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훈춘사건을 아십니까”

느닷없이 총을 든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명분은 마적 토벌이었다. 그런데 끔찍했다. 처참한 학살도 이어졌다. 끊임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였다. 이 대목에서 참으로 이상한 점이 있다. 습격을 감행한 병력이 일본인들만 골라 무차별 살해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영사관에서 일본 경찰 간부의 가족 등이 이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전대미문의 천인공노할 사건이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사건이 발생한 건 중국 만주의 한복판인 훈춘이었다.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동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도시다.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에선 조선인이 많이 건너와 상주하던 곳이다. 주민의 80%가 조선인이었다. 3·1독립운동 이후로는 더 많은 조선인이 이주했다. 그래서 독립군도 결성되고 항일 무장투쟁도 펼쳐졌다. 총독부 입장에선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던 곳이다. 그러자 일제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 병력을 투입할 구실을 꼼꼼하게 찾기 시작했다. 아주 흉악한 모략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활동 중인 중국인 마적 수령 장강호(長江好)를 매수해 마적단 400여명이 훈춘을 공격하도록 종용했다. 마적들은 최우선으로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그리고 시부야(渋谷) 경부의 가족 등을 포함해 일본인 9명을 살해했다. 그것도 부녀자들을 말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마적 토벌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나남사단(羅南師團)을 비롯한 대규모 군대를 훈춘으로 출동시켰다. 이어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를 무차별 사살했다. 한민회와 독립단조직 등도 철저하게 파괴했다. 독립군의 활동 기반으로 여겨지던 조선인 학살에 역점을 뒀다. 훈춘에서 조선인 242명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을 시발로 일본군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105년 전인 1920년 이맘때 발생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또다시 아픔을 겪는다는 교훈은 그래서 오늘도 유효하다.

[세상읽기] 웨이팅문화

일반적으로 줄서기, 긴 대기시간은 고객 서비스 만족도를 낮추는 요소로 여겨졌다. 대기시간이 길어지면 부정적인 감정이 유발되고 고객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돼 서비스 자체의 품질이 높더라도 전체적인 경험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비자는 시간을 낭비한다고 느껴 다른 브랜드나 옵션으로 전환하는 주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긴 대기시간을 뜻하는 웨이팅이 하나의 문화로 잡기 시작했다. 대기줄이 길다는 것은 서비스나 제품이 인기가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한정된 상품이나 특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 이러한 기다림은 소비자의 기대감을 증폭시켜 더 큰 만족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애플 아이폰이 출시될 때 길게 늘어선 줄은 희소성과 트렌드 리더십이 강조돼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 소비자는 서비스나 제품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는 심리적 효과가 발생한다. 스타벅스 리저브 역시 한정된 메뉴와 특별한 메뉴로 소비자의 웨이팅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고급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요리 경연 콘텐츠인 흑백요리사의 경우 출연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예약이 매우 힘들어지자 식당 예약 양도권을 웃돈을 얹어 판매하는 틈새시장이 생기기도 했다. 기다림=희소성의 등식이 작동하는 한 이는 또 다른 소비의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웨이팅이 흔한 현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세대 특징인 소비와 경험에서 독특한 가치를 추구하며 웨이팅을 단순한 기다림 이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정판’과 ‘독점적’인 것에 큰 가치를 둔다. 웨이팅이 길수록, 희소성이 높을수록 그 서비스나 제품이 특별해져 더욱 갈망하게 된다. 웨이팅은 순서대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원칙이 통하는 상황에서 나의 오랜 시간 투자를 통해 얻어낸 일종의 결과물이므로 이를 인증샷과 함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랑할 수 있는 콘텐츠로 변환할 수 있다. “나는 이런 특별한 것을 경험했다”는 훌륭한 SNS 스토리가 된다. 단순히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는 과정을 경험으로 인식하는 것은 줄 서서 기다리는 것도 새로운 콘텐츠가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 트렌디한 것을 탐구하는 세대들에게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웨이팅 열기는 다수의 소비자가 만들어내는 유행을 따라가고자 하는 편승효과의 얼굴을 하고 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왜 인기가 많은지 호기심이 발동하고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자 하는 사치재의 새로운 방식일 뿐이다.

[천자춘추] 21세기 로컬 골드러시

행정안전부는 2021년 10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시·군·구 중 89곳을 인구소멸지역으로 지정했다. 또 우리나라의 낮은 출산율은 2020년 인구 증가율을 마이너스로 돌아서게 했고 인구소멸지역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저출산과 지역소멸 위기는 우리나라의 미래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소멸 위기, 혹은 붕괴 위기를 겪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 부족한 일자리와 정주여건 등에서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 지역이 가진 가치를 찾아내고 상품화해 지역 공동체와 함께 발전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불리는 기업가다. 이들은 로컬 자원을 활용하고 비즈니스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지역소멸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의 효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로컬(local)이라는 단어는 글로벌(global)과 대비되는 단어로 보편적이기보다는 독특함과 본연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 개념이다. 일반적이지 않고 지역만의 환경이나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브랜딩이 가능하고 아무데서나 사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집객 능력도 좋아 지역 활성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공장이나 기업을 유치하는 것도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지만 개발이 아닌 보존과 활용을 통해 지역이 가진 유무형의 자산을 가꾸고 상품화하면 지역 발전에 직접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장단콩으로 유명한 파주의 사임당두부협동조합은 법원읍 상인들이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해 설립했다. 지역의 식재료를 사용한 두부 요리를 판매하고 장단콩 두부 체험 등을 진행하는데 해외 방문자가 늘어나는 등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경험을 통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파주 장산의 독수리 식당은 멸종위기종인 독수리 보호 운동으로 시작됐는데 수백마리의 독수리와 재두루미 등 철새가 찾아오면서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생태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로컬자원은 발굴하기에 따라 엄청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런데 로컬의 가치는 숨어 있고, 로컬크리에이터 같은 기업가의 발굴 노력도 필요하고, 지역의 공간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지역공동체와의 협력이 필요하다. 소멸될 것 같은 지역의 숨은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21세기 로컬 골드러시가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김종구 칼럼] ‘경기도 국밥집’ 회견에 ‘경기도’는 없었다

신선했다. 의미도 있었다. 그의 말대로 ‘1% 경제’다. 경제성장률, 수출증가율, 민간소비증가율이 1%대다. ‘1%짜리 대한민국’을 걱정했다. 여기서 서민을 직격하는 건 소비증가율 1%다. 당장 가계(家計)를 타격한다. 식당, 가게마다 아우성이다. 이런 때 찬물을 부은 계엄 정국이다. 소상공인의 연말 특수가 다 날아갔다. 이런 때 등장한 특별한 기자회견이다. 김동연 경기지사의 ‘신년 간담회’. 설렁탕 먹는 식당이었다. 그 뜻을 칭찬할 만하다. 이런 배려조차 서민에겐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날 경기도 국밥집엔 경기도가 없었다. 강조된 화두가 ‘중앙정부·정치’였다. 모든 언론이 ‘대한민국 비상 경영 3대 조치’를 받아 적었다. 50조원 슈퍼 추경, 트럼프 2기 대응 체제, 기업 기 살리기…. 전부 중앙정부에 전권이 있는 일이다. 표현부터가 ‘요구’다. ‘(추경) 늘려야 한다’, ‘(대응체제) 제안한다’, ‘(기업 살아나게) 해야 한다’. ‘하겠다’는 약속이 있긴 했다. 대외신인도 회복을 위한 역할이다. 다보스포럼에서 다양한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유럽·미국 언론인들과의 대화의 시간, 유니콘 기업과의 자리 등이 예정된 것 같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하겠다고 했다. 앞서 김 지사는 외국 지인 2천400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영국·네덜란드 주한 대사도 만났다. 그만의 국제 관계 챙기기다. 이미 노력을 평가한 바 있다. 그럼에도 구멍은 있다. 경기도정이다. 작금의 도정 하나를 짚어 보자. 경기도·지자체 간의 경기남부광역철도 논쟁이다. 용인특례시 이상일 시장이 석 달째 따지고 있다. -수원·용인·성남·화성 주민의 숙원이다. 2023년 김 지사가 협력은 약속했다. 그런데 국토부에 올린 건의문에 참여 안 했다. 후순위로 미룰 땐 시장들과 협의도 안 했다…. -모두 맞진 않다. 이 시장의 욕심이 과하긴 하다. 하지만 현시(顯示)된 노력이 안 보인 건 맞다. 그래서 청원이 올라왔다. 김 지사가 답했다. -관련 사업을 국토부에 건의했다. 후순위 배치는 정부 요구로 인한 것이다. (검토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주장은) 왜곡된 정보다. 도민 분란을 야기하는 것이다. -31개 시·군을 관할하는 도(道)다. 도지사가 할 법한 해명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이 시장 주장도 맞다. 지역의 기대를 충족 못한 건 맞지 않나. 여기에 경제부지사의 지원은 사실 관계도 틀리다. 이래저래 지역민에게는 경기도가 영 미덥지 않다. 경기도정이 얼마나 넓은가. 철도 현안만 40개라고 한다. 그런 철도(鐵道)도 수많은 교통 정책 가운데 하나다. 그런 교통(交通)도 수많은 도정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김 지사의 공약도 있다. 2023년에 295개라고 확정했다. 기회소득, 경력단절여성, 어르신 일자리, 어린이집, 장애인, 청년…. 신년 기자회견에 모든 걸 담을 순 없다. 강조해야 할 도정을 선언하고 방향을 정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1년 전 신년 회견은 어땠나. 경기북부특별자치도로 가득 채웠다. 설치 필요성 설명, 정부 방해 비판, 총선 공약 채택 캠페인…. 남북 분도는 1천400만명 모든 도민의 관심사다. 북부 주민 360만명의 관심은 더하다. 전문(全文)을 할애할 이유가 넉넉하다. 실천력 강한 김 지사다. 선언대로 2024년 도정은 북자도에 모아졌다. 그런 김 지사의 2025년 신년 화두가 ‘정부·정치’다. 이번에는 그 실천력이 걱정이다. ‘정부·정치’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쓸까 봐. 이재명 전 경기지사도 대권 후보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도 대권 후보다. 여론 조사에서 최근 여야 1등이다. 둘 다 도지사 때부터 잠룡이었다. 그들의 경기지사 신년 회견이 언론에 남아 있다. 핵심 화두를 ‘도정’으로 잡고 있다. ‘정부·정치’는 질문으로 받거나 아예 생략했다. 돌아보면 극히 경기지사다운 회견이었다.

[경기만평] 감당할 수 있겠나...?

[사설] 경기남부광역철도, 지금은 논쟁할 여유조차 없다

고영인 경기도 경제부지사도 경기남부광역철도 논쟁에 가세했다. 일부 시장들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들이 부정확한 주장을 퍼뜨려 도민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철도 사업의 정치화를 중단하라고도 밝혔다. 경기남부광역철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3·4차 국가철도망계획에도 16개, 21개 계획이 반영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제5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자신했다. 지난 6일 김동연 경기지사가 강조한 것도 이 부분이다. 당시 김 지사 설명은 도민 청원에 대한 답변이었다. 청원은 ‘경기남부광역철도 추진’을 물었다. 김 지사는 “일부에서 왜곡된 정보로 도민을 불안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고 부지사의 주장은 이런 김 지사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사업 불발’을 조장하는 일부 시장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도 넘은 도정 흔들기가 되레 경기남부광역철도 사업을 그르칠까 걱정이라고도 했다. 용인·성남시장은 여전히 불신을 표하고 있다. 이상일 용인시장은 “(김 지사의 설명은) 책임회피용 변명”이라고 비난했다. 신상진 성남시장도 “실제로는 GTX 플러스 사업 실행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고 부지사의 주장이 상황을 더 정치화시킨 측면이 있다. 침묵하던 수원시까지 논쟁에 끌어들인 역작용이다. “사업비 및 수요, 경제성 검토를 위한 용역은 수원시에서 뒷받침까지 했다”고 한 대목이다. 이상일 시장이 반박했다. “용역은 용인·수원·성남·화성시가 1억원씩 각각 부담해 공동 발주한 것이고, 수원시가 대표로 발주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분은 이 시장의 주장이 맞다. 해당 용역은 4개시가 분담한 비용으로 실행한 공동 용역이었다. 상황은 엉뚱하게도 수원·화성시민들 사이에도 ‘우리 입장은 뭐냐’는 목소리로 번졌다. 지역 철도 사업도 소속 정당의 유•불리로 침묵하는 것이냐는 지적이 등장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가 복잡할 건 없다. 경기도지사 입장은 ‘잘되고 있다’고, 용인·성남시장 입장은 ‘어려워졌다’다. 제5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되느냐 여부로 결판 나는 일이다. 포함된다면 용인·성남시장이 왜곡한 것이고, 제외된다면 김 지사가 거짓말한 것이다. 철도를 원하는 지역민에게는 그렇게 간단하다. 제5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은 2026~2035년 추진될 사업이다. 이르면 상반기에 나온다. 얼마 안 남았다. 고 부지사가 “사업을 그르칠까 걱정”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렇다. 논란을 키워 경기도에 득 될 것 없다. 국토부로 갈 지푸라기라도 잡는 게 급하다. 그게 지금 일이다. 거짓말 공방은 결과 보고 해도 늦지 않다. 예상컨대 어차피 한쪽에는 치명타다.

[사설] ‘빈집 팬데믹’의 시대... 위축(萎縮)사회의 아이러니다

‘빈집’이 지역의 골칫거리로 처음 등장한 곳이 부산이다. 특히 바다 하나 건너 영도구 일대가 심각하다. 여기도 연간 100만명 넘는 관광객의 ‘핫플’이 있다. 그러나 길 건너엔 금방 무너질 듯 쇠락한 동네가 공존한다. 2023년 기준 부산 빈집이 11만4천245채다. 5년 사이 15% 늘었다. 전체 주택 수의 9%, 열 집 건너 하나가 빈집이다. 부산시는 물론 구·군들도 빈집 태스크포스를 꾸리는 중이다. ‘빈집 팬데믹’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처음 한두 집에서 시작해 빠르게 번져간다. 빈집이 생기면 이런저런 피해가 옆집으로 넘어온다. 동네 탈출 현상도 빚어진다. 사회적 경제적 투자도 멈춰선다. ‘깨진 유리창’으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상점가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빠르게 슬럼화한다는 이론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인천에서도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미추홀구 도화동이나 동구 만석동 등에서는 10년 넘은 빈집도 많다. 세월과 함께 낡아 언제 무너질지 모를 지경이다. 온갖 쓰레기가 마당을 넘쳐 골목길까지 막는다. 고령화와 인구 유출이 많은 원도심에서 더하다. 주민들은 우후죽순격이라 한다. 현재 인천 전체 빈집은 2천962채에 이른다. 이들 빈집은 중구가 28.7%로 가장 많다. 다음 부평구, 미추홀구, 동구 등의 순이다. 72%는 원도심에 있다. 그중에서도 노후 저층 주거지에 몰려 있다. 한곳에 빈집들이 몰리면 지역 공동화가 진행된다. 이런 빈집밀집구역에 몰려 있는 빈집이 661채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빈집은 인근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나아가 이웃들의 정주여건을 급속히 떨어뜨린다. 구조물 상태가 나빠 당장 철거해야 할 3·4등급 빈집도 1천여채에 이른다. 그러나 지자체들의 빈집 정비는 지지부진하다. 소유주의 동의 등 절차가 많다. 연락이 안 닿거나 재개발 등의 기대로 방치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 5년간 철거 및 개량, 안전조치 등이 이뤄진 빈집이 253채에 그쳤다. 주차장, 소공원, 쉼터 등 공공공간 활용은 138곳뿐이다. 남동구가 3년간 무상 사용 동의를 얻어 동네 개방주차장으로 만든 것이 가장 최근 사례다. 일본은 우리보다 더 일찍 빈집 사태가 시작됐다. 선진국병의 하나인가. 과거 경제도 인구도 성장 일변도이던 때는 없던 걱정이다. 그러던 성장사회가 어느 사이 급속히 위축(萎縮)사회로 돌아선 것이다. 내 집 마련은 더 힘겨워지는데도 한편에선 버려진 빈집이 골칫거리다. 위축사회의 아이러니다. 인천시가 ‘빈집세’ 도입을 고민 중이라고 한다. 결국 소유주의 관리책임을 엄격히 하는 수밖에 없다.

[지지대] 군(軍) 본연의 임무

군(軍)에겐 오래된 임무가 있다. 물리력으로 국가를 방어하는 일이다. 군은 합법적으로 물리력, 폭력을 쓴다. 예전에는 칼, 창, 화살 등 화약을 쓰지 않는 무기, 즉 냉병기(冷兵器)를 썼다면 현대는 화약을 쓰는 화기(火器)를 사용한다. 화기는 냉병기와 비교도 안될 만큼의 강력한 살상력을 지녔다. 대한민국 군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화력을 지녔다. 세계에서 보기 힘든 휴전 상황이 수십년간 이어지다 보니 군비를 축소하던 서방과 달리 한반도의 남북은 군비경쟁을 계속해 왔다. 이런 경쟁이 K-방산을 만들고 군을 강하게 무장시켰다. 군은 정부기관 중 합법적으로 물리력, 화력, 폭력 등 힘을 쓸 수 있는 집단이다. 군의 물리적 힘이 세다 보니 군은 국방부에 소속돼 민간의 통제를 받는다. 지상 최강의 힘을 지닌 조직은 문민 통제 속에서 국가방어라는 본연의 임무를 매일 수행하고 있다. 이런 바탕이 있어 우리의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한 달 동안 과거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경험하고 있다. 군통수권자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가 몇 시간 만에 이를 해제하고,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대통령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용산에서 공성전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참사가 또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이 한 달 동안에 벌어졌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제대로 수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의 성실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대한민국의 명운을 가르는 일을 정하는 동안 군은 충실하게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바란다.

[문화산책] 원도심, 문화예술로 유혹?

일상적인 송구영신이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다. 어두운 밤거리에는 응원봉의 불빛이 한데 모이고 안타까운 참사로 수많은 이름들이 밤하늘 영롱한 별빛이 됐다. 전 국민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으려니와 뒤따르는 서민들의 현실적인 생활고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쇠퇴한 원도심 지역의 시장 상인, 자영업자들에게는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추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전쟁의 아픔을 딛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뤄내면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됐다. 그 뒤로 원도심의 쇠퇴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신도시가 조성돼 인구가 분산되면서 원도심은 쇠퇴하고 도시 격차는 점차 벌어진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상권이 무너지면서 과거에 중심이었던 원도심은 그 기능을 잃고 쇠퇴한 지역이 됐다. 우리 사회는 원도심의 활성화를 위해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고 거리에 문화예술을 접목하는 등 여러 방안을 시도해 왔다.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만 해도 꽤나 여러 곳의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이러한 공간들도 역시 시민과 문화예술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취지와는 다르게 시민들에게 큰 공감을 얻지 못함에 따라 활용되지 않고 또 하나의 유휴공간이 돼버린 곳도 더러 있어 아쉬운 마음이 크다. 다른 예도 있다. 어느 시장 귀퉁이에서 연극 공연이 열렸다. 허름한 곳에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이 공연은 주변 상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무대의 막을 내렸다. 눈물을 흘리는 상인들도 있었다. 원도심에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수요가 있음을 보여준 예시가 됐다. 이 사례는 거리 조성 사업에도 영향을 미쳐 문화의 거리가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간 복합문화공간을 우선적으로 만들면서 또 다른 유휴공간이 돼버리기도 한 몇 사례와는 달리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예술 콘텐츠가 문화거리 조성사업으로 확장된 일들은 원도심도 문화예술로 인해 활성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단,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공감을 얻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한 성공 요인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올해에도 여러 지자체에서 문화예술을 접목해 원도심 지역을 활성화하거나 원도심의 빈 건물을 모집해 콘텐츠 창·제작기지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언론을 통해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공간을 먼저 구성하고 그에 맞춰 콘텐츠를 모집하는 모양새다. 이미 정형적으로 지어진 건물에 창의적인 문화예술 콘텐츠를 끼워 맞추는 형국이니 일의 순서가 잘못된 것 아닌가.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콘텐츠’와 ‘공간’이 함께 기획될 때 문화예술과 원도심은 더 효과적으로 상호작용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복합문화공간을 설계하기 이전에 원도심의 구성원, 문화예술기획자, 지역전문가가 함께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특색을 반영해 이 공간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은 설계는 공간의 존재 의미를 퇴색시키며 자칫 새롭게 태어날 공간을 미래의 유휴공간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무형의 창의이며 문화는 자생적 흐름이다. 그리고 지역은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다. 이러한 지역의 문화예술을 원도심의 재생과 접목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본질적인 특성부터 이해하고 그것을 잘 살려내야 한다. 공간이라는 유형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콘텐츠 기획이라는 무형의 결과물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지역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문화예술 콘텐츠가 기획되고 그것과 어울리는 공간이 존재할 때 원도심이 가진 특유의 매력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인천시론] 짠물 당구 김가영

‘당구 여제(女帝)’ 김가영 선수의 활약이 갈수록 눈부시다. 지난달 강원 정선군에서 열린 ‘하이원리조트 챔피언십 2024’ 대회 여자부(LPBA)에서 우승한 그녀는 이로써 2024년 5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일궜다. 또 이 ‘하이원리조트’ 대회에서 결승전을 끝낼 때까지 30연승 기록도 세웠다. 이는 프로당구 남자부(PBA)에도 아직 없는 신기록이라고 한다. 포켓볼로 시작했다가 3쿠션 선수로 변신한 그녀에 대해 “여자 당구에서는 적수(敵手)가 없다”는 말이 돈 지 이미 오래다. 이렇듯 큰 활약을 하고 있으니 그녀는 이제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나에게는 그녀와 했던 재미있는 인터뷰의 추억이 있다. 24년여 전인 2000년 10월, 그녀가 인천여자정보산업고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신문기자로 그녀를 만났다. “당구를 기가 막히게 잘 치는 여고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취재를 위해 찾아간 곳은 동인천에 있던 ‘김가영 당구장’. 딸의 대성(大成)을 원했던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는 당구장에 딸의 이름을 붙였고, 당시 그녀는 이미 여자 포켓볼 분야에서 4년째 국내 1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인천에서 초·중·고교를 다닌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당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창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나이에 당구에만 매달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습을 많이 했는데 경기가 안 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다 아버지에게 무섭게 혼이 날 때는 다 그만두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동안 당구에 투자한 만큼 투자할 만한 다른 일을 못 찾겠고, 기왕 이만큼 투자했으니 본전은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했다. 당시 4구 당구는 700점 수준이었던 그녀는 매일 당구장에서 훈련을 하던 중에 오빠나 아저씨뻘 손님들과 자주 시합도 했다. 그러고는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며 두 가지를 물어 왔다. ‘남자들은 왜 경기에 지면 졌다고 깨끗이 인정을 하지 않느냐’는 것과 ‘당구장에서 왜 짜장면을 시켜 먹느냐’는 것. 대개 4구 150~200점, 잘 쳐야 300점 정도인 남자들이 어린 여학생이라고 우습게 보고 경기를 요청했으니 무참히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같이 “오늘은 이상하게 공이 안 맞는다”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자의 자존심’을 끌어대 어찌어찌 설명했지만, ‘당구장과 짜장면의 오묘한 조화(調和)’는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꼭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던 그녀는 이미 그 꿈을 이루고도 계속 정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 인천 ‘짠물 당구’의 위력을 널리 알리고 있는 그녀가 자신을 키운 인천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