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조계종 '제35대 총무원장 선거', 후보 스님들 마무리 총력전

설정스님, 수불스님, 혜총스님 한국 불교의 차기 지도자를 뽑는 조계종 ‘제35대 총무원장 선거’가 오는 12일에 치러지는 가운데 각 후보 스님들은 자신들의 공약을 내세우며 지지자 확보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최종 후보인 기호 1번 설정 스님, 기호 2번 수불 스님, 기호 3번 혜총 스님은 막판까지 전국 선거인단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하며 지지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수덕사 방장을 역임한 기호 1번 설정 스님은 ‘승풍진작’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승풍진작으로 올바른 승가상을 구현하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환희심을 북돋아 주겠다는 각오로 풀이된다. 부산 범어사 주지를 역임한 기호 2번 수불 스님은 종단 운영 기조의 무게를 ‘수행, 전법, 교구’에 뒀다. 지난달 27일 종책발표를 겸한 기자간담회에서 수불 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 정신으로 자기를 바로 세우고 교단을 바로 세우겠다”며 “수행과 전법 중심으로 조계종을 대전환시켜 다시 1천만 불자 시대를 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기호 3번 혜총 스님은 종단 운영 4대 기조로 수행하는 종단, 전법하는 종단, 함께하는 종단, 존경받는 승단을 제시하고 28개 분야별 종책을 제안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임기는 4년이며 1회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다. 12일 총무원장 선거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공연장에서 치러지며 선거인단은 중앙 종회의원 81명, 각 교구 선거인단 238명을 합쳐 총 319명이다. 허정민기자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전국에서 ‘추석맞이 이웃사랑나누기’ 진행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전국에서 ‘추석맞이 이웃사랑나누기’ 진행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전국에서 ‘추석맞이 이웃사랑나누기’를 진행, 지역 사회에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19일 하나님의교회 본당 새예루살렘 판교성전 성도들은 분당구청을 방문해 이웃돕기 식료품을 지원했다. 그동안 분당구청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이 많은 데 비해 이웃돕기에 나서는 단체가 많지 않아 어려움을 겪어왔다. 분당구청 관계자는 “도움의 손길이 부족해 명절이면 더욱 안타까움이 컸다”며 “매년 때때마다 주위 이웃들을 보듬는 하나님의 교회 나눔 실천에 고마움을 전한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7일에는 백현동 일대 거리정화에 나서기도 했다. 이날 200여 명의 성도들은 명절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가족과 친지들을 맞이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도로변과 주택가, 카페거리, 산책로 등 구석구석을 정화했다. 추석맞이 이웃돕기는 성남, 용인, 파주, 구리, 의정부 등 경기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진행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 관계자는 “이웃들 모두 넉넉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냈으면 좋겠다”며 “작은 정성이지만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날마다 건강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환경정화활동은 물론 독거노인, 모자가정 등 이웃돕기와 헌혈운동, 지역행사 서포터즈, 재난 피해복구, 이·미용 봉사 등 다양한 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와 이웃에게 꾸준히 희망을 전하고 있다. 송시연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조선시대 어류박물학의 보고, ‘자산어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호는 손암(巽菴)이며 다산 정약용의 친형이다. 일찍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돈인 이벽의 영향으로 서양 수학책인 기하원본과 천주교에 대한 교리를 접하며 서양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1790년(정조 14) 여름 원자(순조)가 태어나는 것을 기념하여 시행된 증광별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정조의 아낌을 받으며 1797년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고, 왕명으로 영남인물고 편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1800년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과 이듬해 일어난 천주교 박해로 유배되었고, 같은 해 11월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재 압송되어 국문당한 후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정약전을 나오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하였다. 돌아올 수 없었던 유배생활 정약전이 우이도(소흑산도)에 도착했을 때 나이 41세였다. 이 곳에서 정약전은 섬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정약용이 찬한 묘지명에 “섬사람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교만스럽게 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주인으로 섬겼다.”라고 하였다.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1807년 무렵 대흑산도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사촌서실(沙村書室)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약용이 지은 기문에 따르면 “손암형님이 흑산도 귀양살이 하신지 7년이 되어 5~6인 아이들이 따르며 사서(四書)와 역사를 배우게 되어 초가 두어 칸을 지어 ‘사촌서실’이라 이름짓고 내게 서당기를 지으라 하시기에 누에 채반을 비유로 들어 이곳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들을 깨우쳐 준다.”라고 하였다. 정약전은 59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동생 정약용은 형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사람이었다. “외로운 천지사이에 우리 손암선생만이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탄식하였다. 흑산도의 주민들은 정성껏 정약전의 장례를 치루었다. 묘지명에는 돌아가신 뒤 3년 만에 율정(栗亭)의 길로 운송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절망 속에서 실천한 실학 정신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정약전은 실용에 도움이 될 목적으로 이 책을 편찬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이 책은 병을 치료하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재산을 잘 관리하는데 있어서 여러 전문가에게 진실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어보의 편찬에는 정약전과 함께 두 명의 인물이 관여했다. 흑산도에 살았던 장창대와 정약용의 강진 제자 이청이었다. 어보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흑산도에 살았던 장창대란 인물이었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창대(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실제 정약전은 장창대의 말을 어보에서 9군데나 인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청어에 대해서 “창대가 말하기를 ‘영남에서 나는 것은 등뼈가 74마디이고, 호남에서 나는 것은 등뼈가 53마디’라고 한다”라고 했다. 학술적인 고증으로 어보의 탄생을 조력한 인물은 정약용의 강진제자 이청이다. 어보에는 이청의 의견이 68군데 등장한다. 흑산도 현장에서 정약전은 주로 해양생물에 대한 관찰을 기록했다면, 이청은 문헌고증을 통해 그 내용을 보완하였다. 조선시대 ‘어류박물학’의 보고 해양박물학의 관점에서 자산어보에 보이는 새로운 방법론은 크게 4가지이다. 새로운 이름의 작명, 문헌을 통한 고증, 체계적인 분류방식, 세밀한 경험적 고찰이 그것이다. 어보에는 총 226종의 해양생물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중국어명 41종, 속명을 사용한 것 22종, 방언의 의미를 살린 것 32종, 직접 이름을 작명한 것 131종이다. 정약전이 책을 편찬하며 이름이 없는 해양생물의 명칭을 정한 것이 전체 58%에 이르고 있다. 문헌을 통한 검증의 경우 조선 어류의 박물지로 이 책에 인용되는 고문헌은 총 104종으로 파악된다.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의학, 사전, 문학, 경서, 역사, 박물학류 등이 망라되어 있다. 체계적인 분류방식도 어보의 주요한 장점으로 거론된다. 정약전은 해양생물을 비늘이 있는 종[鱗類]과 비늘이 없는 종[無鱗類], 껍질이 있는 종[介類], 잡류로 구분했다. 잡류는 해충(海蟲), 해금(海禽), 해수(海獸), 해초(海草)를 포함시켰다. 모든 해양생물을 망라했고 상하위 범주를 분류하고 있는 점이 독창적이다. 어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내용은 세밀한 경험적 고찰이다. 정약전은 자신의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관찰을 통해 해양생물의 크기, 형태, 색깔, 습성, 촉감, 맛 등에 대한 정보를 생생하게 글로 묘사했다. 또한 어보에는 현지인들의 전언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섬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을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었고, 모두 자신이 관찰한 것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싣고 있다. 이처럼 자산어보는 해양생물에 대한 과학적 관찰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정약전은 세밀한 경험적 고찰과 체계적인 분류법 등 이전의 어보들이 도달하지 못했던 성취를 이루었다. 유배지라는 절망의 땅에서 조선시대 ‘어류박물학’의 보고가 탄생했던 것이다. 글_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한국학의 기원을 연 실학자, 유희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를 살았던 실학자 서파(西陂) 유희(柳僖, 1773~1837)는 평생 학문 연구에만 전념해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저술을 한 인물이다. 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매산리가 고향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유희의 학문을 일컬어 “정주학을 토대로 하였으되 양명학과 연계되었으며, 청의 고증학의 학풍을 띠었다.”고 했다. 그가 남긴 방대한 학문적 업적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정주학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대 다양한 학문적 흡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후기 진보적인 신조류의 학문경향을 “구시구진 求是求眞”이라 명명한 정인보는 “유희야 말로 구시구진을 학문에서 실천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유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책이 언문지(諺文志)이다. 유희는 역대 학자들이 대부분 한자음을 연구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우리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정음학자인 정동유(鄭東愈, 1744~1808)로부터 문자 음운학을 배웠는데, 정동유는 어릴 적 스승인 강화학파 이광려의 문인이자 주영편(晝永編)의 저자이다. 유희는 30세 전후에 언문지를 저술했지만 원고를 분실했다가 20년이 지난 52세인 1824년에 1권 1책으로 다시 저술했다. 유희는 한글의 기원과 관련해 “언문은 비록 몽고에서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완성되었으며 실로 세간에서의 지극히 오묘한 것이다”라는 기록과 “세종 때에 사신에 명하여 몽고자양(蒙古字樣)에 의거하고 명학사(明學士) 황찬(黃瓚)에게 질문하여 지은 것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성호 이익의 몽고문자 기원설을 지지하였다. 유희는 한글의 기원이 몽골문자에서 유래했으며 ‘ㅇ’과 ‘이’ 혼용은 잘못이라고 했다. 또한 사성점은 한문에서는 필요하나 우리말에는 불필요하며, 된소리는 각자 병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또한 초성, 중성, 종성의 문자 음운을 새롭게 해석하고 표기하여 한자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도록 한글을 교정할 것을 강조했다. 유희의 언문지는 이전의 한자음 위주의 연구에서 벗어나, 우리말 위주의 연구를 시도한 것으로 조선 시대 국어학 연구서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희는 그간 언문지(諺文志)나 물명고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로만 소개되어 왔다. 그가 한글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긴 하지만, 그 밖의 업적이 소개되지 못한 것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버금가는 규모의 거작인 문통(文通)이 행방불명 상태였기 때문이다. 위당 정인보가 유희의 문통을 “평생 저술의 총회(總匯)된 거편(鉅篇)”이라고 소개한 바 있지만, 위당이 납북되면서 문통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2004년 필사본 문통이 발견되면서 박물학자이자 실학자로서 유희가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사도세자 명복 빌던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국가 보물 지정

사도세자 명복 빌던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국가 보물 지정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던 불전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華城 龍珠寺 大雄寶殿)’이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화성시에 있는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42호로 지정했다고 14일 밝혔다. 화성 용주사는 1790년 2월19일에 공사를 시작해 9월29일 불상을 봉안했다. 왕실이 공사를 발주하고 관청이 재원을 조달하는 등 건립 계획부터 공사감독까지 일관되게 국가가 주도한 관영공사였다.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현륭원의궤, 조선사찰사료 등 관련 사료에는 해당 공사 내용과 재원, 집행, 인력 등이 기록돼 있다. 대웅보전은 용주사의 주불전으로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지만, 외부 단청을 제외하고는 잘 보존된 상태다. 정면 3칸ㆍ측면 3칸 규모의 대웅보전은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 등에 짜 맞추어 댄 구조물 공포(?包)가 여러 개인 다포계(多包系)에 팔작지붕 등 18세기 불전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장대석을 사용한 기단과 원형주좌(圓形柱座)를 둔 사각의 초석, 지붕의 용마루 끝에 얹는 조형물 취두(鷲頭), 용머리 모양의 장식기와인 용두(龍頭), 궁궐 건축 또는 바람이 센 남부 해안지역 건물의 지붕마루 전체를 회로 감싸는 양성바름 기법 등 시공에 정성을 기울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권위와 격식, 시대성을 잘 간직한 불전”이라며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관리자 등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류설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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