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행정의 잘못된 만남

연초가 되어 그간 간간히 근황을 전해 듣던 몇몇 작가들이나 단체들의 새해 구상을 접하다 보면, 그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공적인 지원 제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본다. 그리고 거기서 좀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김없이 공적 지원 제도의 이런 저런 얽매임에 대한 하소연들을 듣게 되곤 한다. 속 시원한 해결책을 찾아 막연한 궁리를 함께 해보지만 별무 대책은 마찬가지다. 그나마 하고 싶은 작업에 작은 보탬이나마 받게 됐음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하면서도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한 때 오랜 기간 예술행정 현장의 일을 업으로 해 온 사람으로서 그런 얘기들을 듣다보면, 민망함과 자괴감을 숨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솔직히 최근 3~4년 사이엔 좀 해도 심하다 할 정도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는 한 듯하다.도대체 우리나라 모든 예술가를 공무원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 복잡한 국가 예산회계 체제와 항목에 맞춰 자금의 집행계획을 만들어 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더해 무슨 국가문화예술지원관리시스템이라는 근거도 애매하고 그 쓰임새도 빈약한 맹목적 전산화의 분칠을 덧씌워 지원받는 예술가를 자료 입력 요원으로 만들어 버리는 등 별별 일들을 다 겪게 된단다. 국가문화예술지원 예술가 옭매더욱이 해야 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은 또 뭐 그리 많은지, 어딘가에서 보내 온 지원금 집행 매뉴얼이란 것을 보니, 온갖 도표에 깨알 같은 글씨를 채워 넣은 책 한권 분량이기도 하다. 그 뿐이 아니라 일 년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이것저것 자료제출 요구에 시달리기까지를 각오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이전에 한 번이라도 지원을 받아 본 왠만한 예술가와 단체는 굶어죽어도 다시는 그 짓(?)을 못하겠노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지원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나 지자체, 공공 기관 등의 일선 공무원과 직원들조차도 그 얽히고설킨 난맥상을 풀어낼 길이 없다보니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엄두도 못 내고 허울 좋은 정책적 성과평가의 환상만을 쫓거나 그저 속수무책 앵무새 같은 얘기만을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라고들 한다. 그러면서 예술과 행정은 서로의 잘못된 만남을 탓하며 속절없는 피로도만을 높여가고 있다. 어찌 보면 모두들 제 정신이 아닌 아노미 상태에 빠져있는 듯도 싶다. 예술행정의 좋은취지 되새겨봐야어떤 분야든 공적 제도의 틀 속에 담겨질 때, 일정 부분 규제적 요소가 개입될 수 있을 것이고, 문화예술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작금의 문화예술 지원 제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선을 넘어서고 있다. 마치 모기를 보고 칼을 빼는 견문발검(見蚊拔劍)의 형국이자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자고 접어드는 격이다.거기엔 어떠한 고민의 흔적도 보이질 않는다. 시키니깐 하고, 하라니깐 마지못해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책임은 현장으로 넘기려는 무사안일과 기계적 문서행정만이 보일 뿐이다. 시키고 하라는 사람도 문제지만, 시킨다고 하고 한다는 모양새조차 고작 그 것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은 더욱 문제다. 모든 것은 태도에서 비롯된다. 특히 문화예술의 공적 지원제도는 그 방식과 규모 등 제도 운영상의 문제 보다는 예술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예술행정을 왜 하는지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로 그 실제 성과가 가늠될 수 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좋은 취지와 방식도 태도가 올바르지 못하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진데, 하물며 별반 좋지도 못한 취지와 방식에 태도마저 그러니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경기일보-칼럼]GNP와 인간미는 반비례한다

20여년 전 나는 중앙의 모 일간지에 양자강 기행을 연재한 적이 있다. 아미산의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긴긴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내려 상해의 황포강에서 노을을 보며 마친 대장정이었다.이 과정에서 많은 경승지와 유적들을 보고 느꼈지만, 세월이 가면서 대부분 그렇고 그런 희미한 잔영으로 퇴색해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장면은 희한하게도 시간과 반비례하며 나의 가슴 속에 또렷하게 뿌리박고 있다.조자룡이 조조 군사와 격전을 벌였던 당양의 장판파를 갔을 때다. 나는 기진맥진 수소문 끝에 유비의 부인인 미부인이 투신자결했다는 미부인정(?夫人井)을 찾아갔다. 유비의 아들 아두(阿斗)를 안고 피란하던 미부인이 부상을 입자, 아들을 조자룡 장군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는 바로 그 우물이다. 당양 변두리의 허름한 농가의 울안에 있는 미부인정은 너비 서너 뼘 정도에 깊이는 4미터 정도로 난간도 없이 함정처럼 방치한 채 사용하고 있었다. 인정이 증발된 시대파란만장한 역사의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난에 찌든 기색이 역력한 초로의 부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객을 대했다. 호기심도 호들갑도 없다. 세상사 흥망성쇠를 두고 일희일비한들 무엇하랴는 눈빛들이다.지식도 철학도 없을 한촌(寒村)의 민초들이 어쩌면 저렇게 평온하고 도사처럼 여유로울 수가 있을까. 그때 내 스스로의 답은 오히려 가난이었다. 전별의 정으로 내가 10원을 굳이 건네준 그들의 한 달 생활비는 당시 한화로 천 원 안팎인 7원이라고 했다.유사한 일들은 당양에서만이 아니었다. 운남성 여강 인근의 시골에서도 비슷했고, 적벽대전의 남병산 인근 마을에서도 그랬으며, 특히 20여년을 드나들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빈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어느 해 우리 공연단 일행이 카자흐스탄의 소도시인 잠불에 머물 때다. 고려인 민가에서 단원들이 묵고 있는데, 어느 허름한 옷차림의 60대 아주머니가 발을 절룩이며 겨드랑이에 무엇을 끼고 천천히 다가왔다. 놀랍게도 살아있는 닭이었다. 고생들 하는데 줄 건 없고, 이거라도 삶아 먹으라고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얼마나 굴곡진 역사를 버텨오고, 얼마나 핍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고려인들인데.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고래의 순박했던 인정만은 유전질처럼 남아 있어, 그처럼 소중히 기르던 씨암탉까지 가져오다니!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근래에는 어데를 가도 가슴에 앙금으로 남을 뭉클한 인정 얘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니던 지역을 찾아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물신풍조 벗어나 인간미 찾자더는 성역처럼 남아있는 인정지대는 없는 것 같다. 카자흐나 우즈벡의 오지를 가도, 양안원성제부지(兩岸猿聲蹄不住)의 사천이나 운남을 가도 이제 씨암탉 내는 인정은 모두 증발되고 말았다.사람의 천성이 바뀌어 그런 게 아닐 게다.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그 요상한 바람만 들어가면 모든 게 변하고 만다. 돈 좋아하는 물신풍조가 곧 그것이다. 지난 세기 90년대만 해도 중앙아시아를 드나들 때면 툭하면 눈물을 흘려야 했다. 만나는 기쁨과 헤어지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좀해서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을 경험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 물결이 저들의 가슴을 조약돌처럼 단련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이 인간미를 좀먹어가는 사례를 누누이 경험하면서, 나는 내 나름으로 터득한 진리(?)가 있다. 한참 전부터 한스 독트린(Han's doctrine)이라고 농반진반으로 허장성세를 부리며 주장하는 GNP와 인간미는 반비례한다는 명제(命題)가 곧 그것이다.하늘지향적인 용의 해를 맞아서, 지상지향적인 물신숭배에만 매몰되지 말고, 우리 한 번 GNP와 인간미는 비례한다는 새 시대의 새로운 명제를 구현해 봄은 어떨까.한 명 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용에게 배우는 하이브리드 지혜

과일과 야채로 그린 얼굴이 있다. 형상은 분명 사람의 얼굴인데, 코는 호박이고, 머리는 과일, 귀는 옥수수, 입은 완두콩 식이다. 르네상스시대의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얼굴 연작은 재료가 과일과 야채다. 재치 있는 상상력이 기괴하지만 재미있다. 흔해빠진 과일과 채소인데, 한데 조합해놓으니 초상화다.파블로 피카소의 상상력도 기발하기는 아르침볼도 못지 않다. 그는 버려진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로 황소머리를 만들었다. 안장은 머리가 됐고, 손잡이는 뿔이 됐다. 번뜩이는 상상력이 일품이다. 이질적인 물건들을 조합해서 어엿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창조적인 상상력은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특히 비빔밥처럼 서로 다른 재료를 섞을 때, 그동안 친숙하거나 인습화된 삶이 놓친 신세계가 홀연히 펼쳐진다. 시인들이 익숙한 언어를 낯설게 활용해서 자동화된 일상에 브레이크를 걸고 새로운 경험과 감동을 유도하는 것처럼 창조적인 파괴는 창조적인 결실을 낳는다. 놀라운 이종교배 결정체 용 동양 문화권이 배출한 동물 가운데 톱스타는 단연코 용이다. 오색찬란한 자태에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강인한 비늘, 휘날리는 수염, 날카로운 발톱 등이 검투사의 몸처럼 단단하면서도 신비롭다. 십이지 중에서 유일한 상상의 동물인 용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로 무려 아홉 가지 동물의 부위를 편집한 잡종이다. 놀라운 이종교배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동물 중의 동물로서 능력이 최강이다. 장르와 장르가 혼합되는 크로스오버의 역동성이 신령스럽다. 상징성 면에서도 최고다. 임금의 얼굴은 용안, 입는 의복은 곤룡포, 앉는 평상은 용상이라고 한다. 임금의 상징으로서 용의 이미지와 용 문양은 왕실의 권위를 대표한다. 또 좋은 일을 부르는 길상과 나쁜 일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로, 비를 관장하는 물의 신으로서 사람들의 기원의 대상이 돼왔다.육해공의 동물을 창조적으로 조립한 슈퍼 울트라 애니멀로서 용은 요즘 말로 하면 하이브리드(hybrid)형 동물이다. 서로 다른 기능을 융합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하이브리드. 획일화된 고정관념과 편견을 허무는 하이브리드적 사고와 상상력은 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 파고들었다. 자장면과 짬뽕을 합한 짬자면이 그렇고, 휴대폰은 이제 더 이상 전화기가 아니라 사진기이자 컴퓨터, 텔레비전이다. 태양광과 풍력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가로등이 있는가 하면, 데스크톱과 노트북의 장점을 섞은 고성능 컴퓨터도 있다. 기업에서도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하이브리드형 인간을 새 시대의 인재상으로 꼽는다. 경계 허무는 상상력 발휘하자 최강의 동물 부위를 한데 통합했다는 점에서 용은 스마트 기기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예전에는 독립됐던 기기와 프로그램들이 애플리케이션이라는 형태로 스마트폰 하나에 통합됐다. 하이브리드적 상상력의 결실이다. 과거에 잡종은 경멸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경계를 허무는 하이브리드적 사고와 상상력에서 사람들은 밝은 미래를 본다. 굳이 하이브리드 스타일을 서양미술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용의 조형원리를 곱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이제는 한 가지만으로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시대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다. 수십, 수백 배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아홉 가지 동물을 융합한 혼종임에도 용의 권위와 가치가 최고이듯이 하이브리드적 상상력은 무표정한 현실을 활짝 웃게 만든다. 임진년에는, 다른 동물의 장점으로 보디빌딩한 용처럼 자신의 강점에 타인의 강점을 받아들이는 하이브리드적 지혜가 필요하다.정 민 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디지털유산 보존이 시급하다

아무리 세상이 꽉 막혀 있어도 발전된 현대문명은 세계 어느 곳이든 퍼져 나가게 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모양이다. 아프리카와 중동의 새로운 변화가 바로 모바일 시스템의 개발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고 북한에서도 이미 80만대 정도의 휴대폰이 보급됐다고 한다. 모바일 시스템은 이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이자 문명의 출발점이 됐다. 아마도 지난 30년동안 우리의 생활과 사고의 변화는 인류의 역사상 그 모든 변화를 합하여도 그 양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구석기시대 하나의 이노베이션이 이뤄지는 것이 적어도 30만년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만 배에서 수십만 배의 속도가 되는 셈이다.우리는 과학을 교육하기 위해서 증기기관차, 원시비행기, 우주선, 전기개발장치 등을 과학관에 수집하고 전시한다. 조금 지나면 아마도 이러한 것들은 우리 세대가 구석기유물을 쳐다보듯이 관심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이 시대의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박물관에 전시해야 할까? 바로 디지털 유산들이다. 디지털유산들은 단순히 그러한 유물들만이 아니다. 초기에 만들었던 생각의 집, 즉 웹 페이지와 같은 것들도 바로 디지털유산이다. 디지털로 표현된 생각이 바로 유산이 된다.디지털로 표현된 생각이 유산그런데 디지털기술들의 발전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우리가 조선시대의 백자 등과 같이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문화유산이 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물을 수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 문화재의 개념도 50년이라는 시간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러한 개념으로 판단한다면 디지털유산의 수집과 보존은 국가적인 과제로 수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나중에 엄청난 경비를 지출해도 완전성을 구비하기 어려울 것이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전시물 중에서 브라운관 모니터를 사용하는 것이 있는데, 작품의 내구연한이 차서 교체하기 위해서 이제는 동남아시아 등지의 나라에서 수입해야 할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 수년전만 하더라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유리 브라운관 모니터가 어느 순간 납작한 텔레비전들로 바뀐 것이다. 휴대폰의 발전은 더욱더 빠른 속도이다.수 년 전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2세대 폰은 이제 절멸시키지 못해 안달인 것이 현실이다.지금 당장 수집 시작해야이보다 더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바로 디지털 공간 속에 남아 있는 생각과 창조의 틀들이다. 웹페이지나 영상창조물 등의 디지털건조물들에 대한 평가와 수집도 대단히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우리가 오늘날에는 과거의 무형문화유산을 보존하듯이 이러한 디지털화한 생각의 형상들을 수집하고 보존해야 한다. 그래야 오늘날 멋진 사고들이 어떻게 진화해 온 것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과거의 우스꽝스러운 형태의 웹페이지 구축 시도가 없었다면 디지털문화 자체의 발달 뿐 아니라 디지털기술의 발전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십여년 전에 전곡리구석기유적을 경기도가 가상현실로 복원해 보여주려고 했는데 오늘날의 기술로 보면 아마도 원시적이었을 것이다. 문화적인 욕구가 기술적인 한계로 잘 표현될 수 없었던 것이지만 오늘날에서는 영화 아바타에서 보듯이 가상현실이 새로운 예술의 세계로 승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기술의 진화가 빠르게 일어나는데 과거의 가상현실은 오늘날로 발전하는 하나의 단계이자 초석으로서 디지털문화의 발달과정을 보여주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디지털기기와 콘텐츠들 역시 국가의 미래교육자산으로서 반드시 그리고 시급히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배 기 동 전곡선사박물관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마을 이야기 박물관

마을을 드나들며 그 곳의 산과 들을 자주 접하고, 드문드문이지만 그 곳의 사람들과 봄여름가을겨울을 함께 지내다보면 이것저것 주워듣는 얘기들이 꽤 된다. 어쩌면 소소하기도 하고, 오래된 기억들이라 듬성듬성 끊어지기도 하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몸에 베인 이야기들이다. 귀농 귀촌이라 하여 새롭게 마을로 찾아든 이들 조차도 어느 사이엔가 말하는 품새며 몸짓이 그 곳의 사람들과 닮아있음을 본다. 그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고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다툼과 소란, 반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아리기도 하지만, 그 것은 그 것대로 서로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흔적들이다. 마을의 이야기를 제대로 모아 보겠다고 산골 마을로 찾아든 지 1년여가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그런 이야기를 그저 흘려보내지 못하는 막연한 궁리가 똬리를 틀게 됐다. 지난 일요일 산골 마을의 오래된 문 닫은 학교의 교실 한 칸을 내어 마을 이야기 박물관의 문을 열면서, 마음 한 켠의 실타래가 조금은 풀어지는 듯도 싶다.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야기 귀동냥을 다닌답시고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만, 그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게으른 탓이 크지만, 외지에서 찾아든 근본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선뜻 입을 열지 않음은 인지상정이다. 마을 대소사에 이렇게 저렇게 얼굴을 들이밀며 서로의 탐색이 어지간히 끝나고, 조금은 이물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속내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오래 전 댐을 막아 수몰된 고향마을을 등지고 갖은 고생하며 새로 땅을 일구고, 한 때 제법 번듯한 방앗간도 가꾸며 마을 이장일도 팔 걷어 부치고 나섰으나, 지금은 늙고 병들어 찾아오는 이 없이 두 내외분만 덩그러니 남아 오래 전 뜯겨나간 방앗간 터를 지키고 있는 이야기, 언젠가는 대처로 가고 싶은 새색시의 꿍꿍이속을 감추고 시부모를 설득해 어렵사리 옆 마을로 이사 왔으나, 그나마도 가난과 애틋한 정을 못 이겨 한 평생 산골 마을을 나서보지 못한 채, 이제는 할아버지의 병수발을 받으며 마실 조차 맘껏 못 다니는 병든 몸이 된 이야기 등 어느 하나 콧등이 시큰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다. 도회지에서 간간히 방송에서나 접했을 법한 이야기들을 산골 마을 아랫목에서 무릎을 맛 대고 듣다보면 자괴감, 회환, 분노 등 정리되지 않는 상념들이 마구 뒤엉켜 꼬리를 문다. 왜 이리도 우리네 마을은 가난한가? 왜 우리네 마을은 이렇듯 짠하기만 한가? 한때는 그것이 싫었고 불편했다. 지금도 마을길을 들어서는 심사가 그리 온전한 것만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거기엔 뭔가 알 수 없는 부채감의 무게가 놓여 있다. 여전히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모두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앞가림에 전전긍긍하며 크고, 빠르고, 앞으로 가려는 세태 속에서, 작고, 느리고, 뒤로 가는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 부질없는 객기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곳의 이야기가 화석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임을 곱씹어 보고 싶다. 지난 몇 달간 젊은 작가들의 힘을 빌어, 마을의 이야기를 마을잡지와 마을달력, 동화책 등으로 담아 가꾸고, 마을에 사는 한 분 한 분의 이야기가 담겨질 이야기 상자를 나눠드렸다. 이야기 상자가 그득해지고 서로의 기억을 나눠 가질 때, 우리네 마을이 오래된 미래로 새롭게 충전되어 다가올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늦은 밤 산골 마을 마을 이야기 박물관을 나선다.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의인(義人)을 찾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혼탁하다. 도처에서 역겨운 냄새가 울어난다. 선량한 시민들은 제가 벌어 제 밥 먹고 사는데도 공연히 화가 나고 속이 상한다. 소위 잘 난 자들의 광란의 춤 때문에 무고한 시민들만 정서적으로 골병이 들어간다.여가 삼아 TV시청을 하기도 꺼려진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우리네 국회 꼴이 하도 가관이래서다. 하루를 열어주는 신문지면은 또 어떤가. 난장판이 따로 없다. 치정에다 벤츠 검사는 뭐고, 막말 판사에 측근비리는 또 뭔가.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제 정신들이 아니다. 내일의 우리사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번뜻 번뜻 뇌리를 스쳐간다. 대재앙이 닥칠 때는 예비조짐이 있기 마련인데, 근자의 사회상은 미구(未久)의 환란을 예시하듯 심상치가 않다. 필자는 남양주시에서 정의로운 공직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해가고 있다. 공무원 헹가래운동이 곧 그것이다. 헹가래란 선한 일을 한 사람은 하늘로 띄워 올리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옆으로 흔들었다가 땅에 던지는 행위로서 전통적 민속놀이에 뿌리가 있다. 공직을 바로 세우는 왕도는 곧 엄격한 신상필벌(信賞必罰)에 있다. 잘하는 공무원 칭송하고 부패한 공무원은 가차 없이 필벌하면 공직기강은 바로 선다. 그래서 그간 공무원 헹가래 시민운동에서는 정의롭고 정직하고 정도대로 일하는 삼정(三正) 공무원을 선발하여 시상하며 축하공연을 해주었고, 부패한 공무원은 사직당국에 형사고발을 해왔다.비리로 얼룩진 세상이 같은 캠페인을 6년째 해오면서 나는 칠십 평생 모르고 살았던 공직사회의 생리와 행태를 많이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겉보기보다는 부패지수가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조직내부에서는 정의나 감사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더욱 놀란 사실은 정의의 보루여야 할 사직당국이나 사법당국마저 정의가 실종되기 일쑤이고 자의적 독선이 체질화 돼가고 있다는 현실이다.내가 운영하는 이미시문화서원에서는 호국의 불을 봉안하고 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6월 25일 화천 비목공원에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진혼예술제를 거행하고, 그 향불을 채화하여 영구히 후세에 계승시키고 있는 성화이다. 요즘은 그 촛불을 갈때마다 아련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일이 종종 있다. 낙화처럼 포연에 산화한 꽃다운 영령들이 준엄하게 우리들을 질타하는 피안의 계시 같은 환청임에 분명하다.의이정지 정신 필요정말 한심하고 용렬맞은 후손들이군. 앞 세대의 희생으로 밥 세끼쯤 먹게 되니까 제 잘난듯 흥이 나서 온갖 도깨비짓들로 날 가는 줄 모르는군. 천 길 낭떠러지기 앞에서 한치의 앞도 못 본채 하루살이 부나비춤으로 오두방정들을 떨고 있으니, 들어오던 복도 나가고 국운창성의 시운(時運)도 틀어지지 않겠는가. 오 아둔한 후손들이여, 조국의 산하에 뿌려진 선대들의 핏값을 헛되게 하지 말아다오. 그대들의 후손들에게 제발 6.25의 참상과 같은 혹독한 시련만은 되풀이해서 안겨주지 말아다오.옛말에 따뜻한 마음씨로 주위를 사랑하고(仁以愛之), 정의의 잣대로 주변을 바로잡으면(義以正之) 천하가 화평하게 다스려진다고 했다. 지금 우리사회가 절체절명으로 긴급하게 수혈해야할 덕목은 바로 의이정지(義以正之)의 정신과 신념이다. 정의의 힘으로 나라를 좀먹어가는 공직부정을 도려내고 권력의 오만을 청소해야 우리는 국가와 역사를 지킬 수 있고, 미래의 후세대에게 살맛나는 세상을 물려줄 수 있다. 지성들이 나서고 원로들이 수범하고 신념있는 지사(志士)들이 앞장서야할 계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청사초롱 불 밝혀들고 의인(義人)을 찾아 광장으로 나설 때다. 그 만큼 지금 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다.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장

스티브 잡스와 빈센트 반 고흐

스티브 잡스에게 가수 겸 작곡가인 밥 딜런은 영원한 우상이었다고 합니다. 잡스는 딜런의 노래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딜런에게 삶의 태도까지 배웁니다. 그가 보기에 딜런의 위대성은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부단히 진화해간 데 있었습니다. 잡스도 그랬습니다. 애플에서 쫓겨난 후 좌절하기보다 넥스트 컴퓨터를 거쳐 픽사의 애니메이션으로 진화하며 승승장구한 끝에 애플로 복귀하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장 프랑수아 밀레를 떠올렸습니다. 살면서 어떤 롤모델을 갖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흰 눈밭을 걸을 때도, 앞에 전봇대 같은 목표물을 정해두면 발자국이 바르게 나듯이 든든한 롤모델이 있으면 삶은 한결 반듯해집니다. 인생의 좌표설정에서 롤모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고흐에게 밀레는 평생의 우상이자 롤모델이었습니다. 그는 농민화가 밀레를 스승삼아 그림을 그렸고, 마침내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개척하여 밀레보다 더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스티브 잡스는 밥 딜런을 만났을 때 가장 떨렸다고 했지만 고흐와 밀레는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고흐는 밀레를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스승을 닮기 위해, 스승의 그림을 부지런히 베낍니다. 그렇게 베낀 그림이 수십 점이 됩니다. 습작기를 지나 어엿한 화가가 된 뒤에도, 그리고 자살하기 전까지도 밀레의 그림을 모사(模寫)했습니다.어느 고흐 전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베끼는 과정이 곧 재창조의 과정이었다고 말입니다. 사실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원화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화를 모사한 흑백의 목판화나 사진을 보고 따라 그렸습니다. 흑백의 그림을 모사하고, 채색을 하면서 화면 구성법과 색채를 익혔습니다. 고흐 특유의 격렬한 필치와 눈부신 색채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무르익었습니다. 하지만 고흐의 위대성을 이런 베끼기를 통해 자기 스타일을 개발한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잡스가 밥 딜런에게 배운 진화를 실천했듯이 고흐도 밀레가 보여준 예술가로서의 삶까지 실천합니다.밀레는 평생 노동의 신념을 실천하며, 농민의 생활상을 그려낸 걸출한 농민화가입니다. 그는 농촌마을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농민처럼 살면서 농촌생활에 주목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밀레는 농부들의 음식, 옷, 숙소에 만족해하며, 실제로 그렇게 살았어. 그는 정말이지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어. 다른 화가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을 보인 것이지.(1885년 4월 13일)고흐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한 기법 수련을 넘어 자연과 인간, 노동자의 현실을 이해하고 사랑한 밀레의 삶까지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밀레처럼 살려고 탄광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림을 따라 그리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삶의 태도까지 따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흐는 밀레의 삶까지 실천하다가 위대한 화가로 거듭났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밥 딜런을 통해 용기를 얻고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듯이, 그리고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었듯이, 고흐 역시 후배 화가들의 우상으로 미술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문화정신의 사표, 故 박병선 박사

지난 30일 오후 고 박병선 박사님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셨다. 박병선 박사님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존경의 표시였다. 국민 모두 그 분이 그 곳에 계시다는 것이 마음에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외규장각 도서반환이 이뤄지면서 고인이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에는 많은 우여곡절 그리고 국민들로서는 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다. 평화스러운 조선의 강화도에 프랑스 군이 침입하여 조선 사람들을 죽이고 많은 도서를 불태우고 습탈하여 간 것이 조선왕조 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외규장각도서들이다. 고속철을 도입할 당시에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반환을 약속했어도 국립도서관 직원이 반대한다고 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았던 책이다.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습탈한 우리 문화재를 돌려받지 못하는 우리 국민의 가슴은 억울하고 엄청난 좌절감을 맛 봐야 했다.그 외규장각 도서가 지난 5월에 돌아와서 경복궁에서 성대히 귀환식을 가졌다. 행사가 거행된 경복궁은 솔향기가 누대를 돌고 따스한 봄햇살이 입사귀 마다 반짝이는 분위기 속에서 오랜만에 조선왕조의 위엄이 되살아나는 듯 하였고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참가자들이 우리 문화유산의 향기에 가슴 뭉클한 감동의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모든 영광의 중심과 그 바닥에는 고 박병선 박사님의 끈질긴 집념과 기나긴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사십년 넘는 세월동안 이국땅의 우리 보물들을 연구하고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만들었던 그 장본인이 바로 고 박병선 박사님인 셈이다. 우리는 모두 그 분에게 큰 신세를 진 것이다.약탈된 문화재의 반환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유명하거나 오래된 박물관에 가면 이집트나 다른 고대문명들의 문화유산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발굴한 것도 있지만 많은 것들은 불법으로 약탈되거나 반출된 것들이다. 발굴된 것이라고 하여도 당사국이 요구하면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유네스코의 정신이다. 그런데 반환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도 전체의 양에 비해 거의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반환한다면 사람들이 유럽의 박물관을 방문하는 횟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 뻔하다. 그래서 각 나라들은 반환의 사례를 만들지 않으려고 별의별 이유와 명분을 만들어 내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 어려운 일을 고 박병선 박사가 해 낸 것이다. 그 분의 정의롭고 애국적인 노력이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어 시민단체가 끈질기고 강하게 밀어붙이고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다시 가져오게 만든 것이다. 결국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박 박사님의 자부심과 더없는 나라 사랑이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는 원천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 강대국들의 약탈 문화유산 반환에 획기적인 사례이자 전기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고 박 병선 박사의 일생의 집념은 세계사적인 입장에서도 과거의 제국주의적인 잔재들을 청산하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돼야 한다.세계기록유산인 직지의 발견을 통해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한 민족이라는 점을 일깨운 그 분의 뜻은 우리 민족의 저력을 우리에게만 아니라 세계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외규장각의 도서반환 역시 세계문화사회사를 새롭게 쓰도록 만든 것이다. 어제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된 영결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의 명복을 빌고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영원히 보존되고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우리 후손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그분의 문화독립정신을 계승하는 것임을 되새겼으리라 믿는다.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지역·공동체 아우르는 문화예술 공공성

최근 우연치 않게 지역에서의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과 관련된 몇몇 연구 모임들로부터 부름을 받게 되었다. 짐작컨대 이곳저곳 마을을 기웃거리며 문화운동을 한답시고 입소문(?)을 내다보니, 뭔가 함께 나눌 얘깃거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막상 부름에 응해놓고는 딱히 참신한 얘깃거리도 없을뿐더러, 무슨 얘기든 중언부언을 넘어 또 하나의 오류를 얹는 것에 지나지 않을 듯 싶어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역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의 속성상 예술성에 더해 지역성, 공동체성 등의 관점까지를 폭넓게 짚어봐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단편적인 문화예술 공공성 논의지역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을 얘기하다보면 종종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체계를 따져보는 일이 되곤 한다. 거기서 궁리를 거듭하다보면 종국엔 문화예술의 공공성이란 개념에 맞닿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부지불식간 사용하는 공공성이란 용어의 개념적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더욱이 모든 분야에 걸쳐 제도적정책적 견인력에 강한 영향을 받아 온 우리의 경우, 공공성을 외치는 주장의 기저에 깔린 이해관계 등에 따라 논의를 풀어내는 품새와 갈무리가 사뭇 다를 뿐 아니라 때에 따라 전혀 상반되는 의미를 띄기도 한다. 특히 문화예술의 공공성에 있어 자칫 맹목적 가치 지향성으로 흘러 문화예술의 도구화를 부르거나, 몰가치적 순혈주의로 인한 문화예술의 형해화를 가져오는 양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방관자적 가치중립성만이 능사인 것도 아니다. 아마도 문화예술의 공공성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문화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그리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굳이 옛 동굴벽화 등을 들먹이며 예술 행위의 시원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동서고금을 통해 문화예술이 사회적 관계망 속의 소통과 자리 잡음에서 한시라도 벗어 난 적은 없었다. 시대적 상황과 주어진 여건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뿐, 문화예술의 공공성이란 관점은 언제, 어디서건 작동되어왔다.좀 더 다른 통찰력감수성 필요지역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에 있어서도 지역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문화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확장된 논의는 절실하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이 아직은 지역 공동체의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조각들을 맞추는 것에 머물러 있음은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지역 공동체에 접근하는 동기와 계기가 다양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론도 제각각의 형편에 따라 여러 양태를 보일 수밖엔 없겠으나, 그러한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지역 공동체를 안팎에서 읽어내는 언어가 되기 위해선 좀 더 다른 통찰력과 감수성이 필요할 듯싶다. 이는 곧 지역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지역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문화예술의 공공성이 작동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 문화예술계 현장의 지역 공동체와 조우하려는 여러 노력들이 지속가능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문화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는 두터워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풀기 어려운 난제고 당장의 손에 잡히는 과실을 안겨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외면하거나 회피할 일은 아니다. 사실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면으로 응시하며 진지하게 맞서는 것도 좋은 방책일 수 있다. 그런 노력이 켜켜이 쌓여 우리 문화예술과 지역 공동체가 서로의 기억과 영감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화학적 결합을 이뤄낼 것으로 기대한다.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구름밭 음악회

지난 주말 강원도 산간도로를 구비돌아 양구를 다녀왔다. 만산홍록의 단풍은 지고 울창한 수목들은 육중한 조락(凋落)의 침묵속에 미동도하지 않았다. 희뿌연 11월의 연무(煙霧)와 함께 사위(四圍)는 고요의 바다와 같았다. 일 년 사계절이 다 특징이 있지만, 낙엽이 흩날리는 만추의 절기야말로 영락없이 백발이 흩날리는 우리 일행과 같은 실버 세대의 짝꿍임에 분명했다. 왕성한 생명체가 앙상한 나목으로 변모해가는 겉모습이 닮았고, 화개화락 산전수전 삶의 역정을 거치면서 농익어 풍화된 유순한 순천(順天)의 지혜가 비슷하다.양구군 해안면은 625전쟁 때 작명된 펀치 볼(punch bowl)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펀치라는 단어가 주먹으로 때리다는 뜻도 있다보니, 항간에서는 그 곳 지형이 주먹으로 쳐서 푹 들어간 모양새 같대서 펀치 볼이라 했다고 와전돼 있다. 하지만 펀지 볼이란 영어 뜻 그대로 넓적한 화채 그릇을 뜻하며, 해안면 일대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큰 대접같이 생긴 분지(盆地)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땅, 양구아무튼 첩첩 산중에 넓은 분화구와도 같은 지형은 누가 봐도 조물주의 의도된 조화인양 범상치가 않았다. 나는 내심 멀리 천지개벽의 시대부터 이곳은 국토의 용마루 백두대간의 단전처가 아닐까 생각하며, 일행과 동화같은 몽상을 나누기도 했다.이곳에 플라톤이 주창한 폴리스 규모의 이상국가를 세워보면 어떨까. 아니 유토피아니 무릉도원이니 상그리라니 하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가상공간을 설계해 세계의 명소로 삼아도 좋겠고. 당장은 한국전쟁의 격전지답게 625를 추념하고 지구촌에 평화의 메시지를 발신할 평화의 요람지를 조성해서 국가 브랜드화하는 일도 의미있겠고. 아무튼 이곳에 푸른 지구별의 중심축이 될 치외법권적 이상향을 만들고, 육중한 관문을 만들어서 서울 하늘밑의 역겨운 꼴불견 군상(群像)들만 못들어 오게해도 조국의 산하는 혈기가 되살아날게야!일행 중에는 9순을 바라보는 방송계의 원로가 계셨다. 한국방송 PD 1호로 호칭되는 최창봉 선생은 여러 방송사의 개국주역으로 공헌했고, 주요 방송사들의 기관장을 비롯해서 문화예술기관의 요직을 거치셨다. 하지만 내가 그 분을 소중히 모시고 싶은 진짜 이유는, 그분을 통해서 나는 625세대의 아픔을 여과없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의주가 고향이신 최선생은 이름 그대로 실향민이자,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은 역전(歷戰)의 노병이시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왕년의 전투지를 되짚어보고 싶어 하시는 그 분의 심정이 백 번, 천 번 공감의 심금을 타고 저며온다.이곳에서 망향 음악회를 열자해안분지 산정의 을지전망대는 아주 맹랑한 곳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시계가 넓었는데, 멀리는 금강산 거북바위와 촛대봉까지 시야에 들어오고 뒤로는 대암산이며 설악산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기실 을지전망대가 예사롭지 않음은 운해 속에 섬처럼 솟아오른 고봉준령들의 위용만이 아니다. 그곳에 서면 가칠봉 전투, 도솔산 전투, 피의 능선, 제4 땅굴 등 펀치 볼 지구 전투의 갖가지 사연들이 환청되어 울려오고, 수백만 이산가족들의 고향마을 추억과 애환들이 북녘 땅 산야에서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그래 기필코 내년에는 이 곳 구름밭 정상에서 고향 그리는 시도 읊고 노래도 하는 망향(望鄕) 음악회를 개최해야지. 최선생님같은 천만 이산가족들의 사무치는 향수(鄕愁)를 조금이나마 달래드리기 위해서. 그런데 음악회 제목은 뭐로 하지? 물망초 음악회? 아니면 꿈에 본 내고향? 불효자는 우옵니다?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책 표지디자인을 감상하는 뜻

몇 년 전, 11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아파트 문에는 크고 작은 광고 전단지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대부분 통닭집과 중국집에서 배달음식을 알리는 전단지였다. 그런데 화려한 전단지들 사이로 눈에 띄는 복사지가 있었다. A4용지에 손글씨가 빼곡한 흑백의 전단지였다.내용은 껍질 채 드시는 사과를 구입해달라는 것.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쓴 필체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읽어보니 사과는 직접 정성을 다해서 기른 것이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사과보다 전단지의 편집디자인에 있었다.애플의 로고처럼 그려 넣은 사과 그림과 사인펜으로 여러 번 겹쳐 써서 굵게 처리한 껍질 채 드시는 사과라는 헤드카피, 그리고 경상도 산골 대적 꿀 부사라는 서브카피가 눈길을 끌었다. 바디카피는 행을 바꾼 뒤, 당구장 표시(※)옆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꿀 부사가 왔어요라며, 세 가지 장점을 열거했다. 맨 아래쪽에는 밤 10시까지 주문 배달한다며 핸드폰 번호를 크게 써두었다.과일장수 전단지서 느낀 감동전단지의 광고주는 작은 트럭에 사과를 싣고 아파트 주변을 도는 과일 장수였다. 이 소박한 전단지에는 광고의 기본 요소가 다 들어 있었다. 그가 광고카피를 뽑는 법이나 편집디자인을 배웠을 리 없다. 그럼에도 구매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시각이미지를 그려 넣고 서체에 변화를 주며 강조할 부분에는 동그라미까지 쳐서 보고 읽기 쉽게 편집했다.나는 문득 스스로 서예와 사군자를 즐겼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생전에 가장 아름답게 봤다는 글씨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추운 겨울에 군고구마 장사가 삐뚤삐뚤 써 붙인 군고구마 팝니다라는 글씨였다. 그 글씨는 삶의 진솔함과 절박함으로 쓴 것이었다.과일장수의 전단지가 그랬다. 가슴이 짠했다. 편집디자인의 원초적인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사과를 팔고자 하는 마음이 낳은 절실한 편집디자인, 서체의 변화와 주목성, 전단지에 압축한 카피 등을 찬찬히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갖출 건 모두 갖추고 있었다.우리가 보고 있는 책의 세련된 표지디자인도 따지고 보면 과일장수의 전단지처럼 소박한 디자인으로 출발했다. 오랜 세월의 담금질 속에 지금처럼 탄탄한 체형으로 자리 잡았다.표지는 책의 압축 파일과일장수의 전단지는 판로를 개척하기 위한 판매 전략의 하나이기도 하다. 직접 키운 사과인 만큼 자신감에 차서 한자 한자 써내려간 표지디자인도 독자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고도의 디자인 스킬이 구사된 시각적인 판매 전략이기는 마찬가지다. 비록 과일장수의 전단지가 수작업의 산물이고, 책이 기계적인 공정을 거친다는 차이가 있지만 독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목적이 동일하다. 또 과일장수가 전단지를 만드는 마음과 편집자나 북디자이너가 책을 만드는 마음은 결코 다르지 않다.책은 보고, 읽는 매체다. 출판사에서는 특히 보고에 주목한다. 보기 좋고 읽기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담당자들은 책의 미려한 체형 관리에 최선을 다한다. 표지디자인은 단순히 원고를 디자인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궁극적으로 표지디자인은 독자의 마음을 디자인한다. 독서는 표지에서 시작하여 표지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지는 책의 껍질이 아니다. 표지는 내용의 뜨거운 압축파일이다. 한번쯤 미술작품을 감상하듯이 표지디자인을 감상해보자. 표지디자인을 보면 책이 보인다.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세계의 언어와 문화전쟁의 승리하는 길

이번 선거에서도 트위터 등의 개인디지털매체의 위력이 크게 발휘해 앞으로의 선거 전략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제는 국가 간의 문화전쟁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빈발할 것 같다. 문화전쟁이라 해서 약간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엄연히 국가별로 이러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가 한류로 일시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좋아하는 것도 이러한 심리가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중적인 것 뿐 아니라 다른 문화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모든 영역에서 대중의 목소리가 국내 정치 뿐 아니라 국제적인 정책결정에서도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대중 또는 다중의 목소리가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 되고 있다.이제 문화전쟁 시대며칠전 미국 정부의 도서관 박물관 협회 주관으로 세계의 도서관 박물관 전문가 70명 정도가 오스트리아 잘쯔브르크에 모여서 미래의 참여문화시대의 사회문화교육 방향에 대해 세미나를 가졌다. 이 세미나에서 이스라엘의 한 도서관장이 발표한 사해문서의 세계보급이라는 주제발표에서 한글표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 관장도 자랑스럽게 세계적으로 희귀한 문화유산인 사해문서를 전 세계의 모든 대중을 상대로 알려주기 위해 희귀한 동아시아 언어를 넣은 것에 대해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이에 대해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듯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아! 우리의 한글이. 약간의 감동이 배어나는 순간이었다.앞으로 어느 나라인건 간에 대중교육은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강대국이 되고 학술적인 자료와 문화적인 자료들을 세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해서 학계와 문화계에서 지속적으로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디지털시스템을 통한 세계대중교육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직지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임에도 지구상의 금속활자 비조가 쿠텐베르크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서구인들의 대중적 고정관념을 이러한 전략을 통해 고칠 수 있다. 반대로 다른 나라의 디지털 시스템에서 제공하는 자료의 경우에 우리 대중들의 접근이 쉬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정책이 돼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메일을 통한 지속적인 요구이고 접속클릭수 일 것이다. 접속클릭수를 늘리는 전략 필요이러한 운동은 사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의 하나이다. 바로 세계를 대상으로 독도귀속과 동해표기문제를 다루고 있는 반크의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디지털체제가 세계에서 가장 잘 되어 있는 나라다. 그리고 국내외의 인구도 적지 않고 또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한다. 앞으로 이 문화정보시대에 지구의 각 문화권이나 나라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보이지 않는 문화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새롭게 부각되는 문화와 도태되는 문화들이 생겨날 것이다. 우리는 문화다양성의 견지에 입각해서 우리의 문화를 지켜야 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스템이 제공하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 됐다.우리의 문화정보를 세계화하고 그리고 다른 세계적인 문화정보가 한글화 되도록 하는 것은 이제 바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당면과제가 돼야 할 시점이며 이것은 인문학을 살리는 길이요, 산업기술적인 파급효과도 크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인 수로부인전의 해가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여론)은 무쇠도 녹인다고 했다. 이제 현대의 입은 접속클릭수이고 많도록 하는 것이 바로 국가적 전략이 돼야 한다. 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정의, 분노, 공동체의 적

연전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오르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정의로움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어 올 여름, 또 다른 작은 팸플릿 책자,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눈길을 끌며, 그간 애써 지우며 살았던 분노의 DNA를 다시 꺼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신자유주의의 아지트인 미국, 그 곳에서 공동체주의 학맥을 대표하는 한 논객의 정의에 우리는 왜 주목했는가? 자유와 관용의 톨레랑스(Tolerance)의 본고장 프랑스, 그 곳에서 삶의 황혼을 훌쩍 넘은 아흔 셋 백발 레지스탕스의 분노에 우리는 왜 귀 기울였는가? 그들은 말한다. 오늘 우리 모습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 홀로 살아남은 단절된 개인이 아니라, 오늘이 있기까지의 서사적 맥락과 지금, 여기의 관계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공동체란 단절된 개인의 단순 집합체이거나, 승자독식의 경연장이 될 수 없고, 거기서 정의와 분노는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들고 지켜내는 원동력이 된다. 아마도 우리네 공동체에 정의로움이 넘쳐난다면, 분노의 함성이 메아리친다면, 그들이 그토록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진 못했을 것이다.사실 일상의 각박함과 약삭빠름의 틈새를 허우적대는 범부들에게 매순간 정의를 떠올리며 살기를 기대하기는 버거운 일이다. 정의는 커녕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그때그때 불의에 맞서 분노하며 살기란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정의를 찾고, 분노를 외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거나, 불편하고 거추장스런 장식물이 되어 차라리 정의롭지 못할 바엔 분노를 잠재우며 사는 것이 속편한 처세술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정의와 분노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우리의 삶이 한 순간이라도 공동체를 벗어나 영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뭐 하나 남부러울 것 없거나, 개천에서 용 나듯 단기필마로 입신양명하여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해도,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고서는 입고, 먹고, 잠자는 어느 것 하나 온전한 모양새를 갖추긴 불가능한 일이다. 나만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그 것이 곧 공동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먼 곳에서 날아온 정의와 분노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네 공동체 어딘가에도 그에 공명하는 울림이 있는 듯하다.반면 우리 주변엔 분노 없는 눈먼 정의, 정의롭지 못한 귀머거리 분노를 외치며 정의와 분노의 화신인 양 비범한 체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들의 정의와 분노란 공동체의 공유 가치를 지키는 보루로써가 아니라 패거리 집단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뿐임을 본다. 이들에게 공동체란 한낱 먹이사슬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바로 공동체의 적이다. 공동체란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 조건이기도 하지만, 만들고 지켜내는 사회적 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들고 지켜내기 위해선 정의롭게 분노하는 행동하는 양심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동체의 적들에 맞서 눈먼 정의와 귀머거리 분노를 가려낼 순 있어야 한다. 선량들이 외치는 구호와 격문의 계절을 보내며, 우리의 정의, 우리의 분노는 어떠한지 되짚어본다.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부하라의 밤

작열하는 사막의 태양이 서쪽 지평선으로 떨어지자, 온 천지는 담홍색 황혼으로 물들어갔다. 폭염을 피해서 건물 안에 칩거하던 주민들은 당연한 하루의 일과인 양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삼삼오오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한낮에 포식한 사막의 열기를 삽상한 허공 속으로 토해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별빛 아래서 펼쳐지는 저들의 일상적 놀이 문화는, 어쩌면 멀리 우리네 선조들의 영고(迎鼓)나 무천(舞天), 아니면 옛 그리스의 아폴로 제전이나 디오니소스 제전의 모습,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하는 연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내가 지난 90년대 초 우즈베키스탄의 고도(古都) 부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인상 중에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의 하나다. 기실 사막의 황혼은 더없이 고혹적(蠱惑的)이다. 산악지대인 우리의 노을녁은 짧지만, 일망무제의 사막지대의 노을녁은 길다. 해가 지고도 한 시간여 이상을 붉은 황혼이 대지를 떠나지 않는다. 아스라이 시야의 끝자락엔 오아시스 도시의 진기한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고적들이 실루엣처럼 펼쳐지고, 마침 찬란한 모자이크의 이슬람 사원 앞을 산책하는 두 연인의 모습이라도 은은한 황혼에 투영될 때면, 낯선 이방인들은 이내 순수무구한 아름다움과 끝없는 환상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나는 며칠 전 또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도시들을 다녀왔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 등의 중앙아시아를 고집스레 드나든 지 20년째를 마감하겠다는 뜻으로 그곳을 찾았다. 인생의 황혼으로 접어들면서 그간의 얽힌 일들을 하나하나 덜어가기로 작정하다보니, 중앙아시아와의 인연도 이제 정리해야지 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방문에서도 저간의 결심은 여지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동서문화교류사에서 석국(石國)으로 알려졌던 타슈켄트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강국이라고 알려진 사마르칸드의 아프라지압 고구려 사신벽화 앞에서, 안국(安國)으로 표기됐던 부하라의 대상(隊商)숙박소나 아름드리 뽕나무 고목들을 마주하면서 나의 계획은 맥없이 흔들리고 말았다.거두절미 실크로드로 알려진 사막의 동서문명교류의 통로는 우리네 문화와 역사의 뿌리를 정립해 볼 정보의 보고이자 무한한 상상력을 길어올릴 환상의 수원지들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역사문화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지역이자 문명들임에도, 지금까지 우리와는 죽의 장막,철의 장막 등의 시대적 제약으로 오랫동안 미지의 대륙[terra incognita]으로 격리됐던 지역이 곧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문화권이다.이제 중앙아시아로의 문은 활짝 열려졌다. 수백 년간 타임캡슐 속에서 잠들어 있던 실크로드 문화의 원형들이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화와 예술의 보물창고, 역사와 전설과 민담과 상상력의 저수지인 문명의 이색지대가 우리에게 그 신비스런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실로 야망에 불타는 ?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가슴 설레는 역사적 전개가 아닐 수 없다.나는 사마르칸드의 장엄한 사원 앞 레기스탄 광장에 서서 잠시 천오백여 년 전 신라의 한 유랑연예집단의 머나먼 여정의 애환을 회상하며 야릇한 상념에 젖어들었다.속독(束毒)이라는 제목으로 신라 말 최치원이 쓴 한시의 내용이 곧 그들의 행각이었다.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한 옛 소그디아(sogdia) 왕국을 한자로 속독이라고 표기하는데, 이곳 소그디아 왕국의 연예인들이 파미르를 넘고 중원을 거쳐서 멀리 황금의 나라 신라에까지 갖은 곡절을 겪으면서 당도했다. 아시아 대륙을 소재로 한, 대 로망의 소재가 될 가슴 벅찬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상상력의 원천 실크로드는 그런 곳이다.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평생을 밝힌 한 줄의 응원

노릇노릇 익어가는 주말 오후, 오랜만에 전시장 순례에 나섰다. 크고 작은 전시회에서 만난 화가들의 내밀한 조형세계와 교감하는 기쁨은 가을햇살만큼이나 따사로웠다. 잔잔한 감동에 상기된 채, 전시장 입구에 비치된 방명록마다 정성껏 감사의 말과 이름을 적었다. 작품을 감상하고 그냥 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하지만 나는 방명록을 지나치지 못한다. 방명록의 가치를 깨우쳐준, 이제는 고인이 된 한 원로화가의 특별한 이야기 때문이다.1955년, 서울의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미술관에서였다. 한 화가의 개인전 개막식 날, 전시장은 관람자들로 붐볐다. 그때 평상복 차림의 한 여고생이 얼굴을 붉히며 화가에게 말을 건넸다. 저, 저도 서명(書名)을 해도 되나요?이 말은 전시회를 관람한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는 방명록에 자기도 서명을 해도 되냐는 뜻이다.그럼, 그래도 되지.화가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미 방명록에는 화가 장발, 김환기, 이응노 같은 쟁쟁한 화가들의 서명이 가득했다. 잠시 후, 방명록을 펼쳐보던 화가는 한 서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벅차오는 마음에서.세월이 흘러, 화가는 어느덧 아흔 살의 원로가 되었다. 어찌 보면 이 원로화가는 그 여고생의 서명에 힘입어 평생 화업(畵業)을 일구었을지 모른다. 방명록은 특별히 기념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은 책을 말한다. 관람자는 단순히 자신의 감상 소감이나 이름을 적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화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원로화가가 오십여 년 전의 일을 평생 기억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관람자의 진심어린 소감 한마디는 화가에게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와 응원이 된다. 화가에게 작업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무상(無償)의 행위다. 그렇다고 작업과정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창작의 고통과 세상의 몰이해와 맞서야 한다. 이럴 때 화가는 방명록에 둥지를 튼 관람자의 마음에 의지하며, 다시 붓을 든다.모든 관람자는 작품 앞에서 평등하다. 대통령이든 노동자든, 미술전공자든 비전공자든 신분과 지위고하에 관계없다. 누구나 작품과 일대일로 마주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감상의 순간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다. 그러기에 무명의 여고생은 화가의 작품 앞에서, 기라성 같은 화가들과 동등한 관람자일 수 있었고, 방명록에도 나란히 서명할 수 있었다.원로화가는 옛 일화를 들려주기에 앞서 이런 말을 했다. 세잔은 자기 작품을 이해해 주는 몇 사람의 벗을 아쉬워했으며, 그 가까운 이해자가 어머니였다. 그렇다면 원로화가에게는 그 여고생이 자기 작품을 이해해 주는 몇 사람의 벗 가운데 한 명이 아니었을까. 사실 원로화가의 작품은 형상을 알 수 없는 추상화다. 흔히 생각하듯이 추상화는 관람자와의 소통 면에서 불리하다. 소재를 사실적으로 그린 구상화보다 이해의 폭이 훨씬 좁다. 그래서 자기 작품을 보고 벅차오는 마음이 되었다는 소감이 더 감격적이었던 게 아니었을까.화가는 사진첩을 간직하듯이 방명록을 평생 간직한다. 전시회에 가면 방명록에 서명을 하자. 자기 이름 외에 감상 소감을 곁들이면 더 좋다. 서명은 추임새다. 화가를 평생 춤추게 한다. 또 조형의 진수성찬을 차린 화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서명이다. 작품 감상은 방명록에 서명을 함으로써 완성된다.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참여문화의 확산과 문화복지

그동안 경기도의 문화시설이나 프로그램들은 지도층의 관심에 힘입어서 획기적으로 확장돼 온 것은 사실이다. 서울의 공립박물관의 수효보다 많은 수의 박물관이 있고 또한 여러 가지의 문화프로그램들도 적지 않으며 또한 질도 이제 정상급 수준의 문화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경기도의 경우에는 서울보다도 지역이 넓어 이러한 문화향유권을 유지하는 데는 단위소요예산이 많이 드는 것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이점은 앞으로 지도층이나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문화복지를 갈구하는 시민들이 같이 모여서 풀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고 반드시 이러한 시도들이 있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 됐다.모두가 우려하는 바이지만, 경기도의 문화복지가 앞으로 많이 위축될 것 같다. 문화의 세기는 깊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사회의 문화에 대한 인식은 사회의 다른 분야에 비해 빠른 속도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차원에서 해결돼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탓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예산이 많이 줄어서 도민들의 문화향유권이 줄어들 것 같다. 효과가 바로바로 나타나지 않는 문화를 먼저 손보는 탓일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를 위해 사회복지를 축소하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예산의 효율을 높이고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늘려서 문화예산의 축소를 극복해 문화향유권을 신장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요즈음, 기부문화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인식을 새롭게 하는 여러 가지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젊은 중국배달원의 기부행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감이 있다.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모두들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는 모두가 다 지켜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다. 과거에는 우리 전통사회도 계급사회였지만 서로 도와주면서 살도록 문화가 짜여져 있는 것을 전통문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보이지 않는 제도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문명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외되는 계층이 많아지면 오래가지 않아서 사회는 붕괴되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 그리고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 속에서 다양성이 유지될 때 사회는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기부는 사회에 있어 그 어떠한 제도보다도 중요할 수 있다. 사회에서 시민들의 욕구는 많아지고 예산은 제한되고 성장이 한계에 달하게 되면 현재 우리가 느끼는 문화축소는 더욱더 커지게 돼 우리 마음속의 풍요로움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이제, 문화향유권의 문제도 시민들이 풀어야 할 과제다. 이것을 느끼게 하는 대대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예산이 줄어들든 늘어나든 우리가 필요한 문화수요와 질은 관과 민이 적극적인 공동체 노력으로 해결하고 발전시켜야 할 과제다. 기부도 다양한 기부가 가능하게 만들어서 돈의 기부 이외에도 많은 몸과 마음의 기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세계적으로 어느 시민사회 선진사회이든 참여문화의 창출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절대적인 선택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왔다. 좋은 문화프로그램은 적극적인 참여로 그 성가를 높여주고 예산만 낭비하는 프로그램들은 시민들의 표로서 엄격하게 징벌해 예산낭비적인 요소를 시민 스스로 참여해 없애려는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화프로그램들은 예산 투입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선심성 행사들을 척결하여야 할 때이다. 모두 행복한 사회를 위해서 이 시점에서 절대 필요한 일들이다. 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도시에서 농사짓기

도시와 농사짓기를 맺어주는 일들이 한창이다. 흔히들 도시농업이라 불리는 이것은 단독주택 옥상이나 아파트 베란다, 집주변 짜투리땅 등에서 심심풀이로 푸성귀를 키우는 것으로부터 동호인, 가족단위 주말농장, 귀농?귀촌인을 위한 예비과정에 이르기까지 그 계기와 폭이 다양하다. 최근엔 팜 스쿨(Farm School) 등 교육환경 인프라로써 학교텃밭의 보급과 도심 유휴지를 활용한 주민농원 조성 등 공공 부문과의 결합이 시도되고 있기도 하다. 거기에 더해 조금은 다른 이유지만 빌딩농업 또는 수직농업 등 첨단 엔지니어링 영역으로의 확산된 논의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에 발맞추듯 민간 부문 도시농업 네트워크 활동의 조직화와 함께 수도권 지자체를 중심으로 관련 조례의 제정이 속속 추진되고 있으며, 도시농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한 의정 소식도 들려온다.오늘날 도시와 농사짓기의 짝 맺기가 어색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도시의 터전을 닦는 최초의 몸짓이 어떠했고, 농사짓기의 근원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미루어본다면, 도시와 농사짓기의 엮어냄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런 연유로 인해 도시건 어디서건 경작본능의 발현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갇혀 죽어가는 땅의 생명력을 살려낼 수 있다면, 그것이 경쟁과 효율, 시장만능의 사슬에 묶여 마디마디 끊어진 삶의 온전함을 이어줄 수 있다면, 우리의 도시는 한층 풍요로워 질 것이다.도시에서 농사짓기의 이런 저런 움직임들을 보면서, 그 동안 비워졌던 한 부분이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그 채움 속의 빈자리에 눈길이 가게 된다. 농사짓기의 근간이 땅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듯이 도시농업 역시 땅으로부터 시작됨이 마땅하다. 그러려면 먼저 도시에 땅을 돌려주고, 그 땅이 숨을 쉴 수 있게 해야 한다. 도시농업이 도시텃밭과 다름 아닌 이유가 그것이다. 도시텃밭을 통해 회색의 조경과 조망권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껍질을 벗겨내고 사람과 도시의 오감이 살아 쉼 쉬는 생태문화 경관의 균형을 다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도시농업이 사적 취향이나 관심, 특정한 목적에 한정된 도구적 수단을 넘어, 도시의 인적, 물적 자원과 농사짓기의 경작 공동체 문화 자원이 통합된 문화적 확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자급자족의 온전한 삶에 기반을 둔 나눔과 소통의 생활문화 공동체 만들기로써 도시에서 농사짓기의 진정한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다.나는 소망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근처 텃밭을 찾아 흙내음 맡으며 상추와 깻잎, 배추밭, 고추밭을 돌보고, 텃밭의 푸성귀를 모아 동네 분들과 가벼운 저녁참을 곁들여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그런 도시농부를 소망한다. 휴일엔 텃밭에서 아내와 작은 음악회를 즐기고, 아이들은 늦은 밤 그림자 연극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는 그런 도시마을을 소망한다. 가난하고 힘든 살림에도, 하루 세끼 왠만한 찬거리는 텃밭에서 마련할 수 있고, 늙고 병들어 먼 길 찾아오는 이 없어도, 텃밭 이웃을 사촌 삼아 지낼 수 있는 그런 삶의 텃밭을 소망한다. 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

결국 대학교수직으로 영년퇴임(盈年退任)을 했지만, 기실 나는 강단에서 남을 가르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3040대만 해도 강단에 서는 것이 당당했다. 대단한 지식이라도 쌓은 양 학생들 앞에서 의기양양했고, 한 귀퉁이를 익히고는 전체를 다 아는 양 그들을 훈도(訓導)하고 닥달했다. 한마디로 한줌의 알량한 지식을 전수해주는 것이 대학교육의 알파요 오메가로 용인되는 시대적 풍조에 속절없이 순치된 채, 나 역시 전공지식을 전수하는 숙달된 되풀이 작업에 의심 없이 안주해왔다.하지만 지천명을 지나 이순의 나이로 접어들자 그 같은 강단의 관행에 대한 회의가 깊어져갔다. 자신을 객관화시켜볼 인생의 연륜이 쌓이게 되자 사물의 본질과 핵심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때가 되면 알곡이 익듯, 나이 따라 철이 든 것이다. 철이 드니 강단에 서는 것이 한층 거북스럽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보다 소중하고 근원적인지도 모른 채 관행적인 지식주입에만 열을 올렸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놓았다는 모대학 인문대학에 출강할 때의 경험이다. 미학과에 개설된 강좌지만 여러 단과대학 학생들이 두루 있었다. 효학반(斅學半)이랄까, 10여년을 출강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터득했다. 그 중 하나로 엘리트 학생들의 적나라한 행태를 실체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기말시험을 보면, 어떤 학생은 16절지 반장도 채우지 못하는 반면, 어떤 학생은 시험지 한 장을 더 달래서 4면을 빽빽하게 메운다. 채점을 해보면 반장밖에 채우지 못한 학생은 본인이 배운 대로 아는 대로만 솔직히 쓰고만 반면, 4면을 채운 학생은 현란한 미사여구에 이리 틀고 저리 틀며 뻔한 내용을 장황하게 분식(粉飾) 해놓기 일쑤였다. 뿐만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결석을 해도 반장짜리 학생은 결석자체를 미안해하며 사유도 간단한데, 4면짜리 학생은 결석이유도 분분하고 이를 당연시한다. 강의 후에 퇴실을 할 때도 전자는 선생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려주지만, 후자는 상하분별 없이 자기가 먼저 풀쩍 나가버린다. 아무튼 불편한 진실이지만, 소위 잘나간다는 법대, 경영대, 의대 등 후자의 학생들은 절대평가에서 항상 A학점대를 석권하고, C와 D의 학점은 전자의 학생들 몫이었다. 통계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사람 됨됨이로는 4면짜리 학생들보다 반장짜리 학생들이 단연 A학점대의 인간적인 젊은이들인데도 말이다.바로 우리네 교육현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성교육은 방치한 채 그간 우리는 지식주입의 경쟁교육에만 몰입해왔다. 그래서 머리만 좋아서 판검사로 가고, CEO로 가고, 관계로 가고, 정계로 가면 인생 출세로 간주하고 자만해진다. 우리사회에는 엘리트도 많고 지성도 많고 인재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네 일상은 각박하고 살벌하며, 요사스런 말들의 성찬으로 불신풍조가 만연해가는 근원적인 뿌리는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하겠다.나는 퇴임과 더불어 일체의 출강을 끊었다. 딴에는 좋은 조건의 강의제의도 사양한 채 강단에 서지 않았다. 앵무새처럼 전공지식을 토해내기에는 공허감이 앞서고, 이심전심으로 학생들을 감화시키기에는 자질과 수양이 한참 미달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가르친다는 것의 본질을 간간이 반추하며 5~6년의 세월이 지났다. 내 나이도 70대 중반으로 접어든 요즘, 나는 다시 대학원 학생들의 강의를 수락했다. 지식전수에 앞서 주창하고 싶은 소신이 있어서였다. 지름길을 찾지 말고 돌아가라고 가르치고 싶어서였다. 요령과 효율만을 찾지 말고, 뜸들임이 긴요함을 역설하고 싶어서였다. 알기만하는 박사형이 되지 말고 소신을 세우는 지사형(志士型)이 되고, 재승박덕형의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하지 말고 우선 사람이 되어 세상살이 살맛나게 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라고 일러주고 싶어서였다. 비록 학생들이 흘러간 꼰대의 잠꼬대라고 졸며 하품을 할지라도 말이다.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이중섭이 손목을 꽉 잡은 까닭

해마다 추석이면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춤을 추는,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이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그림의 주인공들은 이중섭과 부인, 두 아들이다. 모두 벌거벗은 채,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듯이 둥글게 돌고 있다.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도 춤이 있다. 벌거벗은 다섯 명의 남녀가 한데 어우러져 춤추는 그림이다.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에 비하면 인물의 형태와 색상이 단순하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이 두 그림은 여러 명이 손을 잡고 알몸으로 춤을 춘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거친 표현과 단순한 표현 외에 눈에 띄는 차이가 하나 있다. 서로 잡고 있는 손의 표정이 다르다. 마티스 그림에서 주인공들이 맞잡은 손은 헐겁다.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이중섭의 손은 부인이 아들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왜 손목을 힘주어 잡았을까?1952년 7월, 가족을 데리고 월남한 이중섭은 625전쟁으로 피란을 다니다가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의 처갓집으로 보낸다. 외톨이가 된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수많은 엽서와 담뱃갑의 은박지, 종이 등에 그림으로 남겼다. 비록 오늘날의 기러기 아빠처럼 자녀교육 때문에 혼자 남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기러기 아빠였다.이로써 분명해졌다. 마티스 그림의 춤추는 남녀는 가족이 아니지만 이중섭 그림의 주인공들은 혈육으로 구성된 가족이다.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손에는 서로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이중섭의 소망은 큰 것이 아니었다. 화가로서의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온가족이 한데 모여 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사람은 누구나 가족의 사랑에 의지하며 산다. 평생직장의 붕괴와 사회보장의 해체 등 경제적인 불안이 개인의 삶을 시시각각 위협하고 있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다행히 등 뒤에는 가족이란 듬직한 응원군이 있다. 가족은 삶에 의미를 주며 역경을 헤쳐 나가게 한다. 생활전선에서 아득바득거리던 사람들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순한 양이 된다. 누구의 상사, 누구의 부하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가장 편한 차림으로 아이와 더불어 평화를 누린다. 가정에서는 날선 경쟁심 따위는 필요가 없다. 느리게 행동해도 좋다. 추석에 사람들이 한사코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가족의 사랑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와 허기를 지우고 새 기운을 충전할 수 있는 곳, 그곳에 부모님이 계시고 끈끈한 사랑이 있다.기다렸다는 듯이 반겨 맞는 부모님의 손을 잡아보면 안다. 덥썩 감싸 쥐는 손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바로 사랑의 온기임을. 모든 것을 감싸주는 듯한 온기 하나로 마음의 상처는 씻은 듯이 가라앉는다. 김종삼의 시 묵화에서 할머니가 종일 고생한 소의 목덜미에 말없이 얹어주는 손처럼, 부모님의 따스한 손길만으로도 자식은 모든 것을 이해받은 듯 마음이 평온해진다.사실 부모님의 소망도 이중섭의 소망과 다를 바 없다. 온가족이 함께 웃으며 사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함께하지 못할 때 삶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이중섭도 암울한 생활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리며, 현실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을 그림으로 달랬다. 결국 죽어서 가족의 품에 안기긴 했지만, 유서처럼 남은 그림은 가족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증거하며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이제 추석은 끝났다. 부모님의 품을 떠나 치열한 삶의 현실로 복귀해야 한다. 떠나올 때, 다시 한 번 힘껏 잡아주시는 부모님의 손길에서 우리는 든든한 기운을 충전 받는다. 그 응원의 손길에 힘입어 우리는 또 한 시절을 보낼 것이다. 춤추는 가족은 이중섭의 꿈이자 우리 모두의 꿈이다. 정민영 출판사 아트박스 대표

유유자적의 놀이문화는 창조사회의 전제

요즈음 우리 사회가 고민하는 것의 하나가 창의적인 사고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말하듯 우리 문화의 치부로만 여겼던 빨리빨리문화가 큰 역할을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가지고는 우리 사회의 발전을 더이상 기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하는 고민은 단지 삼성 만의 고민이 아니고 바로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발전은 선진적인 생각을 빌려오거나 베끼거나 해도 값 싸고 질 좋고 그리고 정신이 잘 무장된 노동력으로 산업화를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엄청난 부의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현재에도 여전히 그런 과정은 진행중이다. 그렇지만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뤄진 전 세계 국가와 산업의 부침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들이 많다. 창조성에 기반하지 않거나, 글로벌 사회의 문화패턴을 바꿀 수 있는 창의적인 저력이 없으면 쇄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창의적인 사고가 많아지려면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생각들이 많아져야 한다. 하나는 융합적인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환상적인 사고이다. 발명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것에 약간의 새로운 것이 가미되는 것이고 이것이 문화의 법칙이라고 할 정도로 보편적인 것이다. 새로운 것이 가미되는 것 중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다른 생각을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만드는 생각융합이다. 그리고 환상적인 생각은 현재 존재하지 않은 설정을 과학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지만 상상적으로 설정해 가는 사고이다. 최근 우리가 즐기고 있는 영화 중에서 오래된 것으로는 스타 워즈나 쥬라기 공원 등이 있고 근래에는 해리포터나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가 바로 이러한 생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영화속 설정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환상적인 사고는 어떻게 보면 꿈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생각이 단지 영화산업의 주제라고 보기보다는 창의적 사고의 첨단이자 미래 산업화의 예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창의적인 사고는 강박적인 환경 속에서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시간적으로 강박관념을 가진다면 작은 문제의 해결은 이뤄질 수 있을지 몰라도 문화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 이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빨리빨리문화도 중요하지만 유유자적문화가 새롭게 부각되어야 그동안 우리사회가 빠르게 성장해 오면서 쌓인 우리 생각의 버그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이런 점을 고려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 슬로시티다. 앞으로 창조적인 사회를 위해서는 엉뚱한 생각이나 몰입된 놀이가 많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인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본래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는 이러한 창의를 위한 여유가 숨어 있었다. 화랑도의 교육을 보면 젊은이들이 산천명소를 다니면서 심신수양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전통의 오락문화에서도 창의적인 특성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어느 통계에서는 역사 속의 발명 건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이뤄졌다는 문명사가의 평가도 있다. 이것은 우리 전통문화가 가진 여유 속의 창조능력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흔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지만 놀이는 새로운 생각의 온상이다. 창의적인 생각은 놀이의 자유와 여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많아질 수가 없다. 우선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이 잘 놀 수 있는 공간과 문화구성이 우리 미래사회의 관건이다.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