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대선별곡(新 大選別曲)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의 기원이래 가장 이상적인 정치제도며, 선거는 민주주의 구현의 기본 수단이다. 이렇긴 하나, 민주주의 목표가치에 비해 미흡한 선거가치의 모순에 갈등을 지울 수 없을 때가 있다. 지방의원, 자치단체장, 국회의원 등을 예로 든다. 선거가 끝나면 이들은 선거구민의 상전이 된다. 지방행사마다엔 으레 지방의원 위주의 인사소개가 없으면 행사가 진행 안 된다. 기초단체장은 ‘소통령’으로 군림하다가 비리로 가막소 가기 일쑤고, 광역단체장은 대통령 흉내를 내는 ‘중통령’ 행세가 예사다. 국회의원들은 전형적인 정치 건달꾼이면서도 위세가 대단하다. 민선의 이들 벼슬아치가 선거구민에게 아양 떠는 겉모습은 건성일 뿐, 속마음은 건방만 들어 있다. 대체로 건방떠는 위인이 일을 제대로 하는 걸 볼 수 없다.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다. 표를 구걸하는 후보들 모습이 가지가지다. 길거리서 음식을 사먹으며 나발을 불어대는가 하면, 기생 오라비처럼 길가는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덮어놓고 껴앉는가 하면, 생전 안 가던 영세민층을 찾아 잘 살게 해줄 것처럼 허풍떠는 꼬락서니들이 가관이다. 이들이, 이들 가운데 그 누구든 대통령에 뽑히고 나면 청와대에 들어가고 나면, 태도가 달라져 민초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것이다. 일다운 일을 위한 소신적 권위가 아니고 위세를 위한 독선적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공·사 구별을 못하고 민생에 고민할 줄 모르고 딴나라에 국위를 못미치는 독불장군이 될 터인데, 이런 당선자가 나올까봐 두렵다. 따지고 보면 왕권정치나 독재정치나 민주정치나 다 국가 구조가 피지배계층과 지배계층으로 구분되는 건, 인간은 둘 이상만 모이면 우두머리 출현이 불가피한 사회적(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수단인 선거 역시 이래서 지배계층의 선출이고, 대통령 선거는 최고 지배자의 선출인 것이다. J 애덤즈는 미국의 여류사회사업가로 1931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말한 ‘연례적 선거가 끝나면 노예제도가 다시 시작된다’고한 경구는 선거의 취약점을 일깨우는 것으로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 곱씹어볼만 하다. 레닌은 그랬다. 국가와 혁명론에서 ‘국가가 있는한 자유는 없다. 자유가 있을 때는 국가가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인류사회의 지배계급 타파를 위해선 국가가 없어져야 하고, 능력에 의해 기여하고 수요에 의해 공급되는 완전한 공산주의의 무정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회주의라고 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붉은 귀족’의 출현은 부르주아보다 폐악이 심하다 못해 소련은 붕괴되고, 중국 베트남 쿠바는 개혁 개방으로 가는 가운데, 북녘은 김일성주의에서 김정일주의로 거듭 수정하는 사회주의의 변질을 가져왔다. JF케네디는 연두교서에서 ‘국가는 시민의 하인이지, 시민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가 구성은 인류생활에서 불가피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최상의 국체인 것이 역사적 경험이고 보면 선거는 비록 갈등을 지닌다 해도 절대적 요체다. 그런데 이 선거가 간단치 않다. ‘가장 고약한 풍습은 벼슬하겠다고 선거운동하고 다투는 일이다’’(키케로), ‘선거는 진흙탕 목욕이다’(GB쇼)란 말 그대로 대통령선거판이 아귀다툼이다. 관자(管子)는 ‘先爭天下者 必先爭人’(선쟁천하자 필선쟁인)이라고 했다. 천하의 패권을 쟁취코자 하면 반드시 누가 민심을 얻느냐를 다퉈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孔子)는 ‘政者正也’(정자정야)라고 했다. 정치란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란 뜻이다. 대통령을 잘못뽑아 우매한 대통령 밑에서 5년을 참고 견디는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국민사회가 먼저 우매하지 않아야 한다. 국민들이 금융권에 진 가계빚이 지난 3개월 사이만도 14조원 이상 늘어 610조6천438억원으로 가구당 3천819만원에 이른다. 나라빚은 지난해 말만 해도 내년 정부 예산안과 맞먹는 248조원이던 것이 올해 280조원으로, 연간 국가채무 이자가 12조원인 가운데 내년 말엔 300조원을 넘어선다. 나라빚은 누가 갚아주지 않는다. 가계빚에 허리가 휘고 있는 국민이 장차 갚아야 할 빚이다. 대통령이 되어도 적자재정의 빈 국고를 맡을 거면서, “뭐 해주고 뭣뭣 해준다…”는 등 부도수표로 끝날게 뻔한 사탕발림 남발의 헛공약이 뭣인가를 잘 가려내야 한다. 어울리지 않은 생쇼로 만면 가득히 짓는 비굴한 웃음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국민은 가만히 있어도 잘 살게 해줄 것처럼 하는 말을 믿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열심히 일 할 수 있기를 원하며 노력의 대가가 제대로 보장되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나와 함께 더 땀흘려 일하자’고 국민사회의 노력을 가일층 당당히 요구할 줄 아는 후보가 보고싶은데 그런 후보는 없다. ‘대통령에게 쉬운 일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해결하기 쉽다면 대통령 이외의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아이젠하워다. 우리에겐 지금 아이젠하워의 말처럼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어려운 일들을 해내는 이런 대통령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BBK ‘물귀신’

검찰 발표를 불신하는 심리가 모르고 우기는 것인 지, 알고도 거짓말을 하는 것인 지, 그도 아니면 무작정 해보는 것인 지 종잡기 어렵다. 특히 대통합민주신당이 검찰의 BBK 수사 발표를 배척, 특검으로 가는 것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특검에서 과연 그간의 검찰수사를 뒤엎을 이명박(한나라당 후보)의 주가조작관련혐의가 드러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검찰은 BBK 수사에 그들의 생명을 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조직에서 하는 일에 비밀은 없다. 만약 있다면 언제고 들통나게 마련이다. BBK 수사를 이명박 입맛에도, 정동영(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입맛에도 짜맞출 수 없는 연유가 이에 있다. 뭣보다 정치적 영합을 금기시 하는 것이 검찰의 내부 공기다. 이명박을 왜 소환 않느냐며 검찰수사를 윽박(지휘)했던 신당이 결과에 불만, 특검법을 발의하는 것은 다분히 정략적 공격이다. 특검에서 여의찮은 결론이 날 때 나더라도, 대선기간 동안 이명박 공격자료의 미제사건으로 물고 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동영은 이명박의 거짓말이 드러나면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에대한 반사적 책임 또한 져야 하는데도 한마디가 없다. 이명박이 거짓말 한 게 아닌 정동영의 헛방이면, 정동영 자신이 사퇴하는 게 책임지는 상응의 공격 자세인 데도 그런 다짐은 없는 일방적 주장이다. 이회창(무소속 후보)의 검찰발표 수용불가는 진퇴양난에 처한 고육지책이다. 이회창의 대선 돌출은 이명박의 BBK관련 혐의가 드러날 것에 대비한 보수세력의 대안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럴 경우, 보수진영이 이회창 대세에 쏠릴 가능성이 많았던 것은 부인되기 어려운 것으로 맞다. 그런데 이명박이 막상 무혐의 되고 나서는, 이제와서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마땅치 않게 된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명박을 두둔할 이유는 없다. 그로 말하자면 뒤가 지저분하다. 자녀의 명문초교 입학을 위한 위장전입, 재산이 350억원이나 되면서 120만원 월급을 탐낸 자녀의 위장취업 등의 사례가 그러하다. 또 주가조작엔 법률적 혐의가 없을지라도 김경준이란 사기꾼과 한동안 어울린 도덕성엔 흠결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명박이 BBK와 관련, 거짓말을 했다면 용서의 여지란 바늘틈 만큼도 있을 수 없다. 닉슨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해야 했던 워터게이트 사건은 캠프 진영의 도청보다, 닉슨이 진실을 부인한 국민에 대한 거짓말이 치명적이었다. 이명박의 주가조작 부인이 거짓말이라면, 사회를 농락한 파렴치에 국민적 지탄을 면치못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먼저 이명박의 BBK 의문을 들고 나선 것이 박근혜(한나라당 전 대표)다. 그는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을 가리켜 ‘대선 본선에서 완주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까지 몰아붙였다. 이명박의 경선 승리를 승복하면서도 지원 유세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던 게, 이명박에 대한 그같은 의문에 검찰수사 결과를 지켜보고자 했던 것이다. 검찰수사 이전에는 진실 파악에 한계가 불가피했던 의문이 검찰에 의해 규명된 이 시점에 와서 검찰을 부인하는 것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김경준의 유령같은 협상설 메모지가 등장하는가 하면, 그 가족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무슨 새로운 증거를 갖고 기자회견을 한다고 해댄다. 명색이 대선 정치세력이 국가기관보다 국제사기꾼 등의 일거일동 농간에 더 목매어 기댄다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도 신당이 BBK를 특검으로 굳이 끌고가자고 한다면 한나라당은 한사코 반대할 일만은 아니다. 이명박이 떳떳하다 하고, 당으로서 꿀릴 것이 없으면 특검 아니라, 특검보다 더한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대선 기간동안 어차피 BBK 공격을 받는다해도 판단은 표를 쥔 국민의 몫이다. 그리고 검찰에 이어 특검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어느 쪽이든 그 영향이 내년 총선 민심과 무관하지 않는 부메랑이 되는 것이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이다. 국민사회는 BBK를 둔 정치 공방에 귀에 못이 배겨 신물이 날 지경이다. 이당 저당, 이 후보 저 후보 할 것 없이 검증된 참 공약은 찾을 길 없고 사탕발림의 헛 공약 아니면 BBK 공방만이 널뛰는 탓이다. 신당이 특검을 하면 하는 것이지 공격을 위한 공격은 자제하는 것이 옳으나 한나라당 또한 공격받는다고 정동영을 고발하는 등 일일이 대응, 손뼉을 마주치는 것도 졸렬하다. 대선에서 하는 일이 모두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국민이 원하는 것이 뭣인지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대선에 끼어든 장막속 BBK 물귀신의 실체가 뭣인지는 후일 결국은 드러날 것이다.

盧, 고독한 下山길

노무현(대통령)이 발등을 찍혔다. (권력)정상의 하산길에서 그것도 믿었던 돌에 걸려 찍힌 것이다. 당선축하금이 포함된 삼성특검법을 차마 거부못한 전격적 수용의 배경 설명에서 그런게 묻어난다. “국회에서 통과할 때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많아 재의 요구를 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해 수용키로 했다”고 했다. (재적의원 189명의 82%가 넘는 155명의 찬성으로 통과돼 거부권을 행사해도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재의 통과가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삼성특검법은) 국회의원들의 횡포이자 지위 남용”이라며, “국회가 결탁해서 대통령을 흔들기 위해…” ‘법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주목되는 건 ‘국회가 결탁했다’는 대목이다. 우군으로 믿은 국회 제1당의 대통합민주신당에게 배신당한 불쾌감을 토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친노계열의 직계조차 강건너 불 보듯이 적극 저지에 나서지 않은 섭섭함은 충격일 수 있다. 청와대는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레임덕은 없다는 권력 의지를 수차 비쳤다. (예컨대 기업도시 건설, 2단계 균형발전, 부처 기자실 폐쇄 등 말기적 증상의 대못질 발작에 바빴다) 이런 와중에 당선축하금이 포함된 삼성특검법 통과에 신당이 한나라당과 함께 손들고 나온것은 명백한 레임덕 현상으로 대통령의 입장에선 심히 뼈 아플 것이다. 그러잖아도 유쾌하지 못한 처지다. 후계 구도로 점찍은 적자 직계군은 후보 경선에서 지리멸렬하고, 후보가 된 서자 직계는 좀처럼 국민의 지지도가 뜨지 않는 판이다. 이런 게 다 자신의 실정 탓으로 화살이 돌아가는 것은 그로썬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적 갈등을 더 증폭시킬 것이다. 대통령은 “(특검법이) 굉장히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했다.(몇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은 맞지만 이 시점에선 논할 때가 아니다) 이보다 대통령의 불만이 의아스런 것은 당선축하금에 대한 개념이다. “대통령이 받아야 당선축하금 아니냐, 개념상 차이는 구분해 줘야 한다”고 했다. 측근이 받은 건 당선축하금이 아니라는 그의 개념 구분은 매우 무책임하다. 뭉칫돈을 노골적으로 “당선축하금입니다”하며 주는 포괄적 뇌물수수 방법은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당선된 대통령) 측근에게 넌지시 건네는 포괄적 뇌물수수 방법은 흔하다. 그리고 당선 요건이 충족되어 건네진 뭉칫돈은 (묵시적) 당선축하금으로 위장된 뇌물인 것이다. (대통령 총무비서관 최도술이 2002년 12월 SK그룹으로부터 11억원 받은 것을 비롯, 생수동업자 안희정·후보시절 수행팀장 여택수 등 최측근들이 대선 이후 수수한 돈이 밝혀진 것만도 20억4천300만원이다. (“대선 이후 돈벼락이 떨어지니 참모들이 이성을 잃은듯 했다”는 것은 노무현 후보 공보특보였고, 지금은 민주당 대변인인 유종필이 한 유명한 말이다) ‘나는 안 받았으니까 깨끗하다’는 말은 좀 헷갈린다. 직접 받은 게 아니고 간접으로 받았으니까 안 받았다는 건지, 직·간접 다 한 푼도 안 받았다는 건지 궁금하다. 아무튼 대통령 노무현은 2008년 2월25일 퇴임 후엔 (자신이 공포한 특검법에 의해 자신이 임명한) 특별검사 앞에 앉아 조사를 받는다. 대통령의 재임 중 형사면책은 특권이긴 해도 공소 시효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지되는 것이어서 정지가 해제되면 시효가 다시 시작된다) 대통령이 특검법 수용 의사를 밝힌 청와대 춘추관에서(배석한 청와대 참모진을 돌아보고) “청와대 사람들은 전부 춥고 배고플 때 살던 사람들이라 인맥이 시원치 않다”며, (그래서) “삼성하고 인맥 팍팍 뚫어놓고 거래하며 편안하게 비서한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측근 두둔은 국민이 보기엔 헛방이다.(되레 안 한 것보다 못하다) 측근을 두둔할 때마다 그들의 비리가 드러나 체면을 구겼으면서도, 두둔이 무작정 여전한 것은 임기말에 밀어닥친 외로움을 그래도 믿을 것은 청와대 식구 뿐이라는 생각에서 그러는 것 같다. 예쁘면 다 좋게만 보는 심리학상의 후광효과에 빠진 것이다. 대통령의 실정을 심리적으로 분석한 게 있다. 미우면 다 밉게 보는 악마효과, 잘된 일은 다 제 탓으로 돌리는 내적귀인, 안 된 것은 다 남 탓으로 돌리는 외적귀인의 편향에서 헤어나지 못한데 기인된다는 것이다. 노무현만이 아니다. 지금 다음 대통령을 하겠노라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대통령 후보군도 예외가 아니다. 누가 되든 잘못된 전철을 또 밟지 않을까 걱정된다.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오는 마음이 홀가분한 사람은 권력의 책임을 무겁게 알았던 사람이다. 반대로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오는 마음이 아쉬운 사람은 권력의 책임을 가볍게 안 사람이다. 전자는 영예롭고, 후자는 고독하다.

등록 앞둔 대선판국

배웠다는 사람들이 더 한다. 고귀하단 사람들이 더 무섭다. 지금 나라를 온통 들쑤시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위인들이다. 정동영·이명박·권영길·이인제·문국현·이회창 등이 이런 사람들이다. 그 주변의 사람들 역시 같은 사람들이다. 하나 같이 많이 배우고 높고 귀한 사람들이 하는 짓은 하나같이 개차반이다. 여기에 굳이 옮길 것도 없다. 못 배우고 미천한 시정잡배도 사람의 맛이란 게 있다. 위선과 가식, 배신과 음모, 모략과 중상이 판치는 그들같지 않다. 사람 맛이 간 그들은 오늘도 이곳 저곳을 누비며 비굴한 웃음과 생쇼로 표를 구걸한다. 내가 찍어줄까 하고 맘먹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것은 하나같이 돈많은 부자라는 사실이다. 그 가운덴 또 정치를 하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다. 정말 이상하다. 전같지 않아 정치를 하면 축재를 하는 것일까, 예전에 신익희는 정치를 하며 논을 팔아 대고, 조병옥 장면은 집을 팔기도 했다. 유진산은 전셋집에서 임종하며 부인에게 빚을 남겼다. 박정희가 남긴 유산은 아무것도 없다. 구미 생가는 큰조카 것이다. 정동영은 불과 3년새 6억7천938만원을 축재하는 재주를 가져서인 지, 아들을 한 해에 3천만원이 들기도 하고 1억원이 들기도 한다는 미국 고등학교에 조기유학을 보내놓고 있다. 이명박의 아들 딸 위장 취업은 치사하다. 명문초교 입학을 위해 위장전입 했던 자녀들이다. 이회창이 쏟아내는 막말 악담은 심히 어른답지 않다. 악다구니 대선판에서 또 하나 가관인 것은 ‘배운’ 사기꾼의 등장이다. 금융의 귀재라던 김경준이 금융의 죄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미국으로 도망가면서 가로챈 384억원의 BBK 소액투자 피해자가 천 수백 명이다. 미국교도소에 있다가 오는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웃어보인 객기는 뭣일까, 그 해답의 실마리가 박수종 변호사의 김경준 변호인 사임에서 나타났다. “금융사건으로만 하는 줄 알았는데…(아니더라)”는 사임의 이유는 배후를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이명박과의 이면계약을 말하며 미국에서 엊그제 새벽 기자회견을 한다 했다가 올케를 내보낸 그의 누님 에리카 김 또한 변호사를 하다 서류위조와 돈세탁 등으로 변호사 면허가 정지된 사람이다. 이명박이 이들의 주장대로 BBK 주가조작사건에 관련이 있는 지 여부의 검찰수사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젠 ‘금융사건으로만 하는 줄 알았는데…(아니더라)’는 대목이 주목되는 데 있다. 물귀신작전이 떳떳한 것이라면 기획입국의 막후가 숨어있을 이유가 없다. 도대체 베일에 가려진 연출자가 누구인 지 알쏭달쏭하다. 배울만큼 배워 고귀하다는 분들이 하는 것을 보면 못배운 조폭을 연상케 한다. 아니 더 한다. ‘네가 안 죽으면 내가 죽는다’는 것으로 아는 그 세계에도 나름대로의 의리가 있다. 민초들의 생존경쟁에도 신의가 있다. 이를 사회성지수(SQ)라고 한다. 사회성지수가 낮으면 마음의 맹인이 된다. 이번 대선의 특성은 정치성지수가 낮은 마음의 맹인들이 득실댄다는 사실이다. 사회인이 저지르는 범죄나 행패보다 지도층이 저지르는 범죄나 행패가 훨씬 두려운 것은 그 폐악이 비할 수 없이 더 심하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죄악이 무섭긴 해도 일반사회악으로 그치지만, 정치지도층의 폐악은 국가사회에 돌아가 국운을 해친다. 지금 대통령을 서로 하겠다는 사람들은 과연 이에 얼마나 자유로운 지, 악다구니에 바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봐야 한다. “전쟁은 방패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칼날로 이긴다”고 했다. 고대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한 말이다. “상대의 공세를 무력화하는 것이 승리의 가장 큰 요체다”라고 한 제갈공명은 수비형 공격 진법으로, 양자강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수몰시켰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트루먼은 민주당 소속후보로 공화당의 입심좋은 듀이에게 마냥 공격받았으나, 점잖게 응수하며 자신의 생각만을 피력한 것이 유권자들 마음을 사 재선에 성공했다. BBK 수사가 한창이다. 일정은 그래도 어김이 없다. 다음 주 부터는 12월19일의 대통령선거 공식기간으로 들어간다. 오는 25~26일 본선후보 등록을 사나흘 앞두고 있다. 범여권은 BBK 총공세속에 한편으로는 이인제의 독자출마 천명에도, 또 문국현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단일화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대선 후보 공식 등록일을 눈앞에 두고도 종잡기 어려운 이상한 판국이지만, 제발 본선에 들어가면 ‘마음의 눈’을 떠 달려져야 한다. 대선 쟁패를 스키피오형, 제갈공명형, 트루먼형 어떤 것으로 하느냐는 것은 자유일지라도, 국민은 네거티브에 식상할대로 했다. 그간 궁금했던 것, 이상하게 여겼던 것들 속내는 언젠가는 결국은 제풀에 드러나고 말 것이다. 임양은 주필

산자(生者)의 오만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누구도 이 대자연의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알 수가 없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는 어떤 것일까, 혼백이 몸을 떠나는 유체이탈의 순간은 어떤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산자는 경험하지 못하고, 죽은 이는 되돌아 올 수 없기 때문이다. 혼백이 떠난 몸은 썩는다. 그럼, 몸을 떠난 혼백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유체이탈이 아니고, 혼백도 몸과 함께 유체공멸하는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산자는 경험하지 못하고 죽은 이는 되돌아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저승은 초인적 세계의 실상일 수 있고, 이승 사람의 가상일 수도 있다. 몸은 죽어도 혼백은 더 살고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 산자의 염원이다. 천국과 지옥, 기왕이면 천국을 바라지만 죽어서도 살긴 사는 게 지옥인 것이 이승이 여기는 저승의 관념인 것이다. 그러나 산자의 입장에선 어떻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죽은 사람의 형체는 영원히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죽음은 영원한 소멸, 영원한 침묵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기약이 없다. 나이는 다만 확률일 뿐이다. 성별이나 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이 허망한 인간의 죽음이다. 죽음(死)으로 인한 주검(屍)이 경외로운 것은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인간적 가치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죽음에 빈부귀천이 없는 보편성과 마찬가지로, 주검의 경외로움 또한 빈부귀천을 초월한다. 누구도 주검 앞에서 오만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은 곧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인 것이다. 주검을 치르는 모든 장례는 이래서 존엄하다. 옛날에 빚을 내서라도 치른 꽃상여에 만장이 줄이은 출상을 현대인이 낭비로 보는 것은 현대 생활상으로 본 시각이다. 빚을 내서라도 그래야 했던 건 주검에 대한 인간 가치의 존엄성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러고 싶어도 넘치는 차들로 길이 막혀 못하지만 출상의 존엄성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출상은 북망산으로 가 매장되기도 하고, 장례예식장으로 가 화장되기도 한다. 매장은 물리적 변화이고 화장은 화학적 변화다. 새삼 수치를 장황하게 들 것도 없다. 화장이 매장을 앞지르기 시작한 근래의 증가율은 긍정적 사회현상이다. 국토의 묘지화를 걱정한다. 또 개발에 밀려 이미 써놓은 묘도 이장하여 화장을 하는 실정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마땅한 묏자리 또한 드물다. 그런데 저승길 가기가 힘들다. 화장률 증가의 긍정적 사회현상 한편으로 이를 해치는 부정적 사회현상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장례예식장이 턱없이 모자란다. 새로 시설하려고 해도 시설하려는 지역마다 일부의 반대꾼들이 들고 일어난다. 몇 십년 전처럼 연기 내뿜고, 냄새 피우고, 외관상 흉한 그런 화장장이 아니다. 동네 인근에 세우는 것도 아니다. 공원화하는 장례예식장인 데도 기를 쓰고 막는다. 관념이 아닌 인식의 차이다. 수목장림은 새 장묘문화다. 아름드리 거목 밑에 화장한 주검의 유골을 묻는 것이다. 주검의 물리적 변화나 화학적 변화나 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긴 하다. 그런 가운데 새 장묘문화로 갖는 수목장림은 또 다른 자연회귀의 의미를 갖는다. 거목은 자연의 묘비인 것이다. 도유림 대여섯 군데에 추진하는 수목장림 시범사업은 경기도가 하는 일 가운데 몇 안 되는 괜찮은 사업 중 하나다. 한데, 이 또한 곳곳마다 주민 반대에 부딪혀 어려운 모양이다. 수질오염을 든다고 한다. 오염되고 말 것도 없지만, 말하기로 하면 묘를 쓰는 것 보단 비할 수 없이 낫다. 지역 이미지가 훼손된다고 한다. 생각하기에 달렸다. 역시 관념이 아닌 인식의 차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본다. 나의 주검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남의 주검에도 존엄성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엔 결국 나의 주검도 포함되는 것이다. 수목장림은 누구든 자신의 유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남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신을 확인한 종말의 자기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어떤 불행속에도 살아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생자필멸의 법칙에서 죽는 것이 바쁜 것일 순 없다. 생사의 경계를 한 번 넘어서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래서 산자는 죽은이보다 행복하고, 죽은이는 혼백이 어떻든 산자보다 불행하다면, 언젠간 그 길로 갈 우리가 장례시설을 혐오시만 하는 건 산자의 오만인 것이다. 관념은 정적(靜的)인 정서이고, 인식은 동적(動的)인 판단이다. 장례예식장이나 수목장림에 좀 더 겸손한 생각을 가져야 할 시기인 것이다.

이명박과 이회창 출마

그렇게만 된다면 공정하다. “대선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김(경준)씨 사건 수사를 후보 등록일(25~26일)이전에 가급적 끝낼 방침”이라고 했다. 이명박(한나라당 대선 후보) 관련 의혹이 제기된 BBK 주가조작 사건 수사에 대해 검찰 고위 관계자가 그렇게 말했다. 만약 그때까지 결론을 못내리면 수사를 대선 이후로 미룰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오는 중순쯤 미국에서 국내로 송환될 문제의 김경준이란 사람은 자진해서 불을 지고 섶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공항도착 즉시 갈 감옥행을 뻔히 알면서도 오는 것이다. 베일에 싸인 그 불이익의 이면이 뭔지 궁금하다. 이명박의 결백 주장에도 대통합민주신당 등 범여권은 이명박에 대한 의혹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김경준이란 사람 역시 이명박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이명박이 비리에 관련된 게 사실이면 두 말 할 것 없이 끝장난다. 관련이 안 됐더라도 억울하게 상처는 받겠지만, 조금이라도 잘못된 게 드러나면 낙마가 불가피하다. 이회창(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삼수 선언에서 이명박으로는 미덥지 않다는 건 이런 BBK 의혹과 무관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만에 하나라도 후보 등록이 끝난 뒤에 이명박이 피의자 신분이 되면 보수진영의 정권교체는 물건너 간다. 국민이 피의자 후보를 당선시킬리가 없는 가운데, 당의 후보 교체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검찰의 대선후보 등록일 이전 수사결론 방침은 이 점에서 매우 적절한 중립의 자리에 서 있다. 이회창의 탈당, 무소속 출마 선언은 돌연변이다. 엔트리에도 없는 선수가 갑자기 출전하겠다고 링에 오르는거나 진배없다. 원로의 체모를 흠집내는 노탐이랄까, 노추가 실로 지나치다. 보수세력의 분열을 앞장서 일으킨 장본인이 보수세력의 규합을 말하는 것은 가관이다. 위기다. 이대로 가면 이명박, 이회창 다 떨어진다. 좌파정권 10년으로도 모자라, 차기 정권 5년을 또 갖다 바치는 꼴이 된다. 한나라당은 ‘경선불복보다 더한 배신’이라고 욕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회창의 오만을 비방한다고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대통령선거 본선에서도 굳이 그를 욕할 필요가 없다. 당장 급한 건 한나라당의 응집이다. 경선의 앙금을 끝내 이대로 짊어지고 있으면 대선 전이든, 대선 뒤든 분당의 고비를 맞는다. 대선 전에 앙금을 털지 못하면 잠정적 분당상태로 있다가 이회창과 함께 침몰한다. 결국 대선에 패배한 한나라당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양분된다. 설령, 분당의 파국을 가까스로 면한다 할지라도 대선에 이은 총선 역시 지리멸렬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보수정당의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는 면모는 아니다. 경선에서 이긴 사람이 먼저 내놔야 한다. 경선에서 진 사람은 내놓으려고 해도 내놓을 것이 없다. 대권과 당권 분리는 당헌으로 안다. 당헌이 아니더라도 분리하는 게 순리다. 이재오(최고위원), 이방호(사무총장)를 내치는 것은 ‘읍참마속’도 아니다. ‘이명박 선대위’서 중용하다가 집권하면 총리 같은 자릴 맡길 수도 있다. 이재오, 이방호를 당직에서 물러서게 해 박근혜(전 대표)를 비롯한 경선에서 진 사람들의 소외감을 덜 수 있다면, 그래서 당의 응집력을 살릴 수 있다면 그토록 인색해선 대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경선에서 진 박근혜 캠프 진영은 내년 총선에서 공천이 안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당내에 확산시킨 게, 경선에서 이긴쪽이 비친 걸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명박은 거게 본의든 아니든 간에 책임이 없다할 수 없다. 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이회창의 탈당 출마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속한 당의 단합을 이루지 못하면 역량과 경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명박이 자기 계보의 대통령 후보가 아닌, 당의 대통령 후보란 사실에 인식을 새로 한다면, 당의 응집력을 보여야 국민을 대해도 신뢰감을 준다. 지금까지의 일은 돌이킬 수 없지만, 더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사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국민을 더 실망시키지 않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BBK 의혹에 관련이 없다는 것에 그렇게 알고는 있어도 검찰수사의 결론을 기다리는 후보인 점은 역시 국민사회에 어쩔 수 없이 부담을 준다. 검찰수사가 후보등록 이전에 행여라도 이명박에게 흠결이 있는 것으로 결론나면 한나라당이 서둘러 새로운 후보로 바꿀수는 있어도, 등록 이후일 것 같으면 분산되는 보수세력의 표가 이회창에게 더 쏠릴 것이다. 이회창의 원려라 할까, 틈새 노림수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라의 명운이 어디로 가자고 이러는 것인 지, 대선 판도가 참 묘하게 돌아간다. 좌파정권 10년에도 시련을 다 하지 못했는 지, 대통령선거를 불과 42일 남기고 또 밀어닥친 설상가상의 시련이 힘겹지만 잘 넘겨야 하는 것이다.

盧의 낙향

이런 예가 없다. 일찍이 권력자의 낙향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대식 장원(莊園)의 신도시를 축성한 적은 없다. 대통령 노무현의 고향,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부지 3만900여㎡(1만600여평)에 짓고 있는 그의 사저는 가신(家臣)들 식솔까지 거느리는 규모로 중세기의 성곽을 방불케 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다 낙향했지만 집을 새로 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의 권력자들도 마찬가지다. 옛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낙향한 것은 생가였다. 그런데 국내에선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들이 퇴임할 때마다 연희동, 상도동 사저를 증축했다. 동교동의 김대중은 빌딩을 세웠다. 노무현이 퇴임후 봉하마을로 낙향할 것이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지난해 6월이다. 신선하게 들렸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이 집을 증축하거나 빌딩을 지어 서울에 계속 죽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퇴임 대통령의 첫 낙향이기 때문이다. 한데, 낙향도 낙향 나름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고향에서 살 집을 장원 규모로 짓는 것을 미리 알았던 사람은 측근 등에 국한해 몇 안 됐던 것 같다. 생가(生家)에서의 노무현에 비해 장주(莊主)의 노무현은 분명히 금의환향하는 것이다. 대통령에 올라 청와대에서 낙향하는 것만도 더 할 수 없는 광영인 데, 거기에 어마어마한 장원의 주인이고 보면 가난에 찌들었던 생가의 옛 노무현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게 있다. 그의 호사의 극치는 결과론적으로 기만적 정치행각의 소산으로 보는 대중(大衆)의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가 보인 언행은 대개가 빈곤계층을 대변하는 좌경 이념이 물씬거렸다. 그래서 언제나 기득권을 질타하던 자신이 어느새 신기득권의 영화에 도취됐다. 대중영합주의에 기대가 부풀렀던 대중의 삶은 더욱 고단한 가운데 그는 포퓰리즘의 과실을 챙긴 신귀족이 되고 말았다. 봉하마을의 대저택은 그 상징이다. 그가 최근에 자신의 정치 이념에 이름을 붙인 시민민주주의라는 게 어떤 것인 진 아직 잘 알 수 없다. 퇴임후에 이에 대한 책을 쓸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지만 그간의 행적을 그렇게 안 보는 학계의 견해가 또 있다. 노무현 정권이 중심이 된 민주화는 국민중심이 아닌 국가중심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얼마전에 김해시청에 들러 가진 주민간담회에서 “저 스스로 흡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때로 잘못한 것도 있으나 나라와 국민들께 부담을 주는 큰 사고를 낸 것은 없다 생각한다”고 했다. 참으로 관대한 자평이다. 국민에게 내내 부담과 불안과 혼란을 준 것이 그의 재임 4년8개월이다. 그만 두기까지 또 무슨 사고를 칠 것인지 여전히 걱정이다.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하면 검토해 보겠다”는 등 수차 헌정질서 교란을 서슴지 않은 것은 말로 그쳤다고 쳐도, 국가발전과 민생문제에 끼친 저해는 참으로 크다. 기업도시다 혁신도시다 해서 되지도 않을 일로 정부예산 절반에 버금가는 120조 가량의 돈을 보상금으로 뿌리면서 벌인 조령모개식 부동산정책은 되레 투기만 조장하였다. 기업규제를 풀기만 해도 연 7% 성장이 가능할 성장동력을 옥죄어 조기퇴직, 청년실업을 양산한 가운데 지난 2년새만도 국내에 투자된 83억달러의 외자를 역시 과잉규제로 이탈시켰다. 그간의 국민적 고통을 어찌 여기에 다 말할 수 있겠는 지, 낭비된 세월이 실로 아깝다. 갖가지 공사(公社)경영의 적자 심화속에 자기네 사람들로 채운 공공기관장들의 상식밖 고액연봉 잔치도 이 정권들어 생긴 폐해다. 생수 동업자 안희정부터 시작해서 청와대 적자(嫡子) 변양균 등에 이른 끊임없는 측근비리에도 자책을 보이지 않는 강심장으로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 청와대서 나온 것도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북베트남 지도자 호찌민이 인민적 숭앙을 받았던 것은 인민과 의식주 생활을 똑같이 하면서 시범을 보인 청렴이 언제나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정말 빈곤계층을 위한 지도자였다면 봉하마을의 사저가 신도시 규모인 것은 그래선 안 되는 일이어서 유감이다. 대중은 역시 그의 대중영합주의에 기만당했다는 생각을 이래서 떨치지 못하는지 모른다. 지방 아무데서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귀향이고,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낙향이다. 노무현의 화려한 낙향(落鄕)은 진정한 의미의 낙향이 아니다. 임양은 주필

아픈 상처, 좋은 만남

1949년 6월 김일성은 그해 9월 남북을 망라한 입법기관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통일 실천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무렵 38선에서 5㎞ 이내의 민간 거주자를 후방으로 이동하는 등 남침 준비가 시작됐다. 1950년 6월7일엔 ‘평화적 조국통일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해 8월5일부터 7일까지 남북통일 최고입법기관 선거를 위한 남북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모임을 해주에서 갖자는 것이다. 이어 6월10일에는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된 조만식 선생과 서울서 체포된 남로당 거물 이주하·김삼룡의 신병 교환 제의, 19일에는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제안이 있었다. 그리고는 며칠 안 된 6월25일 새벽4시, 38선 일원에 걸친 인민군의 남침이 감행됐다. 남조선 해방을 위한 총공격 명령 제1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겸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원수 이름으로 나왔다. 군사력 비교는 국군은 병력이 10만5천752명 인데 비해 인민군은 19만8천380명이다. 주요 장비는 남쪽은 곡사포가 960문인데 비해 북쪽은 1천727문, 전차는 북쪽이 242대인데 비해 남쪽은 한 대도 없고, 항공기는 남쪽은 22대 북쪽은 211대다. 그날 아침, 평양방송은 이렇게 보도했다. “만약 남조선 괴뢰정부가 38선 근방에서 취하고 있는 군사적 모험을 즉시 중지하지 않으면 적을 쳐부수기 위한 결정적 조치를 취할 것이며 남조선 당국은 이 군사적 모험에서 생기는 모든 결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오전 9시30분 김일성은 평양방송을 통해 ‘조선 인민에게 고함’을 직접 발표했다. “남조선 당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제안한 모든 평화적 통일방안을 거부하고 38선 북방인 해주지구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여 이를 격퇴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반격을 명했다. 이로부터 생기는 모든 결과에 대하여 남조선 괴뢰도당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란 것을 발표한 것은 이날 오전 11시다 그러나 그 시각,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참으로 한가했다. 서울의 일요일은 느긋했다. 육군 수뇌부는 전날밤 육본회관 낙성식 파티에서 흠뻑 마신 게 덜 깬 작취미성의 상태에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기껏 취한 조치가 이런 것이었다. 헌병 지프가 한강변을 돌면서 보트 놀이가 한창인 강심을 향해 확성기로 소리쳤다. “38선에서 상황이 발생했다. 휴가나 외출중인 국군 장병은 즉각 귀대하라! 즉각 귀대하라!!”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용감무쌍한 국군이 괴뢰군을 격퇴하고 있다”며 허위 보고하고, 이를 곧이 들은 이승만은 “서울시민은 동요말라”는 넋나간 방송을 했다. 대한민국이 그 때 망하지 않은 게 천운이라면 정말 천운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이렇게 시작된 동족상잔의 전쟁은 1953년 7월27일 자정에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3년 1개월 2일을 끌면서 강산을 시산혈하(屍山血河)로 물들였다. 1천만 이산가족을 낳았다. 국군·인민군 등 전투원을 비롯한 준전투원 비전투원인 민간인 등에 이르는 사상자가 1천만 명이다. 김일성은 전범이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릴 들이댄 전쟁 범죄자인 것이다. 남북 관계의 개선에서 따지자면 뭣보다 전쟁 책임 문제부터 따지고 넘어가야겠지만 지금 이를 따지면 대화가 막힌다. 문제는 참고 안 따진다 해서 잊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반공이나 승공을 말하면 웃기는 소리가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공·승공은 웃기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당시의 시대 배경을 지금의 시대 배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시대관의 오류다. 그런 이념의 갈등을 극복하여왔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탈 이념의 시대가 온 것이다. 탈 이념의 시대가 오긴 했지만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된다. 남북 관계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저들이 신용이 없는 사실이다. 전쟁을 일으킨 전과는 있어도 상대해야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은 어떻든 좋은 만남이다. 좋은 만남이 있는 날, 아픈 과거를 빗댄 것은 더는 아픈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대는 물과 같아 멈추지 않고, 시대는 흐르면서 새로운 역사를 일군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손학규의 ‘백의종군’

대세론이 위협받은 절대 절명의 고비에 처한 손학규, 그는 모레 열리는 광주·전남지역 경선을 재역전 교두보 삼아 캠프 해체의 배수진을 쳤다. 하긴, 손학규만이 아니다. 1위로 올라선 정동영이나 ‘친노파’ 단일화로 맹추격전을 벌이는 이해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제주·울산·강원·충북 등 4연전서 서로 물고 물린 혼전 양상으로 물러설 수 없기는 다 같다. 그러나 손학규의 입장은 특히 또 다른 점이 있다. 대통합민주신당내 ‘반노’ 진영의 유일한 주역이다. 신당의 손님이 아니다. 창당 기여에 지분을 갖고 있는 신당 주주다. 그런데도 고독한 것은 노무현을 겨냥한 ‘반노’의 대립각 틈새로 부는 패거리 바람 때문이다. 당의 공조직이 아닌 사조직이 패거리다. 패거리 동원의 버스떼기 설이 공공연히 나돈다. 패거리 동원의 가능성은 또 있다. 패거리 경선이 국민경선은 아닌 것이다. 한명숙·유시민의 사퇴는 이해찬 옹립을 위한 노무현 진영의 대선 각본 제1막이다. 예견됐던 일이다. 정동영이 지금은 ‘비노’로 분류되지만 원래는 노무현 사람이다. 당의장을 두 번 지내고 통일부장관을 지냈다. 초록은 동색이다. 이들에겐 기성 세력의 사조직이 있다. 사조직, 즉 패거리가 없는 것은 고군분투하는 손학규 혼자다. 4연전 경선 직후, 마포 자택에 칩거하던 그가 천주교 절두산 성지와 남양 성지를 들르고는 캠프를 전격 해체했다. 손수 운전한 경승용차 마티즈는 동승했던 부인의 차다. 캠프 해체는 낡은 패거리정치의 구태 타파를 정조준한 자폭적 순교다. 무모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다고 더 알아 주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현실정치를 모르는 처사라고도 한다. 그러나 현실정치를 하나 택한 건 있다. 호남 민심 잡기다. 1차 100일 민심탐방, 2차 20일 민심탐방 모두 전남에서 시작했다. 햇볕정책의 지지를 거듭거듭 확인했다. 동교동의 김대중 집을 방문하곤 했다. 김대중의 훈수정치는 마뜩찮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호남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다. 손학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 스스로가 갈등을 겪고 있다. 그를 가리켜 순진하다고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예컨대 민심대탐방은 정치적 쇼다. 가령 탄광 막장 같은데서 광원과 사진만 찍고 적당히 말 수도 있는 일이다. 사진만 찍고 마는 정치인들의 유사행위가 없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손학규는 진종일 또는 며칠씩 탄가루를 들이마시며 광원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 일쑤다.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쇼다. 문제는 진심으로 보여주는 쇼냐, 가식으로 보여주는 쇼냐의 차이에 있다. 신당의 경선이 어떻게 판가름 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만약 노무현 사람이 후보가 되면 ‘도로열린우리당’의 완결판이라는 사실이다. 열린우리당을 왜 해체했는가, 그 간판으로는 대선에 명함을 들이밀 수 없기 때문이고, 이유는 국정 파탄에 있다. 장사가 안되어 신장개업을 하면 주인이 전 사람인지, 새 사람인지가 관심사다. 신장개업의 신당 후보가 누가 되느냐는 것은 신당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간판이다. 그가 지금 광주에서 민심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금남로 거리에서 광주·전남지역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금남로는 5·18 항쟁의 거리다. 물론 정동영·이해찬도 지지를 호소한다. 그러나 캠프를 없앤 손학규 처지는 필마단기의 백의종군이다. 투표율이 관건이다. 지난 4연전의 평균 투표율 19.8%로는 여전히 사조직 중심의 재판이 된다. 국민경선에 합치되는 경선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인의 참여율 제고가 절실하다. 민심에 직접 호소하는 백의종군의 승패는 결국 투표율에 달렸다. 신당 경선은 29일 광주·전남에 이어 이튿날은 부산·경남, 그리고 10월6일 전북 등 일정으로 이어진다. 경기도는 막판에 있게 된다. 지난 2002년 당시 집권당인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가 중도 사퇴를 한 게 노무현이 대승한 광주·전남경선이 있고나서다. 막판의 경기도 경선에서는 노무현의 들러리를 섰던 정동영이 표를 더 얻었다. 이인제에게 갈 표가 정동영에게 쏠렸던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명박이 후보로 이미 확정됐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이 후보가 됐다. 경선이 아직 진행 중인 정당은 신당과 민주당이다. 대선 본선은 말할것 없고 정당내 경선에서 누굴 맘에 두느냐는 것은 선택의 자유다. 신당에서 손학규를 주목하는 것은 다만 경기도 민선지사를 지냈고, 또 순수한 경기도 출신의 후보로는 자유당 정권 때 야당의 거목이었던 신익희 이후 처음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한 가지를 더 들자면 그의 행적이 여러가지로 파격적인 점도 있다. 신당의 경기지역 경선이 언제일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아마 막바지 절정을 이룰 것이다. 손학규의 경선이 경기지역 경선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임 양 은 주필

신정아 신드롬

온통 신정아 얘기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뒷전이다. 아마 추석 연휴의 모임에서도 단연 첫손 꼽는 화두로 오를 것이다. 서른다섯살의 미혼 여성이 나라안을 발칵 뒤집어놨다. 린다 김이 말했다. “전문 로비스트인 나를 사기꾼과 비교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김영삼 정부 때 미국의 무기업체 로비스트로 국방부 장관 이양호와 연서를 주고받는 등 부적절한 미인계로 말썽을 산 적이 있다. 신정아 비리에 청와대 정책실장 변양균의 유착관계가 드러나자 일부 언론이 ‘제2 린다사건’으로 보도한데 대해 그같은 불쾌감을 나타냈다. 듣고보니 딴은 틀린 말이 아니다. 신정아는 고도의 사기를 쳤다. 미국의 예일대를 안 나왔고 박사 학위도 가짜다. 고등학교 졸업 학력의 큐레이터다. 화가도 아니다. 한데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군림, 혜성처럼 빛을 뿜었다. 일약 동국대 교수가 되고 광주 비엔날레 예술총감독 자리에 올랐다. 진짜 박사도 이런 벼락 출세란 여간해선 어렵다. 정부 예산 잘 따오기로 소문난 그녀는 미술계의 마당발이었다. 미술계만이 아니다. 종교단체에도 예산을 따내주곤 했다. 그림도 잘 팔아주었다. 그도 비싼 값으로 정부 기관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크게 구전받아 벌어들인 돈인진 몰라도 주식으로 5억원을 주물렀다. 고가 빌라에 명품으로만 치장하는 호사생활을 일삼았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호사생활을 했으면 누군들 굳이 탓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신정아 하나로 잘 나가던 변양균이 권좌에서 낙마했다. 변양균만이 아니다. 동국대 교수들이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등 분규에 휩싸였다. 불교 조계종 종단이 내분을 겪고 있다. 도대체 그녀가 뭣을 어떻게 했길래 이토록 사방에서 야단인 지 그게 미스터리다. 변양균과의 관계도 그렇다. 단순한 남녀 관계 같으면 그것이 ‘예술적 동지’ 사이든 내연의 사이든 그들의 사생활이다. 그러나 신정아와의 사이에서 변양균의 역할은 남자이기 보단 기획예산처 차관·장관 그리고 청와대 정책실장의 신분이었고, 신정아는 그같은 신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변양균은 공직 만년에 어쩌다 뒤늦게 안 젊은 정인에게 독직도 감수하면서까지 순정을 다했던 것 같다. 아마 가짜 박사란 걸 알고도 공모자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정아 입장에서는 변양균 같은 순정을 준 것으로 보지않는 것이 세간의 평판이다. 쏟아져 나오는 신정아 행각의 의혹 가운덴 변양균도 몰랐던 놀랄 일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간에 회자가 되고 있는 게 신정아 이면서도, 입방아에 오른 것 만큼은 인식이 나쁘지 않은 점이다. 심지어 그녀가 산 방식을 선망하는 시선조차 없지 않다. ‘대단한 여성’이라고도 한다. 누구 말처럼 사기꾼이다. 가짜 학위에 미모를 내세워 권력층과 미술계와 대학과 종단을 휘저은 사기꾼을 그렇게 보는 것은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이미 정의가 실종된 국가사회에서 불의에 새삼 분노를 느끼기 보다는 역설적 정서를 갖는 것 같다. ‘신정아 신드롬’이 그냥 개인의 미인계였다면 신문 사회면 기사에 불과하다. 그러지 않고 연일 1면을 장식하는 것은 권력을 등에 업은 ‘신정아 게이트’이기 때문인 것이다. 권력도 보통 권력이 아니다. 나라 최고의 권부에서 요직을 지내며 최고 권력자의 신임이 두터웠던 최측근이다. 그리고 그 최고 권부는 청렴과 도덕성을 늘 말해왔다. 그러나 청렴이나 도덕성과는 거리가 멀어 썩어 문드러진 최고 권부의 비서관이 국세청 간부에 대한 친노 기업인의 뇌물 제공 자리를 마련, 정·관계까지 뇌물 의혹이 번지는 겹경사 아닌 ‘겹흉사’가 겹쳤다. 이런 가운데도 ‘신정아 게이트’가 더 부각되는 ‘신정아 신드롬’은 호사가들의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사안의 질이 더 무겁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산처 장관을 지낸 이가 뒷배를 보아 주었으니 정부 예산은 가히 신정아의 쌈지돈이 주머니돈인 셈인 것이다. 이 정권은 정말 희한한 정권이다. 그동안 신드롬도 많고 게이트도 많았지만, 신정아·변양균 같은 사건은 보다 보다 처음 본다. 국내에서만이 아니고 해외 어느 나라에서도 듣도 보도 못했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 지 몰라도, 세간의 이런 화젯거리는 제발 이번 추석 연휴를 끝으로 더 안 생겼으면 한다. 이런 건 있다. 대통령 선거 얘길 하다보면 서로 생각이 달라 말다툼이 벌어질 수가 있다. 하지만 신정아·변양균 얘기엔 냉소는 있어도 언쟁하는 일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임 양 은 주필

노무현의 無恥

항간에 나도는 우스갯소리다. 누가 물에 빠졌는데 아무도 구조를 안해 어느 행인이 건지고 보니 노무현이더라는 것이다. 고맙게 여긴 그가 행인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해서, 그럼 꼭 한가지가 있다며 말한 소원이 어디가서 내가 구해줬다는 소릴 (구해줬다고 하면 욕을 얻어먹을 테니까)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절대 지지층이 들으면 노발 대발할 소리지만 이것이 세간의 민심이다. 그러나 정작 가여운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라 민초다. 대통령은 고향인 경남 김해 진영땅 봉하마을에 짓는 퇴임후에 살 사저가 가히 중세기의 장원(莊園) 규모다. 연건축면적이 1천277㎡(386평)에 이르는 노무현가(家) 말고도 노무현가 집터 4천290㎡(1천297평)를 포함한 3만900여㎡(1만600여평)의 매머드급 개인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장원’에서는 형되는 노건평씨 가족과 가신들 그리고 경호요원이 함께 살게되는 모양이다.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 드골이 낙향하여 산 집은 낡은 생가다. 동네 아이들의 할아버지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으로 말년을 소일했다. 죽어서도 생전의 유언에 따라 고향 사람들과 함께 동네 공동묘역에 묻혔다. 국민투표에서 패해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오늘날 드골을 ‘위대한 프랑스 건설’을 기치로 내걸었던 위대한 지도자로 프랑스 국민들이 추앙하는 이유가 그같은 검소한 인품을 흠모하는 데 있다. 진영땅은 ‘노무현 장원’이 있어 앞으로 좀 시끄러울 것 같다. 진영(경찰)지구대가 벌써 구설수에 올라 있다. 도박사건을 조사하면서 편파적으로 한 것이 대통령 형되는 이의 친분인사가 개입된 의혹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초지종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이같은 혐의로 검찰수사가 진행되는 것으로 보도됐다. 대통령을 빗대는 항간의 우스갯소리로 불쌍한 것은 퇴임후의 호화 장원을 꾸미는 대통령이 아니고, 국민인 것은 잘못 뽑은 그같은 지도자의 지배로 민초들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속에 무력감에 빠진 민중은 그런 풍자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이 작금의 시류인 것이다. 신정아 게이트 등을 두고 ‘깜’도 안되는 소설을 (언론이) 쓴다던 그가 변양균(청와대 정책실장)과의 스캔들이 드러나자 한다는 말이 “할 말이 없게 됐다”는 것이다. 미술계에서 국비 지원을 잘 따오기로 평판난 그녀가 예산처 차관·장관을 지낸 사람과 그토록 가까웠으니 이제와서 알고보면 국비가 쌈지돈이었던 셈이다. 측근 비리가 어디 그 뿐인가, 그간의 청와대 사람 등 비리를 말하자면 책을 한 권 써도 족하다. 그 가운데는 대통령이 “동업자”라고 한 동업자 비리 등 유형 또한 가지 가지다. ‘암군(暗君) 밑에서 간신(奸臣) 난다’고 했다. 측근 비리는 측근을 둔 사람의 책임이다. 즉 대통령 사람들 비리는 대통령의 책임인 것이다. 최고 권력을 등에 업은 측근의 발호는 최고 권력자의 처신이 잘못된 탓이다. 그러나 이를 솔직히 시인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구차스런 변명이 앞섰다. 이래서 국민의 분통을 더욱 터뜨리게 만든다. “할 말이 없게 됐다”는 이번 경우 역시 다를 바가 없다. “검찰수사 결과에 따라 입장을 다시 정리해서 밝히겠다”면서 대국민 사과를 유보했다. 대국민 사과의 유보는 ‘소설을 쓴다’고 했던 마음보를 당장 꺾고 싶지 않은 오기인 것이다. 타이밍을 놓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어찌 검찰수사 뿐인가, 재판을 해봐야 할 것이고 재판도 확정판결이 나야 할 것이나 측근 비리는 이게 아니다. 한번 동지인 관계는 영원한 동지로 어떤 처지에 있든 챙기고자 하는 것은 정치인으로써 노무현의 장기라면 장기다. 이것이 그들 사이엔 의리로 통할지 모르지만, 국민사회의 눈엔 패거리 협잡으로 비친다. 하물며 비리에 ‘읍참마속’은 커녕 감싼다면 불의로 지탄받는다. 신정아 게이트는 아닌게 아니라 소설같은 이야기다. ‘깜도 안되는 소설’이라던 것이 감이 되는 소설같은 실화의 실체는 아직 미궁이긴 하다. 미궁이지만 압수수색 벽두에 나타난 단서가 그같은 정황을 말해 준다. 도대체 측근의 권력 남용이 어디까지 갔는지 궁금히 여겨진다. 지금까지 나타난 가짜 박사의 교수 임용, 광주비엔날레예술감독 기용 등 혐의는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왕조시대에 임금은 부끄러움이 없다하여 ‘무치’(無恥)라고 했는데도 부끄러움을 알았다. 왕도 아닌 대통령이 ‘무치’를 능사로 알아서는 착각이다. 이제 몇달 남지 않긴 했어도 좀 염치를 알았으면 한다. 국민이 대통령을 욕하게 되는 것은 대통령의 불행이기 보단 국민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임 양 은 주필

손학규, 맞을수록 큰다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선두주자 손학규가 1 대 8의 집중타를 당했다. 어제 발표된 예비경선에서 4명이 떨어져 나갔으니 이젠 1 대 4, 특히 친노파 3명의 집단 견제를 받을 것이다. 토론회 때마다 그가 당한 공격은 한나라당 탈당 그리고 평소 지닌 생각이 한나라당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에 있으면 영판 3등에 머물것 같아 경선 불복보단 탈당 카드를 선택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대권의 웅지를 펴기 위해 탈당을 했으면 탈당의 원죄에 대한 비난은 감내하는 것이 대도로 가는 정치인다운 금도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관련한 그밖의 비난은 어의가 분명치 않다. 보수진영으로 분류하지만 진보와 보수, 보수와 진보의 담장은 상대적 개념이다. 이에 한국적 분류의 경계로 친북, 반북을 들지만 이도 상대적이다. 반공주의나 우리식사회주의는 한 시대를 넘긴 낡은 이념이다. 지금은 ‘실사구시’의 시대다. 손학규는 평양 근교에 대단위 경기도협업농장을 세웠다. 손학규가 친노도, 비노도 아닌 반노인 점에서 그같은 분류를 한다면 그건 맞다. 민주신당 경선주자들과 그가 한 자리에 있는 화면을 보노라면 좀 생뚱맞은 시각이 든다. 9명 중 손학규를 제외한 8명이 이젠 친노, 비노로 나뉘었지만 당초엔 노무현 정권의 사람으로 같은 태생인 것이다. 친노도 비노도 아닌 반노의 선두는 집중타를 당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대통합민주신당의 현실에 있다. 열린우리당, 민주당탈당파, 선진평화연대, 미래창조시민사회 등이 대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간판을 단 것이 대통합민주신당이다. 일명 ‘도로열린우리당’이기도 하다. 이 정권이 ‘도로열린우리당’을 만들긴 했지만, 신당이 열린우리당의 적통 적자이길 거부하는 것이 노무현을 중심으로 하는 친노세력의 고민이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지난달 31일 당소속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나타난 노무현 대통령과의 거리두기다. ‘서해북방한계선(NLL) 문제에 대해 보수적으로 대응하고, 정부의 분배위주정책과 교육평준화정책에 대한 방향 전환을 검토한다’는 것이 정책기조 발제의 요지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손학규가 1위를 현격한 차이로 앞서 달리면서 친노 주자들은 줄줄이 열세를 면치못한 경선 판도는 노무현 사람들에게 정치적 위기감을 안겼다. “가슴 저 밑에서 분노와 서글픔이 밀려온다”는 안희정의 말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노무현의 최측근인 그는 손학규·정동영이 예비경선 1·2위를 다툰데 대한 속내를 그같이 밝혔다. 엊그젠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김영삼 전 대통령 그쪽에서 범여권으로 넘어온 사람한테 줄서서 부채질하느라 바쁘다’는 노 대통령 말은 손학규의 지지세력이 팽창하는 것을 둔 불만이다. 이에 대한 역공 또한 만만찮다. 손학규는 ‘40일 동안 조용해서 나라가 좀 편해지나 했더니 또 시작한다’며 ‘노 대통령은 제발 대선판에서 비껴서달라’고 맞받아 쳤다. 이른바 ‘손님론’은 정체성 논쟁이다. 손학규는 범여권의 손님이라는 청와대측 말에 캠프측에서는 신당 창당의 주역이라고 공박한다.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든 4개 주체 가운데 선진평화연대는 손학규가 이끈 정치세력이다. 다만 손학규가 범여권에 든 게 눈에 아직 익지않을 뿐, 신당 창당 참여는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이제부터다. 4명을 걸러낸 본경선 경쟁 대열은 5명 중 친노파가 3명으로 수적으로는 단연 우세하다. 반노파 손학규, 비노파 정동영, 친노파 이해찬·한명숙·유시민 등이 벌이는 본경선은 필연적으로 ‘합종연횡’이 예견된다. 친노파는 이변이 없는한 한명숙과 유시민이 이해찬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화 옹립이 가능하다. 이해찬은 총리시절 노 대통령으로부터 ‘찰떡궁합’이라는 극찬을 받았을 정도로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궁금한 것은 손학규가 본경선에서 당의 대통령 후보로 뽑혔을 경우, 노무현 사람들이 손학규의 최종 승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들로서는 실로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승부사 기질이 몸에 밴 그들은 온갖 선거꾼 기량을 혼신의 힘을 다해 쏟을 것이다. 손학규는 친노파의 그같은 과정에서 샌드백처럼 집중타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양재도 잘못쓰면 독약이 되고 악재도 잘 쓰면 양약이 된다. 기전문화의 정수는 모든 것을 소화하는 중용이다. 중용은 ‘실사구시’의 요체다. 집중타를 두려워할 것은 없다. 손학규는 맞을수록 클 것이다. 대통합민주신당 본선 흥행을 보는 관전 포인트가 이 대목에 있다. 임 양 은 주필

탈레반 인질, 40여일만의 석방

생존 인질 19명이 전원 풀려나기까지는 긴장의 연속이다. 한꺼번이 아니고 수 명씩 순차적으로 석방한다는 것이 막판의 피를 말린다. 중간에 돌발상황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여 두렵다. 지난 7월19일 피랍된지 40여일만이다. 성남 분당 샘물교회 아프간 선교 및 봉사단 23명이 탈레반에 붙잡혀 억류된 과정에서 이미 남성 인질 2명이 피살됐다. 여성 인질 2명은 며칠전 조건없이 풀어주었다. 남은 인질의 알려진 석방 조건은 세 가지다. 아프간 주둔, 동의·다산부대의 연내 철군과 역시 현지에서 활약하는 비정부기구(NGO)요원들의 즉각 철수 그리고 아프간에서의 선교활동 중단이다. 선교활동 중단은 종교상의 문제다. NGO 철수는 시민단체 일이다. 그러나 철군은 주권 관련의 국가 대사다. 이는 연말로 이미 일정이 잡혀있다. 계획돼 있는 연말과 협상에서 합의된 연내가 어떻게 다른진 확실치 않다. 연말보다 서둘러 좀 더 일찍 철군하는 것이 연내가 아닌가 생각된다. 중요한 대목은 연말이든 연내든 주권에 속한 철군이 탈레반측과의 협상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다. 텔레반은 정부기구가 아니다. 아프간 반정부 무장 세력인 테러집단이다. 정부 기구가 아닌 무장집단과의 협상은 외교가 아니다. 그렇지만 인질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두려운 실체다. 엄연한 존재를 부정할 수 없어 부득이 갖는 실체 접촉은 그래서 외교가 아니고 다만 협상인 것이다. 비외교 협상에서 주권 관련의 철군 합의는 불가피하긴 했지만 일찍이 없던 선례로 남긴 수치다. 그렇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간 정부군에 억류된 탈레반 포로와의 맞교환 요구를 한국 정부의 권한밖 일로 설득시켜 포기케 한 것으로 자족해야 했다. 궁금한 것은 발표된 이외의 이면합의가 정말 없었느냐는 것이다. 몸값 흥정이 예가 될 수 있다. 탈레반의 순차적 인질 석방 조건이 그같은 이면합의 유무를 생각케 한다. 인질을 여러 군데로 분산시켰기 때문에 시일이 걸린다는 말은 좀 미덥지가 않다. 순차적 석방은 이면합의 이행의 담보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전원 석방 합의에 이른 것은 대면협상의 성과다. 정부는 적어도 인질이 모두 풀려나기까지는 어떤 군사행동의 징후도 보이지 않기를 아프간 정부와 미국의 백악관에 단단히 일러둘 필요가 있다. 탈레반이 인질을 산악지대에 분산 억류한 것은 군사작전이 감행될 것에 대비한 것이어서 군사적 징후는 곧 인질의 안전과 직결되는 인계철선인 것이다. 그렇찮아도 인질 석방 후 아프간군과 미군의 대규모 소탕전이 개시 될 것을 염려하는 탈레반 내부의 강경파 반발이 없지않다. 이에 빌미를 주는 돌연변이로 인질 석방에 차질을 빚는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번 인질 사태는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주요 언론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인질을 버스 째 납치한 대규모 피랍 사태는 처음이기 때문에 인질의 안전을 특히 주목한 것이다. 정부도 인질 안전을 최우선으로하여 이런 저런 체면은 돌보지 않았다. 대면협상의 직접 대화가 그렇고 연내 철군 합의 등이 그러하다. 떼죽음의 늪에 빠진 국민을 살리는데 다른 이유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몸값 지불이 없다 하더라도 벌써 가장 비싼 대가를 치렀다. 이미 밝힌 비정부 무장세력과의 비외교 접촉에서 주권에 관한 철군을 합의한 굴복은 돈으로 비교될 수가 없다. 외국 출타가 보편화됐다.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국민들이 많은 외국 여행을 한다. 다른 나라에 가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신변의 불안에 대해선 자신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 개인의 부주의나 경솔한 행동으로 국가에 폐해를 주고 국민에게 심려를 끼치는 것은 국민의 도리가 아니다. 특히 위험지역은 더 한다. 반정부군은 아프간만이 아니다. 반정부군이 아닌 무장강도집단이 또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일본의 경우, 세계여행안전정보를 날마다 방송함으로써 해외여행 안전에 경각심을 돋운다. 국내에서도 해외여행 국가를 분류해놓고는 있다. 그러나 이만으로는 미흡하다. 국가정보원 같은데서 철저히 분석된 해외여행정보를 공지할 의무가 있다. 아프간 피랍자 가족들의 그간 고생이 참 많았다. 피살된 두 인질 가족의 참담한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히 이제나마 돌아오는 인질들 또한 그동안 겪은 심신의 고통을 평생 잊지못할 것이다. “국민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는 더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는 일이 없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임 양 은 주필

이명박의 길

대통령 따논 당상의 맹신보다 박근혜측 융합이 우선과제다 섣부른 당 조직 李계열 개편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다 이명박이 당에 대놓고 쇄신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컨대 ‘한나라당은 시대적 정신이 뭣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은 말 자체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말은 맞지만 그는 당의 대통령 후보이지 당권을 가진 대표는 아니다. 그런 말을 정 하고 싶으면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로 우회적 표현을 하는 것이 옳은 처신이다. 경선 전당대회 이후 엊그제 처음 열린 한나라당 최고 위원회 회의자리에서 그는 가운데 자릴 앉기를 권해 받았다. 어느 자리에 앉았는진 모르겠으나 만약 대표 자리에 앉았다면 경솔하다. 당의 대통령 후보가 당 최고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좌중의 상석은 어디까지나 당 대표의 자리다. 당이 낸 후보다. 후보가 당을 재단 할 순 없다. 이명박이 경선 후유증 극복으로 요구받는 것이 당의 단합이다. 후보가 당에 군림, 좌지우지 하려고 들어서는 단합이 저해된다. 금이 간 균열의 봉합은 커녕 마저 깨지는 것이다. 정녕, 당의 결속을 위한다면 후보가 당에 겸손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대선 본선용 공약 같은 것도 앞으로 당과 협의해 매니페스토를 작성하는 게 정답이다. ‘대선선대본부’ 구성도 마찬가지다. 인간적 금도로 당 조직을 존중하는 가운데 개성을 살리는 것이 대통령 후보다운 역량이다. 이명박이 대통령 당선을 따놓은 당상으로 여긴다면 착각이다. 시급한 것은 경선에서 박빙의 승부차로 진 박근혜측과 화학적 융합을 이루는 것이다. 박근혜만이 아니다. 박근혜를 지지했던 말단 당원까지도 섭섭하게 대해선 대선 승리는 물건너 간다. 당 조직을 이명박 계열로 개편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렇다고 박근혜를 ‘선대본부장’으로 추대하는 것은 재고해 볼 일이다. 경선에서 이미 험한 말을 서로가 많이 주고 받았다. ‘박근혜선대본부장’은 모양새는 좋아도 상대에 대한 전략상 취약점이 된다. 본인 역시 고사할 것으로 안다. “백의종군하겠다”는 말의 뜻이 그렇게 보인다. 박근혜측과의 화합은 먼데 있는 게 아니다. 패자에 대한 승자의 보복을 삼가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이런 여론조사가 있었다. 경선에서 박근혜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박근혜가 경선에서 진 본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그래도 지지할 것이냐는 것이다. 결과는 약 절반이 안찍거나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명박이 1.5% 표차의 승리에 자만한다면 박근혜를 지지한 50%의 한나라당 표를 잃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진 한나라당 내부에 눈을 돌려 이명박의 길을 살폈다. 내부 못지않게 험난한 것이 외부의 사정이다. 문제의 도곡동 땅 의혹은 불씨다. 이명박과는 상관이 없는 억울했던 일로 밝혀질 것인지, 도덕적 의문 사항으로 묻어둘 것인지, 사법처리의 시한폭탄이 될 것인지 잠복된 불씨의 향방을 전망키 어렵다. 또 뭣이 제기될지 모른다. 그만이 아니다. 범여권은 그동안 이합집산의 전열 정비에 바빠 대선 채비가 늦었지만, 이명박이 생각하는 것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범여권의 중심 세력인 민주신당에는 친노·비노계보가 있다. 친노계보는 초초 맹장의 선거꾼들이다. 이들이 다시한번 또 뭉쳐 들고 일어났다 하면 무서운 괴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비노계열 가운덴 가공할만한 잠재적 폭발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 이러한 범여권이 단일 후보를 내세워 탄력을 붙이면 한나라당 독판 경선이던 때와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대선의 길은 마라톤 42.195㎞ 레이스보다 길고 험하다. 초반 선두의 마라톤 선수가 결승 테이프를 끊기도 하지만 밀리기도 한다. 대선 레이스에서 대세론은 무위하다. 한나라당이 번번이 겪은 정권 탈환의 좌절이 대세론의 미몽에 기인했다. 그래놓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내세우는 대세론은 역시 맹신이다. 이명박은 여론조사 실시 이후 내내 1등 해온 것이 함정일 수 있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냥 후보일 때와 본선 후보일 때와는 또 다르다. 어느날 하룻밤 새에 곤두박질 치는 것이 여론이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밀린 경선 표를 여론조사 표로 만회, 여론조사라면 톡톡히 재미를 본 이명박이지만 여론이 비수가 되어 되돌아올 수가 있다. 결국 경선보다 어려운 본선의 가시밭 길을 헤쳐가기 위해선 내적 요인의 극복으로 외적 요인에 대처해야 하는 걸로 집약된다. 그런데 이에 작용되는 가장 큰 덕목이 사람 됨됨이다. 이명박의 됨됨이 어떤지 두고 보는 것이다. 임 양 은 주필

학력위조의 ‘함정’

그 때, 조선일보가 공모한 지방 주재기자 시험에 대졸 학력 제한을 두지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통하다. 그전까지 고졸 학력으로 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린상고만 나와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낸 장기영씨가 사장으로 있던 한국일보만이었다. 나는 대학을 문턱만 걸치다 말았지만 대학중퇴는 학력이 아니다. 나의 학력은 고졸이다.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위조가 터진 이후 김옥랑 단국대 전 교수의 가짜 대학 학력이 드러나 학력 파문이 잇달고 있다. 놀라운 것은 ‘고졸교수’로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까지 하고 동숭아트센터 대표까지 지낸 사실이다. 학력을 속인 것이 문제이지 교수 실력은 있었다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KBS라디오에서 성가를 떨쳤던 어느 영어 강사 역시 학력위조로 7년동안 이끈 프로그램을 도중하차 하긴 했지만 인기를 모았던 것은 그의 실력이다. 이들의 거짓 학력은 지탄받아 마땅하면서도, 그렇게 해서라도 기회를 잡지 않았으면 재능을 뿜지못했을 것이다. 이 역설을 어떻게 봐야할지 참 찜찜하다. 교육법은 고등학교의 목적을 ‘고등보통교육과 전문교육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대학교육은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그 광범하고 정치한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학문을 공부하는 곳이 대학인 것이다. 학문에도 전공부문이 있다. 그런데 대학을 나와 전공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냥 대학을 나오기 위해 들어가기 좋은 학과를 선택하기도 한다. 물론 대학에서 공부한 학문을 전공으로 평생 연구에 종사하며 국가사회에 공헌하는 이들도 있다. 임권택 영화감독은 고졸학력으로 대학 강단에 선다. 극작가이며 연극 연출가인 이윤택 시인 역시 고졸이다.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초등학교도 다니다 말았지만 생전에 받은 명예박사가 서 너개나 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덴 대학을 안 나온 사람이 약 절반이다.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 대통령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어 백악관의 주인이 됐다. 제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종식시킨 트루먼 대통령은 고등학교만 나왔다. 그러고 보니 국내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포상고,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상고 출신의 고졸 대통령이다. 대학, 그것도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은 좋다. 비록 대학에서 공부한 학문분야를 사회에 나와 종사하지 못할지라도 공부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문제는 실력을 학벌주의 위주로 보는데 있다. 부모가 자녀의 배우자감이 생기면 먼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고 묻는 게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요즘의 세태다. 대학은 당연히 나왔을 것으로 보고 어느 대학인 가를 묻는 것이다. 대학을 안 나왔다고 하면 교수를 안 시켜줄 것이므로 교수가 되기위해 학력위조를 한 것은 그렇다 해도, 학력위조는 일상의 생활에서도 많다. 맘에 든 배우자감을 놓치지 않기위해 안 나온 대학을 나왔다고 하거나 다른 엉뚱한 대학을 나왔다고 속이는 것도 학력위조다. 대학졸업을 사칭했다가 모처럼 당선된 지방의원직을 상실하는 것을 볼 땐 실소를 자아낸다. 일본에선 지금 나온 대학을 안 나온 걸로 학력위조를 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많아 골머리를 썩히는 것으로 전한다. 요코하마시는 700여명, 오사카시의 경우는 1천140여명이 대졸학력을 고졸로 속여 공무원이 됐다는 것이다. 1990년대 장기불황이던 때 고졸 취업을 넓히기 위해 대졸은 응시 제한을 한 바람에 이같은 학력의 하향 위조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를 자진신고한 공무원에겐 1개월 정직과 함께 자원봉사 등의 중징계를 내렸다지만, 학력의 상향 위조만 보아온 시각으로는 그도 징계감인가 싶어 생소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평생 중 기억력이 가장 왕성하다. 나의 경우는 수학을 못해서 물리학도 싫었지만 예컨대 중력의 가속도를 구하는 ‘S=2분의1gt²’ 공식을 아직도 기억한다. 황산덕 서울대 교수의 ‘법철학’ 저서를 읽은 것도 고등학생 때다. 한국 및 세계 문학의 고전을 비롯해 카뮈의 실존주의 소설 ‘이방인’ 등 근대 작품을 섭렵한 것도 그 때다. 공산주의 서적을 어렵게 구해 탐독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지금의 고등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행 되지 못하고 학생들이 학과외의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은 대입지옥 때문이다. 물론 공교육의 정상화로 이를 고치긴 해야겠지만 대학 입시는 어차피 언제나 지옥이다. 세상 사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대학은 마땅히 존중돼야 하지만, 학벌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팽창되어서는 ‘대학이 뭐길래’하는 의문이 가능해진다. 또 이래서 생기는 학력위조는 자기 부정이다. 간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능력이다. 임 양 은 주필

남북 정상회담을 또 하면!?

노무현 정권의 양수 겸장이다. 김정일 정권은 밑져야 본전이다. 오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간 갖는 걸로 남북간에 동시 발표된 두 정상회담은 한나라당이 보는대로 껄끄러운 점이 없진 않다. 시기로 보아선 넉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정략적 수단으로 볼 수 있다. 대선을 앞둔, 그리고 북녘에 잘해준 노무현의 임기 말에 노무현에 대한 김정일의 이벤트성 선물인 것도 사실이다. 장소로 보아선 7년전에 김대중이 평양을 방문한 답방으로 김정일이 남쪽에 오는 게 순린데도 데데하게 또 만나고 싶으면 평양으로 오라고 한다. 목마른 사람이 샘 파는 격으로 아쉬운 사람이 오라는 것이다. 추진 방법이 밀실 접촉인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청와대는 정상회담 추진설이 나돌때마다 부인하면서 물밑 접촉을 해왔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남북 정상회담을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것은 노무현의 양수 겸장에 걸려드는 자충수다. 남북 문제는 민족사적 최대의 현안이다. 두 정상이 만나는 반대 이유로 시기와 장소와 방법을 꼬치 꼬치 따질 일은 아니다. 껄끄러운 대목이 있어도 만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졸렬하다. 노무현은 민족사적 현안 타개를 내걸면서 한나라당의 그같은 자충을 유도하는 노림을 깔았다. 노무현에게도 정상회담이 자충이 되는 부담이 없는 건 아니다. 김정일을 만나는 것이 대수인 것은 김대중의 평양 방문으로 족하다. 노무현·김정일 회담은 이젠 만나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만나서 웃는 모습으로 사진 찍고 덕담이나 건네는 수준의 회담 같으면 아무 감흥을 주지 못한다. 노무현의 평양 방문은 김정일의 핵무기 폐기 선언을 이끌어내야 비로소 평가받는 가치가 발생한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남북경협 및 교류확대, 북미 국교정상화 등도 대량 살상무기의 실체적 위협이 사라져야 가능하다. 상호 군축이나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등도 매한가지다. 남북간 철도 및 도로 개통, 자유왕래 등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노무현이 김정일을 한 번 만난 자리에서 단번에 다 해결할 순 없다. 그러나 핵무기만은 불능화가 아닌 폐기 언질로 한반도 비핵화선언 당시로 되돌려야 한다. 담보가 장치되어 번복할 수 없는 절대적 가능성을 이끌어내야 국민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만약 이를 다 하지 못하면 노무현 또한 김정일의 선심성 대선용 방문이란 비판을 면치 못하는 자충에 빠진다. 평양 방문에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2000년 김대중의 평양 방문시 김대중은 공항에서 김정일의 리무진 승용차를 타고 함께 갔다. 연도의 평양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은 김정일이지 김대중이 아니다. 어떻든 그 때, 40분이든가 김대중 혼자 김정일과 동행한 그 시간은 국가의 통치권 접촉이 완전히 차단됐다. 대통령의 통치권 접촉은 한 시의 단절도 있어선 안 되는 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장시간의 공백이 생겼던 사실을 노무현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조선은 같은 공산주의인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국가와는 물론이고 심지어 쿠바와도 달라서 대한민국, 즉 남한과는 체제가 상극이다. 그러나 더 이상 동족끼리 피를 보아서는 안 된다. 남과 북의 공존 공영, 나아가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다. 자주 만나야 한다. 남북간 두 정상회담은 이에 으뜸가는 수준을 지닌 직접 대화인 것이다. 기류로 보아 대선 전 회담을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일정이 이르게 잡혔다. 10월쯤이나 있게 될 줄 알았던 것이 생각보다 두어 달 앞당겨졌다. 노무현은 김정일의 직접대화 수용 용의가 국민적 땀의 대가임을 명심해야 된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이후 지금까지 북에 공식·비공식으로 이래 저래 흘러 들어간 돈이 자그마치 약 10조원이다. 이만한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정상회담에 응하고, 앞으로 또 더 큰 이득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남북관계만 잘 되면 다른 건 깽판쳐도 된다”고 말 한 적이 있다. 이미 다른 건 숱하게 ‘깽판’이 났다. 임기 말에 갖는 남북 관계 최고의 만남에 뭣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 지 주목하고자 한다. 그냥 만나는 것만으로도 대선에 의도된 영향을 줄 것으로 여겨서는 착각인 것이 국민사회는 그토록 어수룩하지 않다. 김정일의 원맨쇼나 보게 하고 그의 간만 키워 놓는 만남이 되어서는 악수가 된다. 뭣보다 평양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이 투명해야 할 것이다. 양수 겸장도 되물림으로 외통수를 당하는 수가 있다. /임 양 은 주필

' 소나타1악장'

빈소를 차리고 화장을 하는 장례예식장은 더러 납골당을 두기도 한다. 그런데 장례예식장을 두고자 하는 곳마다 말썽이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장례예식장을 만들려는 자치단체장은 으레 역적 취급을 당한다. 서울 홍제파출소 뒤편에 화장터가 있었다. 벽제장례예식장으로 옮겨가기 전의 일이다. 홍제파출소 앞에서 시내버스를 내려 집을 가려면 화장터 옆길을 거쳐야 하는데 이게 고역이다. 안 그래도 기분이 언짢은 터에 날씨가 우중충하면 경유를 땐 굴뚝에서 나온 검정 그을음이 흩날리면서 누린 냄새가 풍긴다. 내가 한 때 장례예식장을 싫어했던 것은 젊었을 적에 겪은 이런 좋지못한 기억 때문이다. 심지어 문상을 다녀오면 목욕하고 입성도 벗어 빨도록 했다. ‘사람은 살면서 변한다’는 말을 실감한 것은 가족의 장례를 치르면서다. 부모와 아내를 보내고난 뒤, 그리고 이젠 내 차례라는 생각이 들면서는 장례예식장에 갖는 관념이 달라졌다. 이래서 장례예식장 건립을 두고 ‘결사 반대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일찍이 지녔던 혐오적 관념을 떠올리곤 한다. 죽은 이의 혼령에 갖는 인식은 신앙의 자유다. 분명한 건 혼령이 입었던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땅속에 묻혀 썩는 물리적 변화든, 불에 타 가루만 남는 화학적 변화이든 간에 어차피 몸은 자연으로 간다. 이런 가운데 화장이 선호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렇게 보인다. 우선 매장은 돈 드는 부담이 크다. 국토의 묘지화를 걱정하는 견해가 있다. ‘명당자린 99.9%가 없다’는 지관들이 있다. 무엇보다 묘에 대한 관심이다. 나도 대구에 있는 선친의 묘소를 1년에 한 번 성묘가는 것도 벼르고 벼른 끝에 겨우 간다. 하물며 내 자식인들 애비보다 더 나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미리 포기한지가 오래다. 사족을 붙이자면 사후 시신을 가톨릭의대에 이미 기증해 놨다. 지금의 장례예식장도 화장장이다. 화장장이긴 해도 예전의 홍제화장터 같진 않다. 수년 전 수원 하동 두메에 있는 수원시연화장을 가보고 놀랐다. 20년 전 이던가, 권선동에 있었던 굴뚝화장장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장례예식장의 시설 현대화는 날이 갈수록 첨단으로 치닫는다. 시설만이 아니다. 주변 환경의 공원화도 여러가지로 연구되어 얼핏 보면 장례예식장 같지 않은데가 있다. 아무리 장례예식장을 첨단화하고 공원화해도 기분 좋은 곳이 아닌 건 맞다. 인간의 이런 보편적 정서는 죽음에 대한 거부 욕구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싶지 않은 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태어나면서 전제된 인간의 숙명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간에 한 사람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숙연하게 보아야 하는 의미가 이에 있다. 죽으면 거의 거쳐가야 하는 장례예식장을 모독하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장례예식장이 썩 내키는 곳은 아닐지라도 혐오시설로 매도하는 건 좀 심하다. 육신의 종착지가 혐오시설이라면 인간의 가치를 너무 없어보이게 하는 혹평이다. “도시의 이미지를 떨어뜨린다”고 한다. “집값이 떨어진다”고 한다. “자녀 교육에 좋지 않다”고도 한다. 정말 이런데에 장례예식장을 짓는 자치단체장이 있으면 그는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는데에 장례예식장을 짓는데도 혐오시설로 우기면 반대를 위한 트집쟁이 꾼인 것이다. 장례예식장은 지을만한 곳에 더 지어야 한다. 인간 생활의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엔 노소가 없다. 나이는 다만 확률일 뿐이다.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 오만이 허용될 수 없다. 장례예식장에 갖는 거부감이 오만일 것 같으면 그는 참으로 멋모른 가여운 인생이다. 생각의 여유는 마음의 문을 닫느냐, 여느냐에 달렸다. 악성 쇼팽의 장송곡은 애도의 장중함이 인간의 죽음에 숙연성을 갖게 해주지만, 원래 장송곡으로 작곡한 것은 아니다. 지병인 폐결핵 요양을 위해 여류시인이며 애인인 상드와 함께 마조르카섬에서 지내면서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악장의 한 부분이다. 이를 작곡하고 요절한 그의 곡을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렸던 짧은 생애를 기려 후세 사람들이 장송곡으로 삼은 것이다. 쇼팽의 천재성은 어쩜 죽음을 계시받고 이 곡을 작곡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 뜻하는 숙연성은 쇼팽의 장송곡 이상으로 장중하다. 조간 신문에서 아침부터 죽음을 자꾸 얘기했다 하여 탓할 것 까지는 없다. 죽음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숙제다.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간은 행복하다. 그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삶을 누리는 건 최대의 행복이다. 우린 모두 행복한 사람들인 것이다. 임 양 은 주필

‘쟁이골’에서

그곳엔 그런 것이 없었다. 우렁이속 같은 범여권의 만화경도, 조폭 같은 한나라당의 아귀 다툼도 없었다. 사는 걱정도 접어두었다. 생각이야 어찌 없을까만, 그런 세속을 입에 담을 장합이 아닌 것이다. 화성시 서신면 장외리 2 옛 함산초등교 터, 폐교된 그곳은 무성한 느티나무 이파리들이 제부도 갯바람에 속삭이듯 하늘거렸다. 운동장에서는 청소년들의 ‘덩더꿍 똑딱 덩더꿍’하는 장구 소리가 적막을 깬다. 농악대 차림의 상모를 제법 돌린다. 강당에서는 가야금이나 피리를 배우는 고등학생 또래들이 가락 삼매경에 빠졌다. 쟁이골이다. 십여년 전 폐교된 학교를 문화예술촌으로 만들었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우리 가락은 쟁이골 문예학교의 청소년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든 것 중의 몇 가지인 것이다. 촌장 김명훈은 별종이다. 혼약하여 내년에 며느리를 볼 아들, 사위를 봐야 할 장성한 딸이 있는데도 언제나 백발동안이다. 덥수룩한 털보의 구레나룻이 순백인데도 얼굴은 앳되다. 그러는가 보다 했는데, 그 곳이 이런 곳인 줄을 가서 보고 비로소 알았다. 앳되 보이기는 그의 부인 또한 마찬가지여서 이도 ‘부창부수’인가 보다. 산수좋고 공기좋은 벽촌에서 문화생활을 하여, 보다 젊어보이는가 하는 느낌이 물씬 났다. 사업 경영이 어찌 쉬울까마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일 게다. 그러고 보니 난 그를 잘못 알았다. 한 12년 전인가, 중부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고, 지금은 경기언론인클럽 사무국장을 한다. 경기언론인클럽은 회장도 그렇고 사무국장 역시 봉사하는 자리다. 언론계 후배로만 여겼던 그가 그토록 대단한 촌장인 줄은 처음 알았다. 내친 김에 더 하면 몽골촌 캠프장, 도예 및 제부도 갯벌체험, 전통무예, 체험학습종합센터, 청소년 수련 등 이밖에도 하는 일이 참 많다. 이윽고 2007 단봉예술제가 시작됐다. 쟁이골에 간 원래 연유가 이 때문이다. 개회식도 축사도 뭣도 없이 곧장 행사로 들어가는 것은 도식적인 것을 싫어하는 촌장의 성질머리 그대로다. 마침 들른 최영근 화성시장 또한 여느 사람들과 어울려 소탈하게 담소하는 게 보기에 좋았다. 판소리며 성악 등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갖가지로 접목된 흥겨운 한마당 잔치가 질펀하게 운동장을 깔았다. 사람들은 200명쯤 되어보였다. 그런데 별종은 촌장만이 아니다. 말총머리 아니면 모시두루마기에 검은 안경을 끼는 등 별별 희한한 별종들이 다 눈에 띄었다. 털보들도 많아 웬일인가 싶었더니 ‘전털련’(전국털보연합회)인가 하는데서 회원들이 털보 촌장을 보아 우정 도우미로 나섰다는 후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이고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이다. 관념과 인식을 병행하는 것이다. 관념은 감성이고 인식은 이성이다. 예를 들면 여러가지의 종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데 뭔가 적힌 것을 먼저 줍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적힌 종이를 먼저 줍기도 한다. 뭔가 적힌 종이를 먼저 줍는 것은 적힌 내용이 필요할 걸로 보는 인식으로, 즉 이성이다. 반면에 아무것도 안 적힌 걸 먼저 줍는 건 백지가 필요할 것으로 보는 관념, 즉 감성인 것이다. 문예는 감성에서 출발하여 이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정서다. 순백의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흰 바탕에 뭣을 담을까 하는 건 창작의 자유다. 그날 모인 사람들 역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예술제를 보면서, 각자의 흰마음 바탕에 자기 나름의 생각들을 담았을 것이다. 뭣을 담았든 분명한 것은 거의가 ‘정중동’(靜中動)의 선(仙)을 가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명예욕이나 돈 같은 명리도 좋지만, 인간은 때론 그런 것을 넘어 조용히 자신을 생각해보는 백지장같은 순백의 시간이 필요하다. 삶의 심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사는 무상해도 세월은 항상 같아서 변함없이 간다. 세월을 타고 흘러가는 인간사는 그래서 오만이 겸손보다 못하다. 난 그같은 상념을 가지면서 쟁이골을 떠났다. 낮에 떠나서 경험하진 못했지만, 단봉제 행사는 밤에 야영불을 피워두고 동동주 잔도 기울인 것으로 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정담을 꽃피운 자린, 원초적 인정으로 인간살이에서 서로 간의 정리인 것이다. 범여권의 만화경도, 한나라당의 아귀다툼도, 사는 걱정도 잠시 접어두었던 곳에 있다가 나와보니, 대선 타령이 요란하고 살아갈 걱정이 태산이다. 이래서 쟁이골 같은 일이 많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또 갖는다. 맑게 씻긴 심성이 여운처럼 남아 우리들의 피곤한 심신에 탄력을 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노인정의 ‘복달임’ 笑劇

초복날이다. 복달임이 있었다. 한여름 더위를 물리치는 복달임엔 수박 같은 제철 과일 등이 있다. 삼계탕도 좋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복달임에는 개고기가 제격이다. 개고기를 말하자니까 곁가지로 먼저 덧붙일 게 있다. 닭잡는 도계장도 있는데 도견장이 없는 것은 식품위생법의 허점이다. 개고기를 법제화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는 생각일 게다. 기르던 애완견이 죽어도 개 전문장례장이 있어서 조사까지 읽으며 장례를 치른다는데 개고기를 먹다니, 노발 대발하는 동물 애호가들도 있을 것이다. 왕년의 프랑스 육체파 여배우 브리짓 바르드는 88서울올림픽이 열릴무렵, 한국의 보신탕문화를 매우 심하게 비난했다. 그녀는 은막을 은퇴한 후 동물사랑운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물애호가들도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면, 고기를 먹을 것이며 고기는 곧 동물인 것이다. 일본이나 몽골 사람들은 우리가 안 먹는 말고기를 먹고 서구에서도 말고기를 먹는 데가 있다. 육식문화는 인식의 차이가 아닌 관념의 차이인 것이다.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던 지학순 대주교가 살아계셨을 때의 일이다. 한 번은 외국의 모임에서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는다지요?”하는 빈정거림에 “예, 식용개가 있으니까요”라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다. 외국인은 애완견을 잡아먹는 줄 알지만 그런 개고기는 주어도 안 먹는 게 아니고 못 먹는다. 복달임 개고기, 전래 민속상의 식용 개고기는 흔히 말하는 ‘똥개’가 최고다. ‘황구보신탕’이 으뜸인 것이다. 글의 곁가지가 너무 길어져 본체로 들어가야 겠다. 그래서, 초복날 개고기 복달임이 있었던 곳은 수원시내 어느 노인정에서였다. 소문은 개를 잡는다고 났는데 그게 아니고 추렴을 한 것이 열 댓 분이 한 마리도 아닌 반 마리를 산 것이다. 화제는 사람은 많고 개고기는 적은데서 시작된다. 또 개고기만 산다고 맛있는 보신탕이 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마늘 깨 파 같은 양념이 좀 많이 들어가는게 아니고, 애쓰는 공력이 얼만데 바깥 노인들이 삶을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집안에서의 노부부나 노인정에서의 안노인, 바깥노인들 사이나 지내다 보면 좀 언짢은 일이 있을 수 있어 마침 서로가 삐죽거린 틈이 생겼던 터라 개고기 요리를 안노인들에게 부탁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인접한 경로급식소에 부탁해 도움을 받게 됐는데, 이도 처음에는 바깥노인들이 주방만 빌리자고 한 것을 안심찮게 여긴 급식소에서 아예 도맡았던 것 같다. ‘전어굽는 냄새 맡고 집나간 며느리 돌아온다’는 속담이 있지만 개고기 삶는 냄새 또한 여간 진동하는 것이 아니다. 벌써 개 잡는다는 소문이 퍼진데다가 냄새까지 진동하다 보니 이웃 가게들도 대단한 복달임이 벌어지는 줄 알고 우스갯 축하소릴 한 마디씩 했으나 그게 아니다. 정작 다 삶킨 고깃 덩이는 얼마 안 되는데 비해 사람들은 추렴한 사람 수보다 많아 자원봉사 아주머니들이 고깃살을 찢으면서도 개고기 한 점을 입에 넣지 못했다. 이에 이어 벌어진 코미디가 재밌다. 바깥노인들은 살코기를 먹으면서 안노인들에게는 국물만 한 그릇씩 보낸 것이 그만 화근이 됐다. 국물은 제대로 우러난데다 잘된 양념이 듬뿍 담겨 먹음직했다. 그래서 생각한다고 보낸 게 ‘누군 고기 먹고 누군 국물만 먹느냐’는 안노인들의 비아냥만 사고만 것이다. 고기는 모자라지만 추렴에 들지않은 한 바깥노인이 마침 지나가다 들른 것을 자릴 같이 했다. 그에게 ‘돈 만원을 내라’고 하니까, ‘이런 자린 줄 모르고 먹었기 때문에 못내겠다’고 하자 누군가가 ‘다른 ○○들에겐 잘 쓰면서 그러냐?’고 말해 한바탕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노인정의 개고기 복달임엔 얘깃거리가 참 많다. 개뼈다귀 촌극도 있고, 돈 말 끝에 만담 같은 은행 나들이 얘기 등도 있었다. 모든 분들이 다 젊어선 한가락씩 한 사람들이다. 이젠 나이 들어 그런 면모를 찾기 어렵지만, 사업가 출신, 고위공무원 출신, 전문직종 출신 등도 있다. 물론 노인정엔 살기가 넉넉잖은 노인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젊었을 적에 벌어놨지만 예컨대 자식들 사업자금으로 떼어주고는 사업이 안 되어 자식도 어렵고 부모도 어렵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날 개고기 복달임 추렴을 한 사람들 중에는 형편이 나은 사람도 있다. 보신탕을 사먹을 수 있는데도, 굳이 추렴을 한 것은 사람 사는 재미였던 것이다. 사소하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랄 수 있는 이 이야길 칼럼으로 쓰는 것 역시 사람 사는 포근한 얘길 하고 싶어서인 것이다. 나도 노인으로 그 노인정 회원은 아니지만 지인의 초청을 받아 개고기 복달임에 갔다가 본 소박한 정경을 옮겨 보았다. 복날은 또 다가온다. 복달임은 뭐니 뭐니 해도 개고기 잔치가 으뜸인데, 노인정마다 안팎노인들이 복달임을 함께 즐길 수 있게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중복이 오는 25일이고, 8월14일이 말복이다.

동탄2 ‘골프장 특혜’ 노무현식 正義인가?

이것이 대통령 노무현식 사회 정의인가, 맞으면 ‘맞다’하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몇천만원 대로 껑충 껑충 뛰어 이를 사려고 야단 법석이라더니 요즘은 가당찮은 1억 설까지 나온다. 동탄신도시 2지구 안에 든 골프장 회원권이 이 지경이라는 것이다. 관계 당국은 마땅히 실태 조사에 나서 확인해야 할 일이지만, 골프장 특혜 의혹의 파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토지 수용으로 쫓겨나게 된 18개마을 1천200여 명의 주민, 그리고 240여 등록 공장과 600여 무등록 공장 등 840여 공장은 갈 곳이 없어 아우성이다. 중앙집권의 전횡에 시달리는 화성시와 화성시의회는 안간힘을 다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지방분권을 말하는 이 정부가 분권은 커녕 지방자치마저 말살하기 때문이다. 동탄신도시 2지구 계획을 발표한 이 정권의 눈엔 골프장만 보이는 것 같다. 성업 중인 골프장 세곳과 예정지 두 곳 등 782만여㎡는 수용 대상에서 제외시킨 반면, 주민의 농토며 공장 부지 등은 수용해 몰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 바람에 주민들은 신도시에 수용되지 않아도 될 171만6천여㎡의 농토가 골프장 때문에 편입됐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이만이 아니다. 오산시 오산동 일원 287만㎡, 용인시 남사면 북리·통리 일원 957만㎡에 대한 개발행위제한구역 지정이 골프장 봐주기와 무관치 않은 날벼락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도대체 골프장이 뭐길래, 이토록 대대로 살아온 주민 그리고 가까스로 기업을 일궈낸 공장보다 더 중하다는 것인가, 정책 판단의 오류로 보기보단 특혜쪽에 의혹이 훨씬 더 쏠린다. 정부측이 말하는 매입비 과다 등 이유는 타당성이 결여돼 변명을 위한 변명이라는 게 객관적 판단인 것이다. 국가 권력과 사회 특권층의 결탁으로 비치는 특혜 의혹이 제기되어서는 정의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누군가는 말했다. “국내에서 미국으로 골프장 달린 집 사려고 가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명품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골프장 달린 집 사려고 미국까지 가는 작자가 얼마나 되는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같은 관점의 주택정책 기조는 무주택자의 집 마련과는 거리가 멀어 가진 계층의 투기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골프장 달린 집까진 못되어도 골프장 투성인 동네의 신도시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골프장을 놔두는 것은 유해 환경이며 혐오 시설이다. 동탄신도시 2지구가 아무리 돈 많은 부자가 입주하는 명품도시일 지라도 주민들이 다 골프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보단 서울대공원 같은 도심속 대공원을 만드는 것이 남녀노소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는 전향적 웰빙 시설이다. 골프장이 잔디 보존만을 염두에 두어 유독성 농약을 뿌리는 것은 종종 말썽이 있었던 현상이다. 도심속 골프장은 유독성 농약이 빗물에 흘러 내리는 도심공해 유발의 원천이 되기에 족하다. 농민의 농토, 공장 부지 등은 수용해가며 유독 수용에서 제외되는 골프장의 개발 이익은 대체 얼마나 돌아가는 것일까,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나다. 하루 아침에 금싸라기 땅이 된 골프장 부지는 언젠가는 또 더 비싼 아파트 부지로 둔갑될 수 있다. 불로소득도 유분수지 이런 불로소득은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이라면 용인될 수 없다. 이런데도 이 정부는 골프장만 감싸고 돌아 특혜 의혹을 증폭시킨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영세 계층은 무력감에서 환장하고 나자빠질 일이다. 동탄신도시 2지구 현지는 신도시계획 철회 요구가 전반적 분위기다. 중앙 권력의 일방적인 재산권 제한이 헌법 정신에 합치되는지 또한 의문이다. 명품도시 건설이 재산권 제한의 정당한 사유가 되는 공공 필요시설로 볼 순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주민들이 촉구하는 생계 및 이주대책, 공장기업주들이 요구하는 공장 밀집지역의 예정지구 제척 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침묵으로 외면해서는 일시에 원성이 폭발할 수가 있다. 급한 것은 당장 골프장 수용을 결정하는 일이다. 도시공학으로도 골프장을 놔둬서는 신도시 형태의 기형적 개발이 불가피하다. 또 골프장 특혜 의혹의 불의를 묻어두어서는 현지와 어떤 타협도 원만히 이뤄질 수 없다. 이것이 언행이 다른 노무현식 정의가 아니라면, 동탄신도시 2지구는 계획을 철회하거나 아니면 전면적 재검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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