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세상이 왜 이렇게 어지러운가

정말 세상이 어지럽다. 지나친 비관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지금의 우리상황은 우려 할만하다. 경기 불황은 장기간 계속되고 실업자는 늘고 있다. 대학 교육까지 마친 고급 인력의 청년 실업은 개인의 불행이며 국가적인 손실이기도 하다. 가정 경제에 버팀목이 되어준 중장년의 실업은 안정된 가정생활마저 위협하고 있다. 늘어나는 각종 범죄는 시민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고 사회기강은 무너지고 있으며 공권력은 위엄과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데 있어 가장 안정되고 결속력이 강한 가정은 어떤가. 가정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심을 높여주고 평화롭고 우애가 넘쳐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물질만능의 가정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자녀들에게 협동 정신과 가족 간의 우애를 가르치는데 소홀한 것 같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정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가족 간의 갈등과 부부의 이혼 등으로 파탄에 이르는 가정이 늘어나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부도덕부조리한 사회분위기 가정의 파탄은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할 자녀들이 버림받게 되는 등의 문제는 물론 가정이 지켜야할 사회 규범마저도 점차 퇴색해 가고 있다. 학생들의 인성을 높여주고 지식을 고양시켜 주어야 할 학교 교육은 입시위주의 경쟁만을 강조 하면서 자율적인 교육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만연되고 있는 학교 폭력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교권마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보호 받아야할 여성과 어린이들은 성폭행범에게 유린 당하고 목숨까지 잃고 있다. 범죄자의 재범 방지를 위한 전자발지까지 착용하고서도 성폭행 범죄를 저지르는 재범들의 증가는 자녀를 둔 부모와 여성들을 더욱 불안하게 해 당국의 보다 강력한 대처가 요구되고 있다. 가난과 실업으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일부 생활 은둔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도 증가, 무고한 시민들이 생명을 잃거나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 의해 야기되는 각종 범죄와 비리는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저소득층 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 주고 있다. 시민 모두 힘을 합쳐 개선하자 국익을 뒤로한 채 여야간의 끊이지 않는 정치권의 정쟁은 시민들을 식상하게 만들고 있으며 여야 가릴 것 없이 터지는 공천 헌금 사건들은 시민들을 실망 시키는 것은 물론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 불신, 정치를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사회가 이렇다 보니 윤리와 도덕심을 갖춘 시민 정신의 고양은커녕 늘어만 가는 부도덕하고 불공정해지는 사회 분위기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 이렇듯 심화 되고 있는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오늘의 현실을 시민 모두가 힘을 합쳐 개선해 나가야 한다. 가정은 존엄성이 회복되고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 가정의 파괴를 막고 가정의 평화를 되찾아야 한다. 학교는 학생의 인격과 도덕심을 고양하는 등 전인교육을 실시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정치권도 소모적인 경쟁을 지양하고 건전한 정치풍토가 이루어 질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정부는 제대로 된 가치관과 법치의 확립을 위해 공정사회를 구현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각종 범죄의 증가로 시민 생활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는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믿고 생활할 수 있는 치안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 일벌백계로 범법자들은 엄벌해야 하고 시민들의 준법정신 함양이 선행돼야 한다. 시민들은 나만이 피해자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공공의 선을 실천할 때 공정하고 밝은 사회는 이루어 질 것이다. 김창수 인천언론인클럽 수석 부회장

[경기시론] 문제 아이를 다루는 법

만약 자신이 교사라면,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계속 떠드는 학생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몇 번 주의를 주었는데도 계속 떠드는 학생이 있다고 가정하자. 집안 문제가 있는가를 살펴봤더니 특이사항도 없다. 계속 떠들어 반성문을 적게 하였는데, 이마저도 안하겠다고 달려든다. 선생님에게 이렇게 대드는 것이 잘된 행동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대든다. 학교 안다니면 될 것 아니냐!고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경우 많은 교사들은 학생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참는다. 참고 참고 또 참아서 문제가 해결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참고 또 참고, 또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견딜 수가 없다. 교무실에서 그 반에 들어가는 장면만 상상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 된다. 수업시간에는 그저 못본 척 하고 지내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과 이런 학생들을 왜 도와주어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감만 느끼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학생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화를 내게 되고, 교사로서의 권위마저 상실하게 된다. 화를 내고 나서야 자신의 권위가 떨어졌음을 깨닫는다. 반대로 자기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억울하게 무시당하고 나서야, 속상할 때도 있다. 무작정 타이른다고 해결 안돼 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공부를 하라고 말했더니, 당신이 내 인생을 살아주느냐? 내 인생 알아서 살겠다고 자녀가 대든다고 가정해 보자. 부모에게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관심없다고 대답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자녀의 행동을 이해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없는 경우, 부모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하는 한숨만 쉬게 될지도 모른다. 이럴 때 우리가 어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린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공감을 통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흡연이나 음주 등 품행 문제를 저질렀을 때, 이런 학생들에게 잘못을 지적하면, 상대편은 자기보호를 위해 방어적 시도로 합리화를 하게 된다. 즉, 어른들은 하면서 우리는 못하게 한다거나 남들에 비해 나는 사소한 편이라는 식의 논리를 만들어 내게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별 미안함이나 부적절감을 느끼지 않는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 댓가를 지불했다는 생각이 들면, 비행청소년들은 떳떳해진다. 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을 마치 하나의 자랑거리처럼 여긴다. 다음에는 더욱 심한 행동을 가하게 된다. 공감 통해 부끄럼 느끼게 해야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는, 학생으로 하여금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공감해 주어야 한다. 최초의 일탈행동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자신이 적정선을 벗어났음을 알고, 당황해하고, 부끄러워한다. 이 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담배를 피는 학생에게 눈을 맞추고, 따뜻한 시선을 보낸 다음, 손을 한번 잡아주는 일은 학생이 스스로의 감정에 접촉하게 돕는다. 이는 공감적 행동을 통해 스스로 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일이다. 모든 문제행동 뒤에는 긍정적 동기가 숨어있다. 학생들이 문제 행동을 할 때에는 자신이 관심을 받고 싶거나, 힘이 세다는 것을 보이고 싶거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있거나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싶은 것이다. 이런 동기를 이해하는 일이 어른들이 할 일이다. 차명호 평택대 교수

[경기시론] 올림픽을 마무리하며

올 여름은 무난히도 더웠다. 열대야가 10일 이상 지속되고, 폭염경보까지 발령됐다. 그래도 그 더운 여름날을 버티게 해줬던 것이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의 선전이 아니었나 한다. 밤잠을 설치고, 더위에 눌리고 피곤에 겨워도 우리 선수들이 한계에 도전하며 성공을 일궈내는 것을 보며,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필자 역시도 무더운 여름밤 기쁨을 전해줬던 우리 선수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한 올림픽을 통해 우리의 성장한 국가경쟁력과 국민우수성을 다시 한 번 알릴 수 있었다. 영토와 인구수에서 중국, 미국, 러시아에 수십배 뒤지는 국가, 불과 50여년 전에는 그들의 원조를 받아야 했던 국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늘 위협받고 그나마도 둘로 나뉘어 있는 나라, 천연자원도 넉넉히 못 갖고 있는 나라, 그 나라가 전 세계인들의 축제에서 당당히 5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한계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수영, 체조에서조차도 이제 우리가 메달을 딸 수 있는 명실상부한 스포츠강국이 됐다. 축구는 올림픽대회 3위라는 쾌거를 이뤘으며, 마지막 경기를 할 때에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또 한 번 붉은 물결이 출렁이기도 했다. 우리 국민의 뜨거운 열정과 단합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 마음에 새겨 이제 스포츠축제는 끝났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그러나 이럴 때 쯤이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부적응의 후유증을 앓게 된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고, 현실은 너무도 진부하다. 허탈감과 공허감이 자리잡게 되고,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또 다른 자극적인 대상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야구와 프리미어리그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올림픽이 단지 스포츠축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던 아름다운 선수들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자신의 가슴 속에도 그렇게 뜨거운 열정이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 뒤에는 한 찰나를 위해 수년간 피땀을 흘린 그들의 노고가 있기 마련이다. 사격의 메달리스트 진종오는 두 번의 쇄골부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상의 슬럼프를 재도약의 계기로 삼았다. 유도의 김재범 선수는 인대가 끊어지고, 어깨가 탈구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도 부족해 죽기로 한다는 불굴의 의지로 세계 최고에 우뚝 섰다. 송대남 역시 무릎부상과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어려운 역경에서도 체급을 올리는 극단의 결정을 하며 투혼을 불살라 최고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땀을 많이 흘린 사람이 있다면 메달을 가져가도 좋다는 레슬링의 김현우,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연습했다는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 모두 우리에게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각자의 분야서 최선 다해야 할 때 우리는 메달을 따는 선수의 선전에 열광하지만, 그 배후에 숨은 피와 땀은 제대로 읽기 어렵다. 비록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주었던 선수들의 노고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혼전을 다했던 장미란 선수도 그러했고, 핸드볼, 농구, 하키선수들 그리고 그밖에 모든 선수들이 그러했다. 부상과 가난, 슬럼프 등 온갖 역경 속에서도 세계 최고를 향한 집념과 불굴의 의지를 불살러 줬던 선수들. 그들이 흘렸던 땀을 이제 우리 마음 속에 새겨야 할 때이다. 그들에게 단지 박수를 쳐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자기 분야의 선수가 되어 각자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차례이다. 올림픽은 비단 스포츠에만 있지 않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대표선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할 때, 대한민국은 스포츠를 넘어 모든 분야에서 세계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재진 변호사

[경기시론] 올림픽의 감동을 이어가려면

연일 금메달 소식이 화제다. 그 바람에 잠 못드는 밤을 지새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폭염 못지않은 뜨거운 애국심으로 온 국민이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금메달 10개가 목표였던 올림픽선수단은 이미 금메달을 여러 개 더 따냈고 금메달 순위도 목표를 훌쩍 넘겼다. 올림픽 성적과 관련해 흥미로운 통계치가 있다. 그것은 인구 대비 메달의 숫자이다. 뉴질랜드 통계청인 스태티스틱스 뉴질랜드에서는 인구수를 고려했을 때, 우리나라는 대략 15위권에 머문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셈하자면 인구가 많은 미국이나 중국도 하위권으로 추락하며, 대신 인구수가 적은 그레나다가 1위라고 한다. 상당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결과이다. 인구만이 문제가 아니라 거의 국책사업인 것처럼 전폭적으로 올림픽을 준비하는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들과 그대로 비교한다는 것 역시 어찌 보면 불공평하다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상식 때마다 울려 퍼지는 애국가와 화면 가득이 떠오르는 태극기는, 어떤 신랄한 통계분석적 비판으로도 감동의 깊이를 반감시키지 못한다. 어떤 금메달리스트에 대한 대기업체 사장의 통근 격려금도 아마 이런 감동이 발로가 되었을 것이다. 메달리스트에 대한 과도한 관심보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올림픽 열기에 대한 비판 역시 귀를 한 번 기울여봄직 하다. 최근 해외토픽에서 자주 다뤄지고 있는 기사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국의 금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에 관한 내용이다. 일확천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여금에 대한 내용은 아마도 해외에서는 토픽감인가보다. 물론 시기어린 부러움으로 인한 기사일 수도 있겠지만, 외국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적당한 위로금을 넘어선 수준인 것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이런 기사들의 저의는 한국의 선전이 어마어마한 보상금 때문에 달성되는 것이라며 성과를 평가절하 하려는 의도로부터 출발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되었든 금메달리스트들은 귀국과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노파심이 드는 점은, 아직까지 어린 젊은이들에 대해 과도한 대중의 관심과 금전적 혹은 그 이외 특권적인 혜택을 쏟아 붓는 일이 이들의 장래를 위해 꼭 바람직하기만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스포츠 저변 확대 위한 노력 기울여야 단기간에 유명세를 떨치다가 갑작스럽게 인기가 추락해 결과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맞이하는 어린 연예인들의 사례도 사실상 사회적 책임이 없지 않다고 할 때, 지금 냄비같이 끓어오르는 비정상적인 영웅론은 메달리스트에게는 차후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당장에 금메달의 댓가를 운운하는 것보다는 한국 스포츠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빛나는 승리 뒤에 가려져 있는 패자들에게도 응원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요한 순간이라 판단된다. 이제 올림픽도 끝이 났다. 온 나라를 매일 밤 뒤흔들던 응원의 열기도 사그라졌다. 올림픽이란 이슈는 아마도 4년 뒤를 기약하며 우리의 뇌리에서 잠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다음을 준비하는 노력들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목표를 향한 선수들의 노력은 묵묵히 지속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동반자가 되어주어야 할 것이며 관심을 잃지 않고 그들을 응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땀방울과 노력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도록. 이수정 경기대 대학원 범죄심리학과 교수

[경기시론] 올림픽과 스포츠정신

스포츠정신이라는 게 있다. 승패나 결과를 떠나 최선을 다하는 것, 나의 승리를 위해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것이 바로 스포츠정신이다. 런던올림픽이 스포츠정신을 무색케 하는 누더기올림픽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거의 모든 선수들이 페어플레이를 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심판진과 대회 운영진이 선수들의 땀과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어서다. 오죽하면 어글리(추한) 올림픽이라는 말이 나올까. 어글리 올림픽의 폐해가 하필이면 우리에게로 몰리기도 했다. 박태환, 신아람, 조준호 등의 어이없는 판정이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국민이면 누구랄 것 없이 흥분하고 분노했다. 다행이 우리의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악조건 속에서도 잇따라 낭보가 날아든다. 새삼 선수들의 열정에 박수를 쳐줄 일이다. 한편, 우리 역시 어글리 올림픽에 일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선수들이야 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뒷전의 대한체육회와 언론, 특정 종목 해설위원의 부적절한 행태와 언행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승부정신 무색케하는 어글리 올림픽 잠시, 축구 예선전으로 돌아가 보자. 가봉과 경기할 때다. 해설자로 나선 허정무씨의 해설이 종내 귀에 거슬렸다. 대표선수와 대표팀 감독까지 맡았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가봉 선수가 부상으로 실려 나갈 때마다 좋아요, 잘 된 일이에요, 잘 됐어요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실수인가 싶었지만 후반전에 벌어진 똑같은 상황에서도 좋아요, 잘 됐어요를 반복하는 걸 보면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뭐가 좋고, 뭐가 잘됐다는 건가.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날 경기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딸아이가 함께 보고 있었다. 대한체육회의 행태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멈춰선 1초로 커다란 상처를 입은 신아람 선수를 다독여야 할 체육회의 행태가 한심하다. 선수는 국제펜싱연맹(FIE)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바랐지만, 체육회가 받아들인 건 사과가 아니라 생뚱맞은 특별상이었다. 선수의 의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꼼수를 내놓은 거였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감정 섞인 기사를 양산하고 있다. 감히 한국이 치명적 오심 이유 있었다와 같은 기사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를 얕잡아 보는 서구국가들의 음모라거나, 자기들은 불황을 겪고 있는데 우리가 너무 치고 올라오는 게 배가 아파서 그렇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혹자는 올림픽을 총성 없는 전쟁이라 말한다. 전쟁을 대신한 대리전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건가. 다른 관점도 있다. 올림픽은 싸움이나 전쟁이기 전에 인간본연의 도전정신과 열정을 극대화하는 경연의 장이며 축제이기도 한 것이다. 왜곡된 스포츠정신 바로잡아야 왜곡된 스포츠정신, 일그러진 올림픽정신을 바로잡아야 한다. 잘못은 정확하게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되 사람을 미워하거나 남의 불행을 즐기고, 요행을 바라는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올림픽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꿈과 희망, 열정, 도전정신을 키우는 교육의 장이며 실천의 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옳을 수 있듯 상대도 옳을 수 있다. 우리가 승리를 갈망하는 것처럼 상대도 승리를 갈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추한 올림픽을 교훈 삼아 다시금 스포츠정신의 중요성을 깨우쳐야 한다. 올림픽을 통해 우리의 아이들이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의식을 고양하는 것도 나쁠 건 없지만 그에 앞서 진정한 스포츠정신을 이해하고,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인권의식을 깨우치기를 바란다. 최준영 작가

[경기시론] 일등을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올림픽 시즌이다. 시합을 보면서 한편에서는 환호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안타까워한다. 혹시라도 선수에게 힘이 될까 싶어 목청껏 응원한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선수가 이기면 뿌둣하다. 왠지 우리나라의 근성을 보여준 것 같아서 자랑스럽다. 문제는 졌을 때이다. 우리나라 선수가 경기에서 지면 매우 안타깝다. 그때, 선수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시합에서 더 잘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등수보다는 개별 선수가 어떤 자세로 시합에 참가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래야 존경할 수 있는 스포츠 지도자가 탄생한다. 그런데 안타까울 때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분명히 안타까움과 화는 다른 감정임에도 안타까운데 화를 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된다. 하나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감정을 구분하고,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 또 하나는 일등만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일등 추구의 경쟁지향 분위기 벗어나 전자와 관련해, 우리는 감정 표현에 매우 서툴다. 당황한 것과 서운한 것, 그리고 속상한 것은 서로 다른 감정들이다. 그럼에도 속상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과의 축구시합에서 승부차기를 하는데, 우리나라의 마지막 선수가 실축을 하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안타까운 감정과 화를 내는 감정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살피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좌절했을 때, 스스로 달래고 또 다시 노력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우리나라의 경쟁지향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비단 스포츠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공부를 해야만 큰 인물이 되고,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자주 듣는다. 해서 공부에서 앞서가기 위해 노력한다. 초등학교에 입학 하기 전부터 각종 학원을 전전하며,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토익이나 토플 점수를 올리기 위해 또 학원을 다닌다. 노력하는 모든 이가 인정받아야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일등을 못하면 무엇을 해야하는지 방향을 설정할 수가 없다. 일등만 되라고 배운 사회에서 일등이 못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과적으로 공부나 스포츠에서 일등을 못하면, 이 사회에서 건전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겪는다. 자신의 삶을 다양한 영역에서 실험해 보고, 인생 행로를 결정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하면 곧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은 성적이 높다고 해서 성공하거나 실패하지는 않는다. 일등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등하는 사람만이 잘사는 사회는 비정상적인 사회이다. 인생이 일등인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노력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올림픽에 나간 선수들이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고 좌절하고 싶을 때 한 번 더 뛰는 자세, 쓰려졌을 때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것, 자신이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자신과 경쟁하는 것 등을 통해 끝임없이 자기 분야에서 앞으로 전진한 결과이다. 이제는 우리의 청소년들이 일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학생,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한다. 자신의 이상을 설정하고,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나설 수 있도록 조력해야 한다. 일등한 선수, 일등하는 학생만이 아니라,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희망해 본다. 차명호 평택대 상담대학원 교수

[경기시론] 내 안에 적이 있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움직임이 바쁘다. 지난 대선에서도 박근혜 대표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주목됐지만, 정작 그녀의 적은 상대 당이 아니고, 같은 당 내에 있었다. 결국 그녀는 대통령후보자리를 내주고, 당내에서도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반면 지금은 그 입장이 뒤바뀐 느낌이다. 한편 통합진보당은 가장 선두에서 당을 이끌어가야 할 당 출신 의원들에 대한 제명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멀고 멀건만, 정작 그 발목을 잡는 장애물은 그 안에 있었다. 국가적으로도 다를 것이 없다. 대외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고 국가 전체의 역량을 발휘해도 헤쳐나가기 쉽지 않은 국제관계에서 때로는 국내에서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 차이로 인해 분열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된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단은 일본을 둘러본 후, 동인과 서인이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똑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왜 견해를 달리했어야 했는지. 결국 자신이 속한 편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내부의 분열, 가장 치명적인 적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념적으로 좌와 우를 나누어 이야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물론 개인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이념상 분류가 가능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발전적 토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러한 것에 대해 오히려 순기능적 역할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좌와 우를 일방적으로 나누고, 모든 사람들이 경계선 좌우측으로 분리돼야 한다고 본다면,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에는 분열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며 특히 대외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내부적 분열이야말로 진정한 적일지도 모른다. 사안을 달리해, 요즘은 임기말을 앞둔 대통령의 측근과 인척들의 비리도 문제되고 있다. 이러한 측근과 인척의 비리 문제는 이제는 너무 익숙해,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사례가 되고 말았다. 민주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본직은 깨끗하게 국정을 수행하려고 노력해왔다고 하지만 비리, 뇌물, 뒷거래 등의 문제는 주로 측근과 가족에게서 터져나오곤 했다. 가장 믿었던, 그리고 가장 대통령을 잘 보좌해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대통령의 국정을 방해하는 비리가 발생하곤 했던 것이다. 이 또한 적이 멀리 있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대선 앞둔 시점, 분열 아닌 통합을 베트남전쟁을 대상으로 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플래툰은 마지막에 영화배우 찰리 쉰의 대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린 적이 아닌 우리 자신과 싸웠다. 적은 우리 안에 있었다 이 영화를 본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대사를 잊을 수가 없다. 전쟁을 치뤄야 하는 군인으로서, 적군이 아닌 아군에 적이 있다니. 어쩌면 가장 큰 적이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내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의미의 예언은 2천년 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계속 평화로울 수는 없다. 국외에는 적이 없다 해도 국내에 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했던 칭기즈칸의 후예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언제까지 영화로울 줄 알았던 로마 제국도 결국 패망했다. 그런데 그 패망의 원인은 늘 내부에 있었다. 결국 정치에서든, 국가에서든 강해지고 안정되기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화합하고 단결할 필요가 있다. 내부적인 분열은 그 어떠한 외부의 적보다도 더 치명적인 적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내부적으로 하나가 된다면, 어떠한 외풍도 이겨나갈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안으로 더 소통하고, 화합하며, 의지와 결의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론이 분열되기보다는 전 국민의 대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화합의 터전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이재진 변호사

[경기시론] 예방만이 대책이다

매일 우면산 자락에서 수원으로 출퇴근을 한다. 강북이 집이었던 십 수 년 전엔 직장까지 운전을 하고 다니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선에 자리를 잡았고, 그 이후 출퇴근은 간편해졌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깐, 지난해 이맘때 우리 동네는 참혹한 수해를 겪었다. 밤새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 끝에 산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침, 저녁으로 싱그러움을 주며 오래된 친구처럼 포근하던 숲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질 줄은 꿈에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인명피해가 난 집도 있었는데, 그 같은 불운만은 피할 수 있어 감사한 맘이었다. 또한 질퍽한 동네를 성심껏 치워주는 군인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큰 은혜를 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흙 벌 속에서 상처 입은 꼴로 드러난 주변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정말 더 처참했던 상황은 우리 동네가 겪은 불행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더 멀어지면서부터 시작됐다. 폐허 속에서 아침마다 노란 스쿨버스를 타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나마 외관만 건사한 정자에서 어르신들이 넋놓은 모습으로 파손된 놀이터를 물끄러미 보실 때마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천벌을 받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특이했던 경험은 점점 그 같은 불행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 즉 나도 뭔가 원죄가 있어 천재지변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범죄 피해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근거없이 세상은 공평하다(just world)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특정 개인에게 불행한 일이 벌어지면 뭔가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불행이 찾아왔을 것이라 판단한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책임없는 불운에 대해서도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오귀인의 경향도 있다고 한다. 임상적으로 보자면 이와 같은 잘못된 책임감이 우울증의 원인이 된다고도 한다. 즉 자신과 관계없는 불행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불행이 자기 탓이라 생각하고 자책한다는 것이다. 2011년도 여름 벌어진 산사태는 이 모든 심리현상을 필자에게 경험토록 했다. 결국 산사태의 피해는 출퇴근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 동네로의 이사를 주장한 어리석음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이같은 생각은 최근까지도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아마도 평상시와 다름없는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끔찍한 범죄에 노출된 피해자들도 아마 필자와 같은 심정이리라. 사실 본인들의 잘못이 아닌 불행을 두고서, 주변인들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잘못한 것을 찾으려 애써 노력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명확히 해야 하는 일은 2011년도 우면산에 내린 폭우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희귀한 사건이듯, 범죄피해 역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재지변에 대한 방재시스템이 있느냐하는 공동체의 책임처럼 범죄에 대한 예방시스템도 꼭 있어야 하는 문제일 뿐, 개인의 재량권은 그 어떤 대목에서도 주요 변수가 될 수 없다. 예방시스템 잘 갖추는 것이 대책 어제도 폭우가 내려 잠을 설쳤다. 혹시 산에다 쌓아둔 돌더미들이 휩쓸려 내려오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밝게 갠 아침, 동네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몇 개월 수해 예방책이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범죄도 역시 이렇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 대학원 범죄심리학과 교수

병상의 S형에게

S형. 지난주에 내린 첫 장맛비가 호우경보로 이어지고 말았어요. 오랜 가뭄 뒤 한꺼번에 쏟아지는 장맛비를 보면서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차고 넘치는 것도 문제라고요. 그날 자정, 시청 로비가 갑자기 불어난 직원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어요. 혹은 자다일어나 나왔을 테고, 혹은 술 한 잔 하다가 호우대비 비상근무에 임하라는 문자를 받았겠지요. 평소 같았으면 먼저 달려왔을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게 어찌나 마음 아프던지요. 공직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밖에서 보기엔 하는 일도 없이 세금만 축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더 없이 무거운 책임감과 과중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산다는 걸 단박에 알게 되는 거죠. 봄이면 주말도 없이 산불대기에 나서야 하고, 바람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눈이 오면 또 눈이 오는 대로. 지난 겨울 손발이 부르트도록 밤새 눈을 치웠다던 신입직원의 말이 생각나네요. 까짓, 좀 알아달라고 하는 말 같네요. 그게 아닌데 말이죠. 한쪽 면만 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인 거죠. S형. 지난주 형의 발병 소식을 들으면서 순간 울컥하고 말았어요. 예삿일이 아닐 거라 직감했거든요. 새삼 하늘도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제가 알기로 형은 누구보다 성실근면한 사람이고, 특히 공직에 들어선 뒤론 책임감 강한 공직자의 표상이었어요. 그런 형이 하필 중요한 시기에 병가를 냈다면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중한 병이겠다 싶었던 거죠. 생각해 보면 형의 공직은 격무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던 듯해요. 거쳐 온 부서들이 말해주잖아요. 주로 기자나 시의원을 상대하는 부서에 근무했으니 말예요. 그 분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아무래도 시정의 리트머스 역할을 하는 분들을 상대하다 보면 스트레스와 격무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거죠. 기획실로 발령난 뒤로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근래 정시에 퇴근하는 형의 모습을 본적이 없어요. S형. 따져볼 것도 없이 형의 병은 업무상 재해라고 봐야 해요. 형 혼자만의 병도 아니고요. 근래 들어 유독 급발병하거나 돌연사하는 4,50대가 속출하는데 원인은 죄다 격무와 스트레스라고 하더라고요. 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피로사회라는 책에는 자기 착취라는 말도 나오는데 공감이 되더라고요. 성과사회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있으며 자신은 곧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고, 결국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거죠. 40대 후반, 아니 50대까지도 대체로 그런 문화에 찌들었던 세대가 아닐까 싶어요. 외부적인 스트레스와 동시에 내적으론 끊임없이 자기착취를 해왔던거죠. 성실과 근면, 책임감과 의무감, 자기계발과 성취동기 등에 자기최면을 걸어놓고는 정작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떨쳐버리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거죠. 그러니 몸도 마음도 정신도 여간해선 버텨내기가 힘들 수밖에요. S형. 그래서 형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도, 동료 선후배들의 사기를 위해서도, 무엇보다 형 자신의 노고와 노력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형은 꼭 병마를 이겨내야 해요.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세요. 예의 형의 강한 의지와 긍정적인 사고방식, 치열한 열정으로 툭 털고 일어나시리라 저는 굳게 믿고 있어요. S형. 어젯밤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제 딸 다정이가 그러더군요. 중학교 들어와서 수학시험에서 100점을 맞기는 처음이라고요. 곧바로 형 생각이 나더라고요. 다정이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는 형의 큰 딸 덕분이라는 걸 다정이도 저도 잘 알고 있는 거죠. 형이 서둘러 일어나야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에요. 어서 일어나서 제 술 한 잔 받으셔야지요.

[경기시론] 사람과 가까워지기

7월이다. 일찍부터 시작된 더위 때문에 7월의 초입에서도 더위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다. 날씨가 더워지면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공연히 불쾌해지고, 사람들이라도 마주치면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한여름에는 누군가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싫어진다. 체온이 난로의 열처럼 느껴진다. 이때는 사람들하고는 좀 멀리 떨어져 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이번 여름에는 진짜 사람하고 가까이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문명이 발달된 이래,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왔다. 인류사 초기에 인간은 한동안 따뜻한 적도 부근에 인류는 모여 살았다. 외부로부터 자신의 열을 보존할 방법이 없었기에 열이 있는 곳에 살았던 것이다. 일차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의 기술은 인류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저렴한 가격에 옷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인류를 좀 더 추운 지역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기술문명 발달이 인간끼리 소통 막아 이후 기술문명의 발달은 인간과 인간의 접촉보다는 인간과 기계, 그리고 다시 기계와 인간의 연계 고리를 만들었다. 인간은 기계를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은 다른 인간과 직접 대화하며, 필요한 것을 나누고, 도움을 주며 살아왔다. 이때 인간은 완전한 존재로서 다른 인간 앞에 존재하게 된다. 기술문명의 발달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도구를 통하도록 요구한다. 휴대폰 없이는 서로 연락하기 어렵다. 과거에 동일한 장소를 공유한 사람끼리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요구하는 유사한 일을 하는 사람끼리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마틴 부버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해 버렸다. 인간과 인간이 목적 존재로 만나기 보다는 인간이 수단이 되어 버린다. 인간이 일상적으로 만들어 내는 개념속에 인간의 참 의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상대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학생과 학생이 가깝기 보다는 개인적 욕심이나 소유하고 싶은 물건(휴대폰, 유명 운동복 등)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 옆에 있는 학우가 물건보다 더 중요한 곳에서 폭력이 일어날리는 없기 때문이다. 가정내 불화도 마찬가지이다. 자신과 배우자간의 거리보다는 돈이나 명예, 위신 등이 더 가까운 존재가 될 때 폭력은 일어나게 된다. 사회적 문제도 사람과 사람이 가깝기 보다는 자신이 받게 될 이익이나 이득에 초점을 맞추면 여러 가지 갈등이 야기되게 마련이다. 이번 여름에는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상대편의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상대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관계가 사회 전반에 퍼졌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가깝게 여기고, 상대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만남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다. 그런데 욕심이나 욕구, 혹은 물건이 앞선 관계는 나-그것, 혹은 그것-그것의 만남으로 끝난다. 여름을 진짜 시원하게 지내는 방법은 사람과 만나는 일이다. 가식으로 만나 개인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사람과 깊이 만나보려고 노력하는 만남은 올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모르게 할 것이다. 차 명 호 평택대 상담대학원장

[경기시론] 이념의 맹목성보다는 실천원리로

18세기 서구 유럽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인간에게는 희망적인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19세기를 넘어서면서 인간의 이성은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암울한 전망이 대두되었다. 자본가들의 부의 축적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처참한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서구 사회를 지지하는 밑받침으로 자리잡았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하여 그 결말이 절망적일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견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공황이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된 공산주의는 매우 신선하고 매력적이었으며, 이상적인 사회구조로 보였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공산주의는 현실에서 치유할 수 없는 결함을 갖고 있었고, 결국 1990년대 이후 동유럽국가의 패망으로 그 실패가 증명되었다. 공산주의 실패는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이념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 고도화의 실패와 인간상의 현실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간단한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형제가 집에 돌아왔다. 뛰어들어온 형제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고기와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동생은 고기를 먹고 싶어했다. 형은 동생에게 고기를 양보하고, 자신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고기와 아이스크림을 충분히 먹을 수 있고, 냉장고에도 언제나 고기와 아이스크림이 저장되는 상황이라면, 형과 동생이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 실패, 인간상의 현실적 오류 이러한 상태라면 생산수단의 사유화나 사유재산 문제는 그다지 대두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국가가 관리하고 소유한다고 해도 국민 개개인이 아무런 불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민들이 필요한 재화를 언제나 충족할 정도의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부족한 부의 상태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국가에 대해 자신을 희생하는 가치관의 고양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형제가 땀을 흘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냉장고에는 아이스크림이 하나 있을 뿐 텅 비어 있는 상황이었다. 형제는 자주 아이스크림을 먹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동생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한다. 이 경우 과연 형은 동생에게 아이스크림을 양보할 수 있을까. 만약 양보하지 않는다면 분쟁이 유발될 것이고,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만약 형이 넓은 마음으로 동생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양보를 한다면 형과 동생은 다툼이 없을 것이고,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관 세뇌 통한 정치구조, 오래 못 가 이러한 이유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에게 그 전형적인 인간상을 강조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인민의 모델을 정하여 이를 맹목적으로 따라하도록 세뇌하고, 북한에서는 애국계몽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지도자를 맹신함으로써 자신을 희생하도록 강요한다. 폐쇄를 강조하게 되는 이유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치관의 세뇌를 통한 정치구조는 오래갈 수 없었고, 결국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보면 순수한 공산주의는 현실적으로 도래할 수 없는 이상적인 국가모델일지도 모르겠다. 이 재 진 변호사

[경기시론] 경찰에 대한 당부 말씀

경찰이 주폭을 처벌할 것이라고 한다. 다행한 일이다. 이는 주요 일간지 중 한 곳에서 우리나라의 빗나간 술 문화를 문제 삼으면서 국민의 공감대를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만취한 난동꾼으로부터 힘없는 국민을 보호하자는 의지를 다시 한 번 천명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최근 경찰 혼까지 언급하면서 쇄신위원회까지 발족시킨 경찰의 가시적 성과물인 것 같아 반갑다. 며칠 전 수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피의자인 오원춘에 대한 사형선고가 있었다. 애당초 예상되었던 일이었지만 다시 한 번 끔찍한 사건이 떠올라 일상사에 쉽게 임하기 어려웠다. 사형으로서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 대한 사법정의는 이루어졌다 치더라도 아직 귓가에는 절명의 순간 구조를 요청하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었을 지를 상기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얼마나 간절히 경찰이 들이닥치기를 기다렸을까? 주폭, 강력 단속하겠다는 경찰 필자는 현재 배우자 살해사건을 지원하고 있다. 딸 둘이 있는 부부가 평생을 참고 살다가 인생의 노년기에 남편의 폭력을 더이상 참지 못하여 때리던 남편을 아내가 넥타이를 목에 감아 살해한 사건이다. 수백 장에 이르는 사건기록을 읽어보면서 남편을 결국 살해한 피고인도 피고인의 두 딸도 얼마나 여러 번 경찰에 구조를 요청했는지 실로 놀라게 된다. 어떤 때는 중학생 딸이, 어떤 때는 친척이 신고를 했음에도 왜 경찰은 폭력사건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일까? 물론 경찰 입장에서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112 신고로는 지금껏 위치추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한 사람을 쉽게 구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는 경찰이 너무 쉽게 체포권을 발동하게 되면 국민의 인권이 쉽게 침해된다는 논란으로부터 야기된 결과이기도 하다. 경찰이 긴급한 대처의 의지를 갖는다 할지라도 이후의 형사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경찰만 과잉수사의 논란에 처할 수도 있는 문제 역시, 경찰의 발목을 잡는다. 신고자 보듬는 감성도 키워야 더욱이 신고 당시에는 흥분해 있던 피해자가 갑자기 변심하여 고소를 취하해버리면 경찰만 우스운 꼴이 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미온적 태도로 피해자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수원사건은 절대 절명의 순간에 경찰의 개입이 이 같은 염려들에도 불구하고 왜 꼭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최근 주폭 단속을 하겠다는 경찰의 의지는 단호한 것으로 보인다. 공권력을 침해하는 술주정꾼의 난동이 도를 지나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부하고 싶은 점은 그 같은 주폭 척결의 의지가 경찰의 권위를 유지시키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힘없고 어리석은 백성들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후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권력 수호의 강력한 의지보다는 어쩌면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경찰로서는 더 필요한 요건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어린 아이와 여자들의 간절한 목소리로부터 그들의 고통이나 생명에의 위협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감수성이야말로 경찰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덕목이리라. 행정절차 상의 부담이나 논쟁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일어서서 도움을 제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곧 경찰 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수 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경기시론] 멘토의 시대

류, 날고 싶으면 빨라져야 해. 온 힘을 다해서 달리면 어느 순간 날아오르지. 그때부터는 어디든 갈 수 있어. 하지만 멈추면 그대로 떨어져버리는 거야. 은희경의 최근작 태연한 인생(창비)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득 이 문장에 밑줄을 치게 된 것은 최근 독서계를 강타하고 있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쌤앤파커스)에 대한 반작용이었을지 모르겠다. 숨 가쁘게 달리다 지쳐 쓰러진 영혼을 위로하는 혜민스님의 온화하고 따뜻한 메시지가 호응을 얻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내려놓을 수 있고, 누구나 가던 걸음을 멈춘 채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숱한 강제와 강박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실은 온 힘을 다해 내달리라고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사회의 키워드를 잡아채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강준만 교수가 최근 펴낸 책이 멘토의 시대(인물과사상사)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바야흐로 멘토의 시대인 것이다. 책은 한발 더 나아가 멘토의 제도화를 주장한다. 위로와 배려의 인간미를 제도에 접목해보자는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가 만든 열풍 멘토 현상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도 빼놓지 않는다. 멘토 현상의 기저에는 누군가의 위로를 갈구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고통이 전제되어 있는데, 아울러 이 세대가 맞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테크가 남긴 하이터치 욕구가 청춘콘서트로 대변되는 새로운 유형의 멘토링을 성장시킨 또 다른 동력이라는 것이다. 현실은 외려 강준만 교수의 주장을 앞지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느새 위로를 넘어 힐링(healing)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힐링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멘토의 위로가 때로 공허하게 느껴질 때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기위해 저마다 힐링캠프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려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가 멘토를 만들어냈고, 그들에 대해 무한한 믿음과 존경을 표해왔다. 성철스님과 법정스님, 김수환 추기경 등이 원조 멘토였다면 그 분들이 떠난 자리를 안철수, 법륜, 박경철, 한비야, 김난도, 김미화 등이 메우고 있다. 멘토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이제 우리의 청춘들이 안도와 편안함을 찾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않다. 대학등록금은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여전히 취업은 어렵고, 결혼과 출산에 대한 고민도 여전하다. 멘토가 필요 없는 사회 만들어야 그래서다.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멘토의 제도화가 아니라 멘토가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멘토들 중에 각 분야의 원로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유념할 일이다. 학계와 문단은 물론 정ㆍ재계, 문화예술계의 원로들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어찌된 일인가. 애초 멘토는 오디세이아Odyssey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의 이름이었다. 오딧세이가 트로이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멘토(mentor)에게 맡긴 데서 유래한 것이다. 고로, 멘토는 부(父)의 부재를 전제한다. 여기서 부는 단지 생물학적 아버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테다. 부의 부재는 곧 질서와 배려, 이해와 사랑의 역할공간으로서의 가정과 학교의 결핍을 의미한다. 각계의 원로들과 아버지가 멘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일이다. 멘토의 시대는 우리사회의 근간인 가족의 해체와 붕괴,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성의 권위 상실과 존재론적 위기에 연원하는 것인 셈이다. 그래서다. 진정으로 온화하고 따뜻한 사회는 멘토들의 활약이 넘쳐나는 사회가 아니라 집 나간 아버지들이 집으로 돌아와 제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최준영 작가

[경기시론]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 미래로 나아가는 사람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주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왜 이럴까?이다. 왜 나는 부자가 아닐까? 왜 나는 좋은 회사에 다니지 못할까?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족의 원인을 자꾸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과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원인은 과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를 잘못 만났다거나, 친구를 잘못 만났다거나, 사회가 잘못되었다거나, 국가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거나, 등등 여러 가지 과거의 원인에 초점을 둔다. 과거 원인에 집착을 하는 한,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개인이 자신의 삶에 던지는 질문이 같기 때문에, 돌아오는 대답도 같을 수밖에 없다. 범죄피해자들이나 교통사고 환자들이 이런 경우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그 길로 안 갔더라면... 내가 조금만 일찍 나섰더라면... 등. 이 경우 지속적으로 과거를 떠올리게 되고, 결국 고통을 이겨낼 수가 없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새로운 삶을 살려면, 내 삶에 주어진 목적은 무엇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내가 미래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이것은 과거 나의 삶이나, 현재 내가 가진 조건을 뛰어넘게 만든다. 현재부터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분명히 찾을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프레임이라는 책에서 최인철 교수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인용했다. 세실과 모리스가 예배를 가는 중,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되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두 사람은 랍비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세실이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라고 묻자 랍비는 당연히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모리스는 랍비를 찾아가 담배를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되나요?라고 묻는다. 랍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도는 때가 장소가 필요없다네라고 대답을 한다. 삶을 어떤 프레임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예화이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과거 원인만 찾는다면 미래에 새로운 일을 계획할 수 없다. 새로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과거 패턴에서 본인이 얻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현재 삶이 어려운 이유로 과거를 탓하고 있는 한, 현재나 미래에 새롭게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이 과거 탓이기 때문이다. 과거 집착말고 미래 바라봐야 그러나 과거의 원인을 찾는 것도 자신을 지탱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건강한 삶은 되지 못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의 박철 총장은 한 강연에서 외대 파업 기간 중, 파업을 다루는 것도 하나의 과업이고, 또 파업이 진행되더라도 학교의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하는 것도 또 다른 과업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삶은 2중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삶에서 닥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는 것도 있지만, 삶에서 성취하려는 목적도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삶이 던지는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해서 삶의 과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달성해야 할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과거만 쳐다보면서 현실과 타협을 하면, 현실을 외면할 수는 있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 된 것에는 과거와 다른 사람들의 책임이 더 많다는 인식을 가지는 경우, 삶이 자신에게 던지는 과제를 외면하게 된다. 삶의 모든 위기를 해소하고 나면, 이미 자신의 삶은 저만치 앞서가 있게 마련이다. 몸은 컸고 나이는 들었는데도,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마음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이런 아이의 발걸음으로는 새로운 미래를 창출할 수 없다. 이제는 미래를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보자. 그것이 곤경에 처한 개인을 살리는 길이며, 어려움에 직면한 국가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다. 차명호 평택대 상담대학원장

[경기시론]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이 시대는?

2차 산업사회에서 우리는 대량생산의 기적을 맞이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최대한의 생산을 해야 했고, 많은 시간을 노동에 투입함으로써 비로소 수입을 증대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자본주의의 원리는 지금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가오는(또는 벌써 도래한) 시대는 이제 최대 생산만이 중요한 시대는 아니다. 이제 세계는 정보와 소통, 네트워크 사회로 접어들었다. 고립되고 경직될수록 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및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변화의 기적을 맛보았다. 한 나라에서 누군가가 작성한 문서는 지구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에게 순식간에 전달될 뿐만 아니라, 그 소통에 다수가 참여하게 되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고, 이에 따라 일 개인의 낙서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그 문건은 세계가 교류하고 참여하는 소통의 장에서 기능하게 되었다. 정보고속도로를 준비하였던 빌 게이츠가 예견하였던 대부분의 미래가 지금 현실화되고 있다. 인터넷정보를 활용한 교육현장의 변혁, 가상쇼핑몰 등의 무한정보공유를 통한 완전경쟁을 실현하는 쇼핑문화, 장거리네트워크 그밖에 하다못해 차량블랙박스, 나아가 전자기술을 통한 직접정치의 실현에까지. 이미 우리는 변화된 세상에 살아가고 있고, 우리 스스로도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소통과 네트워크의 시대 그러나 개개인의 정신적 문화적 변화는 그러한 물질적이고 환경적인 변화에 못 미치는 것 같다. 경직되고 수직적인 구조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수용할 수가 없다. 직장 내에서, 또는 컨소시엄 과정에서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환경적 변화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소통에 참여하지 못하는 업체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는 우선 유연한 사고를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세상에 적응할 수가 없다. 권위주의는 이제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다. 어깨에 힘을 주고, 자기 권력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을 현대인들은 무시해 버린다. 기업에서는 실력과 권위보다는 이제 참신한 아이디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현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무조건 암기식 공부를 하거나, 반복학습을 통한 점수올리기 공부방식은 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 창의적인 발상을 끌어낼 수 있는 교육이 가장 이상적일 수 있다. 다가오는 미래에 대하여 늘 준비하며 새로운 사고를 공유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제는 소통과 네트워크의 시대이다. 열린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새로운 사고 공유 노력해야 개인과 개인, 업체와 업체가 연결되면 이제 차원을 넘어서 거대한 네트워크 형성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컨대 북한은 다가오는 시대를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의사소통의 무한교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 장밋빛 미래만을 예견할 수는 없고, 그 미래에 대하여 명백한 해답을 제시하는 학자도 아직은 없다. 그러나 그곳이 인류가 지향해가고 있는 방향이고, 트렌드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리가 맞이하는 시대는 분명 변화된 세상이고, 우리도 여기에 걸맞게 변화해야 한다. 인터넷정보망이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환경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 이제 정신적 문화적 환경의 변화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제 경직된 사고를 버리고, 권위주의를 청산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상대방과 소통을 해야 하며, 늘 새로운 사고를 공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면, 머지않아 다가올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재진 변호사

[경기시론] 민간의 전문성 인정돼야

몇 시간을 멍하니 있다가 돌아섰다. 법원에서 명령을 받아 피고인 감정을 하러 갔었지만 구치소에서 거절을 당했다. 재판을 위해 요청한 감정임에도 구치소에서 피고인 면담을 못하게 하는 것이 좀 이상했지만 보안과의 내규가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문심리위원제도가 도입된 초기에는 이렇지 않았지만 최근 구치소에서의 피고인 면담은 계속 거절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재판을 할 때나 구속 여부를 결정할 때 피고인의 심성이나 죄질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법원은 다양한 전문인력을 이용해 정신감정부터 재범가능성까지를 평가한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이같은 평가는 소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선진국에서는 박사학위를 받고도 상당한 경력을 갖춘 민간전문가들이 할 만한 일을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공무원들이 대신하고 있다. 민간영역 전문성 인정 못 받는 현실 이같은 상황을 당면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의 공적 영역과 민간영역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외국 같으면 당연히 인정할만한 민간영역의 전문성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민간인이라는 이유로 해서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더욱 답답한 노릇은 실상하를 가리지 않고 공조직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해 관료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해당 영역에서는 그나마 전문성을 인정받는 필자에게도 상황이 이럴 진데 그렇지 않은 연구자들은 얼마나 어려울까? 인터넷으로 검색되는 외국의 논문에서 만나게 되는 수도 없이 많은 범죄연구들은 우리 처지에는 격세지감이다. 민간 연구자들이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 같은 연구의 결과물들은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다. 원인을 알아야 올바른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나, 문제가 터질 때마다 원인 탐색보다는 임기응변에만 몰두한다. 효율적 정책 위해 긴밀히 협력해야 성범죄의 심각성만 하더라도 인면수심의 성범죄자가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서야 사회적으로 문제임이 인식됐다. 하지만 수십 년 전에도 유사한 범죄는 우리 사회에 존재했었다. 현실 파악이 이렇게까지 왜곡된 연유는 아마도 그들에 대한 접근권이 민간연구자들에게는 열려져 있지 않았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과학기술의 발전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또한 과학적 접근으로 산출된 실증적 증거들은 효과적인 정책을 산출한다. 성범죄자들에 대한 거세약물법을 언급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 성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하여서도 거세약물의 효과성을 검증한 연구결연구결과물이 있던가 하는 의문이다. 외국 같았다면수도 없이 많은 연구들을 하고서야 나타날만한 법률을,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짧은 기간 안에 별다른 검증 없이제정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민간의전문 연구결과와 행정은 멀기만 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외국의 경우 형사정책 분야에서 가장 각광받는 논제는 바로 증거 기반정책(evidence-based policy)이다. 민과 관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형사정책의 효과성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밀접히 협력한다. 공기관에서 확보한 자료들을 민간연구자들에게 광범위하게 공개함으로써 다양한 정책의 효과성을 검증한다. 이때 연구들은 관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들이 자원해 이뤄진다. 보다 적확한 정책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관은 민간전문가들의 능력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지원한다. 공조직에 의해 민간의 전문성이 인정받는 시대는 언제쯤 올까 궁금해진다. 이수정 경기대교수

[경기시론] 초등학생 딸아이에게서 배웁니다

어린이날 저녁, 야근 중인 저만 빼고 식구들 모두 여행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작은아이가 유난히 아빠를 안쓰럽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휴대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오늘은 평생 한번 오는 슈퍼문 데이래, 아빠는 무슨 소원 빌었어?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얼렁뚱땅 둘러댔습니다. 응, 우리 딸에게 멋진 남자친구 생겼으면 좋겠다고 빌었지, 근데 너는? 돌아온 대답에 깜짝 놀라고 말았네요. 다시는 친구들이 집을 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빌었어. 전날 밤이었습니다. 2012 군포 철쭉대축제 개막식을 치르느라 밤늦도록 귀가하지 못하던 차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뜸 작은 애와 함께 경찰서에 다녀왔다는 겁니다. 놀랄 수밖에요. 황급히 이유를 물었더니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날 저녁, 작은애의 친구 세 명이 가출을 했는데 다행이 우리아이가 경찰서에 가서 친구들의 메신저 아이피를 알려준 덕분에 아이들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천만다행이지요. 초등학생들이 집밖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일이니까요. 가출은 충격이었고, 바로 찾은 건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거기까지였다면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고 말일이었을 텐데 이어지는 얘기가 감동까지 선사했습니다. 경찰관이 작은아이에게 물었답니다. 혹시 함께 나가자는 제의는 없었느냐고. 작은 아이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학교폭력 걱정하기 전에 나는 우리 엄마를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데 내가 집 나가면 엄마가 걱정할 거 아냐. 그래서 난 그냥 집에 들어갈래. 다음날 문자로 친구들이 다시 가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던 딸아이. 새삼 아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딸아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름 생각해 보니까, 친구들의 가출을 이해할 만하다는 겁니다. 가출을 주도한 아이의 부모는 거의 매일 부부싸움을 했고, 싸움이 끝나면 어김없이 딸아이에게 앙갚음을 하곤 했답니다. 한 달 전 아빠는 집을 나갔고, 그 뒤 엄마는 술 담배에 의존하면서 지속적으로 아이를 괴롭혔답니다. 친구의 안타까운 상황을 얘기하는 딸아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습니다. 자기가 그 친구였더라도 집을 나가고 싶었을 거라면서. 어른들의 폭력성을 돌아봐야 친구의 불행을 담담하게 얘기하는 딸아이의 표정을 보면서 저는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내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상시적으로 폭력에 노출돼 있는 아이를 도와줄 아무런 방법을 갖지 어른, 그게 많이 답답했고 안타까웠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볼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이의 말은 어쩌면 지금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 처한 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리 없이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우선 아이의 말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어요.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입니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어른의 폭력에 속무무책 당하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저 나름 방어권을 행사하고 싶은데, 물리력으로 안 되니 도피로서의 가출을 감행하게 되는 거죠. 학교폭력이 심각하다고 걱정들을 많이 합니다. 모두들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운운합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는 인색합니다.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인정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폭력이 있기 전에 어른들의 폭력이 있었다는 것을. 부모의 폭력, 교사의 폭력이 고스란히 아이들의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폭력의 대물림이라고 할까요.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걱정하기 전에 먼저 우리 어른들의 폭력성을 성찰해야 합니다. 초등학생 딸아이에게서 배운 겁니다. 최준영 작가거리의 인문학자

[경기시론] 오월의 심리학

오월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린이날 행사와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로 5월의 절반이 지나간다. 어릴 때는 어린이날이 주는 즐거움과 부모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기쁨, 존경하는 은사님을 찾아뵙는 설레임이 있었다. 그때는 오월이 감사의 달이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어린이날엔 다른 집 아이들만큼 추억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아이들의 카네이션을 받아야 하고, 제자들과 점심을 먹어야 하는 날로 바뀌었다. 이제는 오월이 의무의 달이 되었다. 오월하고도 며칠 지나서야, 가족의 달이라고 하는 오월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 시기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월은 파종의 계절로 씨를 뿌리는 달이며, 동시에 가족의 달이다. 둘이 같이 해석하자면 가족의 마음에 씨앗을 뿌리는 시간이다. 무엇을 뿌리고 무엇을 심어야 하는가? 가족은 공기 같아서 함께 있으면 귀중한 줄 모른다. 때로는 귀찮기까지 하다. 심지어는 서로 원수처럼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식구가 없는 날은 참으로 허전하다. 집으로 들어서는데 식사는 했어요?라고 묻는 아내가 없으면, 아빠, 언니가 내 것을 허락도 없이 가져갔어!라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이 없으면, 텔레비전 그만 보고 이야기 좀 하자는 부모님이 안계시면 온 집안에 불을 다 켜놓고 있어도 허전하기만 하다. 가족의 달 가족 마음에 씨앗을 가족은 일상의 소소한 일을 공유하기 때문에 오래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일인가를 알아차린다. 그렇기에 옆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누구 하나라도 없어지면 표시가 금방 난다. 이런 가족에게 무엇을 심어 두어야 하는가? 조엘 오스틴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빠와 등산을 간 어린이가 발을 헛딛어 계곡으로 떨어졌다. 마침 나뭇가지에 걸려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산을 돌아 내려오는 사이에 아들은 무서워 소리를 쳤다. 그러자 메아리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하였다. 나 좀 도와주세요 메아리가 응답한다. 나 좀 도와주세요 아들은 응답만 하고 나타나지 않는 메아리에게 화가 났다. 화가 나있는 아들 곁에 도착한 아버지가 왜 그러냐고 물어본 다음, 이렇게 설명을 한다. 아들아, 이렇게 해 보려무나, 넌 참 멋있는 사람이야, 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메아리는 똑같은 말을 아빠에게 들려준다. 그렇다. 가족관계는 메아리와 같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가 결국 내가 받을 메시지이다. 좋은 말을 많이 들려준 부모는 자녀에게서 좋은 말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러나 나쁜 말을 많이 한 부모는 나쁜 말을 듣게 마련이다. 내가 긍정의 메시지를 심어두면, 자녀에게서도 긍정의 메시지가 돌아온다. 이런 맥락에서 오월에 가족들의 마음에 뿌려야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좋은 기대와 서로에 대한 긍정적 믿음이다. 삶에서 좋은 것을 기대할 때, 좋은 것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자신과 가족의 삶에서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것만을 얻게 된다. 자녀들에게 긍정의 믿음 심어줘야 로저스는 삶의 가치를 감자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는 감자는 자신에게 주어진만큼 최선의 다해 싹을 틔운다. 감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제한되어 있다고 해서, 싹 틔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과가 뻔하기 때문에 싹 틔우기를 포기하는 감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녀들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만큼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녀에 대해 긍정적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여 더욱 성장하도록 지도하기 보다는 누구와 비교해서 더 나은 자녀가 되도록 경쟁하게끔 만들 때가 많다. 오월에는 긍정의 믿음과 기대를 심어볼 일이다. 차명호 평택대학교 상담대학원장

[경기시론] 공직의 책임과 의무

우리는 얼마전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국회의원은 정치의 꽃이라고 할 수 있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다. 정치를 희구하는 심리는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할 것이다. 또 실제로 국회의원에게는 많은 혜택이 주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불체포, 면책특권까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에게 권력이 생기고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국민을 대표하여 국가사무를 처리하는 중차대한 책임을 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축하만 받고 있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만큼 커다란 사회적 의무를 지게 됐음에 밤잠을 설치며 자신의 책무를 고민해야 할 일이다. 이는 공무원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요즈음 대통령 측근 인사들의 비리가 또한 세간의 관심거리다. 이 역시 국민에게 봉사해야하는 고위직 공무원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망각한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할 것이다. 국회의원으로서, 그리고 고위직 공무원으로서 갖게 되는 권력과 혜택은 그만큼의 국가와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따르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조선시대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목민관으로서의 도리와 행동양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을 음미해 보기로 한다. 벼슬을 하는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자로서 임금과 같다. 비록 덕망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위임이 없으면 하기 어렵고, 하고 싶은 뜻이 있다 하더라도 명철하지 못하면 하지 못한다. 능력이 없는 자가 수령이 되면 백성들은 그 해를 입어 곤궁하고 고통스럽다. 고위공직자로서 자신이 그러한 덕망과 능력을 갖추었는지 헤아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스스로 나서서 벼슬을 구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만약 선거에서 국민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선출했다면, 결국 그 책임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되고 말 것이다. 국회의원 권력혜택 책임 뒤따라 이러한 구절도 있다. 바라던 관직에 임명되었다 하여 공연히 마음에 들떠서 선심을 쓰기 쉬우나, 이는 결국 나중에 그 비용을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 보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의 작금의 정치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듯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정치권력을 사용한다면 그보다 더 큰 해악이 어디 있겠는가. 또 정약용은 의를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마음에 언제나 두려움을 간직하면 혹시라도 방자하게 됨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허물을 적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백성을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공직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근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직에서의 청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청렴은 수령의 기본임무로서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을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누가 비밀히 하지 않으랴만 밤중에 한 일이 아침이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송나라 때 자한의 이야기를 전한다. 하루는 농부가 귀한 보물인 옥을 얻어 이를 자한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때 자한의 말은 이러했다. 그대는 옥을 보배로 삼고, 나는 받지 않는 것을 보배로 삼으니, 내가 받는다면 그대와 내가 모두 보배를 잃는 셈이 아니겠는가. 정약용 목민심서 새겨야할 때 공직사회의 덕망과 능력, 그리고 의와 청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에게 원하는 국민들의 희망은 다르지 않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들, 그리고 고위공직으로 중책을 맡게 된 사람들에게 목민심서는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 자리는 그만큼의 책무가 따르는 직책이라고. 국민을 두려워하고, 의와 위엄을 갖추고, 청렴하게 국가사무에 충실해 달라고. 이재진 변호사

[경기시론] 학교가 도와줘야 한다

주말에 비가 오더니 온 세상 꽃이 만개했다. 유독 때늦은 봄으로 금년에는 동백꽃과 라일락을 동시에 목격하는, 조금은 기이하나 여전히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필자에겐 이럴 때 멍했던 머릿속이 갑자기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한 특이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유독 정서적인 감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실존하기도 하는데, 연구자들은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유형이 바로 사이코패스라고 일컬었다. 가사는 알되 노래는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무감동한 사람들, 바로 그들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최근 수원 지동에서 등장한 잔혹한 살인사건의 주인공을 놓고도 그가 사이코패스냐 아니냐? 는 의견이 분분했다. 문제는, 이렇게 냉혈한과 같은 구성원들이 최근 우리 사회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문의 범죄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도대체 그런 사건을 저지른 주인공들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 묻곤 한다. 물론 그들이 지닌 행동상의 특이성은 사이코패스라는 낯선 단어로 회귀되는 듯도 하지만, 그렇다면 그와 같은 성격의 문제가 왜 발생하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다시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가정 양육환경 빠르게 악화돼외국의 연구자들은 유전적인 문제를 근본 원인으로 본다. 선대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취약성으로 인해 중추신경계의 반응이 일반인보다 둔감하게 태어난 생래적 원인이 이들의 가장 큰 핸디캡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유전적 소양만이 충분조건은 아닌데, 거기에 어린 시절 부터의 방임과 학대, 교육 결손, 사회적 고립 혹은 비행 또래와의 결속 등 다양한 후천적 요인이 더하여져 잠재적인 문제의 발현을 촉진한다고 한다.이렇게 보면 어린 시절의 경험은 특히 중요하다. 비록 유전적인 특이성을 지녀 인생의 초반기에 사회성 발달이 느린 아이들도, 부모와의 신뢰로운 관계형성은 그들의 성격적 문제가 발현되지 않도록 하는 억제기제로서 작용한다. 이에 대한 경험적 증거는 수없이 많은 바, 비행의 억제에 가족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는 원리를 시사한다.매달 소년원에서 가퇴원하는 아이들에 대한 심사를 하게 된다. 그때 보게 되는 아이들에 대한 신상정보는 청소년 폭력의 문제가 대부분 병리적인 가정환경에서 유래하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난폭한 아버지와 모친의 가출, 그로 인해 심화되는 음주습벽과 아동학대, 이런 조합이 아니라면 부친의 외도, 이혼 후 모친의 일용직 근무, 그로 인한 돌봄의 부재가 아이들의 성장을 병리적으로 만드는 필수불가결한 원인이 된다. 백 중 여덟아홉은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이다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소년원을 나가면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아이들까지 있다. 학교의 총체적 체질개선 필요가정의 양육환경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결국 기대를 걸게 되는 곳은 학교이다. 허나 현재의 학교상황이라면 오히려 아이들의 문제를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심화시킬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관심한 교사와 무책임한 학교, 그리고는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학교는 아이들의 취약함을 감싸고 바로잡아주기 힘들다. 하지만 인생에서 유일하게 인성의 발달에 집중할 수 있는 곳 또한 학교이기에, 폭력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바로 이참에 학교의 총체적인 체질개선을 주문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돈이든 인력이든 전폭적인 지원이 꼭 필요하겠다. 곤경에 빠진 아이들을 구원하는 학교, 바로 그것이 온 국민이 바라는 바이다.이수정 경기대 대학원 범죄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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