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 대문 밖에는 어머니를 닮은 작은 꽃밭 해마다 이맘때면 화단을 덮으며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자식을 보듬듯 어루만지며 말없이 속삭이던 어머니 올해도 작은 꽃밭 가득 씨를 뿌리지 않아도 피어난 들국화 주인 없는 텅 빈 그리움만 가만히 곁으로 들어온다.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시인마을 동인. 한국경기시인협회 사무차장.
긴 밤이었다 초침이 경계를 가르던 그 시간 나는 잠 속에 있었다. 욕심내어 간직해야 할 그 무엇이 없어 새해를 그렇게 맞았다. 더 겸손하게 아침이면 비워진 일과를 채우기 위하여 또 누구를 기다린다. 어제 본 그이라도 새롭게 만나는 것처럼 만나고 살갑게 안부를 섞는다. 같이 살아있어 서로에게 감사해하며 따뜻한 차 한 잔 나누면 한 나절이 간다. 때 마친 오후, 또 누굴 기다리는 그 하루가 햇살처럼 소중하다. 최복순 서울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연애편지처럼 소리 없이 눈이 온 새해 첫날 깨끗한 눈을 보니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진다 하나, 둘, 셋, 넷, 빙 돌려가며 찍은 꽃무늬 발자국에 향기가 고인다 흰 도화지에 그린 자화상, A4 용지에 써내려간 계획처럼 손 타지 않은 한 해를 열며 숫눈 위에 발자국을 찍는다 사랑이 시작되었다 최대희(본명 최정희) 평택 출생. 1999년 작품활동 시작. 시집 치즈사랑 선물 그리움은 오솔길에 있다 가곡 그대에게 가는 길경기문학인 대상 경기시인상 농촌문학상 등 수상 국제PEN한국본부 평화작가위원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돈을 빌려 쓰라 한다 갚을 능력도 없는 시인에게 정을 빌려 쓰라 하면 얼씨구나 뭉텅뭉텅 빌리겠지만 세월 빌려 쓰라 하면 절씨구나 자란자란 빌리겠지만 건넛산은 제 등허리 넘어 하늘을 내어준다 가슴 가득 출렁이는 넉넉함을 정 굶으면 쓸쓸함에 쓰러지는 나그네에게 추억 나들이에 더 바랄 것 없는 강 아래까지 붉게 물들이는 하늘을 내어준다. 정순영 경남 하동 출생. 1974년 시전문지 풀과 별천료. 부산시인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세종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시집 사랑등 8권. 부산문학상, 한국시학상 등 다수 수상.
누구에게나 사다리 하나쯤 있지 내게도 사다리가 하나 있어 손끝 자락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 놓인 반지르르한 홍옥 같은 꿈에 닿기 위해 밟고 올라가는 이동식 계단 그러나 아무리 길게 사다리를 늘여 올라가도 손에 잡히는 건 푸른 먼지 한 톨 그마져도 슬쩍 바람에 뺏기고 내려올 때면 괜찮아 넌 할 수 있어란 후렴구를 부르곤 했지 생각해보면 사다리는 내게 버팀목이야 비상을 꿈꾸며 붙인 날개의 촛농이 녹아 추락할 때 사다리는 공중에서 늘어져 있었고 강을 건너지 못해 울고 있을 때 출렁다리로 누웠지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네게로 가는 길을 한 달음으로 달려 갈 수 있도록 철길을 만드는 거지 그러기에 나는 너란 문자에 닿기 위해 오늘도 사다리를 놓지
훈데르트바서의 집은 굽이치는 물결이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은 한 굽이 돌 때마다 바람이 일고 한 고비 쉴 때마다 풀냄새가 짙어졌다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던 나는 우주 밖으로 이어진 훈데르트바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푸른곰팡이에 녹색 이끼를 입히면서 눈물에도 색깔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졌고 수많은 창으로 이어진 소박한 거짓말에도 적의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 동안 너무도 많이 버려졌으므로, 황사 먼지에 가려져 꽃 피울 수 없는 날들을 생각하며 나는 울었다 나무 그늘로 차고 넘치던 물의 기원을 이젠 먼 날의 전설쯤으로 기록해야 할까 훈데르트바서의 초록 물방울들이 그늘을 향해 뛰어 오른다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계단 사이사이 그가 심어놓은 뿌리에선 막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숨죽인 불꽃들이 푸르지 못했던 잠에서 깨어난 듯 뿌리를 뻗어왔다 날선 곡선들이 서서히 나를 감고 휘어졌다 김창희 강원 평창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졸업. 1999년『시대문학』시 등단.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동화스피치협회 부회장. 문학아카데미시인회 고문,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문학아카데미회장 역임. 시집 짧게 혹은 길게 외 한국시문학상, 숲속시인상, 한국동화구연가 대상, 수용문학상(평론), 한국시학상 본상 수상.
먼 길 가신 후 자주 보러 오시네 힘내라 길 잃지 마라 도와줄 건 뭐 없니 다시는 걱정마시래도 또 오시는 아버지 김경옥 2011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월장원 2012 한국시조시인협회 전국백일장 장원 2013 가람백일장 차상 2015 《유심》 신인상
처음 네가 돌이었을 때 너는 날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가슴으로 널 안았었다 내 가진 모두는 네 것이었고 네 귓볼에 불어넣는 내 숨결도 가슴처럼 떨리는 작은 손짓과 물너울같이 출렁이는 이 몸까지 절절하게 너를 원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한다 내게 사랑한다 말해 줘 깨어나라 그리고 나와 함께 가자. 이애정 책과 인생(수필) 문학시대(시)로 등단. 시집다른 쪽의 그대 이 시대의 사랑 법. 한국문인협회 유족설립위원회 위원. 녹색문학상 추천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차장.
먼 길 가신 후 자주 보러 오시네 힘내라 길 잃지 마라 도와줄 건 뭐 없니 다시는 걱정마시래도 또 오시는 아버지 김경옥 2011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월장원 2012 한국시조시인협회 전국백일장 장원 2013 가람백일장 차상 2015 유심 신인상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네 곁에 나를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내 곁에 너를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네가 나였고 내가 너였는데 신발창 밑에 붙은 껌 딱지처럼 거슬리는 것들- 애를 써도 떨어지지 않는다 문득, 네가 그리워지는 날은 애꿎은 전화기는 몸살을 앓는다 잊고 있었던 끈적거림, 뇌파를 자극하며 순간순간을 괴롭히고 있다 따뜻한 유자차 한 잔으로 무심한 마음 나눌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아집,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오월의 간이역에 당신이 내리던 날 목숨 다한 꽃의 비상 잠시 빛나는 그 모습 한 평생을 바라보던 당신에게로 이제 고개 들어 마주합니다 바람으로 가득 찬 내 사랑 까칠한 나무피를 벗겨낸 자리에 복사꽃 속에 숨은 이름 엉엉 빠지는 그리움에 무작정 용서했던 기억만으로 당신에게 나는 갑니다 한 줄 흔적도 없는 삶을 왜 그리 분주하고 힘들게 밟아 왔는지 당신은 알면서도 그냥 이 계절 한창 피어오르면 되는 것을 그러다 놀란 듯 떨어지면 되는 것을 오랜 세월 혼수상태 된 희망 그 속에서도 붉은 등으로 우뚝 서서 환한 살빛을 쏘아대는 당신은 풍성한 표적입니다 사랑하라고 사랑하라고 떠나기 전에 사랑하라고 바람에 순종하는 문풍지처럼 오늘은 복사꽃 바람이고 싶습니다. 차경녀 한국문학정신으로 등단.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낭독시200편(CD)제작 영상시. 부천여성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부천지부 감사. 시예술방송협회장.
기차가 들어올 철도 쪽 그늘진 플랫폼 바닥이 얼어 웅크린 겨울 강 빛이라 잠시라도 햇볕 든 쪽으로 물러서서 겹겹 껴입어 몸 부푼 둥실한 그림자를 데우며 짧아서 절실한 따사로움을 조우 차디찬 공기를 가른 기차가 속도를 늦추어 티켓을 배정받은 기다림의 숫자 앞에 멈추고 데우던 그림자를 재빨리 지우며 승차계단을 오르는 발목까지 한기 아리도록 휘감아 시린 겨울 플랫폼 김철기 1983년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 창립. 그리다, 꿈빛 나이테, 불켜기 등 시집 12권. 탐미문학상 본상, 경기도문학상 본상, 한국시학상 등 수상. 국제PEN한국본부이사 겸 PEN경기지역위원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시서화진흥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지도위원 겸 상임이사.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한국시문학아카데미 상임이사.
어둠이 뒤척이는 오래된 골목 어귀로 재개발 전단지만 헤진 벽 기우는 밤, 충혈된 가로등 불빛 찬바람에 출렁인다 아버지는 달팽이관처럼 등짝 웅크린 채 소리 없는 방에서 주파수를 맞춘다 듬성듬성 빈틈을 보이는 정수리 위로 반질하게 새어 나온 하얀 안테나들 허공에 온기 없는 숨들이 공명하자 축축한 꿈결 그 위로 바람이 분다 일자리가 없는 날들을 새기듯 누런 벽지에 촘촘히 돋는 곰팡이들 씨실과 날실이 어긋난 달력에는 너덜너덜해진 날짜들만 건져지고 껍데기 같은 집 한 채에 한숨들은 방바닥 여기저기 점액질처럼 자꾸만 들러붙는다 고장 난 보일러 배관 이따금씩 쇠쇠 차가운 목울대 세우고 우는 밤 아버지가 다시 둥글게 몸을 웅크린다 아버지가 주파수를 맞춘다 더듬이 번뜩이는 아버지의 정수리 그 꼭대기마다 파동처럼 바람이 분다 천천히 안테나가 선다
가을이 간다 스산한 자락 하나 마저 거두려 한다 얼마나 많은 어둠이었나 얼마나 많은 낙엽이었나 모진 겨울의 문턱에서 오스스 떨어보는 외로운 단념 하나 영이별의 몸짓으로 떠나보낸 사랑인데 언제 내게로 와 다시 둥지 틀었던가, 가을은 되풀이되는 결별 이 쓸쓸한 불가사의 김애자 강원 춘천 출생. 시대문학(수필), 예술세계 (시), 시조시학(시조)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수원문학상 작품상, 경기시인상, 경기PEN문학 대상 수상. 산문집 그 푸르던 밤안개 추억의 힘, 시집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피었다 지는 꽃엔 씨앗이 지문이다 붙들던 푸르름엔 사랑끝이 단풍이다 어떤가 가을만 한가 그대에게 이 가슴이 1991년 박재삼시인 추천 시조등단, 2019 문학과 의식평론등단, 한국문인협회 감사세계한인작가연합 상임이사, 문학과의식운영위원장, 국제PEN한국본부,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현대문학사조편집위원, 시집 내 안의 나와 마주앉아 사랑, 그 언어의 무늬 산사에서 길을 묻다, 에세이바람난 산바라기 그리움으로 가는 편지1.2.3 사랑하는 나의 작은 우주야
이정표를 따라 달려온 휴휴암 거북모양 바위와 지혜의 보살상 우뚝 서있네 백사장이 없는 바닷가 너른 마당바위 위로 바닷물은 얕게 흐르고 있어 먹이를 흩뿌리면 재빨리 모여드는 물고기떼 불경소리, 목탁소리에 귀 기울이며 물고기들은 먼 바다로 나가지 않네 휴휴암이라 부를 때마다 감도는 휘파람 소리 편안히 쉬며 방생 기도하는 물고기 신도가 사람보다 많은 휴휴암 문연자 경기 옥천 출생. 문학세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학사 편찬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문학세계문인회ㆍ소우주시회 회원. 소정문학 동인.
찬밥으로 김밥을 만든다 찰기없이 극돌던 밥들 천천히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 중에 마음 통하는 사람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손이 닿고 숨결이 닿고 생각이 닿으면 하나가 되어 갈 수 있는 일 오지 않은 내일을 달달 볶고 있기엔 눈물나게 아까운 시간들 찬밥이면 어떻고 더운밥이면 어떠리 모난 정이라도 돌돌 말아 정성껏 가다보면 맛스러워 지는 걸 김안나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용인지부부지부장. 한국수필가협회 사무국장.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문학의 집 서울회원. 시집 나는 외 3권.
죽지 말고 잘 살아야한다 강가에 나와 강물을 들여다보며 방생한 내 분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하늘 한번 쳐다보며 훨훨 날아가 잘 살아야 할 텐데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하고 걱정이 되어 날개 달아준 너의 이름 불러본다 시집갈 때, 어머니 내 두 손을 꼭 잡고 하신 말씀 가서 잘 살아야한다 살아보지도 않고 눈물만 흘리던 난 지금 눈물 같은 시를 쓰며 살고 있다 내 분신, 내 詩들아! 어디에 있던 죽지 말고 꼭 살아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 지은경 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한국비평가협회 이사, 세종시예총 자문위원, 아태문인협회 명예이사장, 신문예문학회 명예회장, 황진이문학상 대상자유시인협회상 등 수상. 시집숲의 침묵 읽기등 12권, 평론집의식의 흐름과 그 모순의 해법 칼럼집알고 계십니까 등 저서 30여권.
어디로 갈까 길 한복판 고개 숙인 가랑잎들 힘없이 구른다 바람 불면 바람 분다고 갓길에 멈춘다 어디로 갈까 나는
가을은 소리 없이 문턱을 넘어 가만히 내게로 왔습니다 기승스럽던 더위가 한 풀 꺾인 것을 보고 그것을 짐작 했습니다 매미의 요란한 울음소리로 가을이 가까이 왔음을 확실히 알았지요 서둘러 얇은 긴 소매의 옷을 꺼내 입어야겠군요 모양 없이 아무렇게나 모자 속에 쑤셔 박았던 머리도 깔끔하게 다듬어 보겠습니다 아직 덜 익은 사과 몇 알과 두어 웅큼의 풋대추를 멜빵 달린 가방에 넣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보고픈 친구를 찾아 가겠습니다 사과의 신 맛을 생각하니 입에 침이 도네요 보면 먹어야 늙지 않는다는 대추도 한 알씩 나누어 먹겠습니다 한가롭게 원두막에 퍼질러 앉아 설탕과 크림이 섞인 커피를 종이컵에 마시며 우린 너무 촌스런 할머니들이 되어버렸다고 서로 흉보며 위로하며 목젖이 보이도록 함박웃음을 웃겠습니다 그것은 가을이 소리 없이 내게로 왔기 때문입니다 김도희(본명 김인숙) 스토리문학으로 등단.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