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初雕本 瑜伽師地論 卷五十三)은 인천 연수구에 있는 고려시대(11세기) 기록유산으로, 1993년 국보 제276호로 지정됐다. 유가사지론은 인도의 미륵보살이 지은 글을 당나라의 현장(602664)이 번역하여 천자문의 순서대로 100권을 수록한 것으로, 11세기에 간행한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 본은 100권 가운데 제53권으로, 처음 새긴 본이다. 종이질은 닥나무종이이며, 가로 48㎝, 세로 28.4㎝이다. 이 판본은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재조대장경 판본과 비교해보면 판수제와 권, 장, 함차표시의 위치에 차이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 호암 이기조(15951653) 선생의 묘소는 군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이 선생은 광해군 7년(1615)에 병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고, 인조 13년(1635)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낼 때는 많은 덕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묘지는 부인 고령 신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는 향로석과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상석이 있고, 좌우로는 동자상 문인석망주석이 한쌍 씩 있다. 묘역 앞에는 숙종 31년(1705)에 세운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박세채가 글을 지은 것이다. 1992년에 이장할 때 발견된 묘지석의 내용에 의해 원래의 묘역을 영조 4년(1728)에 이장해 만들었음을 확인했다. 지난 1990년 4월30일에 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됐으며 소재지는 군포 산본동 산 1152-11번지다. 현재는 한산이씨총대종회에서 관리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화각장(華角匠)은 인천 남동구에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다. 화각은 쇠뿔을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을 말하며, 이것을 이용해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을 화각장이라 한다. 화각공예는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와서 생산이 많지 않았으므로 특수 귀족층들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에 주로 이용됐다. 화각공예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나전칠기인 경함(經函)과 염주합(念珠盒)에는 복채기법으로 된 대모(玳瑁)가 나전과 같이 사용됐고, 이러한 기법은 조선 전기와 중기의 나전에까지 이어졌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화각으로만 장식한 화각공예품이 발달했다. 화각공예는 투명도가 높은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편 다음 뒷면에 오색찬란한 단청안료로 갖가지 문양을 그리고 채색해, 나무 등으로 만든 각종 기물인 백골(白骨) 위에 붙이고 백골의 내부와 뼈대 등 화각 이외의 여백은 옻칠을 하여 마감하는 기법이다. 화각공예는 색채 및 문양에서 장식성이 뛰어난 실용공예로서 우리나라의 전통공예, 특히 목공예 가운데에서도 매우 특색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사육신 중의 한 명인 유응부 선생과 한남군 이어, 병사 양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제단으로, 어린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처형당한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을 마련한 이 단에는 낮게 마련된 대지 위로 3기의 비석이 놓여 있다. 가운데에는 총관유응부선생의 비석이, 그 양 옆으로 병사양치선생, 한남군이어선생의 비가 각각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또한 유응부 선생의 고향이었던 만큼, 단 옆으로 선생의 옛 흔적을 기리는 유허비를 비각 안에 모셔두었다. 조선 영조 22년(1746)에 설치된 것으로, 매년 가을마다 유림들에 의한 제사가 행해진다. 현재는 포천 소흘읍 소흘로116번길 13(무봉리)에 위치해 있으며 지난 1987년 2월12일에 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정우량 영정(鄭羽良 影幀)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9호로, 조선 후기의 문신인 정우량(16921754) 선생의 초상화이다. 정우량은 조선 경종 3년(1723)에 병과에 급제하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초상화는 살색의 대나무 발을 배경으로 두고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좌우가 대칭을 이룬다.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짙은 청색의 관복을 갖춰 입었으며, 가슴에는 문관을 상징하는 학과 구름을 수놓았다. 수용성 물감을 아교액과 혼합하여 진한 색채로 만들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 개인소유로 관리되고 있으며, 관람할 수 없다. 문화재청 제공
남양주 안빈묘는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의 무덤이다. 안빈 이씨는 병자호란때 봉림대군(효종)이 청에 볼모로 가자 심양까지 따라가 봉림대군을 모셨다고 한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후궁이 되었으며, 1686년(숙종 12)에 안빈에 책봉되었다. 효종 사이에서 숙녕옹주를 낳았다. 묘소에는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묘표석 등이 있으며, 묘표석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지묘(朝鮮國安嬪慶州李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지난 1991년 10월25일 사적 제366호로 지정된 바 있다. 한편, 남양주 안빈묘는 사적지 원형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해 비공개로 관리중이다. 학술조사 등 목적으로 관람을 희망하실 경우에는 사전에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사릉(031-573-8124)에서 허가를 받은 후 출입 가능하다. 문화재청 제공
천연기념물 제304호인 강화 볼음도 은행나무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자연유산이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화 볼음도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800살 정도이고, 높이는 24m, 가슴높이의 둘레는 8.96m이다. 마을의 언덕 위에서 정자나무의 구실을 하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신성스런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800년 전에 홍수에 떠내려 온 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며, 이 나무의 가지를 태우면 신이 화가나서 재앙을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정월 그믐날에 모여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비는 풍어제를 지내곤 했으나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포천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신생대 제4기 추가령 구조선 또는 북한의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이 옛 한탄강 유로를 따라 흐르다가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급랭하여 형성된 것으로 우리나라 육지에서는 발견된 예가 드물다. 선캄브리아기 변성암류와 제4기 현무암질 용암류와의 부정합 구조, 주상절리, 하식애 및 고토양층의 발달 등 지질지형학적인 가치 및 경관적 가치도 우수하다. 지난 2013년 2월12일에 천연기념물 제542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위치는 포천 창수면 신흥리 산 209-1 등 12필지다. 문화재구역은 1만 8천146㎡, 보호구역은 12만 8천770㎡에 달한다. 문화재청 제공
옹진 백령도 사곶 사빈(천연비행장, 甕津 白翎島 사곶 砂濱)은 인천 옹진군에 있는 지질지형으로, 1997년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지정됐다. 사빈(沙濱)이란 모래가 평평하고 넓게 퇴적되어 만들어진 곳을 말한다. 백령도 사곶 사빈은 백령도 용기포 부두의 남서쪽과 남동쪽의 해안을 따라 자리잡고 있다. 언뜻 보면 모래로 이루어진 듯 하나 사실은 규암가루가 두껍게 쌓여 이루어진 해안으로 썰물 때면 길이 4㎞, 폭 300m의 사빈이 나타난다. 사빈을 이루고 있는 모래는 크기가 매우 작고 모래 사이의 틈이 작아 매우 단단한 모래층을 형성하고 있다. 사빈은 콘크리트 바닥처럼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에는 UN군의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백령도 사곶 사빈은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것과 더불어 전세계적으로 단 두 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지형 및 지질상을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통일벼 유물은 과천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1960년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수확 신품종 개발의 성과물인 통일벼 육성 과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들이다. 통일벼의 원형이 된 IR667을 교배하여 육성한 결과를 적은 조사야장과 여기에 사용된 시험도구들로 국립과천과학관에서 공개전시 중에 있다. 야장은 4권, 시험도구는 1식으로 구성됐다. 통일벼의 개발과 보급에 의한 주곡의 자립은 허문회를 비롯한 육종학자들의 연구와 신품종의 보급을 위한 연구 및 영농교육에 매진한 농촌진흥청의 노력이 결합된 결과물로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유물은 지난 2013년 8월27일 국가등록문화재 제555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옹진 백령도 진촌리 감람암포획 현무암분포지(甕津 白翎島 鎭村里 橄欖岩捕獲 玄武岩分布地)는 인천 옹진군에 있는 자연유산으로, 1997년 천연기념물 제393호로 지정됐다. 우리나라에서 감람암 포획현무암이 분포하는 곳은 경기도 전곡, 평택 강원도 철원 일대, 울릉도 및 제주도에 국한되어 있다. 백령도 진촌리의 감람암 포획현무암 분포지는 백령면 진촌리에서 동쪽으로 1.3㎞ 정도 떨어진 해안에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지름 510㎝ 크기의 노란 감람암 덩어리가 들어있는 용암층이 만들어져 있다. 용암층은 두께가 10m 이상이며,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령도 진촌리의 감람암 포획현무암 분포지는 지구 속 수십 ㎞아래에서 만들어진 감람암이 용암이 분출할 때 함께 올라와 만들어진 것으로 지하 깊은 곳의 상태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시골소녀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가등록문화재 제533호로 춘천 이영일 선생의 몇 안되는 유존 작품이다. 이 선생은 1920~30년대에 채색화 분야에서 활동했던 화가로 1925년 조선미술전람회에 3등상을 수상하면서 연속 7회에 걸쳐 특선을 차지한 작가이나 해방 이후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시골소녀는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소녀와 여동생을 화면 가득히 묘사한 작품으로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자세, 옷차림 등에서 당당하고도 섬세한 표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녀들의 빨간색 치마와 아기를 업고 있는 푸른색 포대기에서 채색화의 특징이 두드러지며 강약이 없는 가는 필선으로 인체의 윤곽선을 두른 기법에서 일본화의 표현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창덕궁 창고에서 발견돼 1971년 한국근대미술 60년전에 처음 출품됐다. 식민지 시대 화단사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평이다. 문화재청 제공
옹진 백령도 남포리 습곡구조는 천연기념물 제507호로, 백령도 남포리 장촌해안의 장촌포구 서쪽해안 약 300m 지점인 용트림바위 바로 건너편 해안절벽에 있으며, 그 규모는 높이 약 50m, 길이 약 80m 정도이다. 이 단층 및 습곡구조는 백령도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선캄브리아기 백령층군의 장촌층이 동아시아 일대에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고생대 말~중생대 초의 지각변동으로 형성되었다. 즉 지하 깊은 곳의 횡압력으로 변성 및 변형작용을 받아 습곡 및 단층이 이루어진 후, 지각이 풍화 및 침식되면서 서서히 융기되어 지금과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난 큰 규모의 단층 및 습곡구조는 매우 드문 일로서, 이들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한반도의 지각 발달사를 규명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문화재청 제공
노강서원은 의정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조선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1654168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그는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는 도중 죽었다. 학문에도 깊고 성품도 강직한 분으로 알려졌으며 사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숙종 21년(1695)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27년(1701)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노강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문화재청 제공
대금장(大匠)은 인천시 무형문화재 제6호로, 삼금(대금중금소금) 가운데 하나인 대금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한다. 대금은 대나무로 만든 관악기로 저 혹은 젓대라고도 한다. 대금 제작에 사용되는 재료로는 황죽(黃竹)이나 쌍골죽(雙骨竹)이 쓰인다.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황죽 또는 쌍골죽을 불에 구워 기름을 제거하고, 구부러진 부분을 바로 잡아 약 2개월간 건조시킨다. 이어 대나무 안에 소금물을 부어 약 24시간 경과시킨 다음 소금물은 제거하여 10일간 건조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대나무에 구멍을 뚫고 갈라짐을 방지하기 위해 마디 위치에 따라 10군데를 낚시줄로 동여맨다. 구멍에는 취구(吹ㅁ)청공(淸孔)지공(指孔)칠성공(七星孔)청가리개가 있는데, 취구는 입김을 불어넣는 곳이며, 청공은 떨림판 역할을 하는 갈대의 속껍질을 붙이는 곳이다. 지공은 손가락으로 음정을 조절하며, 칠성공은 전체 음정을 미세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문화재청 제공
이 카드는 과천시가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었던 인물 4천857명에 대한 신상카드다. 1920~1940년대에 일제 경찰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1980년대에 치안본부(현재 경찰청)에서 국사편찬위원회로 이관됐다. 카드에는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김마리아, 유관순 등 일제에 항거한 독립 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사진ㆍ출생연월일ㆍ출생지ㆍ주소ㆍ신장 등 개인의 기본정보 외에 활동ㆍ검거ㆍ수형에 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부착된 인물사진은 희귀한 경우가 많으며, 당대의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을 조사하거나 확인할 때 가장 신빙성 있고 설득력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경기12잡가(京畿十二雜歌)는 인천시 무형문화재 제21호로, 긴잡가라 하기도 하고, 좌창이라 하기도 한다. 19세기경 발생한 장르로서 사계축 소리꾼들 사이에서 만들어져 불렸다. 역사적으로 조선말기에 공예인, 상인, 기녀들이 즐겨 불렀고 사계축(四契軸:지금의 서울역에서 만리동 고개 및 청파동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남자 소리꾼들)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초기 12잡가는 8잡가와 잡잡가로 구분되었는데 8잡가는 유산가적벽가제비가집장가소춘향가선유가형장가평양가 등이고, 잡잡가는 달거리십장가출인가방물가의 네 곡을 말한다. 이들을 12잡가로 묶은 것은 12가사의 영향인 것으로 본다. 현재 부르는 12잡가는 유산가적벽가제비가집장가소춘향가선유가형장가평양가달거리십장가출인가방물가이다. 문화재청 제공
이 입상은 원래 봉업사지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겼다. 불상과 광배(光背)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눈코입은 심하게 닳았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다.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등록문화재 제705호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제대 및 세례대는 사적 제424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안에 있는 핵심적인 의례물로, 1900년 건축 당시 강화도 지역의 화강암을 재료로 제작됐다. 세례대에는 修己洗心去惡作善(수기세심거악작선, 자기를 수양하고 마음을 닦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라), 重生之泉(중생지천, 거듭나는 샘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개신교의 한국 토착화 사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한국의 성공회 교단에서 최초로 제작된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내부 구조물과 조화를 이루는 단순하고 소박한 형상은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를 띠고 있다. 또한, 유물의 위치와 모습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현재까지도 의례물로서 원래의 기능대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한사는 여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고자 지은 사당이다. 송시열은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대선비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영의정까지 지냈다. 정조 9년(1785)에 왕이 김양행에게 사당을 짓게 하고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사당 이름을 대로사라고 하였다. 그 뒤 고종 10년(1873) 10월에 강한사라 개칭하였다. 건물은 강당과 사묘, 관리인이 거주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교적 간단한 규모이나 배치가 특이하다. 출입문인 장인문이 서쪽으로 나있으며 사묘 또한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영릉(효종의 릉)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거할 때 송시열을 모시던 44개의 서원이 모두 헐렸으나 오직 대로사만이 강한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남게 되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