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남들에게 정장 바지는 없어선 안될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더운 여름이면 땀이 많아 엉덩이 부분이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외관손상훼손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유형이 가장 많다. 엉덩이 찢어짐없이 신사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자. ■품질표시, 취급상 주의사항을 꼼꼼히 확인하자 의류 등 섬유제품은 특성상 착용 또는 세탁과정에서 사고가 발생되기 쉽다. 그 중 상당수가 제품의 품질표시 및 취급상 주의사항을 간과해 발생한다. 취급 시 주의사항은 제품의 중요한 표시이므로 제품 구입시, 착용 또는 세탁 전에 세탁방법 등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착용자의 착용세탁보관 방법에 따라 제품의 상태가 달라진다 견이 함유된 제품 등은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철 착용 환경에서 손상받기 쉽다. 정장 바지 한 벌을 매일 입는 것 보다 여러 벌을 자주 교체해 착용하는 것이 좋다. ■전문가에게 자문 또는 품질 시험검사를 의뢰하자 의류 등 섬유제품을 사용 또는 세탁하면서 발생한 하자의 원인은 다양하고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없어 전문가(심의기구 등)에게 의뢰해 의견을 구하는 것이 좋다. 다만 심의의 경우 육안이나 간이테스트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관능검사로 시험항목 및 권장기준이 있어 품질시험검사가 가능한 경우에는 이를 통해 보다 정확한 원인규명을 해 볼 수 있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과 세탁업표준약관 내용을 알아두자 섬유제품 및 세탁서비스와 관련해 분쟁이 발생하면 소비자분쟁해결기준, 세탁업 표준약관 등 관련 규정이 기준이 되므로 이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모씨(여30)는 지난 4월 산후조리원을 방문해 6월25일 입소할 예정이라는 의사를 밝히고 2주 이용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카드로 계약금 31만원을 결제했다. 한 달 정도 지나 개인사정으로 입소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업체에 계약해제환급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최모씨(40)도 마찬가지다. 최씨는 지난해 2월28일 분만 예정일을 기준으로 이용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 10만원을 지급했다. 예정일보다 빠른 22일 출산을 한 뒤 입소를 하기 위해 산후조리원에 연락하니 업체와 연계된 병원에서 분만하지 않았다며 계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이처럼 산후조리원 업체들이 계약해제 요구를 거부하는 등 관련 소비자피해가 급증하고 있어 산후조리원을 이용하려는 소비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8일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1372소비자상담센터에 접수된 산후조리원 관련 상담건수가 2010년 501건, 2011년 660건, 올해 상반기 404건으로 매년 30% 이상 급증하고 있다. 올 상반기 산후조리원 관련 상담 404건 중 계약해제 거부가 216건(53.5%)으로 가장 많았고, 질병안전사고(감염, 상해)이 61건(15.1%), 부당행위(입실 거부) 35건(8.6%), 기타 문의(부가세, 가격) 92건(22.8%)가 뒤를 이었다. 현재 모자보건법에서 산후조리원이 갖춰야할 인력 및 시설기준, 산후조리업 신고절차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분쟁에 대해서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의 계약해제 관련 규정 외에 별도의 기준이 없어 질병안전사고 등 소비자 피해에 대해 적절한 배상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따라 한국소비자원은 소비자피해 사전 예방을 위해 ▲계약서, 약관내용 확인 ▲계약서에 환급 기준 및 약정내용 기재 ▲산후조리원 시설 확인 후 계약할 것을 당부했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산후조리원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병 및 안전사고 등에 대한 배상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며 산후조리업자의 안전사고 예방 등에 대한 철저한 관리감독도 이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Q. 지난 6월20일 방문판매원에게 위인전집을 구입하고 대금 35만원을 신용카드로 결제했습니다. 남편의 반대가 심해 일주일이 지난 후 청약철회를 요구했는데 판매원은 시일이 많이 지났고 박스도 개봉됐기 때문에 철회할 수 없다고 합니다. A. 방문판매등에관한법률에 따르면 소비자는 계약서를 교부받은 날부터 14일 이내에는 그 계약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 만일 소비자가 물품을 훼손했다면 철회할 수 없지만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포장을 훼손한 경우에는 철회 거부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소비자가 물품을 구입한 후 일주일만에 철회한 것이므로 소비자는 판매원에게 책을 반품하고, 판매원은 책이 훼손됐는지를 확인한 후 책을 반환받은 날부터 3영업일 이내에 대금 35만원을 환불(신용카드 결제 취소)해야 합니다. 자료제공=경기도소비자정보센터 손철옥 팀장 (031)251-9898
책벌레였던 남자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라디오 프로그램 은방울과 차돌이에서 차돌이 역할을 맡으며 일찌감치 방송계에 발을 디딘다. 어느새 50이라는 나이를 훌쩍 넘어섰지만 지금까지 방송국 문턱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수더분한 옆집 아저씨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비열한 아버지 역할로 분한다. 그런 그가 한국 최초의 비언어(非言語) 연극 난타를 들고 나타났다. 처음엔 뭔가? 하던 국민들이 열광했다. 이어 뉴욕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했다. 아시아 국가에선 처음있는 일이다. 새로운 길을 열고 기적을 만든 문화 수출자이자 문화 CEO, 바로 PMC프러덕션 송승환 회장이다. 난타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열정의 산물이다. -2010년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 초대학장에 취임하면서 30년 넘게 핀 담배를 끊으셨다면서요. 못끊었어요. 다시 피고 있어요.(하하) 실패하긴 했지만 많이 줄였습니다. -대학에서의 융합 문화, 여전히 낯선데요. 어떤 의민가요. 요즘 융합이 유행이다시피 많잖아요. 말 그대로 융합이에요. 무용과 학생이 학점을 인정받으면서 연극과, 음악과 수업을 들을 수 있어요. 무용하는 친구도 연기나 음악을 알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 경영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크로스해서 수강할 수 있게 한 거죠. 졸업생이 없어 성과를 알수는 없지만, 학생들이 많이 달라졌다는 건 확실합니다. -문화관광체육부장관 물망에도 올랐었죠? 문화 산업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 적임자라는 생각도 드는데. 물망에 오른 게 아니고, 구체적인 제의를 받았어요. 제가 고사한 거고. 직접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하하) 행정일 하시는 분들한테 현장 일을 잘 전달하면 되는 거지, 제가 직접 그 자리에서 일하기엔 능력도 부족하고 일단 저는 자유스럽게 살고 싶어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흔히 대박 터뜨린 연예인으로 꼽힙니다. 솔직히, 얼마나 버셨나요. 난타가 대박이 났죠, 제가 아니라. 1997년도에 초연하고 올해로 15년 됐는데 지금도 계속 매진이에요. 돈이 없어서 초기에 투자를 많이 받았어요. 극단을 주식회사로 만들었는데, 국내선 최초죠. 결국 PMC프러덕션이라는 회사가 돈을 많이 번 거죠. 저는 회사 대표로 월급 받고, 주주 중 한 사람으로 배당을 받는 게 전부에요. -난타의 성공 비결에 대한 질문은 아마 지치도록 받았을 겁니다. 성공 비결, 도대체 뭡니까. 난타는 사물놀이 리듬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 폭발력과 주방이라는 친근한 드라마적 요소가 빛을 발하면서 1997년 초연 이래 매진 행렬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선 비언어극이라는 게 먹혔죠. 세계 진출이 목표였으니까요. 국내 전용관을 만들어 해외 관광객들도 공연을 볼 수 있게 했죠. 둘째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을 업그레이드 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패밀리 쇼라는 특징도 성공 요인이죠. 우리나라 연극이라는 게 과거에는 대학 졸업한 일부 지식인들만 보는 걸로 인식됐는데, 난타는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웃고 손뼉칠 수 있는 쇼라서 오랫동안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이 없으셨다면서요. 난타를 만드는 과정도 그렇고, 해외진출할 때까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고비가 많이 있었죠. 해외에 한국 연극이 알려지지 않아 작품을 설명하기 보단 한번 와서 보라고 권했어요. 어렵게 세계적인 공연축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관객 동원에 성공했어요. 브로드웨이 아시아라는 미국 에이전트를 고용해서 우리보다 정보가 많은 그들이 해외프로모터들에게 활발히 소개한 것도 기여했죠. 어려운 고비야 수도 없이 많았는데, 지나가고 나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거죠.(하하) -그동안 문화공연이 성공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로 마케팅을 꼽으셨어요. 난타의 마케팅 전략은 뭔가요. 모든 기획자가 작품을 잘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판매하려는 노력은 안 해요. 저는 작품을 만드는 노력만큼 티켓을 파는데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아무리 좋으면 뭐합니까. 홍보 안 하면 몰라요. 저는 원하는 수치가 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홍보하자는 마인드에요. -성공한 CEO로서 경영기획 쪽에 전념할 수도 있는데, 드라마 출연도 꾸준하고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데 이유가 있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배우였고, 배우를 은퇴한 적은 없잖아요.(하하) 예전만큼 활발하게 활동할 순 없지만 1년에 한 편 정도는 드라마가 됐든, 연극이 됐든 하자는 원칙을 갖고 있어요. 이번에 JTBC를 통해 방송될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에서 아들 셋 중 둘째 아들 역을 맡았어요. 이번 작품은 목욕탕집 남자들, 내 사랑은 누굴까 이후로 10년 만에 김수현 선생님과 함께 하는 작품이에요. 오랜만이죠.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돼야 하고, 조언도 필요할텐데, 어떻게 하나요. 앉혀놓고 강의하지 않아도 제가 난타로 애든버러를 가고 해외 시장 진출하는 걸 보고 후배들이 점프를 만들었어요. 마케팅 역시 후배들이 열심히 하고 있고요. 굳이 강의하거나 조언하는 것보다 보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창의력 마인드, 적극적인 마케팅에 대해 늘 이야기하죠. -뮤지컬협회 이사장으로 뮤지컬 육성 차원에서 좀 더 하실 일도 많을 꺼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사장이라고 뭐 다 할 수 있나요. 단계적으로 해야죠. 이 시점에서는 창작뮤지컬을 활성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것 때문에 8월6일부터 서울뮤직페스티벌을 열죠. 연간 100편이 넘는 창작 뮤지컬이 만들어지는데 관객들은 잘 몰라요. 이번 페스티벌을 통해 뮤지컬인들끼리 네트워크도 단단해지고 우리 창작뮤지컬도 활성화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 공연계 앞으로 어떤 쪽으로 흘러가야 할까요. 방향을 제시해주신다면. 한국무용이나 국악처럼 상업화되기 어려운 공연 분야가 있어요. 국가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상업성이 없다고 거들떠보지 않으면 안돼요. 순수예술은 나라가 잘 살면 잘 살수록 육성하고 보호해야죠. 반면 공연 문화는 상업화를 시켜야 하는데 비즈니스 마인드가 부족해요. 어설픈 거죠. 5천만 국내시장으로는 (상업화가)힘들어요. 해외 시장을 개척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배우 되고 싶고, 가수 되고 싶어하는데 시장이 작아서 걱정이에요. 시장이 작으면 아이들 꿈만 있지 현실 가능성이 없거든요. 순수는 순수대로 굳건하게, 상업은 상업대로 굳건하게 가야 합니다. 대담=박정임 문화부장 bakha@kyeonggi.com 정리=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화천의 남자 이외수가 수원에 떴다. 130만명이 넘는 팔로워와 소통하는 대한민국 파워트위터리안 소설가인 이외수가 나타났다 하면 질풍노도의 젊은이들이 인산인해, 버글버글, 북적북적 거린다.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그와 맞팔을 하고, 그의 책을 사서 읽고, 그의 강연을 듣고 싶어한다. 7월 19일 수원 이비스 앰배서더에서 열린 힐링로드(Healing Road) 강연 콘서트 역시 취업, 연애, 집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는 수원의 청춘들이 모여 들었다. 이외수의 고민해결방식은 파격을 일삼는 기인(奇人)이 아니었다. 날카롭게 고민을 진단분석하고 구체적인 극복방법이나 본인의 경험담을 들어 친절하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 헤어스타일과 수염은 여전하세요. 수염은 언제 자르실 건가요. 혜민스님이 머리 기르면 생각해 보죠.(하하) - 오늘보니 20대 젊은이, 엄마 손잡고 온 초등학생, 나이 지긋한 노년층까지 팬층이 정말 두텁습니다. 수원에서 돈 잘버는 법과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다고 트위터에 올렸어요. 객석이 안 차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많이들 오셨네요.(하하) - 춘천교대 재학시절 등록금이 없어 짤렸다 들었습니다. 강원도 인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교대에 입학해 무려 7년을 다니다 짤렸습니다. 정말 갈 때도 없고 해서 노숙자 생활을 했죠. 보름씩 굶은 적도 있고. 자취할 때인데 방세가 6개월씩 밀려 집주인이 얼마나 불쌍했으면 밀린 방세 안 내도 좋으니 나가만 달라고 애원을 하더군요. 무슨 재주로 방세를 갚을까 고민하다 신춘문예에 데뷔해 당선금으로 방세를 갚자 생각했죠. - 가난이 오히려 덕이 된 셈이네요. 가난에서 출발한 것이 내 문학과 삶입니다. 전 세대와 공감대 형성이 잘 되는 이유 역시 간단합니다. 속이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고, 포기가 빠르고, 사과를 잘하는 나의 진정성이 공감으로 이어지는 것뿐입니다. - 대한민국 고민해결사로 통하세요. 오늘 강연에서도 고민상담이 쏟아졌구요. 여중생이 친구들과 소원해지고 성적도 떨어져 고민이라고 하길래, 빈 깡통에 콩을 심어 매일 콩과 이야기하고 한시 100수를 외우라고 해줬어요. 뒤늦게 작가가 되고 싶어 방송대 국문과에 입학한 40대 아주머니께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 묻길래, 식물채집하듯 노트에 단어를 채집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또 스물 한살 연기지망생이 친구가 먼저 인기를 얻어 속상하고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의문인데 어쩌면 좋죠?라고 하길래 10대는 무한히 꿈꾸는 다(多)몽기요, 20대는 그 많은 꿈중 평생을 받쳐도 아깝지 않을 꿈을 찾아내야 하는 선몽기요, 30대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분골쇄신 정진하는 정진기다. 요즘 젊은이들은 뭐든 빨리 이루려하는 게 문제입니다. 꿈을 찾았으니 열심히 노력할 일만 남았다고 말해줬습니다. 잘했죠?(하하) - 강연뿐만 아니라 트위터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거나, 고민이 생기면 작가님을 찾아요. 왜 그럴까요. 이성의 시대 20세기는 갔습니다. 21세기는 감성의 시대입니다. 이 모든 문제들이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고민과 문제들이죠. 공통적으로 길을 묻습니다. 길을 걷다 넘어졌을 때, 길을 잃어버렸을 때, 혹은 방향을 틀어야 할 때 저를 찾습디다. 제도권 교육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SOS를 칩니다. 요즘 연애 때문에 너무 슬퍼서 웃기기가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털어놓는 개그우먼부터 내일 생애 첫 직장 면접을 봅니다. 응원 한마디 부탁합니다는 취업준비생, 그리고 기초생활수급자 어르신 가정에 넘어짐을 예방하기 위한 문턱제거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자원봉사 연결이 넘 힘들어요라고 하소연하는 사회복지사도 있어요. 심지어 트위터에 애들이 키우던 거북이를 애들 아빠가 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는 글이 올라와 아빠가 아이들 앞에서 거북이처럼 방안을 기어 다니시는 수밖에 없겠다고 답변해줬어요.(하하) 저는 하소연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존버정신을 외쳐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존나게 버티는 정신을 말하는 겁니다. 버티자는 것을 강조하는 용어죠. - 평소 정치적 발언이나 특히 대한민국 교육정책과 관련한 따끔한 충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대 출신이라서 그런 건가요. 대한민국은 잘못돼 있습니다. 대한민국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비는 하늘을 잘 날고, 다람쥐는 나무를 잘 타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과목을 배웁니까. 땅 속의 두더지한테 땅 속을 잘 파는 법만 가르치면 되는데 두더지한테 나는 법을 왜 가르칩니까. 대학, 대학원까지 졸업했으면 밥 세끼는 제대로 먹고 살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제 반성해야 될 때가 왔습니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경제력 12위라고 합니다. 먹고 살만하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국민자살률 1위, 청소년자살률 1위, 노인자살률 1위, 자살 3관왕입니다. 머리좋은 사람이 많은 세상은 행복한 세상이 아닙니다. 마음 좋은 사람이 많은 나라가 행복한 나라죠. - 그럼, 돈 버는 방법좀 알려주세요 가난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돈을 보고 더러운 돈, 이 지랄같은 돈이라고 욕합니다. 돈은 뭐 자존심없습니까. 자신을 욕하는 사람한테 가까이 가겠습니까? 이 세상의 보편적 원리 중 하나는 같은 성질끼리 모인다는 것입니다. 치사한 놈은 치사한 놈끼리, 바위는 바위끼리, 돈은 돈끼리 모이죠. 돈을 미워하면 멀어지고 이뻐하면 가까워집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돈을 사랑하면 됩니다. 참고로 난 40대 초반까지 식구들을 굶겼지.(하하) - 작가님의 자택과 집필실이 있는 감성마을이 화천의 명물이 됐어요. 인구 2만4천여명에, 3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군사도시 화천군에 외수 마니아(oisoo mania)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면서요. 지방자치단체에서 생존한 작가에게 문학관을 건립해 준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간혹 저를 화천군수로 착각하시는 분도 있는데 저는 화천에서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화천을 홍보하는데 열정적으로 앞장서는 거죠. 지난 1년 동안 진행된 감성마을 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8월 8일부터 12일까지 상서면 다목리 감성마을과 화천읍 붕어섬에서 화천감성 5일章을 개최합니다. 9일 도서진흥백일장, 울랄라 세션 특별공연과 문학강연, 감성음악회, 문학기행 등 다채로운 감성체험을 화천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아직 여름휴가 계획 없으신 분들은 화천으로 오세요. 이외수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하하) - 이외수의 행복론은 무엇입니까. 미국 제1의 거부 록펠러는 54세에 암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 재산에만 탐을 내는 것을 보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맙니다. 그런데 록펠러는 93세까지 장수합니다. 인간은 아름답지 않은 걸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외형과 내면 두가지가 있어요. 외형의 아름다움은 시간에 자유롭지 않아서 변질되고 퇴락하나, 내면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흘러도 변질되지 않죠. 내 가슴에 사랑이 가득해서 수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수많은 것들이 나를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인간은 행복해집니다. - 요즘도 야동 즐겨 보시나요. (하하) 그럼요. 요즘은 바빠서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핫(hot)한 것은 꼭 챙겨보죠.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바다만큼 푸르고 햇살처럼 빛나는 처마밑의 하늘, 단청.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마저 오색으로 물들이는 단청 아래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어쩌면 하늘까지 닿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단청을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보듯 고개를 들고 단청을 바라보았다. 처마 끝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오색 빛깔을 따라가다보면 내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에 도달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았다. ■ 단청, 도심을 물들이다 도심속 사찰로 유명한 인천 석암산의 수도사에서 혜명 정성길 단청장(55인천시 무형문화재 제14호)을 만났다. 정 단청장은 수도사 대웅전의 단청을 새단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행히도 그 날이 공사 마지막 날이어서 장인이 단청을 하나하나 완성해 가는 과정도 지켜보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대웅전의 아름다움도 만끽할 수 있었다. 수도사는 단청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모두 정 단청장의 작품이다. 대웅전은 물론 삼천불전, 일주문, 극락보전, 칠성각까지 손이 안간 게 없다. 특히 삼천불전 단청은 장인이 오롯하게 자신의 기술과 열정으로 완성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수도사 삼천불전은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과 같은 곳이야. 항상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단청을 대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늘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들지. ■ 단청, 소년의 꿈이 되다 장인은 인천 영종도 운북동 동강리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영종도 백운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던 용궁사는 그의 놀이터가 됐다. 작은 시골아이는 사찰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단청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고개가 아프도록 단청을 올려다봐도 지루한 걸 몰랐다. 열여덟살 때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형이 멀리 경상도에서 단청 그리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하자 그길로 따라나선다. 우연하게 출발한 길에서 그의 단청 인생을 열어준 혜각스님(1905~1998통도사국가중요문화재 단청장 48호)과 연을 맺는다. 당시 혜각스님은 통도사가 낳은 금어(金魚)라고 불릴 정도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단청분야의 일인자였다. 가족들은 그가 단청 기술을 배우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재단사나 재봉사가 되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 때는 월급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기술을 가르쳐줬으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지. 비록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한번도 단청의 길로 들어선 것을 후회한 적은 없어. 오히려 이렇게 살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지. ■ 단청, 꽃을 피우다 혜각스님만큼이나 장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혜원 김준웅 선생(1941~2010충남 무형문화재 제33호)이었다. 김 선생은 장인의 단청수학을 돕고 스승 역할까지 도맡았다. 장인은 김 선생과 함께 혜각스님 문하에서 10여년동안 기술을 배우고 익혀 1986년 수도사 삼천불전 단청을 시작으로 독립했다. 지금까지 그가 참여한 단청만 해도 무량사, 약사사, 도선사 등 200곳이 넘는다. 인천에서 볼 수 있는 단청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인은 금문초 기법에서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고 있다. 금문(錦紋)이란 무늬를 수놓은 비단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문양으로, 신성과 위엄을 표현한다. 장인은 2004년 인천시 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됐고, 2005년에는 문화재청 단청 상시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단청은 본래 장식의 의미보다 보전의 의미가 강했다. 궁궐이나 사찰을 이루고 있는 나무가 습기를 먹어 뒤틀리거나 썩지 않게끔, 벌레가 파고들어 틈이 벌어지고 헐거워져 부서지지 않게끔 틈을 메우고 덧바르던 것이 단청의 시작이었다. 장인의 단청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혼이다. 세월이 흐르고 단청은 화려한 색과 문양을 덧입었지만 단순히 멋지기만 한 그림으로는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게 장인의 지론이다. 혼과 정성이 없으면 아무런 감흥도 없는 법이지. 작은 구석 하나도 놓치면 안돼. 보이지 않는 곳까지 꼼꼼하게 색을 입히고 그림을 넣은 이유가 무엇인지 잊는 순간 단청으로서는 끝인거야. ■ 단청, 뿌리를 내리다 단청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처마밑에 그림을 그려야 하니 목은 항상 뻐근하고 어깨에는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 같은 통증을 견뎌야 한다. 멋모르고 단청을 배우겠다 도전했던 사람들 중에는 반나절만에 붓을 내려놓은 이도 있었다. 단청은 오방색(청적황백먹)이 기본이다. 물감이 없던 시절에는 납으로 적색을 내고, 돌을 갈아 먹색을 만들고 조개껍질로 흰색을 표현했다. 그냥은 나무에 색이 잘 먹지 않으니 쌀풀같은 것을 만들어 접착제로 사용하곤 했는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화학약품으로 만든 안료와 접착제를 사용하게 됐다. 장인은 사실 단청을 옛방식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유지관리를 생각하면 화학약품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쉽다고 말한다. 단청작업은 출초 작업, 즉 문양을 그리는 것부터 한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송곳으로 선을 따라 촘촘하게 작은 구멍을 낸다. 작업이 끝나면 출초를 기둥이나 석까래에 대고 밀가루를 묻히는 타초작업, 밑그림 그리는 일을 한다. 밑그림에 색을 칠하면 단청이 완성된다. 단청은 일손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다. 국내에서 단청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천여명이 넘지만 단청장 칭호를 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장인은 후계자 계승에 힘쓰고 있다. ■ 단청, 역사가 되다 장인의 혼이 담긴 단청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20~30년 전에는 화려한 색을 자랑했을 단청이 세월에 떠밀려 엷어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누구보다 단청을 사랑하는 장인은 더했으리라. 장인은 각종 문화재급 건축물을 보수하면서 남은 부재를 모아 자신의 호를 딴 혜명박물관을 만들었다. 박물관 문을 연지도 벌써 햇수로 4년이 넘었다. 옛 단청자료들이 아무렇게나 취급되거나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워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단청유물만도 2천여점에 달한다. 개인 박물관이다보니 수장고도 부족하고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후손들에게 옛 선조들의 솜씨의 예술의 혼을 전해줄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단청을 더 좋아하고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내가 인천지역 단청장이 된 것도 앞으로 인천에 널려 있는 소중한 단청자산을 보전하고 알리는데 앞장서달라는 뜻 아니겠나 생각하고 있어. 김미경기자 kmk@kyeonggi.com
전시장에 들어서니 열받은 펭귄 가족이라는 작품이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펭귄이 열을 받았다? 재밌네 하며 들여다 보니 재료가 모두 소화기다. 눈을 살짝 돌려보니 이건 또 뭔가? 변기를 뚫는 도구, 일명 뻥뚫어를 지붕에 얹은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이게 다가 아니다. 숟가락과 포크를 구부려 합친 플라밍고, 팥알로 만든 개미떼, 키보드로 만든 체류탄 등 시선을 끄는 작품마다 재료란 것이 우리가 흔히 쓰다 버린 물건들이다. 일반 사람들에겐 하찮게만 보이는 고물로 이런 근사한 작품들을 만든 사람은 누굴까? 주인공은 바로 입체조형 예술가 최정현(52)이다. 지난 25년 동안 만화 반쪽이시리즈로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그가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재치, 풍자까지 곁들여 고물을 입체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작품 소재만큼이나 소탈한 첫인상을 가진 최정현을 지난달 18일 전시 뚝딱뚝딱 고물 자연사박물관이 열리고 있는 화성 동탄복합문화센터에서 만났다. ■ 고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다 무섭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하는 열받은 펭귄 가족은 그가 내 집처럼 드나드는 고물상에서 소화기를 발견하는 순간 그래 이거다 라는 감탄사로부터 비롯됐다. 그 순간 지구 온난화로 이상 기후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상에 뿔난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한 것. 빨간 소화기는 화가 난 펭귄의 몸통으로, 뾰족한 쇳덩이로 이뤄진 입은 마치 자연을 할퀴는 사람들처럼 표현했다. 여기에 환경파괴를 멈추라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자동차 브레이크 패드로 만든 팔을 몸통에 붙여 완성했다. 반쪽이의 육아일기로 유명세 탄 만화가 펜 놓고 용접기 들자 25년 아이디어 봇물 생활속 고물에 사회적 메시지 담아 새생명 도로표지판 활용한 재활용전시관 여는 게 꿈 언뜻 보면 대충 만들었을 것 같은 그의 작품에는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외면적인 표현과 더불어 내면에는 철학적인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바로 최 작가의 3단계 법칙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는 재료, 주인공, 제목으로 관람객을 이해시킨다. 야심작 로드킬을 보면 작가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재료는 타이어, 주인공은 눌린 고양이로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로드킬이라는 제목을 통해 보는 이들의 상상과 작품의미가 오버랩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무, 스테인리스스틸, 석고 등으로 만든 작품은 작가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어렵죠.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마우스, 옷걸이로 만든 작품은 뭘 의미하는 지 금방 눈치를 챈답니다. 여기에 제목까지 붙여지면 관람객들은 제3단계 공격에 까르르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어요. 이런 그를 일각에서는 정크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즐거운 만화조각가(만조)라고 칭했다. 정크 아트는 여러 사물을 붙이고 붙여 덩치를 키우지만, 그가 만든 작품은 원초적인 재료와 철학이 연결된 입체식 만화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단골 고물상 10여군데를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고물상이 많다는 화성 봉담에 작업실을 차린 것도 그 이유에서다. 특히 작업실 주변 고물상에선 쌓여진 고물들 각각에 깃들여진 사연을 쉽게 들을 수 있는 것. 고물의 사연과 최 작가의 생각이 일치했을 때, 고물은 비로소 제2의 인생을 찾게 된다. 여기저기 상처 난 재료들을 보면 우울해요. 근데 작품으로 완성하면 방금 생산한 새 물건들보다 오히려 좋죠. 재료에 난 상처가 인간에 의해 생겨났다기보다 고생하며 살아온 삶으로 느껴지거든요. 난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뿐이에요. ■ 25년간의 아이디어, 입체로 터지다 1990년대 반쪽이의 육아일기로 유명세를 탔던 만화가가 왜 고물상을 돌며 재료를 수집하고, 용접기를 들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부인 변재란씨와 딸 최하예린씨가 오랜 시간 이들의 사생활이 일기를 통해 노출되면서 아빠, 이제 그만!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반쪽이 시리즈의 마침표 시기를 놓고 고심하던 중 딸과 함께 떠난 런던 여행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걸어갈 새로운 길을 찾게 됐다.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작품들이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 박물관에 들어선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들을 보면서 이 정도 양이면 평생 달라붙을 만 하다고 느꼈죠. 대신 나는 남들과 다르게 작품의 소재를 고물로 바꾸고, 거기에 인간들의 사연을 풍자적으로 넣겠다고 결정했어요. 펜촉을 내려놓고 용접기를 잡자 그가 25년간 만화를 그려오면서 스스로 터득한 아이디어 발상법이 온몸에 자리 잡고 있다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여기에 그의 손재주까지 더해지면서 한 달 만에 400점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최 작가는 국내 순회 전시 도중 후배 만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하면 좋은 아이디어를 설계해놓고 왜 다 갖다버리느냐. 입체로 남기면 영원할 텐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보는 이가 판단했을 때 평면작품인 만화보다 입체작품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최 작가는 그림은 아이디어 설계일 뿐입니다. 만화는 한 번 보고 나면 그만인 일회성 작품에 불과해요. 반쪽이를 그리던 1988년 처음으로 수류탄을 이용해 짭새를 완성했는데 작품이 내뿜는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 100% 재활용 전시관 꿈꾼다 전시장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음악이 나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세제통이 눈에 띈다. 깨끗히 씻어주는 일을 하고 버려진 세제통을 말끔하게 씻어, 세상의 밝은 소리를 전하도록 최정현이 라디오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세제통 라디오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주파수 조절은 물론 볼륨까지 줄였다 키웠다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쉽게 사용하고 버리죠. 하지만 고물로 만든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내가 만든 게 하나도 없어요. 연출만 했을 뿐이에요. 나를 위해 재료를 만드는 전세계인들로부터 에너지가 나오죠. 그는 최근들어 100% 재활용 전시관을 구상 중이다. 절에서 기왓장에 소원을 써 불사를 하듯, 생명을 다한 도로표지판에 방문객들이 글을 쓴 뒤 그것들을 모아 돔 형식의 건물을 세우려는 것. 또 도로표지판이 빛 반사가 뛰어나다는 특징을 살려 건물 주위에 주차장을 만들어 차량에서 나오는 불빛을 이용해 건물 외부를 밝히고, 주변엔 고물 작품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체험활동장까지 설치하는 구체적 방안까지 생각해놨다. 최 작가는 화성에 100% 재활용 전시관을 세우기 위해 국내를 돌며 전시를 열고 있다며 사람들이 내게 준 고물들로 작품을 만들고, 그들과 환경까지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기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계곡으로 산으로 향하는 청춘들을 실어 날랐다. 주말 저녁이면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나이트클럽을 방불케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기차가 끊기면서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는 폐허로 변했다. 잡초가 가득한 철길, 텅 빈채 녹슬어가는 역사, 양주의 장흥(長興)역이 그랬다. 1년이 걸렸다. 장흥역이 변하기 시작했다. 쓰레기로 가득찼던 폐가는 100여장의 LP판을 갖춘 카페와 부서진 가구를 리폼 받을 수 있는 공방, 무료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으로 탈바꿈했다. 마을 주민들에게조차 버려졌던 장흥역이 예술의 옷을 입고, 그때 그 시절 추억과 낭만을 나눌 수 있는 사랑방이 됐다. 예술과 삶이 함께 만나는 곳, 그곳에 장흥역이 있다. ■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간 예술 지난달 20일 장흥역 앞 역전 다방에서 만난 오명은 일영 1리 이장은 이런 게 예술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까지도 다가올 수 있는 거구나했죠. 예술이라는 게. 내 일상으로 예술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게 전혀 뜻밖이었습니다라는 말로 속마음을 나타냈다. 70~80년대 MT문화를 꽃 피웠던 장흥역 일대는 2004년 교외선 철도가 폐쇄되면서 8년 사이 슬럼가처럼 방치됐다. 특히 그 곳에 조각공원이나 아트밸리, 장흥아틀리에 등 문화예술특구를 구축해온 양주시의 입장에서 장흥역 주변은 눈엣가시였다. 지난해 10월 폐허가 된 장흥역 일대를 재생시키고자 예술가들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상황이다. 이 때부터 예술가들이 주민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지역적 가치를 찾아내고 일구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사업비는 경기문화재단이 댔고, 예술가 그룹은 수원미술전시관 수석큐레이터이자 커뮤니티 아트 기획자인 조두호씨가 이끄는 오래된 미래팀이 결합했다. 프로젝트 명은 장흥 오라이. 장흥이 모두 잘 될 것이라는 의미의 Alright와 장흥으로 오세요(오라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조두호 장흥오라이 기획팀장은 장흥오라이 프로젝트의 관건은 주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읽어내고, 그 가치를 재생시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장흥역 살리자 예술가주민 의기투합 폐가에 쌓인 쓰레기 치우기부터 시작 역앞 매점은 공방다방은 찻집으로 단장 그때 그 시절 추억과 낭만 새록새록 ■ 추억은 예술을 타고 거창한 사업을, 대단한 예술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지난날 장흥역을 거점으로 삼고 살아갔던 장흥면 주민들에게 더 이상 과거가 아닌 오늘의 장흥역을 만들겠다는 게 목표였다. 시작은 8년간 시간이 멈춰 있던 역 앞 매점, 찻집, 전파상에 쌓인 쓰레기를 치우는 일부터였다. 트럭 세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쏟아졌다. 이후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일영리 마을 주민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렇게 한 장면씩 되살린 기억은 종이에 재현되고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면서 전체적인 프로젝트의 윤곽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매점은 DIY(Do It Yourself) 수업과 목공 가구의 수리 및 리폼이 이루어질 두꺼비꽁(짜)방이 됐고 전파상은 장흥면 유일의 사진관인 장수사진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역전 다방은 옛 이름 그대로 다운휴게소라는 명패를 걸고 찻집이 됐다. 온전히 새것은 아니었다. 지난 40년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남겼다. 이 모든 일의 주연은 주민들이었다. 목수 출신인 오명은 이장은 오랜만에 연장을 들었고, 공방 인테리어와 지붕공사를 도맡았다. 동네 어르신들은 카메라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미소로 사진을 찍었다. ■ 이제부터가 시작 깨끗하게 정리된 것은 모두들 좋아하지만, 아직까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마을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잘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6월 프로젝트의 제막식과 결과보고전시회를 열었다. 장흥 오라이 프로젝트가 일단락 된 것이다. 예술가는 떠났고 주민들과 3개의 커뮤니티 공간만 남겨졌다. 그렇다고 주민들의 마음도 떠난 건 아니었다. 곧바로 오명은 이장을 중심으로 장흥 오라이 추진단이 구성됐고, 3개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운영 계획도 세워졌다. 마을 축제도 고민중이다. 장흥 오라이 팀도 다시 거들겠다고 나섰다. 올 하반기에는 마을 주민들 스스로 공간을 운영해 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조두호 기획팀장은 취지 자체가 소통의 예술에 있는 만큼 앞으로 이 공간을 통해 이곳 주민들이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소통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설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나. 다 쓰러져가는 역이 이렇게 변할지 누가 알았겠어. 마을 제일의 보금자리가 생겼다고 흐뭇하게 미소 짓는 백발 노인의 눈동자에 옛 장흥역의 영광이 스쳐지났다. 장흥(長興)이라는 지명처럼 이곳이 길게 흥할 곳일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윤철원기자 ycw@kyeonggi.com
어느날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잘 풀리지는 않지만 계속 풀고 싶었고, 풀릴 것 같은 생각에 골몰하며 문제풀이에 집중했다. 그 때 문제를 다 풀고 일어나니 서너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려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무언가 열중하다가 시간이 지나간 기억이 있다면, 그 일은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일일 것이다. 아니라면 꼭 해결하고 싶은, 마치고 싶은 강한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가렛 미첼(1900~1949)여사와 최명희(1947~1998)작가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이 두 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혼불이라는 장편을 한 편씩 남기고, 짧고 굵은 생을 살다 가셨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남북전쟁과 전쟁 후의 재건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그녀는 1925년 결혼 후부터 1936년까지 10년이 넘도록 이 작품에 전념했다. 과연 그녀가 이 원고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끝내 완성시킨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최명희의 혼불도 1980년 등단 이듬해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서 혼불(제1부)이 당선돼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5부를 연재했으며, 1996년 12월 제15부를 전10권으로 묶어 완간하였다. 이 또한 역사소설로 1930~40년대 전라북도를 배경으로 당시의 양반사회와 평민과 천민의 삶이 관혼상제를 비롯, 풍속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녀들은 왜 이 한편을 완성하기까지 펜을 놓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 한편에 얼마나 많은 혼신의 힘을 실었기에 죽음에 이르렀을까. 팔십까지 보장된 삶과 마흔의 명예로운 죽음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잠 못 드는 이 여름, 마가렛 미첼여사와 최명희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대화해 보자. 그리고 올 여름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을 닮아보자. 문의(031)257-5067 전방하 동화작가독서특훈하나로 저자
동네를 아무리 둘러봐도 그 흔한 학원 하나 없다. 게임을 할 수 있는 PC방은 물론 친구들과 함께 주전부리 할 수 있는 분식점도 없다. 연천군 청산면 풍경이다. 그럼 아이들은 뭘하며 놀까. 학교가 끝난 뒤, 딱히 할 것이 없는 이 곳 학생들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있거나, 간혹 말썽을 피워 문제아로 낙인이 찍히곤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즐거운 일이 생겼다. 예술문화단 놀패가 전통유희를 이용해 연극을 가르치는 몸 열고 마음 열고 프로그램을 갖고 청산면을 찾아온 것. 남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조차 하기 힘들어했던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게 된 기적, 어떻게 일어났을까? ■전래놀이로 하나되기 교회 예배당이 아이들의 놀이터다. 마을 주민들이 아이들을 위해 예배당을 강당으로 쓰도록 했던 것.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수업시작 시간인 오후 4시30분, 오지나 강사(여36)가 우렁찬 목소리로 얘들아!를 외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강사 주위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남자팀 대 여자팀으로 나눠 단체 사방치기로 수업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늘 그랬던것처럼 줄을 서고 순서를 정한다. 놀이가 시작되자 한 발로 7칸을 뛰고 마지막에 두발로 멋지게 착지한다. 특히 처음에 뛴 사람은 뒤를 이을 친구들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최대한 선에 가까운 곳에 착지해야 해서 부담감이 백배다. 게임 시작 전 금을 밟지 않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세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선두로 나서 유독 사방치기를 잘했던 나지은양(13)은 왼쪽 발가락 뼈가 휘어서 걱정했는데 한발 뛰기는 오른쪽으로 해서 다행이라며 여자팀 인원이 적어도 우리가 더 유리하다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점잖은 여자팀과 달리 남자팀은 상대방을 방해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주위를 맴돈다. 여자팀에서는 이런 행동에 화를 내다가도 그만 하고 똑바로 하자라며 의젓한 모습을 보인다. 선생님도 한 수 거든다. 올림픽 기간인데 페어플레이 하자라고 말하자 남자팀은 멋쩍어 하면서도 정돈된 모습으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격렬한 남자팀과 여자팀의 대결은 결국 무승부라는 아쉬운 결과로 끝이 났지만 두 팀 모두 시종일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날 수업에 참여한 16명의 초등학생들은 푸른꿈 지역아동센터 소속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 곳에서 몸 열고 마음 열고 수업을 받는다. 오 강사는 초등학생이라 산만하지만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을 많이 배려한다며 수업의 시작을 사방치기 등 협동심이 필요한 전래놀이로 시작해 함께 땀을 흘릴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학생들은 모여라! 오 강사의 한 마디에 쉬고 있던 아이들은 둥그렇게 앉아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색연필과 종이 한 장씩이 앞에 놓이고 여러명이 단어로 시 짓기가 이어졌다. 한 단어를 놓고 각각 한 줄의 문장을 만든 뒤 3~4명의 발표한 문장을 이어 한 편의 시를 짓는 놀이다. 첫번째 주제는 피자다. 맛있다, 먹고 싶다 등의 평범한 대답이 이어지던 중 김민혁군(13)이 피자 8조각, 먹기엔 너무 부족하다라는 인상깊은 한 마디로 피자라는 시 마지막 구절을 완성시켰다. 이어 콜라, 신발이라는 시와 함께 오지나 선생님이라는 재미있는 주제가 결정됐다. 짖궂은 남자아이들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흰머리, 결혼 등 금지어를 거침없이 이야기하며 멋진 시를 만들어 냈고, 아직 한글에 서툰 한지삼군(8)과 나도현군(8)은 형, 누나들의 도움을 받아 종이에 자신의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권근영(여23) 보조강사는 가장 어린 지삼이와 도현이는 아직 한글 쓰는 것이 서투르다며 글을 쓰는 시간이 되면 항상 주위에서 지삼이와 도현이가 한글을 쓸 수 있게 가르쳐준다고 전했다. 오늘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그림으로 만드는 우리이야기다. 그림카드 5개를 놓고 남자팀 대 여자팀으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꽃도 있고, 오로라도 있고, 여자도 있고 아이들은 어떤 상상의 세계를 보여줄까? 남자 아이들은 바닥에 누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여자 아이들은 토론을 여러 번 한 뒤 전지 위에 그림카드를 붙이고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나도현군과 나지은양이 각각 팀의 발표자로 나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연말에 있을 연극 공연을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연습하는 것은 이들에게 필수사항이다. 막장 드라마다~, 무슨 공주가 저래? 등의 반응도 잠깐, 오 강사가 그림카드를 들고 목련의 사연이라는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자 금세 눈이 똘망똘망해진다. 문미정 대표(여40)는 요즘 집단놀이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아이들이 평소 노는 걸 보니 서로 봐주는 게 없다며 함께 하는 놀이, 돕는 놀이를 통해 때론 즐기고, 때론 실패를 인정할 줄 아는 사회성을 심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변화가 시작됐다 2년 전 수업을 처음 시작할 때 아이들은 발표는 물론 눈도 잘 마추지지 않는 소심함을 보였었다. 연천이 군 부대 지역인데다 농업이 주가 되는 지역적 특색 때문에 조손가정, 한부모가정 등 소외계층의 아이들이 많아 자존감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예술문화단 놀패는 이런 아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기 위해 경기문화재단에서 공모한 2012 지역 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를 통해 예산을 받아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몸 열고 마음 열고를 통해 개개인의 마음 치유는 물론 같은 마을, 같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 문제까지 해결했다. 처음엔 같이 놀아주지 않고, 이야기도 하지 않던 아이들이 지금은 서로 도와주고, 화가 나도 금방 화해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아이들이 직접 각색한 연극 연천골 백설공주를 공연한 뒤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 조무선 푸른꿈 지역아동센터장은 군인 자녀들은 하교를 하면 시내 학원으로 향하지만 이 곳 아이들은 대부분 그럴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연극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의 성품, 인성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문 대표는 예전엔 자존감이 부족해 어떤 반응도 기대할 수 없었는데 1년이 지나니 아이들이 애정표현 등 모든 것을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다며 연극 공연이 목적이 아닌 아이들의 긍정적인 변화와 자아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도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