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분포지도를 보면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는 300개가 넘는 성곽이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이 성들은 쌓은 시기가 각각 다르지만 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신라 성이다. 이성산성, 아차산성, 대모산성, 고봉산성, 파사성, 계양산성, 수안산성, 행주산성, 성동리산성, 호암산성, 반월산성, 설봉산성, 설성산성 등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대표하는 산성도 대부분 신라 성들이다. 신라는 6세기 중엽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성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7세기 후반 당나라와의 전쟁과 8세기에 발해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이처럼 많은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신라성은 남아 있는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돌로 꼼꼼하게 쌓았기 때문에 보존상태도 고구려 성이나 백제 성보다 양호하다. 백제의 판축토성은 흙으로 만든 성이라는 물리적인 한계로 인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성벽이 쉽게 붕괴되었다. 남한지역의 고구려 성의 경우, 석축성일지라도 두 겹 정도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다져서 쌓는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백제의 토성과 마찬가지로 성벽이 쉽게 붕괴되었다.신라인들은 성벽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성의 높이와 같은 너비로 기단부를 넓게 잡았다. 또한 성의 외벽과 내벽은 다듬은 돌로 쌓고, 가운데 부분은 길쭉한 돌로 빈틈없이 쌓아올려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외벽에는 보축성벽을 덧대었으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성문을 성벽 위에다 만듦으로써 방어에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였다.신라가 튼튼하게 성을 쌓기 위해 투입한 인력과 비용은 백제나 고구려보다 몇 배나 많았을 것이다. 물자를 운반하거나 성을 드나들 때마다 사다리를 이용해야 하는 것도 많은 불편함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축성에 필요한 엄청난 대가와 출입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했다. 성벽의 높이가 무려 20m에 달하는 삼년산성과 먼 곳에서 성돌을 가져다가 옥수수알 모양으로 하나하나 다듬어서 쌓은 이성산성 2차 성벽을 보면 신라인들의 정성과 노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신라가 이처럼 꼼꼼하게 성을 쌓은 것은 원칙에 철저한 신라인들의 완벽주의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신라에는 대장척당(大匠尺幢)이라고 하는 요즈음의 공병대와 같은 축성부대가 있었다. 신라는 새로운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신속하게 대장척당을 파견하여 성을 쌓도록 하였다. 고대 국가에 있어 점령한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확고히 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중요한 일이 견고한 성을 쌓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아마도 신라인들은 국가의 운명을 생각하며 목숨을 걸고 성을 쌓았을 것이다. 이처럼 성을 쌓는 기술 하나에서도 완벽함을 추구했던 신라인의 삶의 태도를 찾아낼 수 있다. 신라인의 이러한 완벽주의는 삼국 중 가장 열악했던 조건의 신라를 최후의 승자의 자리에 서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라는 스스로 역사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경상도 사투리 중에 자주 쓰이는 말로, 단디 해라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꼼꼼하고 빈틈없이 하라는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은 먼 옛날 산성 쌓는 일을 감독했던 신라의 대장척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신라인의 완벽주의 위에 쌓여진 신라의 성곽은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전혀 없는 삼국 시대 축성 기술의 진수를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오피니언
심광주
2009-09-1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