레’와 개념이 일치한다. 정리하면 화성 길이는 성이 4천600보, 옹성 163보, 용도 367보다. 성 길이 4천600보는 시설물 간 거리인 원성 길이와 돌출된 시설물을 형성하는 곡성 길이를 합한 길이다. “화성 길이는 얼마일까”에 대한 답은 “4천600보”로 하면 된다. 옹성과 용도를 포함하지 않아도 문제가 안 될까? 용도는 성이 아니므로 화성 길이에 포함하면 안 되고 별도로 언급하는 것이 맞다. 옹성 길이도 성 길이와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이유는 옹성은 문의 외성으로 원성도 곡성도 아니고 문의 길이는 곡성으로 이미 성 길이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장안문을 예로 들어보자. 장안문은 곡성으로 길이가 26보이고 장안문의 외성인 북옹성은 길이가 55보다. 성의 길이 4천600보에 26보는 이미 포함된 수치이므로 북옹성 55보는 별도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의궤에도 장안문 길이와 북옹성 길이를 분리해 별도로 언급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4천600보는 몇 ㎞입니까”란 질문에 대한 답이다. 요즘 일상으로 쓰이는 미터법으로 답해야 한다. 누구나 언뜻 답을 쉽게 내놓지 못한다. 의궤에 길이 단위가 ‘보’이기 때문이다. 매우 생소한 단위로 환산이 문제다. ㎞로 환산하려면 1보가 몇 척인지, 그리고 1척이 몇 m인지 알아야 한다. 환산 기준이 의궤 기록에 없다. 당시엔 미터법 자체가 없었으니 당연하다. 환산 기준으로 ‘화성에 한해’ 1영조척을 310㎜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합당한 근거도 있다. 이 값은 화성을 대규모로 복원할 1970년대 당시 유효한 유구를 기준으로 만든 값으로 전문가와 정부가 정한 값이다. 즉, ‘수원성 복원정화사업 복원용척’이다. 최소한 정부가 인정한 수치다. ‘화성에만’이란 조건을 단 것은 다른 유적의 경우 복원용척이 다를 수 있기에 한 말이다. ‘유효한 유구’란 전쟁, 파괴 등 유적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일을 겪었어도 당초에서 변하지 않은 유구를 말한다. 이를 기준으로 환산해 보자. 우선 보 단위를 척 단위로 바꿔 보자. 보에 대해 의궤에 ‘주척으로 따져서 6척이 1보가 되고 영조척으로 따져서는 3척8촌이 된다’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4천600보는 주척으로 2만7천600척이고 영조척으로 1만7천480척이 된다. 주척은 중국 주례에 규정된 단위다. 영조척은 성역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척도로 건물 짓기, 성 쌓기, 수레나 선박 제조에 사용해 영조(營造)를 붙인 것이다. 간혹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가 만든 척도라 말하는 분도 계신다. 재미있는 분이다. 주척의 환산치는 없으므로 영조척을 활용한다. 1영조척의 복원용척인 310㎜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화성 전체 길이는 5천419m, 즉 5.4㎞다. 필자는 환산값을 확인차 장안문 홍예의 선단석 간 거리를 실측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로 1㎜ 단위까지 네 곳을 측정했다. 하지만 측정 수치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유는 돌의 재료 특성상 표면에 1㎜ 정도의 구멍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무리 측정을 잘해도 의미가 없다. 하나는 공식적 인증을 받을 수 없는 점 때문이다. 또 하나는 수많은 곳을 실측해 평균을 냈다 해도 평균이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다. 결론으로 첫째, ‘화성 길이’ 범위는 성, 옹성, 용도 중에서 성 길이, 즉 원성 길이와 곡성 길이의 합계로 4천600보다. 둘째, ‘환산값’은 화성의 경우 1영조척이 310㎜이며 이 값은 ‘수원성 복원정화사업 복원용척’으로 쓰인 것이다. 따라서 화성에서 성의 길이는 4천600보이고 미터법으로는 5.4㎞다. 환산 기준보다 길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다. 측정 기준이다. 성 안에서 잰 것일까, 성 밖에서 잰 것일까, 여장 중심선일까, 같은 위치라도 바닥에서 잰 것일까, 가슴높이일까, 눈높이일까. 측정 위치에 따른 길이 차이는 엄청나다. 이에 대한 답은 차후 관련 주제 기사에 언급될 것이다. 공장 제품도 아니고 산과 평지를 누비는 대규모 공사에서 모든 수치가 서로 맞아떨어지는 화성 성역에서 정조의 정확한 관리를 엿보았다. 성역의궤의 정확성도 봤다. 화성 길이조차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이강웅 고건축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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