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환자복을 입은 여인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당신은 쇼펜하우어의 행복 론을 읽은 적 있나요? 아직 읽지 못했군요 읽지 마세요 뻔한 이야기예요 행복은 잠시일 뿐 인생의 대부분은 고통이랍니다 그런데 이곳은 참으로 편안해요 누가 무어라하든 내가 왕비예요 저기를 보세요 나를 지켜주는 근위병들이 있고 내 수발을 들어 주는 궁녀들이 있어요 이곳은 나의 알람브라궁전입니다 성채가 보이는 계단을 오르면 헤네랄리페 정원이 보이고 오래된 연못에서는 사자의 분수가 슬픈 눈물을 마구 쏟아내고 있어요 지금, 알람브라 궁전을 추억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네요 그렇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아치형 창문 사이로 저렇게 맑은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잖아요 이제는 동정의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마세요 시간을 쪼개먹으며 아귀처럼 살아가는 성 밖의 백성들이 불쌍해요. 정겸
한낮에 여행 갔다 이제야 돌아온 바람마저 잠 못 이루고 잔치를 한다 보랏빛 꽃 피우는 소리 깨알처럼 여무는 밤 그리운 이 곁으로 동그라미 굴리다 산 허리에 등 기대 있는 듯 없는 듯 새벽이 오는 소리에 제 발자국 덮는다. 민병주
하늘을 향한 웃음으로 아름다운 자태로 태어나 활짝 핀 당신은 전설 속에서나 현세에서나 철마다 꽃들의 명예를 지키고 있구나! 따가운 뙤약볕을 두 팔로 끌어안고 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휘영청 허리를 비틀며 세월의 아픔을 딛고 기다림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구나! 행여나 님이 올까 낮에는 태양을 향해 밤에는 별을 향해 화려한 영광을 속으로 감추고 소리 없는 울음이 화려한 꽃으로 피웠구나!
물 흐르는 빛 어딜 가는 줄 모르고 가고 잎이 돋지 않는 아름드리 나무의 잃어버린 날을 줍는다 보리 겨장국도 없어 못 먹던 날 나를 잊기도 하고 때로는 읽기도 하며 모진 길 참고 둥글게 살아온 건 집사람의 사랑이 빚어낸 그 무딘 한 톨을 가꾸고 온 마음 여기까지 오게 했다 생각할수록 흐르는 물소리 되어오고 나는 새 깃털같이 날아간 세월 아내를 쳐다 볼 때 마다 얼굴에 쓰여진 글! 안쓰러운 가슴으로 일렁이며 오는 내 눈빛에 고이는 눈물 억척스런 지난 삶이 흐르고 있다. 김석규화성 출생. 문예비전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몸 속이 고장나면 건위정이 최고였듯 내 어릴 적 외상엔 무조건 ‘아까징끼’ 빨간약 그것 하나면 울음도 절로 그쳐졌지 약 바른 무르팍을 눈물 뚝뚝 흘리면서 한참을 들여다보다 어느새 다 잊고서 동무들 뛰노는 곳에 신명나게 달려가던 지금도 그런 약 있었으면 참 좋겠다 마음 다쳐 힘들 때면 먹거나 바르는 약 따뜻이 문지르기만 해도 다 낫던 그런 손도 김애자강원도 춘천 출생. (수필), (시). (시조)으로 등단. 시집 , 산문집 . 한국경기시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수원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아무리 문 걸어도 밀려오는 우기의 구름 내 안의 뜰 안에는 불면폭우 쏟아진다 일시에 지나온 삶이 회오리친다. 환시 보듯 발 딛을 틈도 없이 흔들리고 출렁이는 이 밤의 하얀 바다 조심스레 배 띄우고 만 갈래 시름 조각들 모두 실어 힘껏 민다 수면 깊이 깔려 있는 물풀들이 깨어난다 어느새 하늘가엔 어스름이 눈을 뜨고 어둠 속 샛별이 돋듯 푸른 꽃을 피우고 싶다 허허로운 시간들이 물밀듯 파고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애잔한 풍금소리 가끔씩 낮은 테너로 깊고 더 깊게 깨우고파 송유나
찬밥으로 김밥을 만든다 찰기없이 극돌던 밥들 천천히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 중에 마음 통하는 사람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손이 닿고 숨결이 닿고 생각이 닿으면 하나가 되어 갈 수 있는 일 오지 않은 내일을 달달 볶고 있기엔 눈물나게 아까운 시간들 찬밥이면 어떻고 더운밥이면 어떠리 모난 정이라도 돌돌 말아 정성껏 가다보면 맛스러워 지는 걸김안나
가슴속에 끌어안고 있는 마음이 한 여름 잡초처럼 셀 수 없이 빼곡하다 정작 꺼내어 쓸 것들은 몇 푼어칠까 행복을 찾아 다 소용하다지만 엉킨 길을 뚫다보면 백발이 먼저 오고 마는 것을 황혼에 서린 이 상념들 버릴 길이 멀고멀어 오늘은, 내일 먼동이 트기 전에 서둘러 버리러 가자.
속으로 흘렀을까 갈증 타던 고향길이 가윗달 떠오르자 몸살 앓는 한반도여 탯줄은 끊어도 이어지는 강물인가 정인가 길 잃은 철새인가 절로 메던 가슴인데 광교산 그 맑은 물 수월래 춤을 추자 은하가 흘러 내려와 산 넘어 벗이 왔다 서투른 넋두리도 흥에 겨워 술 익는다 풀 수 없는 매듭이 어느 결에 삭았어도 지새는 귀뚜리 울음에 고향길을 거닌다 안희두충북 청주 출생. 시집 (1987), 로 등단. 시집 등 7권, 시조전집 등 3권.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경기시조시인협회 회장, 수원문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신갈중학교 교장.
산수유, 얼레지가 봄의 전령인 줄 알았더니 그건 모두 그리움이더라 밤하늘만 보면 북극성, 카시오페아, 오리온 찾기가 좋았더니 그것도 모두 그리움이더라 복자기, 은행잎이 예쁘게 물든 길도 온통 그리움 뿐이더라. 첫눈 오는 날 무조건 좋아서 좋은 줄 알았더니 그것도 진정 그리움 때문이더라
수없이 잎을 피우고 작은 꽃잎에 담긴 빛과 이슬로 이 봄날 내내 마음 졸이다가 글썽한 한순간을 지나가며 초여름 턱을 넘어온 봄이 가나 보다 물소리, 바람소리. 거문고소리, 그리운 당신 메아리로 밀려올 때. 김수연
물안개 자욱히 내려앉은 강둑 구름 밀려가는 햇살 아래 어머니 긴 그리움 내려 놓습니다 가슴에 카네이션 한번 달아드린 기억없이 오월은 또 왔다 갑니다 보리타작으로 껄끄러운 적삼 벗으시고 강물에 몸을 담궈 배고픈 가난과 고달픈 시름을 씻고 돌아오는 밤 강 둑 바람은 시원했지요 하늘엔 초록별이 총총 떠 있고 어머닌 내 손을 잡으시고 별을 헤며 노래를 했지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이 오월이 다 지나기 전에 어머니 노래가 잠든 그 곳에 가고 싶습니다 가서 다시 한번 별을 헤던 어머니의 노래가 듣고 싶습니다김도희황해도 출생,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경기여류문학회 회원,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누군가 말했지 늘 감사해도 모자라는 줄 모르고 높은 곳 바라본다고 그래, 지금 태어나 새로운 초록 바늘 잎 달았어 멀리서 안아주고 언제나 기다리고 의연히 서있는 영원한 믿음 살 오르는구나 가까이에 다가서면 어디, 별빛 쏟아져 내려 푸른 생각 펼쳐라 청청한 부드러운 소리 흔들어 깨웠지 네 곁에 서서 바라다 보는 오월 나에게는 아침 편지요 어렵사리 손에 잡은 세상 큰 맘 먹고 용기 내었다 소나무처럼 청정한 기상으로 산고수청의 어진 솔향 한껏 마셨네 스쳐가는 바람마저 꿈길 인 듯하다 성명순 내 가슴의 끝, 네가 살다 뿌리 내릴 초록 긴 강이다. 충남 보령 출생. 시집 시간 여행 나무의 소리. 한국문인협회 인문학콘텐츠 개발위원,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경기문학포럼 회장. (주)에이스케미컬 사회공헌팀 상임이사. 황금찬문학상, 제9회 농촌문학상, 수원예술인상 수상.
바다가 끝나는 곳에서 그 메마른 살같을 붙잡고 있는 나문재를 본 적 있는가? 네 귀퉁이의 바람이 성난 파도의 머리채를 잡아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고 난 후 나는 잠깐 바다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뿌리에 선연한 붉은 피가 고통스러웠던 그의 삶을 말해 주었다 물이 닿았던 곳마다 쩍쩍 갈라져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 매일밤 바다를 울부짖게 했음을 뭍이 드러나고 알았다 모든 상처는 고통이 지나가고 난 후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비로소 온 몸으로 흔들리며 삶은 먼 데 바다로 가는 법을 스스로 깨닫는다 돌 갓지난 딸을 막 재우고 나온 어린 새댁 쭈그리고 앉아 나문재를 뜯는다 푸르게 빛나는 맨발이 처연하다 그녀의 젊음으로 피워낸 또 하나의 어린 바다가 세상의 어느 구석에서 이제 막 움트림을 시작할 것이다 멀리, 밀물이 들어오는 신호가 눈물처럼 깜박인다 김미선 제32회 경기여성 기예 경진대회 백일장 시부 최우수작품
밥을 먹을 때면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한다 밥알 하나하나에 농부들의 소금내와 한 끼분의 양식을 위해 수고하는 나의 땀도 함께 보이기 때문이다. 입 안 가득 단맛을 우려내면 무뎌진 혀끝에 감도는 황홀함 수고로운 나를 잊는 것도 잠시일 뿐 빛과 어둠이 뒤섞여 곡식이 여물 듯 이 땅에 발붙이는 세상 어디쯤 나는 홀로 익어가는 것일까 데카르트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고 하였지만 만물의 뿌리는 나 자신이라 여기며 오늘도 나에게 보시를 한다 밥알 한 톨 남기지 않는다이계설평택 출생. 시와 의식으로 등단. 시집 가면놀이 습기를 말리며 그녀를 소각한다 한반도를 적시는 고구려의 숨결 서서 꾸는 꿈 가시고기. 제12회 한국문인협회작가상 수상.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이사.
사립문 밖을 나서면 함초롬히 피어있는 꽃밭 사이로 굽이굽이 열린 좁은 오솔길 그 길을 걷고 싶다 수박 참외가 널브러지고 콩 고추 대궁이 어우러져 있고 호박 오이가 새치름히 자리 잡은 그 사이 길을 걷고 싶다 상추와 푸성귀를 벗하며 반딧불과 함께 밤을 지새우고 매미 소리에 낮잠 청하다가 고추잠자리 너울춤 좇아 그 길을 함께 걷고 싶다 고정현강원도 정선 출생. 로 등단. 시집 . 한국문학발전상. 오산문인협회 공로상, 한국미소문학 대상 수상. 오산문인협회,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한국미소문학작가회장
지난밤 바람자고 떠난 사릉개울 물방울 초롱 초롱 던져 싹 틔우는 아침 햇빛 쏟아지는 한나절 징검다리 건너 조약돌 줍는 아이들 낮달 하늘바다로 흔들리고 검은 고양이 갈대숲 기어 나와 목젖 축이는 봄볕.홍중기양주군 출생. 1982년 시집 로 작품 활동 시작. 월남 나트랑. 사이공 방송국 근무. 개인 포엠 콘서트 6회 개최. 남양주시인협회 명예회장.
기상 캐스터는 오늘 날씨로는 멋부릴 일 아니라며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점심밥 먹은 후 전조현상이 드디어 발동을 시작했다. 회오리바람이 뱅뱅 세 번 코를 잡고 돌더니만 떨어진 벚꽃잎들 일순간 말아버렸다. 그리고는 세찬 비가 사선을 그으며 내리더만 직립으로 양이 넘치도록 내렸다. 오후 내내 심술을 더해 돌풍으로 돌변했다. 아직 떨어지지 않는 벚꽃들만 떨듯이 딸랑딸랑 움직였다. 방극률전북 남원 출생. 2001년 시 등단. 2011년 수필 등단. 2017년 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수원문인협회, 경기문학인협회 회원. 서정문학 작가회장. 시집 외 3집.
연분홍 꽃등 알알이 불 켜들고 그렇게 봄을 밝히셨거든 가시는 걸음은 고요해야지요 바람이 꽃잎을 휘몰아 간다고 목숨이 다 한 것은 아니지요 꽃 진 자리 아물고 나면 작은 날개 돋아날 테고 푸른 기도로 솟아오르면 열린 하늘, 비원의 숲은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쌓아올린 탑길을 따라가다 보면 해거름 널브러진 슬픈 길목에서도 꿈꾸어 노래하시던 청산을 만나실 테고 겁 없이 불어오던 비탈 바람 잠재울 솔수펑이는 있겠지요 여기까지만 견디시면 됩니다. 어머니
햇볕 화사한 봄날 주말 광교산 둘레길 벚꽃 먼 곳 가까운 곳에서 어른도 아이들도 모두 몰려나와 벚꽃에 홀리고 봄 향기에 취했다 유모차를 미는 젊은 부부 이리저리 뛰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사진 찍기에 바쁜 연인들 흐르는 세월이 아까워 두 손 꼭 잡은 어르신 연로한 노파를 부축하는 중년 여인 머리 위엔 화려한 꽃의 미소 광교산자락 연녹색 숲 사이로 호수는 봄바람을 실어다 주며 “모두모두 행복하라” 한다 아! 나도 그리운 님 손잡고 걷고 싶다. 이계순김포 출생. 성균관대학교 법정대학 졸업. 법무부 근무. 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시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