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그런 것이 없었다. 우렁이속 같은 범여권의 만화경도, 조폭 같은 한나라당의 아귀 다툼도 없었다. 사는 걱정도 접어두었다. 생각이야 어찌 없을까만, 그런 세속을 입에 담을 장합이 아닌 것이다. 화성시 서신면 장외리 2 옛 함산초등교 터, 폐교된 그곳은 무성한 느티나무 이파리들이 제부도 갯바람에 속삭이듯 하늘거렸다. 운동장에서는 청소년들의 ‘덩더꿍 똑딱 덩더꿍’하는 장구 소리가 적막을 깬다. 농악대 차림의 상모를 제법 돌린다. 강당에서는 가야금이나 피리를 배우는 고등학생 또래들이 가락 삼매경에 빠졌다. 쟁이골이다. 십여년 전 폐교된 학교를 문화예술촌으로 만들었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우리 가락은 쟁이골 문예학교의 청소년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든 것 중의 몇 가지인 것이다. 촌장 김명훈은 별종이다. 혼약하여 내년에 며느리를 볼 아들, 사위를 봐야 할 장성한 딸이 있는데도 언제나 백발동안이다. 덥수룩한 털보의 구레나룻이 순백인데도 얼굴은 앳되다. 그러는가 보다 했는데, 그 곳이 이런 곳인 줄을 가서 보고 비로소 알았다. 앳되 보이기는 그의 부인 또한 마찬가지여서 이도 ‘부창부수’인가 보다. 산수좋고 공기좋은 벽촌에서 문화생활을 하여, 보다 젊어보이는가 하는 느낌이 물씬 났다. 사업 경영이 어찌 쉬울까마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일 게다. 그러고 보니 난 그를 잘못 알았다. 한 12년 전인가, 중부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고, 지금은 경기언론인클럽 사무국장을 한다. 경기언론인클럽은 회장도 그렇고 사무국장 역시 봉사하는 자리다. 언론계 후배로만 여겼던 그가 그토록 대단한 촌장인 줄은 처음 알았다. 내친 김에 더 하면 몽골촌 캠프장, 도예 및 제부도 갯벌체험, 전통무예, 체험학습종합센터, 청소년 수련 등 이밖에도 하는 일이 참 많다. 이윽고 2007 단봉예술제가 시작됐다. 쟁이골에 간 원래 연유가 이 때문이다. 개회식도 축사도 뭣도 없이 곧장 행사로 들어가는 것은 도식적인 것을 싫어하는 촌장의 성질머리 그대로다. 마침 들른 최영근 화성시장 또한 여느 사람들과 어울려 소탈하게 담소하는 게 보기에 좋았다. 판소리며 성악 등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갖가지로 접목된 흥겨운 한마당 잔치가 질펀하게 운동장을 깔았다. 사람들은 200명쯤 되어보였다. 그런데 별종은 촌장만이 아니다. 말총머리 아니면 모시두루마기에 검은 안경을 끼는 등 별별 희한한 별종들이 다 눈에 띄었다. 털보들도 많아 웬일인가 싶었더니 ‘전털련’(전국털보연합회)인가 하는데서 회원들이 털보 촌장을 보아 우정 도우미로 나섰다는 후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이고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이다. 관념과 인식을 병행하는 것이다. 관념은 감성이고 인식은 이성이다. 예를 들면 여러가지의 종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데 뭔가 적힌 것을 먼저 줍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적힌 종이를 먼저 줍기도 한다. 뭔가 적힌 종이를 먼저 줍는 것은 적힌 내용이 필요할 걸로 보는 인식으로, 즉 이성이다. 반면에 아무것도 안 적힌 걸 먼저 줍는 건 백지가 필요할 것으로 보는 관념, 즉 감성인 것이다. 문예는 감성에서 출발하여 이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정서다. 순백의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흰 바탕에 뭣을 담을까 하는 건 창작의 자유다. 그날 모인 사람들 역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예술제를 보면서, 각자의 흰마음 바탕에 자기 나름의 생각들을 담았을 것이다. 뭣을 담았든 분명한 것은 거의가 ‘정중동’(靜中動)의 선(仙)을 가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명예욕이나 돈 같은 명리도 좋지만, 인간은 때론 그런 것을 넘어 조용히 자신을 생각해보는 백지장같은 순백의 시간이 필요하다. 삶의 심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사는 무상해도 세월은 항상 같아서 변함없이 간다. 세월을 타고 흘러가는 인간사는 그래서 오만이 겸손보다 못하다. 난 그같은 상념을 가지면서 쟁이골을 떠났다. 낮에 떠나서 경험하진 못했지만, 단봉제 행사는 밤에 야영불을 피워두고 동동주 잔도 기울인 것으로 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정담을 꽃피운 자린, 원초적 인정으로 인간살이에서 서로 간의 정리인 것이다. 범여권의 만화경도, 한나라당의 아귀다툼도, 사는 걱정도 잠시 접어두었던 곳에 있다가 나와보니, 대선 타령이 요란하고 살아갈 걱정이 태산이다. 이래서 쟁이골 같은 일이 많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또 갖는다. 맑게 씻긴 심성이 여운처럼 남아 우리들의 피곤한 심신에 탄력을 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피니언
임 양 은 주필
2007-07-2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