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대하여 기록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름만 있고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地分) 358개가 있다. 관미성, 쌍현성, 살수, 건안성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곳들도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지명이며, 그 중에는 위례성도 포함되어 있다.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던 때는 고려 인종 23년(1145)으로 고려가 건국된 지 200여년, 고구려 멸망이 불과 500여년 경과한 시점임에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중요한 역사 현장들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 고증할 수 있는 기록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이처럼 부족한 역사 기록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많은 혼란과 논쟁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한성백제의 도성인 위례성(慰禮城)이다. 위례성의 위치는 임진강 유역, 삼각산 동록, 장안평 일대, 몽촌토성, 남한산성, 하남 일대 등 여러 곳으로 추정되어 왔다. 이 논의에는 유형원, 신경준, 안정복, 정약용, 이병도, 이기백, 천관우 등 조선시대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당대를 대표했던 학자들이 참여하였지만 위례성의 위치를 밝히지는 못했다.위례성의 위치는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위례성의 하나로 추정되었던 이성산성은 발굴조사 결과 6세기 중엽 신라가 쌓은 신주의 치소성(治所城)으로 밝혀졌으며,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대에 처음 쌓은 주장성(晝長城)으로 확인되었다.반면 아무도 백제도성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풍납토성에서는 정교하게 쌓은 판축토성벽과 대규모의 의례용 건물을 비롯하여 기와건물과 도로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와당, 삼족기, 고배 등 다양한 유물과 함께 중국과의 교역을 말해주는 전문도기, 육조계의 벼루 등 중국계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몽촌토성에서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판축한 토성벽과 지상건물지, 수혈주거지, 저장시설 등의 유구와 중국제 시유도기, 청자류, 금동제과대금구, 각종 철기류, 골제찰갑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한성백제의 도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서울과 하남, 성남에 걸쳐 679만㎡의 규모로 건설되는 송파신도시는 도시 명칭공모를 통하여 2008년 위례신도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백제의 역사가 시작된 지역으로서 그 역사성을 되살린 미래지향적인 도시명칭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그런데 최근 천안시에서 위례신도시라는 명칭 사용을 재검토 해달라는 건의가 국토해양부에 제기되었다. 삼국유사와 조선시대의 각종 지지자료에 온조왕의 위례성은 직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천안에 위례산과 위례성이 있지만 수도권에는 위례와 관련한 어떤 역사적 근거와 유적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역사왜곡이니 이름을 도둑맞았다느니 하는 과격한 주장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명 전쟁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그러나 위례성과 관련된 이 논쟁에서 천안시가 승리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지명 외에는 백제 도성이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천안 일대에서 확인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록은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많은 정보를 남기지만 때로는 이처럼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위례성 지명 논쟁을 보면서 상반된 시각으로 사회현상을 표현하고 있는 신문 중 일부만 후대에 남게 된다면 그 때의 학자들은 오늘을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문화재지원팀장
오피니언
심광주
2010-03-24 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